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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인문학-13-다산을 정리하며
올해로 다산이 태어난지 253년, 돌아가신지 180년,
다산은 다산 탄신 250주년인 2012년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세계가 인정한 훌륭한 인물이라는 뜻으로 대한민국의 큰 자랑이다.
8대 옥당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외가 처가 모두 훌륭한 집안이다. 특히 그의 외가는 고산 윤선도의 명문 집안이다. 그가 태어난 곳 또한 산수가 수려하고 강이 있는 풍광의 아름다움을 갖춘 곳이다 공부는 아버지 밑에서 했다. 그리고 16세 때 성호 이익의 유고를 보고 실학에 눈을 뜨게 된다.
다산의 일생에서는 가족이나 가족 주변인들의 많은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특이하다 9세 때 어머니 해남 윤씨가 죽게 된다. 9살의 감수성 많을 때 어머니(공재 윤두서의 손녀)의 죽음은 그에게 많은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 서모와 형수 아래서 자라게 되어 어느 정도의 어머니에 대한 상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15세에 결혼하여 20세에 첫 딸을 낳았으나 다셋 만에 죽게 된다. 슬하에 9남2녀를 낳아 6남1녀의 자식에 대한 사별의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전쟁도 아니고, 특별한 질병이 돈 기록도 없는데 너무나 많은 자식의 죽음을 당한 다산의 마음은 아버지로서 무척이나 애달프고 괴로웠슴은 분명 했을 것이다. 죽은 자식의 애달픔에 대한 자세한 기록 들은 많지 않다. 유배 2년차에 네 살배기 농아가 죽었다는 비보를 보고 농아의 죽음을 슬프하며 먼저간 자식들에 대한 기록들이 보인다. 1802년 12월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농아가 죽고 나서 보낸 편지가 애달프다. “너희들 아래로 무려 사네 아이 네명과 계집애 하나를 잃었다. 그 중 하나는 낳은지 열흘 남짓 할 때 죽어서 그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겠고, 나머지 세 아이는 모두 세 살때였지 품에 안겨서 한참 재롱을 피우다 죽었다. 이 세 놈들은 나와 너의 어미가 있을 때 죽어서 그래도 운명이라 생각 햇는 데 이번의 농아의 죽음은 내 간장을 후벼 파는 큰 슬픔이 북받치는 구나. 내 마음이 이를진데 너희 어미의 마음은 어떠하겠느냐. 엄마를 잘 위료해 드려라“ 농아는 서울에서 유배를 떠나 올 때 엄마의 손을 잡고 아무 것도 무른채 손을 흔들며 다산과 서울에서 작별 했던 그 아들 이었다.
31살에 아버지가 진주목사로 재임중 임지에서 별세하게 되고, 손위형 약종과의 사별은 큰 충격 이었을 것이다. 이때는 다산도 국문 중이라 슬프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형님 약종은 천주교를 믿었다고 당당히 얘기하고 국문장에서 장엄한 죽음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1년 뒤 형 약종이 순교한 그 국문장에서 형의 큰 아들 청상이 순교 되고 형수와 조카 차상, 질녀 정혜는1839년 다산이 죽고 3년후 “기해박해” 때 모두 순교 된다 흑산도 유배 된 약전 형님과의 사별은 그가 해배 되기 2년 전에 돌아가시게 된다. 학초는 약전 형의 아들로 학문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 다산의 후계자로 삼고자하였으나 강진 유배시에 17세에 요절했다는 부음을 받게 된다. 일생 중 다산의 일생에서 가족과 가족 주변에 이렇게 많은 죽음의 사건도, 인생역정에 흔치 않을 것이다. 먼 친척으로 이승훈은 다산의 매형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형 약전과 함께 참수 당한다. 이 많은 가족이나 친척의 죽음에서 가장 슬픈 죽음은 형 약전과 매형 이승훈의 죽음이 아니었을까 생각 된다. 같은 국문장에서 국문을 받고 형은 당당히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장열히 순교하게 되지만, 형의 시신도 거두지 못하고 손위 형 약종과 함께 유배 길에 오른 다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얼마 전만 하여도 정조의 총애를 받는 신하로서 무언가 나라를 위하여 큰일을 할 수 있을 다산 이였는데 노론벽파의 당쟁에 휘말려 천주교와 끊은지 오래 되었지만 매형과 형이 천주교의 신자라는 연좌에 묶여서 고향과 800여리나 떨어진 강진으로 유배 길에 향하는 그의 마음은 상상으로도 이해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과 아픔을 맛보았을 것이다.
다산과 천주교는 숙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벽, 이승훈, 황사영 등은 친인척으로 자연스럽게 다산과 형제들은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천주교는 는 초창기엔 이단으로 몰리지 않았다. 반대당파를 제거하는데 명분이 천주교 밖에 없었기에 천주교룰 빌미로 많은 사람이 박해, 사사, 유배 되었다.:황사영 백서“사건에서 만도 300여명이 죽음을 당했다.
11월 말 강진은 가을걷이가 거의 끝나고 가끔 겨울바람이 매서울 때이다. 형님과 나주 율정점에서 생애 마지막 밤을 보내고 형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왔지만 그가 갈 곳은 없었다.
강진에서 그를 맞아 준 사람은 주막집 노파였다. 그 노파의 주막집 골방에서 4년을 보낸다. 아전들의 자녀를 공부 가르치며 첫 유배지에서의 설움을 달래며 국문 형장에서 상한 몸을 추스리게 된다.1년만에 2번이나 국문장에서 재판을 받아서니 다산의 몸은 많이 상해있었을 것이다. 주막집에서 가르친 제자가 4명인데 그 중 마지막 까지 남은 제자는 황상과 이청으로 다산을 많이 도운 18제자에 속한다. 다산은 그들이 아전들의 자녀였기에 과거에 응시 할 수 없음을 알고 황상은 시를 가르쳐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훌륭한 시인으로 길렀다.. 황상은 스승을 잘 섬기며 의리를 지켰다. 돌아가시기 전에 황상이 다산의 고향 마재를 찾았다. 몇 일 머물다 다시 강진으로 오게 되는데 떠나올 때 스승께서 마지막으로 준 선물은 “규장전문 1권” 붓 한 자루, 먹 한 정, 부채 한 개, 여비 돈 두냥이었다. 작별 인사를 하고 마재를 떠난 이틀 후 강진으로 돌아가는 중에 다산이 죽었다는 부음을 듣고 다시 마재로 돌아와 스승의 장례를 도맡아 치루게 된다. 이청은 사의재에 이어 보은 산방에서 다산이 보낸 그후 2년간 자기 집에서 스승을 모셨다. 혜장선사가 마련해준 보은산방을 떠나 제자 집에 머물렀다는 것은 아마 보은산방이 여러 가지로 불편했을 수도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제자 집인들 편 할리 있었겠는가? 다시 10년간 지낸 다산초당은 귤동마을 윤관의 제의로 초막 정자에서 10년의 유배 생활은 안정적 생활이었을 것이다. 강진에서 8년이란 세월동안 많은 어려움도 겪었고, 지난 과거를 잊어며 현실을 잘 받아들여서 현실에 만족한 긍정적인 생각으로 보냈을 것으로 생각 된다. 특히나 귤동마을의 윤씨들의 많은 자녀들이 다산초당 서암 글방에 모아서 공부 가르치는 일에 큰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사람이 모이다 보면 도와주는 사람, 좋은 사람도 자연적으로 생기는 법이라. 특히나 자녀들이 다산 맡에서 글 공부를하고 학문적으로 깨어나며 성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것도 조정에서 큰 벼슬을 한 대학자이니 다산 밑에서 배우는 것만 하여도 많은 기대와 부모들의 자랑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강진에서 8년간 유배중 황상과 이청이란 두 제자를 키웠고 나머지 16제자는 다산 초당에서 키운 제자로 봐야 한다. 10년간 16명의 제자를 길렀다는 것은 다산의 가르침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18명의 제자를 정성으로 길렀기 때문에 다산은 그 많은 책을 저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 500여권의 책을 다산 혼자서 다 저술하기는 불가능 했다고 생각한다. 다산의 지도 아래 제자들이 쓰고 다산은 편집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최근에 “김정운”교수가 쓴 “에톨로지Aditology”라는 책에서 “창조는 편집이다”라는 글이 뜨 오른다. 아무턴 다산의 생각에 의해서 책이 만들어 진 것은 분명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다산의 평가에서 다산은 천년에 한명 태어날 수 있는 천재 인물로 꼽는다. 그 많은 훌륭한 저서들을 지도하여 쓸 수 있었던 힘은 우선 다산의 명철한 역사 인식과 조정에서 정조로 부터 나라 다스리는 철학의 학습. 암행어사나, 곡성 부사로서의 경험 등등이 밑바탕이 되었다고 보여 진다. 또한 유배지에서의 죄인이라는 한 풀이, 강진 다산초당의 자연적인 풍치의 아름다움, 차 생활 등이 생태적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경제적인 도움은 후일 사돈으로 맺어지는 윤서유의 도움이 많았을 것이다. 그외 귤동마을 윤단의 집안의 경제적인 도움도 컷을 것으로 보인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난 후 말을 타고 백련사 근처로 다니면서 술과 음식을 마음껏 먹고 농막에서 낮잠을 자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고 하니 이른 경제적 도움은 사돈인 윤서유와 윤단 집안의 도움이었을 것이다. 윤단의 집안의 도움은 그 집안 자녀들을 가르치는 당당한 댓가였기에 다산 역시 조금도 마음의 꺼림낌 없이 경제적으로 도움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산을 공부 하면서 한 가지 의문이 풀리지 않았던 것은 18년 동안 유배 생활에서 예날 조정에 있던 여러 인맥을 통해서 유배에서 풀려 나올 수 있는 다방면의 노력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요즘의 시각으로는 이해 되지 않을 것 같다. 대부분 이름 있는 선비들은 유배 생활에서 당당하게 지내는 경우가 많았고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선비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선비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이다. 사약이 도착 하는 것을 미리 알고 목욕을 하고 깨끗한 한복으로 갈아 입고 사약을 기다리다가 사약이 왔을 때 사약을 앞에 놓고 긴 수엽을 꼬아서 입에 물었다. 부모로부터 물러 받은 수염까지 사약에 담글 수는 없지 라는 마지먹 유언을 남기며 영광 된 죽음을 받아들였다.
1816년 5월3일 유배15년차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천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는데 옳고 그름의 기준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에 관한 기준이다. 이 두 가지의 큰 기준에서 네 가지의 큰 등급을 말 할 수 있다. 옳음을 고수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단계이고, 둘째는 옳음을 고수하고 해를 입는 단계이다. 세 번째는 그름을 추종하고 이익을 얻는 단계이다. 가장 낮은 단계가 그름을 추종하고 해를 보는 단계이다 너는 네게 홍의호에게 편지를 해서 항복을 빌고 강준흠, 이기경에게 꼬리치며 동정을 받도록 애걸해 보라는 얘기를 했는데 이것은 앞서 말한 세 번째 등급을 택하는 것이다. 세 번 째 등급을 택하면 곧 네 번째 등급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 명약관화한데 무엇 때무에 내가 그 짓을 해야겠느냐. 내 운명을 고즈넉이 받아들이고 애걸 한다고 무슨 보탬이 되겠는냐. 강준흠, 이기경이 요직에 앉으면 반드시 나를 죽이고 말 것이다. 죽이려 한다 해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니 나는 절조를 지키며 이곳에서 조용히 글이나 쓰면서 살고 싶구나. 나는 꼭두각시가 아닌데 너는 무엇 때문에 나를 그들의 장단에 춤추게 하려는냐. 너 또한 부귀영화에 현혹되어 아버지를 업신여기고 있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 내가 살아서 고향 땅을 밟는 것도 운명이고 밟지 못하는 것도 운명일 것이다. 마음을 크게 먹고 세월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할 지니 다시는 이러쿵 저러쿵하지 말거라“
우리의 올 곧은 선비들는 유배 생활을를 보내면서 공통 된 생각은, 비록 죄인으로 유배를 와서 있지만, 정적이나 반대편에게 아부하거나 인맥을 통해 풀려 날 생각은 치욕으로 여기고 오직 절조를 지키며 당당하 유배 생활을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죽음 또한 두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광조, 김괼필 등이 그 대표적인 유배에서의 죽음이다..
유배에서 풀려나기 2년전에 “목민심서”를 완성하게 된다. 그리고 형님 약전이 흑산도에서 그 해에 돌아가신다. 무척 슬프하셨다. 지척에 두고도 16년간 한번도 만나지 못해서니, 그리고 유배지에서 돌아가셔서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흑산도 유배지에서 유리나라 최초로 바다 고기에 대한 자료를 그의 호를 붙여 “자산어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다산 본인이 유배의 몸이기에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다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기도 형님처럼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 할 운명에 처해 질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있지 않았을까?
1818년9월14일 다산은 유배 생활 18년 만에 풀려나게 된다. 다산을 공부하면서 다산과 18이라는 숫자가 인연의 숫자로 보인다. 유배 생활 18년, 18제자, 해배 되는 해도 1818년. 해배후 18년 만에 맞이한 죽음.
강진에서 40세의 한창 나이에 시작 된 유배가 57세의 비교적 건강한 몸으로 해배를 맞이하게 된다. 18년이란 긴 유배 생활을 끝내고 고향 마재로 향한다. 무엇 보다 책의 짐이 많았을 것이다. 홍임이란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아마 유배지에서 수발을 드는 후처를 둔 것 같다. 그 엄마와 함께 마재로 가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 온 다산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저술에 매진하여 그 다음해에 “흠흠선서”30권을 완성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지인들을 만나면서 유배지에서 정리한 책의 평가와 자기의 철학을 공유하면서 그의 다이 60세에 모든 저술을 끝내게 된다. 총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들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목민심서” “흠흠선서” “경세유포” 등이다.
고향에 돌아온 노후는 무척 행복한 생활이었다. 57세에 해배 되어 75세에 운명하게 되니 해배 이후 18년간의 노후를 고향 마재에서 보내게 된다. 조정에서 벼슬을 제수 받을 기회가 있었지만 서용보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용보와의 악연은 끝까지 따라다녔다.
1836년 2월22일 결혼 한지 60년이 되는 그날에 다산은 운명하게 된다. 회혼례를 축하 해주기 위해서 모인 친척들은 다산의 슬픈 죽음음 지켜보아야 했다.
정조와의 숙명적인 만남과 정조의 총애. 정조의 운명적인 죽음으로부터 시작 된 단산의 유배 생활 18년, 다산이 피 할 수 없었던 숙명적 천주교와의 만남. 다산 초당에서의 저술 활동,
이 모든 것은 다산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가 죽은 지 180년이 지난 지금, 다산은 우리 앞에 세계적인 인물로 다시 태어나고있다.
몇 일전 김영란 법이니 박원순 법으로 공직사회는 물론이거니와 언론 ,교육계 등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다산은 200년전에 “목민심서“에서 관(행정)은 관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섬기지 않는 공무원들의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100년도 못 되어 조선은 치욕적으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법 다산의 철학과 사상에 대해서 모든 군민은 특히 지도자는 본받아야 겠다.
다산은 열악한 유배지에서도 사람을 가르치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능력에 따라서 18명란 많은 제자를 가르쳐 “다산계”를 조직화시키고, 후일 다산계가 “다산학단”이 되어 조선 후기에 실학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산학단은 실학에 충실한 학문적 뿌리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생각을 초월하는 많은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미래의 불확실에 모두가 불안해한다. 또한 사회적인 병리현상이 치유 불가능 할 정도로 심각하다. 그 원인의 중심에 물질이라는 피 할수 없는 크다란 빙산이 우리 앞에 괴물처럼 놓여 있다.
이런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은 지도자와 지식인들이 무한 책임감을 느껴야하는데 주변을 돌아 보면 올 곧은 지식인도, 훌륭한 지도자도 잘보이지 않는다. 특히 20세기만 해도 지식의 권위는 학교, 특히 대학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대학 교수들의 지식의 권력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는 황우석 교수의 논문 사기사건 이후 교수들의 지식 권력은 무너져 버렸다. 또한 많은 정보와 지식이 그들이 발표하는 논문에서 얻는 것이 아니고 간단히 스마트 폰만 누르면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시대라 우리는 누구나 지식의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선생이 존경 받는 시대는 갔고, 지식을 잘 편집하고 잘 포장하여 잘 전달하는 지식편집자, 지식포장 전문가, 지식 전달자가 지식 권력을 누리는 시대로 급변하고 있다. 지금까지 지식 권력을 누렸던 교수, 선생들은 점점 설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그들의 지식의 권위와 권력자로서 그들의 프레임에 갖혀서 냉동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농담으로 “교수나 선생 3명을 부산으로 데려가는 것은 양 100마리를 몰고 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이시대의 지식인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는 말이다. 지식은 말장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산이 주장 한 것처럼 실학이 되어야 한다. 조선후기에 유학이란 지식이 팽배하여 사대부라는 계급 사회를 만들어 일하지 않고 학파나 따져서 분당을 만들고, 국민의 흡열귀가 되어 국민은 피폐하고 사대부라는 상위층 계급은, 장례 예 하나로 어떤 옷을 입어야하는 지를 놓고 귀양을 보내고 사약을 내리던 시대에 실학자들은 나라의 장래를 걱정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현실 학문인 서학 적 천주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어쩌면 이른 사회적 현상이 숙명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쟁을 일산던 정치인들은 역사를 퇴행시키고 실학자들을 죽이고 유배 보냈으니, 후일 조선이 망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라고밖에 달리 설명 할 방법이 없겠다..
다산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제자를 능력에 따라서 가르쳤다. 그 열악한 유배지의 환경에서도 실학중심으로 능력 중심으로 사람을 키웠다. 그가 쓴 목민심서에 자극받아 당쟁에 신물이 나고 피페해진 농민들이 들불처럼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다.
다산의 아픔의 치유는 저술과 제자 가르치는 일에 매진하였기에 치유 될 수 있엇을 것이다. 또한 그가 태아난 마재의 아름다운 풍광과 강과 산이 잘 어려져 어릴 때 무척이나 정서가 풍부한 아름다운 마을에서 보냈기에, 늘 친구와 사람을 좋아하고, 자연을 즐기며, 차를 마시면서 유배의 아픔을 달랬다고 보여 진다. 숲, 원예, 문학, 차를 즐기며 좋은 사람과 만나면서 18년이란 유배의 아픈 마음을 치유 했다고 믿는다.
새 봅이 되었다. 농업과 원예, 숲, 등 자연을 좋아하는 우리는 주변의 봄의 자연 환경 모두가 훌륭한 교과서로 우리 앞에 푸르게 펼쳐지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의 생테쥐베리는 “인간의 대지”라는 책의 서문에서 “대지는 책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더 넓은 봄의 대지로 나아가 자연의 스승인 농업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많은 실학을 배워 각자가 자연 지식의 높은 탑을 한층 한층 쌓아가도록 노력하길 바란다.
2015년 3월5일 대보름 새벽에
다산에 대한 치유 인문학을 끝내며 여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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