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 건국전쟁 예찬에 국가 폭력 피해자들 반발 "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오게되는데 괭장히 결정적인 중요한 결정을 적시에, 제대로 하신 분, "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 (건국전쟁) 을 보면서 많은 분들이 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웅은 이제 외롭지 않다." (오세훈 서울시장) 지난 설 연휴 동안 여권정치인들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정치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띄우기에 나섰다. 이들의 사회관계망 서비스 (SNS)에는 ` 관람인증샷` 이나 이 전 대통령의 공적을 언급한 후기 등이 올라왔다. 오세훈 시장과 나경원 전 의원은 이 전 대통령을 ` 영웅 ` 으로 칭했다. 이승만 정권 시기 국가폭력으로 다치거나 가족을 잃은 시민들은 수십년이 지난 현재 까지도 상흔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4.19혁명의 도하선이 된 3.15의거 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유족들은 14일 경향신문과의 통화하면서 " 정치인들이 학살자를 미화하고 있다" 며 반발했다.
4.19혁명 유족회 "돌아가신 분 앞에 죄스러워" 김영달 4.19혁명 유족회 경남지부 사무국장(75)은 1960년 3.15의거 때 여섯 살 터울의 형을 잃었다. 그해 18세이던 형 김영호씨는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에 항의해 경남 마산시 남성동파출소 인근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이 쏜 총에 맞았다 김씨는 마산의료원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시신에는 곤봉에 맞은 흔적과 총상으로 인한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김 사무국장은 형을 잃은 응어리 속에 한평생을 살았다고 했다. 부정선거 항의 시위 생존자 "사연 안다면 그런 말 못해 " 형의 친구들도 친구를 살리지 못했다 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렸다고 한다 당시 경찰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했고 시위가담자를 고문하기도 했다. 김 사무국장은 " 이승만은 민주주의와 정의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독재자인데 뉴스에서 정치인들의 말을 듣고 있으니 유족회 사무실 책상에 놓인 12명 열사의 사진을 보기가 굉장히 죄스러웠다" 고 했다. 1960년 3월15일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유경옥씨(81)도 부정선거에 항의해 북마산파출소를 찾았다가 경찰에게 폭행당하고 왼쪽 팔꿈치에 총상을 입었다. 64년이 지났지만 유씨는 비가 오는 날이면 아직도 팔이 저릿하다고 했다.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유족 " 공산주의 낙인에 가족몰살" 그날 유씨는 운 좋게 집에 돌아왔지만 동네에서 살던 중학생 김모군은 숨졌다. 유씨는 " 정치인들이 숨진 김군의 사연을 알았다면 이 전 대통령을 지금처럼 영웅이라고 부를 수 없었을 것" 이라고 했다 그는" 평소에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면서 선거 때만 되면 빨랫비누든 고무신이든 나눠주고 누구를 찍으라고 말하던 자유당 정권의 모습을 기억한다" 고 했다.
한국정쟁민간인희생자 태안유족회 회장인 정석희씨(77)는 1950년 10월의 그날를 생생히 기억한다. 집에 들이닥친 경찰 두 명이 새끼줄로 정씨 아버지의 양팔을 묶고 연행해갔다 며칠 후 아버지의 주검이 마을 주민의 지게에 실려 집으로 왔다. 그 후 일주일 단위로 정씨는 삼촌과 할아버지 할머니를 차례로 잃었다. 정씨 가족이 죽은 이유는 정씨의 할아버지가 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사법 절차마저 없었다. 정씨는 " 당시 인민위원회는 독립운동가 여운형 선생의 조직이자 마을주민 모임이었다" 며 " 이승만이 1948년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정권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 공산주의자` 로 몰면서 비극을 초래했다" 고 말했다. 2016년 대법원은 국가폭력 피해를 인정해 한국정부가 정씨에게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비극은 정씨만의 일이아니었다.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2009년 태안.서산 민간인학살 희생자가 1895명에 달한다는 진실규명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 공권력의 불법 행사를 막지 못했던 이승만 정부에까지 그 책임이 귀속된다" 고 했다.
" 독일 히틀러에게 항고산업을 발전시킨 공이 있다고 그의 사진을 내걸거나 동상을 세우나요. 오히려 반나치법으로 금지합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왜 학살자를 추앙하고 기념관까지 만든다고 하나요." / 윤기은. 김송이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