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당물(低當物) 박지연
저당이란 채무의 담보로 부동산 또는 동산과 때로는 유가증권 등을 저당 잡힘을 말한다. 통상 주택을 구입할 때 부족한 만큼 은행에서 대출을 원할 때 은행에서는 저당권을 설정함에 따라 저당물을 제시하게 된다.
죄와 벌
"그 노파만 없으면 그 많은 돈으로 천가지 훌륭한 일들을 성취할 수 있고 수많은 가정이 빈곤과 파멸에서 구제할 수 있다. 진딧물보다 못한 저 노파만 제거하면 된다." 라는 생각으로 라스꼴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 이바노브나를 살해 한다. 이것은 러시아의 문호 도스또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나오는 라스꼴리니코프의 독백이다.
그 노파가 어려운 사람들에게서 이자를 꼬박꼬박 챙기는 것은 타인의 생명을 좀 먹고 있는 존재라고 표현했다. 19세기 제정 러시아는 농노를 노예처럼 부리고 중소 지주들도 몰락하는 탄압 속에서 국민의 불만이 고조된 시기가 반복된다. 동란이 일어나고 농민들과 도시 빈민층 가운데는 관료와 영주의 수탈을 피해 모스코바국가의 남쪽 경계를 넘어 돈강 유역의 카자크집단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제정 러시아의 압박에 계속해 시달려 온 농노들은 노예의 신분으로 시민들의 삶이 너무 어려웠다. 황제들의 탄압은 계속되고 영토 확장과 남하정책을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농노들도 전쟁에 끌려가며 희생되는 악순환 시대에 살았다. 서유럽 문물을 받아들였으나 외교에는 늘 실패하면서 가혹한 관료정치로 국민들을 감시하고 탄압하여 견디기 힘든 사회상이었다. 개혁을 하지만 농노는 인격적 자유와 거처의 자유조차 속박 당하던 시대에 1866년 <죄와 벌>은 탄생했다.
그 시대의 사회적 사상적 정치적 문제를 예리하게 반영시켰다. 이미 작가 자신도 누명을 쓰고 시베리아에 유형를 당했고 군생활도 했으며 가난에도 시달려 본 본인이었다. 동시에 인간 본질의 근본적 문제점을 제시한 것이다. 인간이 추구한 죄와 벌에서 인간 깊숙이 내재한 욕망과 사회적 규범과 상충할 수 밖에 없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우리 현실과 비교해도 시대상이나 사화상은 다르지만 젊은이들이 희망이 보이지 않는 청년실업의 고통은 그 때나 다를 바 없다. 우리 주변에도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욕망을 자제하지 못한 존속살인이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당하지 못한 행동으로 강탈하는 사례가 바로 그 속성을 보인 것이다.
빈부격차가 극심한 그 시대에 5층 다락방에서 가난하게 기거하는 라스꼴리니코프는 가진 것이라곤 시계와 담배케이스뿐이었다. 그의 저당물은 오직 그뿐이다.
이 시대의 경제 논리로 보면 이바노브는 고령의 나이에도 경제활동을 하며 어쩌면 자기의 가족을 부양하는 건강한 사람이고 단지 고리대금이 문제일 뿐 돈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대여해 준 서민 금융인이라 할 수 있다.
되( 胡)각시 왜(倭)각시
이전 세기에 청나라 장군 원세개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에서조차 세도를 부리며 청나라의 무직자나 무뢰한들을 대거 불려들여 청량리와 왕십리에서 채소밭을 가꾸게 했다. 이들은 거의 홀아비들인지라 돈을 많이 축적했다. 그들은 그 돈으로 우리나라 영세민에게 월 1활의 높은 이자를 받는 고리대금업자로 변신해 돈 놀이를 했다. 이 비싼 이자를 열달 동안 원금과 이자를 갚지 못하면 아내와 딸을 바친다. 즉 인신(人身)을 저당해 돈을 꿔주는 조건이다. 끝내 갚지 못하면 여자들은 그들의 손에 들어가는 비극이 시작되어 이런 불행한 여자를 되(胡)각시라 불렀다.
그에 그치지 않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에도 이런 일은 많았다. 서울 진고개에 몰려든 일본인들은 자기나라에서는 직업도 없는 무직자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이 벌인 업종은 전당포였다. 이 때 저당물은 부실한 부동산 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아내와 딸을 우선시해 인신을 저당 잡았다.
더 지독한 것은 저당 잡힌 여자들이 젊을수록 값을 많이 처주었다. 또 미추( 美醜)의 차이를 두고 아름다우면 저당값이 높아지고 추녀는 값을 낮게 계산해 대출하는 행위를 공공연하게 자행했다. 그 저당된 여인들은 저당된 동안 동거를 하는 경우와 노역(勞役 )을 제공하는 경우로 대별되었다. 일본 홀아비들은 저당 기간동안 여인과 동거를 하게 되며 이자만 전당포에 내면 된다. 이렇게 희생된 여인들을 사람들은 왜(倭 )각시라 불렀다. 이것은 완전히 인신이 저당된 경우다.
나라가 어려워 이토록 많은 수모를 당한 우리 나라 여인들, 물건 취급을 당한 분통 터질 분노를 차마 참을 수 없다.
가장 하찮은 저당물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으로 6.25 전쟁의 총소리는 멈췄지만 거리에는 다 부서진 건물, 널브러진 전쟁의 상흔만이 남아 과히 폐허가 되었다. 3년 동안 전쟁으로 농사도 제대로 못 짓고 모든 공장도 돌 수 없는 빈사상태의 나라 형편은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가난했다. 학교도 집도 부서져 없어져 버렸다. 거기에 북한에서 피난을 온 사람들까지 도시는 만원이지만 일거리 먹을거리가 없고 그야말로 춥고 배고픈 시절이었다. 해를 지나고 1954년, 1955년이 되어도 나라경제는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했다. 공무원이나 학교교사들은 그래도 천막을 치고 일을 했지만 노동자들은 하루하루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시절, 부산에 몰려든 피난민들은 부두에서 노동을 하거나 그것도 공치는 날에는 가장은 죽을 만큼 마음이 아프며 찾는 곳이 있었다. 다급한 김에 헌 웃저고리를 맡기고 전당포에서 끼니를 이을 양식 값을 얻어 가족이 기다리는 가정에 돌아온다. 어머니들은 아무리 아끼려 해도 가족의 생존을 위해 비녀나 반지며 웬만한 값나가는 패물은 다 잡히고 날렸다. 어머니들은 바느질 품을 파는 가족이 연명하던 생명줄인 재봉틀, 이 귀한 재산도 아이들의 등록금을 대느라 머리에 이고 전당포에 오른다. 학생들은 마지막 졸업비를 못내 졸업을 못 할 때 아끼던 만년필이라도 잡히고 몇 푼을 얻어다 밀린 월사금을 내야 했다. 나중에는 이불도 나오고 구두까지 벗어 놓고 가는 전당포, 대개 전당포는 후미진곳이나 가파른 곳이 많았다. 누가 볼세라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애걸하듯 저당물이 아닌 하찮은 것들을 맡기고 몇 푼을 얻어 나올 때는 천하를 얻은듯 기뻤다던 그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저당물도 안되는 고물딱지를 그래도 본인은 소중하다 싶어 맡기는 물건이라 전당포 아저씨는 그래도 값을 처 주었던 고마운 분들이다. 참 서로 의지하며 살아낸 고달픈 시절이었다.
그 무렵 우리의 옷은 다 타버려 추위에 떨 때 미국에서 구호물자가 많이 들어왔다. 시장에 가면 그래도 싼 구호물자로 몸을 가리고 담요를 덮고 군복을 물들여 입고 물들인 담요로 코트를 만들어 추위를 버티던 때였다.
이런 형편을 걱정해 정부에서는 공설 전당포를 네 곳에 세웠다. 그러자 한꺼번에 3천명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고 서민 금융은 언제나 서러움이 따랐다. 너무나 모두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와 중에서도 재건부흥자금을 만들기 위해 한국은행에서는 '푼돈 모아 목돈 만들자'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 프랭카드는 거리를 펄럭이고 어린이들은 먹고 싶은 군것질 하나 사지않고 10원짜리 동전을 돼지 저금통에 꼬박 꼬박 넣어 저축을 해 산업자금에 보탠 1950년대, 60년대를 살아낸 엄마 아빠들. 그들의 눈물겨운 시절이 바로 보릿고개를 넘으며 전당포 인생으로 버텨낸 어르신들이다.
서민금융
전당포를 들락거리던 시절도 지나 전당포는 사라지는 듯 싶더니 서민들은 목돈 구경하기가 힘들자 계가 들불 번지듯 성행했다. 너도너도 하나 둘쯤은 들어야 목돈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회적 피해가 많았다. 원래 금융이란 신용이 첫째인데 계주나 계원들의 약속이 깨질때 무한 급수적으로 피해만 남겼다. 무려 서울에만 23만건의 사고를 쳤다는 기록이고 보면 이것도 서민금융으로 발전하기는 어려웠다.
서민금융의 기치를 들고 미소금융을 시작으로 햇살론. 새희망홀씨 등 다양한 형태로 금융소외자들을 돕기 위해 시작한 서민금융은 2008년-2012년 사이 7조원 가까운 실적도 올렸다. 그러나 정부 주도형 서민금융은 지속성에 의문이 간다. 저축은행들이 본연의 기능을 상실해 서민대출은 외면하고 고위험. 고수익의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에 몰두하다 곤욕을 치뤘다. 서민들이 갈곳이 없어졌다. 또다시 자금이 필요한 사람들은 사채업자를 찾아야 하고 이는 고리에 시달리고 끝내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여전히 서민 금융은 제 기능을 못하고 있어 소외되는 극빈자들에게 어떤 형태든 국가에서 저리로 사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
명품 전당포
우리의 경제도 규모가 커져 활동하다보면 급전은 필요하다. 은행에 갈수도 없고 급전을 구하려면 전당포만한 게 없나보다. 애달픈 서민의 생계를 돌보아 주던 그러한 가난의 상징인 전당포는 보이지 않지만 부촌 강남과 금융 1번지 여의도에 버젓이 명품 전당포라는 금융간판을 걸고 성업 중이다. 전당포 주 고객이 나이든 아저씨나 어머니 대신 이제는 20대에서 30대들로 고객층이 젊어졌다. 여유가 있을 법한 연예인. 변호사 .의사 전문직 종사자들도 많다니 참 격세지감을 감출 수 없다. 은행에서는 보증되는 예금이 없이는 마이너스 통장 개설이 어렵다보니 사회 초년생도 단골이 되었다. 요즘 주가 급락에 따른 손실과 예기치 않은 정리 해고 등에 직면한 중상류층에서 전당포를 찾는 일이 부쩍 늘었다.
저당물이 첫째 다르다. 헌옷가지 대신 다이야몬드. 외제차, 명품시계 모피 등 명품들이 주종을 이루고 이전처럼 한 푼이라도 더 처 달라는 흥정은 사라지고 명품시계 감정사, 부동산 전문가, 자동차 전문가들의 감정평가로 이룬다. 영업방식도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등을 통해 감정을 받고 출장 방문 서비도 한다. 휴일도 없이 영업을 하며 이자율도 월 2%에서 3.25%이다. 대출기간은 1개월에서 3개월이지만 연장도 가능하다. 머뭇거리며 전당포 들어가기가 꺼려했던 지난 시절과는 달리 퀵서비스로 해결하고 통장에 입금을 하니 뭐든 거리길 것 없이 투명하고 스피디 하다.
카드 결제일인 15일이나 30일은 북적인다. 돈 쓸 일이 많은 연말이나 크리스마스, 연초에는 대목이다. 중고 시세만 1억 2000만원에 달하는 스위스 명품 시계를 맡기고 7000만원을 빌리기도 하고 중고가 1200만원하는 에르메스 버킨백 5개에 6000만원을 융통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아파트나 공장설비 등이 늘어나고 있다.이제는 은행시간이 맞지 않거나 은행 문턱이 높아 불편한 사람들, 서민이 아닌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의 편리한 곳이 되었다.기업형 비즈니스로 바뀐 진화된 모습이다.
전당포의 유래
서양에서 최초의 전당포는 1428년 이탈리아의 루도비크 신부가 세웠다고 하지만 전당포와 관련한 이야기는 고대 로마 때부터 있었다. 우리나라의 최초 전당포는 고려 공민왕 때인 1365년에 있었다니 이탈리아보다 앞선 셈이다. 그 당신 고려에서는 인신을 채무담보로 하는것이 성행해 고려말에는 인신 전당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 물품 전당포를 이행하게 했다.
본격적인 전당사업이 시작된 것은 조선말에 있었던 갑오개혁을 계기로 근대적 전당업이 발달되고 나서부터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가 어려운 서민들에게는 전당포만큼 삶과 애환이 서린 곳도 드물다. 지금은 신용카드를 쓸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1921년에 나온 현진건의 단편 '빈처(貧妻)'의 첫 장면에도 끼니거리를 전당포에 맡긴 저고리로 해결하던 눈물나는 시대를 살았다. 일제 치하인 1920년대 서울의 조선인 인구는 약 18만명 가운데 전당포가 없으면 6만명 정도는 아마 굶어 죽을 만큼 서민의 삶이 고달팠다고 한다. 그 무렵 1920년 7월 동아일보 기사에 '가난한 사람에게는 전당포 하나가 조선은행이나 한성은행 100개보다 필요하다' 라는 기사를 보면 전당포가 해낸 기능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개항과 함께 외래자본이 유입되면서 대폭 늘어났다. 1894년 이후 계속 늘어 1927년에는 조선인 799명, 일본인 606명, 외국인 1명 등 1406명이 전당업에 종사할 정도였다.
미국에서도 부자 동네인 비벌리힐스의 전당포에 고급 보석이나 예술품을 가진 변호사, 펀드 메니저, 의사 등의 발길이 이어진다. 미국의 어느 곳이나 주얼리를 맡기고 돈을 융통해 쓰는 곳이 많이 산재해 있다. 중국에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자본 수탈자로 지목 받으면서 문화혁명 초기에 금지 되었던 전당포들이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거액의 자본금으로 문턱은 낮게 은행보다 더 빨리 더 많은 돈을 빌려주고 있어 과거 냉소적인 전당포가 중국 부유한 연안도시의 중소기업인들의 자금줄이 되고 있다. 우선 손 숩게 고급 저당물을 맡기고 빌려 쓸 수 있어 현대에서는 아주 적정이자와 편리 함으로 각광 받는 유용한 곳이 되었다.
1961년 11월1일 법율 제 763호로 제정 공포된 전당포 영업법에 의하면 관할 경찰서에 허가를 받아 일정 기준 보관시설을 갖추면 영업을 할 수 있다. 1997년 전당포 영업자 복리 증진과 서민 유통질서 확립을 위한 목적으로 사단법인 전국전당금융연합회가 설립되었다. 이는 정정 당당하고 투명한 선진화 된 경영을 한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공포하는 뜻이 되기도 하고 또 서민금융의 한 몫을 담당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된다. 전국에 약 2000개 가량 있고 서을에는 600개의 전당포가 영업 중이다.
전당포 하면 '죄와 벌'에서 나오는 고리대금업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가난한 보릿고개 시절, 일본 강점기 시대에 현진건의 아내 모본단 저고리의 눈물속에 끝끝내 생명을 이어 온 전당포에 맡기던 저당물, 생각하면 저당물 값도 안되는 것을 맡긴 일이 안쓰럽고 측은함이 앞서 눈물이 고이는 이야기이다. 밤새도록 노름꾼이 마누라가 아끼던 은가락지를 빼어 전당포에 맡기는 그 시대의 서민금융이라 할까. 이제는 투명하게 경쟁하며 서민금융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러시아의 사회구조 속에 고리대금업자를 살해한 이 청년의 생각도 이 시대에는 바꿔져야 한다.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을 요즘 젊은이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려운 시대를 살아낸 우리 서민의 자화상이 바로 전당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