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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과 세례인 요한의 증거 및 예수의 초기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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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개관
요한복음은 예수가 우리의 구주라는 사실 또는 구주로서의 주의 사역을 소박하게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세 공관복음서와 달리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진리의 여러 측면 중 주께서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셨으면서도 태초부터 세워진 구속의 법을 성취하시고자 사람이 되셔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신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결국 절대적 신성(神性)을 가지고 구속사역을 수행하였던 예수는 우리의 절대적 구주 그리스도이시며 또한 그분이 주는 구원도 절대 완전함을 입증하고자 시도한 일종의 신학적 변증서이다.
이는 현대 성도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기독교 기본 진리의 반복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본서가 기록되던 시기, 곧 예수의 강림으로 이제 막 구약시대가 신약시대로 확장 전개되기 시작했고 나아가 부활 승천하신 예수의 사도들에 의하여 초대교회가 건립되던 단계에 있던 A.D. 1세기 무렵에는 이 기본 진리의 정립은 매우 시급하고도 어려운 문제였었다. 먼저 당시 구약에만 익숙하던 유대인들(Jews)에게는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뿐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Trinitty)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더불어 예수의 구속사역을 중심으로 태초부터 종말까지 신 . 구약 구속사가 나누어 전개된다는 사실에 대한 충분한 계시가 없었다. 그리하여 주 예수는 성자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 및 성령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서 결국 주님을 믿는 것은 지금까지 알고 믿어 왔던 여호와 하나님 곧 성부 하나님을 믿던 신앙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같은 하나님을 더욱 온전히 믿는 것임이 확인되어야 했다. 그리고 주님의 구속사역은 다른 새로운 그 무엇이 아니라 지금껏 구약에서는 예표와 예언으로만 주어져 왔던 우리의 그리스도로서의 구속사역의 성취이며 이제 주님은 이를 새로이 확장시켜 당신의 구속사역의 최종 성취인 천국 구원에 대한 새 약속 곧 신약을 새로 주셨는 바 신약은 구약계시와 연속성을 가진 더욱 확장된 진리임이 입증되어야 했다. 또한 구약적 배경이 없는 대신 세속 사상에 물든 당시의 이방인(Pagan) 출신 성도들에게는 그 무렵 풍미하던 소위 헬라 영지주의(Gnosticism) 철학의 주장처럼 정신과 물질, 그리고 신과 세상은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서 신은 결국 육체를 지닐 수 없다는 생각에서 우리의 구속주가 되시기 위하여 성자 하나님으로서 전대 신성을 가지셨으면서도 동시에 인성을 취하신 주님의 신인양성(神人兩性) 중 어느 한 쪽을 부인하거나 아예 주님이 구주라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일은 사실과 다름이 입증되어야 했다.
이런 요한복음의 첫 장인 본장은 크게 다음 3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 1-18절은 본서 전체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세부 내용의 전개에 앞서 본서 전체의 신학적 주제를 매우 간결하게 압축 요약 제시하고 있다. 즉 피조물이요 죄로 오염된 이 세상과 대조되는 예수의 신성과 선재성(1-5절), 이러한 예수께서 태초에 세워진 구속의 법에 따라 죄인된 우리를 위해 대속 희생을 치루시고자 초림하셨을 때, 세례인 요한의 증거와 예수 자신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 곧 구약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분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배척한 사실(6-11절), 구약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척으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확장 전파되어 이방인들도 영적 선민이 되게 된 사실(12,13절). 끝으로 성자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인하여 택한 백성들이 은혜를 누리게 된 사실을 찬양하는(14-18절) 내용이 매우 간결하지만 마치 하나님의 사자가 전 우주를 향하여 선포하듯이 장중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는 요한복음 전체 주제의 요약으로서 구속사의 주체이신 예수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다는 주의 특이한 존재에 대한 계시인 동시에 구약 이스라엘 중심에서 신약의 세계 만민에로의 구속의 복음의 확장이라는 구속사의 전개 과정에 대한 심오한 계시까지 압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의 구속사적 의의는 구속사 전반과 관련되어 있는바 여기서 다 개관할 수는 없고 구속사의 주체로서의 예수의 독특한 존재가 갖는 의미는 본장 개관 말미에 그리고 구속사의 전개가 구약 이스라엘 중심에서 세계 만민으로 확장된 과정의 의의는 롬 11장 연구 자료에서 각각 다루기로 한다.
한편 중반부 19-34절은 앞서 서론에서 압축 제시한 내용들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 하나씩 증거해 나가는 1:19-12:50까지의 긴 말씀의 첫 단락이다. 그 내용은 세례인 요한이, 본래 성자 하나님이시나 우리의 구속주가 되시고자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 예수의 등장을 사전에 예고하였으며(19-28절) 또한 예수께서 이제 공생애를 개시하시기 위한 첫 단계로 세례인 요한의 증언을 받고자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직접 나아오시자 주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주를 바로 자신이 전에 예언하던 그분이었음을 공개적으로 증언하였음을 보도한 내용(29-34절)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는 예수가 본래 절대 신성을 가지신 제 2위 성자이며 동시에 성육신하여 우리의 절대 유일의 그리스도 구주가 되셨음을 구약과 땅을 대표하는 세례인 요한(John, the Baptist)도 그리고 하늘에 계시는 성부 하나님도 입증해 주셨음을 강조하는 단락이다.
후반부 35-51절은 A.D. 27년경 공생애 초기, 예수께서 유대 땅에서 세례인 요한과 만나신 후 그의 공생애의 대부분을 보낼 갈릴리 지역으로 떠나시기 직전에 처음으로 안드레, 요한으로 추정되는 다른 제자, 그리고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 등을 제자들로 부르신 사실과 그 제자들의 고백, 곧 예수가 메시야이시며(41절)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49절)이시라고 했던 고백들과 아울러 예수께서도 간접적으로 자신이 절대 신성을 가지신 그리스도이심을 밝힌 사실(51절)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단락도 결국 예수를 직접 목격한 당사자들은 곧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할 수 있었으며 예수께서도 직접 당신이 성자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셨음을 총 생애 초기부터 밝혔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상의 본장에서는 물론 요한복음은 전체를 통하여 전 구속사의 주체이신 예수는 신인 양성을 가지신 유일한 존재임이 거듭 강조되는바 이것이 갖는 다음의 네 가지 구속사적 의의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첫째 우리 구주 예수는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절대 초월성(超越性)을 가지셨다는 사실이다. 둘째 이런 구주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인류의 조상 아담의 타락에서 시작하여 세상 끝 날까지 인간의 불신이나 사탄의 저항에 전혀 동요됨 없이 계속된다는 절대 연속성(連續性)이다. 셋째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에 따라 필연적으로 신인 양성을 가지신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신 분은 성자 하나님이셨다가 사람으로 나신 예수밖에 없다는 절대 유일성(唯一性)이다. 끝으로 절대 초월자로서 절대 연속되는 구속사의 섭리에 따라 절대 유일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안에서 우리의 구원은 절대 완전성(完全性)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와 보라(Come and See)라고 초청하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선재성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세례 요한의 그리스도 증거
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배척받으신 그리스도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적 신민된 자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은혜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리스도의 선구자 세례 요한의 사역
19 ○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그리스도의 수세
29 ○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그리스도의 처음 제자
35 ○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43 ○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본문 & 자료 노트
주요 주제 1:1-18. 로고스의 이해
본문의 '말씀'에 해당하는 원어 '로고스'는 헬라 사상의 배경에서 나온 용어이다. 그러나 70인역(LXX) 구약 성경이나 신약 성경의 역, 저자들은 이 용어를 헬라어에서의 사전적 용례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관련 성경 사상을 나타내는 용어로 차용(借用)하였다. 따라서 성경에서의 로고스의 개념은 헬라어에서의 로고스의 개념과 사뭇 다르다. 이는 근본 사상을 달리 하는 두 집단이 한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사상을 표출할 때 발생하는 보편적 현상이다. 특히 사도 요한은 매우 독특한 기독론적 관점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용어의 헬라적 용례와 아울러 성경적 용례, 그리고 사도 요한이 주를 로고스로 칭했을 때의 참 의미까지 포괄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헬라어에서의 로고스 개념:
헬라인의 로고스(Logos)관은 근본적으로 우주는 저 혼자 자연히 존재하며 영속하는 것이라는 사상에 입각한 것으로서 이처럼 자연 발생한 우주와 역사 속에 보편적으로 내재한 법(法) 또는 신적 정신, 또는 원리(原理)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로고스라고 생각하였다.
한편 이런 로고스가 인간의 영혼의 이성에도 들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과 그를 반영하고 표현하는 인간의 말에도 로고스가 들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주 만물 속에 보편적으로 내재해 있는 법 또는 원리인 로고스에 의하여 세계는 통일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또 로고스를 통하여 인간은 우주의 신적 원리 또는 정신(精神)과 교감(交感)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로 볼 때 헬라어에서의 로고스는 자연 발생론적 우주관 및 범신론 사상에서 우러나온 개념임을 알 수 있다.
2. 성경에서의 로고스 일반적 개념
앞서 밝힌 대로 헬라인들은 자연 발생된 우주 만물들에 범신론적으로 깃든 우주의 이법, 원리, 이성 등이 로고스라고 보았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 초월자(絶對 超越者)로서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그것이 조화를 이루게 경륜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주권에서 우러나온 계시의 말씀과 우주의 운행 속에 담긴 조화로운 섭리의 원리를 로고스라 칭한다. 즉 로고스가 저 스스로 우주 전체에 편재한 절대적 존재 자체가 아니라 절대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의지와 주권을 선도하는 계시 또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의 내용일 뿐이란 것이다.
이처럼 헬라어에서와 성경에서의 로고스의 개념이 전혀 다르지만 일단 그것이 스스로 있는 것이든, 절대 초월자의 의지를 표현하는 도구이든지 간에 그것이 결과적으로 우주 만물과 인간 영혼에게 고루 반영되어 있고 또 전달되고 있다고 생각한 점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에 이 용어가 성경에서 차용되었다.
① 구약의 개념:
헬라어 로고스에 해당하는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 '다바르', 곧 '말씀'은 대체로 절대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하나님의 언어 행위를 의미했다(창 44:18; 호 1:1).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 창조의 동인(動因)이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7)라고 했다. 또한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사 55:11)라고 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과 의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들은 그것을 자신의 생각에 따라 임의로 변경하여 전할 수 없었으며 오직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로 주어진 계시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어야 했다.
② 신약의 개념:
공관 복음에서 로고스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곧 복음의 말씀을 가리켰다(마 7:24, 28; 13:19; 눅 5:1). 한편 사도행전이나 서신서 등에서도 로고스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근간으로 하는 복음의 메시지 및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켰다(살후 3:1; 딤전 4:5; 요일 2:5).
그리고 사도들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말씀'이라 표현하기도 했다(눅 1:2,4; 행 2:41; 4:4; 6:2,4,7). 이로 볼 때 신약에서의 로고스 개념도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절대 초월자이신 예수님의 언어 행위 및 거기에 담긴 메시지를 가리켰음을 알 수 있다.
3.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
한편 본문에서 사도 요한(John, the Apostle)은 직접적으로 예수를 로고스로 묘사하고 있다. 또 문자 그대로의 표현은 예수가 로고스 곧 말씀이었다가 성육신 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문자 그대로 예수가 성육신 이전에는 말(Word) 또는 우주의 원리의 형태로 존재하다가 육신을 입은 존재가 되었다는 마치 이방 신화 같은 신비적 사상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이는 다만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성육신하여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 예수의 지위와 사역을 나타내기 위한 문학적 표현이었다. 앞서 '성경에서의 로고스 개념' 부분에서 밝힌대로 성경은 로고스를 절대 초월사로서 우주 만물을 질서와 조화 있게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나아가 인간 구원의 원리까지 세우신 하나님의 의지와 주권을 반영한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계시 및 역사와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자체에 담긴 원리로 보고 있다. 이에 사도 요한은 예수도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그런 로고스의 주체이신 성삼위 일체(Hely Trinity)중 한 분이셨으며 나아가 성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 계시의 핵심이 바로 성육신한 성자의 대속(代贖)을 통한 구속의 원리였는바 예수를 로고스로 표현한 것이다. 이를 보다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
① 로고스의 주체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는 인자이신 동시에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신바 절대 초월자의 한 분으로서 우주와 역사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또 우주와 역사의 원리를 입법하신 분이시다. 또한 그에 대한 주권과 의지를 말씀으로 선포하시는 주체의 한 분이시다.
② 로고스의 전달자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는 성육신 이전에도 여호와의 사자로서 하나님의 주요 계시의 전달자의 사역(왕하 1장 자료노트 참조)을 하였거니와 결정적으로는 성육신하셔서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를 복음으로 당신의 제자들에게 전달하셨다.
③ 로고스 자체로서의 그리스도: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말씀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인의 구속이다. 이런 의미에서, 즉 복음의 실체라는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로고스(Logos) 그 자체이시다.
이상의 세 의미에서 주님은 전 우주와 구원의 원리를 세우신 로고스의 근원이시며 그 로고스의 전달자이시며 로고스 그 자체이시다. 실로 주님은 우리의 로고스이시다.
원어연구-1:5 깨닫지 못하더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우 카텔라벤'이다. 여기서 '우'는 부정사(否定詞)로서 아니다'(not)라는 뜻이다. 그리고 '카텔라벤'은 '카탈람바노'의 제 2부정 과거 3인칭 단수이다. '카탈람바노'는 잡다'(막 9:18; 빌 3:12), '살피다'(행 25:25), '좇다'(롬 9:30), '알다'(행 4:13; 엡 3:18)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또 '카탈람바노'는 원래 '~을 향하여'(towards)라는 뜻의 전치사 '카타'( )와 '얻다'(마 7:8; 눅 5:5) 또는 '영접하다'(요 13:20) 등의 의미를 지닌 '람바노'의 합성어로서 어떤 대상을 취하여 얻거나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 따라서 본절에 나타난바 '깨닫지 못하더라'의 의미는 어둠에 해당하는 세상이 빛에 상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살펴서 알지도 아니하였고 붙잡아 영접지도 아니하였으며 그를 따르지도 아니하였다'는 뜻이 된다. 이 번역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으나 아무도 그를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한 사실과 연관이 있다.
한편, 공동 번역과 RSV는 본절의 '카텔라벤'의 의미를 '이기다'(overcome), '압도하다'(over power)라는 뜻으로 보고 전체적으로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has not over come It)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카탈람바노'의 의미 가운데 '잡다'(seize)라는 뜻을 반드시 어떤 물건을 취하는 것만 뜻하지 않고 '제어하다'(control)라는 의미로 이해한 결과 그처럼 번역한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본절은 '빛은 항상 어둠을 이긴다'는 빛의 속성을 표현한 것이 된다. 이는 사도요한이 요한복음 서두에서 이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둠의 사탄의 세력을 필연코 이기실 것이라는 사실을 먼저 선포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위의 두 가지 변역을 모두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도표-1:14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12대 기사
1.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으신(요 17:22)
2. 창세 전부터 가지셨던 것임(요 17:5)
3. 구약 시대 선지자들에게 보이심(요 12:41)
4. 성육신 하시어 인간 가운데서 나타내심(요 1:14)
5. 스스로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으심(요 8:50)
6.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심(히 2:9)
7. 표적으로써 나타내심(요 2:11)
8. 변화 산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심(눅 9:32)
9. 성도들을 자신의 영광에 참여케 하심(골 3:4)
10. 영광 가운데서 승천하심(딤전 7:16)
11. 하늘에서 영광을 받으심(계 5:12)
12. 영광 중에 재림하실 것임(마 25:31)
도표-1:19-51 예수의 공생애 초기의 6일과 후기의 6일의 사역 비교
본서 저자는 1:19-2:11에서는 예수의 공생애 초기의 6일의 사역을, 그리고 12:1-20:23에서는 공생애 후기의 6일의 사역을 기록하여 구조적으로 서로 대칭시켜 주고 있다. 즉 전자는 세례인 요한이 무리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한 날로부터 연속되는 5일간의 예수 행적을 기록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람들의 간접적인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후자는 예수께서 성 고난주간(Holy Passion week)이 시작되기 하루 전인 토요일과 고난주간 첫 날인 일요일, 그리고 고난주간 마지막 2일 및 부활하신 날, 이렇게 5일간의 예수 행적을 기록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예수 자신의 직접적인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양자가 다 1일간의 행적은 기록하지 않고 곧바로 사흘 후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장사되어 무덤에 계신 날을 염두에 둔 것으로 추측된다.
초기의 6일 | 후기의 6일 | |
1일 | 세례인 요한의 그리스도 증거 개시(1:19-28) | 마리아의 도유사건을 통한 예수 자신의 십자가 수난 증거(12:1-11) |
2일 | 세례인 요한과 성부, 성령의 그리스도 증거(1:29-34) | 예수의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12:12-50) |
3일 |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한 첫 제자들 (1:35-42) | 성만찬을 통한 예수와 12제자의 교제(13장) |
4일 | 나다나엘의 고백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1:43-51) | 십자가의 푯말-'유대인의 왕'(18:1-19:37) |
5일 | 기록이 없음 | 장사되어 사흘 동안 무덤에 계심(19:38-42) |
6일 | 사흘 되던 날 -가나에서 첫 표적을 보이심(2:1-11) | '사흘 되던 날'-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심(20장) |
보감-1:40-42 안드레를 통해 본 신앙의 3단계
1 | 세례인 요한에게 예수를 들음(40절) |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남(롬 10:17) | |
2 |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함(41절) |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믿음이 믿으면 구원 얻음(롬 10:9) | |
3 | 형제에게 전도함(42절) |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은 먼저 믿은 자의 도리임(롬 10:14,15) |
인물 연구-1:45-51, 나다나엘
본서 본장 연구 자료 참조.
1:1-5 예수의 신성과 선재성
주지하다시피 사 복음서는 예수께서 우리 구주 되시는 진리의 여러 측면을 고유한 관점에서 각각 나누어 강조하고 있다. 이런 사복음서 각각의 독특한 관점은 사 복음서가 개시되는 도입부에 강력히 반영되어 있다. 예수를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며 고난 받으신 종으로 묘사한 마가는 거두절미하고 예수의 사역 개시 장면에서부터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였다. 반면, 예수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임을 제시하는 마태는 메시야의 혈통으로 구약에서 예언된 아브라함과 다윗 가문의 혈통을 타고 예수가 오셨음을 강조하는 예수의 족보를 기술하는 것으로 복음서 서두를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주께서 성육신하시어 우리와 같은 인자(人子)가 되셨음을 강조하는 누가는 자신의 철저한 고증을 거친 복음서 기술 방향과 아울러 모든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를 제시함으로써 예수에 대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가 가진 여러 속성 중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신성을 강조하는 요한복음은 우주의 역사를 초월한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만유를 초월하여 계시던 예수의 신적 존재되심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복음서를 시작한다.
요한복음의 첫 단락으로서 다음 단락과 더불어 요한복음서 전체의 서론이라 할 수 있는 본 단락이 바로 이런 신성(神性)을 가지신 예수의 역사를 초월한 선재성(先在性)을 강조함으로써 결국 이하 제시될 예수의 복음 사역이 인간 구원을 위해 신적 권위로 행하신 대 우주적 사역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예수를 성자 하나님으로 호칭하지 않고 말씀으로 묘사한 것은 문자 그대로 예수가 성육신 이전에는 말씀의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성육신(成肉身) 이전의 단계에서 여러 가지 사역을 하시던 중 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개자로서, 특히 계시의 전달자로서 활약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즉 예수를 말씀으로 묘사한 것은 예수가 성육신하시기 이전에는 음성으로만, 또는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 원어 로고스(logos)가 가진 문자적 뜻대로 전 우주에 내재한 신적 이성(理性)의 형태로만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부단히 말씀의 사역을 통하여 이 세상과 접촉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말씀 안의 생명 그리고 생명이 발산하는 빛을 강조한 것은 죄악 된 이 세상의 예수의 생명과 빛을 대조시키기 위함이 있다.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이 구절은 의도적으로 창 1:1과 대칭을 이루는 표현으로 기록된 것이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본서 20:31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 것'과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함'이다. 즉 본서는 본래 성자(택자)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성육신 하사 구속사역을 성취하신 예수 안에서만 구원얻을 수 있음을 강조한 책이다. 그러한 본서의 첫 머리를 여는 첫 장 첫 절에서 저자 요한은 창세기가 태초에 하나님에 의한 천지의 창조를 보여주었듯이 이미 그 이전부터 우리 주 예수의 존재가 있었음을 강조하고자 의도적으로 창 1:1과 대칭되는 표현으로 그의 복음서를 개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창세기가 천지 창조의 시점에서 단지 만물의 근원만을 설명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이미 인간이 타락하고 난 후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이를 해결하고자 주께서 구속주로 오셔서 구속사역을 성취한 시점에서 만물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명함으로 죄인이 주를 믿고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구속의 역사가 이미 태초 그 이전부터 존재하신 주님에 의하여 시작된 것임을 강력히 암시하면서, 즉 구속사의 초월적 근원을 강조하면서 복음서를 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나타내기 위해 요한복음은 창 1:1과 의도적으로 유사한 문체로 복음서 기록을 시작한 것이다. 태초에. - 창 1:1에서도 볼 수 있는 단어이나 이 둘은 그 의미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다. 즉 창 1:1의 히브리어 '태초'(חישׁאדנ. 베레쉬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포함한 이 세상의 시작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전 우주 공간은 물론 시간도 시작된 그 시점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서의 헬라어 '태초'(엔 아르케)는 창 1장에서 창조된 '시간'의 개념을 초월한 의미로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기 이전'이라는 뜻이다. 물론 여기 '태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케'도 사전적으로는 단순히 시초, 원점을 가리키지만 2절에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같이 있었고 또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하였으니 여기서의 '태초는 만물이 있기 전의 영원이라'는 뜻이다. 자연 자체는 그 스스로 존재하며 다만 그 안의 만물들이 개별적으로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 한다는 우주관 또는 존재론을 가졌던 헬라인이 사용했던 언어에는 영원 이전이라는 뜻을 적절히 나타낼 단어가 없었기 때문에 요한은 일단 '아르케'라는 단어를 쓰고 그것과 만물과의 관계를 묘사함으로써 결국 말씀이 영원 전에 이미 있었음을 전달한 것이다. 이처럼 본서의 저자 요한은 헬라어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되 그 틀에 매이지는 않고 사용했는바 우리는 요한이 사용한 단어 자체의 사전적 의미를 넘어 그것이 각 문맥에서 지칭하고 있는 구체적 대상과 내용의 의미 발견에 더욱 노력하여야 한다. 이런 경향은 특히 다음 설명할 '말씀'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말씀. - 말씀의 원어 로고스는 헬라 철학에서 흔히 쓰이던 철학적 용어로서 헬라인들에게는 이 말이 '이성(理性), '현상계 안에 내재해 있는 만물의 원리' 또는 이성에 근거한 '언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원래의 헬라적 우주관 곧 앞서 말한대로 우주는 저 홀로 영원하며 다만 거기에 비인격적인 우주의 이법(理法)이 편재해 있다는 범신론적 우주관에 입각한 헬라 사상을 반영하여 갖는 원래의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시고 또 우주와 인생의 법을 세우시고 이를 계시로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즉 천지 만물 속에 자연적으로 내재되어 있으며 인간의 사고와 말속에 반영되어 있는 비인격적 원리, 이성 또는 논리로서가 아니라 절대 초월자로서 만물의 질서를 직접 정하시고 또한 이를 인간에게 선포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적, 인격적 선포로서의 말씀의 뜻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는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에서의 이 헬라어 로고스의 용례(시 33:6; 147:15; 148:8; 사 2:1; 렘 26:1)와 처음부터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에서의 용례에서 잘 입증된다. 즉 구약에서 이 단어는 비인격적으로 원래 만물 속에 내재한 우주의 원리로서가 아니라 그런 원리를 직접 제정하신 인격적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계시란 뜻과(사 2:1; 렘 26:1) 더불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나타내는(시 147:15; 148 8) 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물론 헬라사상과 성경사상이 그 우주관 또는 존재론에서는 차이가 있어서 헬라인들은 로고스가 만물 안에 스스로 내재한 원리라고 생각한 반면, 성경은 그것은 그 자체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만물 속에 있게 하신 조화가 질서이며 또 그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의 반영 또는 선포라고 생각하여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만물 속에는 조화와 질서, 이성과 계시가 내재하여 있다고 보는 점에서는 일치하였기 때문에 로고스라는 헬라 단어가 제한적 의미에서 변용되어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요한은 그 '말씀을 창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제는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 곧 제 2위 성자 하나님의 지위와 사역을 직접 묘사하는 말로 사용했다(요 1:4; 요일 1:1; 계 19:13). 즉 요한은 예수께서 문자 그대로 말씀이라는 신비한 형태로 존재하시다가 육신을 입었다는 신비주의적 사상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먼저는 우주 만물의 질서와 조화를 직접 세우신 삼위 하나님 중 한 분이시며 또한 구약 시대에도 성부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자로서의 사역을 주로 감당하셨으며 결정적으로는 이제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사 하나님의 구속의 복음을 전하는 동시에 그 복음의 실체가 되신 주의 사역을 '말씀'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구속의 뜻을 성육신을 통해 세상에 결정적으로 드러내셨기 때문에 말씀이라 하였으며(Origen) 동시에 성육신하여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는 하나님의 뜻의 결정적 표현이시기에(Calvin) 말씀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로고스, 즉 말씀이 창조 전에 있었음을 들어 로고스의 영원성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존재임을 통해 인격성을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라는 표현으로서 말씀의 신성을 부각시킴으로써 결국 우리에게 살아있는 절대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역할을 하시는 동시에 그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기도 한 예수의 지위와 사역을 보여 준다(본장 자료 노트, '로고스의 이해' 참조).
계시니라. - '계시다'는 영어의 be동사처럼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 '에이미'의 미완료 과거형 '엔'이다. 이러한 시제는 말씀이 태초에 이미 계셨고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계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말씀이 '태초'에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태초'라는 말의 의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말씀'으로서의 예수가 창조 이전에 있었으므로 절대 피조물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이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과 같은 선재(先在)하는 창조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알렉산드리아의 바우칼리스(Baukalis) 교회의 사제 아리우스(Arius)는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예수를 단지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우월적인 존재로 이해함으로써 니케아 종교회의(A.D. 325)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골 1:17에서도 보여지는 바와 같이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피조된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그에 의해 만물이 만들어졌음은 성경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진리이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하나님과 함께'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톤 데온'에서 '함께'라는 의미의 전치사 '프로스'는 일차적으로 '~에로'(눅 23:12), '~가까이'(막 5:11)의 뜻이 있으며 본절에서도 '친밀한 교제'란 암시적 의미를 갖고 있다(Westcott, Zahn). 따라서 여기서 이 단어는 성부 하나님과는 분명히 독립된 개체이나 성부 하나님에게로 부단히 접근하며 인격적 교류를 나누는 말씀으로서의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를 잘 설명해 주며, 이는 더 나아가 그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에서 큰 기쁨을 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요일 1:2). 또한 성자되신 로고스가 성부 하나님과 영원 전부터 함께 계신다는 것은 동등한 지위로 계심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까지 포함하여 성삼위 하나님의 존재의 특성, 즉 하나님께서는 성부 ․ 성자 ․ 성령으로 지칭되는 독립적 개체로서의 삼위(三位)로 계시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일한 일체(-修)시라는 '삼위일체' 개념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Calvin).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원문의 '하나님'(데오스)의 단어 앞에는 정관사 '호'가 없다. 따라서 여기의 하나님은 유일신 하나님이 아니라 일반적인 신적 존재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헬라어 문법상 '말씀' 즉 로고스'가 주어이고 '하나님' 즉 '데오스'가 술어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적합하지 않다. 즉 헬라어에서 술어로 사용되는 명사는 많은 경우에 정관사를 생략하더라도 주어의 관사적 의미가 술어의 의미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말씀과 유일신 하나님은 동일한 분이란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은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 주는 성경상 가장 분명한 표현이다. 즉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요한복음의 기독론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요한은 말씀과 하나님이 다른 이름을 가진 존재로 규정되는 동시에 이 두 분이 같다고 표현함으로써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 실재적 개체이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 양식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이처럼 1절에서는 말씀에 대해 태초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냄으로써 말씀이신 성자의 선재적이며 초 시간적인 면모를,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나타냄으로써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냄으로써 본질상 하나님이심과 같은 성자의 성격과 관련된 가장 근본적인 세 가지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즉 본절의 묘사는 각각 말씀이 영원한 존재이며, 교제를 할 수 있는 인격체이고, 신성을 가지고 계신다는 중요한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성경에 나타나는 유대 문학에서는 반복을 통한 강조법이 많이 사용된다. 본문에서도 1절에 이어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을 반복시키고 있다. 즉 본절은 1절의 내용을 그대로 반복함으로 말씀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 번 강조하여 이하에서 서술할 내용의 근거로 삼는 것이다. 이처럼 본절은 말씀이 태초에 계셨음을 확인함으로 말씀이 창조 사역에 참여하는 내용이 기록된 3절을 준비하고 있다. 즉 '말씀'으로 번역된 '로고스'가 헬라사상에서는 창조된 세계 안에 내재된 원리, 또는 이성(理性)으로 생각되어 피조세계의 범주에 속하게 되는데 여기서 저자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창조의 주체가 됨을 말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말씀의 선재(先在)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요 8장 자료노트,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보다 참조하라.
1:3 만물이. - 이 용어가 정관사와 더불어 쓰이면 '그 만물'로 번역되어 한정된 시점인 '현재'에 존재하는 만물만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관사 없이 사용되어(판타) 과거 ․ 현재 ․ 미래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 역시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헬라 자연 철학에서도 만물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이 있어 왔다. 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Thames), 공기로부터 생성되었다는 주장(Anaxibenes), 빛과 어둠이 만물의 시작이라는 주장(rarmenides)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 세계의 시작은 예수님에 의해서였고, 그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도 그가 만드시고 다스리신다고 주장함으로써 본서의 독자가 되는 당시 사람들이 다양하게 주장했던 만물 기원론이 수정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그로 말미암아, 원문을 직역하면 '그를 통하여'(디 아우투)이다. 이는 만물을 창조함에 있어 성부가 주관자되시고(고전 8:6) 성자가 그 대리자 되심을 보여 준다(골 1:15,16). 이처럼 성자 그리스도는 창조의 중보자가 되실 뿐 아니라 재창조 사역인 구원에 있어서도 중보자가 되신다. 즉 구원 역시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요 10:9: 롬 5:1). 이것이 요한복음의 주제라 할 수 있다(요 20:31).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 1절에 있는 말씀에 있어서는 존재의 동사(be) '에이미'의 미완료 과거형인 '엔'을 사용하여 영원 전부터 말씀이 계속 존재해 왔음을 표현하였으나, 본절에서 '만물'은 그와 대조적으로 '~이 된다'(become)라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기노마이'의 3인칭 단수 자거형 '에게네토'를 사용하여 과거부터 스스로 존재해 왔던 말씀과는 다르게 창조된 피조물임을 설명해 준다. 이처럼 요한은 성경의 주인공이며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께서 다른 피조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성을 지니고 계심을 거듭 강조한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2절이 1절의 내용을 반복해서 강조하였다면 이 문장은 한 절 안에서 위에 서술한 내용을 다시 한 번 반복하여 모든 만물이 그에 의해 지어졌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반복을 통해 어떤 사건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은 히브리 문학의 독특한 문학적 기교일 뿐 아니라 사도 요한의 문장 기교이기도 하다(Dods).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여기에 사용된 '생명'이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즉 신약 성경에서 '생명'이라고 번역된 낱말은 원어에 있어서 두 가지인데, '비오스'와 '조에'가 그것이다. 여기서 전자는 보통의 생활이나 생애를 뜻하고 후자는 사도 요한이 잘 사용하는 말로서 '죽음'(사나토스)의 반대어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저자가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런 죽음과 대비된 '생명'을 말한다. 또한 신약에서는 많은 경우에 이 '생명'과 '영원한'(아이오니오스)이라는 형용사가 함께 쓰여 '영생'이란 뜻으로 사용된다(요 3:15,16; 요일 5:12). 그러나 본 절과 같이 헬라어 '아이오니오스'가 사용되지 않고 단순히 '조에'만으로서도 내용상 '영생'을 뜻하는 경우도 많다(요 14:6;17:3). 한편 성도가 누리는 '생명' 또는 '영생'은 단순히 '살아있음'을 의미하지 않고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계속적으로 누리는 가장 높고 가장 고상한 활력에 찬 영적 도덕적 생명을 뜻한다(Vincent, Trench, Thayer). 본절에서는 그러한 생명이 오직 '그'(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선언함으로써 그리스도만이 인간이 범죄함으로 쓸어버린 영적 생명의 회복자임을 밝히고 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여기서 '빛'(포스)은 달빛이나 별빛과 같은 반사광, 혹은 등불이나 횃불의 빛과 같은 인위적인 빛이 아니라 태양광선과 같은 자체적으로 발산하는 빛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즉 본문에선 이렇듯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사람들의 빛'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예수가 사람들의 빛”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해설이 있는 바 헹스텐버그(Hengstenberg)는 성경 안에서 '빛'과 '구원'이 많이 연결지어 나타나는 것(요 8:12; 9:5; 12:49)을 보고 빛과 구원을 동등시하여 사람들의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빛으로 보았다. 또한 웨스트콧(Westcott)은 더 나아가 '전통에 의하면 빛이란 메시야의 별명의 하나'라고 주장하여 '사람들의 빛' 즉 메시야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할 구세주이며 여기서의 '말씀'의 사역 역시 구원으로 보았다. 또한 도드(Dods)는 '로고스가 사람들의 빛 되는 것은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로고스 안에 있는 생명을 통해서이다'라고 주장한다. 고뎃(Godet)은 이러한 여러 입장을 종합하여 '로고스는 빛이시다. 그러나 그가 항상 빛 되시는 것은 생명의 매개를 통해서이다'라고 말한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을 죽음의 세계인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생명의 세계인 빛 가운데의 삶을 살게 하므로 '사람들의 빛'인 것이다. 한편 4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소개하는데 사용된 '생명'과 '빛'은 요한의 기독론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그 횟수에 있어서도 본서에서 빛은 23회나 나타나며 생명은 54회 사용되어 그리스도의 본질적 사역이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구원 사역임을 밝힌다.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 빛은 그 자체에 어두움에 대비되는 속성을 갖고 있어 비추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와 같이 빛이 외부에서 비추는 것이 아니다. 원어를 통해 볼 때 본문의 의미는 '빛이 어두움 안에서 비추고 있다'(토 포스 엔 테 스코티아 파이네이)는 뜻으로 이는 죄악된 세상 안으로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의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생명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죄악된 어둠의 세상 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비추다'는 동사를 현재형으로(파이노) 사용함으로 빛이 과거에 비취고 있었을 뿐 아니라 아직도 비추고 있다는 의미를 전해준다(Meyer). 한편 여기서 빛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나 이와는 별개로 말씀이 계속 선포됨이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생명을 전해주는 말씀의 빛이 구약시대에는 여러 선지자를 통하여(벧전 1:10) 비추었고, 신약 특히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후에는 성령을 통하여(요 16:13) 어두운 세상을 계속적으로 비추는 것이 그것이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여기서 어둠이란 죄와 불신앙으로 어두워진 인류를 가리킨다. 그리고 '깨닫는다'의 원어 '카텔라벤'은 일반적으로 나쁜 의도로 '붙잡는다', '억압하다'(Lange) 등과 '극복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만약 이런 의미를 취한다면 본문은 '어두움이 이기지 못하더라'로 해석되어 결코 죄악이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억압하지 못한다 라는 것을 나타내게 된다(West). 그러나 여기서는 이 단어를 개역 성경이나 일반적인 번역본이 취하는 바와 같이 '깨닫는다', '이해하다' 등의 고전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본문은 빛이 비추었음에도 깨닫지 조차 못하는 빛에 대한 어둠의 무지한 반응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이러한 사례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실제 사역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요 7:5). 한편 헬라사상은 이원론이 그 특징을 이루는데 '빛'과 '어둠'은 세상을 크게 대별(大別)하는 도구이다. 이때 빛은 생명을 의미하고, 어둠은 주로 죽음, 악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와 조금 다르게 '빛'이란 영적인 생명을 품고 계신 그리스도를, '어두움'이란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 있는 세상을 가리키고 있다.
1:6-18 예수의 성육신과 증거자 요한의 등장
예수의 신적 선재성을 말한 앞 단락에 이어 본 단락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임하신, 즉 초월적 신성을 가진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인성을 취하신 사실에 관한 보도이다. 다른 복음서들이 예수의 성육신 탄생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데 치중했다면 요한복음은 예수의 선구자 세례인 요한의 등장(6-8절)과 성육신하신 사건의 신학적 의의와 목적 그리고 성육신하신 주님에 대한 세상의 전반적 반응(9-14절)을 함께 암시적이고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세례인 요한이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여 증거하면서 특히 주의 본성, 곧 제 2위 성자로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사실을 증거하였음을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다(15-18절). 이는 결국 앞 단락에서도 밝혔듯이 이제 예수의 복음 사역을 보도하기 전에 예수의 신성(神性)을 강조함으로써 향후 전개될 주의 사역이 택한 모든 성도의 구원을 위해 신적 귄위로 행해진 대 우주적 사역임을 미리 밝혀두기 위해서였다.
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 지금까지는 창조 전부터 선재하셨으며 천지를 창조하시고 생명과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소개를 개괄적으로 하였으나, 여기서 저자는 이제 다른 각도에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다. 즉 요한은 과거 팔레스틴 땅에서 회개를 선포했던 세례인 요한의 사역이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임을 밝힘으로써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는 요한과 예수님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차이를 보여줌으로써 예수의 신성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 차이를 살펴보면 첫째는 존재의 성격인데, 요한의 존재 근거를 밝히는 본절의 '났으니'는 부정과거형 '에게네토'(되었음, became)를 사용하여 과거 어느 시점에 피조된 존재임을 말해주나, 1절에서 말씀의 존재 양식을 밝히는 '계시니라'는 미완료형 '엔'(있는, being)을 사용하여 피조물이 아니라 과거부터 있어 왔던 본질적인 존재임을 알려 준다. 둘째는 존재의 출처를 밝히는 것으로서 본절에서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나왔으나 1절에서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여기서 전자 '파라'(~에게서)는 말씀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사용되었던 후자 '프로스'(~와 함께)와 다르다. 1절의 예수께 대해 사용되었던 '프로스'는 서로 친밀하며 동등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내나, 요한에 대해 사용된 '파라'는 친근하기는 하나 동등한 교제가 가능한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셋째는 '보내심을 받은'(아페스탈메노스)이란 말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헬라문헌이나 70인역(LXX)에서 권위 있는 왕이나 창조주로부터 메시지나 임무를 위임받아 파송 된 경우에 쓰였다. 이로 보아 요한은 빛 자체가 아니라 빛된 말씀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인 것이다. 이처럼 예수와 요한의 양자 사이에는 신과 인간이란 본질적 차이와 예비하기 위해 파송된 자와 빛으로 등장한 자란 사역상의 차이를 지닌다.
이름은 요한이라. - 앞 문장에서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실을 밝히고 여기서는 직접 이름을 밝힌다. 복음서에서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본서의 저자 '사도 요한'과 '세례인 요한' 두 명이다. 따라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 공관복음에서는 후자를 모두 '세례인 요한' 이라고 쓰는데(마 3:1; 막 6:14; 눅 7:20), 여기서는 그냥 '요한'이라고만 밝힌다. 그 이유는 바로 앞에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한정 어구가 있어 너무나 분명히 세례인 요한을 가리키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Westcott). 그러나 이후에도 본서에서는 '세례'라는 어구 없이 세례인 요한을 부르는데 그것은 이 책의 저자인 사도 요한으로서는 특별히 자신과 세례인 요한이 혼동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요한'의 원어의 뜻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서 그는 전체 구속사에 있어서 하나의 분계선을 이룬다. 즉 요한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이전부터 오실 메시야를 증거했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라 할 수 있으며 사 40:3에 예언된 대로 광야에서 외쳐 예수님을 소개함으로 새로운 시대 즉, 신약시대의 선구자가 되었다.
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 본절은 세례인 요한의 사명에 대한 표현이다. 여기서 '증거' (마르튀리안)라는 단어의 뜻은 '사실에 대한 증언'으로서(Bengel) 요한의 사명은 역사 가운데 실제적으로 오신 예수님을 사실에 입각하여 증거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세례인 요한의 사명일뿐만 아니라 성경의 저자들 그리고 역사상 등장한 모든 전도자들과 성도들에게 부여된 사명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의 사명도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으로 자기로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 요한의 삶의 목적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었다면, 그의 '증거'의 목적은 '믿게 하는 것'이었다. 한편 본절의 '자기를 인하여'(디아우투)는 3절의 '그로 말미암아'로 번역된 단어와 같으나 그 의미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즉 3절에서는 말씀이 창조의 주체적 사역자라는 의미이나 여기서는 단지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달해 주는 매개자의 역할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창조 시 중보자 사역을 한 것과 세례인 요한도 재창조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중보자로서의 사역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닌다고 볼 수도 있다. 재창조에 대하여는 사 43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모든 사람'은 일차적으로 요한의 메시지를 직접 들은 사람을 가리킨 것이나 더 넓은 의미로는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인 요한의 증언을 대하는 역사상 모든 세대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 본절에서 부정적인 어투를 사용하여 세례인 요한이 '빛'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은 세례인 요한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오해 때문이다. 오래 동안 메시야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 세례인 요한은 그의 기이한 행적으로 인해 때로 메시야로 오해받기도 했었다(눅 3:15). 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이 본서를 집필한 곳으로 추정되는 에베소에서는 예수의 세례보다 요한의 세례에 집착하는 경향마저 보였다(행 19:3,4).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여 생명을 얻게 하려는(요 20:31) 자신의 사명에 입각하여 사도 요한은 이를 의도적으로 밝힌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역 당시 세례인 요한 스스로도 자신의 청중이나 제자들이 자기를 메시야로 보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조심했었다(마 3:11; 막 1:7; 눅 3:15-17). 이와 관련해서는 눅 3장 연구자료, '예수의 선구자 세례인 요한'을 보다 참조하라. 이것은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단순히 참된 신앙의 대상을 소개하는 매개물에 머물러야 함을 보여 준다.
1:9 참 빛. - 6절에서부터 빛 되신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사명을 지니고 이 땅에 온 세례인 요한에 대해 언급한 본서 저자는 다시 4,5절의 주제였던 생명 되시며 어두움을 비추었던 '빛'에 대한 내용을 계속 전개하고 있다. 한편 '참'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여러 가지가 있는 데 보편적으로 쓰이는 '알레데스'는 '진짜', '이상적', '순수한'이라는 뜻이며, 여기에 사용된 요한이 즐겨 쓰는 '알레디논'은 그릇됨의 반대인 '참'이 아니라 불완전의 상대적 개념인 완전을 가리키는 '참'을 의미한다(Calvin, Vincent, Godet). 이처럼 본문의 표현은 말씀되신 그리스도는 어둡고 불완전한 이 세상을 완전케 하는 참 빛이심을 보여 준다.
세상에 와서. - '세상'(코스몬)이란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피조물로서의 우주(롬 1:20)를 가리킬 때도 있으며, 때로는 구원이 요구되는 타락한 인류(29절)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을 떠나 사탄의 지배 하에 있는 곳을 의미한다(요 7:7; 15:18; 17:9,14; 약 4:4). 따라서 본절에서 '세상'은 5절에 나오는 '어두움'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본절에서 '참 빛이 세상에 왔다'란 표현은 생명의 빛 되신 그리스도께서 어두운 세상에 사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가리킨다(막 10장 자료노트. '예수의 성육신과 수난의 필연성' 참조).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 이 단어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갖는 특징과 능력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해 준다. 여기서 '각 사람'(판타 안드로폰)은 단수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집단이나 단체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개체적 의미를 지닌다. 즉 영어의 All man(모든 사람)이 아니라 every man(각 사람)을 뜻한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사람을 대하실 때 무리로서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만나주신다(Plummer). 따라서 '각 사람'에게 빛이 비친다는 것은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 준다는 뜻으로 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다른 어떤 선지자에게도 찾아볼 수 없는 예수님만의 구원 사역의 특징이다. 또한 이 구절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유대적인 선민사상이 잘못된 것임을 알려준다.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 '참 빛'이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었음을 이미 '각 사람'의 의미를 알아보면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빛의 비춤을 성자의 구원 사역으로 본다면, 이는 일차적으로 과거에 있었던 순수한 역사적 의미에서의 성육신의 위대한 사실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하나(Lange, Bengel. Hengstenberg) 동시에 넓은 의미로는 세상 안으로 계속적으로 들어오는 구원의 빛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Ewald, Keim. Westcott). 결국 참 빛은 과거에도 선지자를 통하여 역사 가운데 여러 모양으로 계셨으며 또한 성육신을 통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바 있음은 물론 오늘날에도 성령을 통하여 계속해서 역사 하신다.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셨음을 선언하는 본절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먼저는 창조 이후에 성육신하기 전까지 영으로서 이 세상에 계신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Godet, Westcott)와 성육신 하시고 승천하시기 전까지의 예수의 지상에서의 생애를 가리킨다는 주장(Meyer)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에서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는 어구를 통해 볼 때 본 구절은 예수의 지상에서의 생애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본문의 의미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절에서는 '세상'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오는데, 이 '세상'의 의미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세 가지 모두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로 본다. 그러나 앞의 두 '세상'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로서의 세상을 뜻하고. 마지막 세 번째 '세상'은 하나님을 떠난 불신의 인간 세계라고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대구를 이루고 있는 이 구절은 자신의 창조주조차 몰라보는 타락한 인간의 죄악상을 탄식조로 증거해 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사용된 '알지'(에그노)는 '알다'(기노스코)의 부정과거형으로서 피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관계를 통한 인격적 앎을 의미한다. 신약에도 '안다'는 동사가 많이 쓰이는데, '아이스다네스다이'는 감각적인 지각을 나타내고, '도케인'은 일반사물에 대한 사전적인 지식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며, 선천적인 지식을 의미할 때는 '에이도'가 쓰인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용된 기노스코는 남녀 간의 성적 관계를 의미할 때 사용될 정도로(마 1:25) 친밀한 관계를 통한 실질적이고도 핵심적인 면을 파악한 '앎'이다. 요 10:14,15에서는 이 단어를 성자와 성부의 관계에 적용시키고, 목자와 그를 따르는 양과의 사이에도 사용함으로 '앎'은 곧 '생명을 공유하는 관계'라는 의미임을 보여 준다. 이상의 내용을 생각해 볼 때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와 피조물의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창조주이시면서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는 인간을 사랑하여 어두운 세상 가운데로 내려왔으나 피조물 인간은 이를 완전히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불신자에게도 해당된다.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 '자기 땅'(타 이디아)과 '자기 백성'(호이 이디오이)은 각각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자기 땅'(타 이디아)은 '자기 자신의'(이디오스)라는 단어의 중성 복수형으로 요 19:27에서는 '자기 집'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자기 소유'란 의미가 강하다. 비록 자신의 창조주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백성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의 소유임을 강하게 천명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의도는 당신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이루기 위함이었으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거부로 당신의 통치가 깨어지자, 이스라엘을 세워 당신의 백성을 모으셨다(출 19:6). 그러나 그들조차 하나님을 망각하고 배반하자, 하나님은 마침내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소유된 자들을 다시 모으신다. 즉 예수님을 믿고 그와 하나된 구원받은 성도들 곧 '하나님의 소유'를 회복하시기 위해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예수를 보내어 자신의 소유를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뜻조차 인간은 예수님을 거부함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서 '영접하다'라는 어휘는 개인적인 영접을 의미하는 '람바노'가 아니라, 집단적 영접을 의미하는 '파랄람바노'가 사용되었다. 이는 '자기백성', 즉 유대인 중 개인적으로는 그를 믿는 자들이 있었으나, 집단인 '민족'으로서는 그를 거부하였던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태도는 사 1:2,3에 잘 예언되어 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이처럼 빛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므로 이스라엘은 선민으로 부름 받았던 영광스러운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어두운 집'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1:12 앞 부분에서는(1-11절)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전체적 사역을 기록한데 이어서 본절은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인간들이 집단적으로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빛은 꺼지지 않았으며 각 개인을 위한 구원은 그 계획이 계속 진행되었음을 알려준다.
영접하는 자. - 5절이나 10,11절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반응과 대비시키기 위해, 한글 성경에는 보이지 않으나 원어에서는 역접 접속사 '데'를 사용하였다. 한편 11절에서는 '파랄람바노'란 표현을 사용하여 집단적, 즉 이스라엘의 민족적 영접이 거부되었음을 보여 주었으나 본절에서는 '엘라본'을 사용하여 개인적인 영접이 구원의 방편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Vincent). 즉 구원은 개인적인 영접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아람어 관용법인 'as many as‥‥to them'(~하는 자에게는)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용법은 '~하는 자는 모두'라는 의미로 한 개인의 소속이나 민족, 국가와는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유대인에게 있어서 구원이 혈통이 아니라 개인적인 결단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본서의 저자는 구원의 방법에 대하여 자주 설명하고(13절; 요 5:24) 있다. 그럼 무엇으로 영접하여야 하는 가? 자기 땅에 왔는데 자기의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문맥을 통해 볼 때 '그'는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영접하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생이나 선배 등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으로 이끈 '왕'으로서 영접해야 한다.
곧 그 이름을. - 히브리인에게 있어 이름이란 단순히 누구를 부르는 호칭으로서의 의미보다는 한 존재의 본질 전체를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름을 믿는다는 표현은 그 이름을 가진 자의 총체적인 인격을 수용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그 이름'은 하나님의 본질과 활동의 완전한 계시인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믿는 자들에게는. - 본절에서는 '믿는다'는 표현 '피스튜오'의 현재 분사인 '피스튜우신'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삶 속에서 인정하는(believing in) 강력한 신앙을 의미한다. 이는 '영접'이 단순히 '받아들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그의 이름에 합당하게 왕으로 지속적으로 영접하는 것을 표현한다. 또한 '믿음'도 입술의 고백이나 한 순간의 감정적 상태가 아니라 지속적인 순종을 의미한다(마 7:21). 분명 우리의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은혜인 믿음에 의해 이루어진다(엡 2:8,9). 그러나 그것으로 행위가 없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성경적 믿음이란 행위를 포함하고 있으며(요 14:21). 심지어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약 2:17)까지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여기서는 앞부분에서 '영접하다'(엘라본)와 같이 '주셨으니'(에도켄) 역시 부정과거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이 두 가지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짐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는다. 그러나 어둠의 세력 하에 있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러한 변화는 동시에 그리고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자녀다운 모습이 되는 것은 점차적인 과정을 통해서 되어 진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기록하였던 것이다(갈 4:19).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불확실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권세'란 헬라어로 '엨수시안'인데 이것은 합법적인 권리를 의미하며, 성도는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주장할 수 있는 합법적인 자격을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의미를 전해준다. 우리가 분명하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자녀'라는 뜻의 헬라어 원어의 뜻에서도 잘 드러난다. 신약에서 '자녀'는 두 가지 단어로 나타나는데, '휘이오스'는 양자가 됨으로 상속자가 된 것을 의미하며, '테크논'은 출생과 직결되는 용어로서 '본성적 자녀'를 뜻한다. 본절에서는 '테크논'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중생'(重生), 즉 거듭남을 통하여서만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됨을 알려 준다.
1:13 이는 혈통으로나. - 본절에서는 12절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영접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 이외에는 어떠한 구원의 길도 없음이 3번의 부정을 통해 강조되고 있다. 여기서 첫 번째로 부정된 '혈통'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피'(하이마)의 복수형인 '하이마톤'( )이다. 이에 대해 재미있는 해석이 있는데 첫째는 인간의 출생 시 '부모'의 양성(兩性)의 피를 혼합적으로 부여받았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사람이(Augustine) 있고, 둘째는 단수나 복수가 의미에 있어서 차이점이 없으며 여기서 복수형이 쓰인 것은 단순한 관용적 표현일 따름이다 는 주장(Vincent)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피'를 복수로 쓴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여러 조상들의 피를 이어 받은 공통된 '혈통의 자랑'을 가리키기 위함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듯하다(Moulton). 결론적으로, '혈통'이란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랑인 '유대인의 혈통'을 의미하는 것이나 그것은 결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지 못한다(마 3:9).
육정으로나. - 두 번째로 부정된 '육정'(델레마토스 사르코스)이란 성욕으로(Bernard) 혹은 여자로 해석되기도 하나(Augustine) 일반적으로 성욕을 비롯한 인간의 전반적인 본능을 의미한다. 즉 성경에서 '육정'은 주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주장되는 모든 인간적인 욕심, 세상적인 정욕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갈 5:16). 물론 이러한 세상적 욕망이 우리를 구원시키지 못한다.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 인간이 주로 의지하는 방편이지만 구원을 줄 수 없는 세 가지 중 마지막 것은 앞의 두 가지 와는 좀 다르다. 혹자는 앞의 두 가지를 '동물적 본성'으로 본 반면, 여기서 '사람의 뜻'은 '인간성의 보다 고상한 면과 높은 목적'으로 해석하였다(Westcott). 즉 이는 철학이나 도덕 혹은 법과 인간적 수양 등을 총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앞의 두 가지 수단보다 조금 더 고상할지 모르나 이것도 역시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방법은 되지 못한다(롬 3:20). 왜냐하면 '사람의 뜻' 역시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이 구절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혹자는 여기에 나타난 '난 자들'이 14절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원래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쓰였고, 그 결과 본절은 독생자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말하는 것이 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교부 이레니우스(Irenaeus)가 그의 책 '이단에 대항하여'에서 주장한 이래 많은 자들이 추종했다. 또 다른 주장으로 터툴리안(Teullian)은 이 말을 세속적인 인간과 대조되는 성결한 인간의 기원을 나타내기 위한 영지주의자들의 본문 변조라고까지 표현하였다. 그러나 고대 헬라어의 모든 사본에 복수로 되어 있고, 문맥으로 보아 이를 무리하게 14절에 관계시키기보다는 12절에 대한 해설로 보아 복수로 해석하는 것이 적합하다. 즉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은 혈통이나, 육정,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즉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자녀가 된 자들일 때만 가능하다는 뜻의 문장이다. 한편 헬라어 원문에서는 본절의 문장이 강한 반전(反轉)을 의미하는 접속사 '알라'( )에 의해 시작된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인적 기원(human generation)에 있지 않고 오직 신적 기원(divine generation)에 있음을 보다 분명히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절은 요한복음의 서문이라 할 수 있는 1-18절의 절정이며. 또한 기독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구절이다. 웨스트코트(Westcott)는 본절이 1절과 연결된다고 하고, 벵겔(Bengel)은 대구가 된다고 주장하는데 둘 다 일리 있는 말이다. 즉 1절이 말씀의 온전한 '하나님 됨', 즉 신성을 표현했다면 14절은 그 말씀의 '인간 됨', 즉 인성에 대해 말해준다는 점에서 대비되나 모두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의 본성을 말해 준다는 점에서는 연결되는 구절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육신'(사르크스)은 단순한 육체만이 아니라 인간성 전체를 말한다. 즉 말씀은 '인간'의 모든 필요를 갖고 있는 완전한 인간이 되신 것이다(Westcott), 따라서 "예수님이 실제로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고난과 죽음도 하나의 가상(假像)적인 일"이라는 영지주의자들의 가현설(Docetism)은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소치임을 알 수 있다. 본서의 저자 요한은 본서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변증하는 목적으로 썼으나 동시에 본서 곳곳에서 예수의 참 인간됨을 시종일관 주장한다. 실제로 요 4:6,7에서는 피곤과 갈증을 느끼시는 예수님을그리고 요 11:35에서는 슬픔을 못 이겨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을, 요 11:38에서는 심지어 분노하시는 예수님을 요 12:27에는 갈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까지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되어'(에게네토)는 '~이 되다'(become)의 뜻을 가진 단어 '기노마이'의 부정 과거형으로 한번 됨으로 영원히 되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그의 이전의 신분이 중단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씀이 온전히 육신이 되었으나 여전히 하나님 그대로 계시게 됨을 보여 준다(1:18절 주석 참조), 즉 삼위(三位)중 예수님은 신성을 벗지 않으시고 인성을 입으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가장 크고 오묘한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모세, 이사야, 세례인 요한 같은 훌륭한 성경의 인물이나 마호메트나 석가모니 같은 종교의 창시자들 중에 아무도 자신을 가리켜 '참 신'이며 인간의 구원을 위해 '참 인간'이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러므로 그들 중 아무도 자신이 구원의 근원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참 신이시며 인간이 시기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모두 완전한 형태로 지니셨을 뿐 아니라 이 둘이 연합되어 통일된 한 인격을 이룬 사실에 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 기독론을 참조하라.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성육신의 목적을 보여 준다. 여기서 '거하신다'(에스케노센)의 뜻은 '장막에 산다'는 뜻으로 예수께서는 장막을 침과 같이 일시적으로 이 세상에 머물러 계심을 의미한다(Trench, Moffatt). 이는 마치 출애굽 시에 하나님께서 성막에 임하신 것을 연상시키는 것이나 예수께서는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점에서 훨씬 심화된 양상을 보여 준다. 성육신으로 이 땅에 임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승천 이후에는 성령으로 이 땅에 임하셔서 교회를 보호하신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영광'이라는 뜻의 헬라어 '독사'는 구약에서 여호와의 가시적(可視的) 현현을 의미하는 용어로 70인역(LXX)에서 쓰이고 있다(출 24:17; 40:34; 사 6:3). 따라서 벵겔(Bengel)은 여기서 '영광'을 변화산상에서 본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우리'를 이때 변화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한 베드로, 요한, 야고보로 국한시키나 타당성이 없으며 본 구절은 일반적인 의미의 보다 넓은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보다'는 동사(에데아사메다) 역시 단순한 '봄'을 의미하지 않고 그 대상을 풀이하려고 모색하는 면밀하고 사려 깊은 관찰을 의미한다(32절; 요 4:35; 11:45).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복음 전파 사역을 수행하실 때 본서의 저자와 기타 증인들은 성육신하신 말씀을 주시 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 결국 그의 신비로운 영광까지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영광은 예수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나 승천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 헬라어 원문에서 '독생자' 앞에 사용된 부사 '호스'는 '~같이' 또는 '~만큼'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등한 신적 영광을 지녔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또한 여기에 '독생자'로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헬라어의 '모노스'와 종류나 혈족을 의미하는 '게노스'의 합성어로서 다른 곳에서는 외아들 또는 외동딸을 지칭하기도 하나(눅 7:12; 히 11:17) 본서에서는 그리스도만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어 성자와 성부 사이에만 존재하는 중요하고 독특한 관계를 가리킨다(요 3:16,18; 요일 1: 9). 즉 이 말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가 '유일한' 관계임과 동시에 동일한 신으로서 '하나의 영광과 권위를 지녔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임과 동시에 완전한 신이심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라는 두 사상의 결합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구약의 서술 속에 여러 번 등장하고 있다(출 34:6; 시 25:10; 40:10,11; 61:7).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하나님과 동등할 뿐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이 지상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드러내시는 분임을 알려준다(요 10:30). 또한 '충만'을 나타내는 원어 '플레레스'는 '가득차서 넘치는'이라는 뜻의 서술적 형용사로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의 풍성함을 잘 드러내주는 표현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은 그를 따르는 성도들 모두가 이를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된다.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며 외쳐 가로되. - '증거하여'의 헬라어 원어는 마르뒤레이로서 '증거하다'(마르뒤레오)의 현재형이다. 이처럼 동사의 시제가 역사적 현재형으로 쓰인 것은 예수가 신이시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세례인 요한의 증언이 본서가 기록된 당시는 물론 지금 이 시대나 그리고 앞으로도 역사가 계속되는 한 언제든지 변함없는 역사적 사실로서 생생하게 외쳐져야 함을 보여 준다. 한편 '~외치는 자'는 바로 세례인 요한의 별명으로서(사 40:3; 마 3:3; 막 1:3) 그는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때에도 그리스도를 바르게 외쳤던 자이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 이 말은 예수께서 세례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시는 것을 보기 전부터 메시야가 곧 도래할 것을 예언했었던 사실을 가리킨다(눅 3:16).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르킴이라 하니라. - '내 뒤에 오셨다는 것'과 '나보다 앞섰다는 것'은 상호 모순이 되는 것 같아 보이나 다음과 같은 이유를 통해 볼 때 두 가지 언급이 모두 성립되는 적합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예수님이 요한보다 뒤에 오셨다는 표현은 예수의 탄생이 요한보다 6개월 정도 늦고(눅 1:36), 사역의 시작도 요한이 먼저 시작한 것을 가리킨다(막 1:14,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예수보다 뒤졌는데, 무엇보다 그는 단지 인간이었으나 예수님은 하나님이므로 본질적 신분에 있어서 차이를 지니며 또한 실제적인 존재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기 때문에 모든 인간보다 선재(先在)하신 것이다(요 8:58). 그래서 요한은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은 예수의 신들메를 풀기에도 적합지 못하다고까지 표현하고 있다(막 1:7).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 여기의 '충만'(플레로마토스)은 차고 넘치는 완전한 분량을 의미한다. 즉 '충만'은 '그 자신 속에서 전체의 수(數)나 양(量)이 부족함 없이 완성되는 충분한 상태'(Vincent)를 뜻하며 여기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속성의 전체'(Plumber)를 부족함 없이 갖추고 있음을 뜻하므로 이는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표현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충만함은 아무리 물을 퍼내어도 고갈되지 않는 샘과 같다(Luther). 그러므로 본절의 '충만'은 14절의 '충만하더라'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본성에 연관되어 우리가 바로 그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우리도 그의 '충만'에 참여케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것'(엡 4:13)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취하여야 할 당연한 이상(理想)이 다.
은혜 위에 은혜더라. - '위에'라고 번역된 '안티'는 원래 '~대신에'라는 뜻으로 쓰이므로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은혜 대신에 준 은혜'이다. 그러한 이유로 어떤 이들은 본절을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적 율법의 은혜 대신 더 높은 은혜를 받았다고 설명하기도 한다(Chrysostom, Lampe 등). 그러나 일반적으로 본문은 '대신에'보다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베풀어지는'이란 의미로 본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충만하여서 성도가 온전히 그리스도를 의존할 때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그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는 것이다(고후 6:2).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 원문에서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호티)이란 접속사가 나옴으로 본절이 16절의 이유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즉 바로 앞 절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통해서 우리가 받는 은혜의 특성 '충만함'을 기록한 저자는 이제 율법과 은혜를 비교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주신 은혜의 유익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 요한은 먼저 율법의 기원에 대해서 기록함으로써 모세를 통해 준 율법보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직접 주신 은혜와 진리의 가치를 밝히고 있다. 한편 성경 가운데는 율법은 불의를 깨닫게 하나, 의인이 되게 하지는 못한다(롬 3:20)는 점을 들어 율법의 제한적 측면을 보여주는 구절이 많다. 본절에서도 율법이 비록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완전치 못함을 깨닫게 하고 완전을 꿈꾸게 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음을 보여 줌으로써 더 큰 은혜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 드디어 본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즉 지금까지는 '말씀'(1절), '생명'(4절), 그리고 '빛'(5절)이란 말로 은밀하게 성자 하나님의 본질적 측면을 표현하였던 본서는 이제 구세주의 이름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역사 가운데 한 인간으로 오신 인성을 지니신 예수를 부각시킨다. 한편 불완전을 깨닫게 하는 율법은 하나님의 대리자인 인간 모세를 통해 주어졌던 것이나, 완전케 하는 '은혜와 진리'는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오심으로 은혜의 중요성이 강조된다(Augustine).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드디어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창조 이후 아무도 하나님을 보았던 사람이 없었다. 물론 사막이나 산상에서, 때로는 성전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주시기도 했으나(출 3:2; 사 6:1-7; 겔 1:28) 완전한 실체가 아니라 부분적인 환상이나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에 불과했었다(고전 13:12).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육안(肉限)으로 직접 보게 되면 죽는다는 생각이 있었다(출 33:20; 민 4:20). 그들의 조상 모세도 여호와를 직접 대면하고 율법을 받았다고 기술되어 있기는 하나(출 33:11; 신 34:10) 그 역시 하나님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으며(출 33:17-34:9), 그도 하나님을 충분히 알지 못하였다(출 33:18). 죄악에 의해 더렵혀진 인간은 온전하신 하나님을 살아서는 볼 수가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출 33:20).
아버지 품속에 있는. - 2절에 나타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의 인간적 관계를 전달해 주는 말인 '하나님과 함께'를 더욱 강화시켜 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장소적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라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라는 본절에 대한 웨스트코트(Westcott)의 견해가 나타내듯이 '품속에 있는'이라는 표현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더할 수 없는 친밀함을 보여 준다.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 14절에서 '아버지의 독생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었던 저자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란 표현을 통하여 예수께서 참 하나님되심을 더욱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대 사본 중에는 '독생하신 하나님'(호 모노게네스 데오스) 대신에 '독생자'(호 모노게네스 휘오스)로 기록된 것도 있다. 그러나 전자가 권위 있는 시내사본 등 여러 사본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더욱 인정을 받고 있다. 이러한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분명한 시각과 신앙은 기독교 초기인 당시 여러 가지 이단과 타락한 세상 풍조 가운데서 성도들이 굳건하게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던 큰 요인이 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신앙은 참 신에 대한 혼동 가운데 있는 오늘날의 패역한 세대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1:19-34 예수에 대한 세례인 요한의 증거들
요한복음 전체의 서론에 해당되는 앞의 두 단락(1-18절)은 예수의 신성(神性)과 역사를 초월하여 계셨던 사실, 곧 예수의 선재성(先在性)과 이런 신적이신 예수가 세상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하여 곧 구속 사역의 성취를 위하여 성육신하신 사건에 대하여 기록하였었다. 그에 이은 본문에서부터 요 12:50까지는 이러한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세례인 요한과 제자들의 증거, 예수 자신의 증거, 저자 요한 자신이 선정한 예수의 7대 표적 등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본문은 세례인 요한의 증언과 하나님의 인준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특히 본문에서부터 요 2:11까지는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있었던 한 주간 동안에 발생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마지막 한 주간을 다루고 있는 요 12:1-20:23의 내용과 구조적 유사성을 지니며 대응 관계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본문에서 세례인 요한은 먼저 메시야의 도래를 선포하는 가운데 사 40:3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밝히 증거한다(19-28절), 이와 관련해서는 눅 3장 연구 자료, '예수의 선구자 세례인 요한'을 참조하라. 이러한 세례인 요한의 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관심과 기대를 메시야에게만 두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윽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나아오심을 보자 세례인 요한은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거하였다. 이러한 예수에 대한 세례인 요한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가 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29절), ②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33절), ③ 하나님의 아들(34절)이심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는 주께 대한 성도의 마땅한 자세이다. 즉 성도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가운데서 영생과 구원의 진리인 복음만을 드러냄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도록 힘써야 한다(고전 10:31)는 사실이다. 그래야만 이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구원과 상급을 받게 되므로 오히려 이것이 완전한 영광을 얻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세례인 요한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던 유대 백성들로부터 엄청난 추앙을 받았으나, 결코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라는 사실을 힘주어 말하면서 그들의 관심과 기대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로만 향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 둘째로, 성도들의 구원은 그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죄 값을 지불함으로서 성취된 것이라는 점이다. 즉 세례인 요한이 예수님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29절)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근본 하나님이신 자신을 성부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치실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히 9:11-15). 따라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대가를 지불하고 비로소 성취된 구원의 은혜를 우리 성도들은 절대로 소홀히 여기거나 헛되이 받지 않아야 한다(고전 15:10; 고후 6:1; 갈 2:21).
1: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 이 용어는 특히 저자가 즐겨 사용한 용어이다. 그 횟수에 있어서도 공관복음서보다 월등히 많은데 마태복음에 5번, 마가복음에 7번, 누가복음에 5번이 있으나 본서에서는 무려 70여 회나 나온다. 또한 바울 서신서에서 이방인의 상대 개념으로 쓰였던 이 용어가 여기서는 예수의 사역을 반대하는 자들을 지칭하는데 등장함으로써 주로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사용되었다는 특징도 지닌다(요 6:52; 8:31). 원래 '유대인'은 유다 지파를 가리키는 단어였으나, 남북 분열 왕국 시대에는 남 유다에 속했던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의미했고, 포로기 이후에는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켰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일반 유대시민이나 특히 제사장 ․ 바리새인 ․ 서기관 ․ 장로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Sanhedrin)를 가리켜 '유대인'이라고 불렀다. 본문에서도 일반 서민들보다는 오히려 권력층이 속해 있는 공회를 가리킨다.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 당시 이스라엘 백성 중 어떤 이들은 세례인 요한을 메시야로 오해하기도 했었다 (눅 3:15; 행 13:25).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예루살렘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던 종교 지도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냈다. 유대인의 장로들의 유전을 집대성한 미쉬나(Mishna)를 보면 거짓선지자에 대한 재판이 산헤드린 공회의 직무였음을 알 수 있다.
1: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 '드러내었고', '숨기지 않는다'는 동일한 내용의 말을 이중적으로 표현한 것은 요한의 증언하는 태도가 분명했음을 보여 준다. 특히 '드러내어 말하고'의 헬라어는 '고백하다', '단언하다'라는 뜻의 '호몰로게오'의 부정과거형으로서 요한이 단호하고 솔직한 증언을 했음을 보여 준다.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 레위인의 질문은 단순한 '네가 누구냐'인데 요한은 그들의 질문한 의도를 파악하고서 자신은 절대로 그리스도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에고 우크 에이미 호 크리스토스)는 문장은 '나'(에고)와 '아니다'(우크)가 강조되어 있어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해줄 뿐만 아니라, 문장의 뉘앙스로 볼 때 자신은 아니나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임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1: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교권주의자들의 질문은 그들의 관심을 잘 보여 준다. 그들은 요한에게 '누구'(Who)냐고 묻지 않고 '무엇'(What)이냐고 물었다. 즉 그의 인격보다는 그의 직분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네가 엘리야냐. - 유대 민중들은 자신들을 죄악되고 어두운 세상에서 구원시켜 줄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는 세례인 요한을 그리스도인 줄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다. 또한 혹자는 그를 구약에 예언된(말 4:5) 엘리야로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승천했던 엘리야가 다시 올 것으로 믿었을 뿐 아니라 사실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백성들의 죄를 꾸짖고 회개를 선포하는 그의 모습은(막 1:4-6) 흡사 엘리야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듯 했던 것이다. 당시 교권주의자들은 이를 상기하여 세례인 요한에게 이 같은 질문을 했던 것이다.
가로되 나는 아니라. - 당신이 엘리야가 아니냐는 질문에 요한은 부정적인 대답을 한다. 사실 요한의 사역은 성경에 나타난 '엘리야'에 대한 예언(말 4:5) 그대로 이고, 예수님도 세례인 요한을 '엘리야'라고 하셨음에도 (마 1:14; 17:10-13) 그는 자신이 엘리야임을 부정한다. 그것은 요한이 유대인들의 질문 뒤에 있는 배경을 알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자구적(字句的)으로 해석하여 '엘리야'에 대해서는 과거 승천했던 바로 그 엘리야가 다시 오실 것이라 믿었고 요한이 그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눅 1:17), 엘리야적인 사역을 함에도 불구하고 구약에 나타난 바로 그 엘리야가 아니냐는 질문에는 부정적으로 대답했던 것이다.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 '그 선지자'(호 프로페테스)는 평범한 선지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모세가 예언했던 '나와 같은 한 선지자'(신 18:15)를 가리킨다. 그리고 모세가 예언했던 선지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행 3:22; 7:40). 이에 대해서도 그는 분명히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1: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 그들이 준비해 갔던 예상 대답을 요한이 모두 부정하여 버리자 이제는 요한으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 부르는 신분에 대해 말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그들이 초조하여져서 다급해 하고 있는 모습은 그들이 요한을 공격할 이유를 마련해 가야 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요한'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했던 이유는 '진리'를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요한을 적대시하는 교권주의자들의 하수인으로 심부름을 하기 위해서였다.
1: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 3차례 부정적인 대답을 한 후, 요한은 이제 명시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그러면서 그는 말라기서를 인용하지 않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는데(사 40:3), 그것은 그들이 말라기의 예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요한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관복음서의 기자들도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세례인 요한에게 적용시키고 있다(마 3:3; 막 1:3; 눅 3:4).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 세례인 요한은 사 40:3을 인용하여 자신을 소개하되 한 인격으로 소개하지 않고 단순히 '소리'(포네)라고 소개한다. 이것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라는 중요한 사명을 지니고 있으나 자신을 관사도 없이 그냥 소리라고만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낮추고 반대로 '주', 즉 그리스도만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한편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와 같이 어려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한 후에 메시야가 와서 택한 민족을 구원해 줄 것으로 예언했다. 그리고 메시야의 도래를 위해 많은 준비가 필요한데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백성들의 회개를 위해서 '외치는 자'가 올 것임을 예언한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광야'는 길 없고 나무와 열매가 없는 사막지대로서 당시 유대인들의 심령 상태를 말해 준다. 또한 '외치는'(보온토스)은 그 시제가 현재분사로서 백성들을 향한 회개의 선포가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진리의 소리여야 함을 말해준다.
1: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 요한에게 제사장과 레위인을 보낸 산헤드린 공회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양대 세력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는데, 본절은 그중 바리새파에 의해 세례인 요한에 대한 조사단이 보내어 졌다고 기술한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마카비 독립 운동 이후 외부 세력과 야합하는 당시의 정치적 흐름에 반항하여 생겨난 단체이다. 그 이름이 '분리'를 뜻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다분히 국수적(國手的)이며 율법 제일주의적인 모습으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어 예수님의 심한 질책을 받게 되었다(마 23:2,3). 결국 그들은 그 낡은 율법주의 때문에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마 5:17) 그리스도의 적이 되었다. 또한 '사두개인'들은 유대교에 있어서 귀족적인 제사장들의 단체로서 이들의 관심은 순전히 정치적이었고 종교적인 면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자였다. 당시에 산헤드린(Sanhedrin)의 의장이 사두개파의 영수(領袖)인 대제사장이었는데, 세례인 요한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단을 바리새인들이 파견한 이유는 당시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부류가 바리새인이었고 그들이 보다 종교적이었으므로 당시 종교 질서를 깨뜨린다고 생각하던 세례인 요한에 대한 관심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에 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보다 참조하라.
1: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들이 이러한 질문을 던진 이유는 그들이 '세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알면 분명해 진다. 첫째, 그들은 '세례'를 이방인들이 개종 시에 이방세계의 더러움을 씻는 의미에서 행하였다(Jerenlias). 그런데 본문에서 요한은 이방인들에게만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베풀고 있었으며(눅 3:7), 그들은 그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둘째, 요한의 세례가 더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유대인들이 세례를 메시야와 연관지어 이해했기 때문이다. 겔 36:25; 37:23; 슥 13:1 등에서 세례는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을 표시하며 이는 메시야의 사역과 관련된다. 따라서 메시야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죄 씻음의 세례를 요한이 베풀고 있는 것은 그들이 볼 때 도저히 이해 못할 사실이었다.
1: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메시야나 엘리야 또는 다시 살아난 예언자로서 베푼 것이 아니라 메시야를 준비하기 위해 회개를 선포하는 방편으로서의 세례였다(마 3:7-10). 한편 '물세례'라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 베풀어질 새 생명을 보장하는 불과 성령에 의한 세례를(마 3:11; 막 1:8; 눅 3:16) 예표하는 것이다. 여기서 요한은 먼저 자신의 세례의 정당성을 변론할 뿐 아니라 그들의 관심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함으로써 철저히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한편 물세례와 성령 세례에 대하여는 행 8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 본 구절은 유대인들의 영적 무지를 꼬집는 요한의 지혜로운 답변이다. 사실 메시야는 그들 세대의 사람이었고, 시간적으로 요한보다 늦었지만 그의 공적 사역을 이제 막 시작하려 하고 있었으며, 이미 세례인 요한에 의해 세례를 받은 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를 알지 못했고 엉뚱한 종교적 열심에 빠져 참 메시야를 무시하고, 오히려 세례인 요한을 메시야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 메시야에 대한 이들의 이와 같은 무지는(10절) 그들의 실체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요한의 욕설대로 독사의 자식들(마 3:7; 눅 3:7)임을 드러내 주는 표현일 것이다.
1: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 그리스도와 자신을 극명(克明)하게 대비시키는 세례인 요한의 표현으로서 세례인 요한은 자신을 비하시켜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하고 있다(마 3:11; 막 1:7; 눅 3:16). 이스라엘은 모래 먼지가 많은 지역이라 외출하고 돌아오면 반드시 손과 발을 씻었다. 특히 손님이 오셨을 때는 그 집의 가장 천한 종이 손님의 '신들 메'(영어성경 New International Version에 는 Sandal로 표현되어 있는, 끈으로 이어진 유대인 특유의 신발)를 벗기고 발을 씻겨주는 풍습이 있었다. 이처럼 요한은 자신을 비천한 종으로, 그리스도는 귀하신 분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 유대인들은 단순히 '네가 누구냐'라고 물었으나 요한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존재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 참 의미를 갖는다는 그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요한이 이처럼 예수를 메시야로 굳게 믿게 된 것은 예수의 세례 시 성령의 강림과 성부로부터 메시야 사역에 대한 확인이 있었을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32-34절; 눅 3:22).
1:28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 여기서 '베다니'(베다니아)는 '배 집'(舟家)이라는 뜻으로, 성경에서 '베다니'라는 지명(地名)의 장소는 두 곳으로 나온다. 그중 하나는 예루살렘 남동쪽으로 약 3km지점에 있는 마을로 요 11:1을 보면 나사로의 동네로 나타나고 있다. 또 하나는 본절에 있는 베다니로서 요단강의 동쪽에 위치했으며 세례인 요한이 세례를 베푼 곳이다. 본절에서 이 베다니를 나사로가 살았던 베다니와 구별하여 위치를 설명하는 것은 본서의 기록자가 헬라인 영지주의자가 아니라 팔레스틴 지리에 익숙했던 유대인이란 점을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일련의 정황은 본서의 기록자가 이러한 사건(19-28절)의 실제 목격자이며, 이 사건이 있었던 베다니에서 예수의 부름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도 요한의 저작일 가능성을 더욱 높여 준다. 왜냐하면 교권주의자들을 향한 예수에 대한 세례인 요한의 증언이 기록된 이 부분(19-28절)과 이어지는 세례인 요한의 메시야 증언(29-34절) 및 제자의 부르심(35-51절) 등 이곳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요한복음에만 단독적으로 기록된 것이며 이 때 사도요한은 세례인 요한의 제자로서 이곳에서 이 모든 것을 직접 목격한 자로 추정되기 때문이다(35절 주석 참조).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 이제까지의 내용보다 더욱 분명하게 현장감 있는 시각적 묘사를 함으로써 본서의 저자가 목격자의 입장에서 직접 증언을 하고 있다는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한편 '이튿날'이라는 정확한 시간의 표현 역시 저자가 그 자리에 있었음을 암시해 주며 '나아오심'(에르코메논)은 현재 분사로서 예수께서 나오고 있는 과정을 묘사해 줌으로써 당시의 현장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해 주고 있다.
보라. - 이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데'는 '어린 양'을 목적어로 취하는 타동사가 아니다. 이 단어는 경탄이 섞인 감탄사로서 요한은 유대인과의 변론 가운데 계속 앞세웠던 그 예수 그리스도가 드디어 세상에 밝게 나타나심을 발견하고 감탄하여 부르짖는 탄성이다. 이러한 탄성은 매일의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을 목격하는 성도가 늘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 요한은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속죄 사역을 간결하고도 명확하게 한 마디로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그리스도가 담당한 '죄'가 단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모욕했던 것들(요 19:4-30)이라고 말하지 않고 '세상 죄'라고 한다. 즉 예수님은 본질상 과거 ․ 현재 ․ 미래의 모든 '세상'의 죄를 지신 것이다. 그리고 '지고 가는'(호 아이론)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분사로 쓰여진 것은 많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한 번의 죽으심으로 영원히 속죄를 이루신 것은 사실이지만, 속죄는 동시에 영원한 과정이기도 하다(Chrysostom, Bernard)는 진리를 시사해 준다. 마지막으로 다를 것은 '하나님의 어린양'(호 암노스 투 데우)인데, 이 단어는 구약에서부터 많은 용례를 갖고 쓰이고 있다(출 12:3; 29:38; 레 4:32). 그러나 이 모든 구절은 이사야의 '우리를 위해 고난 받는 어린양'이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한 예언(사 53:7)에 귀착된다. 그것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약에서 '어린양' 에 해당하는 헬라어 '암노스'는 4번 나타나는데 본절과 36절 그리고 행 8:32과 벧전 1:19이다. 마찬가지로 이 모든 곳에서 이를 예수께 적용시킨다. 그 밖에도 신약의 다른 여러 곳(마 8:17; 눅 22:37; 요 12:38; 행 8:32-35; 벧전 2:22-24)에서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의 종을 예수님에게 적용하여 예수가 세상 죄를 해결하실 어린양임을 누차 반복하여 강조한다. 한편 헬라어 원문에는 '하나님의 어린양'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분'이 동격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의 성자로서의 위치와 그의 사명을 분명히 하여, 그리스도가 죄악에 빠져 헤매이는 이 세상을 은혜와 진리로 변화시키실 유일하신 분임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1: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 세례인 요한은 15절에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했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다시 한 번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고 지적하면서 그와 함께 하고 있었던 자들에게 선포하고 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킨 '사람'은 '아네르'이다. 신약에서는 '사람'을 가리키는 헬라어가 세 가지가 있는데, '알렌'은 성적(性的)으로 남성을 뜻하고, '안드로포스'는 일반적인 '사람'을 말하며, 본절에 사용된 '아네르'는 용기와 지혜와 힘 등을 갖고 있는 권위 있는 남성을 표시한다(행 2:22). 특히 이 용어는 결혼관계에 있어서 남성이 여성의 머리가 됨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었다(엡 5:23). 따라서 이러한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를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킨 것은 저자가 그 분의 탁월함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음을 잘 드러내 준다. 그리고 '계심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티'는 현재형으로 그 당시의 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여 주고 있다. 특히 1절에 있는 같은 동사류의 '엔'이 부정과거형으로 영원 전부터 선재(先在)하고 계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과 대조적으로, 본절에서는 현재형을 사용함으로 성육신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그리스도를 잘 드러내준다고 보겠다.
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 - 세례인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서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라고 말함으로 자신이 예수님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알려준다(마 3:14). 그러나 본절에서는 '알지 못하였으나'라고 기록하여 양자가 서로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세례인 요한은 예수님의 친척이었다(눅 1:36). 그런데 어떻게 모를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의문은 '나도'와 '알지'의 원어의 뜻을 알게 되면 해결된다. 헬라어의 '카고'(나도)는 '나 역시도'라는 의미가 강하다. 또한 본절의 '알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데인'은 경험에 입각한 앎을 뜻하는 일반적인 동사 '기노스코'와는 달리, 직관이나 묵상에 의한 영적인 앎(막 1:24; 고전 2:2)을 뜻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너희들만큼이나 나도 그를 알지 못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당하다. 당시 일반 백성이나 교권주의자들 모두 예수님이 남다른 능력을 가시신 분이라는 사실은 인정했으나(막 2:12) 그를 구세주이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치는 않았었다(마 9:3-6). 이와 같이 요한도 예수를 피상적으로는 알고 있었으나 참된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인식하지 못했었다. 예수를 바로 아는 길은 이와 같이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지식에 의해서 가능치 않으며, 오직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는 것이다(고전 12:3).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단순히 현대 교회에서 시행되고 있는 '죄 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포함하고 있는 성례전적인 의미의 '세례'가 아니다. 당시 '물'은 모든 죄의 부정(不定)을 뜻했는데(Hendriksen),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풂으로 죄를 깨끗하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푼 것이다. 성경의 예언에 따르면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를 베풂으로 메시야의 도래를 예비하는 자가 온다고 하였다(겔 36:25; 슥 13:1). 세례인 요한은 자신의 사명의 이러한 과도기적 성격을 제대로 깨달아 회개의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1: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였다'는 것은 복음서의 공통된 표현이다(마 3:16; 막 1:10; 눅 3:22). 이러한 표현은 그리스도의 무죄하심(히 4:15), 그 성품이 순결하고 부드러움(마 10:16), 그리고 고요한 활동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Westcott). 한편 여기서 '비둘기 같다'는 표현에 대하여 시각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감각적 또는 논리적 입증를 초월한 영적 사실에 대한 생생한 '직관'일 뿐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34절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이때 성령은 눈으로 볼 수 있게끔 예수님에게 임하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본문에서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했는데, 성경에서 '하늘'(우라노스)은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창공을(창 1:6-8; 행 4:24) 의미하기도 하며 때로는 하나님께서 계신 곳(전 5:2; 마 5:16)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이 두 가지의 '하늘'을 동일하게 생각하는데, 사실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피조체인 대기 중의 하늘과 창조주 하나님이 거처하는 하늘나라는 전혀 동일하지 않다. 따라서 본절의 표현은 삼위 가운데 한 분이신 '성령'도 '하나님이 계신 곳'에 계신다는 의미에서 '하늘'로 표현한 것이다.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 '성령이 예수 위에 머물렀다'는 표현은 사 61:1; 눅 4:18 ; 요 3:34 등을 기초로 하여 볼 때, 성령에 의한 예수의 관유(灌油, 기름부음, anointing)를 가시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약에서 관유, 곧 기름부음은 하나님이 한 개인을 제사장이나 왕 또는 선지자로 임명할 때 행했던 의식이다. 본절의 의미도 이와 일련의 관계를 갖는데, 그것은 첫째로 중보자로서의 그의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께 그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것과, 둘째로는 예수가 그 일을 수행할 자격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본절에서는 예수가 드디어 그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공적으로 위임받았으며, 그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 이런 식의 표현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할 때 말씀의 신적 권위를 보장하기 위해 많이 사용하는 양식으로(사 1:2; 25:8; 렘 2:2; 6:15; 겔 3:24), 세례인 요한은 이를 통해 그 자신의 사역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도래(到來)를 예언하고 준비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 요한의 임무는 '물 세례'를 주는 것이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눅 3:16) 세례를 주신다. '물 세례'는 자신의 죄성에 대한 깨달음과 회개를 촉구하나 '성령 세례'는 죄인된 인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중생의 경험을 가리킨다(고후 5:17). 그러나 전자와 후자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전자는 후자를 예표하며 준비하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결국 물 세례도 성령 세례로 귀결되어야만 의미를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역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실 유일한 분이시다. 물 세례와 성령 세례의 관계에 대하여는 행 8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 '보다'와 '증거하다'는 세례인 요한의 실제 사역을 잘 대변하는 것일 뿐 아니라 모든 전도자의 할 일이다. 보지 못하는 것을 전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이나(렘 14:14), 본 것을 전하지 않는 것도 큰 죄이다(행 4:27). 또한 본절의 선언은 동사의 시제가 완료시제로 되어져서, 이 놀라운 체험을 한 사람이 그 환상을 명확히 보았을 뿐 아니라 그가 그것을 증거했고 그의 증거가 아직 유효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한편 본절에서 요한이 증거하는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은 복음서가 일관되게 증거하는 내용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을 동일하게 생각하였으며(마 16:16,17), 유혹자와 귀신들도 이와 같은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다(마 4:1-11; 막 3:11; 5:7). 심지어는 의심 많은 도마나 예수의 십자가형을 집행했던 백부장도 이 같은 사실을 고백하였었다(마 27:54; 요 20: 28). 물론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에는 대부분 '인자'(son of man)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나 본 복음서에서는 일관되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예수의 신성을 증거한다. 그러나 초대 교회를 혼란케 했던 영지주의(Gnosticism) 이단의 일파인 에비온파에서는 세례인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 때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영이 인간 예수에게 내려와 그가 메시야 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나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떠날 때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영이 그에게서 떠났다고 주장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고 단순히 탁월한 인간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본절과 복음서의 위와 같은 주장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거듭 강조함으로써 이와 같은 이단들의 억설(膽說)을 일축시킨다.
1:35-51 예수의 처음 제자들
앞 단락(19-34절)에서는 세례인 요한의 증언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살펴보았다. 이제 본문은 그리스도 되신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기에 앞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개시하심에 있어서 먼저 제자들을 택하여 부르신 것이다. 이들 제자들은 곧 '사도'(使徒)로서 예수 생전에는 그분을 도와 복음 전파에 있어 보조적 사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예수 승천 이후에는 예수의 증인으로서 초대 교회 형성과 부흥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행 2:37-47; 5:12-16; 8:14-17). 즉 저들은 예수가 근본 하나님이시면서도 인간 구속(救贖)을 위하여 친히 성육신하사 대속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셨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이를 온 세상에 힘 있게 증거할 수 있었던 산 증인들이었다(행 1:22; 2:32). 따라서 본서 저자 사도 요한이 본문에서 그 같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부르심을 소개하고 있음은 결국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속주이심을 강조하기 위함에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본문은 먼저 안드레와 요한과 시몬이 부름 받은 사실을 언급한다(35-42절), 그리고 그 다음날에 빌립과 나다나엘이 부름 받았음을 언급한다(43-51절). 그런데 이러한 본문은 다른 복음서들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 첫 번째로 부름 받은 두 제자가 원래는 세례인 요한의 제자들이었다는 점이다(35-37절). 결국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상당 부분 세례인 요한의 예비 사역(23절)에 힘입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줌과 동시에. 그만큼 세례인 요한이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음을 의미한다(요 3:26-30).
그러나 공관복음에 의하면(마 4:14-22; 막 1:16-20; 눅 5:1-11) 본문의 묘사와는 다르게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4명을 첫 번째 제자로 부른 것으로 묘사된다. 상호 모순처럼 보이는 이러한 불일치는 본문이 공관복음서의 사건보다 앞서 유대 지역에서 있었던 예수의 1차 부름이었으며 공관복음서의 사건은 실제적으로 제자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예수의 제자의 길을 걸은 실제적 부름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할 때 해결될 수 있다. 즉 본서 저자 요한은 공관복음서 저자가 모두 생략한 유대지역에서의 1차적 부름을 자세히 기록한 반면,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2차 부름의 사건은 완전히 생략한 것이다. 한편 이 같은 본문에서 주목할 사실은 예수님을 따르게 된 안드레와 빌립이 각각 시몬 베드로와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했다는 점이다(41,42,45,47절). 이는 곧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제자들의 이웃에게 복음을 증거한 전도자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우리가 따를 대상일 뿐 아니라 이웃에게 증거해야 할 대상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스스로 여기면서도 막상 주위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의 최대 명령인 복음 전파의 사명(마 28:19,20)을 저버리는 행위이자 혼자서만 구원 얻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기적이고 기복적(祈福的)인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본문에서 또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곧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또한 그분과 만남을 갖게 되기만 하면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즉 처음에 나다나엘은 빌립의 전도를 받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46절). 그러나 예수님을 직접 만난 후에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49절). 이로 보아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단순한 스승으로서의 권위가 아니라 신적인 권위와 위엄을 보이셨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본문에서도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명백히 증거되고 있는데, 이는 본서 전체의 일관된 강조점이다.
끝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주님께 대한 성도들의 신앙은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삶을 통해서 입증되어야 함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된다. 즉 예수님을 만난 지 불과 몇 시간 혹은 몇 일 이내에, 제자들은 '랍비',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 등의 신앙고백을 하였으나, 그 후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록 여전히 그들의 신앙은 실천적이지 못했다. 이처럼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며 매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믿음이 성숙되지 않고 혀로만 주를 섬기는 자들이 있다.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는 입술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십자가를 등에 지고 예수를 따라가는 삶으로써 열매 맺어져야 한다.
1:35 또 이튿날. - 요 1:19-51을 날짜로 계산하면 4일 간에 걸친 내용인데, 본절은 제 3일째이다. 즉 19-28절이 첫째 날, 29-34절이 둘째 날, 그리고 35-42절에 셋째 날, 43-51절이 마지막 4일째의 증거이다. 이렇게 계속 '이튿날'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시간이 경과함을 밝힌 것은 생생한 현장감과 진실성을 전달해 주기 위함이다.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 '섰다가'(헤이 스테케이)라는 단어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바람을 가지고 계속 서서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제자 중 두 사람'이라는 표현을 통해 볼 때 세례인 요한은 아마도 이 두 제자 외에도 더 많은 제자를 거느렸던 것 같다. 한편 본서에는 이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음을 밝히고 있다(40절). 그 외의 익명의 한 제자에 대해서도 학자들 간에 거의 일치된 견해를 내놓고 있는데, 이는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일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세례인 요한과 유대인들과의 논쟁(19-28절), 세례인 요한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29-34절)등이 기록된 본서의 문체나 내용을 통해 볼 때 본서의 저자는 기록된 내용의 목격자임이 틀림 없으며, 또한 본서가 사도 요한 자신의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기입하기를 꺼렸을 뿐 아니라 어머니 살로메의 이름(막 15:40; 16:1) 조차도 나타내지 않으므로(요 19:25)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은 '한 제자'는 바로 사도 요한 자신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1: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 어제는 예수께서 요한을 향해 오시고 계셨지만(29절), 오늘은 오신 것이 아니라 다른 편에서 걸어 다니셨다(walked about). 한편 이 본문이 예수님과 세례인 요한이 한 장소에 같이 있었던 마지막 경우이다. 여기의 '보고'(엠블렙사스)는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응시했다는 뜻이다(42절; 막 10:21; 눅 20:17; 22:61).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 세례인 요한의 이 짧은 증언은 29절의 반복임을 알 수 있다. 요한은 처음에는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고(19-28절), 다음에는 일반 백성들에게(29-34절) 증거하였으나, 이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죄를 담당할 구세주이심을 확신시킴으로써 예비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한다. 그런데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세례인 요한의 제자들의 경우에는 예수가 누구인가를 안 즉시 그를 따르는 열심을 보였다(37절).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29절의 주석을 참조하라.
1: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 신약 성경에서 '안다'(기노스코)는 단어가 단순히 지적인 파악만이 아니라 경험적인 앎(마 1:25)을 의미하듯이, '듣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산' 역시 단순한 들음이 아니라, 들은 말씀에 대한 순종을 포함한다(롬 1:5; 10:17; 살전 2:13). 그래서 신약에서는 이 단어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으로 동의하며 받아들인다는 표현에 많이 사용한다(막 4:24; 요일 1:1). 따라서 본절에서도 세례인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소개를 표현 그대로 받아들였음을 나타낸다.
예수를 좇거늘. - 세례인 요한의 예수에 대한 증언을 듣고, 요한을 좇던 자들이 이제는 예수를 따르게 된다. 물론 세례인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수를 좇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듣고', '좇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인 것이다(마 7:21-27), 한편 '좇거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콜루데산'은 원래 종교적, 도덕적인 입장을 받아들이고 추종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뜻으로 사용한다(43절; 마 8:19; 19:27,28; 막 6:1; 8:34). 따라서 본문에서도 이 말은 세례인 요한의 두 제자들이 이제까지의 삶의 방향을 수정하여 예수를 통하여 무엇인가를 이루겠다는 의지를 갖고 예수를 따랐음을 보여 준다.
1: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로되. - 본절은 뒤를 따라오는 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생생하게 묘사해 준다. 즉 여기서 '본다'는 뜻의 헬라어 '데아오마이'는 특별하고 관심 있게 '주시(注視)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마 6:1; 요 6:5). 이로 보건대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모든 자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각자의 영적 필요가 무엇인지를 살펴주신다.
무엇을 구하느냐. -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으로서는 본서에 처음 등장하는 말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자기를 좇아오는 사람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가 아니라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미 그들의 마음의 소원을 파악하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또한 예수님 자신이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만족시켜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들에게 참으로 요구되는 것은 바른 것을 좇는 것이었다. 동일하게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자신을 좇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라고 묻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세상적인 것을 구하나 그것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일 뿐이다(요일 2:16). 따라서 어두운 세상 가운데 있는 우리들이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생명과 그가 주시는 풍성한 삶이다(요 10:10).
가로되 랍비여. - '랍비'는 '나의 큰 자' 또는 '나의 존경할 님'이란 뜻을 가진 아람어로서 상급자를 지칭하거나 제자들이 선생을 부를 때 사용하였다. 이 단어는 B.C. 30년경, 즉 힐렐(Hillel) 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예수 당시에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생활 언어였다. 한편 이 단어를 아람어 음역 그대로 표기한 것은 요한이 당시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또한 다시 이를 번역하여 준 것은 저자가 자신의 글을 읽는 독자들에 이방인을 포함시켰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이방인들을 위해서 썼으므로 다른 데에서도 자주 아람어를 해석해 준다(38,41,42절 요 4:2; 9:7). 신약성경에서 '랍비'란 용어는 복음서에만 나온다. 마태복음에서는 배반자 유다가 스승에게 인사할 때(마 26:25,49),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나 유다가 예수를 부를 때 사용하였다(막 9:5; 11:21; 14:45). 그러나 헬라 그리스도인이었던 누가는 이러한 아람어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한편 위의 예로 보아 이 칭호는 사람들이 예수를 아직 온전히 알지 못했을 때, 그를 적당히 존중해 주는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이로 보아 본문에서 두 제자도 예수를 선생으로는 모시려 하였으나 아직 그의 신분이나 행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어디 계시오니이까(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 헬라어 '푸 메네이스'는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 교사들에게 가르침을 요청하기 위하여 흔히 사용하였던 관용적 표현이다. 예수를 '선생'으로 인정한 그들은 그와 시간을 더 보내기를 원해 그의 거처를 물었던 것이다. 그들은 간결하고 짧은 대화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좀 더 긴 교제와 조금 더 조용한 곳에서 깊이 있는 가르침을 바랬다. 비록 이때 이들의 예수에 대한 고백은 완전치 못했으나 주님과 계속 함께 하려는 이들의 태도는 마침내 바른 신앙고백을 가진 제자로 변화시킬 것이다(Calvin). 많은 사람들이 먼 거리에서 복음을 슬쩍 접하고 지나쳐 참 제자가 드문 이 시대에, 주님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자 하는 이러한 태도는 참 구도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 탈무드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권위 있는 자가 제자를 부르는 말이다(Bernard). 이 원어를 살펴보면, '오다'(에르코마이)의 현재 명령형과 '보다'(호라오)의 미래 직설법으로 구성된 문장이다. 이는 지금 나를 따라오면 장차 그들이 찾는 궁극적인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명확한 약속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그들이 직접 와서 보고 체험함으로써 진리를 찾으라고 제자들을 초청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권위 있는 초청에 응하는 자는 반드시 참 구주와 구원의 진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 이 사실은 간략한 역사적 부정 과거로 진술되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를 따른 것이 실제로 사실임을 명시해 준다. 한편 그가 계신 곳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계신 곳'을 뜻하는 헬라어 관용구 '푸 메네이'를 사용하여 표현한 것은 거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 그들이 만나서 교제하였던 예수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예수의 집이 있었던 나사렛이 아니라 세례를 받았던 베다니 근처로서 아주 보잘 것 없는 숙소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 여기서 '십 시'란 유대 시간법에 따라 오후 4시라는 견해도 있으나 여러 가지 증거로 볼 때 로마식 시간 계산법에 따른 오전 10시가 타당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요한은 본서를 A.D. 1C 말에 에베소에서 헬라인들을 위하여 기록하고 있었으므로 유대식 시간 계산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둘째로는 문맥으로 보아 '그 날 함께 거하니'라고 기록되었는데 이 말은 밤을 같이 지새웠다는 의미로 그 다음날 오전 10시를 뜻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오전 10시라면 두 제자를 더 부르기 위해 그들을 찾으러 나설 만큼의(41,42절) 충분한 시간이 된다. 마지막으로 본절을 오전 10시로 해석함이 예수님의 수난 사건을 기록한 요 19:14의 시간 계산과도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이 문맥에서 더 중요한 점은 제10시가 지금의 시간 계산법으로 몇 시를 의미하는가에 있지 않고, 저자가 왜 시간을 말했는가에 있다. 이미 살펴 본대로(35절 주석 참조) 본서의 저자는 이때 예수와 함께 그 집에 머문 두 제자 중 한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날은 그들에게는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날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정확한 시간까지 기록했던 것이다. 또한 이 날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 공동체'가 탄생한 기념비적인 날이라고 볼 수 있다(Westcott).
1: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 안드레가 세례인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를 따랐다는 것은 본서에만 나타나는 사실이다. 한편 그의 소개가 베드로와 결부시켜 나타난다는 점이 특이하다. 저자는 마치 '그날 예수를 좇는 두 제자 중 하나는 안드레였다. 너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말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Hendriksen). 이로 보아 본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베드로는 잘 알려졌으며, 그는 예수의 공생애 기간 뿐 아니라 승천 이후에도 12사도의 대표로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안드레가 자세히 설명된 반면 여기에 또 다른 제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가 바로 저자 자신인 요한이였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35절 주석 참조).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자발적 복음 전도자를 보게 되며 그것은 바로 전도자의 동료였던 요한을 통해 간략하게 증언되고 있다. '교회사에서 베드로는 중요한 존재이나 이에 비해 안드레는 큰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도자 안드레 없이 사도 베드로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은(Plummier) 안드레 역시 베드로를 초청함으로 기독교 교회사에서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리고 '먼저'(프로톤)라는 부사는 예수님을 접촉했던 두 제자가 모두 자기의 형제를 찾아 나섰으나 안드레가 먼저 성공했다는 어감을 전해준다(Hengstenberg). 그러면서도 저자는 자신이 두 번째 전도자로서 그의 형제 야고보를 찾아냈다는 사실을 직접 쓰지 않는다. 이러한 저자의 태도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40절과 함께 요한의 섬세한 자제심을 보여 준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 안드레와 요한은 금광이나 다이아몬드 광산보다 휠씬 귀중하고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가장 위대한 것을 발견했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소개하는 친구 안드레의 담대하고 분명한 발언을 통해 그 자신의 신앙도 이와 동일함을 간접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그들의 메시야에 대한 믿음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일반적인 정치적 성향을 띠는 메시야 관으로 많이 정화될 필요가 있으나(행 1:6 참조). 이 발견은 더 크고 더 깊은 영적 구원에 이르는 길을 떠나는 좋은 출발이 되었다(Hendriksen). '메시야의 이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막 서론 특별자료를 참조하라.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 '기름을 붓다', '기름을 바르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크리오'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유대인들이 말하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Anointed One)로서의 히브리어 '메시야'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헬라어로 쓰여진 신약에서는 보통 '그리스도'로 번역되나 '메시야'로 음역된 경우도 두 군데 나타난다(본절과 4:25). 한편 구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제사장이나, 선지자, 왕 등을 의미하며 그들은 모두 장차 오실 메시야의 그림자로서 그 직무를 예표했던 것이다(출 29:7; 삼상 10:1; 16:13; 삼하 1:14,16). 원래 그 말 속에는 '하나님에 의한 선택받은 자',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성별된 자', '위탁받은 일을 완수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에게서 능력을 부여 받은 자'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런데 구약의 후반부, 곧 왕정 후기로 내려오면서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메시야'를 의미하게 되었다(사 61:1; 단 9:24). 그 후 많은 역사적 어려움에 처하면서 이스라엘의 '메시야'에 대한 개념은 변천과 왜곡을 겪게 되었다. 특히 바벨론 유수(幽囚) 이후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이 민족들의 침략 하에 시달렸으며, 그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할 메시야의 도래는 더욱 간절한 소망이 되었다. 또한 메시야의 모습도 모든 열방을 힘으로 물리칠 군사적인 능력과 옛 다윗 왕국의 영화를 회복시킬 정치적 통치에 능한 자로 그려졌다. 이것이 연장되어 신약 시대에 와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정치적 왕으로서의 메시야를 기대하였기에 예수는 엉뚱한 오해(요 6:15)와 기대(막 10:37)를 받았던 것이다. 본문의 경우에 있어서도 안드레가 소개한 메시야라는 의미 가운데는 이러한 히브리인들의 의식이 전제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라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꺼려하셨다(막 1:44,45 등 주로 마가복음에서 그러하다). 이처럼 메시야라는 칭호가 사람들의 왜곡된 소망에 의해 왜곡된 사상으로 채워져 있기는 하지만, 이 칭호는 예수와 구약 성경과의 관계, 예수와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를 가장 적절히 표현해 주는 단어이다.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아'(32절 주석 참조)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되신 것은 과거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존재했던 수많은 왕들과 제사장들이 기름 부음을 받은 진정한 목적인 동시에 그 일의 완성으로서 바로 '그 그리스도'(호 크리스토스)가 되신 것이다. 결국 예수는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의 직분을 한 몸에 지니시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시며, 성도들의 머리가 되심으로써 메시야 사역을 수행하실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삶도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며 현재 새로운 이스라엘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 역시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백성으로서 영적 기쁨을 가질 수 있다(Cranfield). 이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이다.
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 안드레가 메시야를 만난 기쁨을 나누고자 형제 시몬을 데리고 오자 예수님은 그를 유심히 보셨다. 이는 '보시고'의 원어 '엠블렙사스'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다', '눈여겨보다'라는 뜻으로 36절에서는 요한이 예수님을 열렬히 바라보는 것을 묘사할 때도 나온 말이란 점에서 확인된다. 이때 예수님은 짧지만 신적 통찰력으로 베드로의 성격이나 사람됨을 정확히 알아 보셨을 것이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 여기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시몬에서 '반석'(케파)이라는 뜻의 '게바'로 고쳐주신다. 성경적 사고방식에 의하면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이름'이란 그 이름이 대표하는 사람의 본성을 반영하며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낸다. 아담은 생물들의 본성을 알고 있었기에 짐승과 새들의 이름을 지어줄 수(창 2:19) 있었다(Milton). 또한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안다는 것이다(시 9:10). 본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자마자 그의 이름을 고쳐줄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베드로의 자연적인 성품을 깨닫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예수님은 그날 자기 앞에 서있던 충동적인 시몬만을 본 것이 아니라 요지부동의 게바(아람어)나 베드로(헬라어)가 뜻하는바, 즉 반석을 보셨다. 예수님의 이런 예언적 개명(改名)과 같이 베드로는 결국 교회를 위한 사도적인 터전을 구축한 여러 요긴한 반석 중의 하나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예수를 부인하거나(마 26:34) 외식적인 모습(갈 2:11)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부활 후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초대교회의 훌륭한 지도자가 됨으로써 반석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행 1:15-25).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 본절의 '번역하면'(헬메뉴오)은 41절의 '번역하면'(메 델메 뉴오)과 다소 다른 의미를 갖는다. 즉 41절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바꾸자면'이란 뜻으로서 히브리어에 익숙하지 못한 본서의 독자를 염두에 둔 부가적 설명이란 의미가 강한 반면, 본절은 단순히 '그 뜻을 해석하자면'이란 뜻으로서 정보 전달의 의미가 강하다.
1:43 이튿날. - 서론(1-18절)을 마치고는 세례인 요한을 등장시켰던(19-34절) 저자는 세례인 요한에 의해 예수님을 소개하는 과정을 지나(35-42절), 이제는 드디어 예수를 독자적으로 전면(前面)에 내세운다. 예수님은 전날 세례인 요한을 통해 두 제자를 취하신 것(40절)과는 달리 이 날은 직접 제자를 부르신다. 이 날은 유대의 교권주의자들이 요한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사람을 보내는 사건이 있던 날(19절)로부터 넷째 날이다.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 갈릴리는 예수께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사렛이 있는 곳이며 또한 공생애 사역의 주요 무대였다. 당시 예수님이 계시던 요단강 건너편은(28절) 유대인들이 부정한 땅으로 여겼던 사마리아를 지나지 않고 갈릴리로 가는 도로 경유지로서 예수께서는 이때 아마도 고향으로 가는 길이었던 것 같다. 한편 당시 갈릴리(Galilee)는 주로 사회적인 하층민이 거주하던 곳이다. 그들은 주로 어업이나 목축업에 의존했으며, 또 다른 중요한 수입원은 국제적인 교역로를 관리함으로써 들어오는 통행세였다. 그리고 헤롯시대에는 주민들에게서 많은 세금을 거두어 목욕탕, 체육관, 그리고 경기장 같은 헬라적인 문화를 반영하는 건물이 세워지기도 했다. 따라서 예수 당시의 갈릴리는 이방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므로 순수한 유대인들에게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46절). 그러나 예수는 소외받는 계층이 많이 거주했던 이곳에서 주로 사역을 하셨는데, 이는 구약 예언의 성취이다(사 9:1,2).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 여기서 '만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리스케이'는 생생하고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는 현재형이다. 글을 이와 같이 현장감 있게 쓸 수 있는 것은 저자가 실제로 이 사건을 목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혹자는 예수와 빌립의 '만남'의 고리를 방금 전에 등장한 베드로로 가정하고 안드레는 베드로를, 베드로는 빌립을, 빌립은 나다나엘을 인도하는 주변의 가까운 사람에 의해 차례로 복음이 전파되어 나가는 과정의 묘사로 보았다(Bernard). 그러나 여기서 빌립을 만나려고 계획하시고 만나신 분, 즉 이 만남의 궁극적 주체는 예수 자신임을 기억해야 한다. 즉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헌신할 제자를 얻기 위해 예수께서 마음에 두고 찾아내신 것이다(Vincent).
나를 좇으라 하시니. - '좇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데이'는 현재 명령형이다. 즉 예수께서 빌립에게 지금 당장 강한 결단을 촉구하는 명령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본절에는 직접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빌립은 예수를 따르는 12제자중의 하나가 되었다(요 12:21). 한편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첫째는 제자로 따라 오라는 의미로 쓰인다(마 4:27,22; 8:22; 막 1:18; 눅 9:59; 요 21:19). 그리고 둘째로 '본 받으라'(마 10:38; 16:24; 요 12:26)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를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면 나를 따라옴으로 내 제자가 되어서 나를 본 받으라란 의미가 된다.
1: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 빌립과 안드레는 제자들 중 유일하게 헬라식 이름을 갖고 있다. 빌립(Philip)은 알렉산더의 부왕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한 이유로 후에 빌립은 헬라인들의 요구를 예수에게 전달하는 일을 담당하였던 것 같다(요12:20-22).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 '벳새다'는 '고기잡이 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벳새다'는 두 군데 있었는데 하나는 '이투레아'라는 곳으로 오병이어의 이적과(마 14:13-21) 소경을 치유한 이적이 일어난(막 8:22-26) 갈릴리 바다 동편에 있는 '벳새다 율리아스'(눅 9:10)이며, 다른 하나는 '갈릴리에 있는 벳새다'(막 6:45)인데, 아마 가버나움 근처 어디쯤인 듯하나, 그런데 안드레와 베드로의 출신지가 가버나움임을 고러할 때(눅 4:31-39) 본절의 벳새다는 가버나움 근처의 벳새다임이 분명하다.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 빌립은 자기를 찾아주시고 제자로 삼아주신 예수를 좇기로 결정하고, 곧바로 그 비밀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있다.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본서에만 나타나는(본절과 21:2) 이름이다. 그런데 본절의 나다나엘은 마 10:2-4에 나오는 '바돌로매'와 동일인으로 생각된다(Zahn, Ewald, Meyer, Plummer, Westcott, Carr). 그 이유로서 세 가지 정도를 들 수 있다 첫째로 본서에 나타나는 그에 대한 기사는 그가 사도들의 범주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둘째로 공관복음에는 '나다나엘'의 기사가 없고, 본서에서는 '바돌로매'의 기사가 없다. 그래서 동일인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바톨로매'란 이름은 '바요나 시몬'(마 16:17)에서의 시몬처럼 고유명사가 아니라, '바요나' 즉' 요나의 아들'이란 수식어처럼 '돌로매의 아들'(Bar Tolomae)이라는 뜻이므로 또 다른 이름이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셋째로 공관복음에서는 바돌로매가 빌립과 연관지어 나타난다(마 10:2-4). 또한 그들은 베드로, 야고보의 형제와 더불어 예수의 처음 6제자가 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마 10:3; 막 3:18; 눅 6:14). 그렇다면 본문은 그 과정을 그려주고 있다고 보인다. 이상과 같이 여러 가지 요인을 종합해 볼 때 본서의 '나다나엘'은 공관복음에 등장하는 '바돌로매'와 동일인일 것이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 빌립이 자기가 만났던 예수를 나다나엘에게 설명하고 있다. 그가 예수를 율법에 근거하여 소개한 것은 나다나엘이 율법에 정통한 유대인이기 때문이다(47절). 그리고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율법과 예언에 근거해야 함을 암시해 주고 있다. 모세는 율법에서 그리스도를 때로는 모형으로(민 21:9), 때로는 직접적으로(신 18:15) 밝혔다. 또한 구약의 다른 모든 선지자가 예언한 주된 내용 역시 그리스도였다(신 18:18,19; 시 2:7; 사 61:1-3; 눅 24:26,27). 이처럼 본절의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서를 나타내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의 성취이시다(마 5:17; 행 3:22; 롬 1:2).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 빌립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사람 소개법에 따라 이제는 나다나엘에게 그리스도의 인간적 신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구절을 가지고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로부터 출생하였다는 것을 요한복음서 기자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튜빙겐 학파와 스트라우스 학파의 비평가들의 주장은 본 복음서의 서언(1-18절)과 모순되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또한 빌립의 예수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주장도 옳지 않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본질적 특성에 대해서 이미 소개한 이후에 관례에 따라 인간적 측면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요셉의 아들'이란 표현은 가시적인 측면에서는 맞는 사실이었고(마 1:16), 예수를 단순히 요셉의 혈육으로만 보는 것도 당시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 생각이었다(눅 3:23). 또한 예수가 나사렛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도 적절하다. 왜냐하면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지만,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예수를 가리켜 일반적으로 '나사렛 예수'라 불렀기 때문이다(마 2:23; 눅 18:37).
1: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진실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으나(47절) 나다나엘의 예수님에 대한 처음 평가는 조롱하는 듯한 어투이다. 아마도 율법에 능숙했던 나다나엘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미 5:2). 그리고 당시 갈릴리인들은 그들의 교양의 부족과 멋없는 사투리와 이방과의 교역 때문에 멸시받고 있었다(Plummer). 그러한 상황 속에서 나사렛은 더군다나 갈릴리의 조그마한 한 촌으로서 구약성경에서 요세푸스의 역사에도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그 평판도 다른 고을보다 좋지 못했던 것 같다(마 13:58; 막 6:6; 눅 4:28). 그래서 나다나엘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나사렛 사람이라는 빌립의 소리에 어이없어 하면서 조롱하는 말을 하였던 것이다.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 '에르쿠'(오다)와 '이데'(보라)는 모두 명령형이다. 그러나 39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와 보라'와는 다소 다른 어감을 갖는다. 즉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은 스승이 제자들에게 하는 듯한 권위 있는 권면이나, 여기서는 친구가 친구에게 자기 의사를 강하게 밝혀 목적을 이루려는 강권하는 뉘앙스를 갖는다 하겠다. 빌립은 나다나엘의 강한 반론(反論)에도 불구하고 그를 강권하여 예수님에게 소개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논리로써 나다나엘을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직접 메시야와 접촉하도록 권유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Hendriksen).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 상대와 대화조차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의 성품을 꿰뚫어 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이 잘 나타난 구절이다. 긍정적인 필치의 '참'(알레도스)과 부정적으로 기술된 '간사한'(돌로스)이란 표현은 나다나엘의 성품을 잘 드러내 주는 수식어들로서 구약에 예언된 '여호와의 종'의 성품에 일치한다(사 53:9). 또한 '간사한'이라는 말을 앞서나오는 '이스라엘과 대비시켜 사용한 것은 역사적인 배경을 갖는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 등장하는 야곱은 그 이름까지도 '남의 발꿈치를 잡는', '간사한'이라는 뜻으로, 그의 성품은 한마디로 '간교'하였다(창 27:35). 야곱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받으려고 형과 아버지를 속이기까지 하였다(창 25:31-33; 27:18-26). 그러나 그가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 과거를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주셨다(창 32:28).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간사'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옛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나 적용되었던 말이며 이스라엘 사람이란 하나님과 진정으로 만난 진실한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 당시 이스라엘 사람 중에는 그 이름에 걸맞는 진실된 사람이 없고 외식적인 모습만이 가득했다(마 23장). 이러한 때에 주님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나다나엘을 보셨던 것이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라는 말씀은 나다나엘에 대한 예수의 평가, 즉 참 이스라엘 사람이며 간사가 없다는 그 의미를 잘 드러내 준다. 그러나 '참 이스라엘 사람'이며. '간사가 없다'는 것은 절대로 무흠하거나 죄가 없음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죄인 됨을 철저히 인정하며 참회자의 정신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이다. 또한 이는 당시 교권주의자들과 같이 외적인 종교 행위들로 자신을 치장하여 자신의 본 모습을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속이려는 간사한 태도가 없는 자라는 뜻이다.
1: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 나다나엘은 자기로서는 처음 대면하는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잘 아는 듯이 이야기하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따라서 그는 그 지식의 출처를 물어 자신을 누가 소개하였는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신적 통찰력을 가지고 그를 직접 아신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 이스라엘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무화과나무는 유대 민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왕상 4:25). 그리고 무화과나무가 만드는 그늘은 유대인들에게 좋은 휴식처나 공부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였다(Talmud, 'Berachoth' 2:8). 나다나엘도 그 나무 아래에서 율법을 공부하며 메시야의 오심을 기대하면서 기도와 명상에 잠겨 있었을 것이다(Lightfoot). 그러나 나다나엘을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는 것은 그를 어느 시점에 잠간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러한 삶의 자세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표현인 것이다.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 이러한 표현은 요 20:31에 기록된 본서의 저술 목적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와 부합되는 것이다. 추측컨대 이때 나다나엘은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고 계신 예수의 권위에 완전히 압도당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Barclay). 따라서 이처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완전하게 고백을 할 수 있었다. 아마 나다나엘은 이 순간에 가졌던 신앙보다 더 큰 신앙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Luther). 한편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개념은 구약의 예언에 그 근거를 갖는 표현으로 시 2편과 72편 등에서 인용되었다. 또한 신약에서도 메시야 칭호로서 이러한 표현이 등장하는데, 베드로의 신앙 고백 속에서 나타나며(마 16:16),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군중들의 찬양 가운데서도 언급된다(요 12:13).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이란 더욱 유대인들에게 잘 알려진 메시야의 별명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인식되었으며(삿 8:22,23), 이스라엘이 이방 세력들에 의해 큰 어려움을 겪었던 신약과 구약의 중간기 시대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할 왕적 권위를 지니신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 49절에서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사람이 자신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알고 있음을 보고 나다나엘은 그의 능력에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예수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분명하게 고백하였다. 이때 예수는 나다나엘에게 더 많은 크고 놀라운 것을 약속하고 계신다. 사실 나다나엘로 하여금 자신의 메시야 됨을 믿게 하신 것은 공생애 기간 중에 있었던 크고 놀라운 무수한 사건들에 비한다면 예수의 사역 중 하나의 작은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의 약속대로 예수는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이적과 권능을 나타내시어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셨다.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아멘'(진실로)을 중복하여 쓰는 것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독특한 용법으로 약 25번 나온다. 그러나 '아멘' 즉 '진실로'라고 일회적으로 쓰인 것은 공관복음서에 50번이나 나온다. 이처럼 예수께서 교훈을 주실 때 먼저 '아멘'이란 말을 즐겨 쓰신 것은 그의 고유한 언어 습관이다. 일반적으로 '아멘'이란 용어는 유대인들의 기도문의 마지막에 언급된다. 즉 유대인의 어느 문헌에도 이 단어가 문두에 언급된 예는 없다(Jeremias, Leen Morris). 오직 예수만이 이 말을 자신의 가르침의 서두에 두었던 것이다. 예수의 이러한 '아멘' 사용은 자신의 신적 신분을 의식적으로 밝히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즉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은 자신이 전하는 예언의 신적 기원을 알리기 위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란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기에 여호와의 권위를 다시 빌려올 필요가 없으며, 자신의 가르침이 곧 진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참 신이심을 밝히신 것이다.
하늘이 열리고. - 이와 같은 표현은 야곱이 벧엘에서 꾸었던 꿈을 연상시킨다(창 28:10-22). 즉 예수께서는 나다나엘로 하여금 쫓기어 도망가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 사건을 연상시키면서 나다나엘 역시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목격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또한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늘이 열리고 그 동안 죄로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될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실제로 확증된 바 있다(마 3:16; 눅 3:21).
인자. - 본서에서 이 용어가 처음 나타난다. 이 용어(톤 휘이온 투 안드로푸)는 일반적으로 예수의 인성(人性)을 가리키는 말로 간주되어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 주는 표현인 '하나님의 아들'과 대조되는 용어로 이해되었다. 여기서도 나다나엘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 한데 대해 예수님 스스로는 자신이 신이실 뿐 아니라 완전한 인간임을 밝히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는 견해가 있다. 이 용어는 예수의 자기 인식을 잘 드러내주는 용어인데 대다수의 문맥에서 '인자'라는 말을 사용함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단 7:13을 생각하고 계시다는 점에서 다른 접근이 가능하다. 즉 다니엘서에서 '인자'는 개인이자 하나님의 백성의 이상적인 대표자로서 천상적인 인물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종종 자신의 권세와 능력을 강조할 때 이 명칭을 사용하셨다(막 2:10,28; 눅 12:8). 그런 의미에서 여기서 '인자'는 인성을 표현한다기보다는 예수의 신적인 기원과 그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암시하는 용어임이 분명하다. 한편 인자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에 대해서는 눅 12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만백성의 구속이라는 큰 위업을 달성키 위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사역을 수종 드는 천사의 계속적인 수종을 받으셨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성자와 성부 간의 영적 교류를 의미할 수도 있으며(Meyer, Plummer), 예수님의 부활 시에 하늘로서 주의 천사가 내려온 것과 같은(마 28:2) 실제적으로 일어난 영적인 현상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재림 시 가장 영광스러운 형태로 이루어질 것이다.
1장 연구자료
안드레-형제를 전도한 제자
1. 인적 사항
① 안드레는 '강인함', '남자답다'라는 뜻.
② 시몬 베드로의 형제(눅 6:14).
③ 갈릴리 벳새다 출신의 어부(요 1:44).
④ 12사도 중 한 사람(막 3:18).
⑤ 세례인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됨(요 1:40).
2. 시대적 배경
A.D. 27년경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제자로 부름받아 A.D. 1세기 중반 이후까지 활동한 인물.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에 의하면 초대교회 확장기(A.D. 1세기 중반)에 안드레는 흑해 부근의 스구디아에서 전도 활동을 벌였으며 X형(型)의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그래서 X형의 십자가를 일명 안드레의 십자가라고도 한다.
3. 성품
① 세례인 요한의 예수에 대한 증거를 들은 즉시 예수를 좇은 것으로 보아 예수에 대한 열망과 결단력이 강한 자(요 1:35-40).
② 복음을 듣고 제일 먼저 형제 베드로를 주께로 인도한 것을 볼 때 실천적인 전도자(요1:40-42).
③ 자신이 전도한 형제 베드로가 부각될 동안 늘 조용하게 뒷전에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한 것으로 보아 매우 겸손하고 욕심이 없는 자(마 10:2; 17:1; 막 5:37; 14:33).
④ 굶주린 무리와 예수를 뵙고자 한 헬라인들을 위해 예수께 간청하는 등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아 인정 많은 자(요 6:8,9; 12:22).
⑤ 말세의 징조에 대해 예수께 물은 것으로 보아 계속해서 진리에 대해 관심을 갖은 자(막 13: 3,4).
4. 주요 생애
예수의 제자 이전 | ||
출생 | ||
가버나움에서 성장함 | 막 1:29 | |
어부로 생활함 | 마 4:18 | |
세례인 요한의 제자됨 | 요 1:35 | |
그리스도와의 첫 대면 | A.D. 27년 | 요 1:40 |
형제 베드로를 예수께 인도함 | 요 1:42 | |
예수님의 부름 받음 | 마 4:19 | |
예수의 제자 이후 | ||
사도로 세움 받음 | A.D. 28년 | 막 3:18 |
오병이어를 가진 소년을 예수께 인도함 | A.D. 29년 | 요 6:8.9 |
헬라인들을 예수께 인도함 | A.D. 30년 | 요 12:22 |
말세의 징조에 대해 물음 | 막 13:3,4 | |
예수 체포시 도망함 | 막 14:43-50 | |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 | 요 20:19 | |
예수님의 승천 목격 | 눅 24:50-53 | |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체험함 | 행 1:13; 2:1-4 | |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짐 |
5. 구속사적 지위
① 개인적 전도에 힘쓴 제자(요 1:41,42; 6:8,9; 12:22).
② 사도 가운데 핵심적인 위치가 아니었음에도 이를 만족히 여기며 자신의 사명을 수행한 자.
③ 초대 교회 설립자들인 12사도 중의 1인.
6. 주요 공적
① 형제 베드로를 예수께 인도함(요 1:42).
② 오병이어를 가진 소년을 예수께 인도해 예수의 오병 이어 기적을 체험함(요 6:8,9).
7. 주요 실수
① 예수께서 붙잡히실 때 예수를 버리고 도망감(막 14:43-50).
8. 평가 및 교훈
① 안드레는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즉각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린 채 주를 좇았다(마 4:19,20).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서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에 우리 성도들은 안드레처럼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조차도 주님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된다면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결단력을 갖추어야 하겠다(막 10:29-31). 실로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자는 주의 제자가 될 수 없다(마 16:24).
② 안드레는 한 번의 설교로 수천 명을 회개시킨 베드로(행 2:14-41)와는 달리 조용하게, 개인적인 접촉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그러나 이렇듯 안드레는 많은 사람을 전도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베드로를 예수께 인도함으로써 베드로를 통해 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오게 만든 장본인이다(요 1:42). 이처럼 오늘 우리가 대중적으로는 크게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나 우리가 전도한 한 영혼이 장차 하나님의 일에 어떤 큰 일을 감당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에 우리도 내가 가르치는 학생 한 명, 내가 전도하는 한 영혼, 내가 접하는 한 성도를 귀히 여기고, 무한한 가능성을 보며 힘써 복음을 전파해야 하겠다(마 13:23).
③ 안드레는 자기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께로 전도한 자이다. 그런데 이후 제자 생활을 보면 항시 베드로는 제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안드레는 아무 특권도 없이 뒷전에서 묵묵히 사명을 수행했음을 알게 된다(마 17:1; 막 5:37). 이로 보아 안드레는 열두 사도로서 선택된 것에 만족할 뿐 핵심자가 되지 못한 것을 결코 괴로워하지 않은 겸손하고 욕심이 없는 자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혹여 우리는 주의 일을 함에 있어 현재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불만하며 교회 안에서 핵심적인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을 괴로워하지는 않는가?
④ 벳새다 들녘에 모인 무리를 먹이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에 대한 빌림과 안드레의 반응은 너무나 달랐다. 빌립의 인간적 사고로 정확히 계산된 대답과는 달리 안드레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오병이어가 있음을 예수님께 고함으로써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이적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요 6:1-15).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적인 판단과 계산이 아닌 믿음을 가진 자들을 통해 일어난다(마 9:28; 막 9:22-24). 이에 우리 성도들은 나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지 말고 안드레와 같이 믿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겠다.
9. 핵심 성구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요 1:41)
1장 연구자료
나다나엘-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인
1. 인적 사항
① 나다나엘은 '하나님께서 주심'이라는 뜻.
② 갈릴리 가나 출신(요 21:2).
③ 친구 빌립의 전도를 받음(요 1:45).
④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요 21:2)
⑤ '바돌로매'(마 10:3)는 그의 다른 이름인 듯함.
2. 시대적 배경
A.D. 27년경 예수님의 공생애 개시 얼마 후에 제자로 부름받아 A.D. 1세기 중반 이후까지 활동한 인물, 당시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 사이에는 여러 형태의 종말론적인 메시야 대망 사상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정치적 메시야로서 이스라엘을 세계 최강국으로 만들어 행복을 누리게 할 자를 기다렸다. 그러나 나다나엘과 같은 일부 경건한 사람들은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바대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장차는 천국으로 인도하실 메시야를 기다렸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이런 메시야를 생각하고 있었을 깃이다.
3. 주요 생애
예수 대면 이전 | ||
출생 | ||
갈릴리 가나에서 성장 | 요 21:2 | |
빌립에게서 처음으로 예수님 소식 들음 | A.D. 27년 | 요 1:45 |
예수의 메시야 됨을 의심함 | 요 1:46 | |
예수님을 만남 | 요 1:47 | |
예수 대면 이후 | ||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함 | A.D. 27년 | 요 1:49 |
사도로 세움 받음 | A.D. 28년 | 막 3:18 |
권능 받아 이적 행함 | 마 10:1 | |
예수 체포시 도망함 | A.D. 7년 | 막 14:43-50 |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 | 요 20:19 | |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 | 눅 24:50-53 | |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함 | 행 1:13; 2:1-4 | |
복음을 전하다 순교함 |
4. 성품
① 마음에 생각한 바를 그대로 표현할 정도로 간사함이 없고 정직한 자(요 1:46).
② 빌립과 대화한 내용을 보아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메시야를 대망한 자(요 1:45,46).
③ 메시야를 대망하면서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한 것으로 보아 편견이 많았던 자(요 1:46),
④ 자신의 심중을 꿰뚫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신앙 고백을 드린 것으로 보아 영적 통찰력을 지닌 자(요 1:49).
5. 구속사적 지위
① 예수께로부터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함받은 자(요 1:47).
② 이전에 회의와 편견을 갖고 있었으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변화되는 성도의 표본이 된 자 (요 1:45-51).
③ 초대 교회 설립자들인 12사도 중의 1인.
6. 주요 공적
①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함(요 1:49).
② 12사도 중 한 사람으로서 사명 감당(막 3:18).
7. 주요 실수
① 예수가 비천한 나사렛 출신이라 하여 그가 메시야라는 사실에 대해 회의를 품음(요 1:46).
② 예수께서 붙잡히실 때 예수를 버리고 도망감(마 26:56; 막 14:50).
8. 평가 및 교훈
① 빌립에게서 나사렛 예수에 대해 들은 나다나엘은 자신의 회의적인 생각까지도 정직히 표현하였다(요 1:46). 이 같은 그의 정직함은 예수께로부터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게 했다(요 1:4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비록 회의와 의심의 모습일지라도, 성도들이 모든 것을 솔직하게 내어놓고 당신께 나아오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주님 앞에 내어놓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들이 되자.
② 나다나엘은 오실 메시야에 대한 구약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한 마디에 즉시 그가 메시야임을 알 수 있었다(요 1:49). 더욱이 그는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한회의(요 1:46)를 극복하고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예수를 기쁘게 했으며, 주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약속받았다. 이렇듯 우리도 성경 말씀을 늘 상고함으로써 진리를 이해하고, 혹 마음에 회의되어 오는 문제가 있다면 오직 기도와 말씀으로 이를 극복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③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진리를 깨달았을 때 이를 즉시 입술로 시인하고 고백함으로써 예수님을 바로 아는 신앙에 굳건히 설 수 있었다(요 1:49). 이와 같이 마음에 생각하는바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사도 바울도 "너희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7)고 했다. 이에 성도들도 우리가 가진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늘 고백함으로써 더욱 굳건한 신앙 위에 서도록 하자.
9. 핵심 성구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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