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설명 ¶
2006년 일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조사에서 사카모토 료마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좀 또라이 기질이 넘치지만[3] 동시에 카리스마와 공포로 주위를 휘어잡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좋게 볼 때는 마초형 카리스마 캐릭터. 나쁘게 볼때는 세상에 둘도 없는 미치광이로도 묘사된다. 이런 이중성을 좋아하는 일본인들 성격 탓인지 하여간 역사 인물들 중 가장 인기도 높다. 사실 실제로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일본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대망')이나 '오다 노부나가' 등을 보면 소설적 상상력[4] 이 더해져 그야말로 쩔어 넘치는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1534년 5월 12일(양력 6월 23일). 오와리(尾張. 지금의 아이치 현 서부)의 다이묘 오다 노부히데의 적자로 태어나, 2살 때 나고야(那古屋) 성의 성주가 되었다. 참고로 노부나가의 집안은 오다 가의 방계로, 노부나가가 오와리를 통일하기 전까진 가신에 불과했다. 오다 가는 원래 오와리 슈고인 시바 가를 괴뢰로 만들고 정권을 잡은 하극상의 센고쿠 다이묘였으며, 정통성이 부족한 하극상 세력이 그러하듯이 내부 분열로 인해 노부나가가 속한 오다 단죠노츄 가,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 등 3가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양아치로 소문이 나는 한편, 담이 크고 신분차별 없이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인질로 온 마츠다이라 타케치요(松平竹千代=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어린시절을 함께 보냈다. 1548년에는 사이토 도산의 딸 노히메와 정략 결혼을 한다. 도산은 양아치라 불리던 노부나가를 직접 만나보고 그릇의 크기를 눈치챘다고 한다.
당시 칼의 손잡이에 부드럽게 비단이나 천을 두르는데 비해 노부나가는 미끄러지지 말라고 볏짚을 감아놓은 것을 보고 탄식하기를 '내가 죽고 난 뒤에 내 아들은 사위를 당해내지 못 할텐데 어쩌나 ㅠ_ㅠ' 라는 식으로 말을 했다고
부친이 사망하자 평소 노부나가의 행실을 못마땅해 하던 하야시 히데사다, 하야시 미치토모, 시바타 가츠이에가 총명하기로 소문난 노부나가의 친동생 노부유키[5]를 옹립하려 했다. 이에 노부나가는 사쿠마 노부모리, 모리 요시나리 등을 끌어들여 대립한다.
1556년 4월 장인인 사이토 도산이 장남인 사이토 요시타츠와의 싸움으로 사망한다. 사실 이 때, 노부나가는 도산에게 원군을 보냈으나 한 발 늦었다고 한다. 노부유키 파는 노부나가가 도산의 지지를 잃게 된 것을 호기로 여겨 같은 해 8월 24일 군사를 일으켜 노부나가와 전투를 벌이지만 패배. 스에모리성에 틀어박혀 있었으나, 어머니 츠치다고젠의 중재로 노부유키와 카츠이에 등을 사면한다.
1557년 오와리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오다 노부토모의 지지로 노부유키가 다시금 모반을 꾀하나 카츠이에의 밀고로 모반이 발각되어 노부유키는 살해당한다. 이후 오와리의 이름뿐인 지배자로 노부토모에게 이용당하고 있던 시바 요시무네가 노부토모의 음모를 노부나가에게 밀고하였고, 분노한 노부토모가 시바 요시무네를 살해하자 노부나가가 주가 살해의 죄를 물어 다시 노부토모를 살해하여 오와리를 통일한다. 이로서 방계혈통이던 노부나가가 오다 가의 두령이 되었다.
가문의 주인이 된 후 스루가, 미카와, 도토미(스루가, 도토미는 지금의 시즈오카 현, 미카와는 아이치 현 동부) 동해 3국의 태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교토로 상경을 위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오와리를 침공한다. 당시 노부나가는 삼천의 군대를 이끌고 오케하자마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군을 기습하여 격파, 결국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을 벤다.(오케하자마 전투. 단, 요즘엔 정면 공격설이 부각되고 있다.)
이후에 처남 사이토 타츠오키의 사이토(齋藤)가를 격파, 미노를 수중에 넣고, 당시 교토로 가는 통로인 오미의 중견영주였던 아자이 가타마사에게 여동생 오이치를 주고 상경을 개시한다(이 때 가타마사는 노부나가를 존경해 이름을 아자이 나가마사로 바꾼다).
당시에 미요시 삼인방의 손에 죽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내세우고 교토에 입성하여 정권을 장악한다. 이후에 사사건건 대립 했던 에치젠의 아사쿠라 가문을 멸하기 위해서 에치젠에 출병하지만, 아사쿠라가 와의 동맹이었던 아자이 가가 신의를 저버리지 못하고 아자이 나가마사는 노부나가를 배신했다.(이 때의 가네가사키 후퇴전에서 오다가의 부장이었던 키노시타 도키치로(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후위를 자임하고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여 오다 가에서 돋보이는 존재가 된다.)
그로 인해 타케다(武田)씨, 아사쿠라(朝倉)씨, 엔랴쿠지(延暦寺),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아자이 등으로 이루어진 노부나가 포위망이 결성되었으나, 다케다 신겐이 지병으로 급사하여(총포에 맞아서 죽었다는 설이 있으나 신용하기 힘들고, 다만 폐결핵이나 위암 등의 설이 있다) 다케다가는 포위망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고, 이에 포위망은 유명무실, 이어서 노부나가에게 압박을 가하던 우에스기 겐신마저 급사해 노부나가를 막을 수단은 사라졌다.[6]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내쫓아 무로마치 시대의 막을 내리고 차례로 반노부나가 영주들을 멸하여 천하포무(天下布武)의 기치 아래 맹위를 떨친다.
이 과정에서 사찰인 엔랴쿠지를 불태워 버린 일에서 별명인 '제육천마왕'이 비롯되었다. 엔랴쿠지를 불태운 일로 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신벌이 있을 것이다"는 말을 듣자, 그는 오히려 "나에겐 '제육천마왕'이 깃들어 있으니, 신벌도 두렵지 않다"라고 대꾸하며 이후 공문서 등에 서명할 때도 한동안 "제육천마왕 오다 노부나가"라고 서명하기도 했다고. 참고로, 석가모니의 수행을 방해한 악귀 '마라'가 바로 제육천마왕(그런데 불교에서 마라가 어떤 뜻으로 쓰이는지 생각해보면 한국에선 참 재밌는 해석이 가능하다…. 마라 파피야스 항목을 참조하라).
무로마치 시대에 유행했던 코우와카마이(幸若舞) 중 하나인 아츠모리(敦盛)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人間五十年、下天の内をくらぶれば、夢幻の如くなり로 시작되는 구절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나머지 구절은 아츠모리 항목에 나와있다.
신장공기에서는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와리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부나가가 아츠모리의 저 구절을 부른 후, 호각을 불게 한후, 갑옷과 투구를 입고 선 채로 식사를 마치고 갑주를 입고서 출진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여기서 유래된 드라마 등 창작물에서 자주 쓰이는 유명한 대사가 "갑옷을 가져와라!(具足を待てい!)".
1582년, 일본 통일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시코쿠(四国)의 쵸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토벌에 나서기로 한다. 노부나가는 셋째 아들 칸베 노부타카(神戸信孝)(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 중신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하치야 요리타카(蜂屋賴隆)와 조카 츠다 노부스미(津田信澄)에게 군단을 주어 파견할 준비에 착수했으며, 한편 별동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로 하여금 우에스기씨(上杉氏)를 밀어붙이게 하여 호쿠리쿠(北陸)의 토야마성(富山城)·우오즈성(魚津城)을 치게 하고, 모리 나가요시(森長可)에게 북시나노(北信濃)방면,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에게 코즈케(上野)방면으로 진공하게 하여 우에스기씨 세력을 동서남북 사방에서 압박하도록 했다. 여기에 우에스기씨 내부에서 시바타 시게이에(新発田重家)가 반란을 일으켜 우에스기씨는 안팎의 적을 막느라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진다.
우에스기씨 공격이 좋은 진척을 보이고 있던 그 무렵인 5월 15일, 코슈정벌(甲州征伐) 전승을 축하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노부나가가 머무는 아즈치성(安土城)을 방문했다. 절친한 맹우(실은 호구 1호) 이에야스를 대접하기 위해, 노부나가는 쿄토 예법에 밝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에게 이에야스 접대역을 맡겨 사흘에 걸쳐 이에야스를 대접하게 했다.
이 무렵 빗츄 타카마츠성(備中高松城)을 공략중이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아즈치성으로 사자를 보내 원군을 요청한다. 그러자 노부나가는 돌연 미츠히데의 접대담당역을 해제하고 히데요시의 원군을 이끌고 지원에 나서도록 명한다.
아무리 같은 노부나가의 가신이라도 히데요시는 농민 출신의 보잘것 없는 가문 출신이었고, 미츠히데는 역대 바쿠후의 쇼군들을 배출한 왕족 출신 명문 무가 세이와겐지(清和源氏)의 혈통을 이은 토키씨(土岐氏) 지류 아케치씨(明智氏)의 거두였다. 거기에 노부나가의 장인 사이토 도산(斎藤道三)의 처조카인 동시에 노부나가의 조카 츠다 노부스미의 장인으로 노부나가에게는 인척관계(사돈)에 있는 근신(近臣)이었다.
게다가 가신의 필두 중 한 사람이었으며 1575년에 조정으로부터 코레토(惟任)의 성씨와 종오위하 휴가노카미(従五位下 日向守)의 관직을 제수받아 황실과의 관연(官緣)도 있었다. 거기에 격식과 예법에 능했던 미츠히데는 평소 행실을 가볍게 하고 다녔던 히데요시를 좋게 보지 않았다고도 한다.
개인적인 원한을 따지는 미츠히데는 아니었지만, 수도권이었던 킨키(近畿)의 사령관으로 히데요시보다 한참 높은 위치에 있었던 미츠히데에게 한참 아래뻘인 히데요시의 원군대장을 맡으라는 것은 모욕적인 일이었다.[7] 이것이 노부나가의 최후를 알리는 기점이 된다.
5월 29일(양력 6월 19일), 노부나가는 츄고쿠(中国)지방 정벌을 위해 쿄토(京都)에 상락하여 혼노지(本能寺)라는 절에 본진을 차리고 머물러 있었다. 가신들을 선방에 배치한 노부나가였으나 정작 혼노지에는 근위 100여명 밖에 배치하지 않고 있었다. 어찌보면 일본 1인자로서 더이상 일신의 위협을 생각할 일이 없었다는 반증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노부나가의 적장자 노부타다의 군대도 함께 상경해서 주둔중이었다.
하지만 실은 혼노지가 그로부터 2년 전인 1580년에 노부나가의 명으로 대대적인 공사를 거쳐 절인 동시에 하나의 성채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이 2007년 혼노지 유적조사에서 밝혀지면서, 이는 노부나가가 혼노지를 수도에서의 하나의 기지로 운용했으며, 본진을 여기에 차리면서 고작 100여명의 호위만 배치하고 아들 노부타다의 병력을 떨어뜨려서 배치시킨 것도 혼노지의 방어력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유력한 설로 대두되었다.
허나 그렇게 자신하고 있던 노부나가를 향해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의 모욕과 그동안 받았던 부당한 대우, 노부나가가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미츠히데와 연을 맺고 있던 쿄토의 승려세력을 탄압한 것으로 인한 원한[8] 등 여러가지 원인을 이유로 주군 노부나가를 토벌하기로 결의하고 노부나가가 혼노지에 본진을 차리기 사흘 전인 5월 26일(양력 6월 16일)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때의 명분은 히데요시의 원군부대를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6월 1일(양력 6월 20일), 미츠히데는 영지 탄바(丹波)에서의 거점인 카메야마성(亀山城)에서 1만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출진, 수도 쿄토(京都)로 향했다. 히데요시가 경략중인 츄고쿠로 가는 게 아니라는 걸 안 가신들이 어찌된 영문인지 묻자, 미츠히데는 "이 정도 병사를 움직이는 거라면 떠나기 전에 혼노지에 머무르고 계시는 주군(노부나가)께 열병[9]을 받아야지 않겠나"라고 말했다고 한다.[10]
그리고 밤을 넘겨 다음날 새벽 무렵 쿄토 경계인 카츠라가와(桂川) 앞에 다다르자, 1만과 3천으로 병사를 나누고는 3천명만 데리고 카츠라가와를 건너 쿄토로 입성했다. 최근의 연구결과로는 이때가 6월 2일(양력 6월 21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이 미츠히데의 출진에 대해 다른 기록도 있는데, 애초 미츠히데는 노부나가로부터 히데요시의 원병부대를 이끌고 가라는 명을 받은 뒤 카메야마성이 아닌 본거점 사카모토성(坂本城)에서 출진했으며, 이때 군사는 3000명이었다고도 한다. 카츠라가와 앞에서 3000명을 나눴다는 기록과 애초에 3000명을 이끌었다는 기록 모두 쿄토입성의 인수가 같은 것으로 보아, 아케치의 쿄토정벌 부대의 인원은 3000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6월 1일 당일, 노부나가는 교토에서 왕족들과 귀족들, 교토 인근의 유력인사들을 초대하고 다과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것은 죽음 앞의 여유였을까.
6월 1일(양력 6월 20일) 밤, 미츠히데의 접근 사실을 모르는 노부나가는 잠자리에 들었고, 그 시각 교토로 진격하면서 미츠히데는 한마디를 남겼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敵は本能寺にあり)
이것이 바로 혼노지의 변의 개막이었다.
몇 시간 후인 6월 2일(양력 6월 21일) 이른새벽[11], 절 밖에서 들려오는 말 소리와 소음에 잠에서 깬 노부나가는 시동 모리 나리토시(森成利)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이 모리 나리토시가 바로 모리 란마루(森蘭丸)이다. 란마루나 다른 시동들은 "아랫것들이 싸움이 났겠거니"하고 생각했다고 하며, 노부나가 본인은 "츄죠[12]의 반란인가?" 하고 물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빙성이 현저히 낮은 미카와 모노가타리(三河物語)[13]가 출처이므로 믿기 어렵다. 그러나 척후병이 들어와 "혼노지 바깥은 이미 적들에게 포위당했고, 많은 군기(軍旗)가 보였습니다. 깃발의 문장은 도라지꽃(桔梗)입니다."라고 란마루에게 보고했다. 도라지꽃은 바로 아케치 미츠히데 가문의 문장(家紋)이었고, 이에 히데요시의 원군 대장으로 갔을 터였던 미츠히데의 군사가 모반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란마루를 비롯한 시동들이 노부나가에게 피신할 것을 아뢰었지만, 노부나가는 미츠히데의 평소 성격과 능력, 지휘실력을 알고 있었기에 탈출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혼노지 안으로 쳐들어오는 미츠히데의 군사와 맞서싸우다가 중과부적에 이르자 본당 문을 닫고 란마루를 시켜 불을 놓은 다음 최후를 맞았다[14]. 일설에는 그 불길 속에서 타죽었다는 말이 있고 한편으로는 불길 속에서 배를 갈라 자결했다는 말도 있다. 여하튼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노부나가가 혼노지 거처와 함께 불 속에 갇히자, 거처가 다 타기를 기다려 노부나가의 죽음을 최종적으로 확인한 미츠히데는 니죠의 고쇼(二条御所)[15]로 피신해서 맞서싸우던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와 무라이 사다카츠(村井貞勝)를 쳤다. 노부타다는 세번에 걸쳐 안으로 들어오는 아케치군을 물리쳤으나, 아케치군의 철포대가 자신의 측근들을 차례차례로 쓰러뜨리자 무라이 사다카츠 등과 함께 자살했다. 무라이 사다카츠는 혼노지의 변 직전 혼노지 바로 지척에 있는 자택에 있다가 변이 일어나자 노부타다에게 사실을 고하기 위해 처음 노부타다가 주둔해 있던 묘카쿠지(妙覚寺)로 달려갔었다. 노부타다가 이 소식을 듣고 혼노지로 노부나가 구출병을 보내려 했으나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고, 묘카쿠지에서의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사다카츠가 니죠고쇼로 옮겨서 항전할 것을 제안했었다고 한다. 이 당시의 기록은 예수회 선교사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도 상당히 자세하게 남아 있는데, 다름아닌 프로이스 본인이 말하자면 혼노지 옆집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 프로이스의 예배당이 바로 근처라서 미츠히데의 군세가 들이닥치는 광경을 제법 자세히 서술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노부나가의 복수전을 대의로 내세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뒷수습을 하였으며, 미츠히데를 야마자키 전투에서 격파하였고 명실공히 노부나가를 이은 최고권력자로서 자리매김한다. 패한 미츠히데는 도망가다 농민에게 살해당했다.
일본 역사 인물 중 가장 많이 까이기도 한 인물이었지만 일본의 제국주의 시대부터 재조명 받기 시작하여 전국 시대 3인 중 톱으로 꼽기도 한다. 일설에 의하면 신겐, 겐신에게 패배한 적이 있어서 최강까진 아니지만 설령 신겐, 겐신이 일찍 죽지 않았더라도 노부나가의 전략과 군대 규모를 생각하면 병력규모가 노부나가가 동원할 수 있는 총병력의 반에도 못 미치던 둘의 멸망은 시간 문제였다는 설이 지배적이다.[16]
교과서 등 대부분의 일반 서적에서는 전국시대 후기의 흐름은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 확장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교과서에서는 다네가시마 철포 전래 등 매우 중요한 사건을 빼놓고서는 거의 킨키 지방을 중심으로 한 노부나가-히데요시 연표수준이다. 전국시대의 끝은 노부나가를 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전국시대를 끝맺은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치세를 따로 빼어 아즈치-모모야마[17] 시대 혹은 쇼쿠호[18] 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센고쿠 시대의 끝을 1615년 오사카 성 함락으로 보지 않을 경우는 보통 1573년의 무로마치 막부 멸망부터 1603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쇼군 취임까지를 쇼쿠호 시대로 떼어서 취급한다.
3. 기타 ¶
노부나가의 17대손인 오다 노부나리는 스케이트 선수인데 음주운전에 적발되어 망신살을 샀다. 음주운전을 적발한 경관 이름도 하필이면 아케치라서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되고 있다고…….[19] 역사는 반복된다
노부나가를 다룬 창작물에서 항상 나타나는 노부나가의 말버릇 비슷한 표현이 있는데, 바로 '데아루카(であるか)'. '그러한가', '그러냐?' 라는 의미다. 원래 이 당시의 표현으로는 '소-데아루카(そうであるか)'가 맞는 표현이지만[20] 소-(そう)를 빼고 자기 마음대로 줄인 표현이다. 이 표현의 출처는 신장공기에서 노부나가가 사이토 도산과 처음으로 대면할 때 사이토가의 가신이 노부나가에게 '저분이 도산 공이십니다'라고 소개하자 노부나가가 '그런가(であるか)'라고 말한 것이 원 출처.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기록이지만 이런 어법파괴(?)적인 표현도 가신들에게는 특이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전국무쌍이나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도 이 말버릇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신과 사후세계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반면[21] 가신들이 종교를 믿는 것을 말리지는 않았다. 고니시 유키나가도 이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를 믿게 된다. 아즈치 성의 디자인이나 본인의 서양 문물 취미를 들어 노부나가가 기독교를 이용해 불교 세력의 약화를 꾸몄거나 나아가서는 본인도 기독교를 믿지는 않더라도 강력히 지지하고 있었다는 학설도 있다. 전자는 일부러 아즈치에서 각 종파끼리 키배를 붙인 기록이 있을 정도인 노부나가이니 확실하지만 후자는 딱히 근거가 없다.
키는 당시의 일본인 기준으로는 거인에 해당되는 170cm 정도 되었다고 한다. 사실 현재 기준으로도 루저 그렇게까지 작은 키는 아니다. 당시부터 꽃미남으로 유명했다 전해지는데, 지금은 불타 없어졌지만 예수회 수도사가 그린 노부나가의 초상이 있는데, 서양식으로 소묘한 초상의 얼굴을 보면 노부나가는 굵직한 수염을 기른 중후한 미남이다. 그런데 정작 못생겨서 유명한 히데요시와 달리 이 미남자가 딱히 호색한이었다는 기록은 없으니 재미있는 부분이다.
가네가사키 퇴각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 아네가와 전투[22]로 매제인 아자이를 괴멸시킬 수 있었던 것은, 동생인 오이치가 콩주머니의 양 끝을 묶어 아자이가의 배신으로 앞뒤로 포위 당했음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빙과 20화의 대하 드라마가 바로 이 이야기를 방영한 것이었고, 이를 밖에서 잠긴 창고에 갇혀있다는 힌트로 써먹는다.
4. 오다 노부나가 잔혹설 ¶
오다 노부나가가 딱히 다른 다이묘들보다 잔혹한 인물이었다는 유의미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우선 노부나가가 시행한 각종 엄격한 벌들은 원래 당시 일본에서는 당연히 행해지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물론이고 온화하다는 이에야스조차 책형을 시행한 적이 있을 뿐더러 사람을 목만 땅 위로 내밀게 한 다음 톱으로 그것을 썰어버리게 한 적도 있다. 또한 적들을 가혹하게 몰살해버렸다는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 그런 적은 고작해야 두 번 남짓한 정도이고 대부분의 경우 그냥 투항을 받아줬다.
또한 배신자에 대해서도 관대한 모습을 보였는데 동생인 노부유키도 한 번은 용서했고 심복인 가쓰이에도 한 번은 노부유키를 따라서 노부나가를 배신한 역신이었는데, 이를 용서해 중신으로 세운 케이스. 또한 노부유키는 모반을 이유로 살해했으나 노부유키의 아이는 거두어서 곱게 길렀는데 이는 역적의 가족을 멸문하는 동양의 상식에서는 상당히 관대한 일이다. 자신의 서형(정실이 낳지 않은 형)인 츠다 노부히로가 모반을 일으켰을 때도 용서한 적이 있다[24]. 사실 노부나가는 남을 배신하기보단, 자신이 남에게 배신을 당한 일이 더 많았다. 결국 부하의 배신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고, 끝까지 동맹관계를 유지해준건 도쿠가와 이에야스 뿐이었다. 또한 자신 쪽에서 먼저 동맹관계나 맹우 관계를 끊은 적은 없다. 즉 외교적으로 상당히 신뢰할 만한 군주였다는 얘기.
단 오다군이 아자이 가와의 협정을 깨고 포고없이 아사쿠라군을 공격한 부분은 좀 문제가 있다. 아사쿠라와 아자이의 사이 때문에 분명 말릴 것이 뻔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이겠지만, 그 때문에 믿을 만하던 우방 하나가 숙적으로 돌아서버렸다. 이 때문에, 이를 두고 2차 창작물 쪽에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기도 한다. 아자이는 쿄고쿠 가문에게 멸망의 위기에 몰렸다가 아사쿠라 가문의 적극적 개입으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몇 대에 걸쳐 아사쿠라 가문과 센고쿠 시대에서 찾아보기 힘들 만큼 돈독한 동맹관계를 유지했는데, 갓 동맹을 맺은 오다가 아자이와의 협정을 깨고 아사쿠라를 공격했다면 아자이가 어느 쪽을 들지는 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를 배반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 중론.
사실 노부나가가 특별히 기록으로 남을 만큼 잔인한 짓을 저지른 적은 거의 없고 당시 다이묘들 사이에서는 보통의 수준이다. 위에서 언급한 책형의 건만 해도 그렇다. 의리남으로 유명한 우에스기 켄신도 포로를 노예로서 팔아넘긴 적이 있고 히데요시 등은 본보기로 죄없는 백성과 포로, 심지어 어린아이를 포함한 200여 명을 잔인하게 몰살한 적이 있다. 그 시대는 원래 그런 시대였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엔랴쿠지 소각사건인데 하부 항목에서 자세히 서술한다.
기타 노부나가 잔혹설에 언급되는 일들인데, 보다시피 거의 다 후세의 창작.
- 한 때 노부나가의 시녀들이,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외출을 나가거나 놀다가
뺑끼 부리다가갑자기 예정에 없이 빨리 귀환해서 시녀들이 자리를 비운 것을 알아채고 격노한 노부나가에 의해 처형당했다. 단, 사서의 원문은 시녀들이 세이바이(成敗)되었다고 적고 있는데, 이 단어는 처형당하다는 뜻 외에 단순히 응징되다, 처벌되다는 뜻도 포함하기 때문에 몰살당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어찌됐건 엄하게 처벌받은 것만은 분명.[25] 단 어떤 기록에서는 졸지에 죽게 된 시녀들이 도망쳐 절에 숨자 그 절의 주지까지 끌어내서 참살했다는 말이 있으니 일단 극형이었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26] - 아자이, 아사쿠라 등을 정벌하고 나서 아자이 히사마사,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 3명의 해골에 금박을 입혀 바라보며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후대의 창작으로 밝혀졌으며, 사실 일본 전국시대의 상식으로는 진짜로 해골에 금박을 입혔다 한들 그건 사자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행동이지 고인드립이 아니라고 한다. 다만 사료로서 신뢰성이 높은 신장공기에는 7권(텐쇼 2년)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27]. 신장공기의 기사가 사실과 다른지에 대해서는 추가바람.
- 불교에 대해 매우 잔혹했고, 각종 잇코종 봉기를 잔혹하게 탄압하고 치외법권의 성지로 취급되던 히에이 산을 포함한 여러 불교 사찰을 불사르는 등 불교가 사회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했다. 그 과정에서 승려와 주민 수천 명을 학살했다. 그러나 사실 당시 절들은 승병이라는 무력 집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특히 나가시마 잇코잇키의 경우 잇키를 일으킨 무리들이 식량이 떨어져 항복하자 이를 분명히 일차적으로 받아들였는데도 불구하고 처벌을 받을 게 두려운 나머지 배신하고 다시 잇키를 일으켜 노부나가의 동생을 살해하는 등, 센고쿠 시대 기준으로도 배은망덕한 행위를 했기 때문에 전부 죽음을 당해도 이것을 학살이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게다가 승병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당시 승병은 말이 승병이었지 사실상 종교를 앞세워 반란선동을 일삼는 깡패이자 광신도 집단에 가까웠고, 불교의 교리를 거의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분명히 적대적인 다이묘들에게는 좋은 선전거리였고 불심이 깊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용서받지 못할 악행으로 비쳤으며, 노부나가의 악인 이미지에 단단히 한몫 했다. 특히 다케다 신겐은 히에이산 방화 당시 살아남은 승려들을 불러다 보호하며 대놓고 비난하였다. [28]
그야 이를 현대적인 시선으로 보면 정치에 개입하는 타락한 무장 불교세력에 대한 응징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경천동지할 만한 일이었다. 옛날 기록으로도 "최근의 일(엔랴쿠지 소각 사건)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에도 시대의 유학자는 "비록 방법이 잔인했다고는 하나 오래 끌어온 불교의 해악을 제거한 점은 천하를 위해 공을 세운 일이라 할 것이다"라고 쓰기도 했다. 다만, 당대에 이에 대해 언급한 이들 중 직접 참상을 목격한 이는 없으며 또한 히에이잔 지역의 발굴조사에선 이를 증명할 만한 유골이나 화재 흔적 등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 오다 가문을 대대로 섬겨온 후다이 가신이라도 사정 봐주지 않고 무능한 부하를 가차없이 추방하거나 좌천시키는 등 부하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했다. 역시 합리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무정한 처사로 여겨져도 할말이 없다. 미츠히데 같은 가신의 경우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했다는 기록도 많이 보이는데, 루이스 프로이스는 노부나가가 미츠히데를 발길질로 찼다는 기록을 남겼을 정도. 이렇게 생각 없이 가까운 부하를 학대하다가 죽음을 당한 부분은 장비와도 비슷하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남 노부야스가 행실이 나쁘고 잔혹하며 다케다와 내통한다는 혐의를 들어 할복시킨 일. 단 이에야스에게 불리한 일을 에도 막부에서 집요하게 역사 왜곡/윤색하였기 때문에, 노부나가에게 가문 내의 갈등으로 빚어진 일의 책임을 떠넘겼다는 설도 있다. 애초에 노부야스에 대해 신뢰할 만한 사료가 매우 부족하다. 가장 신뢰할 만한 설명은 어머니 세나히메가 이마가와 가문의 사람[29]이었기 때문에 아들인 노부야스도 가문 내 이마가와 파벌의 수장이었고, 이마가와와 손을 끊으려는 이에야스와 분쟁이 발생해서 이에야스가 숙청해 놓고 오다의 강요로 돌렸다는 설.
- 아케치 미츠히데의 어머니가 하타노 하루미치의 가솔과 교환으로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적장의 가솔을 몰살해 버렸고, 결과적으로 미츠히데의 어머니를 끔찍하게 죽게 만들어 격노한 미츠히데가 모반을 꾸미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후일 에도 시대의 창작으로 밝혀졌다.
- 이세 나가시마의 잇코 잇키 세력이 항복했는데, 항복을 받아주는 척 하고 사격을 가해 대량학살했다는 설이 있다. 이쪽 역시 분명치는 않은데, 광신도 집단인 잇코 잇키의 특성상 항복해놓고 언제든 다시 봉기할 수 있는 불안요소이고, 항복 과정에서 오해나 잇코 신도에 의한 무력 저항이 있었다고도 한다. 또한 잇코 잇키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오다 가문의 친족을 포함한 엄청난 수의 오다 군이 전사했고 나가시마 신도는 한번 배신해서 오다 가문의 사람을 살해했었기 때문에 항복을 고의로 받지 않아도 전혀 지나친 일은 아니었다.
5. 인품 ¶
예수회 선교사로 "일본사"를 저술해 당시 다이묘들의 기록을 자세히 남긴 프로이스에 의하면
"목소리가 높고 날카롭다. 상당히 격한 성미인 것 같지만 평소에는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부하의 간언에는 거의 따르지 않거나 또는 아예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비밀리에 혼자서 결재한다. 모든 부하들에게 이상할 정도로 경외를 받고 있다. 몹시 거만하여, 일본의 모든 제후들을 자기 부하라도 되는 것처럼 깔아보고 얘기한다. 사법[30] 문제에 있어서는 꽤나 엄격하고, 가끔씩 자비나 의로움이 돋보이는 일을 한다. 일단은 법화종을 신봉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은 신이나 부처, 이외 어떤 신앙이나 의식도 믿지 않는다. 유럽의 절대군주처럼 행동하며, 모두들 그런 행동에 공포를 느끼고 복종한다."라고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성격이 급하고 거만하다고는 하나 후대에 알려진 잔혹하다는 이미지와 달리, 그 근거는 대부분 창작되었거나 당시의 상식으로는 그닥 잔혹하다 욕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불교세력에 대한 탄압이 당시 사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불교도들을 자극해서 잔혹한 노부나가의 이미지가 유포되었고, 후일의 에도 시대 군담 등에서 적극적으로 그 설을 채용하여 노부나가의 캐릭터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부나가는 가족을 몹시 아낀 것으로 알려졌다. 반란을 획책한 노부유키를 제외하면[31] 동생들을 매우 아꼈고 주변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도 동생이나 친족들은 항상 안전한 후방에 배치시켰다. 그리고 많은 다이묘들이 자신의 누이나 딸들을 정략결혼의 도구로 이용한 것에 비하면 노부나가는 딱 두 번(...) 그랬을 뿐이다. 그것조차 오이치는 오다 가에게 매우 중요한 동맹 관계인 아자이 나가마사와 결혼시켰고, 나머지 한 경우도 상대방은 맹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남이었다. 나머지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귀족인 공가나 아니면 자신의 가신 중에서 꽤 괜찮은 자를 골라서 배필로 삼았다. 특히 딸들은 시집가서도 남편에게 사랑받으며 좋은 대접을 받은 인물이 많아서 인물을 잘 가려내어 딸들을 귀하게 대접할 공처가좋은 남편감을 사위로 골랐다고 할 수 있다.[32]
또한 인재를 씀에 있어서는 신분을 차별하지 않았다. 자칭 아시가루의 아들이지만 실제로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는 히데요시, 또 닌자설이 있을 만큼 정체모를 타키가와 카즈마스, 더구나 외국인 노예 중에서 쓸모있는 자들을 골라서 해방시킨 다음 신분을 사무라이로 승격시킨 후 부하로 삼기까지 했다. 개중에는 흑인도 있었는데(야스케 항목 참조)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었을 때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붙잡혀 임관을 권고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측은하게 여긴 미츠히데는 그를 풀어주었는데 그 이후의 행방은 알 수가 없다. 단 부하의 간언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후다이[33] 까지도 무능을 이유로 가차없이 숙청하는 등 부하들에게 가혹한 면이 있었고 의심이 많았으며, 일부 기록에 의하면 부하를 마구 두들겨패는 등 가까이서 섬기는 신하를 인격적으로 모욕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런 탓에 전국시대의 다이묘 중에서도 상당히 부하의 반란이나 동맹군의 배반으로 고생을 자주 한 편[34] 이고 결국 반란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런가 하면 인간미를 보일 때는 한없이 자상한 모습을 보였다. 인질로 삼아놓은 구로다 요시타카의 아들(구로다 나가마사)을 요시타카가 반란군을 설득하러 갔다가 사라졌는데, 이것을 요시타카의 배반으로 생각하고 그 아들을 처형하라 명령했었다. 이후 요시타카가 배반한 게 아니라 갇혀 있었을 뿐이라는 게 드러났을 때는 자신의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고 미안해 어쩔 줄 몰라했고, 이후 실은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몹시 기뻐했다고 하는 인간적인 면도 있었다. 또 히데요시의 정실인 네네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호색한인 히데요시의 책임일 수도 있다)로 히데요시가 네네를 홀대하자 히데요시를 몹시 꾸짖고는 네네에게 위로의 편지를 썼다.
또한 신빙성이 낮은 개인적 무용담이 전해지는 여타 다이묘들과 달리 노부나가는 스스로 전선에 서서 싸운 적도 많고,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일꾼에게 시킬 법한 일들에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인 사료가 많았던 것도 특징이다. 아사쿠라 가의 본거지인 이치죠가다니 성을 공격할 때는 격전지에 나가서 분투했으며, 사이토 도산을 구원하기 위해 출격했던 나가라가와 전투에서는 가장 위험한 보직 중 하나이던 신가리[35]를 스스로 맡기까지 했다. 또한 혼간지와의 싸움에서 퇴각하던 중 강물에 막혀 부대가 퇴각하지 못하자 직접 강가를 정찰하여 수심이 얕은 곳을 찾아내 병사들을 도강시켜 퇴각한 적도 있고, 이외에 귀한 손님이 오면 다이묘인 노부나가가 스스로 상을 나른다던가 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다고도 하며, 짐의 무게를 두고 짐꾼들이 말싸움을 벌이자 스스로 말에서 내려서 짐을 들어보고 무게를 측정했다고도 전한다. 허세를 부리면서도 안전한 곳에 빠져 있기 십상이던 당시 무장들과 달리 상당히 모범을 보이는 무장이었단 얘기. 그래서 오다에 원한을 가진 닌자에게 조총으로 저격당할 뻔한 적도 있다.
또 몹시 미형이라 젊은 시절에는 여자하고 착각될 정도였다는데 이걸 단순히 우스갯소리라고 볼 수 없는 것이 오다 가는 원래 미형을 많이 배출하는 집안이다. 노부나가의 사촌 중엔 걸어다니면 주변의 남자들까지 하악하악할 정도의 미형이 있었고 오다 가가 몰락한 다음에도 오다 가의 여자들은 다이묘들이 다들 서로 못데려가서 안달이었다. 오이치만 해도, 남아있는 인물화를 보면 당시 일본화 화풍을 참작해도 상당한 미인이라는 평.[36][37]
의외로 부하들에게는 냉혹하고 무시무시한 주인이었지만 가중의 가신의 부인들을 포함한 여성과 외부 인사들에게는 정중하고 예의바른 태도로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아내인 네네 등에게 남긴 편지를 보면 세세한 곳까지 신경쓰는 섬세함과 여성을 대하는 정중한 태도, 최고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도 아닌 부하의 아내에게까지 지극히 예의 바른 문장을 쓰는 점에 놀라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당신은 예전보다 더 아름다워졌소이다. 저 대머리 원숭이(히데요시)가 지금 당신에게 이런저런 불만을 늘어놓는 것 같지만, 이는 언어도단이오. 당신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 없다는 건 다들 알고 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기를 바라며, 남편이 바람 핀다고 질투하지 말고 무가의 여식답게 의연하기 바라오. 이 편지는 원숭이에게도 보여주시오.
한 마디로 이 냉혹하다 알려져 있는 남자가 부하의 가정 불화에 자상하게 상담하는 내용의 편지를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단 얘기.
6. 능력 ¶
오다 노부나가는 전형적인 센고쿠 다이묘다. 아버지 노부히데는 오다 가문을 통일했지만 방계였기 때문에 집안에 적을 많이 만들어둔 상태로 죽었고 가독 계승 당시 노부나가는 인망이 없었다. 그런 불리한 조건에서 오다라는 약소 세력을 전국통일 목전에까지 이끌어낸 대단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39] 이렇게 지방의 한 소규모 다이묘에서 천하인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보니 그 능력은 대단히 비범하게 평가된다.
노부나가의 성격이 급하고 잔혹하다고 알려져있지만, 실제 그의 전략 및 전술은 매우 신중한 편이었다. 자신에게 계속 시비를 거는 타케다 신겐에게 성급히 맞서싸우지 않고 끝까지 외교적 방책을 찾았을 정도. 그러다가 신겐이 죽은 뒤에 벌어진 나가시노 전투의 승리로 사실상 완전한 우위에 서게된다. 일반적인 다이묘라면 군세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다케다를 바로 조지러 갔을테지만 일단은 다시 때를 기다렸다. 그 후 동안 타케다는 경제적[40],외교적[41]인 실책으로 자멸에 가까운 지경에 이를 때가 되자 그제서야 타케다에 총공세를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나가시노 전투의 승리 후 7년 동안의 기다림 끝에 [42] 타케다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호죠가 아군이 되었으며 그리고 우에스기는 내분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그야말로 관동공략을 위한 최적의 상황으로 나타났다. 이런점을 봤을때 몇십수 앞을 내다보는 참을성은 가히 경이롭다.
다만 노부나가의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당대 최고라고 보기는 어렵다. 흔히 노부나가보다 타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켄신을 높게 보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나 노부나가 공기 및 갑양군감 같은 역사적 사료에도 노부나가가 직접 군을 이끌었다가 패퇴하는 경우가 기술되어있다(주로 타케다 군의 무장에게 패퇴). 허나 노부나가의 전술 능력이 비록 당대 최고는 아닐지는 몰라도, 충분히 비범한 건 사실이다. 최고 지휘관의 몸으로 직접 말을 타고 선두에 달려 적을 격퇴한 적도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오케하자마 전투이며, 아사쿠라 가문을 멸문시킬 때도 직접 선두에서 말을 몰았다.
노부나가의 진정한 장점은 전술보다는 전략, 야전보다는 정치력에 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외국과의 무역, 라쿠이치라쿠자(규제 없는 자유시장), 다른 다이묘들에겐 쓸모없다 여겨졌으나 총포를 독점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카이를 독점한것, 쇼군을 이용한 외교전 등 그의 다채로운 전략은 괄목할 만 하다. 이러한 전략이 비록 노부나가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지만(당장 노부나가의 장인인 사이토 도산도 이러한 전략을 구사했다), 하나의 세력을 이끄는 총 책임자로서의 능력은 확실히 뛰어났다. 오다 군이 꽤 큰 손실을 입고 패전한 적은 가끔 있지만[43], 항상 적보다 많은 병사를 이끌 수 있었다는 것은 전략적/정치적인 능력이 전술적인 실패를 언제나 메꿀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44]
노부나가의 용인술은 매우 파격적인 편이다. 잔혹하고 용서가 없다는 이미지와는 달리,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배신자를 용서한 적도 많다. 다만 근무에 태만하고 별로 쓸모가 없는 인물이라 생각되면 아무리 중신이라고 해도 내쳐버렸다. 굉장히 실리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부하들 입장에선 언제 내쳐질지 몰라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노부나가의 이러한 용인술이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또한 노부나가는 매우 근면한 편이었다. 그 자신이 워낙 건강한 체질(사냥과 말달리기를 통해 늘 체력을 단련했다)이어서 가능했겠지만, 가신들 중에서도 노부나가의 근면함에 따라올 수 있는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아케치 미츠히데 정도였다. 어느정도 근면했느냐 하면, 타 가문에 보내는 의례품들을 스스로 일일이 검사했을 정도. 노부나가의 지위를 생각하면 이건 근면한 정도가 아니라 깐깐한 수준이었다.
다만 노부나가는 자기 자신이 워낙 근면하다보니 부하가 조금 태만하다 싶으면 곧장 벌을 내렸다. 더욱이 짬밥되는 노신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기에(대표적인 예가 사쿠마 노부모리),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근면한 자들은 오히려 출세할 기회가 많아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노부나가의 근면함을 따라올 자는 드물었다)의 사람들은 노부나가를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었다. 현대의 한 연구에서 오히려 현대인보다 노동시간이 길지 않았다고 할 정도이던 당시에 이런 일중독자가 다이묘였으니 이 점도 반감을 살 하나의 요소였는지 모른다.
종합해서, 뛰어난 전략 능력과 결코 태만을 용서치 않는 근면함 등이 노부나가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노부나가의 이러한 장점이 기업 경영자의 마인드에 적합하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21세기의 기업 경영을 전국시대 전쟁과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일본에도 "노부나가의 경영 비결!" 같은 책들은 굉장히 흔하고, 마케팅의 일환이긴 하지만 삼성전자 사장이 임원들에게 대망을 읽으라고 권했다고 할 정도로 혁신이 중요한 현대에 이 혁신적이었던 남자의 조직 경영법은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일본의 비효율적인 거대 조직이나 복지부동의 관료조직을 비판할 때 오래된 전통이라도 비효율적이라면 가차없이 개혁하던 노부나가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조직 몸집 줄이기가 중요한 불황이라서 후다이도 서슴지 않고 정리해고를 했던 남자의 경영법이 주목받는지도 모른다. 을은 쳐내버리고 가라!
이외에 노부나가가 마치 잘 안 쓰이던 조총에 눈독을 들인 첫 다이묘라도 되는 양 언급되고 특히 그 유명한 3단철포 설이 널리 퍼져 있는데, 노부나가 이전부터 이미 조총은 전장의 주력 무기 중 하나였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엄청난 경제력과 지역적 유리함, 쇼군을 이용한 정치적 술수로 사카이 지방을 지배하여 화약을 독점하는 것을 바탕으로 수천정에 이르는 철포부대와 그에 걸맞는 다량의 화약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많아봐야 수백정 갖고있었고 화약도 부족해 사격연습도 못하던 다른 다이묘들은 명함도 못내밀었다.
전국 중기 이후에 조총으로 인한 사상률은 40퍼센트 정도였으며, 그 외에 활이나 투석에 의한 사상률도 높은 편이었다.(사상률은 자료출처가 불분명하므로 추가바람. 여기있다. 참고로 활의 초월적 살상력을 볼수있다.http://halmi.egloos.com/1879901 참고로 도검류에 의한 사상자는 3퍼센트 정도) 참고로 투석은 다케다쪽이 자주 쓰는 공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애초에 산악지역이라 손만 뻗으면 돌이있으니.. 3단 철포설이 나오는 것은 오제 호안이 쓴 '신장기'에 철포를 교대로 쏘게 했다는 문장이 한 줄 나온 이후에 널리 받아들여졌는데 신장기는 에도 초기에 나온 군기물(일종의 군담소설)이다. 이를 메이지 시대에 '일본전사'를 편찬할 때 그대로 수록하였으며, 이후 영화, 소설 등을 통해 통설처럼 굳어진 것이다.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오타 규이치가 쓴 '신장공기'[45]에는 3단 철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웃나라였던 중국, 조선의 기록을 보아도 연속사격술은 통상적인 전법으로서 활용되었던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오다 노부나가 시기부터 사용된 전법이었는지는 보다 자세한 검증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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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상화 원본은 분실되고 사진만 남아있다. 그림과 사진 모두 메이지 시대 이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 [2] 요코야마 미츠테루가 그린 오다 노부나가 만화에서는 위 문장을 '참외 모양'이라고 설명하였다. 뜻은 '참외 씨앗처럼 자손을 번창시키라'는 뜻으로 나왔다.
- [3] 아스퍼거 증후군이었다는 설도 있다.일본어 자료
- [4] 극적인 재미를 위해 과장·왜곡된 부분이 많은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다.
- [5] 흔히 이 노부나가의 동생 이름은 '오다 노부유키(織田信行)'라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이 이름을 '자기 손으로' 쓴 적은 없다고 한다. 본인이 쓴 문서에는 노부카츠(信勝), 타츠나리(達成), 노부나리(信成) 등의 이름을 썼다고 한다.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예전작에서는 노부유키라는 이름을 쓰다가 최근작에서 노부카츠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노부유키라는 이름을 안 쓸 때에는 노부카츠란 이름이 제일 많이 쓰인다.
- [6] 이러한 신겐과 겐신의 급사 때문에 전국시대 행운아.라고도 불린다.
- [7] 이런 설명이 흔하긴 하지만, 완전히 신뢰하긴 어렵다. 원군대장이 무조건 현지 사령관보다 낮은 지위인가? 심지어 노부나가의 장자로 오다가의 2인자였던 노부타다도 대모리전에 히데요시를 도우러 출병한 적이 있지만 이것이 히데요시가 노부타다보다 높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원군대장이 현지사령관에게 배속되는지, 아니면 독립적으로 군세를 이끄는지, 오히려 현지사령관을 휘하에 배속시키고 싸우는지는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이다.
- [8]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했는지는 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보통 미츠히데는 천태종 신자라고 여겨지는데, 천태종의 총본산인 히에이잔은 이미 한참 전에 미츠히데 본인까지 합세한 군세로 파괴했었기 때문에 이제와 새삼 그것을 원한삼았다고 보기는 좀 어려울 수 있다;;
- [9] 閱兵 :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자신의 부대를 검사받음. 또는 전쟁 출진 전 사령관 앞에 군대를 사열시킨다는 의미. 閱(열)은 검사하다, 검열하다, 군대를 사열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다.
- [10] 이 말은 에도시대의 역사가 라이 산요(頼山陽)의 일본외사(日本外史)에서 처음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실은 이 말은 실제로 언급되지 않았으며, 미츠히데의 진짜 의도를 파악한 가신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 [11] 새벽 4시경으로 추정된다.
- [12] 中將. 첫째아들인 노부타다를 말한다(...) 즉 처음에는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나 의심했다는 얘기다.
- [13] 도쿠가와 가신 오쿠보 가문의 가훈으로 내려온 책이다. 당연히 사서로 보긴 어렵고, 그냥 신빙성 낮은 사료 중 하나다.
- [14] 미츠히데의 모반 소식을 들은 노부나가는 "어쩔 수 없군(是非に及ばず)"이라 말했다고 한다. 혼노지의 변과 관련된 명대사 중 하나로 지금도 일본의 다른 창작물에서는 등장인물이 노부나가의 이 표현을 쓰는 경우가 간혹 보인다. 그런데 노부나가가 아사쿠라 가를 공격하다가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배신을 당해 철수한 가네가사키 퇴각 때에도 이 말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 [15] 교토시 나카교구 니죠도오리 호리카와니시이리니죠죠마치(京都市中京区二条通堀川西入二条城町)에 있었던 일왕가의 이궁離宮.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니죠성(二条城)으로 개축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다.
- [16] 신겐이 교토로 진격을 개시했을 때 노부나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것은 주력이 아자이, 아사쿠라 등에게 묶여 있어서 등뒤가 텅 비어있었기 때문일 뿐, 당시 이미 노부나가의 세력은 신겐의 2배 이상이었으므로 "신겐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노부나가를 짓밟을 뻔했다"는 일반의 인식은 사실보다 과장된 감이 있다. 실제로 아자이와 아사쿠라를 정리해 배후의 위협이 없어지고 명장 신겐이 죽자 그 대군이라던 신겐의 군대는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에게 손쉽게 격파당한다.
- [17] 각각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거성 이름. 인색한 이에야스와 달리 두 다이묘가 모두 예술의 후원자였기 때문에 주로 문화/예술사를 설명할 때 이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 [18] 오다와 도요토미의 앞글자를 떼어 음독한 것.
- [19] 참고로 경관의 이름이 진짜 아케치인지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루머에 불과하다.
- [20] 오늘날의 일본어 표현으로는 '소-카(そうか)'
- [21] 어느 정도인가 하면 예수회 선교사인 프로이스 면전에서 무신론을 당당하게 설파할 정도였다. 이러니 프로이스가 노부나가를 열심히 비판하는게 당연하지…….
- [22] 1570년 6월 28일 아네가와姉川에서 오다 노부나가군이 양동작전으로 아자이淺井, 아사쿠라朝倉 연합군을 괴멸시킨 전투
- [23] 만화 히카루의 바둑의 번외편에 이 야사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 [24] 그러나 나중에 한 번 배신했다가 귀순한 가신들 중에서 무능하다고 찍힌 사람들을 서슴 없이 추방했다. 하야시 히데사다나 사쿠마 노부모리, 이소노 카즈마사 등.
- [25] 효우게모노에도 같은 이유로
스팽킹엉덩이를 얻어맞는 시녀들이 나온다.(몇 화에서 나오는지 추가바람) 노부나가가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 최전선도 아닌데 시녀를 뺑끼 좀 쳤다고 몰살할 리도 없고, 그 정도 선의 처벌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 [26] 그런데 살해되었다는 그 주지는 문제의 절에 혼노지의 변 이후에도 멀쩡히 잘 있었다고 한다. 어?
- [27] 이하 전문. 텐쇼 2년(1574년) 1월 1일, 교토 및 주변 지방의 다이묘, 무장들이 노부나가에게 인사하기 위해 기후에 출사하였다. 각각 삼헌의 예법(안주를 세 번 바꾸며 각각 술을 세 번 권하는 중세 일본의 술자리 예법)으로 환대하는 주연이 열렸다. 이들이 물러난 후, 이번에는 노부나가의 측근만으로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는 진묘한 안주를 가지고 주연이 열렸다. 작년 북국에서 목을 벤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목, 아자이 히사마사의 목, 아자이 나가마사의 목, 이상 셋을 옻칠로 굳힌 후 금칠한 것을 그릇에 놓고, 이걸을 바라보며 주연을 연 것이다. 모두가 노래를 읊으며 마음껏 즐겼다. 뜻대로 모든 것이 순조로이 흘러가 노부나가는 매우 기뻐하였다.
- [28]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사실 혼간지 겐뇨의 아내는 신겐의 처 산죠노카타의 동생이었다. 배신을 일삼는 마키아벨리스트였던 신겐이 갑자기 정의를 운운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셈.
- [29] 그냥 가문의 일원도 아니고 무려 이마가와 요시모토 본인의 조카였다! 그래서 간혹 이에야스 숭배물에서 등장하는 요시모토의 이에야스 학대론은 전혀 근거가 없는 창작에 불과하다. 조카를 시집보내고 가문 내에서 가장 중요한 책사인 타이겐 셋사이를 가정교사로 앉혔기 때문에 오히려 매우 우대받고 영재교육을 받았다는 게 옳다. 다만 타이겐 셋사이가 이에야스의 교육계였다는 것 역시 진위여부가 불분명한데, 이는 셋사이가 이마가와씨의 본거지인 슨푸를 떠나 있었던 기간과 이에야스가 이마가와씨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기간이 겹치기 때문이다.
- [30] 원문은 "정의". justice가 영어에서 어떤 의미로 쓰이고 있는가 생각해보자.
- [31] 사실 이 노부유키도 첫 번째 반란을 꾸몄을 때는 용서해 줬다. 이건 당시 상식으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관대한 처사였는데, 문제는 이 노부유키가 정신을 못 차리고 또 반란을 꾸민 것. 이 때만큼은 용서받지 못하고 끔살당했다.
- [32] 오이치도 아자이 나가마사가 죽자 이후 가신인 시바타 카츠이에에게 개가시켰다.
- [33] 대대로 그 가문을 섬겨온 집안.
- [34] 시바타 카츠이에, 노부유키(친동생), 아라키 무라시게, 마츠나가 히사히데, 아사이 나가마사,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 등등...
- [35] 殿. 후군이라고도 번역된다. 아군이 후퇴할 때 뒤에 남아 적의 발을 묶는 보직으로, 패전의 경우는 자살행위나 다름없을 만큼 위험하다. 그냥 싸워도 졌는데, 패배하여 얼마 남지 않은 병력을 두 부대로 쪼개, 본대가 도망칠 수 있도록 적을 막는 거다. 나는 죽을 테니, 아군이라도 도망쳐라는 것
- [36] 미모 때문만은 아니다. 마왕의 이미지 때문에 간과하기 쉬우나 노부나가의 대에 전국시대의 사실상 패자가 된 가문이며, 노부나가 사후의 패자인 히데요시도 무시할 수 없었던 오다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하는 쪽이 이상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요도기미를 후처로 들인 것도 당연히 정치적 정통성을 얻으려는 의도가 있었을 수밖에 없다.
- [37]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시집간 오다 가의 여성들이 남편과 금슬이 좋았다는 것과는 별개인 만큼 미모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오다 가가 패자가 되기 이전에 아자이 나가마사나 다케다 카츠요리가 오다 가의 여성을 아내로 맞아는데 금슬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 [38] 그래서 그 당시 지식인 계층이라 할 수 있는 승려나 조정의 귀족들을 고용해 곁에 두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마에다 케이지가 많은 다이묘에게서 등용 제의를 받은 것도 그러한 당대 지식인층과 교류가 많았던 것이 한 원인이다.
- [39] 많은 센고쿠 다이묘가 오다 정도의 약소 세력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지만, 오다 정도로 조직체계를 유지하며 발전한 예는 없다. 우에스기는 카게카츠 대에 이르러서야 자리를 잡았고, 다케다는 급속한 발전에 내실이 따라오지 못해 단결이 약했던 가신단이 신겐 사후 와해되었고 결국 멸망했다.
- [40] 오다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성의 증축과 요새의 개보수를 했지만 경제적으로 취약했기 때문에 무리한 징세를 행했고 이때문에 토호나 영민들로부터 민심을 잃었다.
- [41] 우에스기 가문에 후계자 문제로 내란이 발생했을때 앞에서 언급한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금을 받고 가케가츠를 도왔다. 이 때문에 호죠 가문 출신으로 우에스기 켄신의 양자가 되서 가케가츠와 싸웠던 가케토라가 죽게 되고 동맹관계였던 호죠는 적이 되어버린다.
- [42] 사실 배후에서 오다의 책략이 여러번 개입했다고 한다.
- [43] 일례로 그닥 유명하진 않지만, 오다 군과 우에스기 군이 격돌한 나나오 성 전투는 전국시대 최다 사상자를 낸 참패로 끝났다. 오다 측의 지휘관은 시바타 카츠이에.
- [44] 이래서인지 소설 '대망'등의 오다 가는 당시의 국제 정세에서 소련군에 비유되는 경우가 있었다.
- [45] 이 신장공기는 노부나가의 일생을 서술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료이다. 노부나가의 삶은 대개 여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많이 묘사되는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