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의 사상가, 유교의 시조.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았다. 인(仁)에 대한 공자의 가장 대표적인 정의는 ‘극기복례(克己復禮)’ 곧,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에 따르는 삶이 곧 인(仁)”이라는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孝悌)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仁)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예수라는 이름은 헤브라이어로 '하느님(야훼)은 구원해 주신다'라는 뜻이며,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구세주'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음은, 예수 탄생 이래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물음이다. 그리스도교도에게는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제16장 16절을 보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자, 예수는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라고 말했다고 적혀 있다.
《요한의 복음서》에는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써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불교를 창시한 인도의 성자(聖者)로 성은 고타마(Gautama:瞿曇) 이름은 싯다르타(Siddhārtha:悉達多)이다. 부처님, 부처, 석가모니, 석가세존, 석존, 세존, 석가, 능인적묵, 여래, 불타, 붓다, 불(佛)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석가모니(釋迦牟尼)·석가문(釋迦文) 등으로도 음사하며, 능인적묵(能仁寂默)으로 번역된다. 보통 석존(釋尊)·부처님이라고도 존칭한다. 석가는 샤카(샤키야,Sākya)라는 민족의 명칭을 한자로 발음한 것이고 모니(muni)는 성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석가모니라 함은 본래는 '석가족(族) 또는 샤카족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본래의 성은 고타마(Gautama:瞿曇), 이름은 싯다르타(Siddhārtha:悉達多)인데, 후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Buddha:佛陀)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사찰이나 신도 사이에서는 진리의 체현자(體現者)라는 의미의 여래(如來:Tathāgata), 존칭으로서의 세존(世尊:Bhagavat)·석존(釋尊) 등으로도 불린다.
부처님은 누구신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대반야바라밀다경》의 요점을 간략하게 설명한 짧은 경전으로, 당나라삼장법사인 현장(玄裝)이 번역한 것이다. 260자로 되어 있다.
《대반야바라밀다심경(大般若波羅蜜多心經)》《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또는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핵심적인 이치인 반야바라밀다를 간결하고 명징하게 요약한 불교 경전의 정수에 해당한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산스크리트어 제목은 프라즈냐파라미타 흐르다야 수트라(Prajñāpāramitā-hṛdaya-sūtra)로 한자어 명칭에서 '심(心)'은 마음[心]을 뜻하는 치타(citta)의 번역어가 아니라 핵심·정수(精髓) ·정요(精要) ·에센스 또는 참된 앎[正知]을 뜻하는 흐르다야(hṛdaya)의 번역어이다.[1] 따라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는 제목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반야바라밀다 또는 《대반야바라밀다경》의 핵심 또는 정요(精要)를 간추려 담고있는 경전'이다.[2][3][4]
관자재보살이 깊은 바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다섯 가지 쌓임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갓 괴로움과 재앙을 건지느니라!
사리불이여!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니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도 또한 그러하니라!
사리불이여!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닿음과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가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얻는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를
얻느니라!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아무 것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오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하노니 주문은 곧 이러하니라.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바라 승아제 모지 사바하(3번)
기독교 주기도문 (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예수님은 누구신가?
마가복음 2장부터 3장 6절까지 나오는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서기관 등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5가지 논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간의 충돌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이것은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는 전혀 다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 피에스타 몰에서 스패니쉬들을 대상으로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중동 사람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는 방글라데쉬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시간과 돈을 들여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좋게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했습니다. 대신 모하멧이 마지막 선지자로서 구원자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코란이야 말로 구원의 책이라고 했습니다. 저와 함께 있던 마이크 형제가 모하멧은 이미 죽은 사람이요, 그는 여전히 죽은 채로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여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구원의 책이라고 했습니다. 방글라데쉬에서 온 그 남자는 예수님이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것을 인정했지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부인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는 예수를 도덕적인 현인 중의 한 사람, 혹은 유대인의 정치적 해방자로서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처럼 예수는 누구신가에 대한 잘못된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였던 레위(마태)를 열두 제자중의 한 사람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혁신적인 생각입니다. 예수님 당시 세리는 로마제국에 빌붙어 동족 유대인의 고혈을 짜내는 매국노로써 사람들이 기피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였던 레위를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레위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식사 초대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식사를 같이한다는 것은 정식으로 그 사람과 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레위는 예수님을 식사 초대한 그 자리에 다른 세리들과 죄인들을 같이 초대했습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이 모습을 보고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그들의 눈에는 세리와 죄인들과 교제하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로 비쳐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시딤으로 알려진 그룹의 후계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 준수를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613가지 종류의 율법(248가지의 하라는 명령, 365가지의 하지 말라는 명령)을 지키는 것을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이 율법을 어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어기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자신과 제자들을 두고 하는 말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진정 건강한 자이고, 세리와 죄인들이 진정 병든 자입니까? 자신이 영적으로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전통에 어긋나는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사실 병든 자들입니다. 대조적으로 자신을 죄인으로 알고 항상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세리들이야 말로 영적으로 건강한 자들입니다. 주님은 역설적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병든 자입니까? 건강한 자입니까?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면 그 죄를 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분 발 앞에 엎드려 주의 자비와 긍휼을 간절히 바라는 자가 건강한 자입니다. 주님의 눈에는 그들이야 말로 주의 치유를 받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병든 자입니다.
메시야가 왜 이 땅에 오셨는가? 그것은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분은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라 영혼의 메시야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다시 고소했습니다. 이번에는 금식에 관한 전통을 들고 나왔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은 금식하는 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번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가지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고소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유대인들이 금식하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금식은 개인의 신앙유익을 위해, 공동체의 신앙의 정결을 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성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욤키푸르, 레16:29~34)에 금식을 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후에는 대속죄일 자체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주의 십자가에서 흘러내린 보혈이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의 고소에 대해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필요가 없고,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른 후에야 금식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랑이 혼인잔치를 벌이는 날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 잔치를 즐길 때 입니다. 그리고 신랑을 빼앗길 날에서야 금식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주님은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에 관한 비유 말씀으로 주님이 전하는 올바른 권위와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권위와의 관계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의 복음을 율법이라고 하는 틀 속에 가둘 수 없습니다. 은혜의 복음의 능력은 너무 강력해서 율법의 틀을 부수고 맙니다. 그것은 마치 얼어 붙은 땅을 헤집고 생명의 씨앗이 돋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종종 바리새인들처럼 성도들의 연약한 믿음에 대해 판단하고 정죄하는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고, 주일 성수를 하지 않고, 교회 일에 잘 협조하지 않을 때 바리새인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정죄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물론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성도들의 게으름과 이기적인 생각과 연약한 믿음에 대해 권면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기도하고 주님이 권면의 마음을 주셨을 때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그 사람들의 마음을 만져 주시고, 그들의 잘못을 회개하게 만드시고, 그들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 (천주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무속신앙
한국의 무속신앙은 우주의 만물과 그 운행에는 각각 그 존재와 질서에 상응하는 기운이 깃들어 있어 인간이 제 스스로를 낮추어 그 기운을 거스르지 않고 위하고 섬기면 소원을 성취하며, 모든 일이 질서를 찾아 편안해 진다는 확고하면서도 광범위한 범 우주적, 자연적 신관과 나름대로의 신앙체계를 갖추고 있는 한국의 민간신앙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대상이 고등종교들이 교주를 내세우는 것 처럼 유일신으로 한정되어 있지 않고 우주의 성진은 물론 천지간의 자연신과 인신, 유형신, 무형신 등으로 무한하게 분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늘의 해와 달, 별자리, 땅위의 산과 들, 바다와 계곡, 동네의 우물, 바위와 고목, 가택의 대들보와 부뚜막, 심지어 화장실과 굴뚝까지도 그 자체로 혹은 그 곳에 상주하는 신격이 있는 것으로 상정하여 위하고, 조심하는 것은 물론 영웅신, 성인신, 가내의 조상신, 길거리의 주인없는 귀신까지도 그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연발생적인 원시종교형태의 틀을 벗어나 나름의 체계와 질서를 꾸준히 갖추어 온 한국의 무속신앙은 신을 받아 모신 영매 혹은 사제자로써의 기능을 담당하는 '무당'과 무속신앙을 믿고 따르는 '신도'들을 중심으로 전승되어지고 있다. 무당은 신비한 체험과 특정한 과정을 통해 신의 제자로 만들어져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다양한 종교적 주술과 의식들을 통해 아래로는 인간의 뜻을, 위로는 신령의 뜻을 서로에게 전달해 가며 그 특수한 종교성을 유지해 나간다.
무속의 경전은 따로 없다. 다만, 신을 모시는 무당들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의식에 사용되어 왔던 여러가지 다양한 무가와 무의 신화들, 그리고 그것을 체록한 문서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여기에 한국의 무속이 나름대로 정의하는 우주의 질서와 교리적 지침들이 들어있으며, 소박한 민중들의 삶과 고통, 욕망이 현실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세월의 변화 속에 인간의 욕구도 다양해지면서 도가의 각종 경문과 주문, 불경까지도 자연스럽게 습합되어가며 그 내용을 더 풍부하게 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속신앙이 개인의 신앙행위로 부터 종교로써의 특징을 가지기 시작하는 계기가 바로 사제자로써의 무당이다. 자신의 신념만을 중시하는 개인의 신앙행위에 무당은 '공수(신의 뜻을 전달하는 말)'라는 신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전달하며 개인의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영험한 무당은 신도들로부터 신의 제자로서의 인정과 존경을 받아 개개인이 무속을 믿고 따르는 신심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우주만물의 어느 대상에라도 인간적인 소망이 담긴 나름의 능력을 부여하고 기대어 인간의 구복욕구를 충족시켜 보고자 하는 나약하고도 소박한 민중의 심성과 맞물려 특정한 틀이 없이 자연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한 무속은 아직도 그 원형을 중시하며 많은 부분 원시적 신앙의 형태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사제자인 무당과 신도들에 의해 종교로서의 요소들을 하나 둘 구비하게 되었고, 오늘 날에도 살아 있는 종교로서 민중의 심성속에 뿌리깊이 파고들어 폭 넓은 기반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속은 불교, 유교, 기독교등 외래종교가 들어 오기 훨씬 이전부터 한민족의 핏속에 흐르는 원본적 신앙기반 이었으며, 이 신앙기반은 소위 고등종교라고 일컫는 외래종교들의 풍부한 교리들을 '한국적인 기복신앙으로 토속화' 시키는데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일부 사람들에 의해 미신으로 치부당하면서 신관자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훼손당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민중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원초적 신앙으로 자리잡고 있는 신앙의 한 형태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