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못과 구암리의 고인돌
◎ 청못
구암마을에서 북쪽으로 작은 산을 넘어 약1.5km 지점에 경부고속도로에 의해 두동강이 난 못 오랜 역사를 간직한 청못(청제)이 있다.
채약산(499m)에서 흘러내린 물을 가두어 30여만평의 구암들판을 비옥하게 한다.
대단한 크기를 자랑하는 것도 아주 주변풍광이 빼어난 것도 아니지만 우리나라 수리시설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로보아 이 지역에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이 벼농사를 지으며 살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벼농사의 역사는 삼한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 제천의 의림지 이를 삼한시대 3대 수리시설로 꼽고 있으나, 청못 또한 이에 전혀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구암들에 관계 용수를 공급하고 있는 국내 유일한 수리시설이다.
◎ 청제비(靑堤碑)
청못의 수축연대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법흥왕23년(537) 또는 그전에 수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못의 서북편 얕은 산기슭에는 청못의 처음 둑을 쌓은 내력과 고친 연유를 새긴 비석이 둘 있다.
하나는 청제비(靑堤碑)이고 다른 하나는 청제중립비(靑堤重立碑)이다
이비의 앞 뒤 면에는 각각 다른 내용과 다른 연대의 간지가 적혀있다.
하나는 병진이라는 간지가 있고 다른 하나는 정원14년이란 절대연대가 적혀있다. 전자는 청못의 처음 수축연대이고,
후자는 청제의 파손을 수리한 수치명의 연대라 할 수 있다.
이는 1968 한국일보사의 주관으로 신라삼산에 대한 학술조사를 진행하던 중 조사단에 의해 발견 되어 두비 모두 보물 제517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한 학술위원은 비문에 나오는 문자는 신라시대에 사용한 글씨 문체로 이두를 넣은 신라 속한문체 인데다 신라시대에 쓰이던
용어가 많아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다며 연구결과 병진년은 법흥왕 23년(537)이나 그보다 앞서는 어느 해로 추정되고
정원14년은 원성왕 14년(797)에 해당 한다고 한다. 영천의 읍지인 영양지(永陽誌)에 당나라 정관(貞觀) 때의 기사비(記事碑)에도 기록이 있다고 했다.
◎ 영천의 역사적 내력
청못과 영천지역의 역사적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영천의 읍지인 영양지(永陽誌)의 기록에 의하면 영천은 이수삼산(二水三山)의 고장으로 불렸다.
이수(二水) 영(永)자를 파자하면 그렇다고 한다.
성종대의 학자 서거정이 진주촉석루, 밀양 영남루, 영천 서세루(瑞世樓 또는 조양각)를 영남 3루로 꼽으며 경상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군이라 했다.
부족국가시대 영천에는 진국(진한) 24국 가운데 하나였던 골화국(骨火國)또는 골벌국(骨伐國)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지역이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이고 또 뿌리가 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골화국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은 지금의 완산동과 그 일대로 간주되며 지금은 일부가 군부대에 들어갔고 경주에서 오면
지금의 작산동, 도남, 도동에도 청동기 시대의 부족연맹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영양력 있는 부족의 지도자가 죽어
아마도 구암동에 지석묘를 만들을 것으로 추정해본다.
◎ 골벌(골화)국 (骨伐(骨火))國,의 역사적 배경
기원전 2세기경 위만이 고조선의 지배권을 장악할 무렵 이 지역에는 진국(辰國)이 있었고, 이들은 중국의 군현세력에 저항하면서
점차 부족연맹 세력을 형성하여 갔다.
그 결과 삼한(三韓)이라고 통칭하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등 세 그룹의 부족 사회가 생겨,
기원후 3세기경에는 대방군에 공격을 가하기도 하고 직접 진(晉)과 교섭하기도 했다
‘벌(伐)’은 ‘부리(夫里)’·‘불’과 함께 취락·성(城)을 뜻하는 옛말의 한자표기이며, ‘벌’을 ‘화(火)’로 표기하여 ‘골화국(骨火國)’이라고도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진한호로국(戶路國)에 비정되기도 한다.
세형동검(細形銅劍)과 동과(銅戈)가 발견되었는데, 그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다수의 읍락집단(邑落集團)들이 통합되어서
골벌국을 구성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중심지는 많은 청동기 일괄 유물이 발견된 금호면 일대와 신령면 일대로 추정된다.
한편, 영천 지역에서 출토되는 청동기 유물의 수량과 형태로 미루어 골벌국은 서력기원 뒤 상당기간 동안 경주의 사로국(斯盧國),
달구벌의 작은 나라 등과 밀접한 교역관계를 맺으면서 대등한 정치집단으로 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에 236년(조분이사금 7) 골벌국왕아음부(阿音夫)가 무리를 이끌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사로는 그들에게 토지와 가옥을 주어 안착시켰는데, 영천의 골화신(骨火神)이 경주의 나력신(奈歷神), 영일(또는 청도)의 혈례신(穴禮神)과 함께
신라에서 행하던 대사(大祀)의 3선(仙)이 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골벌국의 지배세력은 신라의 성장과정에서
핵심세력의 하나로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신라는 그 지역에 임고군(臨皐郡) 임천현(臨川縣)을 두었다.
◎ 사로국(斯盧國)
12개의 소국(小國)을 거느린 진한은 지금의 경주 지방에 있던 사로부족(斯盧部族)이 6부족촌의 힘을 결합하여 박혁거세를 내세워
점차 세력을 키워 국가다운 기틀을 잡아갔다.
위만에 쫓긴 고조선 유민들을 받아들여 발전된 금속문화(철기)를 수용해서 점차 세력을 키워갔다.
음즙벌국102(안강) . 실직곡국104년(삼척) . 다벌국108년(포항흥해) . 비지국108년(창령) . 초팔국108년(합천) . 소문국185년(의성)
감문국 231년(김천). 골벌국236년(영천) 이렇게 점차적으로 병합해 갔다.
영천은 경주에서 큰 장애물이 없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가까이 있는 골벌국보다 상대적으로 거리가 멀리 있는 나라들이 먼저 복속되고 골벌국이 가장 늦게
합병된 사실로 보아 골벌국의 세력이 사로국과 대등한 위치에 오랫동안 정치집단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 듯 골벌국은 사로국의 세력이 날로 갈성해지자 상대적인 열세를 실감하고 평화적인
통일를 이루어 병합되어 체야화군(切也火郡)과 사정화현(使丁火縣)으로 사로국의 군현체제에 흡수되었다.
사로국은 지증왕 때부터 제도를 정비하고 경제가 밑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농업을 발전시키고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임금을 마립간으로 부르던 것을 왕으로 고치고 국호를 신라로 바꾸었다.
법흥왕 진흥왕으로 이어지는 신라의 전성시대 북으로는 한강유역까지 남으로는 금관가야(532년)를 복속시키고 결집된 지방 세력인 옛 골화(골벌)국 부족들은 진정한 협조의 조건으로 백성의 풍요와 농업발전을 위해
청제수축을 국책사업으로 내세웠을 지도 모른다.
그 시대 벌써 진보적인 벼농사의 발전을 예상할 수 있으며 인원 7,000여명의
인력이 동원되어 거대 토목사업을 벌일 정도로 이 지역에 많은 사람이 살았고 또한 강한 결집력을 가진 부족이었음을 말해준다.
◎ 고인돌
대륙으로부터 전파된 금속문화는 대체로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무렵 이후에는 한강 이남으로 전래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이 지역의 원시 사회는 부족 사회로 전환되었다.
북부 사회보다는 뒤늦게 그 형식이 변모된 남방식 고인돌이 이 시기에 각처에서 축조되었으며, 또 그러한 사실은 부족 사회의
성립이 그만큼 뒤늦었음과 그 발전 과정이 북부 사회의 그것과 비슷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지역적 역사의 변천과정으로 볼 때 구암동에 있었던 거대한 바위들은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로 추정되며
청못의 존재가 이를 더욱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어릴 때만해도 청못 제방 남쪽 밑 산비탈 구릉지대에 밭을 갈면 토기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를 보아 이 청못 주변에는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이 보인다.
구암동의 바위들은 답1001. 1004, 1005, 1009번지에 흩어져 있었고 우리가 어릴 때만해도 바위에 올라가 놀기도 하던 바위를
세월이 흐르면서 농사짖는데 방해가 된다며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고 뭍어 버린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20여년 지나 2016년 마을의 동내명이 9개의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며 동내를 상징하는 바위가 있어야 한다며 땅속에
뭍어 버린 바위를 장비로 다시 파내어 동내입구 갖다놓았다.
모든 바위는 처음 있는위치에서 옴겨지고 했지만 1009번지의 바위만은 처음위치 그대로 담장의 울타리 역할을 하지만 원상태를 보존하고 있다.
구암마을과 청못은 오랜 역사와 유적을 간직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경부고속도로에 의해 두 동강나는 비운 격은 데다 역사적으로 고증을 못 받고 있다.
지방자치시대 그 지방의 진실 된 역사적 고증과 청동기시대의 유적을 되찾아 참된 기록으로 남겼으면 하는 바램으로 원래 있었던
주변에 복원을 하여 청못과 채약산과 함께 연계하여 고인돌 유적공원으로 조성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
고인돌이 있었던 곳
땅속에 묻었던 것을 파내어 이곳으로 이동...
원래 위치에서 유일하게 손대지 않은 고인돌
- 글. 사진 한상관 -
첫댓글 선배님 고향의 역사유래는 카페고향소식에도 좀 올려주세요~
그냥보기엔 평범한 돌덩이 같은데 역사적 가치를 충분히 있는것 같습니다
앞집이 한성덕씨 대궐집 같습니다.
체신, 괴연 같은 산비탈에 있는 바위도 고인돌이라 지정하였는데 평평한 들판에 있었던 점과
놓여있었던 원래의 형상들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바위와는 좀 달랐다는 점. 그리고 이 지역의 역사적 내력을
미루어 아마도 고인돌이 아니었나 라고 생각 해봄니다.
글을 끝 까지 읽어줘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