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해소되지 않는 부채위기, 누구에게 전가시킬 것인가
그럼 이제 정리해 보자.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실물경제의 심대한 타격이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쳤다. 그런데 2000년대 세계경제는 부채에 의한 성장과 그것의 자산효과에 기댄 성장이었기 때문에, 경제 주체들의 연달은 채무위기는 당연히 실물경제를 지탱했던 자산효과를 상쇄시켰다. 심지어 마이너스 자산효과에 의해 실물부문의 돈은 모두 부채 축소를 위해 빨려 들어갔고, 실물부문의 돈가뭄, 즉 디플레이션은 더욱 가속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주택가격이 폭락했던 현상을 우리는 5년 동안 지켜보아왔다.
그리고 미국은 비전통적 통화완화정책까지 도입하면서 상황을 반전시키려 하였다. 양적완화 조치의 명시적 목표는 국채매입을 통해 국채금리를 하락시켜 이에 연동된 모기지 금리의 하락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런 모기지 금리 하락의 목표는 모기지 채권발행을 용이하게 만들어 모기지 시장을 안정화시키고, 그 여파로 전체 채권시장의 안정과 주택가격부양을 이루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만약 이것이 뜻대로 성공한다면, 다시 가격 상승에 기댄 자산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이것이 실물경제를 부양하는 버팀목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주택가격을 다시 부양하려는 의도는 실패했다. 아직도 미국의 가계들은 빚의 줄이기 위한 과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집값은 고점대비 40% 하락한 채 횡보하고 있다. 다만 금리하락으로 인해 이와 반비례로 계산되는 채권가격만 상승하였다. 그리고 채권시장의 안정과 풍부한 유동성은 앞서 지적한 대로 글로벌 금융시장을 부양하는 역할을 하였고, 의도치 않게 신흥국 시장의 불안정성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처럼 부채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취한 역내 조치가 역설적으로 역외 금융 불안정을 야기하는 사태로 발전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지난 5년 동안 양적완화가 수행한 역할은 금융시장을 안정화시키고 시간을 벌기 위한 ‘가면극’이었다. 이제 절반의 성공을 거둔 이 ‘가면극’은 서서히 무대 조명을 끄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의 의도는 지나친 과열도 막고 예상치 못한 급락도 제어하는 것이지만, 현실에선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현상’이 벌어지면서 관리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동요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 혼란은 국제적인 권력관계에 의해 불균등하게 벌어진다.
그런데 그 권력의 증표가 바로 아이러니 하게도 위기의 주범이었던 달러이다. 이 증표가 없는 나라들은 대외 무역에서 심대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신흥국의 위기는 외환위기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 해결방식은 다시 달러패권에 종속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우리도 겪었던 IMF가 바로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해결사’이다.
4. 몇 가지 논쟁의 지점들
마지막으로 몇 가지 쟁점들을 살펴보자.
먼저 국가부채를 둘러싼 잘못된 관념이다. 기업이나 개인들의 부채와 달리 국가부채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국가로 하여금 채무약속을 강제하는 상위개념의 그 무엇이 법률적 형태로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선 국채를 들고 있는 채권단 그룹과 이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국제신용평가사들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얼마 전 그리스 국가채무위기사태에서 보았듯, 이들은 한 나라를 파국으로 몰아갈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왜 국가의 운명이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부채를 지는 이유는 돈을 얻기 위함인데 그 돈은 누가 발행하는가? 바로 중앙은행이 발행한다. 그런데 그 중앙은행은 누구에 의해서 그런 힘을 보장받는가? 바로 국가이다. 이야기인즉슨 국가가 스스로 만든 돈을 얻기 위해 국가 외부에 존재하는 신용평가사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꼴이다.
국가가 부채를 지는 방법들 중 하나가 중앙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오는 것이었다. 중앙은행의 국채이자수입은 행정부로 귀속되기 때문에, 결국 국가가 직접 화폐를 발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방법은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세계화되기 전에 제한적으로 통용되었던 방법이다. 그러나 80-90년대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부각되면서 이러한 방법을 금기시하게 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나라들은 국채시장을 통해 부족한 재정을 조달한다. 이러한 제약의 근거는 관료들의 이기적이고 부패한 목적에 의해 화폐가 남발되는 것을 막고 화폐가치를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일면 타당한 지적이긴 하다. 화폐가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경제 질서가 파국을 맞은 역사적 사례는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문제는 그 제약의 주체가 주권 밖에 존재하는 IMF와 국제신용평가사들이라는 점이다. 화폐주권의 주체인 민중들은 어디에도 없다. 화폐가치의 안정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건 화폐를 만져볼 겨를도 없이 통장에서 카드대금이 빠져나가는 서민들의 삶이다. 이렇듯 현실에 존재하는 돈은 언제나 불균등하며 누군가에게로 쏠려 있다. 결국 자신들의 주권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 되레 자신들을 소외시키는 꼴이다. 화폐가치의 안정은 모두가 대체적으로 합당한 만큼 화폐를 보유하고 있을 때 서로에게 득이 되는 얘기다.
그래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의 근거가 되고 중앙은행의 핵심 목표로 설정된 화폐가치 안정이라는 언명은 자칫 우리를 금융권력의 노예로 빠트리게 만드는 우를 범하게 만든다. 이들이 주창하는 국가부채에 관한 보수적 시각은 주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불공평한 ‘허리띠 졸라매기’를 강요하고 ‘복지망국론’과 같은 허상에 매달리게 한다.
정작 중요한 건 국가부채를 통해 조달된 돈을 누구를 위해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할 것인가이다. 즉, 생산과 분배에 대한 사회화 전략을 통해 화폐를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는 순환구조를 만드는 게 중요이다. 이것 없이 재정만 쏟아 붓는 건 자본주의의 권력관계 하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세력들에게 고스란히 돈을 갖다 바치는 꼴이 된다. 지난 MB 정권에서 20조를 들인 4대강 사업을 보면 알겠지만, 그건 대기업 건설사만을 부양시키는 토건사업이었다.
그래서 화폐는 특정한 이념에 의해 보존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다스려야 할 대상이다. 그럴 때 비로소 한발 더 나아가 화폐를 전화시키고 부채경제의 구조를 변혁시킬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쟁점은 ‘불확실성’을 상품화시킨 자본의 전략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부채-자산’ 경제가 몰락했던 이유는 미래가치를 현재로 이동시켰던 부채의 힘이 앞으로 발생할 불확실성을 모두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학적 확률에 의해 계산된 ‘부채-자산’ 경제의 ‘자산평가모형’과 ‘리스크평가모형’ 등은 그 자체로 인과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다. 계산과정은 맞다 하더라도 전제와 현실을 반영한 조건에 오류가 있다면 결과는 잘못 계산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설파한 이념은 미래를 계산할 수 있다는 오만함으로 가득차 있었고, 그 오만함은 2008년 금융위기 시 각종 파생금융상품이 부도나면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에 자신의 삶을 의탁했을까? 바로 ‘리스크’, ‘불확실성’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두려움이다. 당장 내일 교통사고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보험에 들게 만든다. 나이 들어서 소득이 없으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이 연금과 적금을 들게 만든다. 그리고 정확히 계산된 가격으로 미래소득을 보장받을 때, 우리는 안도한다. 이건 투기하고는 상관없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기에, ‘리스크’가 꼼꼼히 계산된 견적서가 우리에게 주는 파급력은 상당한 것이다. 자본의 이러한 전략은 성공했고, 이에 기초하여 모든 제도와 삶의 영역을 재편했다. 가령 노동자로 하여금 잘릴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파업투쟁 대신, 확실한 수익과 미래를 보장해주는 부동산과 펀드로 눈을 돌리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떤 상황인가, 신자유주의의 핵심이념이었던 이런 논리들은 이제 모든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기 시작했고, 그 토대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모두들 혼란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 혼란은 ‘불확실성’에 기인한 근원적인 요인으로부터 나오는 혼란이여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찌 보면 ‘양적완화의 정치학’이라는 게 이 혼란함을 관리하는 데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망가진 이 시스템을 지키기 위한 플레이어로서 중앙은행은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전 세계 모든 이들이 버냉키의 입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자산시장의 출렁거림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그래서 새로운 대안으로서 ‘금융억제’만을 이야기 하는 건, 현실에서 기대했던 바에 못 미칠 수밖에 없다. 앞서 말한 바처럼 화폐라는 것이 우리가 적극적으로 다스려야할 대상이라면, 금융역시 신자유주의적 퇴행으로부터 떼어내 새로운 대안적 패러다임으로 전화시켜야 한다. 금융을 억제하면 자연스레 실물부문과의 균형과 맞춰질 것이라 가정하는 건, 주류경제학이 신봉하는 일반균형의 논리와 별다를 바 없다. 실물부문의 영역도 불균형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역사 속에서 확인되었던 수많은 주기적 공황들이 그 증거들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최근 자본통제를 위해 외환거래에 과세를 했던 브라질이 다시 과세를 폐지했다. 양적완화 축소논란으로 금융시장이 동요하면서 헤알화가 급락하자 황급히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처럼 외환시장의 동요에 목줄이 잡혀 있는 신흥국에겐 ‘금융억제’ 이상의 대안이 필요하다.
현재 금융권력과의 역관계 상, ‘금융억제’ 마저도 버거운 현실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발 짝 더 나아간 담론을 만들지 못하면 이들과의 숫자싸움에 말려들 수밖에 없고,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될 수밖에 없다. 가령 각국의 금융규제 논의는 월가와 같은 금융권력의 로비 속에 하나 둘씩 후퇴하고 말았다. 조세피난처 얘기가 나온 지 벌써 수년이 지났지만 속 시원한 해결책이 아직도 요원하다.
옛 것이 사라진 지금,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 더욱 절실한 시기이다. [토론내용 끝]
아래는 발제문(요약) 이다.
<부채전쟁의 플레이어들과 돈의 흐름>
<기축통화의 패권과 양적완화에 동요하는 신흥국>
- 기축통화(기준통화)가 왜 중요한가? 기축통화가 상품시장의 영역을 장악. 달러가 힘이 쎈 이유는 바로 미국이 모든 상품시장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WTO, FTA, TPP ...) 대외무역결제를 위해선 반드시 달러가 필요하다. 대표적으로 석유거래는 원유선물시장을 통해 반드시 달러로 이뤄진다.
- 신흥국은 달러를 조달하기 방법을 강구해야 하며, 이것은 외환시장을 통해 이뤄진다. 그래서 안정적인 외환관리를 위해선 몇 가지 중요한 제약들을 지켜야 함. 그렇지 않으며 투기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기 쉬움. 먼저 경상수지 적자를 방지하여 달러유출을 막아야 한다. 아니면 자본수지 흑자(투자유치)를 통해 달러를 유입시켜야 한다.
- 신흥국들이 벌어들인 달러는 대부분 미국 국채로 투자. (약한채권자-강한채무자 관계)
그러면 달러는 다시 미국으로 들어감. 다만 미국의 부채가 늘어나게 된다. (수출달러 환류메커니즘)
그런데 이런 순환은 오래갈 수 없다. 중국의 엄청난 미국 국채보유량은 이런 방법으로 생겨난 것.
미국 - 중국 서로 얽혀 있는 관계. (미중간 환율갈등) - 부채전쟁 p 60
- 미국의 돈풀기, 그 많은 돈들은 어디로 갔나? 중앙은행으로 되돌아가거나 신흥국 금융시장으로 유입. 미국의 통화정책에 변동이 생길 때 마다 신흥국 금융시장의 극심한 동요. 최근 양적완화 축소를 둘러싼 논란과정에서 몇몇 신흥국들의 위기가 심화.(양적완화 축소와 전망)
<신자유주의 경제이념의 몰락과 대안 찾기>
- 리스크, 불확실성에 대한 계산, 자산평가모델, 리스크평가모델 등등
이러한 수학적 확률계산 및 모형은 그 자체로 한계가 있음. 확률은 인과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님.
- 그런데 왜, 이런 경제이념과 제도, 형식들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나? (현재 부채전쟁을 이해하는 출발점) 바로 불확실성에서 벗어날 절대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 신이 아닌 이상 시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 인간은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 미리 알 수 없다. 안정화에 대한 희구. 신자유주의는 이런 불확실함에 대한 두려운 본성을 치고 들어온 것.(“세계는 계산가능하다.”)
-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이론과 이데올로기를 만들기 위해선, 자본이 만들어 논 리스크라는 상품에 대해 단순한 허구나 허상만으로 비판하는 건 한계적이다. 그러면 투기를 억제하고 국가가 잘 통제할 것을 요구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는 담론 필요.
-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리고 지난 역사에서도 국가 역시 불확실성을 잘 다루지 못했음. 70년대 자본주의 위기, 20세기 현실사회주의 실패, 그래서 관치금융이니 비효율적인 국가개입이니 뭐니 하는 왜곡된 이데올로기가 횡행하는 것임. 새로운 사회를 향한 열망은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결코 좋은 결말을 담보하는 건 아님.
- 그래서 개량주의, 현실타협주의는 그 토대와 상관없이 언제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과 안정화에 대한 욕망에 호소하는 힘이 있다.(“이것만이라도 지켜내자”) 그래서 현 부채전쟁의 국면은 우리에게 여러 개의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