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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언약으로 보기 08
사무엘하 7:1-17
다윗 언약
모세 언약이 주어진 이후 약 400년 이상이 흘렀다. 그리고 사사 시대에 대하여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참고 삿 17:6, 18:1, 19:1)라는 말씀으로 끝맺는다. 이스라엘이 왕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백성들이 당시 사사요 선지자였던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한(삼상 8:19-20) 이유는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라는 말씀에서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을 세우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통해 보여주실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모세 언약에서 말씀하신 내용이다(신 17:14-20).
그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다(출 19:5-6). 그렇다면 나라로써 그 면모를 갖추기 위해서는 왕이 필요하나 백성들이 요구한 왕의 제도와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왕의 제도를 구별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당시에 상비군이 없는 미약한 상태였으므로 이방의 왕처럼 군림하며, 영웅적이며, 전쟁에 앞설 수 있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그야말로 인간 왕을 요구하였다. 즉 백성들이 원하는 스타일이 곧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 ‘사울’이었다. 이런 점에서 사울은 준수하고, 키가 장대하였고, 주위의 군사를 모으는 열방 왕들의 모습 그대로였다(삼상 9:1-2).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신 왕은 언약을 보여주기에 합당한 자여야 한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집에서 선택한 자에게 기름을 붓도록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전했다.
21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행 13:21-23)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란 “내 뜻”, 즉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인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는 언약이다. 그래서 사무엘서 초반에 등장하는 한나의 기도는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음으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사 일하신 것과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그 한나의 기도 내용이 사무엘서 전체를 아우르며 다윗의 승리 노래로 결론을 내린다.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46-55)
한나의 기도가 다윗의 승리 노래로, 마리아의 찬송으로 연결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언약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버지조차도 관심을 두지 않는 자로 왕을 세우기 위해 사무엘이 방문한 자리에 두지 않은 자로 철저히 외면된 자, 무시당하는 자가(삼상 16:10-11) 하나님의 왕권을 보여주는 자로 선택된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의 왕권은 진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이 땅에 왕으로 오실 것을 보여주는 왕이다.
세례자 요한과 같은 위치에서 사무엘이 사사 시대를 종식시키고 엘리 제사장의 가문을 고발하기 위해서라면, 다윗의 등장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위치에서 사울 왕가와 사울을 추종하는 모든 백성의 비언약적 사고방식에 대해 고발한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세워지는 나라가 이스라엘이고, 언약의 말씀(율법)에 의해 유지되는 나라가 바로 언약의 땅에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신다. 이런 점에서 다윗이 보여주는 왕권은 제사장직까지 흡수 통합된 모습이다.
그래서 이제 다윗이라는 왕을 통해 율법이 새롭게 조명된다.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도 다윗에게는 해당이 된다(삼상 21:1-6). 거룩과 비거룩을 다윗의 활동에서 다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룩이란 원수로부터 배척받는 것을 오히려 긍휼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의 심정과 동일한 차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삼상 30:26). 이처럼 다윗은 언약적 입장에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왕의 제도를 통해 기름부음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존재로 규정된 삶이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1절)라는 표현은 현실적으로는 여부스 족속을 쳐부수고 예루살렘을 점령한 때이지만(삼하 5:6-7) 언약적 입장에서 보자면 아브라함 언약이 성취된 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평안히 살게 하신 때”란 언약을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때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때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2절)라고 한다. 흔히 이 말씀을 다윗이 은혜를 입었으니 하나님께 그 은혜에 대해 보답하겠다는 갸륵한 마음으로 이해하나 그런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답변은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5절)라고 하시며 오히려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8-9절)라고 말씀하시면서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11b-13절)라고 말씀하신다.
정리하자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9절), 거주할 땅을 주신다는 것(10절), 너를 위해 집을 지으신다는 것(11절), 네 후손을 세워 나라를 견고하게 하시는 것(12-13절),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아들이 된다는 것(14절), 네 집과 나라가 영원히 보전된다는 것(16절)’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성전)을 세우려 했으나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왕권)을 영원히 세우신다는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왕권과 다윗의 왕권이 결합되는데, 이는 이미 주어진 처소에 대한 예언(신 12:1-32)과 왕권에 대한 예언(신 17:14-20)이 각각 결합되어 성취되면서 이제 새로운 왕국 언약으로 주어진다. 이 언약을 더욱 공고히 하시기 위해 다윗의 죄는 적나라하게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다윗에게 주어진 영원한 언약은 유한한 다윗의 죄가 드러나 영원하신 분 안에 흡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밧세바를 취한 것과 인구 조사이다.
흔히 말하듯이 다윗의 죄는 단순히 밧세바와의 간음, 우리아에 대한 살인이라는 윤리도덕적인 죄가 아니다.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삼하 12:9-10). 즉 다윗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긴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이었다. 그로 인해 헷 사람 우리아를 우습게 여겨 죽이고 밧세바를 빼앗았다고 보신다. 그래서 성경은 “헷 사람 우리아”(삼하 11:3,6,17,21,24), 밧세바에 대해서는 “우리아의 아내”(삼하 11:3,11,26)라고 강조한다.
다윗이 죄를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은 무시해도 상관이 없다는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하지 않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다윗의 사고방식은 언약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죽은 웃사의 일로 인하여 혹시 저주가 내려진다면 이방인 가드 사람 오벧에돔이나 받으라는 식으로 그 집에 둔 것으로 잘 드러난다(삼하 6:10). 이것은 언약 정신에 합당하지 않음을 밧세바 사건으로 보여주시고, 우리아의 희생을 통해 언약 정신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그것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었다.
또한 다윗의 인구 조사는 아브라함 언약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땅의 티끌,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와 같이 번성하게 하신다는 언약을 무시한 것이었다. 결국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사고(삼하 24:24, 대상 21:25) 그곳에 성전이 세워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로 세워지는 나라임을 보여주셨다(대하 3:1). 아브라함 언약에서 주셨던 모리아 산에 대한 장소 계시와 모세에게 주셨던 이름을 두시기로 하신 성막(성전)에 대한 계시, 다윗에게 주셨던 죄와 용서, 긍휼에 대한 타작 마당에 대한 계시가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것으로 성취되었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내 이름을 둘 만한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서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고 다만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왕상 8:16)
그러므로 언약 안에서 다윗의 후손 왕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로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아들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의 위치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두 아들의 직분에 대한 최종 성취로 오셨다. 다윗의 아들로서 그는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번제가 아니라 “상한 심령”(히, ‘루아흐 샤바르’), 즉 ‘깨어져 산산조각난 영’이라는 것을 다윗은 알았다(시 51:16-17). 십자가 죽음 안에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것 이것이 성전이 의미하는 바이다. 이런 점에서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1)라고 선언하였다.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2-33)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마 22:42-45)
(2023050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