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산국민관광단지-단군로계단길-참성단-정상-암릉지대-정수사 |
※산행지 및 코스는 원활한 산악회 운영,기상변화,현지사정등으로 인해
다소 변경 시행 될 수 있습니다.
◈ 산행비 :[금액 확정시 차후 공지합니다]
※위 회비 산정기준은 90명 이상 예약을 전제로 전세버스 대여료,숙박료,식사5끼,
문화재 관람료,왕복 승선료(버스포함),간식&안주류,기타 진행경비가 포함 됨니다.
▶준 비 물 : 세면도구(온천준비). 행동식. 온수. 여벌옷. 여벌양말. ★우의.
개인 상비약. 헤드렌턴. 비상금
☞계좌번호: 차후 공지함
◈리 더: 산행부장 정병범(구름 : 010-2566-0005)
여성대장 정삼덕(소헌 : 016-568-0602)
◈문의처:
☎사무실 055-324-8848
회 장: 011-877-6294 (최해룡-푸른바다)
부회장: 010-3843-8715 (정상환-발길따라)
여부회장 : 016-9611-5500 (최은순-골목대장)
총 무: 010-3592-7850 (김영수-별바람)
여총무: 010-4547-5859 (주숙희-수피아)
※본 산악회는 비영리 순수 동호회로써 산악회 운영진은 산행코스에 따라
안내할뿐 산행중 발생하는 안전사고는 각자의 책임이며, 저희 산악회에서는
어떤 법률적 책임도 지지않습니다.
▶첫째날(17일)
장유출발(08:00)~인천송도점심식사(12:30)~인천대교(13:30)~애기봉 및 전등사관람(14:00)~
외포리선착장(17:00)~석모도(17:30)~매음리펜션도착/숙소배정(18:00)~저녁식사&바베큐 파티(18:30)~
용궁 노천온천 온천욕/자유시간(22:00)~취침
▶둘째날(18일)
기상&식사(06:00)~보문사 관람&낙가산일출산행(07:00~08:30)~석모도출발(09:00)~마니산산행 [첨성단-마니산-선수능-정수사10:00~13:00]~
황산도점심식사(14:00)~서해대교(15:00)~해미읍성&수덕사 관람(16:00)~ 수덕사 저녁식사(18:00)~김해 장유도착(21:30)~귀가
◈ 산소개
마니산-원래의 이름은 두악(頭嶽)으로 머리산, 또는 마리산 이라고도 부르며,
마리란 머리를 뜻하는 고어(古語=같은 말: 옛말)로 강화도뿐 아니라 전민족의 머리로
상징되어 민족의 영산으로 숭앙되여왔다.
참성단(제천단)
해발 472.1m의 강화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상봉에는 단군 왕검께서 단기51년(BC- 2283)
민족의 영화와 발전을 위하여 봄 가을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위해 쌓았다는 제단이 참성당
이며(마니산 가운데 봉우리 해발465m)이 있으며 사적제 136호이다.
단군께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라고 전해오는 곳으로 "마니산 제천단"이라고도한다.
자연석으로 기초를 둥글게쌓고 단은 그위에 네모로 쌓았다.
아래 둥근부분의 지름은 4.5m이며, 상단네모의 1변의 길이는 1.98m이다.
단의 높이는 5.1m이며, 하단의 직경은 11.75m이며, 상단 한변의 길이가 6.5m인 정사각형 이고 단상의 넓이는 42.25㎡다.
상방하원(上方下圓) 즉 위가 네모나고 아래는 둥근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인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생각에서 유래된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에 임금이나 제관이 참성당에서 제사를 올렸으며, 조선시대에도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고려원종11년(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인조17년(1639)에 다시 쌓았고, 숙종 26년(1700)에 보수하였다.
매년10월3일 제천행사가 있으며, 전국체전 성화가 칠선녀에 의해 이곳에서 봉화를 채화하는 의식이 열린다.
산세가 수려하고 기암적벽이 산재해 있고 화강암반이 비교적 넓게 분포되어있다.
또한 기(氣))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세게 나온다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으며 1977년
3월31일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였다.
▶ 전등사
'삼랑성(三郞城)' 동문 (국가사적 제 130호)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부르는데
전등사(傳燈寺)를 갈려면 이 성 안으로 들어가야합니다.
전등사는 삼랑성 안에 있다는 이야기죠.
주차장에서 매표소로 가는길에 계단이 꽤 높은데
생각보단 체력을 요하는 깔딱고개 아니 깔딱계단입니다.
2,500원에 입장권을 구입하고 성문을 들어섭니다.
고려사에는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의 세 아들(부여, 부우, 부소 )이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삼랑성'이라 부르지요.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삼국시대에 그 위에 막돌을 맞추어가며 쌓았고
성체 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고려, 조선시대을 거치며 더욱 보강되었다는데
왠지 성이라 부르기엔 소박한 느낌이듭니다.
성안에는 전등사는 물론 고려시대에는 가궐(假闕)
조선시대에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있었다는군요.
병인양요(1866년)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 군을 물리쳐
이곳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 과 왕실 족보인 '선원보'를 지켰다.
'양헌수 승전비'
1866년 병인양요(홍선대원군이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를 점령)때
조정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여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양헌수(1816~1888)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873년(고종 10)에 양헌수 장군 승전비와 비각을 이곳 동문앞에 건립한 것이랍니다.
비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總梁公憲洙勝戰碑)'라고 새겨져 있지요.
전등사 대웅전 까지는 성문(동문)에서 200여m를 걸어야 하지만 완만한 평지입니다.
'윤장대(輪藏臺)'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것으로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하니 공덕을 쌍아 보세요.
600년이 넘은 은행나무
암, 수 두 그루가 있고 꽃은 피는데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데 열매를 안맺는 전설도 있더군요.
전등사에는 전설이 깃든 고목(古木)이 유난히 많이 있더군요.
전등사를 찾은 사람들이 하나하나 쌓으며 소원을 빌었을 돌탑(?)
전등사 초입에 전통 찻집 '죽림다원'
우측 게단을 오르면 '대조루'를 지나 '대웅보전'이 나온다
대조루앞 단풍나무
단풍나무의 유혹을 외면하고 '정묵당'으로...
'범종 종각' 과 '약수터'
커다란 돌우물통 안에 수북히 쌓인 동전을 보니
로마의 트레비 분수가 부럽지 않더군요.
'달마대사'(?)
전등사에는 '대웅보전'의 '나부상'이 유명한데
그외에도 죽은나무 여기저기에 조각품이 많이 보입니다.
'범종각'
'범종'(보물 제393호)
이 종은 중국 송(宋)나라 때(1097년)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에서 무쇠로 만든 중국종으로
음통이 없으며 겉에 상ㆍ중ㆍ하로 구획이 지어져 띠가 둘려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어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하게 생겼습니다.
표면에 8개의 네모진 구획이 마련되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많이 마멸되어 판독하기가 어렵다.
이 종은 기하학적 무늬로 장중하고 소박한 중국 종의 솜씨를 보이며
종소리가 맑고 아름다운게 특징이랍니다.
일제 말기 군수 물자 수집에 광분한 일제가
공출이란 명목으로 빼앗아 가는 바람에
전등사를 떠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으나
광복 이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전등사로 옮겨오는 시련을 겪기도 했답니다.
'극락암'
범종 종각과 명부전 사이의 계단위에 있는 근래에 세워진 건물로
전등사 조실이었던 서운 큰스님과 상묵 큰스님이 열반할 때까지 머물던 곳이랍니다.
극락암 앞에서 바라본 '대웅보전과 앞마당
' 그리고 우측에 '대조루'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강성당으로 기념품을 판다.
'명부전'
이 전각은 죽은 사람들이 49일 지나 재판을 받을때까지
그들의 넋을 위해 정성을 드리는 곳이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며 영조 43년(1767)
한영(漢英)대사가 시왕전의 시왕을 다시 채색하여 봉안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을 비롯해 시왕 등이 모셔져 있다.
명부전을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명부전 측면
'명부전 삼존불'
명부전은 부처님의 원력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법당
목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및 그 권속들로 봉안하고 있다.
명부전 지장시왕상 및 시왕도
'약사전' (보물 제179호)
약사전은 중생의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며
대웅보전 서쪽에 위치하는 건물로 대웅보전과 거의 같은 양식의 건물이다.
약사전 내부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석조로 조성한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이 약사여래불은 최근 금박으로 개금되어 있다.
'후불탱'
후불탱은 그림 중앙에 약사여래좌상과 좌우협시인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배치하고
상하좌우에는 사천왕을 약사불 뒤에는 가섭과 아난 존자를 그린
병렬식 구도의 그림으로 1884년 혜과 스님이 그렸다.
'현황탱'
1884년(고종 21)에 조성된 것이다.
이 탱화는 사람이 죽은 지 사흘 만에 심판하는 현왕과
그 권속을 묘사한 것으로 동호진철 긍법(肯法)이 그렸다.
'대조루'
(입구에 대형 단풍나무가 있던 누각의 반대편 모습)
전등사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운 누각식 건물로
대조루에서 남동쪽으로 멀찌감치 강화해협이 내려다보인단다.
강화해협은 일명 ‘염하’라고도 부르는데
이 염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전등사 대조루이다.
'종루'와 '대조루'
'종루'
'종루'
전등사엔 두개의 종이 있으며 종각과 종루로 구분되어 세워져있다.
보물 제 393호로 지정된 범종이 이곳에 있었으나 명부전 앞의 종각으로 옮기고
사진의 종루엔 근래에 만들어진 종으로 조석 예불때 사용되고있다.
'향로전'
향로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건물로 불공용 제물의 저장고였으며
법당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조선 시대에는 상궁이나 나인들이 기도하던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
병인양요 시에는 중군의 거처였다고 한다.
지금은 상임법사실로 쓰고 있다.
▶ 보문사
신라시대 지었다 했으니 명실공히 천년고찰입니다.
자못 장중함에 눌리듯 일행과 나누던 대화 목소리가 절로 잦아듭니다.
곡한 오르막
허리 굽으신 노인들의 걷는 모습이 편안해 보이는 코스이기도 합니다.
곡하면 곡할수록 우선은 힘이 들지라도 가고자 하는곳을 보다 빨리 갈수 있는 잇점도 있다는 생각에 길가다 동전 줍듯 세상의 공평한 이치 하나 주워들고 올라갑니다.
벼 베어낸 들판의 허전함이 그러하고 옷 벗듯 붙이구 있던 잎사귀와 작별하고 드러난 앙상한 가심팍이 부끄러워 돌아서있는 나무들이 참 난처하고, 그런데 저렇게 가비야운 기왓장 더 받들기 위해 덤불링하듯 나란히 누워있는 모난 돌과 하늘향해 똥침 놓듯 치어올라간 처마 만큼은 참 보기에 좋았습니다.
땅거미 지면 금방 어두워지듯
잠시 잠깐 끊긴 인적에 적막감이 순식간인데
법당앞에 서성이는 사람들
이들이 찾아 헤메는 것이 무엇일까?
몇몇은 표정을 굳혀 사진을 찍고
또 몇몇은 주머니 뒤져 지갑 꺼내어 갈피속에 천원짜리 하나 따로 주머니에 챙겨 법당 안으로
들어갑니다.
마애블을 향해 올라가다 문득 뒤돌아보니
저렇듯 가시지 않은 안개속에 전봇대 나란히 줄서 있습니다.
올라올적 잠시 들렀던
이미 도를깨쳐 윤회의 수레바퀴속에서 벗어난 오백나한들 나란히 앉아계시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또 사람들은 배를 뛰워 가야할곳을 찾아 저렇게 돌아다닙니다.
중간 쉼터에 사랑채 처마밑에 시래기 걸어 널듯 난간에 저렇게 걸어놓은 것들
"원하는바를 받아 적은 다음 병속에 넣어 걸어놓으면 이루어진다."
아마도 중국 어디선가 전해져 오는 상술 아닌가?
이루어지기보다는 병속에 갇혀 오가지 아니하고 그냥 그대로 마냥 있을것 같은데
앞서 가던 안해는 힐끗 한번 쳐다보더니 그냥 지나갑니다.
아마도 이 조강만나 이미 이루고자 하는것은 다 이루었다 생각했기 때문인지
이루고자 하는것이 적힌 만원보다는 비싸지 않다는 속셈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빠진 뻘의 모습 저렇게 보고있노라면
밭에서 금방 뽑아낸 속살 하얀 무우가 생각나고
또 물건널적 걷어올린 눈부시게 뽀안 윤초시댁 손녀딸의 종아리도 생각납니다.
그런 생각으로 숨차게 올라와 멈춘 곳
마애블의 인자한 미소보다는 아주 오래전
몇자루 망치와 무딘 정 챙겨올라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저 벽같은 돌에 신심으로 새겼을 석공을 생각합니다.
올라오는 이들의 발걸음은 무거워 보이고
내려가는 이들의 발걸음은 가벼워보입니다.
올라오는 이들은 여기에 무엇을 내려놓고 가려 저리 가쁜 숨 고르며 올라오는 것이며
내려가는 이들은 또 무엇을 내려놓고 가기에 저리 가비얍게 내려가는 것일까?
사람이든 짐승이든 나무든 돌이든 저 독이든
모여있으므로 아름답게 보이는 것들.. 참 많습니다.
▶ 애기봉전망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땅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땅
▶ 해미읍성
해미읍성은 조선 태종이 왜구에 대한 방비책으로 축조토록 지시해 1421년 축성되었으며
높이는 5m, 둘레는 1,160m로 성벽 위를 한 바퀴 도는 데 30~40분쯤 걸린다
1421년부터 1651년까지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며 충청의 군사중심지 역할을 했다.
당시 성 안에서 근무했던 병력이 850여명, 충청도 병권의 지휘소로서 국방은 물론 내란 방지 등의 임무도 맡고 있었다.
당시 이순신 장군도 선조 12년(1578년)에 병사영의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기록이 있다.
1651년(효종 2년) 병마절도사가 청주로 이전하면서 해미현 관아가 옮겨 와 해미읍성이 되고
현감인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면서 호서좌영(湖西左營:충청도에 있던 다섯 개의 병영 중 하나)으로 명칭이 바뀌고
지역 행정과 치안을 맡는 중심지가 되었다. 성곽은 하단부에 큰 돌을 쌓았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포개어 쌓고 쐐기돌을 많이 끼운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축성법을 보여주며 안쪽은 흙
으로 내탁되었다.
성 둘레에는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 탱자성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성내에는 수령이 600년 된 사연 많은 회화나무(일명 호야나무) 한 그루가 있다.
조선 후기 천주교인들을 철사에 묶어 목 매달아 죽인 나무인 것이다.
병인양요, 남연군묘 도굴사건에 이어 1880년 천주교 박해 때 내포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해 이곳에서 처형했는데 그 수가 1000여 명 이상이었다.
당시 읍성의 군졸들은 매일같이 교수,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신자들을 죽였다고 한다.
그러다 더 잔인한 방법으로 돌다리 위에서 사람의 발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었으며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는데,
혹시 꿈틀거리는 자가 있으면 횃불로 지져 숨을 끊었다고 한다.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교 신자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 한다.
한 명씩 처형하는 데 지친 관헌은 병인박해 때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을 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가 아무데나 땅을 파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 버리는 처형이었다.
이는 당시의 종교박해와 사람을 죽이는 잔혹성을 보여주는 표본이라 할 수 있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여기에서 처형되었으며 병인박해 외에도 1790년대부터 처형된
순교자가 3000여 명으로 추정된다.
주로 면천, 덕산, 예산 등 내포지방에 살던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을 해미 진영 군사들이 수시로 급습해 재산을 약탈한 후 신자들을 체포했으며 해미 진영 서문밖 사형장에서 처형했다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 신분이 높은 양반층은 상급 치소인 홍주·공주·서울로 이송했으며,
신분이 보잘 것 없는 서민은 심리절차 없이 이곳 해미에서 처형했다.
이렇듯 해미읍성은 단순히 웃고 즐기는 관광지 이상의 뭔가를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다.
아픈 역사의 현장이며 인간이 만들어낸 권력이 얼마나 인간을 잔인하게 해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교육의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