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는 최고의 드러머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모든 스킬이란것은 시대가
변하면서 더욱더 업그레이드되서 나오기 때문에 만약 전성기때의 존 본햄이 지금 그 실력
으로 살아있다면 굉장히 잘치는 수준이지만 최고가 될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가 전설로 남는 드러머이고 현재까지 그의 이름이 나온다는것은 물론 그의 드럼
실력도 있겠지만 레드 제플린이란 그룹과 그의 갑작스런 사망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래 글은 그와 관련된 자료글입니다 ^^
1980년 9월 25일, 레드 제플린의 드러머 존 본햄(본명 John Henry Bonham)이 지미 페이지(Jimmy Page)의 집에서 비상식적으로 많은 술을 마시고 잠들었다가자신의 토사물에 질식사하여 시체로 발견되었다.
평소 술을 즐겨마시는 편이 아니던 그가 왜 그토록 자학적인 폭음을 했는지는 영원히 의문으로 남긴 채. 그는 고작 32세의 나이였다.
70년대 중반부터 고질적인 위장병으로 고생하던 존 본햄은 80년 초부터 연속된 유럽 투어 공연으로 인해 과도한 피로와 복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뮌헨공연 도중에는 단 세곡을 연주한 뒤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의식을 잃는 등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어쩌면 그는 이런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그토록 많은 술을 자신에게 들이부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갑작스런 존 본햄의 죽음은 많은 레드 제플린 팬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으며 두달여 뒤 발표된 레드 제플린의 해체 소식은 전세계 음악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레드 제플린의 존속을 열렬히 기대했으나 10년동안 단 한번의 멤버변동없이 환상의 팀웍을 유지해온 레드 제플린의 나머지 세 멤버,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와 지미 페이지, 존 폴 존스(John Paul Jones)는 "존 본햄의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는 것은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며 망설임없이 밴드 해산을 선언하였다.
네명의 멤버가 만들어내는 완벽에 가까운 조화로운 사운드가 멤버 각자의 뛰어난 실력뿐만 아니라 그처럼 대단한 우정과 결속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해주는 결정이었다
(로버트 플랜트와 존 본햄은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사이로 10대 시절 Band Of Joy라는 밴드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했었다).
남은 세명의 멤버는 존 본햄의 사후 2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팬들 사이에서 가끔씩 고개를 드는 밴드 재결합설에 아랑곳없이 세션이나 솔로앨범 발표 등 개인적인 음악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다.
가끔 레드 제플린 시절을 그립게 하는 베스트 형식의 앨범을 발표하면서. 2000년 들어서 발표된 두장의 앨범 [Early Days/ The Best Of Zeppelin Volume One]과 [Latter Days/The Best Of Zeppelin Volume Two]는 레드 제플린의 활동시기를 두부분으로 크게 나누어 그들의 대표적인 곡들을 차곡이 담은 앨범으로 추락하지 않는 레드 제플린 신화를 다시한번 확인시키고 있다.
아마도 레드 제플린을 들으며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적지않은 감회를 안겨주는 앨범일 것이다.
레드 제플린에서의 존 본햄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많은 후배 드러머들이 별로 어려워보이지 않는 그의 드러밍을 모방해 보려고 시도했지만 보기만큼 그리 만만한게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새삼 감탄했다는 얘기들이 전해진다.
이런 일화들은 존 본햄이 결코 쉽지않은 연주를 매우 간단한 것인 양 연주했음을 입증해주는 예들이다.
"존 본햄의 드러밍이 훌륭한 것은 그가 결코 과장된 연주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로버트 플랜트의 말처럼 존 본햄의 드러밍에서는 화려한 기교를 발견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는 프론트맨으로 나서길 좋아했던 로버트 플랜트나 지미 페이지와 달리 베이스주자인 존 폴 존스와 함께 한발 뒤에 물러난 태도로 레드 제플린의 하드록 사운드에 넘치는 록필과 강렬한 임프로바이제이션을 제공했다.
언뜻 듣기에는 다소 싱겁게 들릴 수도 있는 존 본햄의 드럼 연주에는 과시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5살 때부터 드럼스틱을 잡기 시작해 10세 무렵에 이미 대단한 기량을 몸에 익혔을 만큼 뛰어난 드럼 연주자인 본햄의 진가는 라이브 무대를 보면 쉽게 실감할 수 있다.
그저 무지막지하게 드럼을 두드려대는 대신 그는 섬세하고 놀랄만큼 재빠른 손목놀림으로 정교한 리듬과 사운드를 만들어내었다.
[Led Zeppelin Ⅱ]에 수록된 인스트루멘틀곡 'Moby Dick'은 그의 드럼 솔로가 빛나는 명곡으로 레드 제플린의 라이브 무대에서 빠지지않는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그때마다 존 본햄은 무려 30여분 동안이나 물흐르는 듯한 드럼연주를 즉흥으로 펼치면서 박력과 넘치는 에너지로 수만 관중들을 몰아지경에 빠뜨리곤 했다.
존 본햄의 사후 만약 레드 제플린이 새로운 드러머를 영입해 계속 밴드를 이어갔다면 그들의 사운드는 어떤 식으로든 변화했을 것이다.
그런 변화를 거부하고 친구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화려한 비행을 마치고 땅위로 내려앉은 거대한 비행선 레드 제플린의 해산은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레드 제플린의 재결합을 빌며 고사를 지내기보다는 범람하는 하드코어와 테크노와 모던록 앨범들에 파묻혀있는 레드 제플린의 지난 앨범들을 꺼내 록역사상 가장 완성도 높은 사운드로 평가받는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잠시 존 본햄에 대한 애도의 묵념이나 올리는 것이 어떨까.
어린 나이에 이미 드럼에 관한 많은 기교를 익힌 바 있는 존은 로버트와 함께 "밴드 오브 조이"에서 활동한 바 있는 제플린 이전부터 일급 뮤지션으로 뽑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전까지의 브리티쉬 하드락게의 최고 드러머는 단연 키스 문(Kieth Moon)이었으나, 로버트의 제플린으로의 가입 이후 끈질긴 설득과 막강한 후원하에 레드제플린의 멤버가 됩니다.
실력에 비해 빛을 내지 못하던 그의 실력은 그룹에 가입하게 되면서 유감없이 발휘되며, 전세계를 경악시켰죠.
존의 뛰어난 연주력은 한가지의 일화에서 잘 나타나는데 85년 "라이브 에이드"의 공연이 그것입니다.
존을 제외한 잔여 멤버들이 모두 모여 연주를 하는데, 존의 자리에는 필 콜린스(Phill Collins)와 토니 톰슨(Tony Tomson)
이렇게 두사람의 드러머가 맡아 '역시 존 보냄은 두사람의 몫을 해 낸다'는 전설적 신화를 재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비탄을 안겨준 그의 죽음은 제플린의 해산에 있어서 당연한 일이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심장의 고동 없이는 삶도 없다."
레드 제플린이 결코 다시 합쳐질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JOHN BONHAM 은 드럼에 대해 조금만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이름이고, 그의 연주도 널리 알려진 곡이 많다.
필자는 다른 사람들이 흔히 그에 대해 평가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그를 평가해 보고자 한다.
그가 70년대를 풍미한 불세출의 하드락 드러머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다.
그가 그렇게 많은 이들의 숭배를 받게 된 원인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하고 필자는 그의 연주를 자세히 들어봤고, 생각을 많이 했다.
보통 그를 파워 드러머, 흉내내기 어려운 헤비 터치 등 락 드러머의 최고봉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실제 전 세계 락드러머들중 그보다 더 스트록이 강한 사람이 없고, 테크닉이 뛰어난 드러머가 없고, 키킹이 강한 드러머가 없는가?
주법적인 면에서만 봤을때 그의 연주가 난이도가 크게 높다고는 볼 수 없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BONZO--JOHN BONHAM 의 별명, 이하 BONZO 로 칭함-- 의 장점은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BONZO 는 하드락 드러머의 1세대이다.
그전에도 IRON BUTTER FLY, STEPPEN WOLF 등 하드락이라 칭하는 그룹들은 있었으나 하드락 드러머라는 개념은 없었다.
BONZO 는 바로 락드러머의 존재를 만들고 부각시킨 인물 이란 점이다.
그는 전에 없던 스타일을 창조한 셈이다.
26 인치 킥드럼을 뮤트를 별로 안한 채 사용해서 RINGO STAR 와는 다른 무거운 사운드를 만들어냈고, 각 드럼의 사이즈 가 전반적으로 컸다.
리듬에 있어서도 단순한 리듬을 될 수 있는 한 헤비하게 그루브를 뽑아내었고,그것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단순히 두들겨 부수는 드러머는 아니다.
비디오를 보면 그가 TOMMY ALDRIDGE 나 LARS URLICH 처럼 팔을 높이 들면서 치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는 덩치만 클 뿐 드럼을 그리 세게 치진 않았다.
물론 스네어에서 림샷을 많이 사용하기는 했으나, 요즘의 락 드러머들에 비하면 더 세게 치는 건 절대 아니다.
주법적인 면에서 그는 JAZZ 나 MOTOWN, COUNTRY 등을 나름데로 소화해 내서 락으로 새롭게 융화시킨 모습을 볼 수 있다.
GHOST STROKE 이나 SUFFLE 16에서의 키킹은 힘과 정교함을 고루 겸비했음을 보여 준다.
한마디로 그는 여러 스타일을 고루 섭렵한 걸출한 실력을 새로운 창조로 이은, 말 그대로 예술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테크닉만으로 보면 요즘의 드러머들에게 뒤지지만, 당시의 락드러머들 사이에서 1류의 위치에 있을 수 있었다.
ROD MORGENSTEON 의 말처럼 테크닉이란건 계속 발전 하기 때문이다.
그가 MODERN DRUMMER 지에서 별 5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도 감안된게 아닌가 싶다.
참고로 요즘 최고드러머로 부각된 CARTER BEUFORD 도 별을 4.5 개밖에 못 받았다.
따라서 JOHN BONHAM 을 그대로 따라하거나 그와 비슷한 수준까지 연주해 봐야 현재로선 조금 잘 치는 류의 드러머 에 끼거나, 아류정도로 밖에 취급이 안 된다.
물론 한국에서는 A 급에 낄 수 있겠지만. 그 이유는 BONZO 는 현재의 락드러밍을 만든 장본인이고, 현재 드러밍은 그걸 토대로 많은 발전을 거듭했는데, 계속 20년전것을 고수한다는 것은 좋게 보더라도 복고의 부활일 뿐, 창조적인 면에선 마이너스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그는 당시로선[!] 뛰어난 실력에 락드러밍의 혁명아이다.
영원한 드러밍의 최강자는 절대 아니다.
음악에서 그런 것을 생각할 수도 없겠지만. 또 하나 그가 전설의 인물로서 남을 수 있는 배경에는 LED ZEPPELIN 이란 위대한 그룹의 일원이었다는 점이 있다.
만일 그가 TED NUGENT 나 MOTT THE HOOPLE 의 멤버였다면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
이점에 있어서는 CARMINE APPIECE 가 BONZO 나 COZY POWELL 보다는 아무래도 일반대중들 사이에서 지명도가 약간 떨어진다는게 잘 설명해준다.
물론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세사람 은 하드락 드러머의 1세대로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인물 들이다.
그러나, 현재 유일한 생존자인 CARMINE APPIECE 가 죽더라도 POWELL 이나 BONZO 의 사망때 처럼 시끌 법적할지는 모를 일이다.
외국이나 한국이나 명성은 든든한 배경을 바탕으로 생겨 난다. 실력만으로는 이루어 지지 않는다.
그가 실력이 있었기에 JIMMY PAGE 의 오디션에 합격을 했겠지만, 당시 그보다 잘치는 드러머가 없었다고는 장담을 못 하는 것이다.
LED ZEPPELIN 은 다양한 음악성, 뛰어난 연주력을 바탕으로 BONZO 의 드러밍이 더욱 빛나게 만들어 주었고, 그의 사망시 곧 해체를 하면서 BONZO 는 말 그대로 불멸의 인물이 되었다.
당시 BONZO 와 같은 사운드를 만들어낼 드러머는 없다는 이유가 ZEPPELIN 호 항해중지의 이유였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성명인가?
당시 그의 후임으로 거론 된 드러머는 SIMON PHILIPS,ANSLY DUNBAR 등이었다고 하는데, 필자는 이들이 BONZO 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하진 않는다.
하지만 JIMMY PAGE 의 말이 JOHN BONHAM 만의 개성은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으로 풀이 되고,
필자 역시 그점에 동의 하며, 이점또한 그가 지금 까지, 또 앞으로도 JOHN BONHAM 이 없이 ROCK DRUMMING을 얘기 할 수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