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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돌프 히틀러, 도조 히데키와 함께 추축국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파시즘의 창시자다. 아돌프 히틀러가 젊은 시절 그의 팬이였고,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아 집권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무솔리니는 은근 언짢아했어도 나중에는 히틀러를 친구로 받아들였고, 히틀러 역시 중간중간 그의 무능을 질책하고, 무솔리니가 상심하자 비판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그를 유일한 친구로 여겼다.
1922년부터 1943년까지 장장 21년을 이탈리아 왕국의 수상으로 재임했다. 첫 7년 (1922년 ~ 1929년), 중간 4년간 (1932년 ~ 1936년)은 외무장관 겸직. 짧게나마 죽기 전까지 11년 이상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북이탈리아에 위치한 괴뢰정부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수장도 역임했다. 이탈리아 왕국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대원수(제국수석원수, Primo Maresciallo dell'Impero).
일명 일 두체(Il Duce).[11] 동의어인 독일어 퓌러(Führer)도 지도자(Leader)이라는 뜻. 직접으로는 도제(Doge)에서 유래했다. 원래의 뜻은 "이끌다, 통솔하다"의 뜻인 라틴어 Ducere에서 파생된 것이다. 같은 어원으로 파생된 언어로는 영어의 Duke(공작)와 프랑스어의 Duc(공작), 라틴어 Dux(지휘관) 등 모두 Duce와 어원이 같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살리겠다."는 명목으로 집권했다. 집권 기간 동안 공을 많이 들여 로마 시내의 여러 유적을 대규모로 발굴했다. 현대 로마 시내에 남은 여러 유적은 대부분 무솔리니 정권 시절에 발굴된 것이다. 하지만 이 로마 유적을 발굴하려면 그 위에 자리 잡았던 여러 건물을 일단 철거해야 했는데, 무솔리니는 독재자답게 이 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마찰을 무시하고 오로지 유적 발굴에만 집중해서 르네상스 시대 이후 건립된 다른 가치있는 여러 건물도 많이 철거했다. 그러면서도 포룸 로마노 등의 로마 유적 사이에 길을 뚫어놓고는 황제의 거리(Via dei Fori Imperiali)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길 때문에 많은 유적들이 파괴되고 남은 유적들도 제대로 연결되지 못 하고 있다.
토목과 건축으로 로마와 이탈리아의 모습을 완벽하게 뒤바꿔 놓은 사람이기도 하다.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뚫어둔 화해의 길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광장, 이탈리아 최초의 고속도로 등 이 모든 걸 무솔리니가 만들었다. 로마 관광의 중심가에 가면 "베니토 무솔리니가 만든..."이란 말을 빼놓고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을 정도다. 또한 도시계획에도 관심을 가졌는지 현대 로마에서 에우르(EUR)라는 신도시 구역을 계획해 만들고 이곳에 "로마 문명박물관"과 함께 파시즘을 상징하는 "노동 문명궁"을 만들었다. #
긍정적인 평가로는 무솔리니에 의해 이탈리아의 혼란이 해결되고 경제도 발전했다는 점도 있다.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해 바티칸 시국과의 오랜 문제를 해결한 것도 무솔리니였고, 그가 집권한 기간 동안 마피아 세력이 크게 약화되기도 했다. 특히 마피아의 본진인 시칠리아를 북부 정권에 반항하는 남부 사람들의 기질을 제압하고자 더욱 공들여 탄압했다. 전쟁 후에도 한동안 시칠리아에 파견되는 사법 공무원들은 무솔리니 시절의 후광을 입기 위해 당시 시칠리아에서 근무한 공무원들의 자손들 위주로 뽑았다고 한다. 또한 말라리아가 창궐하던 낙후된 남이탈리아에서 말라리아를 몰아낸 것 역시 무솔리니 치세의 일이다.
무솔리니의 경제 정책은 강력한 보호무역과 국책 사업 투자를 통한 자급자족 지향이었다. 때문에 침략 전쟁을 하지 않으면 망하는 수준이었던 나치 독일이나 일본 같은 다른 추축국에 비하면 거품이 적은 편이였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경제체제 역시 기본적으로 오래 유지되긴 힘든 것이었으며,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내실을 다질 돈과 시간을 에티오피아 침공이나 스페인 내전 개입 등 공격적인 대외 정책으로 불필요하게 낭비했다.
이탈리아가 축구 강국이 된 것도 베니토 무솔리니의 공헌이라고 볼 수 있다. 1898년에 시작한 세리에 A가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인 리그로 전환된 것은 무솔리니의 공로이며,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의 성공적 개최도 무솔리니의 공로가 크다. 그 후로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정상권의 축구 강국이 된다.
정리하자면 무솔리니 집권 전후의 이탈리아의 혼란 상황과 경제 업적, 탁월한 개인숭배화 능력과 우민화 정책을 생각하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지만 않았어도 종신 독재를 했을 정도의 능력은 있었다. 실제로도 20년 넘게 장기 집권했고 전후에도 파시스트 잔당들은 꽤나 잔존했다.
2.나치즘과 파시즘
비공산주의적 전체주의의 주요 사례들은 양차 대전 사이에 출연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존속되다가 사라진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이 있다.* 이 글은 Roy C. Macridis, Modern Political Regimes: Pattern and Institutions(Boston: Little, Brown & Company, 1986), pp.171-183을 필자가 번역한 것임. 김강녕 역 / R.C. 매크리디스 저, 『현대정치체제론』(서울 : 인간사랑, 1990.1) pp.256-274 참조.
역자주 : 전체주의는 크게 공산주의적 전체주의와 비공산주의적 전체주의로 나누어지며, 나치즘과 파시즘은 비공산주의적 전체주의의 주요사례이다.
종종 나치즘과 파시즘은 보수주의 적 성향을 가진 우익단체로서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다수의 기존 이익집단의 이익과 일치되고 좌익정당 및 노동조합의 이익과 배치되게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치즘과 파시즘의 체제는 단일정당이나 이데올로기 및 동원과 관련해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표명에 있어, 공산주의적 전체주의 체제와 현저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들이 추진한 기본적인 구조 변화가 정치권력의 집중과 중앙 집권화를 지향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1). 전체주의
전체주의는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대중민주주의의 상황 속에서 성장했던 새로운 형태의 독재이다. 그것은 국가 ․ 사회 ․ 개인에 대한 전체적 통제를 목표삼고 복종적 엘리트와 조작된 이데올로기의 도움을 받은 지도자의 우월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체주의는 오늘날 민주주의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으로서, 제 2차 세계대전의 종말을 전후한 시기에 있어서는 자유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파시즘(Fascism) Fascism : 좁은 의미로서의 정의에 의하면 파시즘은 극우 정당 내지는 군부 관료중의 반동분자에 의한 정치적 독재로서 입헌주의와 의회제도의 부인, 일당 독재의 수립을 목적으로 하여 독재자의 신화와 지도자 원리에 입각한 사회의 권위주의적 편성을 수반한다고 하며, 넓은 의미의 정의에 의하면 현 단계의 독점자본 지배체제와 실질상 똑같이 취급하여 부르조아, 민족주의, 사회 민주주의 등도 여기에 속한다.
이었으나, 소련의 붕괴직전까지는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 국가들의 독재정치가 등장하여 전체주의적 성격을 답습하였고 현재까지도 독재국가가 잔존하여 전체주의의 개념이 다양화되고 있다.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파시스트 국가들이 패배하였으나, 아직도 파시즘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오늘날 파시즘의 주요 위협은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같은 종전의 파시스트 국가에서가 아니라,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국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Today's isms : Communism, Fascism, Capitalism, and Socialism / William Ebenstein (1958) 이러한 민주국가들의 경우는 심각한 사회적 병폐를 안고 있어서 파시즘 발생의 여러 요인들이 다시 무서운 힘으로 머리를 들 수도 있다. 공산주의의 경우는 30여 년 동안의 스탈린주의의 독재정치에 뒤이어 후루시쵸프(N.S.Khrushchev)하에서 어느 정도 자유화가 진행되었으나, 후르시쵸프의 실각 후 그의 후계자들은 더욱 무자비한 통치 방식을 취하여 점차 재 스탈린화하는 과정으로 돌아갔다. 이와 같이 공산주의 체제도 계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그러한 변화가 반드시
다음 본론에서는 나치즘과 파시즘에서 권력을 모을 수 있었던 요소들을 살펴볼 것이다.
2). 중앙집권화와 권력집중
이탈리아의 정책결정은 최고의 정부기관에서 행해졌다. 독일에서 중앙정부는 개별적으로 주정부를 인수했다. 따라서 민주정치체제에 있어서 분권화시키는 방법의 하나인 연방제도가 폐지되었다. 중앙정부가 지방의 정치적 단위체들을 해체하여 인수했다. 이탈리아에서 내무장관은 각 지방행정기관 내의 모든 구성원을 해임하고 파시스트 당원들도 새로운 행정관과 지방의회 구성원을 임명하였다. 독일의 여러 주 외 지방단위의 행정은 지명된 ‘정부관료’가 장악하게 되었다.
3) 파시즘과 나치즘의 이론과 성격
19020년대와 1930년데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연이었던 파시스트 정권의 등장, 동부와 북부유럽, 심지어는 서유럽의 몇몇 국가들에서도 있었던 비슷한 성향의 정치 세력의 발호,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탈리아 이른바 주축국들에 의해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의 대재앙이 일어난다. 사실 1920년대부터 극히 최근까지 파시즘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혼란스러울 정도의 다양한 해석과 서로 상반되는 견해로 이루어져왔다. 예를 들면 ‘파시즘 시대’라는 에른스트 놀테(Ernst Nlote)의 견해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의구심을 표하고, 파시즘이 시대의 유럽의 정치 상황을 결정지은 세력이 아님을 강조한다.
즉 파시즘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만 정권 획득에 성공했을 뿐 다른 곳에서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 변두리 세력으로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볼프강 비퍼만(Wolfgang Wippermann)은 이러한 사실을 파시스트에 반대하거나 파시스트에 속하지 않는 정치 세력의 효과적인 정책적 대응의 결과로서 해석하면서 ‘유럽에서의 파시즘 역사는 동시에 반파시즘의 역사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시기의 파시즘은 사실 파시스트에 저항한 자유민주 세력이나 사회주의 세력을 압도해 버린 정치적운동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한 일부 연구가들은 유럽의 여러 국가에 있었던 이른바 ‘파시즘 운동’이 그 어떤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나 통일적인 정책을 통한 공동적 성격을 가지지 못했음을 지적하면서, 따라서 파시즘 운동의 정확한 역사적인 관찰을 위해서는 ‘파시즘’ 또는 ‘유럽의 파시즘’이라는 포괄적인 문제제기보다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 나치즘)’, 스페인의 ‘팔랑헤(Fanlange)’ 등의 방식으로 개개 국가의 ‘파시스트적’ 운동을 개별화하여 이들의 고유한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개개의 국가들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던 파시스트적 운동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파시즘이 대두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한다.
4). 파시즘이란
파시즘(Fascism, Faschismus)은 1919년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가 주장ㆍ조직한 국수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ㆍ반공적인 정치적 주의 운동으로서 고대 로마에서 통치자들이 의식 때 쓰던 파시오(Fascio)라는, 도끼 한 개를 중심으로 묶은 나무단에서 나왔다. 그 도끼는 또 사형 때 쓰였던 것이며, 막대기들은 죄인을 칠 때 쓰이는 것이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파스케스(Faces)'라는 라틴어에서 파스케스는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 시가 행진을 할 때 맨 앞에 내세우던 나뭇가지 다발에 쌓인 도끼를 가리키며 국가의 권위와 결속을 상징한다. 1914년 이전에는 고대 로마의 파스케스가 좌파의 상징물로 쓰였다.
5) 나치즘
A 나치즘이란?
아돌프 히틀러를 당수로 하여 1933년~45년 정권을 장악했던 독일의 파시즘 정당 ‘나치스’의 정치사상 및 체제로서 정식 명칭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 NSDAP)이다. 19세기 말엽 유럽에 일반적으로 공통되어 있던 반(反)유대주의, 백색인종지상주의, 국가주의, 제국주의 및 반(反)사회주의와 반(反)민주주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발생하였다.
※ 나치스란 원래 정적(政敵)들이 만들어 낸, 얕잡아 부른 명칭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이 말이 전세계의 통칭이 되었다.
B 나치즘 등장의 배경
A)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
제1차 세계대전의 휴전 직전(1918년 11월)에 시작된 혁명은 이듬해 6월 실패로 끝나, 좌익의 혁명적 기운이 가라앉았다고는 해도, 민족주의‧보수주의를 표방한 반정부세력이 난립하여, 국방군 이외에 수많은 군사조직체가 있었으며, 이 군사조직체들은 대외적으로는 슬라브 민족과, 대내적으로는 공산주의와 대립하고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들 비정규적인 군사조직체들에 의해 위협을 받아 독일 정국이 뒤흔들렸고, 체제의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B) 경제 혼란
- 배상금 지불 : 1919년 여름 제국 정부가 전쟁의 단독책임을 지고(프랑스의 강한 압력으로) 전승국이 제시한 엄청난 부담을 지닌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하였다.
- 프랑스의 루르 점령 : 독일의 배상금 지불 문제로 인해 일어난, 1923년 프랑스군에 의한 루르지방의 점령은 쿠데타 발생의 외부적 요인 중 하나였다.
- 경제 공항 :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전 유럽이 황폐화되었고, 영국이나 독일 같은 산업 국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심각한 경제 불황을 맞았다. 특히 독일은 전후에 ‘막대한 배상금’ 때문에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었으며, 독일이 배상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1923년에 프랑스가 공업지대인 루르 지방을 점령했다. 그 결과 파업이 일어나고, 산업 생산이 더욱 감소했다. 또한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마르크화의 가치가 폭락해, 유럽 국가들은 독일의 배상금을 줄이고, 미국은 돈을 빌려주었다. 그리하여 1920년 대 후반, 독일 경제는 조금씩 나아졌지만, 정부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였다.
3) 공산당의 급격한 대두 : 그 당시 독일 공산주의의 원천은 러시아에서 성공한 10월혁명이었다. 물론 독일 공산주의가 국민성과 사회적인 전체 상황에 있어 러시아와 독일 사이의 차이를 간과했고, 대다수의 독일인들이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 쉽게 수용되진 않았으나, 소련의 지배 시도는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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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분열되어 통일 지연됨으로써 인접국가에 비해 후진국이었기 때문에, 독일 민족주의가 더욱 빨리 파급되었다.
C. 나치즘 성격
바레스나 모리스의 민족주의, 고비노의 인종주의, 드뤼몽 류의 반유태주의, 조류즈 소렐의 폭력주의 등에서 나치즘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상이 일단 나치즘에 수용되고 나면 전적으로 독자적이고 본래의 사상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운명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나치즘의 중심이론은 독일민족지상주의와 인종론이다. 즉, 게르만족은 인류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종족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을 지배할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이와 반대로 가장 열등
5) 히틀러와 나치즘의 관계
1935년부터 1941년가지 독일의 공격적인 행동은 외교적인 것과 군사적인 것이 복합되어 있다. 독일의 행동이 외교적인 것과 군사적인 것으로 명확히 나눠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 보고서에서는 독일의 행동을 7단계의 시기로 구분하고자 한다. 그것은 베르사유 체제의 붕괴, 스페인 내전에서의 독일의 행동, 외교적 행동을 통한 영토 확장, 군사적 행동을 통한 영토 확장, 프랑스의 붕괴와 영국에 대한 공습, 소련 침공, 독일의 잠수함 공격과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다. 이 단락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의 외교적, 군사적 행동에 중점을 두고자 하기 때문에 외교적 행동을 통한 영토 확장까지의 단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1930년대 중반가지 유럽의 안보질서는 베르사유 체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이 체제는 기본적으로 독일의 영토와 군사력의 제약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성장한 독일의 지위 회복 문제와 1933년 수상으로 취임한 히틀러의 현상타파 의지가 결합되면서 기존 안보질서에 대한 변화의 조짐이 생겨났다.1933년~1934년의 상황은 다시 강대국으로 성장한 독일이 자신의 지위 회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주변국들과의 마찰이 생겨나는 시기였다. 유럽에서 군축을 시도하고자 소집된 국제회의에서조차 독일의 정상적인 군사력 소유문제가 주요 의제로 취급되었다. 협상을 통한 독일의 정상적인 군사력 회복의 가능성이 낮아지자 독일은 1933년 10월 군축회의에 불참을 통고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현상을 타파하려는 독일의 행동은 베르사유 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다. 그것은 1935년 3월 16일 독일의 재무장 선언과 1936년 3월 2일 독일이 라인란트 동안에 군대를 진주시키면서 비롯되었다. 결과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를 의미했다. 증대되는 유럽의 위기 속에서 독일은 주변국가에게 평화제의를 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유럽의 위기가 약화되었다.
4. 무솔리니와 히틀러
파시즘이란?
이탈리아말로 "파쇼"라고 하기도 하는데
나치즘 처럼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대공황과 정치적 불안으로
등장한 정치사상 입니다.
뜻을 살펴보자면
제국주의 국수주의적 전체주의적 정치운동이라고 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독일의 나치즘과 함께 독재정치운동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르실것 같네요
파시즘이 두고두고 비난을 받는 이유는
불평등과 폭력을 기반
으로
국민의 모든 생활을 통제한다에 있다는 점입니다.
여튼 무솔리니는 대장장이이면서 아나키스트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적 영향을 받아 성장을 합니다.
그러던 중 병역기피를 하기 위해 1904년 스위스로 떠나고 그곳에서 사회주의자들을 만나
사회주의 혁명가의 길을 걷고 화술과 제스처로
그리고 적극적인 반전운동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극우파로 돌변하여 사회주의 당에서 제명되고
징집당해 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전후에는 극우파로 완전히 돌아서
사회주의를 억제하려고 하는 프랑스 미국 영국의 자본가들에게 비밀적인 후원을 받아
사회주의와 전쟁을 선포하고 총선에 나서지만
1표도 얻지 못하고 낙선하자
이탈리아 전투자동맹을 조직하여 파시즘을 내세우며 사회주의자를 테러합니다.
이후 파시즘을 내세우며 파시스트당을 창당하고 북부 이탈리아를 차지하자
로마진군 쿠데타로 마침내 정권을 차지합니다.
무솔리니의 최후 ※
정권을 획득한 무솔리니는 사회전반을 개혁하고 파시즘을 내세우며
로마 제국의 영광을 찾겠다는 연설로 대중적의 지지를 확보하고
대외적으로 에티오피아 알버니아 침공 스페인 내란 간섭 등
주요 요직에 파시스트 당원을 채워가면서 독재체제를 수립합니다.
그러던 중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무솔리니는 독일 그리고 일본과 강철동맹을 맺고 추축국으로 전쟁에 참전합니다.
하지만 연속되는 패전과 상대적으로 독일보다 국력이 떨어지는
이탈리아는 연속되는 무솔리니의 터무니 없는 호언장담에
점차 내부적으로 불만이 높아져만 가고
이윽고 로마에 까지 연합군의 공격이 이어지자 파시스트 당에서도 축출이 되고 감금이 됩니다.
이에 히틀러는 이탈리아가 연합군으로 돌아설까봐
무솔리니를 구출하고 북이탈리아 샬로에서 실질적으로 나치가 다스리는
괴뢰정권을 수립하고 독일이 패망할것 기색이 보이자
스위스를 통해 스페인으로 망명으로 하려고 하지만 알프스 산맥에서 잡히게 되고
공산주의자들 손에 처형이 됩니다.
무솔리니는 히틀러와 더불어 파시즘을 내세우며 독재주의 정권을 수립했지만
상대적으로 히틀러 보다는 무게가 떨어지는 평입니다.
물론 파시즘을 먼저 내세운건 무솔리니 였고 히틀러도 무솔리니의 영향을 받았지만
국력과 국가장악력에서 차이가 드러나자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도움을 받기 급급했고
히틀러도 이런 무솔리니를 아랫사람 취급하기에 이르죠
어쨌든 무솔리니도 히틀러 만큼이나 악당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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