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년 전 오늘’ 이라는 메시지가 휴대전화에 떴다. ‘육년 전 나는 이맘때, 뭐 하고 있었지?’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우리 가족은 대만에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씨의 기분과 처마에 달린 홍등을 보며 황홀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육년 전 여행의 순간들을 하나씩 넘기다 비를 피해 머물렀던 긴 처마가 눈에 들어왔다.
향연이었다. 밤하늘은 칠흑 같고 어둠에 잠긴 비는 소리로 내렸다. 옆집과 나란히 이은 처마가 홍등의 붉은빛으로 붉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옮기며 몸과 마음이 안정이 되었다.
지루한 현실을 벗어나 여행을 하고 싶었다. 남편의 건강은 조금 좋아졌다가 제 자리 걸음이고. 결혼해서 몇 년이 지나도록 아가가 생기지 않던 아들, 며느리. 나는 기다림에 서서히 지쳐갔다.
추석에 대만에 큰 태풍이 온다고 했다. 실시간 태풍의 움직임을 보면서 바짝 뒤 따라 가기만을 기다렸다. 공항에서 벌써 태풍 쫓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가족이 함께 있으니 그렇게 안달 할 일만은 아닌 것 같았다. 단체여행이라 공항여행사에서 여권 찾고 예약해 놓은 와이파이도 찾아서 그냥 이웃 나들이 하듯 편안한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었다.
도원국제공항에 도착. 하늘은 잔뜩 흐려 비가 곧 쏟아질 것 같았다. 대만의 고속도로는 마냥 달리기만 했다. 끝없이 달리다 보니 건물들이 보이면서 도시에 들어섰다. 눈에 보이는 도로변의 건물들이 모두들 거멓다. 화장을 하지 않아서 까만 내 얼굴을 보는 것 같아 낯이 뜨거웠다. 곰팡이 때문이었다. 이것 또한 연중 비가 쏟아지니 비의 피해였다.
자연의 힘과 침식에 의해 생성된 기암괴석을 볼 수 있는 ‘국립야류해양공원’에 갔다. 거센 바람이 불어 날아갈 지경이었다. 태풍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었다. 대만의 태풍은 다음날 한국으로 이동 한다고 했다. 나는 한치 앞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여행을 와서 태풍으로 한치 앞을 느꼈다.
‘화련’ 행. 태풍은 흔적도 보이지 없었다. 차창 밖으로 본 하늘은 푸르고 낮은 산과 열대 나무들이 보였다. 기차타고 3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서 도착했다. 고구마 같이 길쭉하게 생긴 대만은 위쪽은 온열대 기온이고 아래쪽은 열대 지방이라고 했다, 왕복 여섯 시간을 달려 기온의 변화와 계절이 바뀜을 동시에 느꼈다.
‘태로각협곡‘ 높은 돌산의 계곡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돌산 사이사이로 외줄기 물이 흘러내렸다. 하늘을 여는 폭포라고 우겨도 좋을. 계곡의 유일한 원주민 카페에서 망고 주수 한잔을 마셨다. 인구의 10프로가 살고 있는 완전 깡 촌이었다. 협곡에서 내려와 태평양 바다도 보았다.
하루 종일 비가 쏟아지고. 드라마촬영지인 ‘지우펀’ 홍등골목에 갔다.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은 홍등만큼이나 계단도 많았다. 계단을 오를 때 마다 보이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기념품 상점들. 어두워져 홍등에 불이 켜지니 그 신비스러움에 빠져 산속 도깨비 집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밤에 야시장을 갔다. 태풍은 지나갔지만 비가 또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처마 밑에서 바라보는 빗줄기는 조금은 처량하고 슬프게 느껴졌다. 옆집과 이어진 긴 처마는 우산도 필요 없었다. 몇 번을 왔다 갔다 해보았다.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한쪽 구석진 곳에 있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없어 조용했다. 창밖의 처마에 달린 홍등의 붉은빛을 바라보며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대만의 처마에는 우리가족만 존재하는 순간이었다.
육년이 지난 지금 남편은 힘을 키우려고 애쓰고 있고. 복덩이는 대만을 다녀온 이듬해 추석에 임신소식을 전했다. 그때의 기쁨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왔다. 손녀가 벌써 다섯 살이 되었다. 나는 몸은 바쁘지만 마음은 여유를 가져 보려고 애썼다.
누구나 마음속에 찾아오는 힘듦을 생각해 봤다. 또다시 폭우가 쏟아져도 붉은 빛의 온기 가득한 긴 처마를 생각하면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나만의 처마를 그려 보았다!” 마음속에 숨어 있던 긴 처마는 사라지지 않고 아련한 빛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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