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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익산시 금마면, 삼기면 ▒ 미륵산 / 430m ▒ 미륵보살 기다리는 미륵사 품은 산 |
미륵산(430.2m)은 그리 높지도 크지도 않은 산이다. 그러나 평야지대에 있는 덕에 이 지역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정상에서의 조망이 매우 좋다. 너르디 너른 평야는 물론 맑은 날에는 서해바다와 금강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밖에도 대나무숲의 오솔길이 다른 산에서 볼 수 없는 특색이며 능선에 소나무와 바위들도 심심찮게 자리잡고 있어 아름답기도 하다. 이 산의 매력은 부담없이 오르내릴 수 있다는 점이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은 물론 어린 아이들도 낀 가족산행에도 전혀 무리가 없는 산이다. 익산 사람들은 배낭을 메지 않고 뒷산을 오르듯 가볍게 이 산을 오르내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 편 산천 조’에는 ‘용화산은 군의 북쪽 8리에 있는데 일명 미륵산이라고도 한다’라고 써 있다. 즉 예전에는 용화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또 ‘불우 조’에 미륵사에 대한 것으로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기록은 「삼국유사」 ‘무왕 조’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삼국유사 등 고전의 미륵산 이야기 「삼국유사」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써 있고 이어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 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모름지기 여기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곧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 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회전과 탑과 랑무(곁채)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 했다)라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들을 보내서 그 역사를 돕게 하니 그 절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라 적고 있다. 미륵사를 왕흥사라 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같은 「삼국유사」 ‘법왕금살’ 편에 백제 29대 법왕(무왕의 아버지)이 ‘서울인 사자성에 왕흥사를 창건함에 겨우 터를 닦다가 승하했다’ 했고 ‘무왕이 수십 년에 걸쳐 완성하니 그 절 이름도 역시 미륵사다’라 적고 있으며 「삼국사기」 권 제27 백제본기 제5 무왕 편 35년 조에 ‘봄 2월 왕흥사가 준공되었다. 그 절이 강 언덕에 섰으며 채색으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왕이 매양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고 써 있다. 지금 부여군 규암면에 있는 절인데 그 절을 미륵사라 하기도 해서 혼동한 것 같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미륵사의 석탑이 극대하여 여러 길이나 되어 동방의 석탑중에 가장 큰 것이라고 썼고, 미륵산의 사자암에 대하여도 ‘용화산 위에 있다. 두 바위가 벽처럼 솟아 있는데 내려다 보면 땅이 보이지 않는다. 돌길이 갈퀴처럼 걸려 있는데 가를 따라 올라가면 바로 지명법사가 거주했던 곳이다.’라 써있다.
미륵보살은 미래의 부처님이다. 도솔천에서 있다가 오랜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나 용화수 아래에서 성도한 다음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부처님인 것이다. 삼국시대 끝 무렵 백제의 백성들은 미륵불에 대한 믿음이 컸었다. 미륵불이 백제의 땅에 나타나고 정토가 될 것을 바라며 위의 기록처럼 용화산(미륵산)에 미륵사를 크게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인 사자성에도 미륵사(왕흥사)를 짓고 왕이 자주 들려 향을 피웠으며, 금산사에도 미륵전을 짓고 장육불을 모시기도 했던 것이다. 더구나 백제가 신라에 의해서 멸망한 뒤에는 곡창지대에 사는 백제의 유민들은 신라의 학대를 많이 받게 되었고 따라서 분노와 절망 그리고 좌절도 컸을 것이다. 그래서 백제의 유민들은 참회와 정진을 통해 구원을 받으려 했고 내세에서 복을 얻으려는 바람으로 미륵보살을 믿고 미륵보살의 강림을 더욱 애타게 기다리게 되었다. 이 백제 유민의 대표가 진표율사라 할 수 있으며 진표율사는 백제의 유민들에게 지난 날의 절망을 마감하고 새희망을 갖도록 한 위대한 지도자였다. 백제에서 가장 큰 가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동서 172m, 남북 148m)인 미륵사터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되어 있는 석탑이 남아 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된 석탑으로 완전하지는 않으나 당당한 모습으로 지금도 서있다. 국보 11호. 또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백제 무왕이 찾아간 사자사는 예전 건물은 아니지만 지금도 미륵산 머리 남쪽에 있다. 미륵사터에서 시작하는 산 길 미륵산의 산행은 미륵사터에서 시작하여 다시 미륵사터로 내려오는 게 가장 좋다. 물론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미륵사터 바로 옆의 교육연수원 아래에서 시작하는 길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다. 미륵사터에서 석탑과 유물전시관 등 유적을 둘러 보는 것은 물론 여기가 교통도 좋고 주차장 등 여러가지 편의시설이 있기 때문이다.
미륵사터 주차장 옆(왼 편)에 절터 울타리를 따라 미륵산 쪽으로 뻗은 포장길이 있다. 오른편의 넓은 미륵사터를 바라보며 5∼6분쯤 걸으면 왼편에 푸른 대나무 숲이 나타나고 큰 길이 대나무 숲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대나무 숲 속의 외딴집 문 앞에서 오른 편 밭 가운데로 한 가닥 작은 길이 갈라져 나간다. 이 근처의 팻말에 ‘약수터 0.65km 미륵사지 0.5km 정상 2.5km’라 적혀 있다. 이 길은 곧 산줄기의 등성이로 올라붙는다. 미륵사터와 교육연수원 사이를 비집고 내려가는 산줄기다. 산등성이에서 교육원 쪽에서 올라온 길을 만난다. 리기다소나무 숲 속을 지나는 길의 한 편에 목책이 처져있다. 가파르게 올라채던 길은 큰 바위덩이 아래에서 양 편에 철책이 있는 바윗길이 되고 이 철책길은 150미터쯤 이어진다. 이 바윗길이 너무도 가팔라 철책 외에도 드문드문 밧줄이 매어져 있다. 산등에 올라서고부터는 얼마쯤 편안하게 이어지던 길은 다시 가파른 바윗길이 된다. 여기쯤의 산비탈은 봄에는 산벚꽃과 진달래꽃이 화사하다. 날씨가 그리 좋지 않은 저녁 나절인데도 산행하는 사람들도 많고 여기저기 샛길도 많다. 여기 산행하는 사람들이 별다른 점은 거의 모두가 배낭을 메지않은 것이다.
주로 익산 사람들이 운동 삼아 가볍게 오르기 때문이다. 뜀박질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미륵사 터에서 산행을 시작해서 40분쯤 지나면 한 갈래 길이 오른 쪽 산비탈을 돌아간다. 백제 무왕이 미륵사를 짓기 전에도 있었다는 사자암으로 가는 길이다. 갈림길에서 채 3분도 걸리지 않는다. 사자암 입구에 이른 바 납작한 판자바위가 있고 대웅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른대로 이 판자바위와 높은 암벽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암벽에는 ‘사자동천(獅子洞天)’이라 크게 새겨져 있다. 법당 아래에는 많은 돈을 들여 지은 황토 요사채가 있다. 다시 능선 길로 나와 조금 오르면 냉정약수터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조금 오르면 미륵산에서 전망이 제일 좋은 바위. 마치 크나큰 돌로 된 둥근 지붕처럼 보이는 암봉 옆에 남쪽으로 내민 암반이 ‘전망대바위’. 이름대로 전망이 좋아서 시원하기 그지없다. 익산시와 광활한 호남평야는 물론 모악산과 운장산이 조망된다. 맑은 날에는 서해도 보인다고 한다. 전망대바위에서 양편이 낭떠러지로 되어있는 좁은 능선을 타고 5∼6분을 더 가면 한 자리의 묘를 지나 미륵산의 고스락에 이르게 된다. 미륵사 터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1시간 30분쯤이 걸린다.
고스락은 맨 흙이 그대로 들어나 있는 도도록한 공지로 한쪽에 산불감시소가 있고 돌로 된 삼각점도 있다. 여기서는 전망대바위에서는 볼 수 없던 동쪽의 전망까지 더해져서 상쾌하기 짝이 없다. 여기에는 1,822미터에 이른다는 미륵산성(기준성)의 안내판도 있다. 하산은 올라온 길로 되내려간다. 사자암 갈림길 위에서 오른 쪽 길로 들어서면 냉정약수터로 내려가게 되고 미륵사터로 되돌아가게 된다. 능선길에 드문드문 솟아있는 바위에 서면 익산 일대가 잘 조망된다. 내려박히던 길이 봉긋한 바위턱에서 낭떠러지가 되고 길은 왼편으로 꺾여 내려간다. 여기서부터 가파른 바윗길이고 꾸불꾸불하고 긴 철책이 있다. 울퉁불퉁한 바윗길을 조심조심 내려가면 갑자기 넓고 순한 길이 나온다. 길 왼쪽은 돌을 잘 쌓아 언덕이 무너지지 않도록 해놓았다. 이 길을 3∼4분 가다 보면 오른쪽 골짜기에 유명한 냉정약수터가 내려다 보인다. 이름난 약수터답게 아주 잘 꾸며져 있다. 안내판의 설명에 의하면 피부병과 위장병에 특효가 있어서 단오 칠석 백중 한가위 등 명절에는 찾는 사람이 많으며 「금마지(金馬誌)」에는 이 물에 목욕을 하면 부스럼이 잘 낫는다 했으며 미륵산 정기를 받은 정력수로 담아 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약수터 아래에는 주차장이 있고 찻길을 따라 채 10분도 걷지 않아서 넓은 밭 가운데를 지나 대나무 숲에 이른다. 이어 처음 산길에 들어섰던 갈림길을 지나고 5∼6분을 더 내려가면 미륵사 터 주차장에 다다르면 산행이 끝난다. 느긋하게 걸어도 총 산행시간은 2∼3시간이면 충분하다. <글·김홍주 사진·박운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