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정태성 목사
<갈라디아서 2장 16절>: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러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신 6: 25>을 보면,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만약에 그 명령대로 하나님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의”란 말씀의 완벽한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는 조건이 하나님께서 명령한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고가 이스라엘 전체 사고의 핵심입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으로 “의”로 삼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것으로 여기면 복을 준다는 사상이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의 마음에 새겨놓은 사상입니다.
이 생각은 수 천 년이 지나도 조금도 흔들림 없는 이스라엘 전체 사상의 핵심인 것입니다. 즉, 율법의 온전한 행위가 곧 “의”이다! 바로 이 사상이 이스라엘의 핵심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잘 알고 계셨기에 율법교사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영생 얻는 것을 물어 봤을 때 율법대로 행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체 사상의 핵심 => 율법의 온전한 행위가 곧 '의'이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온전히 지키어 그것이 자기의 “의”가 되고 영생을 얻는다는 확고한 신앙은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진리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알지 못하는 우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 말을 한 것입니다.(요 7: 49) 이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은 그야말로 그들의 “의로움”이 되는 척도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율법에 얼마나 열정적이고 열심이었겠습니까? 율법의 한 항목이라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지킨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의 “의로움”으로 삼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들의 그 의로움에 대적하는 것을 격렬하게 저항하였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율법행위를 통한 자기 “의”로 꽉찬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의 의로움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들 중에 예수를 믿는다고 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도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할례”를 받아야 진정으로 구원 받은 자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벌어진 일이었고, 바울은 이것을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복음의 진리가 항상 있게 하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디도를 통해서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디도가 바로 복음의 진리가 있는 자다”라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복음의 진리가 있는 곳과 없는 곳을 디도를 통해서 확실히 구별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복음의 진리가 없는 곳은 할례를 받아야 “의”가 된다는 그러한 율법행위를 따르는 곳이고, 복음의 진리가 있는 곳은 그 할례로부터 자유 하는 곳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없는 곳 => 할례를 받아야 '의'가 된다는 율법 행위를 따르는 곳이다
복음의 진리가 있는 곳 => 그 할례로부터, 율법행위로부터 자유하는 곳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그 율법으로부터 자유 하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율법과 믿음을 같이 가지고 있지 못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러하다면 그것은 복음의 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를 베드로를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실하게 확증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 사도 조차도 율법의 행위에 있다면 그 베드로 사도도 그리스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베드로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결코 율법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바울사도의 이러한 선언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신명기 6장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온전히 지키면 복을 주겠다는 말과 그것을 지킴으로 의로움이 된다는 그 말씀은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지금도 유효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해석 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새로운 해석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 자들입니다.
<갈 2: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죄인이 아니로다”
이 말은 자신이 예수를 믿기 전의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본래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모세로부터 율법을 받아 그 율법행위로는 흠이 없는 자로써 이방인과 같이 율법 없이 산 자가 아니었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방 죄인이 아니라 율법행위로 의인인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말이 우리는 본래 유대인들이지, 이방 죄인들이 아니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할례도 받고 식탁예법도 지키며 이방인들과 함께 하지도 않고 모든 율법을 전부 지켜 행하므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있었던 그러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갈 2: 16>에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안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자기의 의로움을 율법행위에서 그 근거를 찾았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옳다는 것을 율법을 지킨 것으로 확증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그 율법을 지켜 행했는데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구나! 이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믿음의 내용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께서 의롭게 보시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봐 주시는 것이구나!를 아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복음의 진리”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 왜 율법행위로는 결코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고 그토록 강조 하냐면, 율법의 행위는 즉, 계명을 지키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의”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기 “의”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의 행위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오히려 그 율법의 행위는 하나님께 범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발끈해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범죄 하는 것이라구?” 이런 사람은 여전히 율법아래에 율법의 행위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율법의 행위는 인간의 자기 '의'가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바울사도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된다! 그래서 우리도 그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라고 말입니다. 그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이미 그 예수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의롭게 된 존재들 입니다. 여러분의 의지(율법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버린 자들입니다. 성도가 죄인이다! 의인이다! 라고 논쟁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백 날 해 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죄인이고, 의인이고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는데 있습니다.
<롬 3: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의 그 피로 화목제물로 세우시고 전에 지은 그 죄들을 간과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의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 그 이유가 하나님의 자기 의로우심을 그 백성들을 통해 나타내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행위로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며 자랑할 필요도 없어진 것입니다.
<롬 3: 27~ 28>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다!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우리는 바로 이것을 인정한 자들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는 전혀 자랑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예수를 믿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율법과 상관없이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를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믿음으로만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 율법과 상관없이 살아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며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살인이지, 간음이지, 도둑질이지, 하고 사는 자들이 아니라, 이것이 살인이고, 간음이고, 도둑질이야! 하면서 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며 사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자랑인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의 공로를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증거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공로를 증거 하며 하나님의 의로움을 증거 하러 다니는 자가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 율법을 굳게 세우며 다닙니다. "이 율법은 예수께서 그의 피로 완전케 해서 우리 가운데 진리로 살아 있는 말씀으로 역사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이것이 율법을 굳게 세우며 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복음의 진리로 자유한 자들로 이곳에 모였습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그 자유는 율법의 행위로 나오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나오는 자유들입니다. 그 자유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그 의로움을 제시하는 자유들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율법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 율법은 여러분들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 상을 주시려고 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그 율법은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 하는 자유로 준 것이고,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러분에게 준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에게 그 율법의 행위가 나오면 그 행위는 그리스도 예수를 진리로 전하는 자유가 나오는 것으로 결론지으시길 바랍니다.
<롬 3: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 말을 직역하면,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들에 의하여 그 앞에서 모든 육체가 의롭게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을 통해서는 죄의 온전한 지식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죄의 지식만 줄 뿐입니다. 여러분 속에는 이미 이 죄의 지식이 여러분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죄의 지식이 무엇입니까? 선악과입니다. 그 선악과의 지식이 분명히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올 때는 무엇으로 나오겠습니까?
죄의 행위가 아닌 의를 드러냄으로 나올것입니다. 그 의는 나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그 피를 증거 하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그 의를 증거하고 사는 것이 복음의 진리가 항상 있는 성도들의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