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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백부장의 종 치유 등의 치유 이적과 풍랑을 잠잠케 하신 이적 및 가다라 축사 사건
구속사적 개관
본장과 다음 제 9장 두 장은 시간 순에 관계없이 예수께서 공생애 초기에 베푸신 여러 이적들을 주로 모은 것이다. 이들은 모두 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메시야(the Messiah)로서 땅과 하늘을 제어(制御)할 권능(Power)을 가지셨음과 아울러 죄인에 대 한 사랑(Love)도 가지셔서 이 권능을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사용하시고 계심을 강조하여 주고 있다. 또한 이런 전체적 교훈 이외에도 각 이적은 그 나름대로 고유한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에 나타난 여러 관련 기사들을 개략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4절의 문둥병자 치유사건은 예수께서는 불치병으로서 영적으로는 죄의 오염의 심각성과 그로 인한 파멸을 상징하는 문둥병을 고칠 능력이 있으신 동시에 죄인을 위하여 이를 고쳐주시고자 하는 열정과 사랑을 함께 가지셨음을 강조한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주님은 우리의 더러운 죄와 그 죄가 가져온 끔찍한 결과를 깨끗이 제거 치유하실 분으로서 우리의 구속주(救贖主)이시라는 영적 진리를 전해준다.
다음 5-13절의 백부장의 종의 치유사건은 특히 이방인이 예수에 대하여 큰 믿음을 가진 사실이 강조된다. 예수님의 강림(降臨)으로 시작된 신약시대의 큰 특징 중의 하나가 구속사(救贖史)의 전개가 주로 육적 선민 이스라엘에 국한되었던 구약과 달리 세계 만민에게로 확장되는 것이었던바 본 사건은 이를 잘 보여 주는 실례라 하겠다. 또한 주님께 대한 겸손하고 절대적인 믿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구원을 가져올 것임을 확증시켜 준다.
다음 14-17절의 베드로의 장모 치유 및 베드로의 처가에서의 치유사건은 예수의 구속사역의 즉각성 및 포괄성을 보여 준다. 즉 예수의 구속의 효력은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즉각적으로 나타나며 또한 주님은 이런 구속의 사랑을 되도록 많은 자들에게 베푸시고자 애쓰심을 보여 준다. 나아가 이런 예수의 치유사역은 단순한 능력의 과시가 아니라 구약 예언의 성취로서 당신의 메시야직을 입증하려는 것인 동시에 죄인들에 대한 사랑에서 기인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 18-22절은 유대 땅 도처를 순회하며 사역하시던 예수님의 무리 가운데서 일어났던 일을 소개하는 삽입기사이다. 먼저 18-20절은 구속사역의 노고를 감당하시던 예수의 절대 헌신을 보여준다. 다음 21,22절은 제자들의 삶에 있어서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가져오는 신앙생활이 그 어떤 것보다 앞서서 최우선되어야 한다는 구속사적 교훈을 보여준다.
다음 23-27절은 예수께서 풍랑을 잠잠케 하신 사건을 보도한다. 이는 결국 예수는 그 본질상 우주 만물을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신 삼위 일체 하나님의 한분으로서 우주 만물을 당신의 뜻대로 움직이실 절대 주권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에게 우리는 절대 신앙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끝으로 28-34절은 가다라 지방의 축사(逐邪) 사건이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는 영계(靈界)의 사탄과 그의 추종자인 악령들을 제어하실 능력까지도 가지셨음을 보여 준다. 한편 본 단락에서 절대 주권을 가지신 예수님께 영원한 구원을 요청하기는커녕 당장의 육신의 안일 유지에만 급급한 나머지 예수를 기피하는 가다라 사람들의 모습에도 필히 주목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생명의 구주이신 주 예수의 실체를 바로 보고 그분께 영원한 구원을 요청하는 바른 자세를 갖지 않는다면 일상생활의 인습에 빠져서 주님께서 도래시킨 구원의 진리가 힘겹게 여겨진 나머지 그것을 스스로 거부하며 영원한 구원과 하나님의 사랑을 상실하는 비극을 맞을 것을 엄숙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상의 본장의 내용을 요약할 때 우리는 예수가 우리의 영혼과 육신 그리고 우주 만물과 영계에 이르기까지 절대 주권을 가지신 메시야이심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런 메시야 예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필히 구원을 베푸시려는 사랑의 열정도 갖고 계심을 확인하여 새삼 감사하게 된다(요 5:2-9). 따라서 이러한 절대 주권과 절대 사랑을 가지신 예수께 우리는 절대 신앙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왜냐하면 예수는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좋은 한 스승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또한 예수의 말씀은 실천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세속 종교나 철학의 죽은 관념이 아니라, 살아 계신 구주의 계시의 선포로서 우리의 영생(永生)과 영벌(永罰)을 가름할 기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고 예수와 그분의 가르침을 무시 내지는 거부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도록 새삼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외울 말씀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마 8:22)
문둥병자의 치유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백부장의 하인의 치유
5 ○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베드로 장모의 치유와 귀신 축출
14 ○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인자와 그의 제자들의 삶
18 ○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풍랑을 잠재우신 이적
23 ○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가다라 지방의 이적
28 ○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29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32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본문 & 자료노트
도표 - 8:5-13 예수의 주요 치유 사역들
1 | 백부장의 종의 중풍병을 고치심(마 8:5-13; 눅 7:1-10) |
2 |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심(마 8:14,15; 막 1:29-31; 눅 4:38,39) |
3 | 가다라 지방의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마 8:28-34: 막 5:1-20) |
4 | 한 중풍병자를 고치심(마 9:2-8; 막 2:3-12; 눅 5:18-26) |
5 |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심(마 9:20-22; 막 5:25-34; 눅 8:43-48) |
6 | 두 소경의 눈을 밝혀주심(마 9:27-31) |
7 |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심(마 9:32,33) |
8 |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마 12:9-13; 막 3:1-5; 눅 6:6-10) |
9 | 귀신들려 벙어리된 자를 고치심(마 12:22; 눅 11:14) |
10 | 이방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고치심(마 15:21-28; 막 7:24-30) |
11 |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마 17:14-18; 막 9:14-79; 눅 9:38-42) |
12 | 여리고에서 한 소경을 고치심(마 20:29-34; 막 10:46-52; 눅 18:35-43) |
13 | 갈릴리에서 귀 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심(막 7:31-37) |
14 | 벳새다에서 한 소경을 고치심(막 8:22-26) |
15 | 회당의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막 23:26; 눅 4:33-35) |
16 | 안식일에 18년 동안 귀신들린 여자를 고치심(눅 13:10-17) |
17 | 고창 병든 사람을 고치심(눅 14:1-6) |
18 | 문둥병자 열 명을 고치심(눅 17:11-19) |
19 | 가나에서 한 신하의 아들을 살리심(요 4:46-54 |
20 | 베데스다 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요 5:1-9) |
21 |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심(요 9:1-7) |
보감-8:1-34 예수의 7대 능력
1. 질병을 정복하는 능력(8:17)
2. 자연을 정복하는 능력(8:18-27)
3. 사탄을 정복하는 능력(8:28-34)
4. 죄를 하는 능력(9:1-17)
5. 죽음을 이기는 능력(9:18-26)
6. 어두움을 정복하는 능력(9:27-31)
7. 권능을 부여하는 능력(10:1)
보감-8:5-13 백부장의 믿음의 10대 특징
1. 주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믿음(5절)
2. 주님께 간구하는 믿음(5절)
3.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6절)
4. 그리스도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8절)
5. 직접 체험해 보지도 않고도 주의 능력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8절)
6. 절대적인 신뢰가 있는 믿음(9절)
7. 예수의 모든 말씀은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는 믿음(9절)
8. 절대적인 순종심을 동반한 믿음(9절)
9. 예수께 공적으로 칭찬받는 믿음(10절)
10. 예수께 충만하게 응답받은 믿음(10절)
원어연구-8:8, 감당하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히카노스'( )이다. 원래 이 용어는 '도달하다'(reach to)라는 의미의 동사 '히코'( )' 또는 '히카노'( )에서 유래한 형용사이다. 그 의미는 '적합한'' '넉넉한', '충분한', '만족한' 등의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또 능력에 있어서 '자격이 있는' 등과 같은 의미로도 쓰인다(고전 15:9; 고후 3:6).
한편 본문에서 '히카노스'는 '만족하는', '기쁘게 하는' 이란 뜻으로 번역됨이 정확하다. 즉 본절에서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을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나는 나에 대해서 기뻐할 수 없사오니' 또는 '~만족할 수 없사오니'라는 뜻이 된다. 이는 백부장이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시기에는 자신이 너무 부족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매우 겸손한 표현이다.
이에 대해 영역성경 R.S.V.는 'I am not worthy' 즉 '나는 무가치한 자입니다'로 번역하고 있어, 본절의 백부장의 말이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적 표현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백부장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지극히 겸손하게 낮춘 것은 그가 예수를 메시야, 곧 구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으며, 진정 그 앞에서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부장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비케 하는 자는 드물다. 그러나 진정 그런 자만이 구원의 복을 얻을 것이며, 그것을 인정치 아니하고 그 마음을 완고케 하는 자는 징벌을 당할 수밖에 없다.
보감-8:14-17 치유의 상징적 의미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많은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가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이런 치유들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다음은 예수님의 치유 이적 사례와 그것이 갖는 영적 의미를 도표화한 것이다.
1. 문둥병자의 치유(8:2-4): 우리 죄를 씻어주심
2. 중풍병 치유(8:5-8): 영적 무기력에서 깨워주심
3. 열병의 치유(8:14,15): 세상의 심한 고통에서 건져주심
4. 귀신 쫓음(8:28-33): 죄의 노예 상태에서 건져주심
5. 혈루병에서 치유(9:20-22): 죄로 인한 파괴를 회복해주심
6. 소경 치유(9:27-30): 영적 무지에서 깨워주심
7.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 치유(9:32): 성도의 모든 원수를 물리쳐주심
8. 손 마른 자 치유(12:10-13): 주의 명령에 순종적인 삶 회복
보감-8:28-34 귀신의 7대 활동
귀신은 그 우두머리인 사탄을 도와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의 일을 방해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며 성도를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키려고 노력한다. 성경에 묘사된 그 구체적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편 성도는 귀신이 다음의 활동들을 한다고 해서 반대로 그러한 모든 현상들이 항상 귀신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할 것이다.
1.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함(삿 9:23)
2. 육체적 질병을 일으킴(욥 1:5-10)
3. 사람과 동물을 사로잡음(마 4:24)
4. 도덕적 불결을 일으킴(마 10:1)
5. 영적 진보를 방해함(엡 6:10,11)
6. 거짓 교훈을 유포함(살후 2:11,12)
8:1-17 예수의 치유 이적
지금까지 산상 수훈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법과 윤리에 대해 교훈하신 바 있는 예수님께서는 이제 본장에서부터는 세상 나라에 임하신 매시야로서의 왕적 권능을 드러내고 계신다. 물론 다른 복음서들과 자세히 비교해 볼 때 마태복음은 사건의 발생순서 에 따라 내용을 서술하기보다 비슷한 주제를 가진 사건들끼리 편집하여 서술하고 있다. 사복음서 개론, '사복음서 대조표' 참조. 따라서 본장 2-4절 및 14-17절의 내용은 산상 수훈보다 시간적 순서가 앞서는 사건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막 1:29-31,40-45; 눅 4:38,39; 5:12-16). 그리고 본장 23-34절의 내용은 천국에 관한 비유들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마 13:1-52) 후에 발생한 사건들을 미리 앞당겨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막 4:35-5:20; 눅 8:22-39).
그런데 마태가 이처럼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주제별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을 왕으로 임하신 예수님의 성품과 밀접히 연관시키기 위해서였다. 즉 마태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영원토록 통치하실 하나님 나라의 법을 선포하심과 아울러서, 친히 하나님 나라의 권세로서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신 것,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침과 행함에 있어서 똑같이 자신의 왕적 권능을 나타내셨다는 사실에 대해 강조하기 위해 사건의 연대기적 기술을 무시하고 주제별로 기록한 것이 다(27절; 마 7:28,29). 이에 대해서는 마 서론 특별자료 '마태복음의 주제별 구성 원칙'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본문은 여수님께서 왕적 권능을 드러내신 대표적 사건으로 치유의 이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치유의 이적, 곧 문등병자(2-4절)와 백부장의 하인(5-13
절)과 베드로의 장모(14,15절)와 귀신들린 자들과 병든 자들(16,17절)을 치유하신 이적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세상에 들어와서 끊임없이 인간들을 고통과 신음 가운데로 몰아넣던 온갖 질병을 단지 말씀으로 완전히 해결하시는 예수님의 권세를 보여줌과 동시에, 진정으로 주님께서는 인류를 죄악과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켜 참된 구원을 가져다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치유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뿐만 아니라 본문에서 우리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서는 질병의 고통과 사망의 그림자가 다시는 있지 않을 것이라는 소망을 지니게 된다(계 21:4; 7:5).
이러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축복을 누리는 데에는 그 어떤 신분과 성별과 인종적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등 병자와 백부장의 하인과 베드로의 장모는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결코 존중받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들은 자신이 안고 있던 심각한 문제를 해결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남자든지 여자든지, 고귀한 자이든지 비천한 자이든지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다(고전 1:24).
② 성도들은 신학적 지식과 이성만 중요시하는 이지주의적(理知主義的) 신앙만을 지 녀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이적과 체험만 중요시하는 신비주의적(神秘主義的) 신앙만을 지녀서도 안 된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적'을 행하시되 '말씀'으로 행하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된다. 백부장의 믿음이 크게 칭찬받은 이유도 그가 자기 하인의 병이 치유받기를 간절히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까지 오실 필요없이 오직 말씀만으로도 능히 치유 받을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8절; 시 107:20).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백부장의 믿음의 17대 특징'을 보다 참조하라.
8:1 산에서 내려오시니. - 예수께서 산 위에 올라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무리를 향해 말씀, 곧 산상 수훈(마 5:1-7:29)을 가르치시고 내려오시는 것으로 마 5:1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이제는 일반 백성들 가운데서 사역을 위해 갈릴리 해변 근처로 내려 오셨음을 의미한다.
허다한 무리. - 본절의 허다한 무리는 제자들을 비롯해서 병자들을 포함한 많은 무리를 가리킨다(마 4:25). 왜냐하면 마 5:1이나 7:28의 '무리'(오클로이)는 정관사가 사용되어 한정된 의미로 사용된 반면, 본절 '허다한 무리'(오클로이 폴로이)는 관사가 사용되지 않아 한정되거나 특정인을 지칭하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허다한 무리가 따른 것은 분명히 예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 무리들에게 진리의 교훈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8:2 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헬라어 원문을 보면 본절의 앞에 '그리고 보라'(카이 이두)는 말이 있다. 이 표현은 때로 별 의미 없이 단순히 전 ․ 후 문장을 연결시킬 때 사용되기도 하고, 때로는 획기적인 사상이나 사건을 전개시킬 때 삽입되기도 한다. 본문에서는 한 사건에 대한 기록에서 새로운 사건으로 진입될 때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 여기서 '문둥병'(레프로스)은 '비늘'을 의미하는 헬라어 '레피스'( )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이 병의 증상이 피부가 비늘 모양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이 병의 일반적인 중세는 처음에는 몸의 어떤 부분이 아파오기 시작하다가 감각을 모르는 중세로 심해지다 살갗의 원래 색깔이 변하고 부어오르다 드디어는 비늘같이 벗겨진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문둥병이 실제로 문둥병인지 아니면 문둥병과 다른 여러 피부 질환을 포함하고 있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아무튼 문둥병자는 그 병의 불치성과 혐오성 때문에 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종교적, 위생적 이유로 사회에서 철저히 격리 수용되었다(레 13:45,46; 민 12:10,12). 문둥병에 대해서는 레 13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그러한 의미에서 문둥병자는 허물과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된 모든 인간들을 상징하며, 때문에 예수께서는 문둥병자 고치시는 것을 메시야의 직무의 하나로 간주하셨다(마 10:8; 11:5). 한편 여기서 '절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세퀴네이'( )는 본래 '무릎 꿇다' 혹은 '경배하다'라는 뜻으로' 문등병자의 겸손한 모습을 나타내 준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 당시 유대인들은 존경하는 사람들을 향해 '랍비'(rabbi)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본절의 문둥병자는 예수를 향해 '랍비'라는 호칭 대신에 종이 주인을 부를 때 사용했던 '주'(퀴리오스)라 부르고 있다. 이는 문둥병자가 다른 사람에 비해 더 존경심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능력과 위엄을 갖춘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Carson). 한편 '원하시면‥‥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말은 자기 질병의 치료에 대한 강한 요청이자 신앙고백으로 문둥병자의 예수께 대한 믿음이 매우 컸음을 시사해 준다. 아마도 문둥병자는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을 목격하고(마 4:24) 그가 원하시기만 한다면 자신의 질병도 고치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듯하다. 다만 이 문둥병자는 예수께서 혹시 자기의 질병을 고쳐 주지 않고 그냥 지나치시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던 것 같다.
8:3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 문둥병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레위기의 기록에 의하면 문둥병자의 치유 여부를 확인하는 제사장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문둥병자와 접촉할 경우 의식법상 부정한 자로 간주되었다(레 18장). 그러한 율법에 근거하면 예수께서는 부정하게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치유하시기 위해 오신 진정한 의미의 대제사장이시요(히 9:11-22), 엄격하게 말해서 율법을 초월해 계신 분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문둥병자를 만지신 일로 부정하게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정한 자가 예수의 거룩하심에 의해 정하게 된 것이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 '주여 원하시면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2절)에 대한 예수의 즉각적인 응답으로, 육체적 치유뿐만 아니라 사회적, 종교적인 특권까지도
회복을 선언하신 말씀이다. 특별히 여기서 '내가 원하노니'라는 말은 그의 치유 사역이 자신의 의지와 능력에서 비롯되었음을 상기시켜 주는 말이다(Lenski).
즉시‥‥깨끗하여 진지라. - 문둥병자의 회복이 즉각적이고 완전함을 보여 주는 구절로, 예수의 말씀의 신적 권위와 능력을 잘 보여 준다. 예수의 치유 사역에 대해서는
눅 10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8:4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거나 귀신을 들으신 후 그 일에 대해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은 마가복음에 더 많이 나오며 마태복음에도 종종 나온다(마 9:30; 12:16). 그런데 예수의 이러한 말씀은 브레데(Wrede)나, 불트만(Bultmann)이 주장하는 메시야 은닉 사상 내지는 메시야적 비밀과는 관계가 없다. 예수님이 자신이 행하신 기적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려고 하신 이유는 다만 자신을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알리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다(Matthew Henry, Stonehouse, Carson). 그리고 그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정치적이거나, 그들의 현실적 이익과 관련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메시야 사역을 단순히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것으로 몰고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이와 같은 행위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로 인해 아직까지 남아있는 예수님 자신의 본질적 사역인 복음 전도에 장애가 됨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Clake, Plummer).
다만‥‥네 몸을 보이고. - 예수께서 이처럼 치유 받은 문둥병자에게 그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도록 하신 것은 문둥병 회복에 대한 공적인 판결을 통해 그의 사회 ․ 종교적 특권을 회복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레 14:2).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 여기서 모세의 명한 예물이란 레 14:4,10에 나타난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레 14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한편 예수께서 문둥병에서 치유된 사람으로 하여금 규례대로 예물을 드리게 한 사실은 그가 율법을 존중하셨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주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는 것(마 5:17)을 증거한다. 아무튼 이러한 의식법은 예수의 구속 사역으로 폐지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들은 구약의 의식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히 10:14-18).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구약 의식법의 기본 정신은 존중되어야 한다.
8:5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 예수께서 그의 복음 전도의 중심지였던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신 것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가버나움에 대해서는 마 9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한 백부장이 나아와. - 여기서 백부장은 로마 군대에서 1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백인대(百人隊)의 지휘관으로 오늘날의 군사 편제에 있어서 중대장 정도이다. 이들은 일종의 직업 군인으로서 일반적으로 군기(軍紀) 책임자로서의 임무(마 27:54; 막 15:39,44,45; 눅 23:47). 훈련 담당, 무기검사, 병참담당, 야영지와 전지(戰地)에서의 지휘 등 여러 가지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한편 병행 구절인 눅 7:5을 보면 본절에 언급된 백부장은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건립하는 등 이방인이면서도 유대인들에게 선행을 많이 베풀었으며 따라서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또 학자에 따라서는 가버나움이 헤롯 안디바의 관할지였음을 근거로 본절의 백부장이 그의 용병 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나 분명한 것은 아니다(Carr, Bruce' Johnson).
8:6 주여. - 예수님을 향한 백부장의 존경심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2절 주석 참조.
내 하인이. - 여기서 '하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스'( )는 '아들'로도 번역이 가능한 단어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백부장이 자기 아들의 치유를 위해 예수께 호소한 것이라고 해석한다(Bleck, Weiss). 그러나 병행 구절인 즉 7:2에는 명백하게 '종'(둘로스)으로 나타난다. 또한 '파이스'는 신약에 모두 24회 등장하는데 거의 대부분이 신분이나 계급적으로 아래에 있는 자를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백부장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무시해도 좋은 자를 위하여 친히 주께 나아와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백부장의 인간됨을 엿볼 수 있다.
중풍병으로‥‥몹시 괴로워하나이다. - 중풍병은 신체의 일부 또는 전체가 마비 중세를 나타내는 질병으로 현대 의학으로도 그 원인이 완전히 규명되지 않을 만큼 당시 사회에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는 고칠 수 없는 병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하인의 질병을 고쳐주실 것을 호소하는 백부장에게서 큰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8:7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 여기서의 강조점은 '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는 사람'에 있다. 즉 헬라어에서는 동사가 주어의 인칭과 수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인칭대명사 주어는 생략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여기서 '내가'라는 인칭대명사 '에고'( )라는 말을 굳이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위탁된 권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서부터 나오는 권능으로 이 일을 행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Williams, Hendriksen).
8:8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 여기서 '감당치 못하다'(우크 히카노스)란 말은 어떤 권위 있는 대상에 대해 스스로의 무가치함을 느낄 때 사용되는 말이다(마 3:11). 따라서 본절은 백부장이 그리스도의 거룩하심과 초월성 앞에서 죄악으로 인한 자신의 무가치성을 자각했음을 보여 주는 구절로(Neaunder) 백부장의 겸손한 신앙을 잘 드러내준다. 혹자는 이를 두고 백부장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팔복 가운데 첫 번째 복(마 5:3)을 가진 자라고 말하기도 한다(Edersheik).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 헬라어 원문에는 '되어질 일을 한 마디로 하옵소서 그러면 되겠나이다'의 뜻(알라 모논 에이페 로고)이다. 이는 곧 백부장이 예수님을 전능한
절대자로 믿음과 동시에 그의 말씀 속에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을 믿었음을 시사한다.
8:9 나도 남의 수하에‥‥하나이다. - 여기서 '남의 수하에 있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권세 아래 있다'는 뜻으로, 본절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로마의 군대 조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당시의 모든 '권세'(엑수시안, 마 7:29)는 로마 황제에게 속해 있었다. 따라서 본절의 권세란 로마 황제의 권한을 가리킨다. 그리고 백부장은 로마 황제의 권세를 위임받은 자이므로 백부장의 명령은 곧 황제의 명령과 동일시되었으며 반드시 복종해야만 했다. 만일 백부장의 수하에 있는 자가 백부장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백부장의 명령이 아닌 황제의 명령을 무시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백부장은 바로 이러한 인위적 명령 체계의 원리를 예수와 자연 세계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백부장은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는 분이므로 하나님의 권세를 부여 받았으며, 따라서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효력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온 우주의 참 주인이신 권세로 말씀만 하시면 질병을 복종시켜 굴복시키실 수 있다고 그의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자신과 황제와의 관계와 유사하게 이해한 백부장의 논리는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은 종속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권세가 하나님의 권세와 같고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은 반드시 실현된다고 생각한 백부장의 믿음은 실로 놀라운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 '기이히 여기다'에 해당하는 '다우마조'( )는 어떤 것을 보고 놀란 감정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본절은 한낱 이방인인 백부장의 믿음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나타내 준다. 한편 우리가 놀라는 것은 보통 전혀 새로운 사실을 접하거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을 당했을 때 일어난다. 따라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놀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방편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놀란 사실은 그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께서 완전한 인성을 가지셨음을 의미한다(Calvin). 즉 예수께서 놀라신 것은 그가 육신을 입으셨을 뿐만 아니라 완전한 인간의 감정까지도 소유하신 까닭이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못하였노라. - 예수께서는 당신을 하나님께서 보내 신 메시야로 안 백부장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다. 백부장은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방인이었다는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계시하는 구약적 배경을 전혀 몰랐을 것임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어떤 유대인들보다 예수님의 인격과 권능의 본질에 대해 잘 알고 고백한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의 백부장에 대한 칭찬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사실 예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역시 믿음 있는 자들을 만나 보시긴 했지만 겸손과 애정깊은 사랑과 신뢰를 갖춘 믿음은 만나 보시지 못하셨던 것이다. 아무튼 백부장의 믿음은 이스라엘의 선택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방인의 세계에서 장차 일어날 구원의 전 세계성을 보여 준다.
8:11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천국에 앉으려니와. - 사 45:6; 49:12을 반영한 예언으로, 백부장과 같이 단순히 유대 경내에 거주하는 자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을 말씀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백부장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행 11:18)의 기회를 주신다는 표징이 된다(France).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당사자들로, 이스라엘의 신앙의 뿌리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의 이름은 여호와 신앙의 정통성을 강조할 때 자주 언급되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이들과 함께 천국에 앉는다는 것은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비롯해 이스라엘의 믿음의 선조들이 가졌던 신앙과 동일한 신앙으로 구원 얻을 것을 보여 준다.
앉으려니와. - 문자적으로 '기대어 눕는다'는 뜻으로, 이는 식사 시간에 비스듬이 식탁에 기대어 앉는 자세에서 비롯된 말이다. 특별히 여기서는 향연의 식탁에 둘러앉은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향연은 신약에서 큰 기쁨을 나타낼 때 흔히 사용된 표현으로 메시야 왕국의 완성을 상징한다(마 22:1-14; 26:29; 눅 14:15; 계 19:9). 그러므로 본
절은 결국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구원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을 시사해 준다. 눅 서론 특별자료, '천국과 하나님 나라의 이해' 참조.
8:12 나라의 본 자손들. - 문자적으로 '천국의 자손들'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천국에 대해 합법적인 상속권을 소유한 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는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었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당연히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한 것을 빗댄 표현이다.
바깥 어두운 데. - 메시야의 향연이 베풀어지고 있는 장소' 곧 천국의 바깥을 가리키는 말로, 멸망의 장소를 가리킨다. 멸망의 장소가 어두운데 라는 표현은 신약에 자주 등장한다(벧후 2:17; 유 1:13). 즉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그가 계신 천국은 항상 밝은 반면' 하나님이 없는 지옥은 어두움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없이 사는 심령은 빛을 모르는 어두움의 세계에 산다고 할 수 있다.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괴로운 고통과 격앙된 분노를 나타내주는 말로서 천국의 향연과는 대조를 이루어 지옥의 극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하여간 11절과 본절은 오직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만일 유대인이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합당하지 못하면 하늘나라 바깥으로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구원은 개인적인 산 믿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며, 민족이나 인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요 3:16; 롬 10:12,13; 갈 3:9, 29; 골 3:11; 벧전 2:9).
8:13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 '대로'에 해당하는 조사 '호스'( )는 잘못하면 다른 의미로 오해되기 쉽다. 즉 이 말은 예수님이 백부장의 믿음의 분량에 비례해서 기적을 행한 것처럼 이해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확한 의미는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백부장이 믿고 있는 것 그대로 실현되어졌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이 자신의 소원을 간구하기 전에 먼저 믿음의 분량(롬 12:3)이 장성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8:14,15 예수께서 열병 들린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사건은 막 1:29-31과 눅 4:38, 39에도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은 그 기록들에 비해 훨씬 짧게 기록되어 있다. 이는 마태가 그의 직접적인 관심사, 즉 예수님의 메시야의 권능을 나타내는 일에 관계없는 기사들을 생략했기 때문이다(Carson).
베드로의 집에. - 요 1:44에 의하면 베드로의 고향은 벳새다였다. 그러나 본서 4:18-20에 의하면 당시 그는 갈릴리 해변의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로 보아 아마도 벳새다는 그의 출생지이고, 그 후 어부 생활을 하면서 가버나움으로 옮겼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가버나움과 벳새다가 서로 인접해 있는 마을이어서 설사 고향이 가버나움이었다고 하더라도 벳새다 사람이라고 불리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Carr). 아무튼 일정한 주거가 없었던 주님에게 베드로의 집은 자주 기 식하는 곳이었던 것 같다(Clarke).
그의 손을 만지시니. -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은 오늘날의 병명에 의하면 장티푸스나 말라리아의 일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누가는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매우 중한 병으로 취급하고 있다(눅 4:38,39). 한편 당시는 열이 있는 것을 어떤 질병에 대한 중상으로 여기지 않고 그 자체를 하나의 병으로 간주했다(요 4:52; 행 28:2). 그래서 유대인의 종교, 정치, 사회, 국가적인 삶의 제반 생활 방식을 규정하고 있는 랍비들의 강령인 '할라카'(Halacha)는 열병을 앓고 있는 자와의 접촉을 금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문등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대신 것과 같이(3절) 여기에서도 환자에게 손을 대심으로써 열병을 깨끗이 낫게 하셨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접촉이 금지된 환자를 만짐으로써 더럽혀지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만짐으로써 환자가 깨끗해진 것이다.
예수께 수종들더라. - 마태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한 예수의 이적이 베드로의 장모가 예수를 즉시 수종들 수 있을 만큼 완전한 것으로 예수의 이적이 신적 권능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과 ② 구원받은 자의 정당한 태도, 즉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8:16 저물매. - 단순히 해가 짐으로 어두워진 일상적인 밤 시간을 의미하기 보다는 안식일이 지나간 후의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친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눅 4:31-39). 즉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나온 것이 다(눅 4:40-45). 이것은 안식일에는 어떤 노동도 허용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엄격한 율법 때문에 안식일이 지나야만 병자들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 12:1-10; 막 3:2; 눅 13:14). 귀신들린 자. 육체 질환자에 대조되는 정신질환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경은 정신 질환을 사탄의 역사로 보기 때문에(Weiss), 정신 질환을 귀신들린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당시 유대 사람들 가운데 귀신들린 자가 많았던 이유에 대해 그들이 경건한 신앙심을 잃고 마술과 같은 미신적인 일에 심취한 까닭이라고 주장한다(Lightfoot).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 '다'라는 표현에 본절의 강조점이 있다. 즉 그날 저녁 시간에 예수께 나아온 자는 모두 고침을 받은 것이다. 예수의 능력을 초월한 병이란 있을 수 없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께 복종치 않을 자들이 없는 것이다(Pilliams). 아무튼 본절은 아무리 중한 죄를 지은 자라 할지라도 예수께 나아오는 자는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것을 시사해 준다.
8:17 우리 연약한 것을‥‥짊어지셨도다. - 마가와 누가복음에는 없는 기록으로, 사 53:4의 인용이다. 이처럼 마태의 기록 특징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모두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 파악한 것이다. 아무튼 이사야의 예언은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 곧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고난 받는 메시야를 예언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사야의 예언은 영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마태는 이 예언을 보다 육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적용시키고 있다. 즉 '질고'와 '슬픔'과 같은 매우 추상적인 것을 '연약한 것'과 '병'과 같은 구체적이고 육체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의 예언과 마태의 기록은 본질적인 면에서는 동일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치유의 이적은 단순한 능력의 표출이 아니라 죄와 악으로부터 생겨난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대신 지심으로 죄와 사망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주시고자 하신 속죄자의 사랑의 발로였기 때
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눅 10장 자료노트, '예수의 치유 사역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담당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라벤'( )은 무엇을 떠맡는 것을 의미하고, '짊어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바스타센'( )은 '참다', '지탱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환자들의 질병이나 연약함이 그대로 예수께 전가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다만 예수께서 질병과 연약함의 원인이 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을 나타낸 것이다(Carson).
8:18-22 예수를 따르는 자의 자세
앞 단락(1-17절)에서는 예수께서 수많은 치유의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세상에 임하신 메시야로서의 왕적 권능을 드러내시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모습을 보여주셨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본문은 예수를 좇는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특별히 이러한 내용이 예수의 이적적 권능을 보여 주는 기사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즉 마태는 예수의 고난은 생각지도 않은 채 예수의 권능만을 보고 이상(理想)과 세상적 기대감에만 가득찬 자들에게 진정한 예수의 제자도(Disciples)를 보이고자 한 것이다.
하여간 이러한 본문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언급되고 있다. 한 사람은 서기관으로, 그는 예수의 권능을 목격하고 예수가 어디로 가든지 가겠다고 고백하고 있다(19절). 당시 예수를 박해했던 대표적인 무리들 가운데 한 무리가 서기관들이었음을 감안할 때 서기관의 이와 같은 고백은 실로 놀라운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감수해야 할 자기 부정, 희생, 고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예수의 권능을 보고 예수를 좇는 길이 입신양명(立身場名)의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에게 긍정도 부정도 않으신 채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임할 고난만을 말씀하셨다(27절). 또 한 사람은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그는 주를 따르기 전에 자기 부친을 장사하도록 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21절). 그의 이러한 요청은 매우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자식된 자로서 부모의 장래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요청 이면에는 할 수만 있으면 예수를 따름으로써 겪게 될 고난을 회피해 보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계신 예수께서는 그로 하여금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22절)고 강권적으로 명령하고 계시다. 서기관은 이상만을 추구하여 지나치게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었던 반면, 뒤의 제자는 이 세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 영적인 일에 미온적이고 소극적으로 임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길이 고난과 자기 부인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동시 에 죄악된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려면 현세적 축복과 안정 대신에' 엄청난 고난과 희생의 대가를 치루어야 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적인 축복을 누리기 위해 주님의 뒤를 따르려는 자는 결코 자신의 의도를 달성할 수 없으며, 또한 세상적인 일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채 주님의 뒤를 따르려는 자 역시 예수님께 합당치 않은 자로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마 10:38). 진정한 성도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위해 치루어야 되는 고난과 희생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결코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결단과 용기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맡은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면 할수록,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감히 그것과 비교할 수도 업을 만큼 엄청난 상급과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우리로 하여금 발견할 수 있게 한다.
①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는 자들이 되어야 마땅하다(롬 8:17). 현재의 고난은 장차 성도들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자신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된 것을 오히려 즐거워할 수 있을 것이다(롬 8:18; 벧전 4:13).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편안하고 순탄한 삶만 추구하기보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가 그러했듯이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벧전 1:17).
②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심지어 부모 형제보다 더 사랑해야 될 대상이다.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자기 부친을 장사지낸 후에 다시 제자의 길을 가겠다는 자에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이것은 부모에 대한 효도나 형제에 대한 우애를 금하신 말씀이 아니라. 온전한 사랑과 헌신을 주님 자신께 바쳐야 한다는 의미였다(마 10:37). 만약 우리가 삶의 최우선 순위를 예수 그리스도께 두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참된 제자의 길을 갈 수가 없다(눅 14:26).
8:18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 여기서 '저편'이란 갈릴리 바다의 동쪽의 가다라 지방(28절)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께서는 갈릴리 바다의 서편인 가버나움에 계시기 때문이다(5절). 그런데 예수께서 이처럼 갈릴리 바다 동쪽으로 가시고자 하신 것은 그의 여러 이적 행하시는 것을 목격한 무리들이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무리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는 단순히 기적에 대한 호기심과 경이감을 느끼고 몰려든 군중들에게서 휴식을 취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개인적으로 교육하시기 위해 무리에게서 떠나고자 하신 것이다.
8:19 한 서기관. - 서기관은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비판하고 방해했던 자들로 나타난다(막 2:16; 눅 5:30). 따라서 본절에 언급된 한 서기관이 예수를 따르고자 한 것은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리이다. - 예수님을 대적했던 여러 집단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대적했던 무리 중의 하나였던 한 서기관의 이런 고백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것, 즉 자기부정, 희생, 봉사, 고난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 서기관의 제의를 받으신 예수께서 이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하지 않으신 채 예수를 따르는 자의 받을 고난에 대해서만 말씀하신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서기관이 제자로 부름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왜냐하면 21절의 '제자 중의 또 하나'라는 표현은 서기관이 제자의 부류에 속했던 인물임을 시사해 주며, 또 21절의 제자란 말이 반드시 자신의 전 삶을 주께 헌신한 자만을 나타내지 않고 예수를 따르는 모든 자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8:20 여우도… 새도 거처가 있으되. - 여우는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피폐를 가져다주는 야생 동물이었다. 그리고 새는 동물들 중에 가장 작은 종류의 하나로 매우 하찮게 여겨지던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쉴 수 있는 거처는 있었다. 결국 본절은 누구나 상하의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일정한 거처가 있음을 나타낸 말이다.
인자. - 본서에 처음 나타나는 표현으로,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킬 때 즐겨 사용하셨던 칭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이 예수의 신성을 강조한 표현이고, '다윗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예수의 왕적 혈통을 강조한 표현이라면, '인자'란 명칭은 인간 세상에서 행하신 그의 복음 사역과 깊이 연관된 이름으로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낮아지심, 고난과 죽음 등 세상의 구속주로서의 특징을 강조한 표현이다. 이에 대해서는 눅 12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머리 둘 곳이 없다. - 이는 쉴만한 일정한 거처가 없음을 나타낸 말로, 예수의 구속 사역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표현이다. 사실 유대는 인자를 죽이고자 했고(요 5:18), 갈릴리는 인자를 내어 쫓았으며(요 6:66), 가다라는 인자에게 그 지역을 떠나기를 간청했고(34절), 사마리아는 인자가 머무르기를 거절했다(눅 9:53). 또한 온 땅이 인자를 용납치 않으려 했으며(마 27:23), 마침내는 하늘까지도 인자를 버렸다(27:46). 따라서 예수님의 서기관에 대한 이러한 말씀은 인자의 거처가 정처가 없으며 시시각각으로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대답의 깊은 의미는 인자의 참다운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가치와도 병립할 수 없는 많은 역경이 따를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눅 14:25-33).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서기관의 요청에 대한 말을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로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8: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 여기서 '제자'는 12사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따르는 넓은 의미의 제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19절의 서기관도 제자의 부류에 속했음을 암시한다.
먼저…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 예수님께 대해 제자로서의 길을 가기 전에 먼저 아버지를 장사지내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청은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문화적인배경을 고려할 때 장례식은 일반적으로 죽음 직후에 행하여졌을 뿐만 아니라, 죽은 자에게 영광스런 장례를 거행하는 것이 어느 봉사보다도 더 귀한 의미와 친절로 평가되었다. 또한 자녀로서의 도리는 장례의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귀중한 일일 뿐 아니라(창 25:9; 35:29; 49:28-50:3) 당시 부모에 대한 효성의 척도는 제 5계명(출 20:12; 신 27:16)에 기초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자식된 자는 반드시 부모의 장례식에 참석해야만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제자의 요청은 매우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의 이면에는 영육을 모두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말이 내포되어 있다. 즉 서기관은 이상만을 추구하여 지나치게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었던 반면' 이 사람은 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영적인 일을 추구하는데 미온적이고 소극적으로 임한 것이다(Carson, Lenski, Hendriksen). 사실 이러한 사람은 핑계만 있으면 자기 헌신을 포기하려는 사람이다. 그러나 신앙의 길은 차선의 길이 아니라 최우선의 길임을 우리는명심해야 한다.
8:22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을 뜻하며, '저희 죽은 자'는 육체적으로 죽은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죽은 부친의 장례식은 불신자에게 속한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이다. 한편 예수의 이 말씀은 잘못 이해하면 기독교를 비윤리적인 종교로 매도하기 쉽다. 그러나 기독교는 제 5계명이 보여주듯이 결코 비윤리적인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부모 공경하는 것을 하나님 공경하는 것과 같이 취급하고 있다(마 15:1-6). 다만 예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영에 속한 자의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영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 10:37)라고 하신 말씀에 잘 드러난다. 우리는 여기서 삶의 우선 순위를 배워야 한다.
8:23-34 권능을 행하신 예수
이미 메시야로서의 권세 있는 가르침과 더불어서(마 7:28,29) 각종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치유시키는 이적들을 통하여(1-17절), 온 인류를 구원할 만왕의 왕이신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신 바 있는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역시 자연을 다스리시며(23-27절) 귀신을 물리치는 권능을 행하심으로(28-34절) 자신이 천하 만물의 주인이심과 아울러서, 영육 간에 왕적 주권을 행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거듭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예수님의 놀라운 이적과 능력을 거듭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갈릴리 바다의 풍랑 앞에서 극단적인 공포에 휩싸인 제자들의 모습은 전적으로 그들의 불신앙을 폭로하고 있다. 물론 갈릴리 바다의 어부였던 제자들의 과거 경험이풍랑에 대한 본능적 공포를 불러 일으켰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들은 만유의 왕이시며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안전은 보장된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의 아우성에 잠을 깨신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그들을 책망하셨다. 한편 본문의 후반부에 소개되는 사건은 심지어 귀신들도 예수님께서 사단의 권세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는 이상, 성도들은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정녕 세상 끝 날까지 성도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는 성도가 어디로 가든지, 무슨 일을 당하든지 반드시 보호해 주신다(수 1:5-19; 사 43:1,2; 마 28:20). 따라서 문제는 성도들이 직면하는 난관의 정도가 아니라' 성도들이 지니고 있는 믿음의 분량이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라곤 단한 곳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득한 우주의 끝부분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주권을 행사하신다. 풍랑이 사납게 일어나는 갈릴리 바다는 물론이고,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치다가 마침내 발견한 다시스로 가는 배의 밑층 역시 주님의 주권으로부터 제외되는 영역이 아니었다(욘 1:3-17). 따라서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성도들은 자신이 주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가되어야 한다.
③ 성도들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그 어떤 물질적 손실도 감수할 각오를 지녀야 한다. 가다라 지방의 주민들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심으로 인해 그들 소유의 돼지 떼가 몰사하자, 차라리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마을로부터 떠나시도록 요구했다. 결국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물질적 손실을 계산하는 일에는 재빠르면서도, 정작 영적인 축복과 유익을 도모하는 일에는 실패하는 자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 내기 위한 복음 사역과 영적인 축복을 추구하기 위한 일에 세상 재물을 아끼지 않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마 6:8; 딤전 6:17-19).
8:23 배에 오르시매…좇았더니. -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요단 강 동쪽의 가다라 지방' 곧 갈릴리 바다.저편으로 건너가기를 원하셨다(18절). 그런데 가다라 지방은 육지를 통해 가는 길이 그렇게 멀지 아니했다. 또한 갈릴리 바다는 갑작스런 변화가 심해서 어부들조차 매우 조심하는 곳이었다(24절 주석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굳이 이 바다를 통해 가다라 지방으로 가고자 하신 것은 예수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분임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8: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 여기서 '바다'는 갈릴리 바다를 가리킨다. 이 갈릴리 바다는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수면은 지중해 해면보다 212m나 낮아서 마치 절구의 밑바닥과 같은 상태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기온 변화가 심할 뿐 아니라 때론 돌풍이 갑자기 불어 내려와 바다 면을 강하게 친다. 특히 저녁에는 산 위의 공기가 급속히 냉각되기 때문에 호수를 뒤엎을 만한 돌풍이 수면을 향해 불어 닥치면서 순간적으로 큰 놀이 일어난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절의 이 바다는 항시 교회를 위협하는 악의 바다인 세상을 상징하고, 예수와 제자들이 탄 배는 항시 악의 세력의 도전과 위협에 직면해 있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 원문에 사용된 동사의 시제는 미완료시제이므로 예수님이 계속해서 주무시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본문 앞에는 접속사 '그러나'(데)가 있어서 광풍 가운데서도 평온하게 주무시는 광경을 한층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 주무시는 기사는 성경에서 본절과 본절의 병행 구절밖에 없다. 특별히 마가는 예수께서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다고 그가 주무신 장소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막 4:38). 이러한 예수의 주무시는 모습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말씀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20절). 아무튼 우리는 광풍 가운데서도 평온히 주무시는 예수의 모습에서 참된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자의 평온함을 볼 수 있다.
8:25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 이러한 제자들의 말에서 불신앙적인 요소와 신앙적인 요소를 모두 발견할 수 있다. 즉 제자들이 천지 만물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이 함께 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당황하며 예수께 호소한 것은 불신앙적 요소라 할 수 있고, 바다에 익숙했던 어부 출신의 그들이 목수 출신의 예수께 구원을 호소한 것은 미흡하나마 신앙적인 요소를 보여주는 것이다.
8:26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 여기서 '무서워하는 것'과 '믿음이 적은 것'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무서워한 것은 예수가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진정으로 믿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갈릴리 바다의 풍랑이 아니라 마음속의 풍랑인 믿음의 동요였던 것이다. 한편 '믿음이 적은 자'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에 다섯 번 언급되어 있다(마 6:30 ; 14:31; 16:8; 17:20; 눅 12:28). 주목할 것은 항상 제자들에게 말할 때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가장 믿음이 깊어야 할 제자들이 그렇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이 말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다만 믿음이 부족하여 어떤 일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거나 두려움에 빠졌음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렇게 꾸짖으신 것은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그 사명을 채 감당하기도 전에 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그들을 구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꾸짖으셨다기 보다는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믿지 못함에 대한 책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꾸짖으신대. - 생명 있는 대상을 향해 이야기하듯 자연을 향해 꾸짖으신 예수에게서 만물을 지배하시는 창조주의 권위가 잘 드러난다.
잔잔하게 되거늘. - 시편 기자는 폭풍을 잔잔케 하는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의 표현이라 했다(시 89:8'9). 마태는 이 힘을 예수님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바람이 현저하게 없어진 후에도 파도는 얼마 동안 계속되는 것이고 보면 그리스도께서 무 인격적인 자연에까지 말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주님이 자연 현상까지도 자유자재로 다스릴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셨음을 알 수 있다(창 14:19; 마 11:25; 행 17:24).
8:27 그 사람들이. - 제자들을 가리킨다(막 4:40; 눅 8:25).
기이히 여겨. -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 한 마디로 바다의 풍랑이 잔잔해지자 매우 놀랐다. 물론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의 이적을 기대하지 않았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제자들 역시 예수께 도움을 청했지만 그들의 요구가 실제로 응답되자 놀라움을 금치 못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천지 만물의 주인이시오, 인류를 구속하실 메시야인 것에 대해서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제 귀신과 질병을 제어하실 뿐만 아니라 자연까지도 제어하시는 예수의 능력을 보고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훨씬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 헬라어 원문은 '바람과 바다도 그에게 순종하는고'라고 하여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는 대상이 강조되고 있다. 즉 본절에는 예수의 신적 권능의 탁월성이 나타나고 있다 하겠다. 한편 바람의 방향조차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임을 기억한다면 예수님의 이와 같은 기적은 제자들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신뢰와 위로를 충분히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또한 바다를 명령하심으로 인한 그 결과가 자신이 세상을 만드신 자와 동일하심을 보여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8:28 가다라 지방에. - 막 5:1과 눅 8:26에는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거라사'가 갈릴리 바다 남동쪽 32km지점의 데가볼리에 속한 도시인 '거라사'는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이곳은 갈릴리 바다와 너무 멀리 떨어져 32절의 기록과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거라'를 갈릴리 동쪽 해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오늘날의 '케르사'(Kersa)일 것으로 추정한다(Metzger' Carson). 그리고 이 '거라사'는 몇 개의 도시나 마을로 이루어진 행정 구역인 가다라 지방의 한 마을이었던 듯하다(Sherwin, White). 따라서 마태복음과 마가, 누가복음 사이의 기록은 모순되지 않는다.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막 7장 자료 노트 지도를 참조하라.
귀신들린 자 둘이. - 마태는 '귀신들린 자'를 두 사람으로 언급하고 있는 반면' 마가와 누가는 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기록하는 점에 있어서 다양성을 가진 듯하다.
무덤 사이에서. - 이 지역에는 해변으로 이어지는 몇 개의 길이 있었고 또한 그 길이 끝나는 지점은 산으로 연결되어 바다를 향한 가파른 언덕들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 주위에는 고대의 무덤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 무덤들은 벼랑의 바위벽을 깎아 만든 조그만 방이나 굴의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에 이 무덤 중의 일부는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귀신들린 자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심히 사나와…없을만 하더라. - 귀신들린 자들의 광적인 증세를 나타낸다. 이렇게 광포하고 사나왔던 것은 귀신들의 세력이 그들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막 5:2-6에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군대 귀신들린 자들은 그들의 고유한 인격이 파괴된 채 오직 마귀의 파괴적 성향만을 지니고 있어서 아무도 그 지역을 통과할 수 없었다.
8:29 하나님의 아들이여. - 이는 그리스도, 즉 메시야를 지칭할 때, 특히 신성을 지니는 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칭호이다(마 3:17). 귀신들린 자들이 이러한 예수를 알아보았다고 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이는 곧 귀신들은 초자연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귀신들은 예수를 알면서도 증오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들의 대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한 신학적인 지식이 결코 신앙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약 2:19).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티 헤민 카이 소이'( )는 반발의 표현으로 양자 간에 아무 것도 공통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말로, 직역하면 '우리와 당신 사이가 무엇입니까'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왜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겁니까'로 번역하였다.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 여기서 '때'란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주로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을 심판하여 영원한 불 못에 던지실 마지막 때(계 20:10)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귀신들이 예수를 그들의 심판주임을 알았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귀신들이 예수께 부르짖은 것은 심판의 때가 채 이르기도 전에 예수께서 그들을 심판의 불 못에 던지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아무튼 본절은 악의 세력들, 곧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은 제한적이나마 영원한 심판의 때가 이르기까지는 자유가 허락되어 그들의 활동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8:30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돼지 떼의 수는 거의 2천 마리에 달했다(막 5:13). 한편 마가는 돼지 떼가 있던 곳을 막연히 '거기'라고 표현하고 있는 반면(막 5:11), 마태는 '멀리'라고 표현함으로써 그가 이 사건을 친히 목격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돼지 떼가 사람과 먼 거리에 있었음을 나타냄으로써 돼지 떼가 사람의 소동에 놀라 도망치다 바다에 빠진 것이 아니라 귀신들이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 떼에게로 들어간 까닭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8:31 귀신들이… 간구하여 가로되. -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한 사실은 사단과 그 추종자들의 활동 역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증거하며(욥 1:12), 또한 그들이 예수의 신성을 인정한 것을 의미한다. 한편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기를 간구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귀신들이 육체적인 거처를 필요로 했기 때문, ② 하나님에 대한 증오심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에 들어감으로써 그 돼지 떼를 죽음으로 몰아가기 위해, ③ 가다라 지방의 돼지 떼를 몰살시킴으로 그 지방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배척하게 하기 위해, ④ 부정한 것은 부정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 이 가운데 ③의 견해가 타당성 있게 받아 들일만 하다. 왜냐하면 33절과 34절에 보면 이 사건으로 인하여 가다라 지방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했고, 또한 예수에 의해 쫓겨난 귀신들이 난폭한 행동이나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예가 성경에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마 17:14-20; 막 9:14-32).
8:32 저희더러…들어가는지라. - 예수께서 귀신들의 사악한 의도를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귀신들의 요구를 들어 주신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공공연히 인간들의 재산에 피해를 끼치거나 자신의 사역에 많은 영향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들의 간구를 들어주었을까?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그 지역 주민들이 무엇보다도 하나의 교훈을 배울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것은 현재에 귀신들린 두 사람이 돼지들보다 훨씬 더 귀중하다는 것이었다. 즉 예수께서는 그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악의 세력을 정복하고 영혼을 구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인간으로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기억하고 인간의 제한된 지식과 통찰력을 가지고 그의 뜻을 왜곡시켜서는 안 되며, 세계와 그의 사역 가운데서 숨은 섭리를 찾기 위해 영적 안목을 길러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막 9장 자료 노트' '축사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8:33 치던 자들이. - 돼지 떼를 소유한 주인들로서 주로 이방인들이거나(Bruce) 아니면 돼지를 키워 돈을 벌고자 했던 유대인들일 것이다(Watson). 아무튼 이들은 자신의 재산이었던 돼지 떼가 예수의 이적으로 인하여 몰사당하는 처지에 이르자 몹시 당황하며 시내로 달아났다. 이들이 이처럼 도망한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성경에서 부정하게 여기는 동물을 기른 데 따른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으로 여겼거나 아니면 그들 또한 좋지 못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 돼지 떼의 주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돼지 떼들을 잃은 것이 안타까왔을 뿐이었다. 즉 그들은 귀신들린 자들이 해방되었다는 사실에는 무관심했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물욕은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잠 1:19; 행 5:1-6; 딤전 6:9; 약 1:15; 5:3).
8:34 온 시내가…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 가다라 지방 사람들은 예수의 신적 권능으로 그들의 재산에 손해가 발생하자 혹시 또 다른 재산상의 손해가 발생하지나 않을까 하여 예수께 그들에게서 떠나 주시기를 요청했다. 이러한 사실은 물질적 이해타산에 집착하는 자들은 진정 생명의 구주를 영접할 수 없음을 교훈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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