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문학적 매력, 사유의 감수성
-『수필문학』 3월호를 읽고
강미애
갑진년(甲辰年) 봄이다. 봄이 오는 순간은 경이롭다. 단순히 계절의 교체를 넘어 자연의 불변하는 순환과 변화의 아름다움이 만연하다. 그래서 봄에 발표되는 작품들은 생명력과 생동감이 넘친다.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고 자연이 깨어나는 시기,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그 경계를 지나기 때문이다. 어둠과 밝음, 경계선을 넘은 건강함과 강건함이 엿보이는 봄. 그래서 우리에게 봄은 특별한 계절이다. 삶과 인생, 재생과 소멸의 깊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서.
청량한 숲을 솟구쳐 오르는 작은 울새의 지저귐을 들으면 “한 소절의 노래 같다”라는 경탄의 표현을 아끼지 않는다. 물론 연암 박지원은 중국의 난하(瀾河)를 건너며 이렇게 감탄하는 사람들을 향해 “어찌 실물을, 고작해야 그것을 묘사한 것에 불과한 그림에 견주고 있느냐”며 퉁박을 했다고 한다. 연암의 뿌리인 실사구시의 정신으로는 의당 그렇게 비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 소절의 노래 같다’는 말에는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밝히는 단서가 깃들어 있다.
다재다능한 표현 형식인 수필. 수필은 작가의 생각, 경험, 인식을 반영한다. 문학적 표현을 통해 삶의 본질에 다가가게 하고, 인간의 마음과 정신세계를 섬세하게 탐구한다. 서술적인 이야기와 개인적인 일화를 통해 평범하다고 여겨지는 일상에서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사유의 감수성, 수필문학이다.
3월 호에는 지난날의 소회와 다짐, 새롭게 다가오는 날들에 대한 희망이 담긴 작품이 많았다.
지교헌은 운중천에 자리 잡은 송림을 바라보며, 내리는 눈을 이마에 이고 있을지언정 숙살을 당하기는커녕 오히려 푸르기만 한 모습에 “독야청청(獨也靑靑)”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2024년 세한을 맞이하여, 더욱 푸르른 송백처럼 모든 지성인과 공직자와 지도자는 새로운 용기와 역량을 발휘하여 국가 발전과 사회정의 실현에 헌신해야 한다는 당부의 글이 새해 앞에서 묵직한 무게로 다가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결코 만만치 않은 경우가 많다. 우리의 선현(先賢)들이 아무리 값진 말을 남겼더라도 그것을 외면하거나 불신하거나 배신하고 나아가서는 자사자리와 당리당략에 이용하거나 사회를 혼란케하고 국가의 발전이나 국제평화를 교란하는 언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들은 아무리 정규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성인(聖人)들이나 선각자들이 남긴 좋은 글을 읽고 배워도 그것은 순간일 뿐, “서자서 아자아(書自書 我自我)”로 그치고 만다. 책은 책일 뿐이고 나는 나일 뿐이다.
- 「세한(歲寒)을 맞이하여」 중에서
설복도는 「홀로서기」에서 아내가 병원에 입원하는 동안 가정을 꾸려가는 여자의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밥상에 오르는 음식을 매일 만들고, 빨래, 청소 등 잡다한 집안일의 노동을 직접 경험해 보니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경험으로 지금은 혼자서도 여러 음식을 잘 만들어 먹는다. 텃밭 가꾸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필자는 고추, 들깨, 토마토 등 매년 풍작이라 이웃과 나눠 먹는 것도 즐겁다고 한다. 사람은 올 때도 혼자, 갈 때도 혼자 아닌가. 텃밭과 함께 홀로서기 훈련 중인 필자에게 따뜻한 마음의 박수를 보낸다.
이제는 밥하는 것도, 반찬하는 것도, 설거지하는 것도 모두 익숙해졌다. 채소류는 텃밭에서 해결하고 시장에서 생선 한 마리 사서 굽거나 지져 탕으로 해 먹고 국도 끓여 먹을 수 있다. 요즘의 유일한 소일거리는 작은 텃밭이다. 작물을 심어놓고 매일 물을 주고 돌보며 외출해서 돌아오면 반드시 텃밭을 먼저 둘러본다. 그리고 “잘 있었나, 별 탈 없이 잘 크고 있나 내 자식들아” 하고 말을 건다.
- 「홀로서기」 중에서
손미경은 「텅 빈 충만」에서 삶의 모든 순간이 향기로울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제 남은 세월을 홀로 살아내려니 얼음처럼 경직되어 살아온 날들이 스쳐 지나간다. 달그락이며 행복했던 시절이 그리울 때는 가슴이 시려온다는 필자. 그럴 때 아득한 시절을 떠올리면서 따끈한 된장국 한 숟갈을 입에 넣으면 평안이 밀려오고 위안이 된다는 고백의 문장이 애잔하다.
된장 한 숟가락 푸욱 퍼서 넣고 왕 멸치와 다시마도 넣어 지글지글 보글보글 김이 모락모락 끓인 구수한 된장찌개, 한 수저 후루룩 떠먹으니 외롭고 우울했던 맘이 편안해지면서 위안이 되었다. 함께 할 가족이 없었으나 엄마의 따뜻한 사랑처럼 느껴졌다.
어쩌다가 이 홀로 외로운 노년을 보내게 되었는지 시시때때로 착찹하고 외로움이 잦다. 식구들이 식탁에 앉아 깔깔거리며 웃던 때가 생각날 때 난 말없이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인다. 된장 냄새를 맡으면 부유한 생각들이 고요히 가라앉으며 위로가 된다. 된장찌개는 묘하게 텅 빈 마음이 충만하게 채워진다.
- 「텅 빈 충만」 중에서
황미연은 「시간 죽이기」에서 오일장의 풍경을 펼쳐 놓는다. 시장은 무대다. 극본 없는 배우들이 모여서 연극을 펼치는 곳이다. 주연과 조연 없이 등장하는 모두가 주인공이다. 그들의 연극은 뜨겁고도 슬프다. 유쾌하고 적막하며 가볍고도 무겁다. 오늘도 그들은 노련한 모습으로 삶의 무대에 올라 열연 중이다. 삶은 견디는 것이다.
태양이 자오선을 지나간다. 낮볕에 하늘을 쳐다보지 않아도 눈이 부신다. 집에만 있으면 뭣하냐고, 몸에 밴 부지런함이 저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겠지. 소일거리 삼아 용돈이라도 벌어 쓰면 살아가는 일이 재미있고 활력도 생기지. 그래,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의미야.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혼자 중얼거리며 좌판이 벌어진 길거리를 훑어본다. 사람들은 정물처럼 앉았거나 그림자를 여기저리로 옮기며 시간 죽이기에 바쁘다.
- 「시간 죽이기」 중에서
수필을 쓰는 우리가 마주치고자 하는 것은 경험 그 자체만은 아니다. 자칫 경험에 집착할 경우 모든 작품은 소재주의로 전락하고 만다. 경험을 깊이 삭여내는 사유의 힘이 필요하다. 작가는 자신의 체험을 작가정신으로 치열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이쯤이면 되겠지라는 적당한 선에서의 타협이 있는 한, 작품의 미적(美的) 수준 역시 일정한 선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다시 봄이다. 언어 너머에 있는 사유의 감수성을, 마음껏 개화한 정신의 깊이를 우리는 문학을 통해 만나야 한다. 정신의 깊이에 매개된 체험이야말로 우리가 문학작품에서 얼굴을 돌리지 못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