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재속 프란치스코회 - 프란체스칸의 역사
1.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기원
가. 프란치스코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창설자인가?
재속 프란치스코회가 어떻게 해서 프란치스코의 제 3회가 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3회의 창설자는 1289년 회칙을 준 니콜라오 4세라는 주장을 한다. 회개 운동에 대해 권위자인 도미니칸 Meerssman은 1221년 이후의 회개 운동과 관련한 교황문헌을 비교한 다음 프란치스코가 비록 3회의 실제 창설자는 아닐지라도 복음적 쇄신을 역설함으로 기존의 회개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이에 비해서 Van den Brone 형제 같은 이는 이전의 연구들에 대해서 살펴본 다음 첼라노나 스피어의 쥴리아노나 보나벤투라가 재속 프란치스코 회의 창설자로 프란치스코를 명확히 얘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이 3회에 교회가 공식적인 회칙을 주었는데, 그것이 1221년의 “Memoriale Propositi"라는 것이다.
이런 여러 주장이 있지만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회개자들의 무리는 늘 있어 왔지만 12세기 말에 와서 성직자들의 회(Ordo Clericorum)와 수도자들의 회(Ordo Monachorum)에 이어 교회의 인준을 받은 회개자들의 회(Ordo Paenitentium)도 등장하게 된다. 실제로 프란치스코와 첫 동료들은 교황의 인준을 받기 전 아씨시의 회개자들이라 불렸다. 이 회개자들의 회는 기존 수도승 수도회의 지도하에 있거나 Premonstratensian이나 Humiliati와 같은 새로운 수도회의 3회로 존재했다. 이들은 결혼을 한 사람도 있었지만 안 한 사람도 있었으며, 재산 포기와 구별되는 옷, 단식과 성사 거행에 있어서 일반 신자들보다는 엄격한 실천을 통해서 회개를 실천하였다. 이들이 등장하고 발전하게 된 데는 이노첸시오 3세도 애를 썼지만 호노리오 3세 교황은 우골리노 추기경의 주도하에 회개 운동에 힘을 실어주고 합당한 법적인 성격을 부여하는데 훨씬 더 많은 애를 썼다. 여기에 불을 댕기고 타오르게 한 것이 프란치스코와 작은 형제회였다.
프란치스코를 3회의 창설자로 처음 공식적인 인준을 한 것은 니콜라오 4세의 1289년의 회칙, Supra Montem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1238년 그레고리오 9세가 프라하의 성녀 아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3개의 회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레고리오 9세가 바로 앞서 본 바와 같이 2회와 3회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활성화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특히 보호자 추기경으로 프란치스칸 1, 2, 3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전기들은 말할 것도 없이 프란치스코가 거룩함의 재속적 이상향을 일깨움으로써 재속 프란치스코 회를 세웠다고 분명히 얘기하고 있다. 첼라노 제 1생애 37번은 “어디에서나 감사의 표시와 찬미의 소리가 울려 퍼져 많은 사람들이 세상사에서 오는 걱정을 떨쳐 버렸고 복되신 사부 프란치스코의 생활과 가르침을 보고 자기 자신을 반성했으며 창조주를 사랑하고 흠숭하기를 갈망하였다. 귀족이건 천민이건, 성직자이건 평신도이건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영광에 힘입어 프란치스코의 가르침과 이끌음으로 영원한 영신전쟁을 치르려고 그에게 오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사람은 마치 천상 은총의 풍성한 강처럼 이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의 물줄기를 대주었다. 그는 미덕의 꽃으로써 그들의 마음의 밭을 아름답게 꾸몄으니 그가 훌륭한 솜씨를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펼쳐진 그의 생활양식과 회칙과 가르침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남녀 할 것 없이 쇄신되고 있었으며, 성 프란치스코의 구조를 받은 세 겹의 군대는 승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누구에게나 생활규범을 주었고, 진실로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명확히 제시하였다.”고 적고 있다. 전기는 또한 이노첸시오 3세로부터 생활양식을 인준 받은 다음 한 첫 번째 설교순회의 효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세 동료 전기 60번은 “혼인법에 묶여서 헤어질 수 없는 결혼한 남자나 여자는 형제들로부터 적절한 의견을 듣고 나서 자기들의 집에서 엄격한 회개생활에 들어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잔 꽃송이 16장은 칸나라의 모든 남녀가 성 프란치스코의 말에 불타올라 집을 떠나 프란치스코를 따르려 하자 그들을 만류하며 영혼을 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재속 프란치스코 회의 창설자라는 근거는 다른 무엇보다도 신자들에게 보내신 프란치스코의 편지들이다. 논란이 있지만 이것이 당시의 회개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보낸 편지이고, 따라서 법적인 면에서의 회칙은 아니지만 프란치스코가 회개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하나의 지침을 마치 1회 형제들에게 인준 받지 않은 회칙을 주었듯이 준 것이다. 첫 번째 편지는 빠르면 1209년에서 적어도 1215년 이전에 쓰인 것으로 보는데 두 번째 편지의 초본이었을 것이다. 이 편지가 쓰인 이유도 아마 프란치스코 때문에 1215년을 전후해서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갑작스럽게 늘어난 회개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뭔가 지침을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부패한 교회에 대해 비판하던 회개 운동들에 비해 프란치스코는 교회 안에서 회개를 살아가는 길을 확실히 제시함으로써 기존의 회개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나 새롭게 회개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프란치스코를 영적인 지도자로 삼았던 것이다. 두 번째 편지는 프란치스코의 병에 대한 언급 때문에 1225년-6년에 쓰인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빠르면 1216년에서 늦어도 1221년 첫 번째 생활지침(Memoriale Propositi)이 나오기 전일 것이다. 이 편지는 생활지침이 가지고 있지 않은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나. 1221/1228의 생활지침-재속 프란치스칸의 첫 번째 회칙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프란치스코가 이들에게 편지로서 영적인 지침을 주었을 때 호노리오 3세는 이 회개자들, 즉 재속 프란치스칸들에게 법적인 지침, Memoriale Propositi를 주었는데, 이것은 우골리노 추기경이 작성한 것이다. 이것이 필요했던 이유는 호노리오 3세가 Rimini 주교에게 보낸 1221년의 칙서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지방자치 단체들이 자체 방어를 위해 회개자들에게 강제로 충성을 서약하게 하고 무장을 하게 하였는데, 호노리오 3세는 회개자들을 이런 강제로부터 보호하라고 리미니 주교에게 명한 것이며, 동시에 우골리노 추기경에게는 이 단체들을 제도화하고 법제화하는 역할을 맡겼던 것이다.
우골리노는 이 생활지침을 작성하면서 1201년 이노첸시오 3세가 Humiliati에게 준 Propositum을 기초로 하였다. 그래서 제목에 Memoriale란 말이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원본은 없어졌고 1228년의 필사본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아마 1221년 원본보다 내용적으로 보충이 되었을 것이다. 13장으로 되어 있으며, 단순한 옷차림, 세속잔치에 참여하지 말 것, 춤추지 말 것, 단식과 금육제(주 3회 육식을 하지 않음과 금요일 단식), 기도(성직자는 성무일도, 평신도는 주의 기도 대송), 성사생활(1년에 3번 영성체, 매월 고백성사), 착실한 가정생활, 월례회의, 회비 납부와 가난한 자와의 나눔, 환자 회원 방문과 회원 장례식 참석의 의무, 종신서원 후 유언 작성(재산 처리) 등이 그 내용이다.
다. 니콜라오 4세의 회칙(1289)
여러 형제회들이 점차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하여 보나벤투라 시대에는 관구 봉사자가 다스리는 관구의 틀이 생기게 되었고, 북 이탈리아에서는 관구 회의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단위 형제회들은 이제 이탈리아를 넘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1282년 시찰자였던 피렌체의 Caro는 회칙을 작성하고, 프란치스칸 교황 니콜라오 4세는 1289년 “현재와 미래의 모든 회개하는 형제, 자매들을 위한” 이 회칙을 인준하였다. 이 회칙은 순서만 바꾸었을 뿐 내용은 우골리노 회칙 거의 그대로이고, 여기에 모든 회개자들의 회는 창설자가 프란치스코이므로 작은 형제들이 시찰자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덧 붙였다. 이것은 주교의 관할권과의 마찰도 해소하고, 모든 회개자들이 프란치스코의 이상을 사랑하면서도 독자성을 유지하려는 데서 오는 마찰도 해소하기 위해 시찰자와 지도자를 작은 형제들로 통일하였지만 다른 영성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고유의 조직을 가지고 있던 그룹의 반발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주동자는 도미니코 총장 자모로 Munius였다. 그래서 그에 의해 도미니코 회개자들의 회가 생겨났다. 1286년 호노리오 4세가 인준한 칙서에 이러한 이름이 가장 일찍 발견된다.
2. 13-15세기: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발전과 끼친 영향
프란치스칸 운동의 확산은 당시 회개자들의 회가 이룬 성장과 같았다. 복음적인 이상은 그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와 함께 가정생활과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성화하였고, 왕과 제후들, 귀족과 평민, 학자와 장인을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교 평등을 살게 하였다. 예를 들어 57명의 회원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1252년 볼로냐 형제회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들은 공증인, 서기관, 마구제작자, 이발사, 신 기료, 목수, 종이생산자, 제빵사, 제약사, 모피상 등이었다. 공동체 생활은 매우 종교적이고 생기 넘치는 자체 조직들, 수공업자 길드로부터 혜택을 입었다.
회개하는 형제, 자매들은 그 당시 생겨난 다른 단체들과 같이 신심의 목적과 자선의 목적으로만 형제회를 조직하지 않았다. 그들은 특전과 관면을 받는 전 세계적인 군대의 일원이요, 수도회 일원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들은 앞서 보았듯이 봉건 영주와 시장에 대한 충성서약을 관면 받았고, 이것은 영주와 마을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어야 하는 의무에서 관면을 받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자기의 수도자적 신분과 양립할 수 없는 어떤 공적인 직책으로부터도 관면을 받았다. 당연히 영주나 시장들은 이들의 특전과 관면을 뺏으려 했고, 교황들은 이들을 보호하는 칙서를 계속해서 내리곤 하였다.
1227년 그레고리오 9세가 허락한 또 다른 특전은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자기 재산을 자유로이 기증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그래서 형제회들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수입도 많아서 자기들이 원하는 중요한 자선 사업을 뒷받침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치권은 시 당국자나 교회 당국자 모두로부터 밉상을 받았다.
이런 교회적 신분은 형제들 간에,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사회 법정에 가지 않고, 작은 형제들의 중재를 받아 형제회 내에서 해결하였으며, 해결이 안 될 경우에만 주교에게로 갔다.
다른 관면도 있었는데, 다른 수도회들에 허용된 것과 같은 중지(Interdict)로부터의 관면이 그것이다. 1221년 호노리오 3세는 특별히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중지 상태에 있는 회개자들이 교회생활과 성사, 그리고 교회 묘지에 묻히는 혜택을 주었다. 파문의 중지 상태에서도 이런 혜택을 주자 주교들은 결국 공의회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교회법에 반영하기까지 하였지만, 나중에 이 혜택은 다시 주어지게 되었다.
16세기 말에 이르면 관구의 대표들이 총회를 열었는데, 이는 진전된 단위 형제들의 조직 형태를 가지고 있고 협력적인 자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이태리 안팎으로 이 회개 운동이 확장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단의 위험과 이에 대한 외부의 의구심도 항상 복음적인 재속 단체에게 늘 있어왔다. 특히 14세기 초 1회가 시련을 받고 있을 때 회개자들의 회도 혹독한 시련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회개자들의 회와 공의회에서 단죄를 받았던 Beghard, Beguin, Fraticelli의 생활이 비슷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황은 회개자들의 회에 대한 조사를 명하였고, 정통성이 입증되자 1308년 니콜라오 4세의 회칙을 재확인하였다. 공의회의 단죄가 회개의 형제들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요한 22세는 1318년과 1321년 회개의 형제들을 주교들로부터 방어해야 했다. 그것은 주교들이 계속해서 회개의 형제들과 다른 이단들을 혼동하였기 때문인데 교황은 이런 주교들을 파문시키겠다는 위협까지 해야 했다.
흑사병과 대립교황으로 인한 대 분열로 14세기는 눈에 띄게 숫자가 줄어들어 1385년의 통계에 의하면 프란치스칸 회개자들의 회의 수는 244개였다. 이중 141개가 이태리와 동유럽에 있었고, 23개가 스페인, 29개가 프랑스, 37개가 게르만 국가들, 8개가 영국에 있었다.
15세기에 부흥이 있었는데, Observantes 형제들, 특히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와 요한 카피스트라노 등이 3회에 대한 열정적인 보급 덕분이었다. 이때부터 3회라 불리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부흥에 대한 증언이 있으니, 도미니칸 성인인 피렌체의 안토니오의 증언이 그것이다. “학자들은 도미니코 3회를 프란치스코 3회에 대해서처럼 많이 논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태리에서 도미니코 3회는 얼마 되지 않고, 특히 남자 회원들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프란치스코 3회는 많은 남녀가 모두 성 프란치스코 3회의 회칙을 가지고 있었고 3회 수도복을 입었으며, 그들 중에는 은수자로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의료 봉사단원으로 사는 사람도 있었다. 회원들은 월례회에 함께 모이곤 하였다.” 그는 프란치스코 3회원은 숫자가 많아 도미니코 3회원들처럼 관면을 받지 않았다고 덧붙인다. 그래서 Observantes인 Bustis의 베르나르디노가 “그리스도교는 3회의 회칙을 참으로 준수하는 남녀로 가득하다.”고 강론 때 말한 것이 결코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비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요한 카피스트라노는 3회의 교회적 신분과 법적인 독립성을 변호해야만 했다.
이렇게 3회가 숫적으로 갑자기 증가하게 된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미친 영향에 비교하면 그리 대단한 것이 못된다. 그들이 증가하게 된 것은 Observantes의 보급 노력도 있었지만 3회원들의 영적으로 훌륭한 삶 때문이었다. 성인들과 복자들의 수가 이를 말해 준다.
13세기: 성인 6명(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코르토나의 성녀 마르가리따, 비떼르보의 성녀 로사, 성 루도비코 등); 복자 6명(루케치오와 보나돈나 부부 등)
14세기: 성인 6명(포루투갈의 성녀 엘리사벳, 사르반의 성 엘제아르와 그의 아내, 성 곤라도와 그의 아내, 스웨덴의 성녀 Bridget, Valois의 성녀 Joan, 몽펠로의 성 Rock), 복자 6명(Poligno의 안젤라, Ramon Rull 등)
15세기: 복자 5명
복음적인 성스러움이 꽃피게 된 환경은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다운 생활이었고, 그것은 사도적활동과 자선 사업으로 표출되었다. 형제회가 세워지면 거기에는 오래가지 않아 병원이나 다른 자선 시설이 세워졌다. 이런 시설은 Beati 또는 Beatae라고 불리던 회원들에 의해서 운영되었는데, 이들은 다른 것에 매이지 않고 오직 이 일을 하였으며, 많은 경우 이 일을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공동체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런 시설에는 3회원들에게 싸게 빌려 주는 집들도 있었고, 타락한 여자(창녀)의 교정 시설도 있었으며, 가난한 자들을 위한 애긍시설, 극빈자들을 위한 재가 복지와 급식소, 가난한 청소년을 위한 장학금, 사제성소를 키우기 위한 청소년 사목 등이 있었다.
3. 16-18세기-귀족들의 유행이 되어버린 3회
문예부흥기때부터 3회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인본주의자들이 그 삶의 양식에 식상해 한 이태리에서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프란치스칸 이상과 정 반대인 개신교가 확고히 자리 잡은 나라들에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스페인과 포루투갈, 그리고 스페인 지배하고 있던 유럽(나폴리, 롬바르디아, 풀랜더)과 신세계에서는 세라픽 군대인 3회는 대인기였다. 성 프란치스코가 절정의 광채를 온 사회에 뿌려 왕들과 주교들, 장군들과 학자들, 그리고 예술가들은 프란치스코를 “우리의 세라핌 사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영예로 생각하였고, 자신을 프란치스코의 가장 좋은 열매로 봉헌하는 데 서로 경쟁하였으며, 수도복을 입고 죽는 것을 영예롭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프란치스칸 정신은 희미해져 갔다. 그 외적인 표시가 수도복의 변화이다. 원래의 거칠고 단순한 긴 수도복은 13세기 말까지만 해도 3회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이었는데, 이제 귀족들에게는 너무 크나큰 희생이 되었고, 수공업자나 농부들에게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래서 1508년 율리오 8세는 3회원들이 수도복 대신 넓고 긴 천이 가슴과 등까지 내려오는 스카풀라를 입고 허리에 띠를 매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것은 어떤 옷이건 그 속에 쉽게 착용할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탄압이 있은 다음부터는,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양으로 작은 조각이 되었고, 띠도 매지 않았다.
성스러움과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삶에 투신하겠다는 서약의 삶보다 외적인 사업과 활동에 힘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 16-17세기에 유명한 왕들과 교황들과 주교들과 예술가들이 3회원이었지만 성인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신 새로운 수도회를 세워 성인이 된 3회원은 제법 된다. 선교지 일본에서도 3회원 중에서 성인 17명, 복자 30명 이상이 배출되었다. 일본에서처럼 필리핀과 아메리카에서도 3회는 활발하여 1586년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3회원의 수는 10만 명이 넘었다.
17세기는 1회 모든 가족의 활기찬 지원으로 3회가 많이 발전하였는데, 1633년 톨레도 총회는 “1회 형제들의 게으름으로 어떤 나라와 어떤 지방은 3회가 없어질 지경이니, 모든 나라는 3회가 그 빛나는 모범을 보이는 스페인의 방법을 채택할 것”을 권고한 덕분이었다. 이태리 모든 도시들에서 수많은 형제회들이 생겨났고, 교회와 사회 고위층들이 3회원인 것을 영예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1644년에는 리스본에만 11,000명이, 1689년에는 마드리드에만 25,000명 이상의 3회원이 있었다. 프랑스는 카푸친의 노력으로 3회가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벨지움에서는 상류층만 배타적으로 3회원이 되었고, 독일, 아일랜드, 영국에서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3회가 성화하는 힘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외적으로만 발전하고 내적인 활력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3회 아래에 힘 있는 수많은 단체와 신심행위들이 있었고, 자선사업은 초창기 때부터 계속 되어왔다.
니콜라오 4세 이후로 3회는 1회의 관할권 하에 있어왔는데, 친교의 삶을 추구하며, 자신의 경당과 독립적인 활동을 소유한 3회 공동체의 확산과 대립교황으로 인한 분열 등으로 관할권 문제가 불거졌다. 그러나 1429년 마르틴 5세 이후로 계속되는 교황의 확인으로 Ob와 con 1회 총 봉사자와 관구 봉사자는 3회를 방문하고, 가르치고, 교정할 권한을 가지며, 수도복을 부여하고 서원을 받아들일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1547년 스페인 율수 3회의 계속되는 요청에 의한 양보로 바오로 3세는 세 가지 회칙을 승인하였는데, 3회의 세 부류인 남자 수도회와 여자 수도회와 재속 프란치스코 3회를 위한 회칙이었다. 그러나 재속 프란치스코 3회를 위한 회칙은 단식과 재계의 완화와 관련한 변경이 있었을 뿐이고, 그것도 리베리아 반도에 국한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스페인과 포루투갈에 있는 모든 3회는 율수 3회의 총 봉사자 관할권 밑에 있어야 하고, 총 봉사자는 율수 3회원을 임명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적인 변화였을 뿐 1회와 3회의 관계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3회와 관련하여 카푸친 1회는 아무런 관할권이 주어지지 않다가 1700년대에 가서야 주어졌고, 나중에는 카푸친 뿐 아니라 다른 개혁 그룹에게도 관할권이 주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카푸친은 기존의 형제회가 있는 곳에는 새로운 3회 형제회를 세우지 않는 것이 방침이었기에 이탈리아 밖의 나라에서만 카푸친 관할의 3회가 발전하게 되었다. 18세기의 유명한 성인은 오상의 마리아 프란치스카(-1791)이다.
시련기
3회의 시련기 또한 당시 모든 수도회, 특히 프란치스칸 수도회와 맥을 같이 한다. 클라라 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첫 번째 시련은 1782년 오스트리아에서 찾아왔다. 오스트리아 왕은 모든 3회를 오스트리아에서 폐지하였고, 프랑스 혁명 후 프랑스의 3회가 폐지되었으며, 1810년 모든 점령지의 3회를 폐지하였다. 스페인에서도 수도회의 폐지로 3회가 큰 타격을 받기는 하였지만 대다수의 단체는 살아남아 교구 사제와 수도원을 떠나 있는 작은 형제들의 지도하에 비교적 활기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회복기에 재조직의 어려움이 없었다.
4. 회복기
18세기 중엽부터 여러 가지 중요한 요인들이 작용하여 3회가 다시 발전을 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1회의 모든 가족이 다시 활기를 되찾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두 번째로는 지성인들이 프란치스코의 매력을 갖게 된 것이었고, 교황들의 적극적인 지원도 큰 이유였다.
1회는 여러 잡지들을 발간하여 프란치스칸 이상을 널리 퍼트리고 형제회들 간의 연대를 도모하였다. 1919년까지 전 세계에 걸쳐 164개의 프란치스칸 잡지가 있었다. 한 때 인본주의 지성인들을 중심으로 교회와 수도생활을 반대하고 비판하던 분위기는 반전되어, 지성인들 중에서 세라핌 띠를 두르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으며, 3회 안에서 성성이 다시 꽃 피어 유명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근대 교황 중에서는 비오 9세부터 요한 23세까지 모두 3회원이었다. 그중에서도 레오 13세는 특히 프란치스칸 3회를 사랑하여 그리스도교의 재건에 3회원들이 역할을 해 주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교황이 되기 전 페루지아 주교일 때부터 자신의 교구와 본당에서 3회가 성장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러한 애정은 교황이 된 후 더 커져, 1882년 프란치스코 탄생 800주년을 기해 프란치스칸 3회를 칭송하고 전 세계 모든 곳에서 그 확산을 지지하는 칙서를 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어떤 변화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현대 세계의 요청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과거 이 3회를 탄생시킨 성령에 감도되지 않으면 선의의 모든 평신도들을 하나로 묶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레오 13세 회칙이다. 1884년 5월 30일에 인준된 이 새 회칙은 3장으로 되어있고, 부록으로 3개의 장이 달려있다. 가장 본질적인 것들을 집약하였기에 양적으로는 줄어들었지만 내용적으로는 풍부하고, 현대화한 것이었다. 작은 스카풀라와 띠의 착용, 서약 전 1년의 수련기, 불경한 구경 삼가기, 절식, 성무일도나 성모 소일과를 못할 경우 주의 기도 12번 바치기, 유언 작성, 매일의 양심성찰, 매일 미사와 월례회 참석, 형제회 회비, 가난한 사람 돕기, 1회와 율수 3회의 의무들이 그 내용이었다. 이 회칙을 공포한 다음, 교황은 세계의 모든 주교들에게 서한을 보내 3회를 촉진시키라는 권고를 하였고, 그 결과 3회는 짧은 기간에 급격히 수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이 운동은 가톨릭을 넘어 영국 성공회에까지 퍼져나갔고, 칼빈주의자 모노는 공산주의가 출현한 어려운 시점에서 재속 프란치스칸들로 하여금 윤리적이고, 사회적이고, 영적인 복음을 선포하도록 격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실제로 공산당 대회에 대항하여 3회 세계 대회가 1893년에 시작되었는데, 이 세계 대회는 매년 개최되었으며 많은 경우 17,000명의 3회원들이 참석하기도 하였다. 프란치스코 귀천 700주년을 기념하는 세계대회가 가장 성대한 국제대회였는데, 이때를 기하여 국가별 모임을 갖게 되었다. 20세기에 와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많은 프란치스칸 사제 형제회들이 생겨난 점이다. 이런 형제회들이 이태리에 아주 많았고, 예를 들어 1950년에 프랑스에는 27개의 프란치스칸 사제 형제회가 있었다.
3회는 1920-30년을 정점으로 차츰 수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이유는 1) 수적인 성장을 위해 교회가 3회원으로서의 삶을 쉽게 하고, 성성이나 사도적 활동에 있어서 어떤 프로그램도 제공하지 않고 형제회를 그저 하나의 단체로 만든 것이고, 2) 1회가 3회에 대한 돌봄은 게을리 하면서 더 즉각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며, 3) 제일 중요한 이유일지도 모르지만 3회가 정점을 이루고 줄어들 때 3회를 대신하는 단체나 운동이 출현한 것이다.
이에 1회의 총 봉사자들은 전체 형제들에게 3회에 대한 관심과 노력을 더 보여줄 것을 거듭 촉구하였고, 1957년에는 3회 회헌을 작성하였다. 1960년 작은 형제회의 지도를 받는 3회원은 1,176,856명, 꼰벤뚜알 3회원은 90,000명, 카푸친 3회원은 727,937명, 율수 3회의 3회원은 27,052명, 합계 2,021,845명이었다.
1962년 요한 23세에 의해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소집되고 1965년 폐막되었다. 이 공의회는 세상에 닫혀 있던 교회가 세상에 열려 있고, 시대의 요청에 민감하게 응답하기 위한 공의회였지만, 수도 생활 차원에서 창설자의 정신에로 돌아가고 오늘에 맞춰 쇄신과 적응을 하게 하였으며, 평신도 영성과 관련해서는 세상 안에서 평신도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을 강조하면서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에 3회도 공의회의 정신을 반영하는 회칙을 작성하는 작업을 시작하여 1978년 마침내 바오로 6세에 의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회칙이 반포되었다. 2,000년 현재 3회원의 수는 323,661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