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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사울의 초대 교회 박해와 빌립 집사 등의 사마리아 지역 선교 및 빌립 집사의 에디오피아 내시 전도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제 8-12장까지 이어지는 일련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이 일련기사는 초대 교회의 선교 사역이 예루살렘을 벗어나 일단 유대와 사마리아 등 전팔레스틴 지역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나아가 빌립의 에디오피아 내시 전도, 안디옥 교회의 설립 등이 이루어지고 특히 후에 이방 선교의 기수로 사역하여 가히 이방인의 사도로 칭해졌던 바울의 회심 사건등이 발생하여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초대 교회의 선교 사역이 당시의 세계라 할 수 있는 전로마 제국에까지 끼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는 과정도 보여 준다.
이런 일련기사의 개시 부분인 본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전반부 1-3절은 사울 등을 위시한 여러 유대주의자들이 스데반의 순교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핍박을 시작하게 되어 예루살렘 초대 교회 성도들이 각처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초대 교회의 선교지도 더욱 확장되게 만들어서 이제 초대 교회 선교가 자연적으로 전팔레스틴 지역에까지 미치게 된 전환점이 이루어졌음이 보도된다. 그리고 특히 후에 바울로 개명하여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던 바울(Paul)이 회심 이전에 아직 사울(Saul)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을 때에 초대 교회를 박해하던 유대주의자들 중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중반부 4-25절은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선교 사역을 수행하였고 마침내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이 지역을 방문하여 이 지역 개종자들에게 성령 세례를 받게 함으로써 초대 교회가 이제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 지역에까지 공고히 뿌리를 내린 사실이 일부 주의 복음을 곡해한 마술사 시몬같은 자가 있기도 하였다는 객관적 사실 기록과 함께 보도된다. 끝으로 후반부 26-40절은 초대 교회의 선교를 배후에서 주도하시던 성령의 가장 역동적인 사역의 하나로 빌립 집사가 옛 블레셋 땅가사(Gaza)에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여 세례를 베풀었고 그 직후 빌립은 다시 성령에 이끌려 홀연히 사라졌다가 다시 역시 옛 블레셋 땅의 하나였던 아소도(Azotns)에서 복음을 전하였던 사건을 보도한다. 이는 일단 예수의 복음이 사마리아 전지역에 전해졌고 나아가 세계 각지로 뻗어 나가기 시작하였음을 강력히 암시하는 사건이었다.
전반부 1-3절에 보도된대로 스데반의 순교 사건을 계기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대대적인 예루살렘 교회 박해 사건이 발생하여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각처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복음(福音)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도들이 각처로 흩어져서 거기서도 복음을 전하므로 오히려 더욱 빨리 그리고 더욱 널리 주의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어떤 위기에도 소멸되지 않는 복음의 생명력과 아울러 인간의 눈으로는 위기에 불과한 상황을 궁극적으로는 오히려 더욱 더 큰 구원의 기회로 삼아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구속사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된 구속사의 생생한 모습의 하나이다. 한편 후에 회심하여 바울로 개명하고 기독교의 대사도가 되기 이전에는 유대주의자였던 사울의 초대 교회의 핍박에 대한 보도는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역사적, 문학적 복선(伏線)의 성격이 크다. 즉 다음 제 9장의 그의 회심 기사, 그리고 기실 제13-23장까지의 사도행전 후반부 전체가 바울의 이방 선교 사역 기사를 중심으로 전개되게 된다. 이에 저자 누가는 회심 이전의 그의 행적을 특히 유대주의자의 한사람으로서 초대 교회를 핍박했던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함으로써 이것이 그의 회심과 그 이후의 실로 위대한 선교 사역과 뚜렷이 대조되게 함으로써 결국 바울을 그토록 철저히 변화시킨 복음의 진정성을 암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회심 이전의 바울 곧 사울의 교회 탄압기사는 회심 이후의 그의 복음과 선교 사역에 대한 헌신과 연결하여 전체적으로 이해하여야 하는바 이에 대해서는 다음 제9장 개관을 보라.
중반부 4-25절의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지역 전도 기사는 후반부 26-40절의 빌립 집사의 에디오피아 내시 전도 기사와 함께 앞단락에서 암시된 대로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계기로 예루살렘 교회에 대대적 박해가 가해져서 예루살렘 성도들이 팔레스틴 전역과 해외 원근 각처 곳곳에 흩어져 거기서 선교를 계속하게 되었는바 이의 대표적 사례로 제시된 것이라 하겠다. 즉 본장 중반부와 후반부의 빌립 집사의 사역 기사는 초대 교회 당시 유대주의자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복음이 여러 사도와 초대 교회 성도들을 통하여 팔레스틴 전역과 심지어 해외 원근 각처에까지 뻗어 가던 시대의 사건 중 대표적인 실례로서 제시된 것이다.
특히 본 단락에는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후손이었으면서도 주로 앗시리아 포로기(B.C. 722 이후) 및 바벨론 포로기(B.C. 586-539) 이후부터 선민(選民)혈통의 순수성 보존 문제를 중심으로 유대나 갈릴리 지역의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를 당하여서 서로 심한 반목관계에 있던 사마리아(Samaria) 지역에 그 자신이 소위 디아스포라(diaspora)된 헬라계 유대인 출신으로서 비교적 사마리아인들로부터 반감을 사지 않던 빌립 집사가 먼저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후에 예수의 12사도 중에서도 대표격인 베드로와 요한이 방문하여 성령 세례를 받게 하는 등 사마리아 교회를 공고히 했던 일련 과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개관할 때에 우리는 주로 다음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첫째, 사마리아 선교 사역은 예루살렘에서 태동된 초대 교회의 선교 사역이 예루살렘과 유대를 탈피하여 마침내 전세계로 미치는 중간 가교(架橋)의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전날 주 예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당신의 복음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그리고 마침내 땅 끝까지 전하라고 말씀하셨었다(행 1:8). 이는 사도들을 향한 명령인 동시에 당신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사도들을 통하여 그렇게 역사하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런 사마리아 선교 사역을 통하여 우리는 주의 복음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던 그 시대의 구속사의 과정을 확인하는 동시에 우리의 구속주이신 주의 복음과 관련된 모든 약속은 필히 성취된다는 확신을 새로이 얻게 되는 것이다. 둘째, 그토록 반목이 심했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복음을 전하고 받으면서 서로 하나가 된 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랑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그 어떤 죄도 그리고 인간과 인간끼리의 어떤 편견과 반목도 초월하여 양자를 화해시킬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런 복음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구속사의 은혜를 새삼 깨닫는다. 셋째, 마술사 시몬의 행태에서 드러나듯이 복음의 실체와 복음이 약속하는 구원의 원대한 비전(vision)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자는 외적으로는 교회에 속해 있다 할지라도 매양 복음의 겉모습들 곧 교회의 조직, 겉으로 드러난 은사, 각종 전통과 의식만 받아들일뿐 참 구원을 얻지 못하며 나아가서는 실로 경건을 유익의 재료로만 생각하는 자가 늘 있다는 사실이다(딤전 6:5). 이에 먼저 바로 내가 그러한 자가 아닌가 돌아보는 구속사적 반성이 있어야 하겠다.
한편 후반부 26-40절은 초대 교회의 선교 사역 기사 중에서도 성령께서 특히 역동적으로(dynamically) 역사하신 대표적 사건들 중의 하나로서 이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초대 교회의 선교사역의 지평(地平)이 팔레스틴을 넘어 이방 땅까지 미치기 시작하였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 기사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할 때에는 다음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고려해야 할 것이다.
첫째, 본 기사 자체가 강조하듯이 전도 사역을 지시하고 또 주도한 것은 성령(聖靈)이란 사실이다. 빌립 집사는 다만 도구로서 충실히 복음을 전했을 뿐이다. 이는 구속사의 근본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다만 그 도구에 불과하다는 구속사의 원칙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그리하여 결국 구속사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취되며 이때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빌립 집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즉각적이고도 전적인 순종과 헌신임을 보여 준다. 그리할때 하나님의 종은 위대한 구속 사역에 동참하여 공적을 쌓아 하늘나라에서 더욱 더 큰 상급을 얻을 것이다(계 2:10).
둘째, 우리는 본 기사를 전도의 대상이 되었던 에디오피아 내시(eunuch)의 측면에서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이 당시 사도들과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그가 구약성경을 통해서나마 하나님을 알고 또 섬기고 있었으리라는 것, 그에게 전도하면 그가 주를 영접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되지 않는 전혀 낯선 전도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빌립 집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여러 약속과 예언을 성취하시고 이제 새로이 신약을 주신 구주이심을 전했을 때 곧 이를 깨닫고 주를 영접하여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는 우리로서는 상상도 하지 않은 곳에 그 심령이 어두운 가운데에서나마 하나님을 사모하는 영혼이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우리가 오직 진정으로 주의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그가 곧 주를 영접하도록 성령이 우리를 통해 역사하실 것임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먼저 성도된 우리는 선입관을 버리고 참으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우리의 전생활로 복음을 전하며 증거하여야 한다는 구속사적 의무를 새삼 각성케 된다(딤후 4:2). 또한 그는 일국의 고관으로서 그의 개종(改宗)으로 이방 국가이던 에디오피아(Ethiopia)의 복음화에 큰 진전이 있었는바 우리는 특히 국가는 물론 각급 사회의 지도자(指導者)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주력해야 한다는 선교의 방법론적 측면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왕하 5:1-19).
외울 말씀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행 8:32)
사울의 초대 교회 박해
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전도
4 ○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마술사 시몬의 회심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9 ○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베드로와 요한의 사마리아 방문
14 ○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의 망상과 베드로의 책망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24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두 사도의 예루살렘 귀환
25 ○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빌립의 에디오피아 내시 전도
26 ○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아사야의 글을 읽더라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31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37 (없음)
38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39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본문 & 자료노트
도표-8:1-3 교회에 대한 사울의 핍박
1. 경건한 집사 스데반의 처형에 동의함(행 8:1; 22:20)
2. 교회를 무자비하게 잔멸함(행 8:3; 갈 1:13)
3. 각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들어가 남녀를 끌러내 옥에 넘김(행 8:3)
4. 여러 도시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해 예루살렘에서ㅓ 형벌을 받게 함(행 22:5)
5.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일에 동의함(행 26:10)
6.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문하여 주를 저주토록 강요함(행 26:11)
지도-8:5-8 빌립의 복음 사역 여정
도표-8:26-40 성령의 주요 사역들
1. 그리스도에 대한 사역
1) 잉태케 하심(마 1:18)
2) 물 세례시 성령 임재하실(마 3:16,17)
3) 시험을 이기게 인도하심(마 4:1)
4) 이적을 행케 하심(마 12:28)
5) 그리스도를 성령충만케 하심(눅 4:1)
6) 권능으로 가르치게 하심(눅 4:18,19)
7) 성령 안에서 기뻐하게 하심(눅 10:21)
8) 인치심(요 6:27)
9) 성령 안에서 슬퍼하게 하심(요 11:33)
10) 예수가 주이심을 증거하심(요 15:26)
11)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심(딤전 3:16)
12) 성령 안에서 헌신하게 하심(히 9:14)
13) 부활케 하심(롬 8:11)
2. 성도에 대한 사역
1) 규례를 지켜 행할 수 있게 하심(겔 36:27)
2) 권능을 주심(미 3:8; 눅 24:49
3) 환난 때에 할 말을 주심(막 13:11)
4) 거듭나게 하심(요 3:35)
5) 위로해 주심(요 14:16-19)
6) 모든 것을 가르치심(요 14:26)
7) 그리스도를 증거하심(요 15:26)
8)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요 16:13)
9) 성령 세례를 주심(행 2:17-41)
10)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심(5:5)
11)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심(롬 8:2)
12) 하나님 자녀임을 증거하심(롬 8:16)
13) 성도를 위해 간구하심(롬 8:26,27)
14) 기쁨을 주심(롬 14:17)
15) 소망을 갖게 하심(롬 15:13)
16) 거룩케 하심(롬 15:16; 살후 2:13)
17) 분별력을 주심(고전 2:10-16)
18) 하나님 은혜를 알게 하심(고전 2:12)
19) 성도 안에 내주하심 (고전 3:16)
20) 은사를 주심(고전 12:3-11)
21) 성도를 연합케 하심(고전 12:13)
22) 인치심(고후 1:22)
23)자유케 하심(고후3:17)
24) 구원의 보증이 되심(고후 5:4.5)
25)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심(갈 5:22,23)
26)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심(엡 2:18)
27) 성도 간에 서로 교제케 하심(빌 2:1)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심(빌 2:13)
3. 교회에 대한 사역
1) 성령으로 충만케 하심(행 2:4)
2) 전도 명령을 내리심(행 4:29)
3) 위로해 주심(행 9:31)
4) 선교사를 파송도록 하심(행 13:2-4)
5) 거룩하게 하심(롬 15:16)
6) 세례를 주심(고전 12:13)
7) 하나가 되게 하심(고전 12:13)
8) 복음을 힘있게 하심(살전 1:5)
4. 성경에 대한 사역
1) 성경을 가르치며 해석해 주심(요 14:26)
2) 시편에서 말씀하심(행 1:16)
3)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심(행 28:25)
4) 성경을 깨닫게 하심(고전 2:10-14)
5) 성경 말씀을 감동케 하심(딤후 3:16)
6) 사람들을 통해 기록케 하심(벧후 1:21)
5. 세상에 대한 사역
1) 성부, 성자와 함께 창조하심(욥 33:4)
2)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심(대하 36:22)
3) 세상의 죄에 대해 책망하심(요 16:8-11)
4) 사람들을 구원에 초대하심(계 22:17)
도표-8:1-24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사역의 결과
1. 사마리아인들이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음(6절)
2.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나감(7절)
3.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치유받음(7절)
4.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기쁨이 가득함(8절)
5. 마술사 시몬을 따르던 남녀가 다 복음을 믿고 세례받음(9-12절)
6. 백성들이 청종하던 마술사 시몬도 복음을 믿고 세례받음(9-13절)
7.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로 믿는 자들이 성령을 받음(14-17절)
역사배경-8:1-3 초대 교회 박해사
본권 행 12장 연구자료 참조
인물연구-8:2, 스데반
본권 행 7장 연구자료 참조
인물연구-8:3, 사울
본권 롬 1장 연구자료 참조
보감-8:9-24 마술사 시몬의 8가지 어리석음
1. 복음의 말씀보다는 초자연적인 이적에만 관심을 쏟는 신비주의에 빠짐(13절)
2. 겉으로는 믿는 척하면서 진정한 회개는 하지 않는 위선을 보임(13-19절)
3. 성령마저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황금만능주의에 빠짐(18,19절)
4. 명예를 얻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명실 지상주의에 빠짐(18,19절)
5. 자신의 마술과 성령의 역사를 구분 못하는 영적 무지를 드러냄(18-20절)
6. 복음을 듣고도 진정한 믿음을 갖지 못하므로 여전히 불의에 매여 있음(21절)
7.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고도 회개치 않는 완고한 모습을 보임(22,24절)
8. 회개는 없이 하나님의 진노 피하기만 바라는 이기주의에 사로 잡힘(24절)
주요주제-8:12,13,16 세례의 이해
본장 연구자료 참조
주요주제-8:15-17 성령 세레와 성령 내주 및 성령 충만
본권 행 9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8:28-30 성경 읽을 때의 올바른 자세
성도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장 정확히 알며 또 그 뜻대로 살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생활에 있어 성경을 읽는 것은 더 없이 중요한 일인데, 과연 어떠한 태도로 성경을 읽는 것이 유익된 것인지를 살펴보자.
1. 말씀을 가감치 말고 읽음(신 4:2)
2. 즐거워하며 읽음(시 1:2)
3. 간절한 마음으로 읽음(시 119:9,10)
4.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음(시 119:48)
5.겸손한 태도로 읽음(약 1:21)
6. 날마다 지혜롭게 읽음(행 17:11)
7. 가르침을 경청하며 읽음(행 8:31)
8. 성령 도움을 간구하며 읽음(고전 2:13)
9. 말씀을 적용시키며 읽음(히 4:12)
10. 그리스도를 발견하며 읽음(딤후 1:13)
원어연구-8:39, 흔연히
세례를 받고 난 후 내시는 흔연히 길을 떠났다. 여기에서 '흔연히'는 어떤 뜻인가? 우리말로 '흔연(狀然)하다'는 '마음에 흐뭇해 하다'라는 뜻이다. 비록 이 말이 일상적으로 쓰는 쉬운 용어는 아니지만 원어의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이로'인데. 이 동사의 기본적인 의미는 '유쾌하게 되다'이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대부분 '즐거워하다'(눅 19:6; 요 8:56) 또는 '기뻐하다'(마 2:10; 눅 6:23)로 번역되었다. 또 이 동사는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인사로도 많이 쓰였다(마 28:9; 행 15:23). 이로 볼 때 '카이로'는 지극한 평은과 안정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기쁨 또는 만족을 묘사한다 하겠다.
본문에서 에디오피아 내시는 빌립 집사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또 세례를 받음으로써, 세상이 줄 수 얼는 귀한 평안을 소유하게 되었다(요 14:27). 그 평안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기쁨, 또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혔던 죄의 얽매임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그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빌립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도 이 에디오피아 내시와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하여 얼마나 기쁨과 감사를 느끼고 있는가 돌아볼 일이다.
풍습-8:18, 안수
본서 1권 창 48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8:25-40 초대 교회의 선교사
본권 행 서론 특별자료 참조
지리배경-8:40, 가이사랴
본권 행 10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8:22 성도가 놓치지 말아야 할 8가지 기회
본서 6권 왕하 13장 자료노트 참조
8:1-3 흩어지는 교회
본장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만 한정되지 않고 일단 유대와 사마리아 및 팔레스틴 근경 지역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기록한 제 8-12장까지의 기사의 도입부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즉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마침내 전로마 제국으로 확장되는 중간기적 선교 사역을 보도한 8-12장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이런 본단락은 초대 교회의 복음 전파사역이 예루살렘을 벗어나 팔레스틴 전역에 미치게 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스데반의 순교에 즈음한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 대한 유대주의자들의 대대적인 박해를 언급하고 있다. 즉 스데반 집사의 순교(행 7:54-60)를 계기로 유대교는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 대한 박해를 한층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유대교의 박해를 피해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지만 거기서도 계속 복음을 전함으로 결국 초대 교회는 예루살렘과 유대라는 지 역적 ․ 민족적 틀에서 벗어나 사마리아와 이방 세계에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전기를 맞은 것이다. 또한 이러한 본문에는 특별히 유대교 신봉주의자인 사울(바을)이 교회를 극심하게 박해하는 모습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는 9장에서부터 언급될 본서의 중심 인물의 한 사람인 바울의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자연스런 등장을 위한 도입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에 나타난 유대교의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박해의 동기 및 결과와 그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박해의 동기이다. 유대교의 교회에 대한 박해의 표면적인 이유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기득권 수호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라'(행 1:8)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수행하지 않고 현상태에 안주하려는 교회에 대한 주님의 질책인 동시에 이방 세계에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이자 성령의 역사의 결과였다.
다음으로 박해의 결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라는 지역적 울타리를 벗어나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을 위하여 이방으로까지 전파되었다. 즉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로 시작된 이방 선교(4-8절)는 선교의 중심지를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로 옮기는 결과를 가져왔고(행 13장), 특별히 교회의 극심한 박해자였던 사울을 변화시켜 전도자 바울이 되게하여 이방 선교의 사명자가 되게 하기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박해의 의미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는 박해를 통하여 참된 교회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공동체의 삶과 봉사의 모습을 통하여 신앙의 성숙을 가져온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이제는 한 걸음 나아가 세상의 불신자들을 위한 선교하는 교회의 모습도 가져서 더욱 완전한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 예루살렘 교회는 모이는 교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흩어져서 선교하는 교회도 된 것이다. 한편 교회에 대한 유대교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온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예루살렘 교회를 지켰는데. 이는 예루살렘 교회가 복음의 중심 공동체였던 까닭이다. 하여튼 다른 곳으로 흩어진 성도는 이방 세계의 선교를 위해 파송된 선교사었으며, 예루살렘 교회는 복음 전파의 모체가 되었다.
이상의 내응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교회는 모이기를 힘써야 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들고 각지로 흩어져 세상의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의 방주인 교회로 불러들이는 일에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②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소홀히 하면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를 질타하실 것인즉 성도들은 자신의 본분을 바로 인식 하고 주어 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③ 사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기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에 4:16)는 순교자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신앙인들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자기를 날마다 부인하고 오직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마 16:24; 롬 8:13; 갈 5: 24).
8:1 사울. - 행 7:58 주석 참조.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 본문은 7장에 연속되는 내용이다. 즉사울은 기독교 박해에 열심이었으며(행 9:1) 스데반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으나 그가 유대인들에게 죽임당한것(행 7:57-60)을 당연히 여겼다. 그럼으로써 사울은 의로운 스데반을 죽이는 데 동참했으니 훗날 그는 이일을 고백하며 뉘우친 것이다(행 22:20).
그 날에. - 여기서 '그 날'이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죽인 바로 그날인지(Meyer, Konwling), 아니면 스데반이 죽은 날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은 때인지(Alford, Hervey)에 대해 이견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전자의 견해가 유력시된다. 즉 지금까지 사도들에 의해 점점 그 세력이 커져 가고 있던 기독교에 대해 적의와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유대의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자들은 스데반을 죽인 그 여세를 몰아 당일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핍박을 가한 것이다. 따라서 스데반의 순교는 초대 기독교 수난의 서곡이었으며 성도들이 각지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4절).
큰 핍박이 나서. - 초대 교회에 대한 최초의 박해는 유대인들에 의한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로마 당국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겨 유대교 자체내의 분쟁 정도로 생각하고 방관하였다. 그러나 박해를 피해 세계 각처에 흩어진 성도들에 의해 복음이 로마 제국 전체에 급속히 전파되고 그 결과 기독교인들의 수가 증대되자 로마 당국은 점차 예의 주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로마의 국교인 황제 숭배가 이들에 의해 거부되자 로마에 대한 불충(不忠), 사회 혼란 야기 등의 이유로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성도들에 대한 이같은 박해는 이미 예수께서 예고하신 바로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말씀하셨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도 성도의 궁극적 승리를 확신하는 가운데 핍박당하는 초대 교회 성도들을 위로, 격려하였다(살후 1:3-12; 딤후 3:1-5,12; 벧전 4:12-19).
사도 외에는 다…흩어지니라. - 이처럼 교회에 대한 핍박이 심하자 세계 선교의 중심지가 될 예루살렘 교회를 수호하고 지도해야 할 핵심 세력인 사도들 이외에는 예루살렘 성내에 있던 많은 제자들이각지로 흩어졌다. 물론 예수께서는 이미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마 10:23)고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따라 흩어졌다기 보다는 아마도 핍박에 따른 고난을 피해 자연스럽게 흩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흩어짐으로 도리어 주께서 말씀하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지상 명령을 이루기 위한 첫 행보를 내디딘 것이다. 따라서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 닥친 거센 핍박은 세계 각처에 흩어져 복음을 증거하라 하신 주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예루살렘에만 모여 있던 제자들을 강제적으로 흩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적 방편이었다고 하겠다.
8:2 경건한 사람들. - 이는 유대인 기독교도들을 가리키는지(Bruce) 아니면 복음에 호의적이었던 유대인들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Hervey). 그러나 사도들외에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대부분 흩어졌다는 사실(1절)로 미루어 보아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을 때에도 이들 '경건한 유대인들'(행 2:5)은와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으며, 아나니아도 경건한사람이라 불리웠다(행 22:12). 예수 당시에도 요셉이나(눅 23:50) 니고데모(요 3: 1)와 같은 경건한 사람이있었다. 한편 이 경건한 사람들은 의롭게 죽은 스데반의시신을 서슬 시퍼런 유대인들에게서 빼어내 장사하였다.
위하여 크게 울더라. - 물론 이는 유대인들의 장례 풍습에 따른 애곡(哀哭)이긴 하다(창 50:3). 삼하 3장 자료노트, '히브리인의 장례식' 참조. 그러나 이는 정녕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 부당한 죽음을 당한 데 대한 슬픔의 토로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당시 산헤드린의 판결에 따라 형벌의 죽음을 당한 자를 위하여 공개적으로 애곡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의 죽음을 크게 애통해 한 것으로 보아 그들 중에는 유대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Longeneker).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겼던 사울(1절)이 한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교회를 적대하는 장면이다. 한편 '잔멸할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뤼마이네토'( )는 70인역(LXX)에서 맹수가 포도원을 파헤치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시 80:13). 따라서 사울은 마치 성난 맹수처럼 기독교인이 거주하는 집을 샅샅이 뒤져가며 기독교도 소탕 작전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Bruce, Toussaint). 행 9:1에 의하면 사울이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라고 하고 있는데 그는 실로 살의를 품고 그리스도의 도를 좇는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이러한 그의 잔혹한 행위는 후에 주의 은혜를 받고 고백하는 내용 속에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행 22:4; 26:10; 갈 1:13; 딤전 1:13).
8:4-8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 대한 유대교의 박해는 성도들을 유대와 사마리아를 비롯하여 이방 각지로 흩어지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복음의 확장을 가져오게 했다(1-3절). 본문은바로 그 복음의 확장 과정 중에 있었던 여러 사건들 가운데 하나의 실례로서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전도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빌립 집사의 사역은 스데반 집사의 사역(행 6:8-760)과 함께 베드로의 유대 사역(행 9:32-10:48)과 바울의 이방 사역의 교량적 역할을 한다는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즉 빌립의 사마리아에서의 전도 사역은 '예루살렘 및 유대'와 '땅 끝'을 잇는 의의를 갖는 것이다.
이외에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사역이 갖는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 실천 단계에 들어섰다. 예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고 말씀하셨는데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전도를 시작으로 그 명령이 실천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또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의 화합과 일치를 가져왔다. 사실 유대와 사마리아는 민족적 · 종교적으로 매우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마 10:5 주석 참조. 그런데 이제 빌립 집사의 복음 전도로 인해 예수 안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감정적 대립이 사라지고 평화와 사랑의 공동체가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어떠한 불일치도 하나로 만들어 주는 복음의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잘 보여 준다.
한편 이상의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복음에는 차별이 없으며 오직 복음을 수용하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의 보편성을 알 수 있다(롬 1:16,17).
② 빌립은 복음을 전함은 물론 치유와 축사의 이적도 함께 베풀었는데, 이는 생명의 복음이 있는 곳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도 함께 있음을 시사한다.
8:4 그 흩어진 사람들. - 스데반이 죽고 그 날에 핍박이 있을 때 사도들 이외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진 모든 성도들을 지칭한다(1절).
두루 다니며. - 핍박을 피해 흩어진 성도들이 핍박이 두려워 집 안에 칩거하지 않고 두루 다니며 복음을 증거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마땅히 공포에 질려 있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각기 흩어진 지역을 돌며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계속해서 당신의 구속 사역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결과이니(1절 주석 참조) 실로 하나님의 경륜은 인간의 생각과 달라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다고 하겠다(사 55:9).
8:5 빌립. - 이 사람은 초대 교회가 구제 사업을 효과적으로 행하기 위해 뽑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다(행 6:3-6). 그리고 빌립 집사도 스데반과 같이 구제 사역 뿐만 아니라 본문에서 처럼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사역에 열심하여 뭇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후에 '전도자'라는 칭호로 불리웠다(행 21:8). 빌립의 복음 전도 여행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사마리아 성. - 후기 사본들에는 대개 관사가 생략되어 있어 사마리아에 있는 어느 성 중 한 성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NIV, NEB, RSV, Bengel). 그러나 시내 사본(א), 알렉산드리아 사본(A), 바티칸 사본(B)에는 관사가 있어 사마리아 지방의 수도에 있는 사마리아 성을 지칭한다. 대개는 이 후자의 견해를 취하고 있다(KJV, Hervey, Bruce). 구약 시대에도 이 성은 사마리아 성으로 불리웠다(왕상 13:32; 16:24). 그러나 헤롯 왕이 이 성을 재건축하면서 황제 아구스도의 헬라명을 따라 세바스데(Sebaste)라고 하였다(Josephus). 왕하 17장 자료노트, '사마리아의 역사' 참조. 한편 어떤 학자들은(Lake, Neil) 당시의 사마리아 성이 이처럼 헤롯에 의해 세바스테로 불리웠으므로 본문의 사마리아 성은 고유의 사마리아 성이 아닌 다른 성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의 학자들은 사마리아 성이 고유의 사마리아성이라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8:6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 이처럼 듣고 보는 것은 어떠한 사실을 믿는 믿음에 이르는 중요한 과정이다. 빌립은 복음의 진리에 관하여 말했으며(5절), 또 그 말씀의 능력을 입어 표적을 행했다. 그래서 청중들은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본 후 그 말씀을 좇았다. 이러한 본절은 당시 표적이 사람들을 믿음의 길로 이끄는 데에 큰 역할을 했음을 증거해 준다(행 2:43;6:8). 그러나 오늘날에는 복음의 진리가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으니 우리는 더 이상 표적에 의존하지 않고도 말씀을 전파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으므로 듣는 자의 심령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다(히 4:12).
일심으로…좇더라. - 이처럼 빌립의 말에는 표적이 따라 하나님의 주신 권위가 드러났으니 듣던 자들이 한 마음으로 그의 말을 좋았다. 여기서 '말을 좇다'는 것은 곧 '그 말한 바를 믿었다'는 뜻으로 신앙의 길로 들어선 것을 가리킨다.
8:7 귀신들이…나가고…나으니. - 더러운 귀신들을 내어쫓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은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허락하신 능력이다(마 10:1). 또한 예수께선 믿는 자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고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고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낫게하는 권세를 주셨다(막 16:17,18). 빌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러한 능력들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사마리아 성의 귀신들과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 전에는 그리스도 자신과 특별한 때에 사도들만이 이 인류를 괴롭히는 귀신과 병마를 물리칠 수 있었으나 주의 영이 강림하신 후(행 2:1-4)에는 이처럼 성령이 충만한 자는 모두 그러한 기사와 표적을 능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바야흐로 성령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8: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 사마리아 지역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들이 주로 살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전통을 중시하는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들은 전통적인 예배의식에서 멀어져 하나님을 섬기기는 했으나 이방 우상숭배와 혼합된 형태를 취했다. 당시 사마리아 지역에 귀신들린 자와 병자가 많고, 마술을 행하는 자가 득세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까닭에서 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빌립이 참 진리인 그리스도 복음을 전파했을 뿐 아니라 병자를 고쳐준 사실은 사마리아인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줄 수밖에 없었다. 즉 영적 암흑이 심한 가운데 영적인 빛을 발견한 그들의 기쁨은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승천 이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란 지상명령(행 1:8)에 따라 복음이 점차 확산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의 실중이기도 하다.
8:9-13 마술사 시몬
본문은 앞단락(4-8절)에서 언급한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전도 사역의 성공적 사례의 하나로, 사마리아 백성의 구원에의 참여와 마술사 시몬의 회개를 소개하고 있다. 시몬은 본래 마술을 행하던 자로 마술을 통해 사마리아인들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찬사를 받던 인물이다(9-11절). 하지만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사역에서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시몬에게서 빌립에게로 향하게 했으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했다(12절).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시몬마저도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된다 (13절). 물론 시몬의 회개가 진실했느냐 하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의 능력마저도 돈으로 사려했기 때문이다(18,19절). 아마도 그는 복음의 핵심이나 실상보다는 빌립을 통해 나타난 성령의 역사에만 매료되어 복음을 받아들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의 회개와 세례는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매우 큰 영향력을 끼쳐 많은 사람들이 회개케 하는데 공헌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사마리아 전도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예루살렘 교회에 가해진 박해는 결과적으로 복음이 널리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는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 대한 유대교의 박해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결과요, 성령의 역사의 결과라는 것을 잘보여 준다.
8:9 시몬이라 하는 사람. - 이 인물에 대하여 본문 이외에서는 언급이 전혀 없고 오직 여러 전설들만이 남겨져 있다. 같은 사마리아 출신인 순교자 져스틴(Justin)에 의하면 그는 사마리아의 깃톤(Gitton)에서 출생하였으며 애굽으로 유학하여 철학과 마술을 배워 귀국한 후 활동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특히 그는 마술에 능하여 일명 '마술사 시몬'(Simon Magus)이라 불리웠다 한다(Casey).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시몬은 그노시스파(Gnosticism)의 우두머리였으며(Contra Haereses. 1:23) 베드로를 극렬히 반대했다고 한다(Toussaint). 그리고 로마에서도 이적과 마술을 행하고 마침내는 시몬교의 창시자가 되어 스스로 신이라고 자처했다고 한다(Bruce). 그러나 당시에는 시몬이라는 동명이인이 많아 본문의 시몬에 관한 이러한 전설이나 전승의 진위성을 확인할 길이 없다.
마술을 행하여. - 마술은 본래 고대 바벨론과 애굽에서 성행하였는데 당시의 팔레스틴 지방에서도 유행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사람의 눈을 속이거나 귀신의 힘을 빌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성경에서는 일찍부터 금하였다(신 18:10-14). 창 44장 자료노트, '점과 마술' 참조.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 '놀라게 하며'라는 동사 '엑시스타노'는 '황홀하게 하며'라는 뜻이다. 행 2:7주석 참조. 즉 시몬의 마술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그러나 생명의 길에 관한 빌립의 말과 표적은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8절).
자칭 큰 자라 하니. - 마술사 시몬은 스스로 '큰 자'라고 떠벌렸던 것 같다. 사람들은 그러한 그에게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다'(10절)고 하며 칭송했으니 실상 시몬은 사람들의 말대로 하나님의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그는 겸손하지도 않았고 또 성령의 충만함도 입지 않았다. 단지 그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마술을 행했을 뿐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자신을 높였던 것이다(18-23절). 교부 터툴리안(Tertulian)에 의하면 그는 자신을 '지극히 높은 아버지'라고 하였다 하며, 제롬(Jerome)에 의하면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이며 전능자며, 하나님의 모든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Lenski). 이러한 사실로 보아 시몬이 그노시스파(영지주의)의 우두머리였다는 전설은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8:10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 - 시몬 자신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백성들도 그를 크다고 하였는데 그 범위는 상하 모든 계층을 망라하였다. 이는 시몬의 마술이 특출하였거나 아니면 시몬이 사마리아 백성들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 속였음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하나님의 능력'이란 본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별칭이나(Justin)본절에서는 '신의 능력을 가진 큰 자'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8:11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 확실히 시몬의 마술은 당시의 다른 마술사들의 것보다는 특출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시몬의 마술은 사술(邪術)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기간 동안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을 것이다. 전승에 의하면 시몬은 애굽으로 유학하여 마술을 배웠다고 한다. 본장 9절 주석 참조. 애굽의 마술은 상당히 수준급이었고 세계적으로도 선두의 자리를 달렸었다. 그러한 애굽은 모세의 출애굽 당시에도 마법사들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모세의 이적에 대항하여 마법을 행했었다(출 7:11). 한편 본문에는 9절에 이어 다시 '놀랐다'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 역시 '황홀감에 빠졌다'는 의미이다. 행 2:7 주석 참조.
저희가 청종하더니. - 원문상 정확하게는 '저희가 청종했었다. 그러나'라는 말이다. 시몬의 특출한 마술로 인해 사람들은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구분없이 시몬을 따랐다(10절). 그러나 빌립이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고 표적을 행하자 사람들은 더 이상 시몬을 청종하지 않고 빌립을 청종하게 되었으며 시몬마저도 빌립을 따르게 되었다(12,13절). 사실 진리의 말씀이 없는 곳에는 진리가 아닌 것이 진리의 자리에 서서 사람들을 미혹시킨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이 그곳에 들어가면 결국에는 미혹시키는 것들을 물리치기 마련이다.
8:12 하나님 나라. - 빌립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전한 것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였다. 이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는 복음의 핵심이다. 아마도 빌립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그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인류를 구속하시고 이를 믿는 자는 주께서 통치하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전도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마 13:24-52; 막 1:15의 주석 및 눅 서론 특별자료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 빌립은 하나님 나라에 이어 또다른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 능력을 발휘케 하는 예수의 이름에 대하여 전도하였다. 행 3:6 주석 참조. 이는 빌립의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 후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의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력을 얻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야 함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다 세례를 받으니. - 8절에서 사마리아 성 사람들은 빌립이 귀신들린 자들과 병든 자들을 고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그러한 사마리아 백성들은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빌립이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해 전도함을 받고, 그것을 믿었으며, 또 세례를 받아 구원에 참여하였다. 이는 실로 복음이 예루살렘을 벗어나 다른 지역에 전파된 결과 거둔 귀중한 첫 열매가 아닐 수 없다.
8:13 시몬도 믿고, - 특출한 마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그로 인하여 스스로 큰 자라고 했으며(9절) 또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에 이르는 모든 사람들로부터도 큰 자라고 인정받던(10절), 즉 사마리아 성에서 빌립이 오기 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마술사 시몬도 이처럼 빌립이 전한 바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따라서 이러한 시몬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면 그를 청종하던 대다수의 사람들도 그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에는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 빌립의 표적에 놀란 시몬은 일곱 집사의 한 사람이요(행 6:5) 전도자로 불리운(행 21:8) 빌립을 스승으로 모시고 전심으로 그를 따라 다니며 조역자 노릇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예수의 복음을 믿고 빌립을 좇아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18절로 보아 그는 자신보다 더 큰 표적과 능력을 행하는 빌립으로부터 그 비법을 전수받기 위하여 빌립을 추종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 본장에서 '놀랐다'는 동사가 세 번 나타나는데 본절이 그 세 번째이다(9,11절). 그러나 본절에서 놀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시몬이었다. 즉 9절과 11절에서는 시몬이 사마리아 백성들을 놀라게 했으나 본절에서는 빌립이 행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도리어 그가 놀란 것이다. 시몬 자신도 마술 행함에 있어서는 특출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으나,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입고 행하는 빌립의 표적과 큰 능력 앞에서는 그 역시 진정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8:14-25 베드로와 요한의 사마리아 방문
앞에서는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전도와 그 성과 등을 살펴보았다(1-13절). 이어 본문은 사마리아 전도의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하여 성령 세례를 주는 장면과, 마술사 시몬이 돈을 주고 성령의 능력을 사려다가 책망 받는 모습을 소개한다. 이러한 본문의그 중심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베드로와 요한의 파송이다(14-17절).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된 두 사도는 사마리아 선교의 진상을 파악하고 빌립을 돕기 위하여 사마리아를 방문하였다. 이전에 사도들이 예수님을 좇아 사마리아에 왔을 때는(요 4:3-42) 매우 꺼리는 심정이었으나 이제는 예수님의 사역을 대신하여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가지고 온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안수(手)를 통하여 성령이 임함으로 그 동안 쌓여 있던 유대와 사마리아의 해묵은 감정이 신앙으로 무너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즉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반목(反)과 갈등은 화해와 사랑으로 변화되기에 이른 것이다(엡 2:13-22).
둘째는 사도들의 능력을 보고 은사 매매를 제의한 마술사 시몬의 어리석음과 이에 대한 사도 베드로의 책망이다(18-24절). 시몬은 복음을 받아들였음에도(13절) 영생의 구원보다는 초자연적인 표적과 능력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도들이 행하는 성령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개인적 유익과 이익을 위해 추구했던 마술이나 사술(邪術)과 같은 것으로 혼동하였다. 결국 시몬은 돈으로 성령이 임재하도록 하는 능력을 사고자 했는데, 이는 돈으로 사물의 가치를 결정하던 구습(舊習)을 아직 버리지 못한 것과영적 세계에 대해 무지한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시몬은 사도 베드로의 책망과 더불어 회개의 권고를 듣게된다. 하지만 그는 회개하기 보다는 이를 회피하고 만다.이것은 마치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을 보고 예수님을 좇았지만 그를 구원의 주로 깨닫지 못한 백성들의 불신앙과 같은 모습이다(요 2:23-25). 그러므로 본문은 물질 만능주의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는 타락한 성도의 모습을 가진 자에게 커다란 경종을 울려 주는 것이다(롬 1:21).
한편 누가는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임한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거리낌없이 여러 사마리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한 사실을 기록하므로(25절) 복음에 전혀 차별성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해 준다.
이상의 본문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교훈해 준다.
① 복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반목과 갈등을 화해와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② 이적과 같은 성령의 은사는 성도들의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게 하고 복음 증거를 위한 방편일 뿐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최종 목적이 아니다.
③ 성령의 역사가 크게 임하는 곳에는 사단의 역사 또한 크다는 것을 알고 항시 사단의 역사를 경계하되 특별히 물질 만능주의가 교회에 침투하지 않 도록 경계해야 한다.
8:14 사도들이 사마리아도…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 사울의 핍박이 있었을 때에 다른 성도들은 빚어졌으나 사도들만은 예루살렘을 지켰다(1절). 그 때에 사도가 아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은(행 6:5) 사마리아로 내려가 거기서 복음을 전파함으로 큰 성과를 올렸다(12절). 그리고 사마리아 선교의 성공 소식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도들의 귀에 들어갔는데 이는 사도들에게 매우 고무되는 일이 었을 것이다. 왜냐하면당시 예루살렘은 핍박 받고 있었으나 이방에서 복음이크게 전파되고 있다는 이 소식은 분명 저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 사마리아 선교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의 양대 기둥인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파송하였다. 이것은 빌립의 이방 선교에 대한 확인과 또 그 선교의 열매를 다지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한편 베드로와 요한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복음 사역시대개 같이 행동하여 보조를 맞추었던 것 같다(행 3:1).이 두 사도는 예수께서 산헤드린 공회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도 같이 행동했었다. 요 18:15 주석 참조, 이 두 사도에 대해서는 행 서론 특별자료, '12사도의 행적'을 보다 참조하라. 아무튼 이와 같이 복음전파 사역을 함에 있어 행동의 보조를 같이 할 수 있는 동역자가 있다는 것은 그 사역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담대히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8:15 그들이…성령받기를 기도하니. - 베드로와 요한은 빌립의 선교지인 사마리아 성에 도착한 즉시 빌립의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은 남녀들을 위하여(12절)성령이 임재하시기를 기도하였다. 이러한 사실 역시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보냄 받은 목적이 빌립의 전도 사역을 뒷받침하여 사마리아 선교를 확고히 다지기 위함이었음을 잘 드러내 준다. 14절 주석 참조. 한편 사마리아는 일찍부터 우상 숭배의 대명사격으로 불리운성읍으로 북이스라엘 멸망 이후에는 이방인과의 혼혈이 이루어진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왕하 17:24-33). 따라서 유대인들은 같은 동족이면서도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과 다름 없는 개같은 자들로 취급하여 상종을 하지않았다(요 4:9). 왕하 17장 자료노트, '사마리아의 역사' 참조. 그런데도 예루살렘 교회가 사마리아에 두 사도를 파송한 것은 결국 복음이 각종 인간적 장벽을 넘어 온 세계에 전파될 것임을 예고해 준다.
8:16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의 전도에 의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나(12절) 아직 성령은 받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아마도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에 도착하여 복음이 전도된 상태를 알아 보았을 것이며 그 결과 그 곳 사람들이 세례는 받았으나 아직 성령의 은사들은 체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간파하였을 것이다. 즉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실 때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거니와(요 3:5) 사마리아 사람들은 물로는 거듭났으나 아직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한 불완전한 상태에 있었다. 이것을 간파한 베드로와 요한은 물로 거듭난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성령을 부어 주실 것을 기도한 것이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지상(至上) 명령을 말씀하실 때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즉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다. 마 28:19 주석 참조. 그러나 초대 교회 당시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만 세례를 베풀었던 것으로 나타나며(행 2:38; 10:48; 19:5; 갈 3:2)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 것은 좀더 후대의 일이다. 한편 빌립이 세례를 줄 때 그도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는데 (행 6:5) 어째서 성령 임재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이는 아마도 빌립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아 너무 바빠서 미처 못했거나, 아니면 사도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에게 일임했을 가능성이 있다(Lenski).
8:17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 안수는 교회의 일꾼을 임명하고(행 6:6), 병을 고칠 때에 행하여졌다(막 8:23; 눅 13:13). 본절과 같이 안수를 하여 성령이 임한 경우는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를 했을때였다. 행 9:10 주석 참조. 또 바울이 요한의 세례만 받은 에베소의 어떤 제자들에게 안수할 때에도 성령이 임하였다(행 19:6). 그러나 이러한 기록이 있다고 해서 꼭 안수를 받아야만 성령이 임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한 때에도 성령이 임하였기 때문이다(행 10:44). 또한 반드시 사도들만이 안수권을 가진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사울에게 안수를 하여 성령이 임하게 한 아나니아는 사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행 9:17).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후에 안수를 받음으로 성령이 임하는 형태는 초대 교회에 한시적(限時的)으로 나타난 한 특징적인 형태인 것으로 이해된다. 즉 베드로와 요한이 빌립의 세례와 별도로 안수하여 성령이 임하게 한 것은 어디까지나 초대 교회 선교를 위해 성령의 은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임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카톨릭교회에서는 16절과 본절을 근거로 삼아 세례와 견신례를 구분하고 있다(Longeneker). 그런데 여기서 견신례(confirmation)란 주교가 세례를 받은 신자들의 앞 이마에 성유(聖油)를 십자형으로 발라 주면서 동시에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베푸는 예식이다. 즉 세례는 예수 믿기로 작정하는 의식에 불과하며, 죄사함과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 역사는 견신례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초대 교회의 특별한 상황을 이해치 못한 것이다. 그리고 세례는 예수의 구속 사역을 믿고 그 신앙을 고백하는 자가 받는 입교(入敎) 의식이니 곧 죄 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완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장 연구자료, '세례의 이해'를 참조하라.
8:18 시몬이…돈을 드려. - 시몬은 마술사로서(9절) 사마리아에서 마술을 행하다가 빌립에게 매료되어 빌립을 따라 다니던 자이다(13절). 이 시몬은 예루살렘에서 온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함으로 성령이 임재하는 것을 보고 망령된 행동을 하였다. 즉 그는 값 없이주시는(고후 11:7; 계 21:6)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를 돈으로 사려 했던 것이다(19절). 그는 비록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는 받았지만(13절), 아직 마음의 할례는 받지 못하여 영적인 것들을 물질적인 것으로 환산하여 그 값을 지불하고 사려는 우를 범한 것이다. 이는 그가 이제까지 모든 것들을 금전적인 견지에서 사고 팔았던 세속적 생활의 고리를 여전히 끊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분명한 증거이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그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없을진대 어찌 그 누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은혜와 은사를 감히 살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베드로는 시몬을 엄히 책망하며 속히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고 촉구한 것이다(22절).
성령 받는 것을 보고. - 이는 성령 강림으로 인해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현상 곧 방언(행 2:4) 이나 예언, 통역 또는 병 고치는 은사(고전 12:9,10) 등이 일어났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아니하고서는 시몬이 육신의 눈으로써 성령 강림 현상을 목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Toussaint).
8:19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 예수께서 사도들과 믿는 이들에게 주신 '권능'과 본문에서 시몬이 말한 '권능'이 다른 것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께서 주신 '권능'(행 1:8)은 헬라어로 '뒤나미스'이며 시몬이 본문에서 말한 '권능'은 '엑수시아'이다. 이 두 낱말은 서로 미묘한 의미의 차이를가지고 있다. 주께서 말씀하신 '뒤나미스'는 실제적이고 역동적인 능력을 나타내는 반면, 시몬이 말한 '엑수시아'는 실제적이기 보다는 추상적이고 내면적인 현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이 임재하게 한 '권능'은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은 실제적이고 역동적인 능력이었는데 반해, 시몬은 그것을자신이 해왔던 것과 같은 마술의 능력을 염두에 두고 다른 용어로 표현했던 셈이다. 이처럼 시몬이 '권능'을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미와 다른 용어로 표현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믿는 모든 이들에게 값 없이 주시는 것임을 모르고 그 '권능'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인양 착각했기 때문이다(20절).
8:20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 시몬이 성령이 임재하도록 하는 능력을 돈으로 사고자 하자 사도 베드로는 즉시 노하였다. 왜냐하면 시몬의 그 말은 분명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노력하는 자마다 취할 수 있는 세상의 물질의 차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베드로가 말하는 하나님의 '선물'(텐도레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쁘신 뜻 가운데서 주고자 하시는 자에게 값 없이 거저 주시는 것으로(엡 2:8) 돈으로는 도저히 가치를 따질 수 없이 고귀한 것이다. 이렇게 고귀한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려고하는 것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니 그래서 베드로는 시몬에게 노를 발한 것이다.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 베드로의 진노는 이러한 저주로 나타났다. 성령을 속이고 돈을 탐하다가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가 베드로 앞에서 죽었던 사건이 있다(행 5:1-11). 돈을 탐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사도 바울이 말하였거니와(딤전 6:10) 성경은 돈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딤전 3:3; 딤후 3:2; 히 13:5). 이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마 6:24). 그러므로 돈이라는 가치의 척도로 하나님의 은사마저 계산한 시몬의 태도는 실로 저주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신성한 하나님의 교회는 돈의 흥정판이 되어서는 안된다. 중세의 교회가 돈에 의해 타락하였고 오늘날의 교회의 일각에서도 나타나는 그러한 현상은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본문에서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돈을 가치의 척도로 삼는 자는 그 돈과 함께 망한다'는 사실을 끝까지 기억해야 한다. 참고로 성령의 권능을 돈 주고 사려 했던 시몬의 이러한 행위로 말미암아 '성직을 매매하는 행위'라는 뜻의 영어 단어 '사이머니’(Simony)가 생겨났다(Toussaint).
8:21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 시몬의 마음은 물질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돈이라는 가치의 척도로 재는 구습에 젖어 있었으며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몬의 상태는 하나님앞에서 바르지 못했다.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 '이 도'란 헬라어로 '토 로고'로 글자 그대로 '말씀'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 즉 복음을 가리킨다(Hervey). 또 '분깃'이란 이스라엘이 제비를 뽑아 가나안 땅을 나눈 것을 말하는데(수 14:2), 그렇다면 여기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분깃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볼 때 베드로의 이 말은 시몬에 대해 출교(黜敎)를 명했거나 또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음을 선언한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22절에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베드로의 이 말은 실상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은사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것에 대한 강력한 경고요 단죄로 이해된다. 즉 이에는 교회 내에 배금주의적(拜金主義的) 가치관이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8:22 이 악함을 회개하고. - 돈을 가치 척도로 삼는 자는 그 돈과 함께 망할 뿐이라고 저주한 베드로였지만(20절) 그럼에도 시몬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이는 돈을 탐하여 얼마를 감추었다가 즉시 죽음을 당한 아나니아와(행 5:5) 그의 아내의 경우와는(행 5:10) 대조적이다. 이것은 아마도 시몬은 이미 세례를 받았고(13절), 그가 돈으로 성령의 은사를 사려했던 것은 아나니아처럼 돈에 대한 탐심 때문이 아니라 돈으로 사물의 가치를 결정하던 구습을 아직 버리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이는 그의 영의 세계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하였기 때문에 베드로는 아직 회개의 여지가 남아 있다고 여긴 것 같다. 아무튼 죄의 용서함을 받는 길은 하나님께 회개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
기도하라. -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마음을 열납하시고 용서함을 주시도록 기도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마 7:7,8).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여기서 '혹'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아라' 는 불확실한 가능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악한 생각을 마음에 품은 죄악은 시몬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함을 받느냐 못 받느냐로 결정될 것임을 시사해 준다.
8:23 악독이 가득하며. - '악독'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코렌'으로 '담즙'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신 29:18에 나타나는 데 거기에는 '로쉬'는 시몬이 이러한 독초로 가득찬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시몬이 마술과 같은 사술(邪術)로써 사람을 미혹시킨 것을 뜻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을 자초하고 있는 것을 뜻할 것이다.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 '마술'(Magic)은 사단의 힘을 빌거나 사람의 눈을 속여 행하는 불의한 일이다. 악한 영도 하나님의 능력에 대항하여 기사(奇事)를 행할 수 있다(출 7:11).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은사가 아니요, 또한 사람을 미혹시키려는 데 근본 목적이 있으니 불의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 외에도 시몬이 불의에 매여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사를 돈으로 살려고 했던 그의 행동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18-21절).
8:24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 베자 사본(D)에는 '크게 통곡하며 슬피 울었다'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Longeneker). 따라서 이 첨가 구절에 의하면 시몬은 진실로 회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시몬은 참 회개를 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Blass, Wendt).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시몬이 진실로 회개하지 않았다는 의견을 취하고 있다(Meyer, Alford, Lumby, Lenski). 그리고 그들은 시몬이 베드로의 저주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그것이 자신에게 정말로 일어날까 염려하여 뉘우친 것으로 해석한다. 실제로 본문을 보면 시몬은 자신이 회개하여야 할 일을 베드로에게 요청하는 극히 약싹 빠른 이기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즉 베드로는 '네가 회개하라'(22절)고 말하였는데, 시몬은 '나를 위하여 대신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엉뚱한 요청을 한 것이다.
8:25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 빌립의 세례를 받은 자들에게 성령이 임재하시도록 안수하고(14-17절), 교활하고 사악한 시몬을 꾸짖은(18-24절) 베드로와 요한은 다시 주의 말씀 증거하기를 쉬지 않았다. 이는 빌립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전한 말씀을 더욱 확실히 전한 것이며 또 아직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전도한 것일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복음을 전하니라. - 사마리아 성으로 파송된(14절) 임무를 마치고 선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중에도 두 사도는 복음을 계속 전파하였다. 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마 28:16,17),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행 2:4)사도들은 이제 과거의 나약함을 다 버리고 오직 말씀 전파를 위해 온 몸과 마음과 시간과 정성을 다했다. 즉 그들은 진실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는 데 항상 힘쓴 것이다(딤후 4:2).
8:26-40 에디오피아 내시의 구원
앞에서는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라 할 수 있는 빌립 집사를 중심한 사마리아의 전도 사역을 살펴보았다(1-25절).이어 본문은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가 그리스도의 복음을영접하는 사건을 통하여 복음이 이제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넘어서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본문은 크게 두 가지 사실을 나타내 준다. 첫째는 복음을 세계로 퍼져나가게 한 성령의 역사이다(26,39,40절). 즉 성령께서는 빌립을 인도하여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로 보내었고, 또한 내시가 의심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그의 심령을 움직이셨으며 여러 성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도록 계속해서 빌립을 인도하신 것이다. 이것은 복음 확장의 사역이 전적으로 성령의 주권적인 섭리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준다.
둘째는 에디오피아 내시의 순전한 믿음이다(27-39절).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또한 말씀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 경건한 사람으로 빌립이 다가갔을 때에 선지자 이사야의 글(사 52:7,8)을 읽고 있었다. 그래서 빌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하였을 때에 그는 주저없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였고 세례를 받는 순전한 믿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성령의 권능을 돈을 주고 사려했던 마술사 시몬(18,19절)과 대조적인 신앙으로, 마술사 시몬이 돌짝밭과 같은 얕은 마음의 소유자라면 내시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마 13:19-23).
한편 이런 이방인에 대한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임함을 보여 준다(사 45:21,22). 곧 그리스도의 복음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요 1:12; 살전 2:13).
8:26 주의 사자가… 가라 하니. - 본절에서부터는 빌립의 사마리아 선교(4-25절)에 이어 가사 지방 선교가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누가는 이때 하나님의 사자가 빌립을 인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결정적 사건 때마다 하나님의 사자 또는 천사의 인도함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은 누가의 기록의 특색 중 하나이다(눅 1:11,38; 2:9; 행 1:10; 10:7,22,30; 11:13; 12:7,11,23; 27:23). 한편 '주의 사자'에 대하여 행 5:19 주석을 참조하라.
가사. - 이곳은 지중해 연안에서 4km 지점, 예루살렘 서남쪽 7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애굽으로 통하는 지리적 요충지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정복하기 전에는 가나안 본토인들의 땅이었으나(창 10:10), 여호수아가 이 땅을 정복하고 유다 지파에게 분깃으로 주었다(수 15:47). 이 도시는 B.C. 96년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에의해 파괴되었다. 그후 B.C. 57년 폼페이(Pompey) 치하에 가비니우스(Gabinius)에 의해 약간 지중해 쪽으로 이동하여 재건되었으나 A.D. 66년에 다시 멸망하였다(Josephus).
그 길은 광야라. -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가는 길은 아스칼론(Ascalon)을 통해 가사 해안으로 가는 북쪽 길과 서쪽 헤브론을 통해 가는 길이 있다. 이 중 빌립이 간 길은 '광야'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사막 길이었던 헤브론을 통해 가는 길로 추측된다(Toussaint).
8:27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내시가. - '에디오피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디오피아'는 '검게 탄 얼굴'이라는 뜻으로 흑인들이 사는 땅을 지칭하고 있다. 이 에디오피아는 애굽의 남쪽, 나일강 상류의 넓은 지대에 구스 족속(사 11:11)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이다. 이 나라에는 메로에(Meroe) 왕국과 나바다(Nabatha) 왕국이라는 두 왕국이 있었는데(Lenski), 메로에 왕국은 간다게(Candace) 왕조가 장기 집권하였다. 따라서 본문의 '간다게'는 여왕의 이름이 아니라 그 왕조의 왕을 가리키던 일반적 칭호였다(Robertson). 그런데 이 왕조는 왕위의 계승이 모계로 이어졌다(Pliny). 한편 본문에 나오는 내시는 그 나라의 재무장관 격에 해당하는 큰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권세에도 불구하고 자고(自古)하지 않은 자였으니, 곧 그의 여호와 신앙과 사람 앞에서도 겸손했던 점(31절)에 의해 알 수 있다.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 에디오피아의 이 내시는 고자(鼓子)이므로 유대인들의 성회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신 23:1). 그러므로 그는 순례자로 와서 이방인이 들어갈 수 있는 예배처까지만 갔을 것이다(Longeneker). 이처럼 고자이기 때문에 성회에 참여하지도 못하면서 먼 길을 순례하며 예루살렘까지 온 것으로 보아 이 내시의 여호와 신앙은 대단히 지극하였던 것 같다.
8:28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 이 내시는 에디오피아의 모든 국고를 관장한 큰 권력을 가진 자였으므로(27절)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많은 병거와 수행원들을 이끌고 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병거 위에서도 구약의 말씀을 읽는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때 그가 읽고 있었던 이사야의 글은 당시 광범위하게 읽혀진 히브리 성경의 헬라어 역본인 70인역(LXX)이었을 것이다(Bruce).
8: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 빌립은 '주의 사자'의 명령으로 가사로 내려갔으며 (26절), 다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내시에게 접근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빌립으로 하여금 에디오피아의 권세자인 내시를 전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내시가 복음을 받아들인 후 고국으로 돌아간다면 그를 통해 궁중 내의 사람들은 물론 백성들에게까지 복음이 증거될 것이니 이는 빌립이 에디오피아 선교를 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얻게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빌립이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게끔 강권적으로 역사하신 것이다.
8:30 빌립이 달려가서. - 성령께서 인도하심에 빌립은 지체하지 않고 그 명령에 복종하였다. 그는 성령께서 지적한 병거를 향해 기쁜 마음으로 오직 복음을 전하여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구원하려는 사명감을 품고 달려갔을 것이다.
듣고 말하되. - 유대의 전통에 따르면 여행할 때에 말벗이 없을 경우 하나님의 율법을 읽었으며 또 그 율법을 읽을 때에는 소리내어 읽었다. 그 이유는 소리내어 읽음으로써 읽은 내용을 쉽게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소리내어 책을 읽는 것은 동양인들의 일반적 습관이었으니(Robertson) 에디오피아의 내시도 성경을 소리내어 읽었다. 그래서 빌립은 그에게 달려갔을 때 그가 이사야의 글을 읽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읽는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고서 주저없이 말을 걸었을 것이다.
읽는 것을 깨닫느뇨. -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라 게 기노스케이스 하 아나기노스케이스'로서 이에 대한 해석이 매우 까다롭다. 왜냐하면 '읽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기노스케이스'는 전치사 '아나'와 '알다'라는 동사 '기노스코'의 합성어로 '지식을 쌓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과연 지식을 쌓는 것을 알고 있느뇨?'가 된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을 의역하면 '네가 과연 지금 그 이사야의 글을 읽으면서 쌓고 있는 지식을 이해하고 있느뇨?'라는 말일 것이다. 실제로 내시가 읽고 있던 이사야의 글은 사 53:7,8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었으니(32,33절) 이방인인 에디오피아 내시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말씀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의 지도자들도 구약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여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어리석음을 범할 정도였기 때문이다(행 7:52,53). 또 내시 자신이 말하였듯이 그에게는 그 말씀의 의미를 깨우쳐 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31절). 그러나 내시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 읽는 내용을 들은 빌립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빌립은 그 예언의 의미를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8:31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롬 10:17)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말하는 자, 곧 가르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을 깨닫는 일에도 그 복음을 깨닫도록 지도하는 자가 있어야 함이 물론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되 당신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고 하셨다(마 28:20).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을 통하여, 다시 말하면 가르치는 자를 통하여 역사하신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또 그 복음의 내용을 가르치지 않는 행위는 주님의 지상 명령을 유기(遺棄)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빌립을 청하여…앉으라 하니라. - 낯선 사람을 쉽게 받아들이는 내시의 개방적이고도 겸손한 태도가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전혀 안면이 없는 자가 불쑥 나타나 의외의 질문을 던졌음에도 불구하고(30절) 그 질문이 자신의 갈급한 심령과 관계된 것임을 안 내시는 빌립에게 자신의 마차에 올라 옆자리에 앉도록 겸손히 요청한 것이다.
8:32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 본절과 33절은 사 53:7,8을 인용한 것이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구약 성경 중 가장 대표적인 메시야에 대한 예언 구절을 읽었던 것이다. 즉 사 53장에는 그 유명한 고난받는 종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사 53:1-6).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이 예언에서 가리키는 고난의 종이 선지자 자신인지 아니면 이스라엘 민족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34절 주석 참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후 초대 교회는 이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이 자기 백성들로부터 수난 당하신 그리스도라고 믿었고, 신약 성경에서도 그러한 관점에서 인용하였다(요 12:38; 히 9:28; 벧전 2:22). 한편 본절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사 53:7의 주석을 참조하라.
8:33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 마땅한 죄의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불법으로 재판을 받고 불의한 자들에게 죽임당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마26:59-68; 요 18:28 주석 참조.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며(막 1:11; 눅3:22), 또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께서(요 1:1-3) 자신이 창조하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가리킨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사 53:8의 주석을 참조하라.
8:34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이사야서 53장의 예언은 대체적으로 예언을 한 당사자인 이사야 선지자 자신에 관한 예언이거나, 아니면 이방의 적들로부터 침략받고 압제받는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예언이라고 이해되었다(Longeneker). 이 중 전자의 의견은 이사야 선지자가 므낫세 왕에 의해 톱으로 키움을 당해 죽었다는 전설 때문에 더욱 그렇게 이해되어 왔다. 추측하건대 에디오피아 내시는 예루살렘을 오가면서 이러한 유대인들의 해석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에게서 들은 것을 바탕으로 빌립에게 이같이 물었을런지 모른다(Lenski).
8:35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 빌립은 잘못된 유대인들의 지식에 기초한 에디오피아 내시의 질문을 듣고 이사야 53장의 예언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예언이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였다. 아마도 빌립은 마치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의 구속의 역사를 풀어 설교한 것처럼(행 7:2-50),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의 구속사(救贖史)를 일목요연하게 풀어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8:36 물 있는 곳. - 이 장소가 어디였는가에 대해 여러 견해들이 있다. 첫째는 이곳이 헤브론 북쪽 7km 지점의 벧술 곧 오늘날의 '길벳 엘 투베이카'에 있는 샘이라는 견해이다(Jerome, Alford). 둘째는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가는 도중에 있는 텔 엘 하시 (Tell-el-Hasy)라는 곳에있는 샘이라는 견해이다(Lenski, Longeneker, Hervey). 셋째는 가사 지방 근처에 있는 어느 샘이라는 견해이다(Smith). 그러나 이 중 어느 견해도 확실한 증거가 없다. 단지 확실한 것은 그 어느 지점에 샘물이 있었다는 것뿐이다. 사실 본절의 강조점 역시 빌립이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자연적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 아마도 내시는 빌립의 가르침 속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 즉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 물을 보자그 말을 기억하고 세례를 받고자 청했던 것 같다. 즉 내시는 빌립이 증거한 말씀을 믿고 세례를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 앞서 빌립을 내시에게로 인도한 하나님께서(26,29절), 이제 또 저들을 물가로 인도하신 것이다.
8:37 한글 개역 성경에는 본절이 생략되어 있다. 이는 시내 사본(א)이나 알렉산드리아 사본(A), 바티칸 사본(B), 에브라임 수리아어 사본(C) 등과 같은 주요 사본들에 본절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빙성이 떨어지는 몇몇 사본 곧 베자 사본(D) 같은 데에는 본절에 '빌립이 말하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가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라는 구절이 있다. 이같은 본절은 초대 교회 당시 세례를 베풀 때, 어떠한 신앙 고백을 전제하였는지를 이해하는데에 다소 도움이 된다.
8:38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 주의 사자의 명령이 있으매 빌립은 가사로 갔고(26절), 그곳에서 내시에게 접근하라는 명령에 달려가 접근하였고(29,30절), 접근하자 내시가 빌립을 받아들였고(31절), 읽던 말씀을 풀어 가르치자 즉시 세례 받기를 요청하니(36절) 또 그 즉시 세례를 주고 받으려고 두 사람은 물에 내려갔다. 이는 참으로 일사불란한 느낌을 주는내용이다. 한편 본문에서 '둘 다 물에 내려갔다'는 구절은 빌립이 준 세례의 형태가 침례의 형태였다는 인상을 주고 있으나 이 '물에 내려갔다'는 것이 물 속에 들어간 것인지 아니면 물이 있는 곳까지 내려갔다는것(Alexander)인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는 나는 세례의 형태가 침례였는지 아니면 다른 형태의 것이었는지 단정할 수가 없다. 더욱이 이 물은 샘물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함께 물에 들어가기에는 좁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36절 주석 참조. 그러나 39절에는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라는 표현이 있어 이 물이 조그마한 샘물이 아니라 비교적 큰 오아시스였을 가능성도 있다. 여하튼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물 세례를 주었으니 그 물 세례가 어떤 형태의 것이었느냐가 아니라 내시가 성령으로 진정 거듭났느냐 하는 것이 그 물 세례의 진정성을 확증시켜줄 것이었다.
8:39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 '이끌어 간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르파조' 는 '빼앗아 가다' 또는 '채뜨려 가다'는 뜻으로 빌립이 갑자기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이로 보아 빌립의 물세례가 있은 후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성령이 임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즉 빌립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홀연히 사라졌으나, 내시에게도 성령이 임재하셔서 그를 인도하였을 것이다(Augustine). 교부 이레니우스(Irenaeus)에 의하면 내시는 에디오피아에 가서 주의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마침내 에디오피아 여왕까지 믿게 하였다고 한다.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가시고 홀로 남은 내시는 흔연히 제 갈길로 갔다. 여기서 '흔연(欣然)히'라는 말은 '기쁨으로'라는 뜻이다. 내시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 또 가르침을 받고, 그리고 세례까지 받고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다. 이로 보건대 그가 빌립으로부터 물 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이 임재하셨음이 분명하다.
8:40 아소도에 나타나. - 아소도(Azotus)는 구약 성경에서 아스돗(Azotus)이라 불리웠으며(삼상 5:3; 대하 26:1), 본래 블레셋의 한 성읍이었다(삼상 6:17). 이 성읍은 가사에서 동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했는데, 대체로 가사와 욥바의 중간 지점이다. 한때 항구 도시로 번창했었으나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였다(암 1:8). 오늘날에는 에스듯(Esdud)이라는 작은 마을이 그곳에 남아 있을 뿐이다.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 '여러 성'이란 아소도 근방의 룻다(행 9:32)와 욥바(행 9:36) 등의 도시를 말하는 것 같다(Bruce). 빌립 집사는 이처럼 쉬지 않고 계속 돌아다니며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였다.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 가이사랴(Caesarea)는 갈멜산 남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성읍이다. 그 명칭의 뜻은 로마 황제의 이름을 기리는 '가이사의 성읍'이다. 그런데 가이사랴 빌립보(마 16:13)와 같이 명칭이 비슷한 것이 많아 이런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일명 '가이사랴 팔레스틴'이라고도 불리웠다. 이 성읍의 원명(原名)은 '스트라토의 탑'(Strato's Tower)이었다. 헤롯은 후에 이 성읍을 화려하게 재건축하여 로마 황제에게 헌납하면서 '가이사랴 세바스테'(Caesarya Sebaste)라고 하였다. 이 성읍은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의 하나로 로마 총독이 거주하기도 하였으나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격전의 역사가 있었다. 한편 빌립은 이곳에 이르러 정착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행 21:8). 그리고 그곳에서 살면서 많은 성도들의 방문을 받으며 그들을 대접한 것 같다.
연구 자료
세례의 이해
세례(洗禮)는 기독교에서 행하는 2대 성례(聖禮), 곧 성찬(臺雙)과 세례중의 하나이다. 기독교의 세례의식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례인 요한으로부터 회개의 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의 세례로 모든 의를 성귀하심으로 말미암아(마 3:15) 제정된 것으로 초대 교회 때부터 입교 의식(入敎儀式)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세례는 단순히 입교 의식으로서의 외적인 의미 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의미 때문에 매우 중요한 바 이에 관한 전반적인 사실들을 살펴보자.
1. 용어의 이하
'세례'(Baptism)에 해당하는 신약의 헬라어 용어는 '밥티스마'로서 이는 동사 '밥티조'에서 유래하였다. '밥티조'에서 유래한 용어들은 대개 두 가지 용례로 사용이 되었는데 하나는 문자적인 의미로서 '담그다', '물로 껏다', '목욕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다른 하나는 비유적인 의미로서 그리스도께 받으시는 십자가 수난(막 10:38), 성령의 부어주심(행 10:45; 11:16)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밥티스마'는 단순히 외적인 의식으로서의 물 세례 뿐만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은 '죄씻음' 혹은 성령의 '인치심' 등을 뜻하기도 한다고 볼 수 있다(고후 1:22; 엡 1:13; 4:30), 이외에 신약에서는 단순히 '물로 씻음'이라는 의미로 세례를 가리키는 용어로서는 '루트른'이 있다(엡 5:26),
한편 이렇게 물로 씻는다는 것은 기독교에서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 여러 지역에서는 '죄씻음', '신생'(新生) 혹은 '신과의 연합'이라는 종교적인 의미로 종종 사용되었다. 그러나 외부적인 형태나 그 의미의 일부가 유사하다 할지라도 그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기독교의 세례와 이러한 이교 의식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2. 세레의 본질
기독교에서 시행되는 세례의 본질(本質)을 한마디로 말하면 '씻음과 연합'이다. 여기서 '씻음'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하여 과거의 삶을 청산하는 것을 가리키며, '연할'은 씻음의 결과로 주어지는 새로운 삶의 공동체에로의 소속을 가리킨다. 사탄의 지배 하에 있는 죄인이 성도(聖徒), 곧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죄악된 옛 삶을 벗어버리는 일이 요청된다. 그러나 이 일은 죄인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며 오직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힘입는 방법 밖에는 없다.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이 자신의 구속의 공로를 힘입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먼저는 태초부터 계시하셨던 구속의 법을 십자가 수난(crucifixon)을 통하여 성취하시기 위하여 죄인의 모습으로 성육신(Incarnation) 하겼다. 이에 대해서는 막 10장 자료노트 '예수의 성육신과 대속 수난을 통한 인간 구원의 필연성'을 보다 참조하라. 그리고 당신께서는 전혀 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훗날 구속의 법을 성취하신 후 성도들이 자신과 연합하여 구속의 공로를 힘입음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 외적인 형식으로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회개 의 세례를 받으셨다. 후대 교회가 물세례를 행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모범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속의 공로를 힘입기 위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효과는 외형적으로 시행되는 물세례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통한 구속의 법의 성취와 부활 승천 이후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되었으며(행 2:1-4), 또 각 사람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믿을 때에 받는 성령 세례로 말미암아 그 효과가 각 개인에게 적용되게 되었다. 따라서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그의 구속의 공로를 힘입고 죄씻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고 말한 것은 이와 같은 세례의 본질을 요약하여 보여준 것이다.
3. 세례의 기원과 예표
① 세레의 기원
종교 의식으로서의 세례는 고대 근동에서는 어디에서나 널리 행해지던 것이었다. 특히 동방의 밀의 종교(密儀宗敎)에서는 어떤 사람들을 자기 공동체에 가입시킬 때 물이나 불, 흑은 기타의 방법으로 반드시 통과 의례(通過競禮)를 거치게 했다. 이러한 영향이 기독교의 세례에 어느 정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이 되지만 보다 직접적인 영향은 유대교의 개종자의 세례, 쿰란 공동체의 세례, 그리고 세례인 요한의 세례에서 받았다고 욜 수 있다. 일찍이 유대교에서는 이방인 개종자들을 받아들일 때 세 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했는데 할례, 세례, 제물을 드리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쿰란 공동체의 세례도 유대교에서와 같이 입문 의식(入門儀式)으로 행해졌으나 그 의미는 죄씻음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한다는 종말론적인 것이며 이는 세례인 요한의 세례의 의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세례인 요한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토록 하기 위하여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성결된 삶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죄씻음과 성결됨이 요구된다는 사상은 구약성경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제사장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매 정결 의식을 행한 사실(레 15장; 민 19장), 선지자들의 회개의 요구(사 1:16; 렘 4:14) 등에서 이러한 사상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의식은 중간기 시대 유대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는 구약 성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세례의 진정한 기원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은 전혀 죄가 없으시면서도 죄인들이 자신과 연합하여 구속의 공로를 입는 통로로서 자신을 내어 주시기 위해 직접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이 바로 기독교 세례의 기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수난으로 구속의 법을 성취하신 후에 부활하사 사도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20)하신 지상 대명(至上大命)을 좇은 사도들에 의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초대 교회 안에서 세례의식이 행해지게 되었다. 이렇듯 초대 교회에서는 죄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는 보다 본질적인 의미를 지니는 성령 세례와 함께 물세례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거의 같은 시기에 함께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물세례는 어디까지나 외적인 입교 의식이고 성령 세례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도의 중생(重生)을 이루는 것이기에 성도 개개인에게 있어서 양자는 동시에 주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② 구약애 나타난 세례의 예표들
신약 성경에서 세례의 예표로 들고 있는 구약의 사건들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홍해를 건넌 사건이고(고전 10:1,2), 다른 하나는 노아 시대의 대홍수 사건이다(벧전 3:20,21).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하에 흥해 바다를 통과한 것은 곧 애굽 생활로 상징되는 죄된 옛 사람은 죽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옛 사람이 죽임당하고 새 사람으로 중생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갈 2:20).
그리고 노아 시대 대홍수 사건에서 물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죄악된 세상을 덮어서 죽이는 심판의 의미이고 둘째는 노아의 방주를 물 위에 뜨게 함으로써 노아의 8식구를 세상의 죄와 분리시켜서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는 구원의 의미를 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도 성도를 참 구원의 방주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지악된 세상과 분리하여 건짐을 받는 구원의 인침이요 보중이 된다(엡 4:30).
4. 세례의 증류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세례에는 물세례와 성령 세례가 있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둘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면서도 엄격히 구분된다.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물세례
물세례는 기독교 공동체에 공식으로 가입한다는 입교 의식이다. 즉 과거의 죄를 씻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主)로 믿으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고백하는 자에 대해 교회가 그를 인정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행하는 외적 의식이다. 따라서 물세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견적 교회(可見的敎會)를 세우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지상 대명을 주실 때에도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세례를 주고'(마 28:19)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지상 교회(地上敎會)를 설림함에 있어서 세례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케 함으로써 교회의 구성원이 되도록 하는 외적인 통로가 됨을 보여 준다.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사도들은 항상 복음 전파와 믿는 자들에게 세례 베푸는 일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설립, 확장해 나간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행 2:41; 8:38; 10:47,48등). 이처럼 복음 전파의 실재적인 결실은 세례와 함께 교회 공동체가 생겨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② 성령 세래
물세례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입문하는 외적 의식이라면 성령세례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성령의 인(印)치심이다.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토록 하고 회개 중생케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이다. 따라서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죄씻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탄의 지배하에 있던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중생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리고 성령 세례에 의해서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또 그리스도의 지체(肢体)를 이루는 그리스도인 곧 성도가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지체된 성도들이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참된 교회를 이루게 된다. 물세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참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지상의 유형(有形)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서로 섞여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마 13:24-30).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결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성령 세례는 그가 참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었으며 구원을 받았다는 성령의 인치심이요 보중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에 대하여 행 9장 자료노트 '성령 세례와 성령 내주 및 성령 충만'을 보다 참조하라.
5. 세례의 의의
앞부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례는 구약의 예표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기독교 진리를 가장 함축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기독교 의식이다. 따라서 성도는 세례의 의미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함으로써 새 삶을 부여받는 것임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길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단순히 타인의 눈으로 확인되는 물세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치심에 의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성령 세례를 경험하는 자들이 되어야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세례는 이 지상에 살고 있으나 천국 시민의 자격을 획득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바 이에 대한 감격을 가지고 보다 성결한 삶으로서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드러내는 생활을 하여야 한다.
집사 빌립-이방인 선교의 선구자
1 . 인적사항
① 그 이름이 보여주는 바대로 헬라파 유대인임(행 6:1,5)
②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최초 일곱 집사 중 하나임(행 6:5)
③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을 전한 최초의 인물이 됩(행 8:5)
④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북아프리카 선교의 기초를 놓은 인물임(행 8:26-39)
⑤ 처녀로 예언하는 두 딸을 둠(행 21:9)
⑥ 아소도에서 가이사랴에 이르는 항구 도시에서 설교함(행 8:40)
⑦ 리디아의 트랄레스(Tralles)에서 감독으로 재직하던 중 순교함
⑧ 아시아의 히에라폴리스에서 순교했다는 전승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음
2. 시대적 배경
성경에 기록된 집사 빌립의 활동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숭천하신 직후의 일이었다. 빌립은 베드로와 요한의 투옥(행 5:18), 공회에서의 스데반의 죽음(행 6:8-7:60) 등 여루살럼 초대 교회에 대한 일련의 핍박이 강력하게 몰아쳤던 이 때에 사마리아로 내려가 복음을 전파하고 본국으로 귀환하는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래를 주는 등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빌립은 특히 유대인들만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당연시되었던 당시얘(행 11:1-3)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의 열정을 불태움으로써 초대 꾜회 선교사애 새로운 장을 마련하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3. 주요 생애
1. 헬라파 유대인의 아들로 출생 - -
2. 딸 넷을 둠 행 21:8,9
3. 집사로 피택됨 A.D. 30년 행 6:1-6
4. 사마리아와 내려가 전도함 A.D. 30년 행 8:5
5. 에디오피아 네시에게 복음을 전함 A.D. 30년 행 8:26-39
6. 아소도에서 가이사랴까지 두루 다니며 선교함 A.D. 30년 행 8:40
7.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가이사랴로 온 바울을 영접함 A.D. 30년 행 21:8
8. 리다 트랄레스, 혹은 히레라폴리스의 감독이 됨 - -
9. 순교 - -
4. 성품
① 여루살럼 교회에 대한 큰 핍박 직후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 담대한 인물(행 8:4,5)
② 전도 대상 및 상황에 따라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전도한 지혀로운 인물(행 8:26-39)
③ 성령의 인도에 두 말없이 따랐던 순종의 인물(행 8:29,30)
④ 네 딸을 모두 여언하는 이로 교육한 신실한 아버지(행 21:8,9)
⑤ 여행자를 극진히 대접한 선한 인물(행 21:8)
⑥ 다른 사람보다 앞서서 이방인을 향해 복음을 전혔던 선각자적 인물(행 6:3)
5. 구속사적 지위
① 최초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으로서 초대 여루살램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된 인물
② 에디오펴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여 북아프리카 교회의 기초를 놓은 인물
③ 사마리아를 비롯한 비유대지역 전도를 통해 이방인 선교의 필요성을 중거한 인물
6. 평가 및 교훈
① 빌립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로부터 인정받았듯이 성령과 지혀가 충만하여 칭찬듣는 자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보여준 지혜와 용기, 그리고 남보다 앞선 께달음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실로 성령 충만이 없이는 그 어떤 성도도 하나럼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온전히 이를 수 업다(엡 5:18).
② 빌립은 여루살렘에 몰아친 박해의 칼날을 피해 이동하는 가운데에서도 기회가 있을 떼마다 선교 사역을 쉬지 않았다. 이렇듯 때와 상황의 유불리를 가리지 않는 전도의 열정이야말로 주의 재림을 눈앞에 둔 오늘날의 성도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라 할 것이다(빌 1:15-18; 딤후 4:2).
③ 빌립은 이사야의 글을 읽는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를 보았을 때 주저하지 않고 그 글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임을 밝혔다. 이는 평소 구약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지 않았다면 행할 수 없는 일이며 우리에게 꾸준한 성경 연구의 필요성을 재삼 교훈한다(딤후 3:14-17).
④ 빌립이 복음을 전할 당시 사마리아 성에는 시몬이란 자가 큰 권세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빌립은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복음을 전하고 그로 인한 능력을 보임으로써 그를 굴복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영적 전쟁에 임한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있는 그대로의 복음과 성령의 능력에 대한 철저한 의지이다(고후 10:3,4).
7. 핵심성구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행 8: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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