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 주변의 꽃을 구경한다.
심어놓은 꽃은 별로 없이 한 가지만을 심어놓았다.
이 식물은 우리나라의 "갈퀴나물"과 똑 같은데 크기가 훨씬 크다.
엄청나게 큰 엉겅퀴.
오늘은 "마드리드"에서 "알데무나 대성당"과 "마드리드 왕궁", 그리고 "마요르 광장"을 보고 "똘레도"를 지나 "그라나다"까지 가야 한다.
그런데 아침에 버스에 오르니 "프라도 미술관"을 관람 하기로 했다고 한다.
일정이 변경된 것이다.
"마드리드"의 일정 중 "알데무나 대성당"과 "마드리드 왕궁"의 관람이 취소됐지만 "프라도 미술관"은 의외의 수확이다.
"프라도 미술관"을 가는 길가에는 내가 보려고 했던 조형물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냥 지나치면서 사진만 찍었다.
대지의 여신(女神) "시벨레스"(Cibeles : Rhea)의 분수(噴水)
미술관 옆에 있는 국립 식물원.
"프라도 미술관" 앞에 왔지만 미술관 앞에는 차를 주차할 수가 없어 미술관 뒷쪽에 있는 성당 옆으로 가서 차를 내린다.
프라도 미술관.
미술관 앞 정원에 있는 "고야"(Francisco Jose De Goya Lucientes. 1746~1828))의 동상.
미술관 앞 정원에 있는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azquez. 1599~1660)의 동상.
아시다시피 미술관안에서는 사진찍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또 찍어도 그리 좋은 사진은 안 나온다.
한정된 시간에 많은 작품을 본다는 것 조차도 무리지만 하나를 봐도 천천히 감상할 수 없기에 미련이 남는다.
나중에 미술관에서 본 그림중 기억에 남는 사진을 인터넷에서 찾아 복사를 했다.
인터넷에서 여기 저기를 뒤지다 아주 좋은 사진들은 만나는데 모두 복사가 금지되어 있었다.
다행히 한 군데서 복사를 할 수 있게 해서 몇 장만 가져와서 본다.
원래 남의 사진을 옮겨오면 출처를 밝혀야 되는데 생각해보니 복사를 하려 하는 분들이 많을것같아 출처는 밝히지 않으련다.
"카를로스 4세"(Carlos IV)때의 일이다.
스페인은 국가의 폭정에 시달리던 중 프랑스의 나폴레온 군대가 진격해 온다.
처음에는 스페인 민중들이 프랑스군을 환영했지만 곧 점령군임을 알아채고 항거에 들어간다.
1808년 5월 2일 시작된 항거는 하루뒤인 5월 3일, 수많은 군중이 살해되는 엄청난 희생자를 낸다.
당시의 스페인 소규모 시민군을 "게릴라"(Guerilla)라고 불렀으며
이때부터 "정규군"이 아닌 소규모 전투부대를 "게릴라"라고 부르는 용어가 됐다고 한다.
스페인의 독립전쟁이 끝난 뒤 1814년에 "페르난도 7세"가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프랑스 군대에 맞서 싸운 마드리드 시민을 기리는 그림을 제작할 것을 "고야"에게 주문했다.
"고야"는 1808년 5월 2일과 이튿날인 3일에 일어난 사건을 두 점의 그림으로 제작했다.
먼저 "5월 3일"의 그림을 보면,
"The 3rd of May 1808" (마드리드 수비군의 처형) 266 X 345cm. GOYA.
"고야"는 이사건이 6년을 지난 후 이때의 그림을 그린다.
"마드리드 수비군의 처형"(원 이름은 1808년 5월 3일)이다.
이미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과 처형 일보 직전의 사람들, 그 다음 처형될 사람들,
그리고 수비군을 처형하는 프랑스 군인들의 각각의 표정을 차근히 살펴봐야 한다.
특히 흰색 상의에 두 팔을 들고 있는 사람.
무릎을 꿇고 있지만 다른 사람보다 크게 그려져 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중에
1)수도사를 그린 것 이라는 것.
2)"고야" 자신을 그려 넣었다는 것. 이 제일 많이 이야기 되고 있단다.
또 땅에 흘려진 피는 "고야"가 자신의 피로 그렸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 진위는 모르겠다.
그리고 잘 봐야 할 곳은 뒤로 보이는 교회다.
어둠속에 불은 꺼져있고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이것을 가지고도 프랑스 군대가 이미 교회도 점령했다는 이야기와
교회가 불의(不義)에 등을 돌리고 어둠속으로 숨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원래 이 그림은 벽에다 그린 것을 캔파스에 옮긴 것이라고 한다.(어떻게 옮겼을까?)
그래서 이 그림만은 훼손될 우려가 있어 대출이 안된다고 한다.
"El 2 de mayo de 1808 en Madrid"(1808년 5월 2일). 1814년 "프란시스코 데 고야"
1814, 캔버스에 유채, 268.5x347.5cm
당시 나폴레옹 군대는 이집트에서 데려온 "마멜루코 용병"과 프랑스인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터번을 쓰고 둥글게 휘어진 칼을 사용하는 등의 아랍식 복장과
프랑스식 군복을 입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당시 마드리드에는 수도를 수호할 만한 군대도 없었기 때문에 마드리드 시민들은
맨손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은 짧은 칼, 밧줄, 나무 몽둥이를 들고 싸웠다.
이 날의 시민 봉기부터 프랑스에 맞선 스페인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땅바닥에는 프랑스 군인과 마드리드 시민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고,
앞줄의 마드리드 시민들은 말을 공격하고 마멜루코 용병을 칼로 찌르고 말에서 끌어 내리고 있다.
다음 그림은 한 여인을 두 가지로 그린 그림이다.
La Maja Desnuda(옷을 벗은 마하) GoYa
La Maja Vestida(옷을 입은 마하) GoYa.
이 두 그림의 여인은 한 사람이다.
즉 한 사람을 두 가지로 그렸다.
일설에는 이 여인이 "고야"의 연인(戀人)였다고도 하는데 최근 아니라는 이야기가 확실하단다.
"Maja"(마하 또는 마야)는 "유행의 첨단을 걷는 여성"이란 뜻이라고 한다.
아마도 먼저 "옷을 벗은 마하"를 그렸다가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때문에
다시 "옷을 입은 마하"를 그린듯 했다.
"옷을 벗은 마하"는 당시로는 있을 수 없는 표현이라 어두운 창고에 숨겨져 있다가 근래에 나왔단다.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Saturnus). 146X83cm GoYa.
"고야"가 말년에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원래 이 그림은 "제목이 없는 그림"(無題)이라고 한다.
후에 사람들이 그림의 내용을 보고 위와 같은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카를로스 4세 가족의 초상화 (La Familia De Carlos IV) GoYa
"카를로스" 국왕(國王) 가족의 초상화이다.
그런데 왕가(王家)의 위엄이라고는 볼수 없는, 특히 왕과 왕비는 조금은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다.
사진이 아니기에 조금 더 멋있게 그릴수도 있었을텐데,,,,
저렇게 그리는 화가나 또 저런 그림을 용납하는 왕가(王家)나 내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왼쪽에서 두번째가 "페르난도 7세"(Fernando VII)왕자다.
고개를 돌린 여인은 "페르난도 왕자"의 약혼자였지만 당시로는 불확실한 관계이므로 얼굴을 안그렸다는 설과,
"카를로스 4세"의 여동생이라는 설이 있다.
그 사이에 얼굴에 반점이 있는 여인은 "카를로스 4세"의 누님이란다.
왕자 뒤에 어두운 곳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고야" 자신이라고 한다.
왕비 "마리아 루이사"(Maria Luisa)와 아이들.
왕비의 얼굴은 인자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카를로스 4세"(King Carlos IV)와 바로 뒤에 있는 왕의 동생들이 있고, 우측에는 왕의 아들과 며느리다.
왕도 왕의 동생도 별로 온화한 모습은 아니다.
안고있는 아기의 모습이 조금 부자연스럽다.
근친결혼에 의해 등이 굽은 기형아라고 한다.
시녀들(Las Meninas) Diego Velazquez.(벨라스케스)
이그림의 원 제목은 "펠리페 4세의 가족"이였다고 한다.
그후 "시녀들"이란 제목으로 수정되었는데 가족보다는 시녀가 더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란다.
좌측에서 두 번째 소녀가 "펠리페 4세"의 두 째딸인 "마르가리타"(당시 5세)이고,
좌측의 여자가 시녀 "마리아 아우구스티나"이고 우측이 시녀 "이사벨 데 벨라스코"라고 한다.
그 옆에 검은 옷을 입은 키작은 여인은 독일 출신의 광대인 "마리 바르볼라"이고,
좌측에 서 있는 화가가 "벨라스케스"다.
흥미로운 것은 맞은 쪽 거울에 국왕인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가 보인다는 것이다.
만일 국왕 부부가 맞은 쪽에 서 있다면 사람들의 표정이 저러하지는 않을텐데,,,,
그리고 문쪽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는 남자는 누구인지 모른다고 한다.
Las Hilanderas(실 잦는 여인들) Diego Velazquez.(벨라스케스)
왼쪽의 여인이 실잣는 여인에게 뭐라 말을 하면서 붉은 장막을 걷고 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물레를 돌리는데 물레의 살이 보이지 않는다.
즉 물레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배경의 그림은 무엇일까?
그리스 신화의 한 장면이란다.
옛날에 길쌈을 아주 잘하는 "아라크네"라고 하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아테나 여신"보다 더 잘 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아테나 여신"이 찾아가 겸손하라고 설득하지만 듣지를 않자 "아라크네"를 거미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Diego Velazquez(벨라스케스)의 불카누스의 대장간.(The Forge of Vulcan)
이 그림은 태양의 신 "아폴로"(Apollo)가 대장장이 "불카누스"(Vulcanus)를 찾아와
그의 아내 "비너스"가 "마르스"(Mars)와 밀회중이라고 일러 바치는 장면이다.
깜짝 놀라는 "불카누스"와 일꾼들의 표정.
달구어진 쇳조각등을 살펴보면 얼마나 잘 된 표현인지 알만하다.
아래의 그림은 "보티첼리"(Bottcelli)의
"나스타지오 델리 오네스티의 이야기"(Historia De Nastagio Degli Onesti)의 연작그림이다.
이 이야기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8번째 이야기를 네 폭의 그림으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중 셋은 프라도 미술관에 있고 마지막의 하나는 개인 소장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첫번째 그림.
이 그림에는 한 사람이 여러 명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조금 혼란이 오기도 한다.
1) 좌측의 "나스타지오"(Nastagio)가 실연을 당하고 상심하여 숲속을 방황한다.
2) 갑자기 벌거벗은 여인이 도망쳐오고 사냥개와 말탄 청년이 쫓아오는 것을 보고
"나스타지오"는 나뭇가지를 들고 여인을 구하려 한다.
3)그러자 말탄 청년이 "나스타지오"에게 이야기를 한다.
청년은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냉정하게 거절당하고 자살을 하고 말았단다.
그후 여인도 죽어 사랑을 거절하여 청년을 죽게 한 죄로 계속하여 죽임을 당하는 벌을 받게 된다.
그 악연의 환상을 "나스타지오"가 보게 되는 것이다.
두번 째 그림.
여인을 죽인 청년은 여인의 등을 칼로 갈라 심장을 꺼내어 개에게 먹이로 준다.
깜짝 놀라 물러서는 "나스타지오"의 뒤로는 어느새 살아 난 여인이 달아나고
또 다시 말을 탄 청년이 여인의 뒤를 쫓아가고 있다.
"나스타지오"는 이와 같은 환상이 매일 같은 시간에 계속하여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세번 째 그림.
"나스타지오"는 자신의 구애를 거절한 여인과 그의 가족을 그 숲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푼다.
그 시간이 되자 참혹한 환상이 나타나고 사람들은 깜짝 놀래 어쩔줄을 모른다.
"나스타지오"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그들이 본 환상의 사연을 설명한다.
사연을 들은 사랑하는 여인과 그 가족은 마침내 "나스타지오"와의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네번 째 그림.
네 번 째의 것은 "나스타지오"와 사랑하는 여인의 결혼식 장면으로 이 그림은 개인소장품이라고 한다.
간단(?)하게 몇점의 작품을 관람하고 미술관을 나와 버스가 있는 곳으로 간다.
미술관 뒤에 있는 이 성당은 "Iglesia De Los Jerónimos Reales" 라고 한다.
"예로니모" 성인을 기리는 성당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