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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예수님의 사탄 시험 승리와 갈릴리 사역 개시 및 나사렛 사람들의 배척, 축사와 치유 사역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1-13절의 전반부는 3 1-4:13까지 계속되어 온 예수의 공생애 개시 준비 기사의 종결부분이다.
다음 14-44절의 후반부는 4:14-9:50절까지 이어지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 기사의 개시부분으로서 예수께서 공생애를 개시하사 초기 갈릴리 사역을 행하시던 도중에 있었던 몇몇 사건들을 보도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14-15절이 초기 유대 사역은 생략하고 갈릴리 사역을 보도하기 시작함으로써 주의 공생애 개시를 보도하는 간략한 도입부이고, 16-30절은 예수에 대하여 다름 아닌 주의 고향 나사렛(Nazareth) 사람들이 배척한 사실을, 31-37절은 가버나움 회당의 축사(逐邪) 사건을, 38-44절은 주께서 각종 치유 이적을 행하시며 갈릴리(Galilee) 모든 지경으로 다니시며 복음 전파에 힘썼음을 개괄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제 이런 넓은 시각에서 본 전 ․ 후반부의 구분은 무시하고 각각이 매우 중대한 사건들을 보도하고 있는 각 단락별로 그 구속사적 의의를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1-13절의 예수의 사탄 시험 승리는 문맥상으로 볼 때에는 공생애 개시의 준비 단계로서 땅의 세례인 요한과 하늘의 성부 성령 모두로부터 하나님의 성자요 나아가 성육신하시어 죄로 오염되지 않은 유일한 인자가 되신 메시야이심을 인정받는 예수가 이제 스스로 죄의 근본인 사탄과 대결하여 이기심으로써, 당신은 그가 야기한 죄의 결과에 절대 오염되지 않으며, 또 이를 모두 다 해결할 능력이 있음을 스스로 입증하며 공생애 개시 준비를 마무리 한 것이었다.
이제 이런 문맥상의 위치를 염두에 두고 이 사건이 갖고 있는 구속사적 의의를 개관할 때 실로 우리는 주님이 가지신 위대한 구속사적 지위와 그분이 가지신 구속주로서의 능력과 사랑에 대하여 새삼 확증을 얻게 된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the Saviour)가 되시는 사실 중 주께서 죄로부터 순결한 유일한 인자(人子)로서 하나같이 다 죄에 오염된 우리 다른 인간들을 위하여 희생하사 우리들을 창조 당시의 원래 모습으로 회복시켜 구원을 주신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는 다름 아니라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아 타락한 첫 아담(the first Adam)과 그의 피를 타고 태어나 모두 다 죄인이 된 인류 중 회개하는 자(repenter)를 구원하기 위하여 구속 희생을 하러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우리의 구주셨다. 즉 그는 원래 의롭게 창조된 첫 사람이요 우리의 옛 대표인 아담이 사탄의 시험에 넘어감으로 야기된 모든 죄와 질고(疾苦)를 구속 희생사역을 통하여 해결하러 오신, 죄에 물들지 않은 두 번째 아담(the second Adam, 고전 15:45)이신 셈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예수에게 다시금 사탄이 유혹의 시험(temptation)을 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이신 우리의 구주 예수는 그 옛날 첫 아담과 달리 그 사탄의 유혹을 능히 물리쳐 이기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옛날 첫 아담을 이긴 이래 현 세상의 공중 권세(엡 2:2)를 잡고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다 모든 인간의 육적 조상인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原罪)와 자범죄(自犯罪)에 물들게 하던 사탄은 최초로 예수에 의하여 패배하였던 것이다.
구속사적으로 이것은 먼저 예수 자신은 죄와는 무관하신 절대 순결하신 분으로서 우리의 완전한 희생제물(히 7:26,27)이 되사 우리의 구속사역을 수행할 자격이 있음을 보여 준다. 나아가 성도(the Saint)는 이제 이후로는 그가 예수 안에 있다면,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생활한다면 사탄을 물리쳐 이기신 주님의 도우심으로 사탄을 능히 이길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사탄은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처음 인간을 이긴 후에 계속하여 모든 인간 위에 군림(君臨)하며 죄에 물들게 한여 왔다. 그러나 이제 본 사건으로 인하여 사탄의 패배는 시작되었고 예수의 십자가 구속 사역의 성취(成就)로 사탄의 패배는 결정적이 되었으며, 나아가 세상 끝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든 원흉이며 모든 죄의 기원이기도 한 그의 패배와 형벌은 최종 실현될 것이다(계 20:1,2).
이상을 종합할 때 예수의 시험 승리는 예수 자신의 구속주(救讀主)로서의 절대성을 입증한 것이며 나아가 사탄과 그가 주도한 죄에 대한 예수 안에서의 사람의 승리가 시작되게 된 출발점이 된 중대한 사건이었다.
14-15절의 공생애 개시를 보도하는 기사와 더불어 곧 이어지는 16-30절에서 다름 아닌 예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排斥)한 대목도 구속사적으로 깊은 시사를 던져준다. 예수는 다름 아니라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셨으나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루기 위하여 성육신하신 우리의 구주이셨다. 그리고 죄로 오염된 우리와 달리 죄로부터 절대 순결하고 온전하신 유일한 인자 이겼다. 이런 예수께 대하여 그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의 실체를 바로 보지 못하고 주께서 가지신 외모와 자신들과의 혈연적, 지연적 관계에만 집착하여 맹목적 편견에 빠짐으로써 그의 가르침과 사역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였다. 이는 우리에게 우리가 외면적 인간적 편견에 빠져 예수와 그의 복음을 바라보면 참 진리를 발견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이는 특히 교회의 각종 의전(儀典)과 인간적 이해관계에 얽매어 그 이면에 있는 복음의 진리를 간과하기 쉬운 현대의 우리들에게 중요한 경고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우리가 복음서를 전체적으로 살필 때에 본 단락의 예수의 고향 사람들 뿐 아니라 모든 유대인이 사탄의 사주에 빠져 각종 이유로 예수를 배척했는바 이에 대한 전체적 이해는 예수의 공생애 사역 이해를 위하여 필수적이다. 이는 막 12장 연구자료 '유대인의 예수 배척'을 보라.
31-37절의 안식일 가버나움 회당(capenaum synagogue)에서의 축사 사건, 그리고 38-44절의 예수의 각종 치유 사역 및 갈릴리 순회 사역에 대한 개괄적 보도는 전체적으로 다음 두 가지 구속사적 교훈을 담고 있다.
먼저, 우리에게 우리의 구속주로서 제 2위 성자께서 성육신하시어 완전하고도 순결한, 유일한 인자가 되신 예수는 죄로 물든 인간의 영과 육의 모든 질고를 해결해 주실 능력이 있으심을 보여준다. 그리고 한시도 쉬지 않으시고 당신이 가져올 구원의 복음을 더 많이 더 멀리 전하시려는 사랑과 열정을 가지셨음도 보여준다. 이런 구속의 능력과 사랑의 주님이 우리 구주이시니 우리는 그 얼마나 감사한가!
외울 말씀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예수의 사단 시험 승리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갈릴리 사역 개시
14 ○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나사렛 회당에서의 주의 설교
16 ○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나사렛 사람들의 예수 배척
22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안식일 가버나움 회당의 축사
31 ○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시몬의 장모와 많은 병자의 치유
38 ○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40 ○ 해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
42 ○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본문 & 자료노트
지도-4:1-14 예수의 시험과 갈릴로의 귀환 경로
원어연구 - 4:5, 순식간에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엔 스티그메 크로누'로 나와 있다. 여기서 '스티그메'는 '스티그메 '의 여격으로서 성경에서 는 단 1번만 나오는 단어이다 그리고 '스티그메'는 '찌르다'라는 뜻의 동사 '스티조'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시간상의 한 점'(a point of time)이라는 뜻을 가진다.
또한 '크로누'는 '크로노스'의 소유격으로서 성경에서 '때'(마 2:7; 행 1:6)나 '~할 동안'(요 12:35; 행 8:11) 등의 의미를 지니며, 주로 연대나 시간을 나타낼 때 널리 사용되는 단어이다 한편 심판의 '때' (벧전 4:17; 계 11:18)나 은혜의 '때'(고후 6:2) 등의 표현에서 보는바와 같이 정해진 시간, 결정적인 때를 가리킬 때 성경은 '크로노스'와는 달리 '카이로스' 를 사용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엔 스티그메 크로누'는 '시간의 한 점에서', 곧 '한 순간에'라는 뜻이다. 결국 이것은 마귀가 세상의 모든 왕국을 차례대로 한 장면씩 예수께 보여 준 것이 아니라 '단 한 순간에' 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천하만국을 다 보여주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탄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사탄의 능력이 이렇게 동시에 모든 장면을 다 보여 줄 수 있을 정도로 크다면, 그를 상대하여 싸워야 할 신자들은 과연 또 얼마나 굳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경성하여 깨어 있어야 하는지 새삼 각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엡 6:13). 더욱이 근본 하나님이신 예수님조차도 시험코자 했던 사탄인 만큼 성도는 항상 사탄의 궤계를 경계해야 하겠다.
도표-4:1-7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주요 사역들
성삼위 하나님 가운데 제 2위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성육신하여 오셔서, 당신의 사역을 하시는 모든 과정 속에서 제 3위 하나님이신 성령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계셨다. 즉 성령은 예수의 신분을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그의 사역과 공생애 삶에 있어서 함께 하셨던 것이다. 이에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주요 사역에 대해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성령에 의한 잉태(마 1:18)
2. 물세례 시 성령이 임재하심(마 3:16,17)
3. 성령의 인도로 시험 이김(마 4:1)
4. 성령을 통한 이적(마 12:28)
5. 성령의 권능으로 가르치심(눅 4:18)
6. 성령에 의한 인치심(요 6:27)
7. 성령 안에서 기뻐하심(눅 10:21)
8. 성령 안에서 슬퍼하심(요 11:33)
9. 성령 안에서 헌신하심(히 9:14)
10. 성령을 통한 부활(롬 8:11)
보감-4:13 예수께서 시험받으신 이유
1. 하나님의 구속사에 도전하는 사단의 광포함과 교묘함을 깨닫게 하심
2.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人性) 소유를 분명히 밝히심
3. 인간의 연약함과 고통을 체험하사 인간을 향한 연민과 사랑을 보여주심
4.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 사단과 부딪치는 것이 필연적임을 나타내심
5. 예수조차 시험코자 했던 사단인 만큼 성도는 항상 시험에 대비할 것을 교훈
6. 시험을 이기사 첫 사람 아담의 실패로 말미암은 모든 것을 회복함을 보이심
7. 당신이 사단의 시험을 이기셨듯이 성도들도 사단의 시험을 이기게 하심
8. 종말에 사단을 멸하시고 그 세력을 분쇄할 것을 보증하심
보감-4:17-19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의 특징과 사역
특 징 |
1.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선지자이심(신 15:15) |
2. 성령으로 기름부음 밟으심(사 42:1; 61:1) |
3. 지혜가 충만하심(막 6:2; 골 2:3) |
4.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심(사 42:2; 마12:17-70) |
사 역 |
1. 하나님의 충성스런 대언자가 되심(눅 4:43; 요 17:8) |
2. 세상에 하나님을 계시하심(마 11:77; 요 17:16-76) |
3.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선포하심(요 8:26,28; 12:49,50) |
4. 장래 일을 예언하심(마 24:3-35; 눅 19:41-44) |
5. 말씀과 이적을 함께 행하심(마 13:54; 막 1:57) |
6. 성부 하나님 앞에서 성도의 대변자가 되심(마 10:32; 계 3:21) |
지리배경: 4:16-30, 나사렛
본문은 예수께서 자기 고향 나사렛(NaZareth)에서 배척당하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고향이 나사렛이었음을 명확히 알게 되는데,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나다나엘은 예수가 나사렛 출신임을 들었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비웃은 바 있다. 이에 예수의 고향으로서 성경의 중요한 무대가 되는 나사렛에 대해 간략히 살펴봄으로써 성경의 배경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명칭과 위치
'나사렛'은 지켜보다'. '파수꾼'이라는 뜻으로서, 현재는 이스라엘 공화국에 속하여 '엔 나시라'(en Naslrah)로 불린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의 중심으로서 갈릴리 호수 남단과 갈멜 산 중간 지점에 위치했다. 곧 갈릴리 호수에서 남서쪽 24km, 지중해 동록 32km 지점의 해발 433m의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에스드렐론 평야의 북쪽 계곡에 위치한 탓에 전망이 매우 좋다. 또 그다지 높지 않은 야산들이 서로 연해 구릉(丘陵)을 이루고, 기후가 온화하고 강우량도 농사짓기에 적합하여 대대로 농사를 많이 지었다. 예수님 당시 이 마을은 인구 7천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보잘 것 없는 산골마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 관련 기사 및 역사
구약에는 나사렛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신약에서만 예수의 고향으로서 이 지역이 언급되었다. 곧 나사렛은 예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살던 마을로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께서는 30세가 될 때까지 젊은 시절을 나사렛에서 보내셨다(눅 2:39-51). 그러다가 이 곳을 떠나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공생애 기간(A.D. 27-30년) 중 고향에 다시 돌아오신 적이 있는데, 그때 고향 사람들의 배척을 당하셨다(마 13:53-58; 막 6:1-6; 눅 4:16-30).
그 후 콘스탄티누스의 통치 이전에 이 곳은 유대인들만이 거주하도록 허용되었는데, 콘스탄티 누스(A.D. 324-337년) 황제에 의해 기독교의 성소로 지정되었다.
A.D. 700년경 이슬람 교도의 침입으로 많이 훼손되었으나 십자군 원정 때 다시 복구되어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지금은 3만 명이 훨씬 넘는 인구가 거주하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기독교 도시로 발전하였다.
3. 유적 및 고고학
현재 나사렛은 평화스런 성읍으로 올리브 밭과 사이프리스 숲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곳이 다. 이곳에는 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데, 이 성읍의 북동쪽 끝에는 '처녀 마리아의 샘'이라고 불리는 우물이 있다. 이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물을 긷던 곳으로 전해져 오는데 이 우물은 지금도 그 지역 주민들에게 풍부한 식수를 제공하고 있다. 또 여기서 비탈진 고개를 올라가면 '수태고지 기념 교회'가 있는데. 여기서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수태고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나사렛에는 예수님께서 사 61:1-3절 말씀을 강론하시던 회당 자리에 '헬라 성교회'가 세워져 있고, 요셉의 집, 그리스도의 탁자, '매로나잇'(Maronite) 교회' 등 많은 유적들이 있다.
4. 영적 교훈 및 상징적 의미
잘 알려지지도 않은 팔레스틴의 작고 천한 마을 나사렛이 바로 예수의 고향이었다는 사실은 높은 것, 위대한 것만을 추구하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 뿐만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경륜과 뜻은 인간의 그것과 다르며 인간이 보잘 것 없게 여기고 관심조차 두지 않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관심과 애정 역시 피곤을 향해야 함을 잘 교훈해 준다.
한편 본문에 나타난바 예수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인간적인 면에서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배척한 모순된 현실은, 신앙은 결코 혈연이나 지연 등 인간적 관계에 의해 생겨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분명하게 증거해 준다(눅 4:16-30).
지리배경-4:23,31, 거버나움
마 9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 주제-4:15-20 회당의 이해
본서 14권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 참조
삽화-4:33, 가버나움 회당
복음서를 보면 가버나움(Capernaum)은 예수의 갈릴리 시역 사역의 중심지로서 매우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오늘날 가버나움(Capernaum)에는 동네가 없고, 주후 2세기에서 3세기 경에 지어진 유대교 회당과 베드로의 집터의 유적만이 남아 있어 이 도시를 향한 예수님의 책망을 생각나재 한다(마 11:23). 아래 그림은 유적을 토대로 한 주후 7세기경의 가버나움 회당의 상상도이다. 이 회당은 정면의 출입구가 예루살렘을 향해 있으며, 정면의 장식이 화려한 것이 특징이
다.
주요 주제-4:23-30 유대인의 예수 배척
막 12장 연구자료 참조
주요 주제-4:33-36 축사의 이해
막 9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 주제-4:38-41 예수의 치유 사역 이해
요 9장 자료노트 참조
4:1-13 시험 받으신 예수
전장(3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소개하기 전에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세례인 요한의 선포. 공생애 준비로서의 예수의 수세, 본서의 주인공인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했다. 이어 본장에서부터는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기록이 시작되고 있는데 그에 앞서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위한 마지막 준비로 광야에서 세 가지 시험을 당하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이 기사는 공관복음서가 오누 언급하고 있는데(마 4:1-11; 막 1:12,13) 마가는 예수께서 시험 받으신 사실만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고, 마태는 그 내용상 본서에 나타난 시험의 순서만 둘째와 셋째를 바꾸어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마 4:8 주석의 도표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험은 40일간 금식하며 굶주리신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해보라(3절)는 인간의 육체적인 한계 상황을 자극하는 시험이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예수께는 그렇게 행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능력이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시지는 않았다. 오히려 말씀(신 8:3)으로 시험을 이기셨고 인류를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요 6:35) 자신을 희생하시기까지 하셨다.
둘째, 시험은 마귀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면 천하만국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5-7절) 영적 ․ 종교적 시험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마귀에게 절한다는 것은 인사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신 6:13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라고 하셨다.
셋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해 보라는(9-11절) 정신적인 시험이었다. 마귀는 시 91:11,12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여 예수님을 넘어뜨리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이나 계시를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출 17:1-7; 신 6:16)을 기반으로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인용하셔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이상의 마귀의 시험을 종합해 볼 때 마귀의 시험은 인간의 원초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에서부터 영적인 문제에 관련된 것까지 삶의 전 부분을 총망라하는 포괄적인 시험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시험했던 마귀는 이미 인류 역사의 초기에 첫 번째 아담을 시험했었다. 그때 아담은 시험에서 실패하여 타락하고 인류에 죄와 사망을 가져왔다. 반면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하셨다. 이 승리로 인해 인류는 생명과 구원을 얻게 되었다. 또 예수님 자신은 이를 통해 메시야의 구속 사역을 위한 준비를 완전하게 끝마치시고는 전도 사역으로 들어가신다. 시험의 결과 및 의의에 대해서는 마 4:8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따라서 이러한 본문을 탁해 다음과 같온 교훈을 언을 수 있다.
첫째,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힘입을 때 마귀와의 대적에서 승리할 수 있다(히 2:18). 왜냐하면 인간이 받는 시험을 예수께서 친히 가장 극한 상황 가운데서 받고 승리하심으로 모든 성도들의 간 모범이 되셨기 때문이다 특히 영적 사역에 있어서 마귀와의 싸움은 필연적인 것이며 이 싸움에서 승리했을 때 하나님 나라의 역군이 될 수 있다.
둘째, 성도들은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세상의 여러 가지 것들로 유혹해 오는 마귀의 시험을 말씀에 근거하여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엡 6:17). 성경 전체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하셨던 예수님은 성경의 일부만을 가지고 유혹해 오는 마귀의 궤계를 말씀을 기반으로 해서 물리치셨다.
셋째, 마귀의 시험은 전 인격적인 부분에 대한 것으로 비단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시험은 아니다. 마귀는 세상을 자기의 지배아래 두기 위해서 모든 인간, 특히 성도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을 뿐 아니라 성도들의 전 영역, 즉 영적, 정신적. 육체적 모든 부분을 유혹거리로 삼는다. 따라서 성도들은 항상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벧전 5:8).
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 본절은 눅 3:22에 연결되는 구절이다. 즉 본절은 예수께서 수세 후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처럼 '성령'을 강조하는 것은 누가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로 본절에만 두 번이나 언급되고 있다(눅 1:15 주석 참조).
광야에서‥‥성령에게 이끌리시며. -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은 예수께서는 또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인도되어 40일 동안 그곳에 거하시며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특별히 여기서 '이끌리시며'에 해당하는 '에게토'는 미완료 수동태로, 계속해서 이끌리는 상황을 나타내는데 이는 예수께서 시험 받으시는 동안 계속하여 성령의 인도 아래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바, 예수의 시험받으심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의한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러한 본절은 예수께서 성령이 이끄는 대로 매우 수동적으로 시험에 대처하신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께서 시험에 수동적이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예수께서는 수세 사건 이후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속 사역을 시작하시기 앞서 첫째 아담을 유혹하여 온 인류를 사망의 길로 인도했던 사탄의 시험을 둘째 아담이 되어 분쇄하심으로써 온 인류를 구원하는 그의 공생애를 하나님과 사탄마저 인정하는 가운데 시작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시험에 임하셨던 것이다. 다만 본절이 예수께서 성령의 이끄시는대로 시험 받으신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그리스도의 겸손의 모습을 보이고자 한 까닭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40일의 기간에서 '40'이란 숫자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즉 모세는 시내 산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사십 일을 여호와와 함께 보냈으며(출 34:28). 엘리야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기까지 사십 일치 금식 여행을 했다(왕상 19:8).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십 년 간 광야에서 생활을 했다(민 14:34). 이러한 이유로 일부 학자들은 '40'이라는 수를 '신성수'라 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며, '하나님의 준비기간', 또는 '완성과 인내의 기간'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Hostel , render). 한편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광야에 대해서는 ① 여리고 서북쪽 산지(Hengel. Meyer). ② 모세와 엘리야가 금식한 시내산(Alford). ③ 다볼 간 등의 견해가 제시되고 있으나 ① 견해가 지지를 받고 있다. 예수의 시험 받으신 장소에 대해서는 막 1장 자료노트. 지도를 보다 참조 하라.
4:2 마귀에게. - '마귀'를 가리키는 헬라어 '디아볼로스는 하나님의 대적자 '사탄'의 또 다른 이름으로, '훼방자'. '비방자', '시험하는 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고, 신약에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등장한다. 즉 '형제를 참소하던 자'(계 12:10), '대적'(벧전 5:8), '바알세불'(마 12:24), '벨리알'(고후 6:15), '악한 자'(마 13:19,38). '거짓의 아비'(요 8:44). '살인한 자'(요 8:44), '옛 뱀'(계 12:9), '이 세상의 임금'(요 12:31; 14:30). '공중의 권세 잡은자'(엡 2:2) 등으로 묘사된다. 이런 다양한 묘사는 마귀의 성격과 위치들을 암시한다. 마귀에 대해서 그랜드 종합 교리 귀신론 부분을 보다 참조하라. 하여튼 마귀는 첫째 아담을 유혹함으로써 그 시험에 성공했던 것처럼 예수를 넘어뜨려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려하고 있다. 그러나 마귀의 그러한 계략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으로 완전히 분쇄되고 오히려 그의 다스리는 왕국이 멸망으로 치닫게 되는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시험. -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이 당하는 시험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이 되는데, 하나는 하나님에 의한 시험이다. 이 '시험'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주어지며 그 성격은 주로 '시련'의 양태로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에게 임한 시험이다(창 22장). 또 하나의 시험은 마귀에 의한 시험이다. 이때의 시험은 하나님의 백성을 죄로 이끌기 위해 주어지며 그 성격은 주로 '유혹'의 양태를 띤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본장에 언급된 예수에게 대한 시험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한다면 시험은 구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시험은 긍극적으로 하나님의 허락 하에 주어지며(욥 1:12; 2:6), 모든 시험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자들의 순종 여부 확인과 신앙의 연단, 참 신자와 거짓 신자의 구분을 위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출 15장 자료노트 '시험'을 보다 참조하라. 하여튼 첫 아담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굴복함으로써 모든 인류를 사망의 길로 인도했다(창 3장; 롬 3:23). 그러나 둘째 아담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의 본을 보이심으로써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고 온 인류를 구원하실 권리를 마련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그 안에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장을 열어 주셨다. 한편 마 4:1-11을 보면 예수에 대한 마귀의 시험이 40일간의 금식이 끝나는 시점에 행해진 것처럼 묘사된 반면 본절을 보면 예수께서 40일 내내 시험을 받으신 것처럼 나타난다. 그래서 혹자는 예수께서 광야에 거하시는 40일 동안 계속 마귀의 시험에 시달리셨고 본장에 나타나는 세 종류의 시험은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일 거라고 추정하기도 한다(Robertson, Plummer).
이 모든 날에‥‥날수가 다 하매 주리신지라. - 누가는 예수가 몇 날만 금식한 것이 아니라 사십 일 전체 동안 완전히 금식을 했으며, 예수가 어떤 황홀경 속에 빠져서 육신의 고통도 전혀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 완전한 한 인간으로서 배고픔에 직면한 것을 보여 준다. 한편 마 4:2을 보면 '금식하셨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스튜사스'는 보통 헌신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인 금식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단어이다. 즉 예수께서는 메시야로서 그의 사역을 수행하시기에 앞서 엄숙하고 강한 헌신의 시간을 가지신 것이다. 바로 이러한 헌신을 위하여 금식하심으로 주리신 때에 마귀는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접근한 것이다. 이처럼 신자들의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열심이 강할 때 일수록 마귀들의 시험 또한 강하게 작용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되 그럴 때 일수록 자기를 살펴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4:3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이 말은 마귀가 예수의 신성을 몰랐거나(Clarke). 예수로 하여금 그의 신성을 의심케 하려는 의도(Weiss)에서 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눅 3:22의 하늘의 음성과 관계 있다. 즉 마귀는 '40일 전 수세 시 하늘의 음성이 환상이 아니고 사실인진데 너는 어찌하여 주린 채로 있는가? 내 앞에서 능력을 보여 네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해 보라'는 의미로 이 말을 한 것이다.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에 대한 마귀의 첫 번 시험은 육적이요 물질적인 것이었다. 즉 첫째 아담을 먹는 문제로 시험하여 넘어지게 한 마귀는 둘째 아담에게도 동일하게 먹는 문제로 시험하고 있다. 이 시험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시행되었다. 하나는 하나님과 예수와의 신뢰 관계를 파괴하려는 의도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면 광야에서 내렸던 만나와 같은 이적을 베풀 것으로 기대했다(요 6:30,31).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마귀는 예수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할 수 있는 이적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입증하게 하려는 의도보다는 예수로 하여금 마귀 자신의 말에 복종케 함으로써 하나님이신 예수를 자신이 지배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의 신뢰 관계를 파괴하려는 간계였을 것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방해하려는 의도였다. 즉 마귀는 예수로 하여금 그의 메시야적 권능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대속 사역에 사용하기 보다는 자신의 당면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먼저 사용하도록 유혹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수포로 돌리고자 의도했던 것이다.
4:4 기록하기를. - 마귀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대처 방법은 세 번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한편 여기서 '기록하기를'(게그라프타이)은 '기록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유효 하다'라는 의미로 예수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와 함께 구약 성경이 그의 진리의 기본적인 판단 기준이 됨을 보여준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 예수는 신 8:3 말씀을 인용하여 마귀의 시험에 대응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순종 여부를 시험하고.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때로는 주리게도 하시고, 때로는 만나로 배불리 먹게도 하셨다. 바로 이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는 신 8:3이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을 분쇄할 수 있는 무기가 된 것이다. 즉 예수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신뢰에 인간의 생사가 달려 있음을 강조하심으로 마귀의 첫 번 시험을 극복하신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는 인간에게 떡이 필요함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다만 그는 사람에게 떡보다 더 필요한 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니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한편, 신약의 구약 인용에 대해서는 신약총론 특별자료 '신 ․ 구약의 연속성과 점진성'을 보라.
4:5 마귀가 또 예수를‥‥천하 만국을 보이며 에서 8절까지는 예수에 대한 마귀의 두 번째 시험 장면으로, 영적이고 종교적인 시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마 4장에는 이 시험이 세 번째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마 4:8-10). 이는 마태가 시간의 순서에 관계없이 시험의 설명에 따라 점층적으로 기록한 반면, 누가는 시험의 성격보다는 순서에 따라 사실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의 기록이 보다 역사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마 4:8 주석 도표를 보다 참조하라. 하여튼 마귀는 예수에게 세상 권세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결국 예수를 자기의 무릎 앞에 꿇게 하고자 했다. 그런데 본절과 병행 구절인 마 4:8에 의하면 마귀는 예수를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혹자는 이 산을 헬몬 산이나 느보 산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지상의 어떠한 물리적인 산도 천하만국을 순식간에 다 보여줄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산은 유대의 어느 산으로 보고, 예수가 본 천하만국은 환상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Williams). 물론 그렇다고 마귀의 예수에 대한 시험이 실제 상황이 아니라 환상이라고 하여서 이 시험의 강도와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에스겔이나 사도 요한도 환상 가운데 신비한 경험을 했지만 그것이 결코 거짓이나 허상이 아닌 것처럼, 마귀의 시험 역시 실제와 동일한 강도와 중요성을 지닌 것이었다(겔 40:2; 계 1:10). 한편 여기서 '천하만국'에 대해서는 그것이 ① 유대(Clarke), ②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이방 세계(Meyer. De Wette), ③ 문자적으로 본 천하(Bruce) 등의 견해가 있는데, 이 가운데 ③의 견해가 지지를 받고 있다.
4:6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주노라. - 마귀는 자기 자신을 마치 세상 정사를 주관하는 권세자인 양 자처하고 있다. 이러한 마귀의 주장은 일면 일리가 있다. 사실 성경도 인류의 타락 이후 이 세상이 마귀의 지배 아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요 12:31; 14:30; 16:11; 엡 2:2). 그러나 마귀의 이러한 권세는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며 무제한적인 것도 아니다. 즉 마귀의 권세는 일시적이며 한계를 가지며 그 권세 역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이다(엡 1:20-23; 골 2:15; 계 20:3, 4, 10). 그런즉 마귀는 그의 권세를 누구에게 나누어 주거나 양도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는 마귀가 예수에게 이 세상 왕국의 권세와 영광을 양도하겠다는 주장은 철저히 허위이다. 한편 마귀는 사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실제로 세상 권세와 영광을 소유하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험의 본래적 의도는 예수에게 십자가를 지지 않고 면류관을 얻어 보라는 제안을 그 말 속에 품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은 십자가의 구속 사역의 어려움을 미리 알고 있었던 예수에게 실로 내적 투쟁을 일으키기에 매우 실제적인 시험이었으며(Hendricksen),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완전히 좌절시키기 위한 결정적인 시험이었음을 알 수 있다.
4:7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되리라. - 여기서 '절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스퀴네세스'로, 이는 가장 깊은 종교적 존경과 찬양으로 하나님 앞에 절하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말이다(Lenski). 따라서 이 말은 단순한 의미의 목도가 아니라 '완전한 복종'을 의미한다. 결국 마귀는 지금 이 시험에서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그의 교만한 본성을 다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사 14:12-14). 아무튼 마귀에게 절하는 것은 신앙 세계에서의 종국적이고 결정적인 패배를 의미한다. 만일 예수께서 마귀의 말대로 그에게 절했다면 그는 영원히 마귀의 하수인이 되었을 것이요. 우리의 구원은 요원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또다시 말씀으로 마귀의 궤계를 물리치심으로 그러한 염려를 완전히 불식시키셨다.
4:8 주 너의 하나님께‥‥다만 그를 섬기라. - 마귀의 두 번째 시험에 대적하는 예수의 무기는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예수는 신 6:13을 인용하여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심으로써, 자신의 신적 권능을 사용하기보다는 우리와 같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대한 공경과 하나님에 대한 경배의 모범을 직접 보여주신다. 한편 신 6:13에는 '다만'이라는 구절이 없는데 누가는 이 말을 첨가함으로써 본절의 뜻을 강화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본절은 우리의 진정한 예배의 대상이 오직 하나님 한분이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4:9 예루살렘으로 가서‥‥여기서 뛰어내리라. - 예수에 대한 마귀의 마지막 세 번째 시험 장면으로. 마태복음에는 두 번째 시험으로 기록되어져 있다(마 4:5-7). 이 차이점에 대해서는 마 4:5,8 주석을 참조하라. 그런데 이 마지막 시험은 명예심을 자극하는 정신적인 시험이었다. 사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정치, 종교, 문화 모든 영역에서의 중심지였다. 더욱이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이자 계시의 장소였다. 따라서 이러한 예루살렘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린다면 그는
단번에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메시야라는 증거를 제공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거둘 것은 분명하다(말 3:1). 마귀는 바로 이러한 명예심을 자극하여 예수를 시험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에 대한 마귀의 시험은 육적, 정신적, 영적으로 혹은 물질적, 명예적, 종교적으로 전인격적인 시험이자 삶의 전 부분을 총망라하는 포괄적인 시험이었다. 한편 여기서 '성전 꼭대기'(토 프테뤼기온 투 히에루)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성소 또는 솔로몬의 행각 꼭대기를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으나(Bengel) 보다 유력한 견해는 성전 중에서 '작은 날개'라 불리웠던 '남쪽 망대'를 가리킨다는 견해이다(Alford, Meyer). 사실 '프테뤼기온'은 '작은 날개'라는 의미로 이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요세푸쓰(Josephus)에 의하면 이 망대 꼭대기에서 기드온 골짜기까지는 약 137m로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또 유대인의 전설에 따르면 주의 형제 야고보가 이 망대 꼭대기에서 밀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Hendricksen).
4:10,11 하나님이‥‥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 마귀는 두 번씩이나 성경의 인용으로 참패를 당하자 이제는 자신이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를 현혹하고 있다. 마귀가 인용한 성경 말씀은 시 91:11,12인데 누가는 70인역(LⅩⅩ)에서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마귀는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는 원래 구절에서 '네 모든 길에'란 말을 생략한 채 인용하고 있다. 원래 문장 전체를 해석하면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그 모든 의로운 길에서 보호하시겠다는 뜻이다. 여기서 '의로운 길'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길을 의미한다. 그러나 마귀는 고의적으로 '네 모든 길에'란 말을 생략함으로써 의인은 어떤 충동적인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무조건 보호하신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록 의인일지라도 자신의 뜻에 어긋나며, 충동적으로 위험에 뛰어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신 6:16; 시 19:13). 더구나 스스로 위험을 모험하면서 하나님의 이적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죄악이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너
무도 잘 알고 계셨기에 다시금 말씀을 인용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로 마귀의 궤계를 물리치신 것이다. 하여튼 우리는 여기서 마귀의 교활한 면을 볼 수 있다. 즉 사탄은 두 번씩이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그의 시험에 대처하시자 그 역시 말씀을 교묘히 인용하여 예수님을 무력화 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마귀의 교활함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보게 되는 바 많은 이단 종파들이 말씀을 교묘히 이용하여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말씀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려는 노력이 요청된다.
4:12 주 너의 하나님을‥‥말라 하였느니라. - 예수는 다시 신 6:16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탄의 음모를 분쇄하신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맛사' 혹은 '므리바'에서 물이 부족하자 모세를 반역하며 심지어 하나님에게까지 도전하여 시험하던 상황 속에서 주어진 말씀이다(출 17:1-7). 예수가 이 말씀을 하신 것은 하나님을 시험코자 하는 마귀의 술책을 강력히 대적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마귀의 기묘한 말장난이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신뢰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가르쳐 주신다. 따라서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신뢰를 가지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예수와의 신실한 관계를 파기시키고자 한 마귀의 마지막 시험은 다시 분쇄되었다. 이로써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방해하려는 마귀의 세 번에 걸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예수의 순결함과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이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4: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 마귀의 모든 시험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여기서 '모든 시험'을 의미하는 '판타 페이라스몬'( )은 마귀가 그때에 할 수 있었던 모든 종류의 시험을 말한다. 이로써 아담을 정복한 후 인류를 지배해 오던 마귀의 패배는 시작된 것이다.
얼마 동안 떠나니라. - '얼마 동안'에 해당하는 '아크리 카이루'는 '잠시 동안' 혹은 '보다 좋은 기회가 나타날 때까지'라는 의미이다(Robertson). 즉 마귀의 떠남은 잠정적이었다. 마귀는 비록 지금 당장은 패퇴하여 물러갔지만 그는 예수의 전 생애를 통해 그를 넘어뜨리려고 끊임없이 공격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베드로(막 8:32), 가룟유다(눅22:3),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막 14:1) 등을 통한 시험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시험 등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마귀는 예수의 일생 동안 온갖 종류의 시험으로 괴롭히고 유혹했으나 결국 그리스도 앞에 항상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롬 16:20; 고전 15:55-57). 그와 같이 우리 성도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마귀와 영적인 전쟁을 계속 치러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 또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에 우리는 늘 담대함으로 마귀와의 싸움에 임해야 할 것이다. 한편 마 4:11에는 마귀가 물러가고 나자 천사들이 나아와서 예수께 수종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본절에는 이 말이 없다. 이것은 누가가 홀로 시험을 이겨낸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Marshall).
4:14-30 인자의 사역 개시와 나사렛에서의 배척
앞단락(1-13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공생애 시작에 앞서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한 마지막 준비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본문에서부터는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본문 14절에서부터 눅 6:16까지 이어지는 갈릴리 1차 사역이 있기 이전에 초기 유대 사역이 있었음이 나타나고 있다(요 1:17-4:42).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을 갈릴리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으로부터 기록한다. 이는 누가의 집필 의도로 보여지는 데 자신이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나타내고자하는 것에 있어서 초기 유대 사역의 내용이 불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튼 본문은 예수께서 갈릴리 회당에서 가르치심(14,15절)과 나사렛에서의 가르침과 배척(16-37절)을 언급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심을 기록한 14,15절은 예수님의 갈릴리 제 1차 사역의 서론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마 4:12-16 및 막 1:14,15과 병행을 이룬다.
여기서 누가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성령의 권능으로 행하실 때에 그의 소문이 사방에 퍼지고, 가르치실 때에 칭송을 받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갈릴리 지역은 유대인들의 멸시의 대상이 되어온 곳으로(막 1:14주석 참조) 이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것은 그가 특별히 비천하고 소외된 자의 구원을 위해 오셨음을 시사한다.
한편 갈릴리 사역의 서론에 이어서 소개된 나사렛에서 가르치시고 배척받으신 사건(16-30절)은 4복음서 가운데 유일하게 본서에만 기록된 내용이다. 그런데 갈릴리 제 1차 사역 초두에 이 사건을 소개하는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배척과 핍박으로 점철될 것을 암시하기 위함일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가르치신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 61:1,2)을 인용한 것으로 본래 사 61:1,2은 메시야의 사역의 본질을 보여 주는 것으로 예수께서는 지금 그 예언이 자신의 사역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또한 그 예언은 종되었던 사람이 자유를 얻고 잃었던 토지를 다시 회복하는 희년(레 25:1-55)에 관한 말씀인데 즉 예수께서는 자신을 모든 사람을 죄로부터 해방하여 자유롭게 하고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을 되찾으실 영적 희년의 선포자로 오셨음을 계시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목수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외면하고 예수를 멸시하고 만다. 이에 예수께서는 당시 사람들을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완악함과 비교하여 그들의 완악함을 책망하시는데, 결국 이러한 예수의 책망은 유대인들이 거부한 복음을 이방인들이 영접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을 보여 준다.
4:14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사방에 퍼졌고. - 여기서부터 예수의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과 함께 갈릴리 사역이 언급된다. 특히 본절과 다음절은 예수의 갈릴리 사역의 서론부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마 4:12-16과 막 1:14,15과 병행을 이룬다. 마태는 사 9:1,2을 인용하면서 예수의 갈릴리 사역의 의의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반면 누가는 보다 예수의 사역의 내용을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어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전도하신 것, 그의 소문이 사방에 전파된 것, 회당을 중심으로 전도하신 것 등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예수의 세례 받으심과 광야에서의 시험 사건과 본절과의 사이에는 약간의 시간적 간격이 있다. 즉 예수께서는 본격적인 갈릴리 사역에 앞서 얼마 동안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서 활동하셨던 것이다. 이때의 행적이 요 1:19-4:42에 나타난다. 이때를 이름하여 '초기 유대 사역'이라 한다. 사복음서 개론 '사복음서 대조표' 참조.
결국 누가는 이 얼마간의 시간적 흐름을 본절로써 압축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도 역시 누가의 독특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성령의 역사가 강조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셨으며(눅 1:35), 세례 받으신 후 성령으로 충만케 되셨을 뿐만 아니라(눅 3:22; 4:1) 성령에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셨다(눅 4:1-13). 그리고 이제 예수는 성령의 권능을 덧입고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돌아오셔서 그의 사역을 계속 수행해 나가신 것이다. 여기서 누가는 예수가 각 지역에서 행한 이적과 예수의 놀라운 생명의 말씀으로 인해 사방에 소문이 이미 널리 퍼져 나갔음을 우선 결론적으로 말한다. 여기서 '사방'이란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막 1:28) 데가볼리 지방, 두로와 시돈 지방, 베니게 지방, 이두매와 유대 지방 등을 가리킨다. 즉 예수의 소문은 그의 사역 초기부터 온 사방에 급속히 퍼져 나간 것이다.
4: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 회당 제도는 바사(Persia) 시대 혹은 바벨론 포로기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유대 사회에서는 성전과 더불어 종교 생활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회당은 예루살렘 성전을 대신한다기보다, 제사장 또는 레위인이 아닌 식자층(서기관)에 의해 주도된 곳으로 기도와 율법을 주로 가르치는 곳이었다. 회당은 유대인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었고, 잘못을 한 유대인들에게는 형벌도 내릴 수 있는 사법적 기능도 소유하였다(마 10:17). 그런데 당시 회당에서는 회당장이 저명한 사람을 초청하여 말할 수 있게 하면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 예수는 이런 기회를 통해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예수의 사역 중에서 회당에서의 가르침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16,31-33,44절). 바울 역시 전도 여행시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들 전파 했었다(행 13:14; 14:1; 17:1,2). 이처럼 회당은 기독교 역사 초기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가 되기도 했다. 회당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한편 본절은 예수께서 갈릴리 초기 사역 시기에는 자유로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무리들은 자신의 생각과 가 치관, 선입견, 기대감이 예수와는 다른 것을 발견하자 예수의 적대 세력으로 돌변하고 만다(28,29절),‘이 후 예수는 회당을 떠나 무리들을 가르치겼다(눅 9:12). 한편 본절의 '가르치다'를 의미하는 '디다스코'는 복음서에서 예수의 활동을 언급할 때 종종 쓰는 말로서 '선포하다'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인다(막 1:14),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 누가는 본절에서 아직까지 아무런 반대도 일어나지 않은 갈릴리의 일반적 상황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의 내용은 밝히지 않고 다만 예수의 가르침이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는 것만을 말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칭송을 받다'에 해당하는 '독사조메노스'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돌릴 때 사용한 단어이다(눅 2:20). 사실 예수의 가르치심은 신적인 권능을 가진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영광과 칭송을 받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4:16예수께서‥‥회당에 들어가사. - 본절에서부터 30절까지는 예수께서 그의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 받으신 사실에 관한 기사이다. 그런데 이 기록은 예수의 갈릴리 사역에서 처음 언급되고 있으나 실제로 처음 있었던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미 가버나움 지역에서 어떤 권능을 보이신 바 있기 때문이다(2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연대기적 서술을 고려하지 않고 나사렛 방문을 제일 먼저 언급한 이유는 예수가 잠시 동안 사람들의 칭송을 받다가 곧 사람들의 반대를 어떻게 받게 되었는지를 일반적 실례로서 보여 주기 위함인 듯하다. 하여튼 예수께서는 고향 나사렛에서 자기 규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여기서 '자기 규례대로'는 직역하면 '그에게 습관된 바에 따라서'이다. 즉 예수께서는 어려서부터 안식일을 지키고 회당에 출석하였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그 습관에 따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회당에 들어가신 것이다.
회당에 대하여는 신약총론 '신약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 회당의 예배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쉐마'(신 6:4-9)의 고백, ② 테필라(Tephillah)와 쉐모네 에스레(Shemoneh Esreh)를 포함한 기도가 드려짐. ③ 모센 오경의 7인 이상의 윤독(히브리어로 낭독 후 아람어로 번역함) 이것을 파라샤(Parashah)라 함. ④ 선지서의 낭독, 이것을 하프타쓸(Haphtarh )라 함, ⑤ 설교 ⑥ 제사장의 축복 혹은 제사장이 없을 경우 폐회 기도로 대체함. 이상의 순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읽혀질 때 사람들은 일어섰으며 설교시 앉았다. 여기서 예수께서 성경을 읽으신 것은 아마도 당시 그의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나사렛의 회당장이 말씀을 읽고 설교해 줄 것을 요청한 까닭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성경을 읽으신 기록은 이곳이 유일한 곳이며. 예수가 나사렛에서 공중 앞에 서신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4:17 선지자 이사야의 글. - 직역하면 '선지자 이사야의 두루마리'이다. 이는 당시 성경이 양피로 만든 두루마리에 기록된 까닭이다. 찾으시니.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렌'은 제 2부정 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이는 예수께서 원하는 구절을 찾기까지 두루마리 성경을 한쪽으로는 감고 다른 한쪽으로는 펼치며 훑어보신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찾아 읽으신 것이다. 본절과 다음절은 구약 사 61:1,2의 인용 부분으로서 약간의 차이점을 가지긴 하지만 거의 비슷하다. 그 차이점을 보면 히브리 성경에는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본 인용에서는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로 바뀌어 인용되어 있다. 이는 누가가 70인역(LⅩⅩ) 성경에서 인용한 까닭이다. 또 히브리 성경과 70인역(LⅩⅩ) 성경에 있는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란 구절이 본 인용에서는 생략되었다. 반면 70인역과 히브리 성경에는 없는 구절이 첨가되어 있다. 바로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란 구절인데 이것은 사 58:7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예수는 히브리 원전을 그대로 읽었을 것이므로 구약 성경과 본문의 인용의 차이점은 아마도 누가가 예수의 설교의 취지에 맞추어 자유로이 인용하여 기록한 까닭으로 여겨진다. 하여튼 원래 사 61:1,2의 내용은 고난에 처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기쁨의 소식을 전할 선지자의 자의식을 여러 가지 은유적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이를 자신에게 적용시켜 자신의 메시야적 사역을 증거하신 것이다.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 이 인용문의 전체 주어는 메시야 자신이다. 그런데 21절을 관련시켜 생각해 볼 때, 예수 자신이 바로 메시야이심을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말은 눅 3:22을 연상시킨다. 즉 누가는 구약에 예언된 성령이 이미 예수에게 임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가난한 자에게‥‥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자에게 기름을 부으신 목적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메시야를 보내신 것이다. 예수는 그를 향해 메시야인지 여부를 묻는 세례인 요한의 질문에 바로 구약의 이 구절을 인용하여 그의 메시야되심을 증거하기도 하셨다(마 11:5; 눅 7:22). 그런데 여기에서 '가난한 자'(프토코이스)는 단순히 물질적으로 궁핍한 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열린 자를 가리킨다. 예수는 마 5:3에서 이런 자들을 가리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셨다. 또한 예수는 하늘나라가 바로 이런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6:20), 한편 여기서 '기름을 부으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에크리센' 은 '기름을 바르다' 라는 의미의 동사 '크리오' 의 제 1부정 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이 동사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의 '크리스토스'가 파생되었다. 하여튼 구약 시대에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 등을 위임할 때는 기름을 부었다(출 29:7; 삼상 10 1; 왕상 19:16).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그들의 자격이 공적으로 인정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예수에게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예수가 메시야로서의 그의 사역을 공적으로 감당할 것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구약에서 기름 부음은 성령의 임재 또는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을 의미했다(출 29장 자료노트 '관유'참조). 따라서 예수께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눅 3:22에 언급된 성령의 임재 사건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 여기서 '포로된 자'(아이크말로토이스)는 '창끝'을 의미하는 '아이크메'와 '포로되다'를 의미하는 '할로토스'의 합성어로 '창으로 잡은 자'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는 전쟁 포로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본절은 본래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환에서 귀환하게될 것을 예언한 말이었다. 그것이 여기서는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죄의 세력에 포로된 온 인류를 해방시키고 영적인 자유함을 주시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요 8:32; 고후 3:17).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 이 구절은 히브리 성경의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70인역(LⅩⅩ)에서 인용한 것이다. 아마도 70인역 번역자들은 깊은 지하 토굴 속에 갇혀 있는 자들은 마치 눈이 먼 자들인 것처럼, 그리고 그들이 풀려나는 것을 다시 눈을 뜨는 것으로 이해한 듯하다. 하여튼 눈먼 자가 눈을 뜨고, 소경이 말하고, 귀머거리가 귀가 열리는 등의 이적은 메시야의 표적으로 제시된 것이었다(사 35:5). 실로 예수는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눈먼 자들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실 분이셨다(요 9:39).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 이 구절은 히브리 성경과 70인역에 없는 부분으로서, 압제 당하는 자의 구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사 58:6에서 누가가 인용한 구절로 보인다. 이 말은 앞에서 나열한 모든 말의 결론부라고 할 수 있는데 실로 예수께서는 모든 죄의 세력에 눌려 있던 자들을 자유케 하심으로 기쁨과 평화를 회복시켜 주실 분이셨다.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 여기서 '주의 은혜의 해'란 '희년'(쉐나트 하요벨 ; -수양 뿔의 해)을 가리킨다(레 25:1-55), 이 희년은 안식년 주기에서 50년이 되는 해를 말한다. 희년이 되면 제사장들은 그 땅 전역에 수양 뿔의 나팔을 붊으로써 희년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희년이 되면 가난으로 팔린 땅이 원주인에게 돌아가고 종들이 해방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희년'은 종말론적으로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예표하며 희년의 선포는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킬 복음의 전파를 상징한다고 할 것이다. 희년의 영적 의미에 대해서는 레 25:8-22강해를 보다 참조하라.
4: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 당시 회당에서는 말씀을 읽고 나면 두루마리를 다시 말아서 그 책을 맡은 자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책을 맡은 자는 이것을 다시 법궤 속에 집어넣었다. 여기서 두루마리를 맡아 보관하는 자의 직무를 '카잔'(Chazzan)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회당에서 두루마리를 꺼내오고 봉독 후 다시 보관하는 일 외에도 회당을 정결케 하는 일, 회당 옥상에서 은 나팔을 세 번 불어서 안식일의 시작을 알리는 일,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과 죄수를 매질하는
일 등을 담당하였다.
앉으시니. - 일반적으로 랍비적 전통에 의하면 성경을 읽을 때에는 서서 읽고 말씀을 들을 때에는 모두들 앉았다. 여기서는 예수가 회중 가운데 앉았다기보다는 선생의 모습으로 앉는 것을 말하며, 이제 곧 말씀을 시작하려 하는 것을 의미한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 여기서 '주목하여 보더라'에 해당되는 헬라어 '아테니존테스'는 미완료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계속 주목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즉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회중들은 최근 많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바로 그 예수가 자기 고향 마을 회당에 와서 말씀을 전하려 하자 호기심과 기대감, 그리고 침범할 수 없는 권위를 느끼며 예수께 완전히
끌리었던 것 같다.
4:21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는 '너희가 방금 들은 성경 말씀이 오늘날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여기서 '오늘날'(세메론)이란 말은 강조를 위한 표현으로 예언이다.
성취의 시기를 가리킨다. - 즉 회중들이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바로 이 때에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은 지금 이 말씀을 보는 모든 세대들에게도 역시 구원의 시기가 동일하게 현재적으로 이루어짐을 뜻하기도 한다. 실로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인 것이다(고후 6:2). 한편 '응하였느니라'(페플레로타이)는 말은 완료 수동태 직설법으로, 이 단어는 대개 예언의 성취와 관련하여 사용되어 진다(막 1:15).
4:22 증거하고‥‥기이히 여겨 가로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마르 튀룬‥‥에다우마존 ‥‥엘레곤'( ) 세 단어 모두 미완료 과거형으로 계속된 동작을 나타낸다. 즉 회중들은 예수의 권위에 찬 말씀을 듣고 그를 계속하여 칭찬하며 그 권위 있는 말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예수가 목수였던 요셉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예수께서 자신을 메시야로 증거한 사실을 의심하며 수군거렸던 것이다.
은혜로운 말을. - 이 말은 '은혜의 복음'을 의미할 수도 있고, '아름다운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후자로 보는 것이 옳다(Bengel. Meyer, Farrar). 즉 회중들은 예수의 권위와 매력 있는 말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것이다.
4:23 의원아 너를 고치라‥‥어기서도 행하라. - 이 속담은 의사였던 누가에게는 익숙한 속담이었을 것이다. 이 속담의 뜻은 남의 병을 고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병부터 고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이 속담을 말씀하신 이유는, 나사렛 사람들의 생각을 이미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가 이 속담을 말씀하신 후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에서도 행하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더 분명히 한다. 즉 예수께서는 '네가 만일 메시야라면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들을 네 고향인 여기서도 해보라'는 말을 하려는 청중들의 생각을 미리 아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Hendricksen). 한편 성경에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이적을 행하셨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요 2:12을 보면 예수께서 가나에서 이적을 행하신 후 가버나움에 내려갔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때 예수께서 이적을 베푸신 것으로 여겨진다. 하여튼 예수는 단순히 나사렛 사람들의 호기심이나 불신앙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이적을 행하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는 자기 고향에서 하나의 격언이 성취됨을 선포하신다(24절).
4: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여기서 '진실로'는 '아멘'( )의 번역으로 아멘은 구약시대 때는 주로 '그렇게 될지어다'라는 감탄사로 사용되었으며(왕상 1:36; 렘 28:6). 이 외에도 율법 낭독에 대한 백성들의 동의(민 5:22; 신 27:15-26), 맹세(느 5:13), 예배 시 회중의 응답기도 혹은 송영에 사용되기도 하였다(대상 16:36; 느 8:6). 신약시대에는 교회의 지도자의 말에 동의할 때(고전 14:16)나, 하나님의 약속이 꼭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으로 이 말을 사용하였으며(고후 1:20), 송영(롬 11:36), 축사(롬 15:33). 서신서의 맺는 말(히 13:21; 유 1:25) 등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말을 그의 교훈이나, 경고 등의 초두에 사용하심으로써 그의 말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시곤 하셨다(마 5:18).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없느니라. - 이 격언은 본래 위대한 사람도 그와 친밀한 사람에게는 멸시를 받는다는 말로, 예수는 그의 고향 사람들이 자신을 멸시한 사실을 이 격언을 들어 묘사하고 계신다. 사실 예수의 성장 배경을 잘 알고 있었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쉽게 예수를 메시야로 용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의 태도는 그들에게 굴러 들어온 복을 차버리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처사로, 그들은 결국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만다(마 13:58). 한편 예수께서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사건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배척받으실 것에 대한 예표라 할 수 있다.
4:25,26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 왕상 17:1-24의 내용을 요약 인용하신 말씀이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고향 사람들에 의해 배척을 당하시므로 고향에서는 어떠한 큰 역사를 이루실 수 없음을, 선지자 엘리야가 완악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3년 반에 걸친 가뭄에도 오히려 이방 땅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환영을 받아 그곳에서 이적을 행한 사실로써 설명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엘리야 시대의 가뭄 시기가 본절에서는 '세 해 여섯 달 '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약 5:17의 기록과 동일하다. 그러나 왕상 17:1에서는 '수년 동안', 왕상 18:1에서는 '3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뭄의 기간이 '3년 6개월'이었다는 것은 유대의 구전에 의한 것으로 보이며, 왕상 18:1에서 단지 '3년'으로 기록된 것은 아마도 대략적인 숫자를 기록한 까닭일 것이다.
사렙다. - 두로와 시돈 사이에 일는 지중해 연안의 작은 마을로 오늘날의 '수아펜드'(Suafend)라 불리는 곳이다. 이곳은 구약 시대에는 '사르밧'이라 불리웠다(왕상 17:9).
4:27 선지자 엘리사 때에‥‥나아만 뿐이니라. - 왕하 5:1-19의 내용을 요약 인용한 말씀으로, 본절 역시 25,26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엘리사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문둥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엘리사에 의해 치유받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원수 국가의 장수였던 나아만이 엘리사의 능력을 인정하고 찾아와 나음을 입었다. 이 사실을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한 나사렛 사람들의 배척과 연관시켜 장차 유대인들이 복음을 배척함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이방인들이 복음을 수용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을 암시하신 것이다. 결국 25,26절과 본절은 예수께서 자신에 대한 나사렛 사람들의 배척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하신 놀라운 구속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하여튼 예수의 이 두 가지 예증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국가나 민족, 나이, 사회 계층에 제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며, 예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구원의 문은 열려지는 것이다. 반대로 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할지라도 교만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
4:28 회당에 있는 자들이‥‥분이 가득하여. - 이방인들이 복음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고 유대인들은 불신으로 하나님께 배척을 받으리라는 예수의 말씀은 선민사상으로 가득 차 있었던 나사렛 사람들을 격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예수의 그 말씀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구원은 확실히 보장 받았다고 생각했던 유대인 자신들이 이방인들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찬양과 경배의 분위기로 가득 찼던 회당(22절)은 아수라장으로 돌변 했다. 여기서 우리는 교만하여 회개하지 못하는 완악한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즉 교만한 자들은 자기의 잘못을 지적해 주면 자기 모습을 돌이켜 보고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분내며 자기의 손상된 자존심을 만회하기 위하여 심하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것이다.
4:29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내리치고자 하되. - '나사렛'(Nazareth)은 해발 350m의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로서 나사렛의 남쪽과 남동쪽에서는 이스르엘 계곡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나사렛에 대해서 본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결국 이 나사렛 마을에는 많은 절벽이 있었다. 본절의 '낭떠러지'를 가리키는 헬라어 '오프뤼오스'의 문자적 의미는 '눈썹'으로서 '모자, 혹은 두건'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절벽의 위 끝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한편 사람을 낭떠러지에서 밀어 죽이는 형벌은 민족 반역죄를 범한 자에게 가했던 형벌이다(대하 25:12). 이로 보아 나사렛 사람들은 자신들을 이방인보다도 못하다고 말하는 예수를 민족 반역자로 처단함으로써 그들의 배척을 정당화하려 한 듯하다. 하여튼 예수에 대한 나사렛 사람들의 배척은 예수의 이적과 능력을 보고 따르던 많은 군중들이 도리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게 되는 모습과 매우 흡사한 일로 결국 유대인들의 메시야 배척의 예표적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의 예수 배척에 대해서는 막 12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4:30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 본절에는 예수가 어떤 기적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위기를 모면한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혹자는 예수의 근엄한 얼굴, 위엄한 모습 등이 이성을 잃은 폭도들을 압도했을 것이고 예수께서 폭도들을 뚫고 지나시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 정신이 아닌 폭도들이 예수의 근엄한 모습을 보고 예수를 그냥 놔주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이는 어떤 이적적 탈출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4:31-44 가버나움에서의 전도 사역
앞단락(14-3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제 1차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시고 고향인 나사렛에서 배척받으신 사건을 통해 예수의 전 공생애가 박해와 배척으로 점철될 것과 유대인들의 배척으로 복음의 주도권이 이방인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제 본문은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러한 가버나움에서의 사역은 예수님의 제1차 갈릴리 사역 중 가장 핵심되는 것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 전체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은 복음 전파와 치유 그리고 축사의 사역이 중추를 이루는데 이 사역이 모두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마 8:14-17; 막 1:21-39). 이러한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안식일에 말씀으로 무리를 가르치셨는데 그의 교훈은 권세가 있는 놀라운 가르침이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가르칠 때에 율법에 나타난 계시의 본질이나 핵심 보다는 문자 하나하나에 대한 해석과 전통을 가르치는데 급급하였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질과 핵심을 가르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였다(43절; 마 4:17).
둘째로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의 사역을 행하셨다(33-37절). 그런데 유대교의 전통에 따르면 귀신의 능력은 메시야가 도래하면 깨뜨려지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심은 스스로 메시야임을 드러내는 강한 증거였다. 이것은 쫓겨난 귀신들이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의 거룩한 자'(34절)라 외치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마 8:29; 막 5:7).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이적도 행하셨는데 베드로의 장모와 여러 사람의 각종 질병을 완전히 치료하신 것이다(38-41절). 이러한 예수님의 치유 이적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인간의 연약함과 병을 대신하여 담당하시는(사 53:4) 대속적인 메시야의 사랑과 은혜를 보여준다. 이 치유는 육체적인 질병뿐 아니라 죄악으로 인해 시달리는 깊은 영혼의 상처까지 치료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 치유의 능력 역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야의 사역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예수님의 능력은 단순히 병을 치료하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이 메시야임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본문에 나타난 예수의 사역은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해 주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육간의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다(빌 4:6; 벧전 5:7).
② 성도에게 허락된 은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복음 전파를 보다 원만하게 수행케 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4:31 본절에서부터 44절까지는 갈릴리 지역의 중심지였던 가버나움에서의 예수의 활동을 보여 준다. 예수의 갈릴리 지역 선교 활동에 있어서, 나사렛에서의 활동이 서론부였다면 가버나움에서의 활동은 본격적인 활동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 - 여기서 '가버나움'은 '나훔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구약의 나훔 선지자와 어떤 연관이 있는 듯하나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어쨌든 가버나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요단강과 갈릴리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약 8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칸 민예' (Khan Min Yeh)와 동일한 곳으로 보는 견해(Carr, Stenley)와 '칸 민예'에서 북동쪽으로 약 4km 지점에 위치한 '텔훔' (Tell Hum)이라 불리는 언덕이라는 견해 (Thomason, Robinson)가 있는데 후자의 견해가 보편적 지지를 받고 있다. 가버나움의 위치에 대해서는 마 8장 자료노트, 지도를 보다 참조하라. 그런데 이러한 가버나움은 인구가 조밀하고 동서를 잇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예수께서 복음을 전파하기에는 최적지였다고 할 수 있다. 가버나움의 일반적 사항에 대해서는 마 9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한편 누가가 가버나움이 갈릴리 지역에 속한 마을임을 상세히 말하고 있는 것은 이 글의 수신자인 이방인 데오빌로에게 지리적 개념을 잘 이해시키기 위한 배려이다.
내려오사. - 이 단어는 가버나움의 위치를 잘 설명해 준다. 가버나움은 지중해 수면보다 약 200미터 낮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예수가 언덕에 위치한 나사렛 마을(해발 350m)에서 호숫가 아래 지역으로 내려왔다는 이 표현은 적절하다.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 누가는 특별히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는 예수의 모습을 자주 언급한다(31-41절; 눅 6:6-11; 13:10-17; 14:1-6). 이는 예수께서 안식일의 규례를 파한 자가 아니라, 진정한 안식일의 의미를 보여 주고자 하셨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유함과 참 평화를 얻는 것이다. (마 12:9-14). 한편 여기서 '가르치시매'는 원문에서 미완료시제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일이 그의 습관적 행동이었음을 나타낸다.
4:32 그 가르치심에…권세가 있음이러라. - 여기서 '놀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세프레스손토’ (FETanooovro)는 '제 정신을 잃고 있다’, ‘아연해 하다', ‘감탄하다'라는 뜻으로 매우 놀란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놀라게 된 원인은 바로 예수의 권세 있는 가르침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마 7:29과 막 1:22은 예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는 달랐다고 덧붙이고 있다. 사실 당시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사소한 문제로 입씨름을 하는 매우 무미건조한 것이었다(마 2323 ; 눅 11:42).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었음은 물론 매우 논리적이고 명쾌했다. 따라서 무리들은 예수의 신적인 가르침 앞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4:33 더러운 귀신들린. - 의사인 누가가 보도하는 예수의 첫 이적 기사가 귀신들린 사람의 구원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귀신이 들렸다'는 상태는 단순히 의학적으로 정신 분열이나 정신 이상 같은 정신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인격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 사람의 전인을 지배하는 상태를 말한다. 어떤 학자들은 귀신들렸다는 것을 의학적으로, 육체적·정신적으로 병이 든 상태를 달리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나 그 주장은 타당치 못하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명백히 악한 존재가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막 1:26; 3:15; 눅 8:27). 또 예수의 치유 사역은 육체적·정신적 질병의 치유와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마 17:15-18; 막 5:1-20; 눅 8:2). 따라서 귀신 들렸다는 것은 단순한 정신병 이상의 상태에 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여튼 예수의 귀신 축출 사건은 단순한 질병 치유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권세가 사단의 세력을 몰아냄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역동적으로 임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막 9장 자료 노트, '축사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귀신'이란 표현이 10회, '더러운 영'(프뉴마톤 아카다르톤)의 표현이 2회 나타난다. 반면 마가복음에는 '귀신'이 13회, '더러운 영'이 11회 나타나며, 누가복음에서는 '귀신'이 23회, '더러운 영'이 5회 나타나는데 '더러운 귀신'이란 표현은 본절에서 단 1회 사용되고 있다. 하여튼 이방인을 상대로 쓰여진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이 유대인을 위해 쓰여진 마태복음보다 '더러운'이라는 형용사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귀신'이라는 말 자체가 '악한 것'을 의미하였던 반면 헬라인들은 '귀신'의 개념을 선악의 구별 없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함으로 여겨진다.
4:34 아. - '아'를 의미하는 헬라어 '에아'는 '아!', '하!' 등의 놀람과 혐오감, 적대감 등을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즉 귀신은 예수를 바라보다 두려움과 적대감 때문에 비명을 지른 것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타난다.
나사렛 예수여. - 귀신이 예수를 부를 때 '나사렛 예수여'라고 한 것은 예수가 오랫동안 나사렛 지방에서 살았으므로 붙인 일반적 호칭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나사렛 예수'라는 용어가 예수의 메시야성을 비하시킨 호칭이라고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귀신들이 곧이어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말을 한 것을 볼 때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예수의 메시야성을 비하시키는 말이라기보다는 예수의 일반적 호칭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실 예수께서도 친히 이 칭호를 자신에게 사용하신 바 있다(행 22:8).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티 헤민 카이 소이는 직역하면 '우리와 당신 사이가 무엇입니까'라는 의미로 양자 간에는 아무런 공통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발의 표현이다. 그래서 70인역에서는 이 문장을 '왜 당신은 나를 방해 합니까'로 번역하고 있고 공동번역에서는 '왜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겁니까'로 번역했다. 한편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우리' 라는 표현인데 과연 우리가 누구를 의미하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귀신과 귀신들린 사람을 가리킨다는 견해(Robertson)와 귀신과 그의 모든 동료 귀신을 가리킨다는 견해(Lange, Wessel)가 있는데, 후자의 견해가 대체로 지지를 받고 있다. 즉 귀신은 예수가 오심으로 그와 그의 동료 귀신들이 멸망을 받게 될 것으로 짐작하고 두려워 떨며 자신들을 그냥 놔두기를 요청한 것이다(마 8:29 주석 참조).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 '멸하러'에 해당되는 헬라어 '아폴레사이'( )의 의미는 귀신이 인간에 대해 가진 지배권을 축출함으로써, 그들의 권세를 파멸시키는 것을 뜻한다. 결국 귀신은 예수의 권세와 능력 그리고 일의 사명(요일 3:8)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경악과 분노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 8:29에는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쓰고 있는데 이는 귀신이 자신의 때가 차면 무저갱 속에 갇히게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계 20:3).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 이 말은 막 1:24에도 나타나는 말로 예수의 신성을 드러낸다. 신약성경에서는 믿는 성도들을 가리켜 종종 '거룩한 자'(호 하기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자'(호 하기오스 투 데우)라는 말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사용되었다. 한편 우리는 종종 적대 세력에 의해 도리어 그 사람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본절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즉 예수는 결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지 않았으나 귀신에 의해 그의 신성이 드러난 것이다. 이처럼 성경에서 귀신들이 예수의 신성을 고백하는 것은 종종 발견된다(마 8:29; 눅 8:28).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에 대해 아는 신학적 지식이 곧 신앙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4:35 잠잠하고. - 예수께서는 당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고백하는 귀신을 가리켜 잠잠하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이는 본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함구령 가운데 첫 번째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처럼 자신을 증거하는 귀신의 고백을 막으신 것은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더러운 귀신에 의해 자신의 신분이 증거됨으로써 자신의 신분이 무리에 의해 오해되는 것을 막으시기 위함이다(마 12:24). ② 귀신의 방어적 발언을 무력화시키고 그들에게 임할 임박한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③ 정해진 때가 이르기 전에 자신의 신분이 노출됨으로 대적들과의 마찰이 빚어져 자신의 메시야 사역에 방해를 받는 일을 피하기 위함이다. ④ 당시 잘못된 메시야관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에 의해 자신이 정치적 메시야로 오인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 가운데 ①, ②가 본절의 특수한 상황과 관련된 이유라면 ③, ④는 앞으로 계속되는 함구령의 이유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예수의 함구령에 대해서는 눅 9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넘어뜨리고 나오되…상하지 아니한지라. - 병행구절인 막 1:26에서 마가는 단순히 그 사람이 경련을 일으켰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의사인 누가는 이 부분에서 '상하지 아니한지라'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의학적 관심을 가지고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하여튼 누가는 예수의 명령에 대한 사단의 즉각적인 순종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권세가 사단의 세계의 권세를 능가함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4:36 다 놀라. - 여기서 '놀라'에 해당되는 헬라어 '담보스'는 '두려움이 섞인 놀람'의 의미를 가진다(눅 5:9; 행 3:10). 즉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놀랐을 뿐 아니라, 귀신을 내어 쫓는 예수의 신적 능력 앞에서 또 다시 놀람과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병행 구절인 막 1:27과 비교하면, 마가가 '교훈'(디다케)이라는 용어를 쓴 반면 누가는 명령의 뜻이 강한 '말씀'(로고스)을 사용한다. 또 마가가 단순히 '권세'라는 말만 사용한 반면 누가는 '능력'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예수가 신적 권위를 가지고 이 모든 일을 행하셨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4:37 소문이…사방에 퍼지니라. - 본절은 예수가 행한 이적의 결과를 보여준다. 여기서 '소문'에 해당되는헬라어 '에코스'는 본래 해변가에서 파도가 칠 때 나는 소리를 가리킬 때 사용하던 말로 영어의 '에코'(메아리)는 이 말에서 파생됐다. 그리고 '퍼지니라'에 해당되는 헬라어 '엑세포류에토'는 미완료 중간태로서 계속 퍼져나가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예수의 소문은 결코 가버나움에 만 갇혀 있을 수 없었다. 곧 예수의 가르침과 행한 이적은 마치 메아리가 퍼져 나가듯 사람들의 입을 통해 사방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4:38 시몬의 집. - 본절과 다음절은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것과 관련된 기사이다. 이는 마 8:14-17; 막 1:29-31과 병행을 이룬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는 이전까지 베드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가 갑자기 베드로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는 누가가 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베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튼 병행구절인 막 1:29을 보면 마가는 예수가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갔다고 기록하며, '야고보와 요한'도 같이 동행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는 과감히 그 모든 것을 생략한 채 이야기의 핵심만 우리에게 전한다. 한편 요 1:44에 의하면 베드로의 고향은 벳세다였다. 그러나 본절은 문맥의 흐름상 베드로가 가버나움에 살았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로 보아 베드로는 벳세다에서 출생하여 가버나움으로 이주한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마 8:14,15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시몬의 장모. -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가 결혼한 사람이었던 것과 그가 장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베드로의 장모가 남편과 사별한 여인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하여튼 베드로는 사도가 되어 전도여행을 다닐 때 그의 부인을 데리고 다녔던 것으로 여겨진다(고전 9:5). 사제들에게 독신을 요구하는 로마 카톨릭에서 그들이 첫 교황으로 간주하는 베드로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은 큰 아이러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의 아내 이름은 컨콜디아(Concordia) 혹은 펠페튜아(Perpetua)로써 베드로보다 일찍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지고 있다(Eusebius).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 누가가 '중한 열병'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그의 의학적 관심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헬라시대의 의사 게일린(Galen)이 열병을 '중한' 병과 '가벼운' 병으로 구별한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Lenski). 하여간 여기서 '열병'(퓌레토)이란 고열과 탈수 현상을 동반하는 말라리아를 가리키는 말로, 고대 팔레스틴에서 자주 발생했던 풍토병인데, 당시에는 높은 사망률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붙들린지라'에 해당되는 '쉬네코메네'는 '어려움을 겪다, 억눌리다'의 뜻을 가진 의학 용어로, 원문에는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 쓰였는데 이는 시몬의 장모가 만성열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했음을 시사한다.
4:39 가까이 서서. - 이 말은 마치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는 모습으로 예수가 환자 가까이 서서 환자를 굽어보는 태도를 말한다. 즉 누가는 예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치시는 장면을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는 모습으로 묘사한 것이다.
열병을 꾸짖으신대. - 예수가 인격적인 존재를 대하듯이 열병을 꾸짖으셨다는 말에서 혹자는 귀신이 열병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다만 누가는 예수가 이 열병을 얼마나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치료하시는가를 생생하게 전하고자 한 것 같다.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 예수의 치료는 즉각적이고도 완전했다. 열병을 치유 받고 난 이후 그 여인은 힘이 없거나 그 후유증으로 고생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회복되었다. 다시 생기를 회복한 그녀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손님들을 접대하기 시작한다. 누가는 그녀가 단지 예수만 접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한 모든 자들을 접대한 사실을 기록하며 그녀의 치유가 완전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4:40 해질 적에. - 본절과 다음 절은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이적을 소개하고 있다. 이 기사는 마 8:16,17과 막 1:32-34과 병행을 이룬다. 한편 누가는 본절에서 '해질 적에'라는 시간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왔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유대교에서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적부터 토요일 해질 적까지를 말한다. 이 안식일 동안에는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되었고, 심지어 병자를 고치는 일까지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의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가 예수 앞으로 병자들을 데리고 나온 것이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 의사인 누가만이 예수가 환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병을 고쳐주었음을 지적한다. 즉 예수는 병자들을 한꺼번에 취급하시지 않고 개별적으로 만나 어루만져 주심으로 고쳐 주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각 개인을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애정을 보게 된다. 바로 이 깊은 애정이 병자들을 질병에서 나음을 입게 하는 이적을 낳았던 것이다.
4:41 여러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 많은 무리에게서 귀신이 나가면서 귀신들이 예수를 향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소리 지른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회당에서의 사건과 유사하다(34절). 즉 사악한 귀신들조차 이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여기서도 귀신들이 예수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34절 주석을 참조하라.
4:42 날이 밝으매…한적한 곳에 가시니. - 예수님께서는 많은 환자들을 일일이 치료해 주시고, 밤을 보내 신 후 날이 밝자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병행구절인 막 1:35을 보면 예수께서는 '새벽 오히려 미명에' 조용한 곳에 가셔서 기도를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는 많은 이적을 베푸신 후 다시 하나님과의 조용한 만남의 시간을 가지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능력과 권세가 나오는 원천이었다.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 누가는 예수를 찾으러 간 사람들이 '무리'였다고 기록한 반면, 마가는 '시몬과 그와 함께 있던 자들'이라고 말한다(막1:36). 아마 시몬이 먼저 나가서 예수를 찾았을 것이고, 곧 무리들이 시몬의 뒤를 따라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달려왔을 것이다. 막 1:37에서 예수님을 찾은 시몬이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이 사실을 정확히 뒷받침해 준다.
자기들에게서 … 만류하려 하매. - 예수를 찾는 일에 성공한 무리들은 예수를 단지 자신들만의 예수로 머물게 하고자 떠나지 못하게 붙든다. 본절의 '만류하려'에 해당되는 '카테이콘'은 '붙잡다', '제지하다', '방해하다'라는 뜻으로, 이는 무리들이 예수께서 떠나지 못하도록 강하게 제지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무리들이 이처럼 예수님을 떠나지 못하도록 만류한 것은 그들이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예수의 베푸시는 이적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막 1:37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이 단어는 눅 8:14; 14:9; 행 27:40에 나오는 단어로서 누가의 특수 표현이다. 또한 누가만이 예수께 왔던 무리들이 예수가 그들로부터 떠나시지 못하도록 붙들었다는 말을 기록하고 있다.
4:43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보내심을 입었노라. - 자신들과 함께 있기를 요구하는 군중들의 요구에 예수는 단호히 거절한다. 왜냐하면 그의 사역은 갈릴리 가버나움에만 국한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사역의 최종 목표는 온 세상의 복음화였던 것이다(마 28:19,20; 행 1:8). 한편 본절의 '하나님의 나라'(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라는 말은 본서에서 32회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 본절의 기록이 처음이다. 마태의 경우는 '천국' 혹은 '하늘나라'(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란 표현 양식을 사용하는데, 의미에 있어서는 누가와 동일하다. 그 개념과 의미에 대해서는 마 3:2 주석과 본서 서론 특별자료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참조하라.
4: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 본절은 회당을 중심으로 계속적으로 전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일부 사본에는 본절의 '갈릴리' 대신에 '유대'라고 기록되어 있다(시내 산, 바티칸, 예브라임 사본 등). 때문에 본절의 해석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유대'를 갈릴리와 유대 지역을 포함한 유대인이 거주하는 '전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광역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눅 7:17; 23:5; 행 10:37).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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