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또 하나의 追跡者
휘이잉―
휘이―
구름이 있을 까닭이 없는 짙푸른 하늘인데도 산정(山頂)엔 그대로 사람을 날려보낼 듯한 강풍(强風)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치 텅 빈 공간 속에 섬세한 바람결이 새겨지고 있는 것처럼…….
산정의 사방을 다 합한다 해도 스무 자[尺]나 될까?
땅 위에서 가장 높은 이곳에 지금 구 인(九人)이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승인(僧人)도 있고 속인도 있으며, 여자도 있고 노인도 있다.
그들은 제각기 틀린 용모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들의 몸에선 모두 하나같이 기이한 서광(瑞光)이 보일 듯 말듯 발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부처의 후광(後光)이 바로 이러한 모습일까?
일반적으로 무예가 어느 정도의 경지까지 이르게 되면 기(氣)라는 것이 분출되게 된다.
검을 든 자는 검기(劍氣)요, 살의(殺意)를 품은 자는 살기(殺氣)다.
그리고 그냥 맨몸으로 있는다 해도 앞에 선 자를 무형중에 짓누르는 것이 그 기(氣)라는 것인데, 고대무예를 서술한 마각기(馬角記)라는 것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기(氣)에는 세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육체의 기가 그 첫째고 마음의 기가 그 둘째이며 영혼의 기가 그 셋째이다.
육체의 기란 일신의 단련이 지고하고 오래되어 깊은 연륜을 쌓은 바, 그 힘이 무궁무진하여 어떤 경우를 당하여도 거의 공력의 지연이 없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능히 먹을 것을 먹지 않고 마실 것을 마시지 않고도 범인의 십 배 이상 견딜 수 있는 여력이 생기게 된다.
이를 일컬어 조화지기(造化之氣), 즉 조화경(造化境)이라 한다.
마음의 기란 그 심적 수련이 지대하여 인간의 단계를 넘어섰을 때 생긴다.
즉, 마음을 자유자재로 억제하며 얼음처럼 정결하고 자연무심(自然無心)함을 지키게 됨으로써 예(藝)나 술(術)이 아닌 도(道)의 지경에 이르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이것을 지념지기(止念之氣), 혹은 지념경(止念境)이라 한다.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른 고수들은 그 몸에서 보일 듯 말듯한 보기(寶氣)가 서리어 뭇사람들을 압도하게 된다.
영혼의 기란 일견 마음의 기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하지만 양기(兩氣)는 사뭇 다르다.
마음의 기가 타의(他意)적인 것이라면 영혼의 기는 자의(自意)적인 것이다.
즉, 마음이 일어나면 그렇게 행하고자 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해지고, 마음을 죽이면 다시 행치 않게 되는 경지를 말한다.
심생즉종종법생(心生卽鍾鍾法生) 생멸즉종종법멸(生滅卽鍾鍾法滅)의 이 도리를 공심지기(空心之氣), 또는 공심경(空心境)이라 한다.
이 경지까지 이르면 그의 몸에선 찬연한 보기와 더불어 그윽한 단향(檀香)이 풍기게 된다.
무릇,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경지는 이상의 삼기(三氣)이다.
만약 참으로 신비로운 인간이 있어 스스로 인간의 껍질을 벗고 이러한 삼기(三氣)를 넘어서게 되면, 그때의 경지는 무생무아(無生無我) 천지합일(天地合一)의 공령(空靈)이라고 일컫는다.
인간이 아닌 신(神)의 경지를 뜻함이다.
즉, 생각함도 없고 행위하는 것도 없이 고요히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결국 천하의 연고(緣故)를 느껴[感] 통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 아래 지극히 신명한 자 아니면 그 누가 이러할 수 있으랴!
공령의 기를 접하는 순간부터 그는 인간이라 불릴 수 없게 된다.>
구구절절 설명이 길어지고 말았지만 이 가운데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지념의 경지에 이르면 몸에서 보광이 인다는 구결이 바로 그것인데, 지금 산정에 있는 구 인들이 바로 그러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니 이는 그들이 지념경에 이른 기의 소유자들이란 이야기가 아닌가?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 땅의 무황 진천우도는 자신의 무예가 조화경에 머무르고 있음을 종내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지념의 경지, 즉 마음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열기 위해 성심마공이란 마공을 익히다 스스로 마인(魔人)이 되어 파멸하고 만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다.
그러데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이 산정의 구 인은 하나같이 진천우도의 경지보다 한 단계 높은 경지에 이른 자들인 것이다.
그렇다. 만약 그 어떤 사람이든지 이 구 인이 이렇게 한자리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아마도 입에 거품을 물고 실신이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이 구 인이야말로 사람들의 입과 입에서 오르내리는 전설 속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십파!
천 년을 이어오는 전통의 천외십사종 중 새외십파의 종주급 인물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천축 유가법종(瑜伽法宗)의 제세생불(齊世生佛).
서장 밀종(密宗)의 호리대법왕(狐里大法王).
열하 철혈문(鐵血門)의 독거천근정(獨擧千斤鼎) 철패왕(鐵覇王).
남만 만독성(萬毒城)의 일우독군(一羽毒君).
동영 일월이도류(日月二刀流)의 검귀(劍鬼) 가등옥(加藤玉).
요동 음자촌(陰者村)의 혼제(混帝) 최재봉(崔宰鳳).
대막 광풍사(狂風砂)의 사군(沙君) 향동래(香東來).
서촉 파산파(巴山派)의 수왕조왕(獸王鳥王).
남해 십검지(十劍地)의 검후(劍后) 옥수령(玉秀令).
이 엄청난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경천동지의 모사(謀事)가 있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어쨌든 시간은 고요히 흘렀다.
이때 돌연 검푸른 하늘 속에서 홀연 낙엽이 휘날리듯 한 줄기 인영이 유성처럼 떨어져 왔다.
고요한 정적 속에 사뿐히 몸을 내린 이는 백의미소녀 상아선녀(嫦娥仙女) 진진(陳眞)이었다.
천외십사종, 새외십파 중 새북 관산장(關山場)의 제백육대 종주(第百六代宗主)이기도 한 그녀.
그녀가 착지하는 순간 고요히 눈을 감고 있던 구 인 중 가장 상석에 앉은 이가 눈을 번쩍 떴다.
귀밑까지 뻗어내린 백미와 불타듯 짙은 홍의가사에 검은 선삼(禪衫)을 두른 노라마승.
그가 눈을 감고 있을 땐 모르겠더니 눈을 뜨자 가히 사람을 얼릴 듯한 실 같은 안광이 솟구쳐 나왔다.
그의 표정을 알 수 없는 쭈글쭈글한 노안(老顔)에 한줄기 흐릿한 웃음이 번지는가 싶더니, 한소리 장중한 불호가 노승의 메마른 입술을 뚫었다.
"아미타불…… 진종주! 늦으셨구려……."
상아선녀 진진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 길에 잠시 지체가 있었어요. 용서하기 바래요, 대활불(大活佛)."
"아미타불…… 자리에 앉으시오."
그녀가 아홉 번째 서열에 앉고 나자 노라마승 제세생불은 한차례 하늘을 우러러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미타불……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상의하기 위해서이오."
사람들은 모두 눈을 뜨고 신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을 이어가는 제세생불을 주시했다.
"우리 천외십사종은 아득한 옛날, 십사연방천하검회를 주창한 후, 그에 준하는 단금삼규(斷禁三規)를 정하였소. 이 단금삼규를 관산장 진종주께서 말씀해 보시오."
상아선녀 진진은 맑은 눈망울을 또르르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첫째 단금강호(斷禁江湖), 둘째 단금종무(斷禁宗武), 세째 단금확지(斷禁擴地)예요. 즉, 천외십사종은 검회 이전까지는 강호에 출도하지 않고, 무예를 쓰지 않으며 세력을 넓히지 않는다는 규약이에요."
"아미타불…… 그렇소. 한데, 근자에 들어 천외십사종 중에서 공공연히 그러한 규약을 어기는 가문이 나타났소이다."
"화북 만룡가를 말씀하시는가요?"
"그렇소. 그들은 비단 오십 년 전부터 무림에 출도했을 뿐 아니라 무예를 사용하여 세력을 넓히는 등 단금삼규 전부를 어기고 있소."
"……."
"노납은 이제 오백사십 일의 기한을 남겨둔 검회에 앞서 이 사실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자 하오이다. 서장의 법왕께서 말씀을 이어주시오."
서장 밀종은 천외십사종 중 법을 관장하는 일종의 형당(刑當)의 기능을 맡고 있는 곳이었다.
호리대법왕.
아홉 개의 계단 위에 화살표 모양의 흰 머리가 붙어있는 갈색가사의 깡마른 모습을 한 그가 입을 열었다.
"어떤 문파든 단금삼규를 어겼을 때는 즉시 종주총련(宗主總聯)에 정식 회부되오. 연후, 모인 인원의 과반수를 넘는 찬성이 성립되면 즉시 전체의 힘으로 규약을 어긴 문파를 응징하오이다."
"아미타불…… 응징방법은?"
"대유(大酉) 화사동천(華沙洞天)에 있는 칠악동(七惡洞)에 입동시키오."
칠악동.
순간 중인들의 얼굴이 가볍게 변했다.
도대체 그곳이 어디길래 지념경에 이른 고수들이 이토록 놀란단 말인가?
제세생불은 그런 중인들을 향해 횃불 같은 시선을 던졌다.
"노납은 이 일을 정식으로 제종주 앞에 회부시키는 바이오. 그럼 지금부터 선표에 들어가겠소."
그는 말과 함께 한 개의 투명한 옥돌을 꺼냈다.
"찬성자는 이 옥돌에 구멍을 뚫어주시오. 현 인원이 십 인이니 육 인 이상이 동의하면 되오이다."
십검지의 옥수령부터 차례가 돌아왔다.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것을 옆의 상아선녀 진진에게 넘겼다.
진진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옆 사람에게 다시 넘겼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대막, 요동, 동영, 남만, 서촉, 열하, 서장의 순서로 옥돌은 넘겨졌다.
결과는 오(五) 대(對) 사(四).
대막, 요동, 동영, 남만, 서장이 찬성하여 다섯 표요, 남해, 새북, 서촉, 열하가 반대하여 네 표였다.
옥돌은 마지막으로 제세생불에게 넘어왔다.
제세생불은 무거운 표정으로 옥돌에 찍힌 다섯 개의 구멍을 바라보았다.
그가 찍으면 여섯으로써 응징이 성립되고 그가 찍지 않으면 이 안건은 부결되는 것이다.
하나 그는 이내 우수 중지를 들어 옥돌 위에 갖다댔다.
지지직―
한소리 미세한 둔음과 함께 들고 있던 옥돌에 구멍이 뚫렸다.
선표 여섯!
이것은 응징을 뜻함이라…….
제세생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법규에 의하여 만룡가의 후예를 정식으로 응징하……."
그때 돌연 종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해 옥수령이 발딱 고개를 쳐들었다.
"잠깐, 본 주는 이 일에 약간의 어패가 있다고 생각해요!"
순간 중인들의 놀란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제세생불.
그는 새외십파의 실질적인 영수(領袖)였다. 그런 그에게 저렇게 당돌한 어투로 말을 하다니…….
하나 제세생불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미타불…… 어떤 점에 있어 그렇다고 생각하시오?"
"대활불이 말씀하신 응징의 대상은 어느 한도까지 포함되는 건가요?"
"그야…… 만룡가의 진학(眞學)을 익힌 자에 한하는 것이오."
"소녀가 알기로는 진천우도는 이미 죽었어요. 그의 아들들은 만룡가의 무학을 오성(五成)도 다 익히지 못했고, 그의 후계자는 이제 막 금악을 향해 출발했어요. 그 중 누구를 칠악동에 입동시킬 생각인가요?"
제세생불은 말이 막혔다.
규약에서는 오성 이상의 무예수준에 이른 자만을 종주로 인정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 그녀의 말대로라면 지금 만룡가에는 아무도 해당자가 없는 것이다.
"아미타불…… 그건……."
"실상 그 안에 해당자가 있다고 해도 오늘의 득표는 문제가 있어요."
"……!"
"천외십사종 중 새외십파만이 이 집회에 참석했을 뿐, 만룡가를 비롯한 중원의 한북(漢北), 화남(華南), 중주(中州)의 종주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어요. 과연 그들이 왔어도 지금과 같은 득표가 나왔을까요? 칠악동의 입동이란 그 사람을 매장시키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하여 천 년을 이어온 명문 하나를 멸망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거예요. 나는 이 일에 제종주의 재삼숙고가 있으시길 바래요."
옥수령의 열기 띤 말이 끝나자, 열하 철패왕이 큰 머리를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옥종주의 말씀에 일리가 있소. 칠악동은 너무 가혹하오.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규약에 대한 선표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것도 문제가 있소. 본 주의 생각이오만 이 두 안건의 중간형태를 취하는 것이 어떨지……."
제세생불이 시선을 던졌다.
"아미타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소?"
"사실 우리는 만룡가에 대한 뚜렷한 증거가 없소이다. 진천우도가 무림에 나와서 영토를 확장하기는 했으나 만룡가의 진학을 썼는가 하는 것엔 의문의 여지가 있소. 거기다가 그는 이미 죽은 몸이오."
"……!"
"우리는 일단 이 일에 대한 특계(特戒)를 만드는 것이오. 즉, 소속인원으로 하여금 지금 금악을 향하고 있는 후계자들의 뒤를 면밀히 조사하게 하여 만약 그들이 금악의 무예를 익히고 나와 그 무예를 검회 전에 쓴다면 즉시 응징을 가하도록 하는 것이오."
"흐음……."
"단, 만룡가의 후계자들이 종내 그들의 진학을 익히지 못했을 때에는 이 모든 법규는 폐지되는 것으로 하오."
순간 중인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철패왕의 말은 질서정연했고 조금의 기움도 없는 것이다.
제세생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좋은 말이오이다. 아미타불…… 그렇다면 특계조(特戒組)는 어떻게 꾸미는 것이 좋겠소?"
"육 파 이상의 문파고수 십여 명 정도, 그리고 특계조 계주(戒主)는 종주급으로 하면 좋겠소이다."
그러자 즉시 서장, 남만, 동영, 요동, 대막에서 자파의 고수들을 천거해 왔다.
서장(西藏).
금륜(金輪), 은륜(銀輪), 동륜(銅輪)의 천외삼존자(天外三尊者).
남만(南蠻).
혈살추혼(血殺追魂), 팔비수라(八臂修羅).
동영(東瀛).
혈전신도(血電神刀), 자전신도(紫電神刀).
요동(遼東).
일진풍(一陣風), 일지향(一枝香).
대막(大漠).
광사(狂沙), 혈사(血沙).
그리고 제세생불이 천거한 냉면천왕(冷面天王) 비명대사(飛明大師), 천수여래(千手如來) 보법대사(普法大師) 등 도합 십삼 인이었다.
이러한 특계조의 계주로는 만장일치로 상아선녀 진진이 선임됐다.
"아미타불…… 그럼 오늘의 집회는 이것으로 끝내오이다. 특계조는 내일부터 활동을 개시하며 이들의 조사 후, 다시 집회를 소집하겠소."
슈슈슉!
슈숙―
올 때도 흔적없이 오더니 갈 때도 마찬가지로 흔적이 없다.
그로부터 일각 후, 산정에는 옥수령 혼자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옥수령은 한줄기 긴 탄식을 터뜨리더니 고요히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투명한 하늘 저편으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투박하지만 정(情)이 있고 우직하지만 재질이 뛰어났던 한 사람.
"운룡…… 당신은 운도 없군요. 간신히 가문을 찾아 그 위용을 떨치는가 싶더니 선대(先代)의 잘못을 그대로 이어받게 되다니…… 이제부터 나는 당신이 금악의 무예를 얻지 못하기를 빌어야 하는 건가요?"
비록 치료를 위한 것이었다고는 하나 이미 살을 섞은 부부의 몸이었다.
옥수령은 일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렇다고 운룡의 일에 섣불리 뛰어들었다간 자신마저 징계의 대상이 될 것이 아닌가?
그것은 비단 자신을 파멸시키는 일일 뿐만 아니라 문파를 배신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걷잡을 수 없는 여심(女心).
한소리 쓸쓸한 탄식만이 파란 하늘 위로 무심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 * *
猿鳴客散暮江頭
人自傷心水自流
同作遂臣君吏遠
靑山萬里一孤舟
저문 날 나루터에 님과 이별하고 나니, 사람은 돌아가고 원숭이만 울고 있네.
슬픈 일 모른 척하고 물은 잘도 흐르는구나.
나 또한 자네같이 귀향길 신세인데, 자네가 가는 곳은 나보다도 먼 곳이네.
만리 길 푸르른 산과 배 한 척만 있구나…….
배가 물 위가 아닌 곳을 간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비단 놀라운 일일 뿐 아니라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하나 이 배는 분명히 물이 아니라 뭍을 가고 있었다. 그것도 사막 위를…….
배는 크고 거대했다. 또한 화려했다.
한데 이 배의 앞편에는 노가 없고 엉뚱하게도 말 다리가 대신 튀어나와 있었다.
도합 구십육 개의 말 다리이니 스물네 마리의 말이 배 안에서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 배에는 거대한 타목(舵木) 하나가에 달리어 있어 그것으로써 방향을 조정하고 있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라 하겠으나 배는 분명히 달리고 있었고, 난난은 아까부터 배의 선창에 섬연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생사선(生死船)의 묘용(妙用)에 매우 탄복하고 있었다.
게다가 생사선이 가지고 있는 묘용은 이것뿐만이 아니라고 했다.
도합 팔십구 종(八十九種)이나 되는 각종 기관장치가 이 배 안에는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입을 쩍 벌리게 하는 것으로써 이 배 하나를 가진다면 십만대군과도 능히 싸울 수 있을 정도였다.
금악까지의 수송수단을 가장 큰 난제로 여겼던 난난에게 있어 이 배는 가히 보물과도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 전까지 이 배의 운용방법을 혜공과 혜혜 남매로부터 완전히 전수받고 난 참이었다.
사막에도 달이 떴다.
두두두―
두두두―
배 밑창의 말발굽 소리 외에 모래 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거기서 혼자 무엇을 생각하고 계시죠?"
돌연 그윽한 목소리와 함께 운연이 선창 안으로부터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조금 생각할 것도 있고…… 경치도 볼 겸…… 이곳의 달빛은 매우 좋군요."
"감상적이군요……."
운연은 웃으며 난난의 앞으로 다가섰다.
"좋은 밤이긴 하지만 바람이 차요. 운룡은 어디 갔죠? 벌써 며칠째 보이지 않고 있어요."
난난은 배시시 웃으며 말을 받았다.
"지하방에 틀어박혀 있어요. 무공을 연구하고 있을 거예요."
"어떤……?"
"할아버지가 주신 비급이죠. 그는 그것을 금악까지 가는 도중에 필히 익혀야만 해요."
"후훗…… 앞으로 얼굴 보기 힘들겠군요. 그는 무슨 일이든지 한번 빠지면 정신이 없어요."
"장점이죠."
"그건 그렇죠."
칠흑 같은 수발을 쓸어올리며 운연이 말을 이었다.
"금악은 아직 멀었나요? 도대체 그곳이 어디죠?"
"이 사막 안에 있어요. 오백 리쯤 남았을까……."
"오백 리라…… 그런데 이상하군요. 도남강의 추적대가 왜 통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요? 그들이 추적을 포기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고……."
순간 난난의 얼굴이 가볍게 굳어졌다.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고민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였다.
'도남강…… 그는 왜 오지 않을까?'
난난 등은 지금 큰 길가에서 온몸에 불을 지르고 다니는 격이라 할 수 있었다.
생사선은 너무 특이해서 그들이 지나온 길의 사람들이 아무리 멍청하다 해도 이 모습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생사선이라면 삼척동자라도 능히 쫓아올 수 있다.
그런데도 도남강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자랑이요, 정예인 봉황무색오살 등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난난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는 반드시 올 거예요. 오히려 그보다 그의 수하들이 더 무섭다고 할 수 있어요. 누가 오든 간에 도남강 일파가 오는 순간부터 우리는 괴로움을 각오해야 해요."
촛불.
촛불 아래 한 사람.
그는 한 줄기 그윽한 황촉 불빛이 이글거리는 관옥처럼 단아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얼굴은 지금 필설로 다 형용할 수 없는 큰 고뇌로 얼룩져 있었다.
"이것은…… 도저히 정상적인 무예가 아니다."
운룡, 그는 지금 한 권의 책자를 앞에 펴놓은 채 어이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그리고 매우 당황한 채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심마공(聖心魔功).
그것은 공력을 운기하는 신공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초식에 가까웠다.
요요부단(了了不斷).
무애소지(無涯所地).
공공유극(空空有極).
성심마공은 모두 이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초식의 이름처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무순(無順)으로 되어 있었다.
요요부단(了了不斷).
글 그대로 직역하자면 마치고 마치어 끊임이 없다라는 뜻인데 그 아래에는 엉뚱하게도 천섬일격(天閃一擊)이라는 주해가 있었다.
무애소지(無涯所地).
끝닿는 데가 있는지 없는지 요상막측한 이 문구의 아래에는 자전신교(紫電神巧)의 주해가 있었다.
공공유극(空空有極).
텅 비었는지 비려다 말았는지 난해한 이 문구의 아래에는 또한 어기분여전(馭氣奔如電)의 주해가 있었다.
하나 운룡은 그 어느 것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 초식들은 한마디로 인간의 뼈와 살의 구조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즉, 팔은 안으로 굽고, 뼈는 일정 각도 이상 더 굽히거나 올리지 못한다는 상식을 아예 무시한 것이었다.
뿐인가? 이 괴상한 초식들을 펼치자면 몸 속의 진기를 마치 바람난 여편네처럼 좌충우돌 휘둘러야만 했다.
피가 흐르는 제 방향도, 혈도가 이루어진 제 각도도 모조리 무시한 채 거두고, 또는 모로 휘둘러야 하는 것이니, 이것은 마치 밥을 식도로 넘겼으되 뇌(腦)로 보내어 소화를 시킨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두두두―
두두두―
이곳은 지하방인지라 몹시 시끄러웠다.
바로 밑에서 달리는 말발굽 소리로 인하여 온 방안이 우르르 울리고 있었다.
하나 운룡의 귓전에는 그 어느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검미를 역팔자로 깊이 찌푸린 채 글자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책을 바짝 눈앞으로 끌어당겼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