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완주 선진지 시찰
정파 심 종 은
◉ 12 / 9 (화) 맑음
아내랑 시간에 맞춰 2시에 율면사무소에 주차해놓고 농협마트 앞으로 갔다. 아직 버스는 도착하지 않았는데, 이대훈 목사와 서예가 황 선생은 벌써 나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가까워 오면 서 속속 일행들이 모여들었고, 때맞추어 관광버스도 우리가 모인 마트 앞으로 도착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사계절이 행복한 율면 문화공동체 만들기 행사의 일환으로 부래미축제학교에서 주관하는
전주한옥마을 및 완주 삼례예술촌마을과 로컬푸드 비비정, 그리고 대승한지마을로 가는 일정이다.
총 22명이 참가한 가운데 1박 2일코스로 오후 2시 정각에 출발하였다.
휴게소에 한번 들린 후 전주로 직행하였으나 사고 여파로 차량이 다소 지체되어 5시경 한옥마을에
도착하였다. 공영주차장에 버스를 주차시킨 후 숙박문화관으로 지정되어 있는 김명옥 한옥집에서
체크인하고 나왔다. 우리는 첫 코스로 인근 경기전을 향해 걸어갔다.
경기전은 이씨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전국 6개소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이
라 한다. 또 임진왜란 중에도 소실되지 않고 유일하게 남아있던 사료의 보존사고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백년 되었다는 백매화가 귀한 자태를 그 앞마당에 뽐내고 있었다.
사고를 올라가 보고 돌아나올 무렵 돌 테두리 안에 석등처럼 눈앞에 놓여진 것을 보았다. 불사의
사리탑인 듯이 보이기도 했으나 이것은 왕재의 태실이 보관된 곳이라 하였다. 이것 역시 얼마 남지
않은 귀중한 유산의 하나라고 해설사는 이야기해주었다.
경기전을 둘러보고 나오자 맞은 편 쪽에 전동 성당이 보였다. 한국 최초의 순교성지로 윤지충 등
복자들이 순교하였다고 한다. 아치형으로 지어진 중세기 고풍형 건물은 명동대성당이나 인천의
답동성당에 버금가는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돌아오며 한옥촌에 맞물려 조성된 인근 식당과 상가를 둘러보며 한옥마을 안에 있는 저녁식사
장소로 향하였다. 식사를 끝내고 돌아왔으나 다시 한옥마을을 둘러보기로 하고 숙박촌을 나섰다.
아까 식당에 올 때 눈 여겨 보았던 상가에 들어갔다. 사진을 한지에 찍어 만든 작품을 진열한
곳이었다.
우리는 한옥마을에서 막걸리를 먹어보자고 하여 마땅한 곳을 찾아보았으나 그럴싸한 장소는 보이
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파전과 막걸리가 쓰여져 있는 식당을 발견하고 우리인원이 모두 들어 갈만
한 곳으로 찾아들어갔다. 그런데 모주라는 것이 있어서 그맛이 궁금하여 시켜먹기로 하였다.
그랬더니 웬걸, 수정과 비슷한 맛이 나는 것이었다. 술이 아닌 차 대신에 먹는 것이라고 하였다.
모주라면 원래 술지거미 같은 주정을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잔에 2천원씩이라는데,
차거운 맛에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한잔이면 충분했다.
그나마 그것도 막걸리(1병에 4천원/2잔용)에 섞어 먹으니 겨우 목안을 통과할 수가 있었다. 나이
들 드시니까 모두 몸을 사리는 것이라서 술잔이 내게 자꾸 넘어왔다. 배는 부른데,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다. 곧 나왔으나 그래도 소주가 좋다고 하여 문어꼬치안주랑 함께 사들고 숙박촌으로 갖고
들어 갔다.
우리가 쓰는 안방은 세종대왕실이라는 호칭이 붙어 있었는데, 그 안에 2층 다락까지 모두 남자들
이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만큼 제일 넓었다. 화장실이 마루에 별도로 있었다. 우리들 방 외에 안에는
3개의 방이 따로 있었다. 모두 다락과 화장실을 별도로 갖추고 있었다.
그렇지만, 기껏해야 3〜4명이 잘 수 있고 더 많다해도 5〜6명이 한계였다. 호실별로 율곡. 이황 등
의 별칭이 붙어 있었다. 좌측으로 컴퓨터가 있는 한 방은 김소영씨가 자고, 나머지 한 방은 기사와
이만길 교수가 차지하였다. 그 외로 작은 방과 현관 밖 추녀 쪽으로 내어 만든 쪽방이 있었는데, 그.
두 개의 방은 여자들 차지가 되었다.
방금 사온 꼬치안주로 소주를 나누며(극히 몇 사람만) 대화를 나누다가 잠을 청하게 되었다. 여자
분들은 저쪽 방에서 이미 잠이 든 듯하였다. 대화의 출발은 총무가 내게 <귀곡산장>이야기를 권유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귀신이야기에서 영신적이야기로 변모되어가면서 12시를 넘겼다.
◉ 12 / 10 (수) 비오고 흐림
오늘 오후에 산업시찰이 예정돼 있어서 어제 율면주유소에 가서 오늘 오 잠자리에서 벌써 골아
떨어진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저마다 코를 골기에 바빴다. 옆자리에 드러누운 이대훈 목사나
윤주용 총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소리에 뒤척이다가 나도 몰래 피곤하여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
에 은연 중 깨어날 무렵,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 몸을 다시 보채게 되었다.
문득 바라보니 윤 총무는 저만치 문 쪽으로 기어나가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 그냥 누워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우리가 깔고 잇는 요가 너무 얇은 탓이다. 그래서
이리저리 몸을 옮겨 누우며 그래도 7시까지 버텼다.
그러다가 한 두 사람이 일어나면서 모두 일어나게 되었다. 노 면장은 어느 틈에 일어나 전동성당
에 미사를 드리러 갔다가 돌아와 2층 다락방에 올라가 코를 골며 자는 것이었다. 7시 반 부터 세면을
차례로 하고 식사시간까지 기다렸다. 식당은 바로 옆에 있었다. 한집이라고 했다.
아침은 콩나물밥(6천원)이다. 해장용으로 안성맞춤이었다. 10시까지만 하고 이후로는 전주에서
그 유명하다는 비빔밥(10,000원)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홀에
난로를 피우는 것을 보았다. 난로가 특이했는데, 연필심보다 더 굵은 나무톱밥을 연료로(하루에
1봉/6천원) 사용한다고 한다.
9시30분에 식사를 마치고 둘째날 일정이 시작되었다. 30분 거리에 있는 완주로 이동하여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삼례문화예술촌이다. 그 옛날 일정시대 일본이 수탈해가던 양곡보관창고를 개조
하여 차고마다 미디어아트미술관, 디자인뮤지엄, 책공방, 목공소, 책박물관, 문화카페 등을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서도 전문해설가가 지정되어 있어서 해설을 맡아 해주었다. 마당에는 맹꽁이모양의 형상이
만들어져 있는데, 일제가 창고를 짓기 전에는 습지지역이었다고 한다. 그 주변에서 일제가 숙소로
사용하였던 일식집들이 여러 개 아직도 형태를 유지하며 남아있었다. 건물이 모두 백년 이상 된
것이나 일제의 잔재라는 슬픈 역사라 가슴이 쓰려왔다.
마침 그 주변에 막사발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오늘이 개막일이고 우리가 첫 손님이라고 해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국제전이라고 하기에 장소나 전시물이 넘 협소하여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막사발 1개에 5만원이라고 하는데, 사는 삶은 별로 없었다. 우리 사는 데가 도자기 원조로 치니까.
그곳에서 가까운(10분 정도) 곳에 비비정마을이 있었다. 만경강을 따라 길게 기러기처럼 자리잡은
독특한 마을형태를 자랑하는데, 우리가 찾아갈 곳은 비비정 농가레스토랑. 비비정마을 건달할머니
들이 손수 만들어내는 시골밥상으로 뷔페식으로 운영하는 덕암마을과 함께 완주지역의 농가 레스
토랑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고령화 농촌지역에 고향 할머니의 음식 손맛과 농촌의 정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고, 조미료도 쓰지
않는 차별화된 음식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식사는 버섯찌개지만 특유의 반찬이 많이 나왔다. 윤
주용 총무는 찌개는 입에 대지도 않고 밥그릇을 비웠다. 그만큼 찌개 없이도 충분한 양의 반찬이 나
온 것이리라.
비비정마을에 와서 비비정을 보지 않고 간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해서 그곳까지 걸어가 보기로
하였다. 마을이름의 유래가 비비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남쪽 언덕에 지어져, 강가에서 고기를
잡는 풍경이 바라다 볼 만큼 주위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완주8경에 속한다는데, 우리가 보기엔
계절 탓인지 솔직히 주변풍경이 썰렁해 보였다.
이 정자도 원래는 선조때 최영길이 건립하였다가 철거되고 1752년 영조때 관찰사 서명구가 중건
하였다가 1998년에야 복원된 것이라고 하였다. 하필 이때 비가 와서 일행의 절반(특히 여자분들)은
버스에 남아있었다. 그래도 아직 시간은 충분하였으므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대승한지마을을 가장
마지막에 둘러볼 수 있었다.
대승한지마을은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에 지어진 한지를 주제로 한 테마마을이다. 한지가공 및
체험관과 함께 건립된 전시관(승지관)은 이 지역 한지공장에서 생산된 한지와 한지의 생산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닥종이인형과 전통한지공예품들을 재현하고 전시하였다.
이곳에서는 또 한지공예 체험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한지 뜨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체험을 하도록
운영하고 있으며, 완성된 한지를 종류별로 대개 3천〜4천원에 판매도 하였다. 물론 그 이상의 것도
있었다. 우리는 부녀회원이 혼자서 한지를 걷어 말리는 작업을 빈틈없이 하는 것을 보았다.
마을주변을 돌아보면, 진입하는 입구는 비교적 좁은 편이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항아리
모양으로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한 수려한 산수를 자랑하여 살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한다.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도심의 때가 묻지 않은 듯한 기막힌 풍경이 감탄을 절로 나오게 만든다.
우리가 그곳을 떠나 율면에 도착한 시간은 2시간 반 정도. 오후 5시 반경이었다. 그곳에서 나름
대로 자원을 이용하고 개발하고 활용하여 상품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우리도 우리가 지닌 것을
찾아내고 십분 활용하여 나름대로 상품화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욕구들이 내심 부지불식 간에
가득 솟구치는 것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