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4장 31-38절
그리스도의 양식
지난주까지 사실상 사마리아 여자와의 만남을 통해 전체적인 내용을 다 살핀 것이 되지만, 오늘은 지난주 자세하게 설명하지 못한 부분을 통해 다시금 정리하고자 합니다. 먼저 전반적인 내용을 정리하자면 예수님께서 수가라 하는 동네에 들어가신 것은 어떤 면에서 바리새인과의 마찰을 피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특히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을 만나셔서 물로 시작해서 남편, 그리고 예배로 이어지는 대화를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셨습니다. 비록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그런 의미에서 거짓된 예배로 일관되어 온 전통을 따르고 있었지만 여자의 마음에는 메시야, 즉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한 사람을 고대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이미 성령의 은밀한 역사가 그 마음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동안은 참된 믿음을 찾아볼 수 없었다면 성령의 은밀한 역사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참된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지난주 살핀 것처럼 물을 길으러 왔지만 그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증거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와서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고, 결국 사마리아 사람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게 되는 일이 있게 되었던 겁니다.
이런 전반적인 내용 가운데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가면서 말씀하신 것이 있는데, 지난주에는 간략하게 살폈다면 오늘은 좀 더 자세하게 다루고자 합니다. 31절을 보시면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여자가 동네로 들어갔을 때, 또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오기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먹을 것을 드시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시느냐? 32절을 보시면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이 말에 대해 제자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듯 이렇게 수군거립니다. 33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양식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 성에 도착하셨을 때 분명 목이 말랐고, 또 배도 고팠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취하신 참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여자가 물 길으러 왔을 때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고, 또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목마른 척하거나 배고픈 척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물을 마셨다, 먹을 것을 먹었다는 말씀보다는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생수를 주고자 하신 것, 또 예수님의 진정한 양식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초점이 어디 있느냐 하면 육신을 위하여 먹고 마시는 것이 일차적인 문제로 와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위한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것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교훈은 마태복음 6장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33절을 보시면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육으로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여기에 관심을 가집니다. “어떤 집에서 살 것인가? 어떤 차를 탈 것인가?”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은 무엇과 연결이 되느냐 하면 물질과 연결이 됩니다. 소위 오늘날 물질만능주의가 표면으로 너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사람들의 모든 관심이 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돈 때문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돈 때문에 살인도 하고, 돈 때문에 간음도 하고, 돈 때문에 도둑질도 하고, 돈 때문에 거짓도 증언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돈에 대한 탐심이 얼마나 강한지 끊어지지가 않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 가운데는 어떤 말까지 하느냐?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돈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교훈하시는 것은 뭐냐?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위로부터 난 사람에게 권하시는 말씀은 뭐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데 있습니다. 특히 19과 20절을 보시면 이런 교훈을 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큰 틀에서 보자면 두 가지 인생이 있다는 것이고, 그런 인생 가운데 너희가 살아야 할 방향은 여기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땅에 보물을 쌓아 두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사람이 되라. 특히 여기 보면 왜 땅이 아니라 하늘인가 했을 때 땅에 있는 것은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고, 또 변질될 수 있고, 혹 누군가 가지고 가 버리면 지금까지 쌓아둔 것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의미로서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나의 노력과 수고로 쌓아온 것들이 나에게 아무런 가치로 발휘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늘에 있는 것은 결코 그런 일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땅의 물질을 하늘에 쌓아둘 수 있는 것처럼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 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사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쉽게 이해하자면 “이 땅에서 살면서 재물을 섬기는 자로서 사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사느냐?” 이 문제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심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재물이 자리 잡게 되면 그 안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마음 가운데 재물이 들어올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재물에 대하여는 미워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재물에 대해서는 경히 여길 수 있는 겁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재물에 대한 탐심이 있을 리 없고, 재물에 대한 탐심이 없기 때문에 재물 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악행이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거듭난 자로 있고 또 하늘로부터 난 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떻습니까? 여전히 제물에 대한 탐심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좀 더 좋은 것을 먹고 싶고, 좀 더 좋은 것을 마시고 싶고, 좀 더 좋은 것을 입고 싶고, 좀 더 좋은 장소에서 살고 싶은 마음!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동의가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 땅에서 좀 더 좋은 것을 바라는 마음이 과연 하나님 나라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 땅에서 좀 더 좋은 것을 바라는 마음이 과연 하나님의 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성경은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하는데(롬14:23), 이 땅의 것에 대한 마음이 과연 믿음과 상관이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고자 하는가? 25절 이하인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25-32) 결국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이끌고자 하는 방향은 이 세상의 모든 의식주에 대한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는 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나 구하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너희 아버지로서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신다. 그리고 나오는 말씀이 33절인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지금 예수님의 삶이 그런 삶이었던 겁니다. 육신을 입고 계신 분으로서 먹고 마셔야 살 수 있습니다.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마시지 않으면 목이 마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중요한 것이 뭐냐? 육을 위한 일이 아니라 영을 위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하자면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허락하신 그 소명을 이루는 삶!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바로 사마리아 땅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은 매일 먹고 매일 마시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나 매일 그런 삶을 살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 영혼을 위한 일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교훈하시는 것이 만나 사건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신명기 8장 2절과 3절을 읽어드리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먹이시는 것은 떡이지만, 그것을 통해 무엇을 교훈하시는가? 그것으로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떡도 먹어야 하지만, 사람은 결코 육신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하는 존재라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양식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양식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무엇보다 육신을 위한 떡이 우리의 진정한 양식이 아니라 아버지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이 우리의 양식이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말한 아모서 선지자의 말처럼 진정한 주림, 진정한 기갈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임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더욱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그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도 우리의 진정한 양식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시119:56) 특히 매일 매일을 먹고 마시며 사는 존재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육을 위해 먹고 마실 때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육을 위해 먹고 마시지만 성도는 이것으로만 사는 자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영을 가진 영적인 존재이지만, 무엇보다 성도는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그분의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한다. 그 말씀을 따라 생활해야 한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추수와 관련하여 말씀하시는데, 3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아마도 예수님 당시 이 말씀을 하실 때 추수할 때가 대략 넉 달 정도가 남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위한 추수 때는 넉 달이 남았을지라도 영적인 추수는 지금 당장 해야 할 만큼 희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고 말씀하실 때 그 일을 미루는 것은 마치 추수 때가 되었는데도 추수하지 않음으로 떨어져 버린, 그래서 못 먹게 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추수 때가 되었다면 추수해야 한다는 것이고, 결코 그 일은 미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간혹 보면 육적인 일과 영적인 일에 있어 육적인 일 때문에 영적인 일을 미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등한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주일 시험 문제라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대학입시를 위해 한번만, 혹은 이번에만, 올해만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영적인 문제는 결코 등한시하거나 미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은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인생의 책임을 내가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십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기만 하면 부족할 것이 없을 정도로 더하시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초점이 너희에게 더하신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데 있습니다. 더하신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염려를 버리라는 것이고 그 분량 역시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는 의미이지, 더하신다고 하니까 거기에 초점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더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넉넉하게, 또 어떤 사람에게는 부족하게 채우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채우실 때 하나님의 뜻이 항상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욕심에 근거한 하나님 나라와 의가 아니라, 모든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결코 미룰 수 없다는 마음을 굳게 가지셔야 합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말씀을 보시면 추수와 관련해 두 부류의 사람을 여기서 말합니다. 36절부터 38절을 보시면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여기 보면 뿌리는 자가 나오고 거두는 자가 나옵니다. 이것을 37절에서는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거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세상 원리로 보자면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그 심은 것을 거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처사입니다. 특히 38절에서 심은 것을 거두는 자와 관련해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역으로 말하자면 심은 자는 그만큼의 노력을 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심었지만 그 노력의 결과를 누가 취하느냐 하면 거두는 자가 취하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 심은 자 쪽에서 보자면 배 아파할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세상의 원리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선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는 누구인가? 뿌리는 자는 구약의 선지자들이라고 해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에 대하여 뿌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예수님 이전의 사역자들, 여기에는 세례 요한도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눅16:16). 당연히 거두는 자는 사도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결국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고 할 때 구약은 율법의 가르침 아래 있었다면, 신약은 복음의 가르침 아래 있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구분 짓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은 복음의 다른 형식이고, 복음은 율법의 다른 형식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구약에는 복음의 가르침이 없었느냐? 그렇지 않았습니다. 역으로 신약에는 율법의 가르침이 없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형식에 있어서는 구약의 경우 율법으로 대표되는 반면, 신약은 복음으로 대표된다는 의미에서 이런 구분을 짓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구약을 심는다, 신약을 거둔다고 표현한 것은 구약의 경우 오실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것으로 있었다면, 신약의 경우 오신 그리스도, 즉 구약에서 예언한 모든 것을 다 완성하시기 때문에 그런 완성의 차원에서 거둔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다시 36절을 보시면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란 말에 대해 칼빈은 보상, 상급으로 해석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에 얼마나 부지런히 헌신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때 상급은 공로에 대한 상급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후 말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기 때문에 결코 공로 차원에서의 보상, 상급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상급을 주시는데, 왜 그렇게 하시는가? 거두는 자가 그 거두는 일을 부지런히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은다’는 것은 사도들의 사역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사역이 뭐냐? 복음을 통하여 영생에 이르는 열매가 있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즉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거두지만 둘이 함께 즐거워하도록 하기 위해 거둬야 한다는 것이 36절과 37절의 의미인 겁니다.
여러분,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한 사람이 심고 한 사람이 거둔다고 할 때 세상 이치로 보자면 분명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심은 자 입장에서는 좀 답답해 할 수 있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하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으나 한 몸임과 같다고 말합니다(고전12:12). 때문에 만일 발이 손이 아니라고 하면서 몸에 붙어 있지 않겠다고 할 수 없고, 또 귀가 눈이 아니라고 하면서 몸에 붙어 있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역할을 다르지만 한 몸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8절 이하 21절을 읽어드리면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으로는 그 역할이 다를 수 있습니다. 선지자들의 경우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경우는 오신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율법을 해석하며,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한다는 것은 그들의 공통분모인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세상 이치로 따지자면 뿌리는 자는 슬퍼해야 하고, 거두는 자는 즐거워해야 맞습니다. 왜냐하면 뿌리는 자는 자기가 뿌린 것에 대하여 거두지 못한 반면, 거두는 자는 자기가 뿌리지 않는 것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요, 바로 그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역자들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지난주 살핀 고린도전서 3장의 말씀은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5절부터 7절입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지금 요한복음의 말씀으로 하자면 뿌리는 자나 거두는 자나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누가 주체냐?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런데도 누구를 불러 하나님의 일을 하시느냐 하면 사역자들을 불러 그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이 8절입니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뿌린다고 해서 거두는 사람보다 못한 것이 아니며, 거둔다고 해서 뿌린 사람보다 더 나은 그런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그 일을 하는 것이고, 그 일을 성실하게 실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공로가 아닌, 하나님 자신의 은혜의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셔서 38절도 보시면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엄밀하게 말하면 선지자들의 노력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각자에게 주신대로 믿게 한 사역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추수라는 관점에서 선지자와과 사도를 비교하자면 선지자의 경우 뿌렸기 때문에 노력했다는 것이고, 사도의 경우 뿌리지도 않은 것을 거둔다는 의미에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둔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의 모든 사역은 더더욱 고린도전서 3장 7절 말씀을 드러내는 사역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그들이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요,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사도들의 사역의 주체인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께만 맡겨진 일이 아니라, 사도들에게도 동일하게 맡겨진 일이라는 의미에서 추수에 대해 말씀하셨던 겁니다. 너희는 거두는 자다. 이미 뿌린 자들이 있고, 그렇게 뿌린 자들과 비교하자면 너희는 노력하지 않은 것을 거두는 자이다. 심지어 하늘의 보상도 기다리고 있다. 노력하지 않은 것을 거두러 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도 보상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너희도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어라.
그럼 이것이 지금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각자에게는 각자에게 맡겨진 일의 내용이 다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목사로 부름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일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이 원리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냐?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달리 말하면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자로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사는 일인 겁니다.
십계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출20:3) 그러나 물질이 이미 우리의 우상으로 와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20:8) 그러나 주일조차 우리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고, 또한 오락을 위해 사용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첫 번째 돌판이 이러한데, 이웃 사랑의 정신이 담긴 두 번째 돌판은 어떠하겠습니까?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그리스도의 양식과 사도들의 양식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 말은 우리의 양식도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로 하여금 지금도 이 땅을 살게 하십니까? 그것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을 온전히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그 모든 일이 실제로 나로부터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인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의 모든 목적이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셔야 합니다. 우리 생명을 돌보는 데 우리 인생의 목적이 있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냐?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통해 알려진 것처럼 우리 인생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고전10:31). 그것을 위하여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하는 것이고, 그 말씀이 진정 내 살이 되고 피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내 삶을 이끌 수 있도록 노력하되, 그것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인 줄 알고 겸손히 하나님께 그런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