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알아보는 역사 공부>
허균의 생애 (3)
* 대북당에 입당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 출신의 서양갑(徐羊甲) · 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허균은 본심을 숨기고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이이첨에게 아부하여 대북당(大北黨)에 참여하였다. 그런 후 1613년 12월 예조참의가 되었다. 예조참의에 임명되자 바로 사간원이 '사람됨이 경박하여 본디 행신에 검속이 없고 이단을 숭봉해서 명교(名敎)에 죄를 졌다'며 파면하고 임용하지 말 것을 건의했지만 광해군은 이를 듣지 않고 허균을 신뢰하였다.
1614년 호조참의가 되고, 그해 12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천추사(千秋使)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어 중국에 다녀왔으며, 천추사로 갔을 때 조선왕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된 원인이 된 기록을 입수하여 1615년 1월 조선으로 보냈다. 그 뒤로도 명나라의 각처와 고서점을 다니며 진귀한 책과 유교, 불교 경전을 입수하여 조정으로 보냈고, 광해군은 그의 능력을 칭송하였다. 1615년 2월에는 《학해(學海)》 《임거만록(林居漫錄)》을 조선으로 보내고, 이어 몇 권의 서적을 다시 조선으로 보냈다.
1615년 2월 귀국하였으며, 2월 중순 승문원 부제조가 되었다. 그해 5월 문신들을 상대로 한 정시 문과에서 인정전이란 주제로 시를 지었는데 수석을 차지하였다. 5월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6월에는 전년도 천추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서책(書冊)을 많이 들여온 공로와 종계 변무사(辨誣事)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입수해서 보냈고 또한 명나라 세종 황제(世宗皇帝)가 친히 지은 잠(箴)과 어필(御筆)을 구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특별히 종2품으로 가자의 명이 내려졌다. 그해 6월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1615년 8월 우승지, 좌승지 등을 지내고 그해 말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다시 중국에 다녀왔다. 이 두 차례의 사행에서 그는 베이징 체류 중 명나라 학자들과 시문으로 교류, 그의 수려한 문장력에 많은 명나라 문인들과 사귀게 됐다. 명나라 문인들과 사귀면서 그들을 통해 각종 서적을 입수, 귀국할 때 《태평광기 太平廣記》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이 중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 흉서 문제에 연루
이듬해 1614년(광해군 6년) 호조참의가 되었고, 승정원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그해에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 천추사(千秋使)로 연경에 다녀왔다. 1615년에도 문신 정시에서 1등을 하고, 종2품 가의대부에 올랐으며, 다시 그 해 동지 겸 진주사가 파견될 때 동지 겸 진주부사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다. 1616년(광해군 8년) 사직 제조(社稷提調)를 거쳐 자헌대부로 승진, 형조판서가 되고, 그해 역모로 몰린 인사들 중 유찬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어 파직 당했으나 곧 복직했다. 그해 10월 정헌대부로 승진했다. 1616년 말 진주사(陳奏使) 민형남(閔馨男)가 명나라에 파견될 때 진주부사로 연경에 가 공빈 김씨의 추숭을 건의하고 되돌아왔다. 이듬해 1617년에는 정2품 의정부좌참찬 겸 예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흉격 사건에 연루되어 길주에 유배됐다가 풀려났다.
1617년 2월 부사직(副司直)으로 강등당했고 흉격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음을 해명한다. 그해 3월 아무 관련이 없음으로 드러나 문제는 종결된다. 그러나 그 뒤로도 계속 이런 저런 역모와 흉서 사건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려 곤경에 처하게 된다.
* 인목대비 폐모론
1617년(광해군 9년) 말부터 허균은 인목대비 폐출 논의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인목대비 폐모론에 앞장 선 것은 후일 두고두고 논란거리를 제공한다. 허균이 사형당한 후 그의 외손 이필진은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의논에 끼어든 것은 본심이 아니었고 간흉(奸凶·이이첨)의 꾐에 빠진 것”이라고 그를 변호했지만, 허균은 남의 사주로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폐비 논의에 앞장섰다. 그해 11월 행 사직으로 폐모론에 적극 참여하였다. 심지어 깡패들을 모아 궁궐 뒷산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는데, 정황상 인목대비 암살을 계획한 것 같다. 이 행동은 후에 허균 본인이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그가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 찬성하자 그를 좋게 보던 인사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비교적 그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던 기자헌 조차 허균을 비난하였고, 그의 문인이자 기자헌의 아들인 기준격 역시 그에게 등을 돌렸다. 한편 신분제도와 서얼 차별 등에 항거하기 위하여 서자와 불만계층을 규합하여 혁명을 계획하였으나 그의 거사 계획이 소문이 나면서 외부로 확산되었다. 이는 이이첨, 김개시 등이 칠서의 변에 연루된 서자들과 친분이 있던 허균을 의심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허균은 이이첨, 정인홍보다도 더 인목대비 폐모론에 앞장섰는데, 이 때문에 북인 내에서도 폐모에 반대하는 소북의 영수이자 영의정인 기자헌(奇自獻)과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 이 일로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가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폐모에 반대한 기자헌이 귀양에 처해지고 길주로 유배되자, 그 아들 기준격은 허균이 배후조종한 것으로 의심, 부친을 구하기 위해 비밀상소를 올리고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고 주장하면서 파란이 일어난다. 바로 허균도 상소를 올려 자신은 아무 관련이 없음을 변명하였다.
* 탄핵과 사형
1617년 12월 12일 의정부좌참찬이 되었다가 그해 12월 26일 우참찬이 되었다. 그러나 기준격 등은 계속 상소를 올려 그가 역모를 꾸민다고 공격한다. 1618년 1월 기준격은 계속 상소를 올려 그를 공격했고, 1618년 1월 좌참찬이 되고 그 역시 자신이 역모와 무관하다며 해명을 한다. 결국 그해 2월 우의정 한효순 등이 2품 이상의 대신들을 이끌고 허균과 기자헌을 추국하고 문제를 종결시킬 것을 청한다. 허균도 자신을 변호하는 맞 상소를 올리는데 광해군은 웬일인지 진상을 조사하지 않고 묻어두었다. 그 와중에 허균은 이이첨과 관계가 멀어지게 된다. 이 무렵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허균의 딸이 양제(세자의 후궁)로 내정된 것이다. 허균의 딸은 소훈이 되어 입궐하였다. 허균에 대한 이이첨의 경계는 한층 강화되었고, 그를 제거하기로 기도한다.
그런데 이이첨이 허균을 제거 대상으로 바라보는 중에 광해군 10년(1618) 8월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1618년 8월 남대문 격문은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고 한다.
1618년 기준격이 상소를 올려 허균이 왕의 신임을 얻은 것을 기화로 반란을 계획한다고 모함하고, 허균이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허균에게는 계속 국문이 열렸고 그때마다 무수한 고문이 가해졌다. 결국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고 응하게 되고, 그의 심복들과 함께 능지처참형을 당해 생을 마감한다.
* 최후
그해 사헌부와 사간원은 계속 허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해 8월 21일 사헌부의 탄핵 상소가 올려진 뒤 바로 파면 당했다.
벽서의 작성자가 허균이란 소문이 돌면서 광해군은 과거 기준격의 상소문을 국청에 내려 조사하게 했다. 자신의 최후를 예감한 허균은 8월16일 자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를 딸의 집으로 옮겨놓고 다음날 체포된다. 그는 도피하라는 지인들의 권고를 거절하고 자신의 저서와 작품들, 누나 허난설헌의 시문들을 모두 손수 장녀의 집에 옮겼다. 그는 사위 이사성(李士星)에게 나중에 아들에게 물려주어 간행하도록 할 것을 부탁했고, 당시 어린 외손자인 이필진에게도 나중에 자신의 문집을 꼭 간행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기기도 했다.
당시의 허균에 대한 평가는 총명하고 영발(英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됨에 대하여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해 8월 16일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된 뒤 국문을 받고 8월 24일 한성부에서 능지처참되었다. 시집간 두 딸은 연좌되지 않았고 그의 아들들은 연좌되어 처형당한다. 그러나 다른 아들들은 하인들의 도움으로 조령 근처로 숨었다가 경상북도 영천과 울산에 숨어 살았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49세였다. 그에게 능지처참이 집행될 때 무려 3,000번 이상 회질이 가해져 살점이 도려내진 뒤 목이 잘려 매우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가 체포되자 그와 관련된 인물이 대부분 체포되었고 사위 이사성 역시 체포되어 국문을 당했으나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친하게 지내지 않았음을 들어 극적으로 화를 모면하였다. 그의 조카인 허채, 허보, 허신 등도 의금부로 잡혀가 국문을 당했지만 허균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음을 들어 화를 모면하였다. 그가 처형된 직후에도 계속 그와 관련된 인물들이 의금부와 포도청에 불려다니며 공초를 당했다.
* 사후
그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고 훗날 20세기 초에 이르러 선산 근처에 가묘가 조성되었다. 그의 사후 연좌제가 적용되어 강릉에 있는 아버지 허엽의 묘소도 부관참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비 오는 날이면 허균의 선영에는 울부짖는 소리가 나, 어느 선비가 없는 자식으로 생각하라는 내용의 위령제를 지낸 뒤 울음소리가 그쳤다 한다. 허균 사후 그의 후손들은 끊긴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그의 후손들 중 일부는 파가 다른 문중인 (허목 봉례공파)에 양자로 가거나 타인의 후손인 것처럼 변성명을 하고 후손을 이어왔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허균의 살아남은 아들(허굉)의 직계 자손들이 가첩을 통해 허균의 직계 후손임을 주장하여 오다가, 1995년 양천허씨 허추자산공파 세보에 판도좌랑공 11세손(균)파 교산공파로 숨겨긴 혈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의 작품인 홍길동전은 인조반정 직전 유몽인 등이 자신들의 문집과 서신 등에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이라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후대에 홍길동전의 저자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허균의 문집과 성소부부고 등은 1668년 외손자 이필진이 간행하여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 이후에도 그가 북인과 대북당원이었던 탓에 복권되지 못하였다. 정조 때와 고종 때 그에 대한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노론의 강한 반대로 무산되었고, 그는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복권되지 못한다. 1910년(융희 4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그의 저서 홍길동전과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 사상과 활동
그는 자신의 문집에서 〈관론(官論)〉, 〈정론(政論)〉, 〈병론(兵論)〉, 〈유재론(遺才論)〉등을 통해 민본사상과 국방 강화 정책 추진, 신분계급의 타파와 평등한 인재등용과 붕당배척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적서차별의 부당함과 부패관료를 규탄하는 글을 여러 편 남겨 사회비판적인 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는 학론(學論)·정론(政論)·유재론(遺才論)·호민론(豪民論)의 논설을 통해 당시 정부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내정개혁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원시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 인재 등용론
그는 적자와 서자 모두에게 공평하고 균등한 기회를 부여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스승 손곡 이달이 서자로서 출세하지 못한 것이 이유라고도 하고, 허균 자신이 재취부인의 소생으로 서자들과 다를 바 없는 불우한 처지라서 이에 공감했다는 설도 있다.
* 사상의 자유
유교 사상에 얽매이지 않은 사상적 편력은 당대에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다.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으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 도교와 노장사상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이러한 사상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빠질뻔 했다고도 고백하였고, 유교 이외의 사상에서도 정답을 찾을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있었으며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번하였다는 고백을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불교에 호감, 흥미를 갖는다는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편지글 등을 통해 일부 밝혔다.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내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 〈한정록(閑情錄)〉등을 통해 은둔의 실천과 방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으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허균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을 하였으니, 이는 곧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입증한다. 일각에서는 그를 조선인 최초의 천주교인으로 보기도 한다.
* 죽음에 대한 의문점
그의 처형을 두고 당시 조정의 권신이었던 유희분이 죄인에 대한 면밀한 심문 없이 자백 직후 형을 집행했다 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 이를 두고 허균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했던 또 다른 권신 이이첨이 처형의 정당성과 허균의 역모 혐의를 강조하면서 이 논란은 가라앉았으나, 허균이 능지처참되던 날 형장에서 죄안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는 증언이 있어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허균은 처형 직전 광해군이 친국하는 자리에서 광해군을 향해 '할 말이 있다' 고 외쳤으나 곧 제지당하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또한 이이첨은 허균이 의금부에 하옥되어 있던 당시 허균에게 처벌은 없을 것이라며 꾸준히 안심시켰다고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실록은 '왕 역시 허균의 역모와 관련하여 사실 관계를 더 파악하려고 하였으나 권신들의 강압으로 형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군다나 허균과 함께 능지처참형을 당한 김개는 1678년(숙종 4년) '결정적인 죄안이 없다'는 당시 도승지였던 김석주의 주청에 따라 신원되면서 허균의 죄안의 존재 여부 자체에 대한 의문을 낳고 있다. 이러한 의문점 때문에 그의 하옥부터 형 집행의 순간까지를 소설화하거나 드라마로 제작하는 등 많은 흥밋거리도 낳고 있다.
1623년 3월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시절의 무수한 옥사로 희생된 사람들은 거의 복권과 추숭이 이루어졌으나, 허균만은 유일하게 대한제국이 망하던 시점까지 복권되지 않고, 역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처형을 예감하고 자신의 문집 《성소부부고》를 자신의 외가에 비밀리에 의탁했으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그의 사상과 학문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어 있다. 실제 그 후 국가의 변란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했다. 역적으로 형을 당한 까닭에 그의 저작들은 모두 불태워지고 〈성수시화 惺叟詩話〉 · 〈학산초담〉(鶴山樵談) · 〈성소부부고〉 등 일부만이 남아 20세기까지 전한다.
죽음이 임박해옴을 예감한 허균은 1617년말 맏사위인 이사성(李士星)에게 자신이 수집한 4000여권의 장서도 맏사위 이사성에게 보낸다. 또한 자기 문집을 정리해 큰사위에게 보낸다. 허균의 문집은 외손자이자 이사성의 아들인 이필진에게 전해졌고 이필진의 묘지명에 허씨의 책 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 음식 평론
허균은 한국 최초의 음식 평론서도 남겼다. 그가 쓴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 품평서 '도문대작'에 관한 내용으로 꾸며진다. 이 책에는 허균이 40 평생 먹어본 조선 최고의 맛이 기록돼 있다. 3일 동안 입에서 향이 가시지 않는다는 강릉의 방풍죽, 회 한 젓가락에 돌아갈 곳을 잊게 한다는 한강의 숭어와 웅어 등 177가지 별미에 대한 평가가 들어있다. 제작진은 "이 책에 등장하는 특산물 중에는 현재 사라졌거나 식재료로 이용되지 않는 것들도 많다"며 "조선 중기 우리 음식 문화의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 평가
유몽인은 그가 "역적 허균은 총명하고 재기가 뛰어났다. 고 평가했다. 그가 지은 소설 《홍길동전》은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허균이 진보적인 종교인이어서, 천시 받던 불교는 물론 천주교회까지 신봉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한편 기인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문집에 실려 있는 그의 한시는 많지는 않지만 국내외로부터 품격이 높고 시어가 정교하다는 평을 받는다. 시화(詩話)에 실려 있는 그의 문학비평은 당대에는 물론 현재에도 문학에 대한 안목을 인정받고 있다.
사람됨에 대하여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볼 때 몇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대변해주고 있다.
* 가족 관계
허균이 처형당할 당시 이미 출가한 두 딸은 연좌되지 않았다. 그밖에 이복 형 허성과 친형 허봉의 아들들 역시 연좌되지 않는다. 동인의 초대 당수인 성암 김효원과는 이중 인척이 된다. 김효원은 그의 후처의 친정아버지인데 그의 형 허성의 딸이 김효원의 아들 김극건의 부인이 된다. 김효원의 아들 김극건은 그와 처남 매부간이면서 조카사위-처삼촌간인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그의 아들들은 처형당했고, 허굉 등 일부만이 기적적으로 숨어서 후사를 이었다. 또한 이사성에게 시집간 큰딸, 의창군에게 시집간 딸, 광해군의 세자인 폐세자 질의 후궁인 소훈으로 책봉된 딸은 화를 면하였다. |
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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