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은 세 복음서의 내용이 왜 조금씩 차이가 나고 어떤 부분은 상반되게까지 기록이 되어 있는지 혹, 이유를 알고 계시는지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제자들에 의하여 조금씩 오류로 적혀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세상을 만드시고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완전하신 하나님을 오해한 것입니다.
아래 글을 통하여 복음서가 어느 한 부분도 잘못 표기되지 않았고 인생들 눈에 오류 인듯한 그것이 오히려 옳은 표현임과 동시에 믿지 못하는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 이심을 여러분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의 일부를 올려드립니다.^^
# 먼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에 가는 방법을 가르치신 것을 설명한 책은 네 권으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그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누가복음]은 성경을 잘 알지만 잘못된 길로 걸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마태복음]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복음을 받은 자들에게,
각각의 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들도 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하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하려면 성령이 가르치시는 성령의 법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니 "성령의 법을 따르라" 는 당부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이 내용의 전제를 바탕으로 아래 글을 읽으신다면 과연 그러함을 말씀으로 직접 확인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쓰인 주기도문 비교
@ 마태복음의 기도문
[마태복음 6장]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祈(빌 기)禱(빌 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하늘에 계신 - : “우리” 라고 가르치십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일대일의 문제임에도 ‘우리’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구원을 받기 전까지는 우리 중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배워야 하고, 도움을 받고 도와주며, 열매를 맺으며 가야 하므로 우리 중에 살되 하나님과는 ‘독대’ 해야 합니다. 가르치는 자도 배우는 자가 열매이므로 그의 도움이 필요하고 배우는 자는 가르침을 받아야 자기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우리’ 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교회이며,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하신 새 율법인 성령의 법, 어미의 법이 있는 성전입니다.
10 나라이 臨(임할 림,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나라: 내 마음속에 서게 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면 내 영이 살게 되는 곳,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 나라가 내게 임하게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 뜻이: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살아가는 동안 내가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질 때만, 온전한 의뢰가 있을 때만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뜻이 행하여져 내가 택함을 받은 것 같이 나 또한 그에 부응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며 내 땅에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라는 기도입니다.
#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하늘은 ‘구원의 법’ 이며, ‘성령의 법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것 같이’ 입니다.
# 땅: 내 마음 밭을 말합니다. 아울러 “마음이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한 것과 같이 내게 주어질 피전도자의 마음 ‘밭’ 의 의미도 포함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밭에서도 이루어져야만 내가 구원을 받기에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늘에서는 이루어지고 다른 사람의 밭에서도 이루어졌으나 내 밭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나는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내 밭의 열매 맺음도 하나님이 뜻하고 계시지 않으면 맺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 밭에 열매가 맺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우선 나를 죽이고 온전한 의뢰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라고 지시하는 것에 부응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은 ‘구원을 받고 싶다면 먼저 너부터 죽여라. 또 그런 뒤에라야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나를 첫 열매로 드려야 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기본 조건입니다. 결국, 이 기도는 “내가 반드시 구원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의 부인이라는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日(해 일)用(쓸 용)할 糧(양식 양)食(밥 식)을 주옵시고
# 성경 본문에는 ‘오늘날’ 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현재 시대’ 를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매일의 오늘밖에 허락됨이 없음을 매일 자각하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죽거나 잠을 자지 않거나 비몽사몽간이 아닌 인식하고 있는 ‘지금’ 의 의미입니다.
그것은 다시 어떤 사람에게든지 보장된 ‘내일’ 이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만 역으로는 사람이 온전히 내일이 없는 오늘을 살 수 있게 될 때 그것이 곧 ‘영원’ 하게 사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어제’ 혹은 ‘내일’ 이라는 개념은 시간이라는 한정된 개념의 바탕 위에서 한정된 삶을 사는, 육체를 입고 있는 인생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영원을 사는 영이 산 자라면 더 이상 그 시간적 개념 안에서 살 이유가 없습니다.
결국, 깨어 있는 ‘지금’ 만을 사는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안식’ 이 찾아오는 것이며 아울러 그것이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닮아 가면 그것이 하나님의 자식이 되어 가는 것이며, ‘흙으로 빚은 사람’ 이 ‘신’ 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땅에서 하늘에서의 날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우리를 하나님의 ‘자식’ 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시편 89장]
27 내가 또 저로 長(길 장)子(아들 자)를 삼고 世(대 세)界(지경 계) 列(벌일 열)王(임금 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28 저를 爲(할 위)하여 나의 仁(어질 인)慈(사랑할 자)함을 永(길 영)久(오랠 구)히 지키고 저로 더불어 한 나의 言(말씀 언)約(묶을 약)을 굳게 세우며
29 또 그 後(뒤 후)孫(손자 손)을 永(길 영)久(오랠 구)케 하여 그 位(자리 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30 萬(일만 만)一(일) 그 子(아들 자)孫(손자 손)이 내 法(법 법)을 버리며 내 規(법 규)例(법식 례)대로 行(갈 행)치 아니하며
31 내 律(법 율)例(법식 례)를 破(깨뜨릴 파)하며 내 誡(경계할 계)命(목숨 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32 내가 지팡이로 저희 犯(범할 범)過(지날 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罪(허물 죄)惡(악할 악)을 懲(징계할 징)責(꾸짖을 책)하리로다
위에 언급된 율법은 모세의 율법이 아닙니다. 성령의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법이 빠진 이전 공의에 속한 유태교와 이슬람과 천주교와 기독교와 및 모든 교단은 시편을 연구하고 또 말합니다. 시편의 처음 말씀이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모를 리 없습니다.
[시편 1장]
2 오직 여호와의 律(법 율)法(법 법)을 즐거워하여 그 律法을 晝(낮 주)夜(밤 야)로 默(잠잠할 묵)想(생각 상)하는 者(사람 자)로다
이 묵상하는 율법은 모세의 율법이 아닙니다. 그러면 또 다른 율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있어야 묵상을 할 터인데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유태교는 그렇다 치더라도 성령의 법을 모르는 그 외의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묵상할까요?
[야고보서 1장]
25 自(스스로 자)由(말미암을 유)하게 하는 穩(평온할 온)全(온전할 전)한 律(법 율)法(법 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者(사람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者가 아니요 實(열매 실)行(갈 행)하는 者니 이 사람이 그 行하는 일에 福(제사에 쓰는 고기와 술, 복 복)을 받으리라
시편에도 율법은 없고 서신에도 율법은 없습니다. 다만, 율법이 있으니 들여다보고 묵상하라고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그날그날 하루를 사는 동안 한 구절의 말씀씩을 묵상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먹을거리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은 내게 주어진 ‘오늘’ 이라는 시간에 전하여 열매 맺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양식을 받지 못하면 그날의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한시라도 말씀에서 떨어져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는 말씀의 본뜻입니다. 온전히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주어진 상황에서 성령이 깨닫게 하시고 행하도록 도우시는 말씀이 곧 일용할 양식입니다.
12 우리가 우리에게 罪(허물 죄) 지은 者(사람 자)를 赦(용서할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罪를 赦하여 주옵시고
#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된 상황에서 너희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가 너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지 않으면서 어찌 하나님이 너의 죄를 사해주시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마음에 평온을 찾은 뒤에, 화평을 이룬 뒤라야 이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원수라도 사랑하는, 사랑의 마음이 있지 않고는 이런 기도를 할 자격이 없습니다. ‘준 것 같이’ 라고 ‘과거’ 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3 우리를 試(시험할 시)驗(시험 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惡(악할 악)에서 求(구할 구)하옵소서 (나라와 權(권세 권)勢(기세 세)와 榮(꽃 영)光(빛 광)이 아버지께 永(길 영)遠(멀 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진실로>)
# 시험에 - :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성령이 떠나지 않을 수 있게 내 속에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단의 시험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온전히 하나님께 속하라는 지시인 것입니다.
# 악에서 - : 악이란 세상에 속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악에서 구하옵소서” 란 나 스스로의 노력이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노력 없이는 일단 자격 미달이 됩니다.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 :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 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은 의뢰가 있습니다. 온전한 의뢰 없이 권세 아래 있다고 자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한다면 ‘나’ 를 철저히 죽여야 합니다.
‘영광이 아버지께 있다.’ 라는 것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는 선한 길에서 열매 맺는 것과 자신을 연단하는 작업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자기 자성 없이는 이렇게 기도할 자격이 없습니다.
나를 죽이는 이 죽임을 행하는 것이 씨 중에 가장 작은 겨자씨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장 작은 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을 때 말씀으로 ‘나’ 를 세상에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기우지 않은 자는 모두 하나님이 심은 것이 아니어서 뽑힐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 기도는 조건이 선행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속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 누가복음의 기도문
이 기도는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 같이’ 를 전제합니다. 또 가르치심도 만민이 대상이 아니고 선민인 제자들에게 국한하여 가르치신 기도입니다. 말하자면 선민의 처지에서만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오늘날로 하자면 “너희는 이제 곧 하나님의 뜻에 따라 멸절될 것이다.” 를 말씀하시는 것이 됩니다.
왜 그런지 보겠습니다.
[누가복음11장]
2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祈(빌 기)禱(빌 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臨(임할 림, 임)하옵시며
3 우리에게 날마다 日(해 일)用(쓸 용)할 糧(양식 양)食(밥 식)을 주옵시고
4 우리가 우리에게 罪(허물 죄) 지은 모든 사람을 容(얼굴 용)恕(용서할 서)하오니 우리 罪도 赦(용서할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試(시험할 시)驗(시험 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는 내용이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멸함을 받을 이전 공의에 속한 자가 이 말을 넣어 기도하는 것은 “어서 우리를 멸하여 주옵소서.” 하는 것이 되므로 그것은 빠진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주기도문은 “사하여 준 것 같이” 로 과거형으로 전제되나 여기서는 “용서하오니” 로 현재형입니다. 누가복음의 기도문은 ‘지혜로운 불의한 청지기’ 에게 국한된 기도문입니다. ( ※ 불의한 청지기와 관련된 글은 까페"세 복음서의 차이와 필연성 증명" 이라는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이 기도는 하나님께 온전히 속할 것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