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강석태
추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햇살이 따갑다.
오늘은 제주를 서양에 알린 외국인을 찾아보고 공부를 하는 날인데 마침 외국인 신부님이 머물렀던 성당터가 이 하논 분화구안에 있었다고해서 아무리 봐도 오름이란 생각이 안드는 하논부터 소개를 하면서 시작합니다.
하논의 탄생과 특징
하논은 논이 많다. 라는 제주말로 큰 논이란 뜻의 한 논이 변형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논분화구는 서귀포시 호근동에 위치한 한반도 최대의 화산분화구로 제주도내 368개의 오름 중의 하나인데
예전에는 분화구가 너무커서 화산체인줄도 모른체 큰 화로로 보인다고 홍로라고 불렀고
나중에 홍리 동쪽을 동홍,서쪽을 서홍동으로 유래가 되었다.
깊이는 약 143m, 분화구의 직선거리 중 동서방향은 1.8㎞, 남북방향 1.3㎞의 타원형 화산체로 3만~7만6천년 이전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응회환의 오름이다
용암이나 화산재 분출 없이 지하 깊은 땅속에서 지하수를 만나 폭발하면서 생성된 마르(maar)형 분화구로써 지표면보다 낮게 형성된 화산체로 산체의 크기에 비해서 매우 큰 화구가 형성되는 특징이 있다.
또 화산이 다시 이중으로 폭발하면서 화구안에 작은 오름을 알오름,보롬이오름이라고 동네사람들이 불려진다.
마르(maar) 란?
독일에 가면 이런형태가 많이 있는데 보통은 폭발할때 하늘로 치솟게 되는데 재도없고 용암도 분출하지 않으며 이 안에서 수증기폭발을 해서
분화가 옆으로 번지는 형태로 지면보다 낮고 분화구가 상대적으로 매우 큰 형태를 말한다.
또한, 하논분화구는 이탄 습지로서 다양한 생명체나 식물들이 썩지 않은체 발견 연대별 생활상이나 식생을 연구하는데 가치가 있는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응회환 화산체와 분석구가 동시에 나타나는 이중화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고학적 가치연구의 최적지로 알려져 있다
이탄층이란 ?
- (지질) 부패와 분해가 완전히 되지 않은 생물과 식물이 유해가 진흙과 함께 늪이나 못의 물밑에 쌓인 지층을 말한다.
하논 분화구 안에서 샘솟는 물은 하루 1천~5천 리터가 분출되고 있으며, 이 용천수를 이용하여 5백여 년 전부터 벼농사를 짓고 또 옆에 선반내랑 합처져서 천지연으로 흐르고 있다.
이러한 큰 분화구를 갖고 있어서 2002년도에 분화구에 야구장 건설 계획을 세웠다가 환경단체의 반대로 철회되는 일이 있기도 하였으며, 각종 난개발로 인한 하논분화구의 외형 파괴가 심각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2006년 이후 제주의 고위층.전문가를 중심으로 하논 복원을 위한 추진협의체가 구성되었으나 지금은 유야무야된 상태이다.
옛 서귀포 성당터
하논성당은,
1900년도 6월 김원영신부에 의해 당시 최초로 하논에서 설립되었으며, 1902년 홍로성당으로 이전하기까지 산남지역이 실질적인 모태 성당이다.1937년 현재의 서귀포 성당으로 이전 정착되었다.
에밀 타케신부가 부임하면서 선교활동도 중요했지만 어려운 어린아이들을 돌보기위한 활동을 열심히 했다.
천주교가 제주에 들어오면서 급격한 교세화장의 과정에서 지역 토호세력들과 갈등이 불거지면서
제주에서 1901년 발생한 신축민란(이재수의 난)의 동기가 되기도 했다.
제주를 서양에 알린 외국인을 정리를 하면
1. 하멜(1930~1992, 독신)
- 네덜란드 사람으로서 동인도 연합회사 상선 스페르버르호 선원
-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 중 제주도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 선원64명중 36명만 살아
- 일행은 10개월만에 탈출을 감행하다다시 붙잡혀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어 훈련도감 박연 아래 배속후 틈만 나면 탈출을 시도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살면서 13년간 탈출전까지 매일 일기를 작성,
- 하멜 등 8명이 일본으로 탈출 후 이 기간 동안 겪은 일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
임금을 지급받기 위해 첨부자료로 사용되었고 이는 곧 책으로 출판되었고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어,독일어, 그리고 영어로 번역되어 출간되면서 유럽에 코리아가 알려진다.
- 이것이 하멜표류기이며 제주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 계기가 되었다.
-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외국인이 쓴 최초의 가장 충실한 조선견문록인 셈이다.
2. 에밀 타케(한국명 : 엄택기, 1873~1952)
- 프랑스 출신 신부
- 1897년 24세에 파리 신학교 졸업후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한 후
- 1902~1915년 서귀포 하논성당 3대 주임신부로 부임
- 13년간 제주에 살면서 선교활동,식물채집 활동을 하였는데 1908년 관음사 인근에서 자생 왕벗나무를 발견
유럽학계보고 제주가 원산지라는걸 세상에 알렸고 한국 식물 분류학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 1911년 일본 포리 신부가 에밀 타케 신부에게 보내온 일본 온주밀감 14그루는 오늘날 제주도 감귤산업의 근간이 되었다.
지금도 옛 서홍성당 자리에 한그루가 남아있다.
- 13년 만에 대구교구로 이동해 가면서 제주왕벚나무 한그루 대구성당에 심었고, 지금은 거목으로 자란 제주왕벚나무 옆에
타케 신부의 묘소가 있음.
3. 지그프리트 겐테(1870~1904)
- 독일의 쾰른신문사 기자이면서 지리학자였다.
- 신문사 동아시아 특파원이자 지리학자였던 겐테는 해외 특파원 활동 중 1901년 6~11월의 6개월동안
강원도,서울,제주를 방문하여 여행기를 남겼다.
- 서양인으로 제주의 한라산을 처음 등정한 사람이다.
- 두 개의 기압계로 한라산의 높이를 측정하여 1,950m라고 발표한 최초의 인물이며,
- 퀼른신문에 한국, 겐테 박사의 여행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하면서 제주의 가치를 세계에 알린 인물
4. 어네스트 윌슨(1876~1930)
- 영국 식물학자로 1917년에 한라산에서 채집한 구상나무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 윌슨이 명명한 구상나무의 학명은 아비에스 코리아나 즉 한국의 전나무라는 뜻이며 신종 기재문에서 구상나무를 한국의 식 물상에 가장 흥미로운 종중의 하나라고 기록했다.
- 이 나무를 제주인들이 ‘쿠살낭’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구상나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구상나무잎이 성게가시처럼 생겼다 해서 쿠살낭이라 불렸다고 전해진다.
- 어네스트 윌슨은 1914년 일본에 첫발을 내디딘 야쿠시마섬에도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고 윌슨 그루터기.윌슨공원등등
잘 보존 관리해서 야쿠시마의 상징으로 전해지고 있다.
감사합나다.
첫댓글 와우~
잘 정리된 글에 다시금 복습이됩니다.
어려운 시절에 우리 제주도의 자연과 문화를 세계에 알린 서양인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우리 스스로 개척하지 못한 시대의 그늘이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우리 제주 우리땅,
더아끼고 보호하는데 일조하길 다짐해봅니다
긴 내용을 잘도 정리하셨네요.
사진이 가을 분위기를 물씬 전해줍니다.
수고하셨어요 ^^
미처 몰랐던 사실들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 합니다~~다시 한번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
함께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글을 읽어가는동안 마치 함께 동행한
기분이었습니다~~ㅎㅎ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거의 모든 조사를 다시 하신 것 같아 제 차례가 걱정됩니다. 하논에 들어서는 순간 바깥 세상과 분리된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