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물건보다 못한 것이니 애석하구나! ”15)라고 하여 함께 공부하더라도 서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기도 하였 다. 이는 자신의 공부를 확실하게 하고 나아가 주변에 있는 붕우들까지 변화시키는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렇게 모여서 강학한 곳으로는 仙査齋나 硏經書院이 대표적이다. 영모당통강제자록에는 강학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매월 초하루에 혹 연경서원에 모이기도 하고 혹 선사재에 모이기도 한 다. 성현의 잠계를 강당벽에 걸고 북쪽 벽아래에 스승의자리를 마련한다. 慕堂이 樂齋와 나란히 앉으면 생도들은 앞으로 나와 배례를 행하고, 이어서 삼면으로 나누어 서서 서로 향하여 읍례를 행하고 자리를 정하고 앉는다. 有司 가 큰 소리로 <白鹿洞規>와 <學校規範>을 한번 읽는다. 直月이 생도들의 선악을 적은 장부를 바치면 선자는 장려하고 악자는 경계하고 가르친다. 그 후에 생도들은 각기 읽은 책으로 進講하는데, 반드시 단정하게 손을 맞 잡고 곧게 앉을것이며, 서로 돌아보며 이야기 할 수 없다. 성현의 글과 史學이 아니면 강을 허락하지 않는다. 혹 연고가 있어 참석하지 못하게 되면 사유를 써서 유사에게 보고하여 스승이 알게 한다.16) 선사재는 개인의 서재가 아니고, 연경서원처럼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교육기관에 가까웠다. 특히 서사원이 많은 이용하였는데, 선사재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이를 중건한 사람이 서사원이었기 때문이다. 선사재에서의 강학에는 손처눌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5) 慕堂日記 上, 89쪽, “丹之所藏者, 赤必然之理也. 兩人獨同處, 而不能漸染薰陶者何也. 人不如物, 惜哉.” 16) (국역)영모당통강제자록(永慕堂通講弟子錄) 乙巳規約
1601년 부터 1614년 4월까지 선사재에서 강학한 날이 확인되는데, 예를 들어 1605년 3월에 7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정구를 모시고 강학하였다. 또 1613년 8월에 대구부사가 참석한 가운데 강학을 하기도 하였는데, 여기에 손처눌은 제자인 鄭好仁과 金善慶을 대동하고 참석하기도 하였다. 대구부사는 손처눌보다 늦게 도착하여 강학하는 모습을 종일토록 지켜 보기도 하였다. 17) 그런데 위의 기록을 보면 강학을 하는 데는 강학의 규정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의 강학 규정은 손처눌이 혼자 만든 것은 아니고 서사원과 함께 강학을 하며 그의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았다. 公이 항상 敎化가 밝지 못함이 곧 講學이 정미롭게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탄하면서 강학을 진작시킬 방법을 생각하였다. 을사년(1605) 겨울에 고을의 벗과 講學會의 규약을 의논하였는데, 그 가운데 節目과 課程은 모두 寒岡 鄭先生에게 여쭈었다. 강론한 책은 朱子書, 退溪集, 心經, 近 思錄, 小學 등이었고 經傳 같은 경우는 자원하는 사람에 따라 일과를 정하고 조약을 엄하게 하여 가르쳤다. 공이 제자들을 인도하고 가르쳐 성취시키고자 하는 아름다운 뜻이 지극했으나, 결말을 이루지 못했으니, 식견 있는 자들이 지금까지 그것을 애통해하며 한탄하고 있다.18) 손처눌이 서사원에 관해 적은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서사원과 긴밀하게 의논하며 스승인 정구의 의견까지 구하여 강학의 규정을 마련한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서사원은 <仙査精舍學規>를 지었는데, 이것은 율곡 이이의 <隱屛精舍學規>와 유사하였으며, 손처눌도 여기에서 영향을 받아 17) 慕堂日記 上, 487쪽 18) 慕堂集 권5, 樂齋徐公行錄
<을사규약>을 만들기도 하였다.19) 이러한 강학의 규정을 만들게 되었던 것은 손처눌이 1600년 2월에 서사원, 곽재겸 등과 함께 향교에 모여 <學校模範>을 강학한 것이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지하다시피 <학교모범>은 李珥(1536~ 1584)가 지어서 당시 국왕인 宣祖에게 올린 글이다. 이이가 경연에서 선비의 풍습이 가볍고 구차하며, 스승의 도리도 끊어진 것에 대해 언급하자, 선조가 이에 대한 규범을 事目으로 지어올리라고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서사원의 문집인 낙재집에는 <학교모범>.<선사정사학규>.<精舍約 束>.<示精舍學徒>가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학교모범>과 <시정사학도>는 이이가 지은 율곡전서의 <학교모범>.<시정사학도>를 그대로인용한 것이고, <선사정사학규>.<정사약속> 역시 <은병정사학규>와 <은병정사 약속>에서 정사 이름만 바꾼 것이다. <仙査精舍學規>의 주요한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20) 19) 이에 관해서는 이미 선행 연구에서 지적이 있었다. 宋熹準, 2003 慕堂 孫處訥의 講學活動에 대한 연구 참조. 20) 樂齋集 권6, 雜著 慕堂 孫處訥先生의 生涯와 學問(靑湖書院 간행) 94~95쪽 <仙査精舍學規> “一。入齋之䂓。勿論士族庶類。但有志於學者。 皆可許入。齋中先入者。僉議以爲可入。然後乃許入。若前日悖戾之人。願入則使之先自改 過修飭。熟觀所爲。决知改行。然後許入。(公糧之用依硏經) 一。推鄕中年長有學行德義者一人爲山長。又擇一人爲有司。又輪選一人爲直月。山長有 司。非有故則不遞。直月則一月相遞。凡齋中論議。山長主之。凡百必禀而定之。(山 長有故在他處則其時參會㝡長者主之) 凡齋中之物出納。及供僧齋直使喚及什物有無。 有司掌之。(非有司則不得擅自使喚檢罰之事) 凡物皆有籍。遞時按籍交付于代者。凡 山長朋友所講論之說。皆直月掌其記錄。以爲後考之資。 一。書不得出。色不得入。酒不得釀。刑不得用。書出易失。色入易汚。釀非學舍事。刑
- 선사재에 입학 할 수 있는 규칙은, 士族과 庶類를 막론하고 학문에 뜻이 있는 사람은 모두 입학 할 수 있다. 먼저 입학한 사람들이 논하여 허락한 후에 들어올 수 있다. 만약그전에 悖戾했던 사람이 입학하기를 원하면, 먼저 그 사람에게 스스로 잘못을 고치고 수양하게 만든 다음 그 사실을 잘 관찰하여 행동을 고친 것을 안 다 음에 입학을 허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