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가 만난 문인들 21
박태진 시인
김 송 배
박태진(朴泰鎭) 선생은 스스로 ‘老詩人’이라고 했다. 그가 아홉 번째 시집 『時代는 가고, 다시 가고』에 수록된 「老詩人의 푸념」이란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격(激)한 어조로 읊고 있다.
왜 내일을 살지 않을까 / 이르지 못하는 그대로의 / 모르면 모르는 그대로의 / 오늘을 분명히 살고 있다면 / 그러나 쫓고 쫓기는 두셋 세대들의 / 찟고 찟기는 이음새의 허탈속 / 시를 아직도 오솔길에서나 쓸 것인가
어쩌면 아직도 감상적이거나 경박한 언어유희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우리들 현대 시인들에게 정중하게 또는 따끔하게 질책하고 있다. 스스로 ‘푸념’이라 언어를 사용했지만, ‘노시인’의 진정한 충고로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그는 내가 1980년대 초반『心象』지에 당선하고 나서 어느 개인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성춘복 선생과 김현숙 시인들과 교유(交遊)할 때 자연스럽게 상면하게 되었다. 키가 훤칠하게 크시고 눈이 부리부리한 맵시가 서양 신사를 능가하는 젠틀맨이었다.
그는 1921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일본 리쿄대학(入敎大學) 문학부 영미과를 수료한 후 귀구하여 이화여고에서 잠시 교편을 잡다가 국내 굴지의 해운회사 영국 런던지사장으로 근무하면서 서양풍의 신언(身言)을 겸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런던에서 생활할 때 이미 서양에서 발달한 문예사조를 익히기 위해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보다 앞선 다다이즘과 쉬르레알리즘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에 관한 서적들을 원서로 구입하여 탐독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1948년에 연합신문에 시「新開地」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으며 1957년에는 김경린, 김원태, 김정옥, 김차영, 김호, 이영일, 이철범, 이활과 9인이 [현대의 溫度]라는 동인을 결성하고 앤솔로지를 발간하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이 [현대의 온도]동인은 1940년대 후반기부터 시작한 모더니즘 운동의 다양한 결함을 비판하고 일부 성급하게 전개했던 실험운동의 모순을 지양하여 새로운 휴머니즘의 세계를 발견하려고 집합한 것이었다. 이미 그들에게 아비규환의 절망도 정신적인 미로도 차분한 지성의 힘으로 극복하고 이제 새로운 세계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비평정신이 투철했다고 문학사가(文學史家)들은 말한다.
그의 시풍에 대해서는 김해성 교수가 저술한『한국현대시문학개설』에는 다음과 같이 적시하고 있다.
그의 시풍은 지극히 서민적인 현실에다 소재를 두고 일사적인 생활의 풍경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풍경은 거리와 집과 수도가 있는 뜰이며 시의 위치는 바로 오늘이다. 그는 오늘의 현실 생활 속에서 부드러운 지성의 눈으로 차분하게 현실을 점묘(點描)해 나가면서 휴머니티 속에 이지적인 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항상 차분하고 점잔하신 언행과 더불어 그의 작품은 현실과 서정으로 우리 민족 고유의 인생관으로 낮은 목소리의 생생한 언어로 누구보다도 개성적인서정과 리듬을 구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와 나는 1987년 대만에서 개최된 ‘아시아시인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황금찬, 성춘복 외 몇 분의 시인들과 일본 도쿄로 날아갔다. 여장을 풀고 시내 구경을 나갔는데 긴좌(銀座)의 거리와 지하철을 타고 돌아보는 코스였으나 그는 이 일정을 취소하고 그가 수십년전에 다녔던 입쿄대학을 찾아본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옛날을 회상하면서 모교를 돌아본다는 근엄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한국시인협회가 설립할 때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고 많은 작품 활동을 통해 1962년, 첫 시집 『변모』이후 2000년 제10시집 『내일은 오고』까지 상재하여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또한 선시집을 비롯해서 평론집 『현대시와 그 주변』『박태진 시산문』등 3권, 자역영시선 『Selected poem』2권, 번역시집 『英, 美, 佛 詩選』2권 외 수필집이 다수 있다.
그는 2002년에 『최신 영, 미, 프랑스 시선집』이란 이름으로 역간(譯刊)집을 내면서 ‘나는 평생의 소원이 성취되는 느낌이고 기쁘기 한량없다. 일인치하의 젊은 내가 일본의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외국의 저서를 일어 번역으로 읽으며 우리 한인들은 언제 자기말의 번역으로 읽느냐는 꿈같은 이야기였다’고 토로하는 것을 보면 서양의 작품들을 한글로 번역해서 우리 국민들에게 읽도록 하고픈 간절한 업적이 이루진 것이다.
어느날 그에게서 시집『時代는 가고, 다시 가고』를 선물로 받았다. 나는 즉시 서평을 썼다. 독후감이겠지. 대원로 시인의 시를 이러쿵 저러쿵하면 큰 실례가 될 것이다. 그는 ‘나는 뭣을 다짐하는가. 내 나이를 감안할 때 더 쓸 것이 있겠는가 반문해 본다’ 혹은 ‘노욕의 애교로 봐줬으면 한다’는 다소 감상적인 어조는 그의 진실임을 알 수 있다.
지난 이야기 어쩌다 기억하라지 / 괘씸했던 그런 일들 / 답답하긴 왜 그래서 인생인 걸 / 소나무 기둥 가시지 않는 응어리들 // 잊었던 아니 잊었던 / 어느 時點은 그때 그때는 다시 가고 / 인생을 살고 보면 수박겉의 얼룩무늬 / 세월은 가고 무늬는 낡고--중략--맙소사! 늙은이라고 꿈이 없을까 / 이어 깨지는 그런 거 말이요 / 난 다밥해서 탑골공원은 안가, 답답해서 / 인생을 살만큼 사는데에 / 不滿도 내 멋의 하나.
이렇게 작품「시대는 간다」에서 절규에 가까운 어조에 대해서 약간의 풍자적 요소가 스며있기는 하지만, 이는 채근담에서 볼 수 있는 ‘하루 해가 벌써 저물었으되 오히려 노을이 아름답고 한 해가 장차 저물려 해도 귤 향기가 더욱 향기롭다. 그러므로 일생의 말로인 만년은 군자가 마땅히 정신을 백배나 더해야 한다’ 고사를 인용한 서평을 오랫동안 편집고문으로 있던『순수문학』1996년 7월호에 게재하였다.
나는 이 시집 서평을 쓰면서 노시인의 내면에 잠재한 철학의 깊이와 폭 넓은 가치관을 이해하는 기쁨도 가졌다. ‘인생도 살고 보면 수박겉의 얼룩무늬’이며 ‘불만도 내 멋의 하나’라는 낭만적 아이러니를 다시 감지할 수 있었다.
하루는 광화문 근처에서 좀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뭐가 잘못되어 혼날 줄 알았으나 수고했다며 점심을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일식집에서 노시인과 정종을 곁들인 오찬은 그동안의 문학적 그의 넋두리인 작품「시인의 雜談」을 동시에 풀어 마시고 있었다.
이러한 문학적 업적이 인정되어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과 순수문학상, 옥관문화훈장, 영랑문학상, 번역협회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으나 어차피 인생은 한번은 끝내는 것. 그도 2006년 1월 1일, 향년 83세를 일기로 평생을 함께한 사모님과 사랑하는 딸을 남겨 놓은 채 영면했다. 명복을 빕니다.
*[문학공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