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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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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스크랩 한양조씨 월담헌및사월종택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17 13.06.23 19: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월담헌 및 사월종택(月潭軒 및 沙月宗宅)
소 재 지 :  영양읍 하원리 205-1
건 축 주 :  조임(趙任)
건축시기 :  1602년
소 유 자 :  조관호(관리자 : 조준길)
문 화 재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52호


건축 이야기
월담헌은 사월(沙月) 조임(趙任)이 1602년(선조35)에 세운 살림집이다. 조임은 10세때 부친을 여의고, 영해면 원구2리 옷금 안동 권씨 종가에 장가를 든 후 처외가인 인량리 대흥 백씨인 백장단(白長湍)댁의 재산을 천석 넘게 얻었다. 이 재물을 가지고 이름난 승려인 성지(性智)가 터를 잡은 곳에 집을 세웠다. 또한 종택은 낙동강 지류인 반반천 상류의 옥선대를 바라보는 경승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임란 등의 전란에도 병화를 입지 않아 영양에서 제일가는 명지로 꼽힌다. 월담헌이라는 이름은 주자의 「무이구곡가」에서 취하였고, 현판의 글씨는 창석 이준(李埈)의 친필이다.

어떤 사람이 “그대의 헌함 이름은 ‘달이 빈 산에 가득하고, 물이 못에 가득하다’는 뜻인가?”라고 물었다. 내가 “무이구곡(武夷九曲)은 주자가 산수에 흥취를 붙인 것인데, 나처럼 용렬한 사람이 어찌 현인의 마음과 자취에 비길 수 있겠는가. 다만 물이 못을 이루어 달빛을 더욱 잘 받아들이고, 헌함이 못 위에 있어 맑은 기운을 서로 비추기 때문에 경치에 따라 이름을 붙였을 뿐이네.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건축 특징
월담헌은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누각을 주 건물로 하여 주택을 사각형으로 배치하였다. 이는 매우 희귀한 예로, 개인 주택으로 정남향(正南向)인 집은 궁중 건물이 아니고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방이 셋이고, 마루가 4칸으로 규모가 크고 건축 양식이 특이하다. 이 종택은 400년 이상의 고식을 간직하였고, 누마루의 각 문에는 중간설주를 문짝 사이에 배치하였다. 누각형 재청(齋廳)이 사당 앞쪽에 있었으나 현재 소실되었다.


건축 구성
사월 종택은 주위에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다. 정침의 좌측에는 3칸 규모의 초가 방앗간채를 두었고, 담장 밖 우측 언덕 위에 3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정침은 원래 일자형(日字形)에 가까운 배치형태로 지어졌으나, 제청과 문간채는 철거되었다. 현재는 ㄷ자형의 안채 우측에 ㄱ자형의 사라애가 연접된 형태로 축소되었다. 문간채는 이 집안이 자손이 귀한 탓에 풍수상의 이유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좌측을 통째로 온돌방으로 꾸민 후 뒤쪽으로 다시 온돌방 1칸을 두었으며, 우측에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4칸 마루방을 연접시켰다. 마루방 하부에는 민흘림의 하층주를 세워 마루방은 누마루를 이루게 하였으며, 정면과 우측면에는 평난간을 세운 헌함을 둘렀다. 가구는 오량가의 홑처마집인데, 대청 주위의 문틀의 모습은 모두 중간 설주를 세운 고식(古式)의 영쌍창으로 구성되었다.


현판
월담헌기(月潭軒記)
조임
축천단기(祝天壇記)
월담헌제영(月潭軒題詠)

 

관련인물
- 조임(趙任, 1573~1644)
자는 자중(自重)이고, 호는 사월(沙月)이며, 본관은 한양이다. 그는 임란과 호란 때에 큰 공을 세워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영양 한양 조씨 세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아버지는 조광인(趙光仁)이고, 어머니는 광주안씨 안수인(安壽仁)의 따님으로, 두 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임은 10세 때 부친을 여의고 상(喪)을 집행하는데 성인과 같이 하였으며, 글을 읽을 때에도 나라가 위급함을 당한 안타까움을 탄식하였다. 또한, 일찍이 정암 조광조 선생께 가학의 진수를 이어받지 못하고, 퇴도 선생께 배움을 청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학문에 대한 지향을 보였다. 뒤에 송간(松澗) 김윤명(金允明)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약관의 나이로 맏형인 수월(水月) 조검(趙儉)과 함께 화왕성 전투에 진력하니 의병대장 곽재우가 일찍이 보지 못한 일이라며 기이하게 여겼다.

1627년(인조5)에 후금이 침입하는 난이 일어나 나라에서 군량미가 부족해 나라에서 모속령(募粟令)을 내리니 “이 땅에서 먹고 사는 것이 나라 은혜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 벼슬에 있지 않다고 하여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곳간을 열어 양곡을 나라에 헌납하였다.

1636년(인조14)에 청이 다시 침입하였으나 이미 70이 가까운 고령이라 몸소 싸움터에 나갈 수 없게 되어 집 뒤에 단을 세우고 매일 밤 목욕재계하고 단에 올라 이 땅에서 오랑캐를 몰아 낼 것을 하늘에 빌었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화의가 이루어지자 단에 올라 통곡하니 이 단을 향리 사람들이 ‘축천단’이라 불렀다. 축천단 비각은 2009년 현재, 도지정 문화재로 지정하는 심의 단계에 있다

만년에는 경학에 전심하여 자리 곁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논어 구절을 새겨 평생 경계하였다. 평소에는 전장을 갈라 조상을 받드는 제수를 넉넉히 하고, 조카들 중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 주니 영해부사 유대일(兪大逸)이 감탄하기를, “류씨가훈(柳氏家訓) 범씨의장(范氏義庄) 해동대노(海東大老) 산남유일(山南遺逸)”이라고 하였다. 또한, 숙운정을 지어 벗들과 시가를 짓고, 시사를 논의하였으며, 원근의 후생들을 강학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명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필시(絶筆詩)를 한 수 남기고 운명하셨다.

 

영양 > 영양청기권 > 영양읍 하원리
- 영양읍은 서북쪽으로 일월산이 뻗어 내려와서 일월면을 읍의 경계로 접해 있으며, 다시 청기면 금성산을 사이하여 팔수곡 큰 재를 분기점으로 읍내 서부리와 연접해 있다. 영양읍의 동과 서를 가르는 반변천은 일월면 곡강에서 상원리를 돌아 대천 2리 입구에서 동천(東川)과 합류하고 감천리를 지나 입암면으로 흘러 낙동강의 동쪽 원류를 이룬다. 1676년에 이르러 현재의 군청 자리에 동헌(東軒)이 들어서게 되면서 동부리와 서부리가 영양군의 중심을 이루었다.
하원리는 마을의 동쪽과 서쪽을 반변천으로 가로 둘러서 크게 두 개의 자연 마을로 나누어진다. 강물과 산의 경치가 뛰어난 마을로, 본래 영양군 동면의 지역으로서 상원리의 아래쪽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에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원당동과 문현동의 일부를 따서 하원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원리에는 조임 선생의 옛 신도비와 사월공이 세운 숙운정, 종택인 월담헌이 있다. 신도비는 원댕이 마을 앞쪽에 있는 숙운정 영역 안에 새로 세워져 있다.

문고개,문현(文峴)은 하원리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삼지리에서 대천리로 가는 길목의 고개인데, 이 고개가 문처럼 생겨 출입구의 기능을 한다고 하여 문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옛날에는 동면 사무소와 물방앗간이 있었다고 한다. 문현은 문고개의 한자식 표현이다.

원댕이,원당(元塘)은 반변천 상류의 강변에 있는 마을로 안쪽을 내원당, 바깥쪽을 외원당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오씨들이 살았으나 조선 중종조 기묘사화 뒤에 조원이 입향하면서 지금은 한양 조씨들이 더 많이 거주하고 있다. 큰 못이 있다하여 원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래는 대천 다리에서 원당으로 들어오는 곳에 산이 양쪽으로 이어져 있었고 강물이 삼지리로 흘렀으나 천지개벽이 일어나 앞산이 끊어지고 물에 떠내려가 독립되었다고 한다. 또한, 옛날 옥황선녀가 옥선대에 내려와서 비파담에서 목욕하고 선유굴에서 놀았다는 전설이 구전으로 전해온다.
원당이 마주 보는 마을이 안원댕이 또는 내원당이다. 강 안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뚝넘이는 원당에서 둑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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