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제례·민속신앙·문학에서 나타나는 물 우리나라 사람들의 종교적 믿음에서 ‘물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물음은 물의 물리적·지리적 위상(位相)에 관한 물음이 아니고 정신적·정서적 위상에 관한 물음이다. 즉, 우리의 정신과 감정 속에서 물이 차지하는 위치·기능·의미 등에 관한 질문으로 그것은 당연하게도 우리의 상상 속에서 갖게 된 물의 원형 성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게 될 것이고, 물의 의미를 캐는 일이 때로는 심층 심리의 바닥까지 깊이 캐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문학작품을 통한 물의 해석에까지 관여하게 되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1. 물의 원형 성의 유래 우리는 오랜 농경 생활, 특히 수도경작의 비중이 매우 높은 농경 생활을 영위해 온 만큼 물이 생활에서 갖는 기능과 가치는 매우 높았다. 그러나 수도경작 위주의 농경 생활이 물 신앙을 성립시키는 유일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물을 생명력과 풍요의 원리로 여기는 일이 농경 생활을 맞아 비로소 생겨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은 농경 생활을 넘어선 차원에서도 그 생명력과 풍요의 원리를 향유하고 있었으되, 다만 농경 생활의 역사에 따라서 그러한 물의 속성이 더욱 보완되고 증강되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시베리아 원주민과 일본 신화 등 적지 않은 세계 신화들이 물을 모든 생명이 있는 존재들의 첫 모태로 여기고 있는데, 이것은 풍요와 생명의 원리로서 물이 갖는 원형 성이 농경 생활을 넘어서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베포도업침’이라고 일컬어지는 제주도 천지개벽 신화의 첫머리인 “삼경개문도업(三更開門都業) 제일릅긴, 요 하늘엔 하늘로 청 이슬 땅으로 흑 이슬 중앙 황이슬 나려 합수(合水)될 때, 천지인황(天地人皇) 도업으로 제이르자.”에서 보면, 우주적인 이슬 기운이 모여서 된 합수를 개벽의 계기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천지개벽의 계기가 된 물을 ‘원수(源水)’라고 하거니와, 이 원수의 관념을 농경 생활에 일방적으로 묶어서 생각할 수는 없다. 한국인이 가꾸어 온 물의 원형성은 이와 같은 신화적 원수의 관념과 농경 생활에 관련된 풍요·생명력의 원리가 상호작용을 끼치면서 복합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2. 신화적 원수(源水)와 물의 왕비들 천지개벽, 즉 창세기적인 원수 관념은 후세의 각종 홍수 전승 및 부인네들이 꾸는 물의 태몽들에 그 자취를 남겼고, 그 자취는 다시 강이나 바다를 죽음과 재생의 상징으로 형상화하는 시 작품들에까지 미치게 된다. 고구려 <동명왕 신화>에서는 동명왕의 모비인 유화(柳花)가 웅심연이라는 물 출신으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신라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閼英)이 알영정이라는 물 출신인 것과 마찬가지이며, 고려왕조의 여 시조인 용녀 또한 개성대정(開城大井)과 맺어진 물의 여인으로 되어 있다. 유화·알영·용녀는 한결같이 ‘물의 왕비’ 내지 ‘물의 여 시조’라는 성격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이들 세 왕비 가운데 유화와 알영을 각기 ‘하늘의 남성’ 또는 ‘하늘의 남신’이었던 해모수·박혁거세와 대비시켜 보면, 하늘:물=남 성왕(시조):왕비(여 시조)라는 등식 관계를 설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물이 여성 시조와 맺어질 때 물의 원수 성은 매우 뚜렷해진다. 물의 왕비들이 물이 지닌 풍요와 생명의 원리 그 자체의 형상화 또는 인간적 구현이라면 그들을 ‘물 할미’, 곧 수고(水姑)들과 같은 선에 놓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른바 ‘약수신앙(藥水信仰)’을 바치던 샘터나 우물의 지배자라고 믿은 물의 여신이 다름 아닌 ‘물 할미’이거니와, 이 ‘물할미’를 ‘물의 왕비’ 또는 ‘물의 여 시조’의 원형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물이 남성으로 표상되는 사례를 민속신앙에서 찾아보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로, 산(山)의 성이 남성과 여성 사이를 넘나드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여 산신의 경우는, 가령 가야의 정견모주(正見母主)나 신라의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의 경우가 그렇듯이, 여 산신이 나라의 시조모(始祖母)를 겸하고 있다. 반면에 물 할미가 곧 나라의 시조로 관념화된 사례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산모신(山母神), 곧 산 할미와 나라의 여 시조가 겹치는 사례를 좇아서, 알영·유화·용녀가 나라의 시조모이자 물 할미였을 가능성은 생각해 볼 만한 것이다. 생명의 원리를 간직한 우물로써 신앙화된 사례는 후대의 전승에서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는데, 광명사정(廣明寺井)·달애정(炟艾井)·양릉정(陽陵井)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3. 물의 제례(祭禮) 물이 지닌 풍요와 생명력의 원리가 ‘물의 여 시조’, ‘물 할미’ 등의 관념을 낳을 수 있다면, 물은 성역(聖域)이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고려의 물 할미라고 볼 만한 용녀와 관계된 개성대정은 신정(神井)으로 일컬어져 정사(井祠)까지 갖추고 있었다. 강하(江河)나 천정(泉井), 바다 등 물에 바치는 제례에 대한 기록은 적어도 삼국시대에서부터 나타난다.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에 보면, 고구려의 제례로서 “언제나 삼월삼질이면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하였으되, 사냥한 사슴과 돼지를 하늘과 산천에 제사 올렸다.”라는 기록이 있고, 신라의 제례로는 “삼산오악(三山五嶽)과 그 밖의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나누어서 대중소(大中小)의 제사를 올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로부터 고구려·신라에서는 이미 하천제(河川祭)를 올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신라의 경우 동해·서해·남해·북해의 사해(四海)와 동독인 토지하(土只河), 남독인 황산하(黃山河), 서독인 웅천하(熊川河), 북독인 한산하(漢山河)의 4독(四瀆), 즉 4강(江)에 중사(中祀)를 올리고 오악과 같은 서열로 중요한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 왔다. 이들에게 바치는 제례는 국가에서 주관하는 정기적 제례였다. 국가에서 드리는 부정기적인 제례로서 가뭄이 드는 따위의 비상시에 임시로 강하에 바치는 제례의 기우제가 있었는데, 왕이 직접 행하는 기우제는 강하뿐 아니라 연못 따위에서도 행해졌다. 이 밖에도 산과 강에 드리는 제례로는 메뚜기를 물리치기 위한 양황제(禳蝗祭)나 애기빌이 곧 기자(祈子)를 위한 제사가 있었다. 산천에 대하여 국가적 규모로 올리는 제례는 고려시대에 전승된다. ≪고려사≫ 권2 태조 26년 4월의 기록에, “팔관(八關)은 하늘의 신령과 명산대천과 동신을 섬기기 위함이다.”라고 한 바와 같이, 고려에서 행해지던 대규모의 국가적 종교행사인 팔관회가 부분적으로는 하천과 용신에게 제사 지내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도교의 초례(醮禮)를 위해서도 대궐 뜰에서 산과 함께 하천에도 제사를 지냈는데 이 초례는 기우·기설(눈밀이)·기양(祈禳:재변을 물리침)·기곡(祈穀)·기복(祈福) 등을 위해서 올려진 만큼 하천은 빈번하게 국가적인 제례의 대상이 되었다. ≪고려사≫에 “해독(海瀆) 산천(山川)의 신들에게 각기 훈호(勳號)를 더하다.”라는 기록이 많이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국가적 경사가 있을 때나 왕이 행차해서 특정의 산과 내를 지나갔을 때 시행되었던 일로, 산과 하천에 벼슬을 주거나 더하여 하천에 대한 공경심을 표현하고자 했다. 고려에는 이 밖에도 합굴룡사(蛤窟龍祠)·오룡묘(五龍廟)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각기 바다의 바위굴과 섬에 모셔진 용신이었던 만큼 고려시대에 섬긴 용신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태종실록≫ 권28 태종 13년 6월, 을묘의 기록에는 “본조(本朝)에서는 전조(前朝)의 제도를 이어받아서 산천에 올리는 제사의 등급을 나누지 않았으니, 나라 안의 명산·대천 및 여러 산천을 옛날 제도에 의해서 등급 나누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여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본을 따르면서 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산천에 제사 지내고 제사에 등급을 매기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 결과 남·동·서해의 3해와 한강, 경기도의 덕진(德津), 충청도의 웅진(熊津), 경상도의 가야진(伽倻津), 압록강·평양강 등 6독에는 중사를 올리고 경기도의 양진(楊津), 황해도의 아사진(阿斯津), 청천강 등에서는 소사(小祀)를 드리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시대는 산천단(山川壇)·산천성황(山川城隍)의 제도가 확립되고, 하천신 가운데 일부는 적어도 호국지신(護國之神)으로 섬겨지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