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담는 그릇
-유경환의 <그릇> 조명
그릇
유경환劉庚煥 (1936~2007) 수필집 ⟪두물머리⟫ ⟪염소 그리기⟫
좁은 서가 한쪽을 비워놓고 그릇 하나를 올려놓았다. 막사발 비슷한 질그릇이다. 무엇이 담긴 것이 아니라 빈 그릇이다. 빈 그릇이라야 그릇 자체를 보게 된다.
보고 또 보아도 매일 눈길이 간다. 볼수록 눈길이 더 끌린다. 소박하다고 할까 질박하다고 할까. 아무 꾸밈이 없는 생김에 색깔도 유별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눈길이 닿으면 그냥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라 머물게 된다.
이 그릇을 구워낸 사람은 무엇을 담는 용기로 만들었으리라. 하지만 내겐 빈 그릇으로 오히려 좋다. 무엇이라도 담기면 그릇보다 담긴 것에 눈길을 흘리게 되기 때문이다.
하여간 눈길을 끄는 매력이 어디엔가 숨어 있긴 한데,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합당한 것이 담길 수 있다는 기대에서일까, 아니면 그릇 그 자체로서의 소용에서일까. 생산자의 의도와 소비자의 용도가 언제나 일치하리라는 것은 어설픈 생각이다. 그 불일치가 만드는 거리를 적절히 좁히는 일로서 미의 감각을 키울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런 것까지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조용히 그것을 즐기고 있음만 말할 뿐이다.
그릇이라는 말은 참 듣기 좋고 또 나직이 말하기도 좋다. 우리말이 이렇듯 오묘할 수가! 그릇이라고 발음할 때 마음이 안쪽으로 조금만 잡아당겨짐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나만의 경우일까.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면 무엇인가 알맞은 것으로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말미암아 듣기에도 말하기에도 좋은 정서를 지니게 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내게도 욕심이 있다는 증거가 된다.
어리석지 아니한 사람은 자기에게 걸맞은 그릇에 마음을 둔다. 마음으로 정하는 일이기에 이를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걸맞지 않게 큰 그릇을 선택해 놓고 턱없이 모자라는 부족을 채우려 들면 허욕이 일어난다. 허욕은 언제나 끝이 사납다. 채우려 채우려 하여도 채워지지 아니 하는 것이 허욕이다.
처음부터 자기에게 알맞은 그릇을 마음으로 정했다면 그것으로 이미 마음 편한 일이다. 더 채울 자리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욕심의 자리도 없다.
나는 요즘 어떤 그릇은 음식을 담기에 앞서, 마음을 담기에 필요한 도구로 빚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도공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그릇을 여러 곳에서 보게 된 뒤부터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진열장 앞에 서자마자 내 생각이 틀림없노라고 혼자 우겨댄다.
조상이나 하늘에 대고 무엇을 간절히 빌 때 두 손 맞잡고 경건히 올려놓는 제기 또한 마음의 그릇이 아닌가. 그러기에 마음을 담고자 하는 그릇으로 빚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전적으로 그른 것은 아니다.
그릇은 육신을 지탱하는 음식을 담아내는데 유용할 뿐만 아니라 영혼을 담아보는데도 필요한 용기다. 아주 어려서 어머니가 한밤중에 물을 담아놓고 거기 염원을 풀어 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빈 그릇 하나 정갈하게 씻어 두 눈 감고 마음까지 쏟아 부으면 그 안에 괴는 맑은 흔들림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을 한때나마 열띠게 하는 술 한 잔보다야 열길 우물에서 길어 올린 한 사발 물이 그릇의 가치를 얼마나 아름답게 하는가. 따져 보면 사람 또한 그릇의 일몫과 크게 차이 나지 아니한다. 무슨 생각 어떤 의식을 육신에 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품위와 성격이 달라진다.
남들이 스스로 따라가 감동을 얻고 존경을 표하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손가락질을 받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인가도 전적으로 그 사람이 지니는 인간 내면의 문제인 것이다.
그릇이 크고 작다는 말이 때때로 한 사람이 지닌 도량이 크고 작다는 말과 다르지 않게 쓰이는 것을 듣는다. 그렇다면 그릇과 도량이 동의어일 수 있겠다. 그릇이 도량과 무관하지 아니한 어의를 지닌 것만은 틀림없다.
서가 한쪽을 비워 그릇 하나를 올려놓고 바라보면서 내 마음이 담길 크기의 그릇이면 족하다고 다짐한다. 가끔 분수에 어긋나는 짓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를 가늠해 보는데 더없이 좋은 사발이다. 분수에 맞는지를 견주는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겠는가.
언젠가 법정스님의 《오두막 편지》라는 수상집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 표지엔 다른 문양이 없고 작은 그릇 한 개만 그려져 있다. 맑은 가난을 수행자의 기본으로 강조하는 스님의 생각과 아주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 많은 스님들 가운데 유독 법정을 택하는 것도 그의 수필에 담긴 스님의 내면 때문이리라.
뭔가 담기 위해 빚어진 그릇이라 하여도 빈 것이 내겐 더 좋다. 서가에 비껴드는 햇살이 그릇을 채워주는 이 충만을 보고 있노라면, 아예 다른 것으로 채울 생각은 안하게 된다. 비끼는 햇살에도 윤이 난다.
― ⟪염소 그리기-2006년⟫에 수록
그릇은 주로 인간의 육신에 영양을 공급하는 밥이나 물을 담는 데 쓰는 것으로 쇠, 돌, 나무, 짚, 흙 등을 가공하여 만든다. 그중에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주로 사용되는 것은 흙으로 빚어 구운 사기나 옹기이다. 이는 종지에서 항아리까지 그 크기가 다양하고 그 외형도 다양하다. 그러나 고체나 액체를 담는 그릇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처음에는 토기로 시작한 것이 그 모양이나 외형을 보다 아름답게 꾸미는 도자기공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고려 시대의 청자, 조선 시대의 백자가 그 산물이다. 요즈음에는 청자나 백자의 외형에 현혹되어 그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를 논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릇>의 화자가 주목하는 것은 그 외적인 가치와는 거리가 멀다. 그릇은 무엇을 담는 용기容器라는 그릇의 본분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그것이 육신과는 거리가 멀다.
좁은 서가 한쪽을 비워놓고 그릇 하나를 올려놓았다. 막사발 비슷한 질그릇이다. 무엇이 담긴 것이 아니라 빈 그릇이다. 빈 그릇이라야 그릇 자체를 보게 된다.
보고 또 보아도 매일 눈길이 간다. 볼수록 눈길이 더 끌린다. 소박하다고 할까 질박하다고 할까. 아무 꾸밈이 없는 생김에 색깔도 유별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눈길이 닿으면 그냥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라 머물게 된다.
이 그릇을 구워낸 사람은 무엇을 담는 용기로 만들었으리라. 하지만 내겐 빈 그릇으로 오히려 좋다. 무엇이라도 담기면 그릇보다 담긴 것에 눈길을 흘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릇>의 서두이다.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를 소장하고 싶은 사람은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거실에 그럴싸한 받침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화자는 서가 한쪽을 비우고 그 위에 모양도 색깔도 유별나지 않은 막사발 비슷한 질그릇 하나를 올려놓았다. 책을 꽂아놓는 서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릇은 이미 밥이나 물을 담는 생활용기가 아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무엇이 담기면 담긴 것에 눈길을 빼앗길까 봐빈 채로 인 막사발. 이 그릇의 용도가 궁금하다.
하여간 눈길을 끄는 매력이 어디엔가 숨어 있긴 한데,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합당한 것이 담길 수 있다는 기대에서일까, 아니면 그릇 그 자체로서의 소용에서일까. 생산자의 의도와 소비자의 용도가 언제나 일치하리라는 것은 어설픈 생각이다. 그 불일치가 만드는 거리를 적절히 좁히는 일로서 미의 감각을 키울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런 것까지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조용히 그것을 즐기고 있음만 말할 뿐이다.
생산자는 무엇인가를 담기 위해 그릇을 만든다. 사발이라면 밥이나 국을 담는 데 주로 쓴다. 그러나 화자는 빈 그릇을 고집한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불일치인 것이다. 이 불일치가 만드는 거리는 심리적 또는 정신적인 거리이다. 바로 앞에 있는 것이 아득히 느껴질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허접하게 대하는 것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 경우는 순전히 주체의 주관에 의존한다. 주체의 내면에 형성된 사람됨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릇이라는 말은 참 듣기 좋고 또 나직이 말하기도 좋다. 우리말이 이렇듯 오묘할 수가! 그릇이라고 발음할 때 마음이 안쪽으로 조금만 잡아당겨짐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나만의 경우일까.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면 무엇인가 알맞은 것으로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말미암아 듣기에도 말하기에도 좋은 정서를 지니게 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내게도 욕심이 있다는 증거가 된다.
화자는 ‘그릇’이라는 말에서 느끼는 좋은 어감을 ‘무엇인가 알맞은 것으로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데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욕심의 발로로 보고 있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욕심이라는 것이 있다. 그 욕심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상인은 돈을, 정치가는 권력을, 학자는 지식을 욕심낸다. <그릇>에서 화자가 욕심내는 ‘무엇인가 알맞은 것’은 무엇일까?
어리석지 아니한 사람은 자기에게 걸맞은 그릇에 마음을 둔다. 마음으로 정하는 일이기에 이를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걸맞지 않게 큰 그릇을 선택해 놓고 턱없이 모자라는 부족을 채우려 들면 허욕이 일어난다. 허욕은 언제나 끝이 사납다. 채우려 채우려 하여도 채워지지 아니 하는 것이 허욕이다.
처음부터 자기에게 알맞은 그릇을 마음으로 정했다면 그것으로 이미 마음 편한 일이다. 더 채울 자리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욕심의 자리도 없다.
‘자기에게 알맞은 그릇’을 알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외쳤던 ‘너 자신을 알라.’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하다. 자아의 영혼, 곧 순수한 정신세계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깨달아 이를 생활화할 수 있는 지혜.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그리스의 철현哲賢들이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을 참배한 것도 이를 얻기 위한 수행修行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자기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아테네의 제도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도 이를 달게 수용한 것도 바로 여기에 기인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사형 수용은 굴종이 아니라 자아의 순수한 영혼을 수호하기 위함이었으니 말이다.
이 순수한 자아를 추구하는 사람은 외면 세계보다 내면세계를 중시한다. 그래서 모든 가치를 내면을 충족시키는 데 둔다. 그를 체득한 연후에 자기에게 알맞은 그릇을 마음으로 정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그 여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견지할 수 있게 한다.
나는 요즘 어떤 그릇은 음식을 담기에 앞서, 마음을 담기에 필요한 도구로 빚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도공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그릇을 여러 곳에서 보게 된 뒤부터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진열장 앞에 서자마자 내 생각이 틀림없노라고 혼자 우겨댄다.
조상이나 하늘에 대고 무엇을 간절히 빌 때 두 손 맞잡고 경건히 올려놓는 제기 또한 마음의 그릇이 아닌가. 그러기에 마음을 담고자 하는 그릇으로 빚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전적으로 그른 것은 아니다.
그릇은 육신을 지탱하는 음식을 담아내는데 유용할 뿐만 아니라 영혼을 담아보는데도 필요한 용기다. 아주 어려서 어머니가 한밤중에 물을 담아놓고 거기 염원을 풀어 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빈 그릇 하나 정갈하게 씻어 두 눈 감고 마음까지 쏟아 부으면 그 안에 괴는 맑은 흔들림을 느낄 수 있다.
화자는 그릇은 물질만을 담는 용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골몰한다. 제례의식에 사용되는 그릇, 곧 제기祭器는 제물祭物을 담는 그릇이지만 식기食器와는 다르다. 간절한 마음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제기를 빚은 도공의 간절한 마음 또한 담긴 그릇이다. 첫닭이 울면 정갈한 모습으로 우물에 가, 아직 아무도 두레박을 넣지 않은 물을 길어다가 뒤란 장독대 앞 반석에 올려놓고 두 손을 모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염원을 간구하는 어머니의 앞에 놓인 정화수 그릇. 그럴 때 그릇은 마음을 담는 용기가 된다. 그 정화수 사발에서 정성 모아 부은 맑은 마음의 흔들림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을 한때나마 열띠게 하는 술 한 잔보다야 열길 우물에서 길어 올린 한 사발 물이 그릇의 가치를 얼마나 아름답게 하는가. 따져 보면 사람 또한 그릇의 일몫과 크게 차이 나지 아니한다. 무슨 생각 어떤 의식을 육신에 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품위와 성격이 달라진다.
남들이 스스로 따라가 감동을 얻고 존경을 표하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손가락질을 받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인가도 전적으로 그 사람이 지니는 인간 내면의 문제인 것이다.
그릇은 외형이 같아 보일지라도 어떤 일에 쓰이느냐에 따라 크게 다르다. 육신을 위한 음식을 담아 식탁에 놓는 그릇과 조상을 섬기는 마음을 담아 제상에 올리는 그릇이 다르듯 막걸리를 담아 마시는 사발과 정화수에 간절한 마음을 담은 사발 또한 같을 수가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 안에 담긴 영혼이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그 순수성이 변질되어 불순한가에 따라, 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느냐, 천시를 당하느냐가 결정된다. 사람됨, 곧 인격을 결정하는 것은 외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면에 의한 것이다.
그릇이 크고 작다는 말이 때때로 한 사람이 지닌 도량이 크고 작다는 말과 다르지 않게 쓰이는 것을 듣는다. 그렇다면 그릇과 도량이 동의어일 수 있겠다. 그릇이 도량과 무관하지 아니한 어의를 지닌 것만은 틀림없다.
어떤 사람이 가진, 사람이나 물질을 품을 수 있는 정도를 도량度量이라 한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지닌 마음의 크고 작음이다. 그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현들의 가르침과 끊임없는 사색을 통해 빚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의 도량을 알아 그에 알맞은 것을 담는 일은 쉽지 않다. 때로는 간장종지가 국그릇이 되고 싶어 하고, 어떤 때는 똥장군이 생수통 노릇을 하려 들기도 한다.
서가 한쪽을 비워 그릇 하나를 올려놓고 바라보면서 내 마음이 담길 크기의 그릇이면 족하다고 다짐한다. 가끔 분수에 어긋나는 짓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를 가늠해 보는데 더없이 좋은 사발이다. 분수에 맞는지를 견주는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겠는가.
화자가 자기의 도량을 측정하는 도구로 선택한 것은 ‘막사발 비슷한 질그릇’이다. 지나치게 크지도 작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화려하지도 않다. 그것을 서가 한쪽을 비워 올려놓았다. 서가는 책을 꽂아놓는 선반이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다.’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서가에 놓인 그릇은 마음의 양식이다. 성서일 수도, 불경일 수도 있다. 그것을 보면서 분수에 어긋나는 욕심을 경계하고자 함은 소크라테스가 우러른 아폴로 신전과 통하는 데가 있다.
언젠가 법정 스님의 《오두막 편지》라는 수상집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 표지엔 다른 문양이 없고 작은 그릇 한 개만 그려져 있다. 맑은 가난을 수행자의 기본으로 강조하는 스님의 생각과 아주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 많은 스님들 가운데 유독 법정을 택하는 것도 그의 수필에 담긴 스님의 내면 때문이리라.
허욕을 경계하고자 하는 화자의 눈길을 끈 것이 법정스님의 《오두막 편지》이다. 다른 문양 없이 작은 그릇 하나만 그려진 그 수상집의 표지 그림이 화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어쩌면 작가가 수필 <그릇>을 쓰게 된 동기일는지도 모른다. 이전부터 불교의 정수精髓인 무소유無所有의 철학으로 일관한 법정의 정신세계에 감복感服해 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무소유는 집착을 버리는 데서 비롯된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의 핵심인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 色卽是空’에서 보여주는 모든 것은 공, 곧 없는 것임을 깨달아 마음을 비웠을 때라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태복음> 5장 3절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이 저들의 것’ 역시 모든 욕심을 비워 마음이 가난해졌을 때라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집착에서 해방되었을 때라야 진정한 평화와 자유에 접근할 수 있다.
뭔가 담기 위해 빚어진 그릇이라 하여도 빈 것이 내겐 더 좋다. 서가에 비껴드는 햇살이 그릇을 채워주는 이 충만을 보고 있노라면, 아예 다른 것으로 채울 생각은 안하게 된다. 비끼는 햇살에도 윤이 난다.
글의 일관성을 견지해 오다가 완결성을 부여한 결말 부분이다. 화자가 서가에 막사발 비슷한 빈 그릇을 올려놓고 거기에 마음을 두는 것은 그릇이 아름다워서도 금화金貨나 권력이나 명예를 채우기 위해서도 아니다.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없음, 마음의 가난함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릇을 채워주는 햇살의 충만함에는 소크라테스의 순수한 영혼이 담겨 있을 법도 하다.
수필은 일상적인 생활에서 소재를 선택하여 쓰는 글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소재를 평면적으로 서술해놓은 글은 수필이 아니다. 선택한 소재에 자기의 내면에 축적된 사상이나 감정을 용해시켜 짤막한 산문으로 표출했을 때 비로소 수필이 된다. 그러한 점에서 <그릇>은 사상성과 예술성을 갖춘 뛰어난 수필이라 평하기에 부족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