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문명의 걸작 - 고조선 천문도
1990년대 중반 일본 아사히신문은, 평양의 한 고인돌 덮개돌 위에서 북두칠성이 발견되었다는 보도를 내놨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나라의 전문가들조차도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외면으로 대하였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오늘날, 모든 역사학자와 고고학자 등은 고인돌 위에 북두칠성을 비롯한 성혈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자신들의 상식에 맞추어 눈으로 본 것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생긴 해프닝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단순한 돌덩어리로 치부해버린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고인돌의 북두칠성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하나는 천문학으로 상징화되는 수학과 과학의 탄생이며, 둘째는 종교와 신앙, 그리고 세상을 보는 세계관으로서 철학의 탄생이다. <고인돌에 새겨진 성혈> <충북청원군 돌판> <경북열일군 돌판> 과학적으로 보면 북두칠성은 그 자체로는 수학과 전혀 상관없는 별들처럼 보이며, 우리 눈에 7개의 별들이 눈에 쉽게 띄었고, 이정표 구실을 하면서 그 모양이 각인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별들을 돌에 새겼다는 것은, 그만큼 오랜 세월 북두칠성을 관찰했다는 논리이기도 하다. 북두칠성은 1년 내내 볼 수 있는 별자리지만, 그 뜨는 시간은 모두 다르다. 눈에 보이는 시간이 다르다는 말이다 . 그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수 계산을 하는 것이다. 천문학은 인간이 하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서 가장 일찍 태동한 학문 중의 하나이다. 선사시대의 여러 인류문명들은 피라미드, 스톤헨지 같은 천문학적 유물들을 남겼으며, 바빌론, 그리스, 중국, 인도, 이란, 마야문명 같은 동서양의 초기 문명들은 밤하늘에 관한 많은 관측기록을 남겼다. 역사적으로 천문학은 농사나 자연환경보호, 측성학, 역법, 천체 항법 등 인간생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각박해지고 약육강식의 사회가 조성되면서, 고대의 천문학은 점차 과학성을 상실하고, 점성술이나 주술적인 자기중심적인 이념지향의 이데올로기로 변질이 되게 되었다. 결국, 인류의 시원시기에 매우 정교한 천문학의 발달에 대하여 눈을 감고, 점성술로 변질 된 고대의 천문학을 확대 해석하여 인류의 천문학의 발달은 16세기의 망원경의 발명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잘못 규정하고 있다. 현대에와서야 40여 년 동안 고대 마야문명의 유적에 대한 탐사결과 이들의 천문학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 마야력에 대해 과학자들이 입을 모아 동의하는 것은, 그들이 남긴 유산이 현대 과학으로도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정확하다는 것이다. 특히 가장 정교한 것으로 꼽히는 것은, 바로 우주의 주기와 시간을 계산하는 탁월한 계산능력이다. 이들의 역법은 우주의 주기와 시간에 대한 계수법이 현대 과학으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만큼 정밀하다. 2012년과 마야력을 소개하고 있는 도서 ‘월드쇼크 2012’ 의 저자 중 한 사람인 그렉 브레이든은 마야력이 우주시간을 추적할 수 있는 역사상 가장 정교한 측정방법수단이라고 하였다. 마이클 D. 코 등 전문가의 분석에 따르면 마야력은 무려 25세기 이상, 단 하루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지구시간과 우주시간을 카운트하고 있다며 그 정확성에 경이로움을 표했다. 고대 마야인이 계산해 낸 금성의 1년은 584일로서 현대 과학이 관측한 583.092일과 비교했을 때 오차는 매일 12초, 한 달에 6분 정도이다. 현대 과학은 1년이 365.2422일인 것을 알아냈지만, 마야인은 1년이 365.2420일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을 만큼 마야인의 역법은 오늘의 첨단 과학을 능가하고 있었다. 특히 놀라운 것은, 마야인들이 2012년 12월 21일 지구가 은하계와 동화한다는 것을 예측했다는 것은, 태양의 황도를 미리 읽고 2만 5800년 주기의 세차운동까지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평생 고대 마야 문명을 연구한 호세 아구레스 박사는, 그의 저서 ‘마야인의 원동력, 기술 저편의 길’ 에서 마야역법에는 ‘은하계절’의 운행규율이 있다고 했다. 즉, 우리 태양계는 5125년의 대주기를 지나가고 있다. 이 주기의 기간은 기원전 3113년부터 기원후 2012년까지이다. 이 대주기 동안 지구는, 태양계와 함께 은하의 중심에서 나오는 은하빔을 가로질러 이동하게 되는데, 이 은하 빔의 길이가 기간으로 5125년이다. 이 태양계의 모든 별이 은하 빔을 지나가는 대주기 이후 지구에는 대변혁이 일어나는데, 마야인들은 이를 ‘은하계와의 동조’ 또는 ‘은하계의 동화’라고 명명했다. 마야역법에 따르면 대주기를 13단계로 나누고, 그 각 단계를 다시 20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지구는 그 마지막 20년간의 주기인 1992년에서 2012년에 들어가 있는 상태이며, 이른바 ‘은하계의 동화’에 진입하는 최후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예고한 바로, 2012년 12월 21일 태양이 은하계의 황도와 적도가 형성한 교차점과 완전히 합치되면, 태양은 곧바로 은하계의 틈 사이에 놓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은하계가 지구에 내려앉아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은 것과 같아진다. 이날 태양과 은하계의 중심은 정확하게 일직선을 이루게 된다. 과학자들은 은하가 일직선이 되면, 아마 몇 년 동안은 태양의 흑점이 지구의 자기장에 악영향을 미쳐 지구의 자기장을 파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태양이 은하계의 중심과 일직선이 되는 현상은, 지구 자전축이 황도면의 축에 대해 2만 5800년을 주기로 회전하는 세차운동이 일어나는 동안 단 몇 차례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2012년에 태양과 은하계가 일직선이 된다는 사실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이 우주의 운행 원리를 수학적으로 꿰뚫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결론적으로, 마야력은 약 2만 6천 년 전의 과거와 먼 미래의 태양 궤도까지 정확하게 판독해 만들어진 정교한 달력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구를 비추고 있는 태양의 탄생과 소멸을 천체와 태양의 궤도를 판독하는 나침반인 동시에 지구의 운명을 결정짓는 지도와 다름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러한 우주천제의 운행을 관측할 수가 있는 수단들이 있었을 것이다. 수학과 과학이란, 주관적인 신앙이나 믿음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인 이치에 의거하여 정밀한 수의 원리와 셈법에 의하여 그 해법이 정해진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수단으로 우주의 운행을 관측하고 측정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우주의 먼 거리에서 움직이는 별들의 행적을 세말하게 측정하는 관찰 할 수 있는 망원경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날 인류 최초의 망원경은, 16세기경 이탈리아의 갈릴레오가 네덜란드의 발달한 렌즈 제작기술을 이용하여 만들었으며, 이로부터 천문학이 급속도로 발전하였다고 하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마야력의 발견으로 그 정설은 수정이 불가피한 것이 된다. 사실 그 정설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는 고대의 망원경이 발견되었다. 즉 망원경에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부품인 렌즈를 인류는 이미 오랜 옛날부터 사용했다는 흔적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미 B.C. 2,000 년에 만들어진 렌즈들이 지중해의 크레타 섬과 소아시아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비잔틴이나 동유럽 장인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 아주 정교하게 다듬어진 1,000년 된 타원체 형태의 렌즈들도 고트랜드 섬의 해적기지에서 발견되었다. 로마시대 작가인 플리니와 세네카는 조각사들이 렌즈를 사용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즉 오래 전부터 인류는 렌즈를 제작해서 불을 피우고, 물체를 확대해서 보고, 혹은 안경을 만들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흔적들이 여러 유적과 유물에서 발견되고 있다. 한편 우리민족은 이미 오랜 전부터 하늘에 대한 과학적인 관찰을 하였고, 여기서 놀라운 수준의 수학과 과학성과를 겸비한 천문학이 발달한 것이다. 고인돌의 성혈이야말로 천문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웅변하고 있다. 그런데 고인돌 덮개돌 위에는 북두칠성만 그려진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다른 별들도 그려져 있다. 이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처럼 천문도를 그리려 한 흔적으로 보인다. 다른 별들을 그려 넣어 하늘 세계를 덮개돌 위에 재현해 놓은 것이다. 이는 북두칠성만 그렸던 초기의 고인돌과는 달리, 하늘세계를 모두 표현하려 한 것처럼 보다 발전한 의식 상태를 반영한 고인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만큼 별들에 대한 관측 기술이 발전했음을 말해준다. 또한 한반도의 다양한 곳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의 성혈은 그만큼 많은 별들을 우리 민족이 알게 되었고, 또 그만큼 많은 별자리가 생겨났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별자리를 제대로 연구하고 분석하면, 우리 민족의 별자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인돌 위에서 북두칠성이 발견되는 순간 더 확실해졌으며, 천문학의 수준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또 고인돌 덮개돌이 제단으로 쓰였다는 사실에서도 우리 민족은 단순히 죽은 이에 대한 제례뿐만이 아니라, 천문학의 역법과 더불어 세상에 대한 철학적인 사고나 인생과 그리고 세계관의 구조를 알아보는데 객관적인 물증이며 중요한 근거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고조선에는 고상한 집단적인 자아성찰의 철학이 있었고, 고인돌은 그 활동의 증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고인돌 덮개돌 위의 북두칠성은 우리 민족의 종교와 과학과 수학, 그리고 철학적인 상징으로서의 문양과 관계가 매우 깊다. 우리민족은 일찍이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이를 경제적인 기초로 문화를 발달시키고 나라를 만들었다. 사실 농업이란 목축과 달리 약탈경제와는 연관성이 매우 적다. 수많은 농기구와 가축을 농업에 이용하는 기술까지 축적된 나라이기도 하다. 농업을 주식으로 하는 문화나 문명은 노예경제와 약탈경제, 육류를 주요한 음식으로 하는 그러한 문화와는 구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천문학의 발달은 곧 농사의 발달과 비례관계로 이어진다. 고조선의 천문학이 발달했다는 것은 곧 농사도 그만큼 발달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농사를 제대로 지으려면 적절한 때에 적절하게 파종하는 등 사시사철의 변화와 절기를 제대로 아는 것이 필수다. 그런데 이 절기를 제대로 알아내려면 하늘을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계가 없던 고대시절에는 해, 달, 별의 움직임을 관찰함으로써 이를 토대로 역(歷)을 만들고 시간의 흐름을 계산할 수 있었다. 이를 철학으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역(易)’인 것이다. 4계절의 변화와 매 절기를 제대로 아는 것이 농사에는 필수였으므로 하늘을 관찰해 제대로 된 역을 만들고,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제왕의 책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은 제왕만이 대행할 수 있고, 자연재해는 제왕의 부덕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는 세계관은 결국 하늘을 잘 관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늘의 정보는 하늘을 계속적으로 관찰하고, 거기서 이상 징후에 대한 결과를 도출하는 담당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대문명사에서 천문학의 발달 여부가 중요시되는 것이며, 기원전 1200년경에 하늘을 관찰했음을 보여주는 바빌로니아의 토지 경계비가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에서 전설적인 성인으로 추앙 받는 이른바 ‘3황5제’가 있는데 이들의 업적은 모두 하늘과 땅에 관한 일이다. 요임금은 ‘희화씨’라는 천문 관측 관원과 기관을 설치했고, 순임금은 ‘선기옥형(혼천의)’이라는 천문기구를 창안해 천문역법을 정비하고, 백성들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었다. 우임금은 잦은 홍수로 황폐해진 중원지역의 치수에 성공함으로써 천하를 평정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중국의 전설적인 세 성군 요, 순, 우는 천문 역법과 치수를 완성함으로써 제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1800년이나 빠른 천문도가 우리나라의 고인돌에서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세계 고대 천문학 분야에서는 개, 뱀, 전갈 등의 그림이 그려진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바빌로니아 토지 경계비를 별자리의 원형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고대 천문학의 발상지로 인정하는 이유이다. 또 메소포타미아가 다른 지역보다 앞서 문명을 꽃 피운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그곳에서 발견된 체계적인 천문도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학자들의 발표에 의하면, 대동강 유역 고인돌에서 발견된 천문도는 기원전 3000년경의 것으로, 기원전 1200년경에 만들어진 바빌로니아의 천문도보다 무려 1800년이나 앞선 것으로 밝혀졌다. 고인돌별자리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다음 아래의 평안남도 증산군 용덕리에 있는 외새산에서 발견된 10호 고인돌 무덤이다. 이 고인돌은 문자 비슷한 곡선과 점들이 새겨져 있어, 글자를 전하는 돌이라는 뜻에서 ‘전자석’이라고 불린다. < 룡덕리 고인돌과 실측도> 북극성을 중심으로 11개의 별자리에 속하는 별들이 새겨져 있으며, 별들의 운동을 감안한 연대는 기원전 2900년경이다. 고인돌 무덤의 뚜껑돌 겉면에는 80여 개의 구멍이 새겨져 있는데, 조사 결과 그 구멍들이 별자리를 나타내고 있음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밤에 별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하늘의 모든 별들이 한 별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중심이 되는 별이 북극성이다. 또한 북극성 주변의 별들은 다른 별자리들과 달리 연중 계속 볼 수 있다. 별의 밝기를 반영하여 구멍의 크기도 각각 달랐는데, 세차운동을 감안하여 연대를 측정해보니 고인돌의 별자리는 기원전 약2800의 하늘을 보여주었다. 또 같은 무덤에서 발굴된 질그릇 조각의 연대를 측정해보니, 4926년(±741)으로 나타나 고인돌 별자리의 연대 측정에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초고대 시절부터 천문을 세밀하게 관측하고, 기록을 남겼다는 것을 보여준다. 총체적으로 대동강 유역에 있는 200여 기의 고인돌 무덤에 그려진 별자리는 북극 주변의 별자리와 지평선, 적도 부근의 28수를 비롯하여 모두 40개가 된다. 이 별자리들은 북위 39도인 평양의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별을 모두 새긴 것이다. 또 이 별자리에는 특이하게 은하수와 플레이아데스성단들도 새겨져 있는데 망원경이 발명되기 이전에 육안으로 보이는 별자리를 이렇듯 많이 새긴 것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다. 고인돌 별자리는 한반도 남쪽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미 1978년 충북대 이융조교수는 충북 청원군의 고인돌유적에서 조그마한 돌 판을 발견했는데, 표면에는 지름이 2~7cm의 크고 작은 홈이 65개나 파여 있었다. 고등과학원의 박창범 교수는 조사한 결과, 이것이 기원전 500년경의 천문도이며 북두칠성, 작은곰자리, 용자리, 카시오페이아 등을 묘사한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는 실로 ‘고인돌의 나라’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고인돌이 많은 나라다. 고인돌의 영어로는 ‘Dolmen’이고, 일본어는 ‘도루멘’이라고 하는데 바로 우리말 돌멩이이다. 이것만 봐도 고인돌이 우리나라에서 유래하여 전 세계로 흘러간 것을 알 수가 있다. 현재 전 세계에 산재해 있는 고인돌의 숫자는 약 8만기로 추산되는데, 한반도에는 남북한을 합쳐 5만기 이상의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고인돌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며, 이 가운데 천문도를 새긴 고인돌은 주로 평양에서 발견되는데, 그 수가 200여 기에 이른다. 그러나 고인돌의 뚜껑돌에 새긴 구멍이 천문도라는 것을 알기 전에는 이 구멍에 대한 견해가 분분했다. 고인돌의 뚜껑돌에 있는 구멍은 고인돌을 채취하고 가공하는 과정에서 생긴 흔적으로 보거나, 불을 일구는 발화구멍의 일종으로 보기도 했으며, 하늘과 태양 숭배사상의 표현 또는 장례의식이나 장식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일부는 민간에서의 장수를 의미하는 발자국으로 인식하기도 했고 피장자의 족보로도 보았다. 또한 중국학자들은 제사를 지내고, 그 회수를 표시하거나 제사에 사용된 동물의 수량을 표시했다고 설명했다. 즉 학자들 마다 하늘과 태양 숭배 사상의 표현, 또는 장례의식이나 장식적인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다. 또 다른 학자들은 제사를 지내고 그 횟수를 표시하거나, 제사에 쓰인 동물의 수량을 표시한 것과 같은 기초적인 산술의 증거 정도로 추정하였다. 그런데 우리조상은 이미 오랜 전부터 북두칠성 문양을 몸에 띄고 태어난 아이들을 '제왕' '대장군' 등의 운명을 지닌 것으로 풀었다. 또 북두칠성은 하늘을 오르는 '수레'로도 여겨졌다. 죽은 이들의 영혼이 이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오른다는 신앙이었다. 불교와 같은 종교에도 칠성신앙이 그대로 전해지는데, 북두칠성을 타고 하늘나라로 간다는 신앙이다. 우리나라불교에서의 칠성여래는 일본, 중국, 태국, 캄보디아, 인도 등 수많은 나라에서는 결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특히 고구려 고분의 수많은 벽화들에는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는데, 하늘로 올라가는 수레로 그려진 것들도 있다. 견우와 직녀가 1년에 단 하루, 7월7일 칠석(七夕)에 오작교라는 다리에서 만난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별자리와 관련된 천문학 설화에서 발전했을 것이다. 천문학에서 견우(牽牛)라는 별자리와 직녀라는 별자리가 각각 있고, 이들 두 별자리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정반대 위치에 떨어진 채 하늘을 회전하다가 칠석이면 합쳐지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견우는 독수리별자리를 구성하는 알타이어(Altair) 별이며, 직녀는 거문고별자리의 베가(Wega) 별을 지칭한다. 견우직녀 이야기로 대표되는 칠월칠석이란 절기는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에 의하는 한, 이미 고구려 사회에도 깊이 침투해 있었다. 이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벽화고분인 덕흥리 고분이다. 북한 남포시에 소재하는 이 고분은 축조연대가 서기 408년이라는 확실한 기록이 무덤 자체에 남아있어 고구려 무덤의 연대를 결정하는 가늠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곳 무덤 앞 칸 천장 남측에는 견우와 직녀 그림이 있다. 견우는 글자 그대로 소를 끌고 있으며, 그 뒤 은하수를 형상화한 것임이 분명한 굽이치는 강물 그림 너머에 직녀가 있다. 이들이 각각 견우와 직녀임은 두 인물 옆에 각각 '견우지상'과 '직녀지상'이라는 묵 글씨가 적혀 있다는 점에서 의심할 바가 없다. 같은 고구려 벽화고분 중 대안리 1호분에는 직녀 그림이 확인된다. 견우직녀 설화와 칠월칠석 신앙이 고구려 사회에 짙게 침투해 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는 남포시 소재 ‘감신총’이라는 고분벽화에 보이는 서왕모(西王母) 그림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들의 근본이 별자리인 까닭에 천상을 노니는 존재들이며 사람이 죽어서 승천한 죽은 영혼들을 돌보아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며, 이런 까닭에 죽은 고구려 사람들이 잠든 무덤의 천장을 장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인돌 무덤에 새겨진 구멍의 배열 상태를 조사한 학자들은 널리 알려져 있는 별자리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성좌도’라는 결론을 내렸다. 평범한 돌에 아무렇게나 구멍을 뚫은 것처럼 보이는 고인돌이, 현대 과학자들도 놀랄 정도로 정확한 별자리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의 우리 선조들이 당시의 최첨단의 과학기술 정보를 돌 위에 적은 것으로, 우리의 고대사를 다시 쓰게 하는 획기적인 자료가 됐다. 총체적으로 대동강 유역에 있는 2백여 기의 고인돌 무덤에 그려진 별자리는 북극 주변의 별자리와 지평선, 적도 부근의 28수를 비롯해 모두 40여 개가 된다. 이 별자리들은 북위 39도의 평양의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모두 새긴 것이다. 또 이 별자리에는 특이하게 은하수와 플레이아데스성단들도 새겨져 있다. 육안으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을 이렇듯 많이 새긴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가 없다. 아래의 사진의 왼쪽은 황해남도 은천군 우녕동의 고인돌로서 별자리의 천문학적 연대는 4800년 전으로 나타났으며 계절은 여름경이다. 또 오른 쪽 사진의 강동군 화강리 고인돌에는 전사, 화개(케페우스별) 별자리가 새겨져 있는데, 천문학적 연대는 3700년 전 여름경이다. < 황해도 정동리 우녕동 별자리 고인돌> < 강동군 항목2리 별자리 고인돌> 함경남도 함남 함주군 지석리의 고인돌에서 발견된 별 그림은 기원전 1500년경의 것으로 고조선 중기에 해당한다. 북극점을 기준으로 해 큰곰별자리에 속해 있는 북두칠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작은곰별자리, 카시오페아, 케페우스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특히 뚜껑돌 우측을 따라 은하수에 해당하는 작은 별들이 많이 새겨져 있다. 이는 은하수가 별들이 많이 모인 것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당시의 관찰이 정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별의 밝기에 따라 구멍의 크기를 4부류로 구분해 새겼는데, 그 크기는 직경 10, 6, 3, 2센티미터 순이고 깊이는 3~3.5센티미터 정도이다. 이 돌에 새겨진 별을 관찰하면 동지, 하지, 춘분, 추분점의 위치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용자리별을 기준으로 볼 때,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에 속하는 별에 해당하는 구멍들의 간격이 용덕리 고인돌보다 더 정확하며, 4등성 이하의 별까지 새겨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 사람들이 단순히 별을 관상한 것이 아니라, 관측 연구하고 그 결과를 실생활에 적용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우리민족의 천문학이론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 우선 밝혀져야 할 것이다. 과연 어떠한 과학적인 원리를 가지고 우주 천문을 관측하고 계산을 하였으며, 그 철학적인 실체는 무엇이며 그 객관적인 근거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선 고문헌의 내용을 검토해보자! 태백일사의 제 3권에서 신시본기에는 우리나라 책력의 시원을 ‘계해’라고 하는 역법을 썼다고 한다. 이어서 구을 단군 때에 ‘갑자’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제사에서도 ‘7회 제신력’이라는 역법이 있었다고 한다. “ 신시에 七回祭神의 책력이 있었다. 첫 회의 날엔 천신에 제사 지내고, 2회의 날엔 월신에 제사지내고, 3회 날에는 수신에 제하고, 4회 날에는 화신에 제지내고, 5회 날에는 목신에 제하고, 6회 날에는 금신에 제지내고, 7회 날에는 토신에 제지내었다. 대저 책력을 만듬은 예서 비롯됨이라. 그렇지만 옛날엔 계해(癸亥)를 썼나니 단군구을이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써서 10월을 상달이라 하고 이를 한해의 시작이라 했다. 六癸는 신시씨에 의하여 신지에 명하여 제정된 것으로 계를 처음으로 시작한다. 계는 啓요 해는 核이니, 일출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계를 蘇羅라하고, 갑을 청차이라 하고, 을을 적강이라 하고 ,병을 중림이라 하고 정을 해익이라 하고, 무를 중황이라 하고, 기를 열호수라 하고, 경을 임수라 하고, 신을 강진이라 하고, 임을 유부지라 했다. 亥를 支于離, 자를 효양, 축을 가다, 인을 만량, 묘를 신특백, 진을 밀다, 사를 비돈, 오를 융비,미를 순방,신을 명조, 유를 운두, 술을 개복이라 한다. ” 위 글을 보면 우선 우리나라의 책력이란 사실 음력의 달력과 12절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즉 오늘날까지 동양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12간지나 천간시간의 책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특히 중국학자 쉬랑즈는 ‘중국사전사화’의 저서에서 중국의 역법은 사실 동이족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구절을 그 증거로도 삼고 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다른 각도에서 책력을 논하는 문헌이 있다. 이른바 박제상공이 저술 했다고 하는 ‘부도지’의 글이다. 우리는 박제상의 징심록 15권 중에서 제1권인 부도지의 20장과 23장을 해석하면서 그 해답의 단초를 찾아볼 수가 있다. 이 부도지의 20장과 22장은 역(易)의 이치와 역(曆)법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과 달력의 기본적인 원리와 계산법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중국의 역법에 대하여 예리한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중국의 천문과 역법에 대하여 거북이나 ‘명엽’의 변화를 보고 작성한 우매한 점술역법 이라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부도지 23장에서는 부도역법의 기본적인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천도(天道)가 돌고 돌아, 종시(終始)가 있고, 종시가 또 돌아, 4단씩 겹쳐나가, 다시 종시가 있다. 1 종시의 사이를 소력(小曆)이라 하고, 종시의 종시를 중력(中曆)이라 하고, 네 번 겹친 종시를 대력(大曆)이라 한다. 소력의 1회(回)를 사(祀)라 하니, 사에는 13기(期)가 있고, 1기에는 28일이 있으며, 다시 4요(曜)로 나뉜다. 1요에는 7일이 있고, 요가 끝나는 것을 복(服)이라 한다. 그러므로, 1사에 52요복이 있으니, 즉 364일이다. 이는 1, 4, 7의 성수(性數)요, 매 사의 시작에 대사(大祀)의 단(旦)이 있으니, 단과 1은 같기 때문에 합하여 365일이 되고, 3사의 반(半)에 대삭(大朔)의 판(?)이 있으니, 판은 사의 2분절이다. 이는 2, 5, 8법수(法數)요, 달이 긴 것이 1일과 같기 때문에, 제 4의 사는 366일이 된다. 10사의 반(半)에 대회(大晦)에 구가 있으니, 구는 시(時)의 근원이다. 300구가 1묘(?)가 되니, 묘는 구가 눈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9633묘를 지내서 각(刻), 분(分), 시(時)가 1일이 되니, 이는 3, 6, 9의 체수(體數)다. 이와 같이, 끝나고 또 시작하여, 차차 중력(中曆)과 대력(大曆)에 미쳐서, 이수(理數)가 곧 이루어지는 것이다. ” 문제는 위의 글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있는데 대부분 전문가들도 위 글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며 경우에는 음력으로 생각하는 경우와 양력으로 생각하는 경우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부도지의 전체 내용을 보면 오늘날까지도 유지되는 동양사회의 음력에 대한 가혹한 비판을 하며 마치 서양의 태양력을 옹호하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 글은 동양사회에서는 용납할 수가 없는 서양의 태양력의 역법을 주장하는 것이고 따라서 위 글은 서양의 역법에 경도된 자의 소행이라는 근거로 간주되고 이에 따라 자연히 진위논란이 일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부도지가 작성된 시기가 430여년경이라고 한다면 그 당시로서는 서양의 태양력은 상상할 수도 없는 시기라는 것이다. 결국 태백일사의 신시본기의 책력은 중국의 역법의 시조 격으로 동양사회에서 고유한 역법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부도지의 역법은 서양의 태양역법으로서 부도지 자체의 저서가 위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위 신시본기의 책려이나 부도지의 역법이 태양역이나 태음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태음역이나 태양력의 그자체가 우주 운행의 현실을 정화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자의적이고 인위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음역과 양력 모두를 비판하는 것이고 이들의 역계산법과는 달리 자체 고유한 역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여기서 인위적인 말의 의미는 현실의 자연세계를 정확히 반영하는 역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오늘날 지구촌의 모든 나라가 사용하는 이른바 ‘그레고리역법’과 기타의 북한에서 흔히 사용하는 ‘주체연호’ 등은 모두 이른바 황제 중심의 역법인데 이는 우주 운행의 과정을 정확하게 반영하기보다는 왕의 생일처럼 기념적인 사건과 꿰맞추어 정해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역법은 일종의 점성술이나 주술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위 부도지의 주장에 의하면 적어도 정확한 역법이라고 한다면 1년은 12달이 아니라 13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1개월은 기본적으로 28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년을 13달로 하고 한 달을 28일로 하는 역법은 과연 무슨 근거로 하여 이루어 진것일까? 이를 이른바 ‘부도역법’이라고 하며 이 기원은 고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민족사에서 역법의 시조격인 ‘계해의 역법’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자연현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가장 현실적이며 과학적인 역법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부도역법이란 오늘날의 양력의 역법을 셈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고조선의 계해역법이나 7회 신력이나 갑자책력이나 부도역법은 모두 그 근본이 같다는 것이다. 즉 계해의 역법이나 부도역법은 모두 우주운행의 변화를 객관적인 이치에 맞게 수리화하고 수량화한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부도역법이나 계해역법의 본래의 역법이란 그 본질적인 중심이 어디이며 그 수 계산법은 무엇인가? 우선 그 역법에서 중심적인 것이 바로 북극성이고 북두칠성의 운행을 보면서 계산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계해역법은 우주운행의 기본중심이 북극성이고 북두칠성과의 운행을 통하여 우주와 만물의 운행과 주기를 자연이치 그대로 계산한 것이다. 그리고 부도역법은 이를 더욱 추상화하고 일반화하여 단순한 역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업그레이드 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미 태백일사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고조선의 계의 역법이란 바로 ‘소라’ 라고 하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소라는 사실 다음과 같은 바다와 육지에서 자라나는 갑각류의 소라와 같은 것이다. 아래의 그림은 소라라는 생명체의 모습을 수학적으로 계산한 것이다. 위 그림은 자연의 형상과 형태에 숨겨져 있는 이른바 황금비, 황금분할의 수학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이른바 ‘피보나치수열’이라고 하여 매우 신기하게 생각하는 수열이다. 우리조상들은 자연에서 얼마든지 관찰할 수가 있는 황금비 황금분할의 수 계산법으로 북두칠성의 운행과 우주의 주기를 계산한 것이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무수하게 존재하는 고인돌은 이를 증명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위 태백일사의 신시본기에 등장하는 ‘소라’라는 것은 분명 한문이 아니고 순수 한글의 소리음이다. 아마 갑각류의 소라가 아니고 잣나무의 ‘솔’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솔의 음이 소라로 되고 이 형상이 금척의 수 계산에 가장 합당한 것이다. 이 소라가 솔을 의미하든 갑각류를 의미하든지 별로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해를 ‘지우리’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는 북극성의 밝기정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태양의 빛과 그림자의 변화를 가지고 시간을 계산하는 역법을 의미한다. 즉 해가 지나가면서 생기는 기울기를 수치로 계산하는 책력을 의미한다. 해가 지나가면서 생기는 기울기의 비율이라는 말을 축약하여 생긴 개념이고 이러한 방법으로 동서양의 대부분의 고대학자들이 시간을 계산하고 각분시라는 시간구분을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학자들은 지우리라는 말 자체에 매우 과도한 해석을 하고 있다. 개념적인 파악은 오히려 주관적인 착각을 부른다. 과학적인 태도가 아닌 것이다. 혹자는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땅위로 자라 나오면 해를 향하여 자라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라 한다. 또는 태양이 뜨고 지면서 자연의 생명체는 빛과 어둠을 알게 되고 그 속에서 자연의 모든 생명현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 ‘지우리’를 철학적으로 풀이하자면 세상이치를 태양의 움직임에 비유하건데 어둠이 있으면 반드시 밝음이 있고 밝음이 있으면 반드시 보임이 있으며 보임이 있으면 반드시 지음이 있으며 지음이 있으면 반드시 공이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이 해의 개념이고 지우리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주목되는 것은 빛이란 태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북극성은 밝기로 계산된다. 없어졌다가 생기는 것이며, 나타났다가 지나간다가는 것으로 마치 삶에서 흔히 있는 이별이고 죽음인 것이다. 그러나 만물의 생명의 씨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계’란 북극성과 북두칠성의 움직임을 원방각의 수학적인 계산에 의하여 그 움직임을 계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 북극성이 한번 그 운행을 하면 대략 2만5천 8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처럼 소라와 같은 자연의 황금률을 우주에 적용하게 되면 오늘날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는 마야인들의 책력마저도 이에 범접할 수 없는 높은 경지의 역법이 된다. 오늘날 인류문명사의 모든 역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위적인 개념에 근거하여 수리화한 역법이기에 모두가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원천적으로 정확하게 반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조상들의 역법이야말로 이른바 황금률의 우주 자연의 법칙을 책력에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는 점에서 가히 신의 역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편 신라의 충신인 박제상공이 저술한 부도지의 이른바 ‘부도역법’ 은 고조선에서 널리 대중화되어 있는 역법을 금척의 원리로 수리화한 것이어서 우리가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우주의 운행원리는 북극성의 삼성의 변화와 그 4단 운행을 금척의 원리로 수리화 하고 5개의 보이지 않는 자리와 7개의 별자리를 가지고 그 밝기정도를 수치로 계산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금척의 원리로 실제 적용한 책력이나 혹은 남아 있는 증거물은 무엇이며 또 이를 계승한 것이 과연 무엇이 있는가하는 점이다. 아쉽게도 이를 증거 하는 유물과 유적은 단편적으로 극소수의 것에서만 그 흔적을 보이고 있을 뿐이고 더구나 이에 관한 탐구가 거의 전무한 실정이고 다만 설화와 전설로만 이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흔히 신라의 건국설화에서 박혁거세가 태어난 나정을 우물가에 비유하는 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한 나머지 혹자는 무슨 해양세력으로 규정하기도 하는데 이는 너무도 자의적인 해석이다. 우리는 흔히 북두칠성을 국자에 비유한다. 그러나 과거에는 북두칠성은 우물가에서 물을 뜨는 것으로 비유하였는데, 신라의 선덕여왕의 첨성대가 바로 북두칠성의 상징으로 건축된 성탑인 것이다. 아직도 첨성대를 우물로 비유하여 마치 알을 우물가의 용과 비유하기도 하는데, 사실 나정의 의미는 원방각의 철학에서 방의 형상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첨성대의 꼭지부분의 사각형의 모양은 바로 북두칠성의 국자모양의 사각형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여 원, 방, 각으로 이루어진 금척의 원리를 형상화 한 것이다. 아무튼 우리 조상은 아주 먼 옛날부터 북극성을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역법을 만들고 철학을 세우고 과학을 하며 이를 자연의 농사일에 적용한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우주의 별들의 움직임을 통하여 천부경의 내용을 이해하게 된 것이고 이를 원리화 한 것을 금척이라고 규정하고 계속 전승하게 된 것이다. 한편 세계에는 돌무덤들이 더러 존재하지만 고인돌처럼 형식과 위용을 갖추고 매우 너른 강역 내에서 나타나는 경우는 우리 민족을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다. 고인돌에는 작은 방이 있고 그 곁에 망자가 사용하던 물건들이나 청동검과 같은 부장품이 있다. 그런데 아직 주목받지 못한 고인돌의 부장품 중에서 ‘돌저울추’가 있다. 임진강 중류 지역에서 발견된 돌저울추는 한 농사꾼의 밭에서 발굴됐는데, 그 농부는 농사하는데 걸리적거리는 고인돌을 불도저로 밀었고, 그 아래서 돌저울추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 저울추는 돌과 무쇠로 만들어졌으며, 몸통에는 `십오근(十五斤)`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는데, 무게에 따라 저울추가 각각 달리 사용되었음을 말해준다. 이 저울추가 의미하는 것은 매우 크다. 우선 저울이라고 하는 것은, 노동생산물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위한 수량과 수의 과학이 정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삶을 살아가는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공정한 사회를 이루는 것이고 이러한 공정성은 동물세계와 같이 오로지 물리적인 힘에 의하여 세워지는 양육강식의 궤변논리가 아니라 객관적인 수에 기초하는 철학적 권위로 이루어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나가서는 이 돌추가 의미하는 것은 시장제도에서 필수불가결한 공정한 셈법과 제도가 이미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나 고조선의 화폐인 ‘돈’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로 시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법률에서도 당시의 사회에는 시장경제가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저울추의 존재는 이 시장이 매우 활발하게 움직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당시에도 도량형이 통일돼 있었으며, 산동 지역의 저울추와 무게가 같다는 사실은 산동과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미 그 이전부터 고조선의 무역이 상당히 발달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길이 무게 부피 등의 단위를 통일 한 도량형의 존재는 고조선이 여러 가지로 중국에 비해 사회제도가 매우 정교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먼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선박도 중요하지만, 항해기술 즉 배가 육지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때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이 나침반이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나침반(羅針盤)의 사용에 있어 세계 최고의 기록을 갖고 있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문무왕 9년(669년) 정월 초에 당나라 승려 법안이 신라에서 자석을 얻어간 사실이 쓰여 있고, 5월에는 급찬 지진산 등을 통해 자석 두 상자를 당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의 나침반은 송나라 때 발명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런 자료를 보더라도 세계 최초로 나침반을 발명한 나라는 신라로 볼 수 있다. 나침반에 대한 기록은 통일신라가 등장한 이듬해이지만 통일신라 전에 나침반이 사용되었음이 틀림없으며, 어느 나라보다 나침반을 사용했다면 당시 항해술도 매우 앞섰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셈법을 뒷받침 하는 정밀한 수학과 과학이 전제되며, 이를 바탕으로 하는 과학적 세계관이 실체로서 존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당시 고조선사회는 이미 저울과 추의 관계로 상징되는 정치철학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예를 들면, 단군시대의 신지 발리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신지비사’에는 고조선의 만주지역의 삼한일대의 지세를 저울에 비유한 바, 고조선은 삼한으로 황금분할 되었는데 진한을 저울대로 비유하고 변한을 저울추, 마한을 저울판으로 황금분할 되어 하나의 공동체사회를 구성하고 운영되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렇다면 고인돌에 새겨진 천문도의 수학과 철학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너무도 먼 일이고 그 기억의 흔적도 아련하지만, 새 아침에 처음 집을 나서는 설레는 마음과 호기심으로 우리의 잃어버린 철학을 찾아서 또 다시 길을 가보자! ===================================================== 돌에 새긴 천문도, 소주천문도 중국 소주(蘇州)시 문묘(공자묘)에는 남송시대(1127~1279)의 귀중본 비각이 전시돼 있다. 네 개의 비각 중에서 현재‘천문도’와 ‘지리도’, ‘제왕소운도’ 세 개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지리도 아래 이 비각들을 만든 시기와 유래가 적혀있다. 지리도아래에는 원래 1190년 황상(黃裳)이 그린 것을 순우 정미(丁未, 1247)년 왕치원(王致遠)이 사천에서 얻어 돌에 새겼다고 기록돼 있다. 천문도는 ‘소주천문도(蘇州天文圖)’ 또는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로 불리며 1247년 완성됐다. 소주천문도에는중국에서 볼 수 있는 사계절 별이 모두 새겨져 있으며, 이는 동양의 별자리 체계를 갖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각천문도이다 ------------------------------------------------ '천상 열차 분야 지도' 기원 전 3,000년 경에정확하게 하늘을 관찰하여 고인돌에 천문도를 새긴 우리 선조의 과학 기술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천상 열차 분야 지도(天象 列次 分野 之圖)'로 이어진다. 천상열차분야의 '천상天象'은 하늘의 형체이고,'열차(列次)'는 황도 부근을 12지역으로 나눈 12차이며, '분야(分野)'는 이에 대응하는 지상의 지역이다. 곧 천상열차분야지도는천상도, 열차도, 분야도라는 세 지도를 합친 지도를 뜻한다. 천상 열차 분야 지도는 고구려 말기, 당나라 군이 쳐들어온 672년에 대동강 물에 빠뜨렸는데, 다행히 그 전에 제작해둔 탁본 한 장이 조선 초에 발견되었다. 이덕일 박사는 당나라에서 의도적으로 석각본을 수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천문도를 갖고 있다는 것은 독자적인 천하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당나라가 석각 천문도를 수장한 것은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본 것이다. 천상 열차 분야 지도는 오래된 천문도 중의 하나이다. 동아시아에서 본격적인 전천 천문도의 역사는 삼가 성도에서 비롯되지만, 이 천문도는 현존하지 않으며, 그 역사적 실존 여부도 불확실하다. 다만, 그 별에 대한 정보는 당나라 때, '보천가'라는 책에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281좌 1,445개에 달하는 동아시아 별자리의 표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천문도로 그린 것이 아니며, 본격적인 전천 천문도로 1,247년에 만든 중국 소주의 '순우 천문도'가 있지만, 이것은 고구려의 석각 천문도보다 무려 9세기나 늦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계절별 별자리 엄밀하게 정의되는 용어는 아니지만 특정한 계절 밤 9시경 남쪽 하늘에서 잘 보이는 별자리들을 계절별 별자리라고 한다. 별자리를 찾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성군들로는 봄철대곡선, 여름철대삼각형, 가을철대사각형, 겨울철대삼각형이 있다. |
[카페, 우리문명 아카데미]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