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야신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산야신이라는 말은 구도자, 수행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산야스는 구도자가 지켜야 할 계율을 말하는 것입니다.
5. 하늘같이 넓고 바다처럼 깊게(태을금화종지) 4/4
내가 말하는 제자(Sannyasin)의 의미는 구식의 케케묵은 성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죽은듯이 무감각하게 앉아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창조적이 된다는 것이다. 춤추고 노래하고 곡을 짓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라.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하라.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어 그것을 하라. 행위란 꿈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도록,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있는 가장 큰 기쁨이다. 진정한 축복이다. 오직 그대가 미지의 것을 실현했을 때, 만들고 창조하며 꿈을 현실에 옮겼을 때, 그대가 신을 도왔을 때만 찾아온다. 그대 자신의 방법으로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만들었을 때, 세상에 기쁨을 더해 주었을 때, 그대는 산야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 내면의 생명을 아는 것이 그대로 하여금 죽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일단 그대가 완전히 자신의 힘으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면 내면의 불꽃이 양쪽으로부터 활활 타올라 죽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3의 눈은 오직 극한에서만 작동하기 시작한다. 최고점에서만이다. 질질 끌려다니듯 살지 말라. 삶을 짐이나 채워야만 하는 의무 따위로 생각하지 말라. 삶을 춤이 되게 하고 축제가 되게 하라.
이것이 불멸에 이르는 길이요, 세속을 초월하는 길이다. 삶의 불꽃으로 제3의 눈이 열리면 그대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더 이상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차이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옛날의 산야스(sannyas), 소위 그 수도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을 버리는 것으로 가르쳐져 왔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포기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삶의 의지를 최상으로 끌어 올리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한 번 그대가 자신의 존재 속에서 진실을 발견만 하면 세상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높이 오를 수록 낮은 곳에 있는 것은 하찮게 보인다. 그대는 세상을 버릴 필요가 없다. 이미 떨어져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른 곳으로 도망갈 필요가 없다. 이 세상에 살면서 초월하도록 하라. 도망 하는 것과 초월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참 제자는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하는 법이다.
빛은 몸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몸 밖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일단 몸속에서 빛을 보게 되면 그 빛은 몸 속 뿐만 아니라 몸 밖에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라. 어둠은 개인적이지만 빛은 우주적이다. 죽음은 개인적이지만 삶은 우주적이다. 비극은 개인적이지만 축복은 우주적이다. 비극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대가 하나의 분리된 실체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축복이 흘러넘치기 위해서는 그대가 조화 가운데서 전체의 일부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빛은 몸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몸 밖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해와 달이 산천대지(山川大地)를 비추나니 그 모든 것이 빛이다.
일단 내부에서 그 빛을 보게 되면 어디서나 그것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달이든 해든..... 모든 빛은 동일하다. 안과 밖이라고 해서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빛은 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해와 명철, 통찰과 깨달음,
그리고 모든 정신작용은 빛에 불과하다.
달 속의 빛이나 제3의 눈 속에 있는 빛이나 같은 빛이다. 일단 그 빛이 같은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안의 세계와 바깥 세계의 구분이 사라진다. 안 세계가 바깥 세계요, 바깥 세상이 안 세상이다. 그래서 선사(禪師)들은 삼사라(Samsara)가 니르바나(Nirvana), 즉 이 세상 자체가 그대로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이 몸이 바로 부처요, 이 땅이 그대로 낙원이다.
그래서 부처는 깨달음을 얻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말 믿기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모든 존재가 나와 더불어 깨달음을 얻었다." 수세기 동안 불교도들은 이것에 대해 명상해 왔다. "무슨 뜻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내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 모든 존재도 깨달음을 얻었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천지인데 말이다."
수행자 자신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는데 어떻게 모든 존재가 깨달음을 얻었을까? "
그러나 부처에게 그것은 계시되었다. 그는 안과 밖을 구분 짓는 것이 단지 자아(ego), 쬐그맣고 얇은 커튼과도 같은 자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다. 일단 그 커튼이 떨어져 나가면 더 이상 안도 없고 바깥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는 "내가 깨달음을 얻었노라."고 말할 수 없다. 대신 그는 말한다. "모든 존재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모든 나무와 모든 강과 모든 산과 모든 사람들, 그리고 온갖 동물과 식물이 전체 깨달음을 얻었다. 그에게는 이제 어떤 분리된 자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대들이 깨달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순히 이렇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내가 깨달았노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굴레 속에 있었다. 나는 무지와 불행 속에 있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나' 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는 축복에 젖어있다. 존재는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안과 밖은 같은 것이다. 사실 안도 없고 바깥도 없다. 모든 구분은 빛이 제3의 눈으로 흘러들어갈 때 사라진다. 한 개의 눈, 그 외눈으로 흘러들어갈 때 말이다. 모든 차별은 사라진다. 무지개가 한 줄기의 하얀 빛이 된다.
며칠 전 이런 질문이 있었다. "바그완( Bhiwn ), 당신은 하얀 옷을 입으면서 왜 우리들에겐 오렌지색 옷을 입으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단지 상징이다. 그대들이 모든 색깔이 사라져 한 줄기 흰 빛 만이 존재하는 상황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한 것이다.
이해와 명철, 통찰과 깨달음,
그리고 모든 정신작용은 빛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몸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밖에 있는 것도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다.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그것은 풀밭과 꽃잎 위에서 넘실거리고 연꽃 위에서 춤을 추는 그 빛과 똑같은 빛이다. 그 똑같은 빛이 내부에서는 명철과 깨달음, 통찰과 이해가 되는 것이다. 명심하라. 스승이 말하는 것은 이해이지 지식이 아니다. 스승이 말하는 것은 명료함이지 대답이 아니다. 그대는 너무나 명료해져서 질문들은 자취를 감춘다. 어떤 해답을 찾아서가 아니라 그대가 너무나 명료해져서 더 이상 혼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단지 그것 뿐, 질문이 사라져 버린 것이지 해답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이해라고 한 것이지 지식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불과 며칠 전, 아니루다( Aniruddh )도 물었다. "우리의 지식과 스승님의 지식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저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차이점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내가 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을 것이다. 사실은 그 반대이다. 나는 그대들 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다.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단지 명료할 뿐이다. 그것은 명철과 이해력 때문이지 지식 때문이 아니다. 여기에는 나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들의 문제이다. 그들은 그 지식 나부랑이를 내팽개쳐버려야 하리라.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단지 명철만이 있을 뿐이다. 질문이 들어오면 나는 거기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명철함으로 조명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며 그리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반응으로 그대에게 응답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요, 통찰력인 것이다. 지식이 사람들을 눈멀게 한다. 그들의 눈은 지식으로 가득 차 있어서 다른 것을 볼 수 없다. 질문을 하기도 전에 그들은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미 대답이 거기에 있다.
그들은 그대의 질문이나 그대의 존재에 대해서는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그대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주어진 대답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황급히 대답을 하고 나서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논증과 기록들을 들먹인다. 모든 지지수단을 동원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한 가지... 이해력, 보는 힘, 즉 통찰력 밖에는 없다. 그래서 스승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해와 명철, 통찰과 깨달음..... 그것은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구름 한점 없는 내면의 하늘일 뿐이다.
하늘과 땅의 광화(光華)는 대천세계(大千世界)에 충만하다.
일신(一身)의 광화도 역시 하늘을 가득 채우고 땅을 뒤덮는다.
그것은 하나의 빛의 꽃(light-flower)이요, 이 모든 존재 자체이다. 신비주의자들이 경험하는 것이 이것이다. 삼라만상이 빛 이외의 것으로는 되어있지 않다는 것. 온통 빛 뿐이라는 것. 그 빛은 바로 존재의 기본 요소인 것이다. 현대 물리학자들도 거기에 동의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전기라고 부른다. '빛'이란 단어는 너무 시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땅의 언어로 끌어 내려야 했다. 그래서 대신 '전기'란 말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 물질(matter)은 사라졌다. 물질의 깊은 중심에는 전기와 전자들, 그리고 춤추는 전기 입자와 에너지 입자밖에는 없다. 거기에는 물질도 없고 질량도 없다. 이것은 수세기에 거쳐 신비주의자들이 체험해 왔던 바다. 그들이 태어난 곳이 인도이건 티벳이건 차이가 나지 않는다. 존재가 그 어느 것도 아닌 빛만으로 되어 있다는 것, 이것은 모든 신비주의자들의 기본적인 경험이 되어 왔다. 『태을금화종지』는 말한다. "이 빛, 이 빛의 꽃, 이 빛의 이파리들이 바깥 뿐만 아니라 내부의 구석구석까지 가득 비춘다."
그러므로 빛이 회전하면 하늘과 땅과
산과 강 일체도 동시에 회전하기 시작한다.
똑같은 것을 부처는 다른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내면에서 빛이 순환하는 것을 본 순간 그대는 다른 모든 곳에서도 빛이 동트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단지 빛의 흐름, 거대한 빛 에너지의 출렁거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인체의 정화(精華)를 위로 끌어올려 눈 속에 응축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체의 비밀을 여는 위대한 열쇠이다.
초심자들은 주의할지라. 하루라도 명상수행을 하지 않게 되면
이 빛은 흘러 나가 버리나니 누가 그 행방을 알겠는가?
단지 일각(一刻)의 시간만 명상을 해도 그것으로 만겁천생을
제(制)할 수 있다. 모든 방법들은 고요함으로 끝을 맺는다.
이 놀라운 묘법(妙法)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조사(祖師)는 하루 15분이면 된다고 말한다. 제3의 눈에 응집된 채 15분 동안 고요히 앉아 있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대의 미래를 송두리째 바꿔 버리기에 충분하다. 그대는 육체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된다. 다시 세상으로 내던져질 필요가 없다. 그대는 가르침을 받았으며 육체와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살 만한 가치가 주어졌다.
그대의 영혼은 아무런 구속도 없이 자유롭고 분방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죽음도 태어남도 끝이 날 것이다. 그대는 이 무한한 존재의 세계에서 영원히 빛으로 꽃필 것이다. 단지 15분이면 된단 말인가? 그렇다. 15분만으로도 기적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침묵과 고요를 위하여 15분 조차도 할애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Ignatius Loyola)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만약 교황이 로욜라가 일생을 바쳐 일했던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를 해체하라고 명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다. 로욜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15분 동안 기도하고 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이오"
매우 의미심장한 대답이다. 비우호적인 교황이 권좌에 올랐으니 로욜라의 모든 업적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었다. 로욜라는 작은 신비주의 단체를 결성했었다. 그곳에서는 비의(秘의)에 의해 일이 행해졌으며 그것이야말로 기독교가 항상 반대해 오던 것이었다. 기독교는 신비주의자들을 위험한 사람으로 간주하며 항상 두려워해 왔다. 신비주의자들은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었으며 일단 그들이 진리를 세상에 내놓으면 사람들은 더 이상 의식 따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이제 누가 교회 따위에 신경이나 쓰겠는가?
그래서 기독교는 변함없이 모든 신비주의 단체들을 파괴해 왔다. 그리하여 어느 누구도 교회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이르는 다른 문을 갖지 못하도록, 모두 다 성직자에게만 와야 하도록 획책해 왔다.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욕구가 생길 때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어서는 안되었다. 이런 바보같은 생각 때문에 기독교는 이 세상의 종교라 할 만한 것은 송두리째 파멸시켰다.
사람들은 각각 다르고 또 각각 다른 성격의 단체를 원하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 다른 종류의 기법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찾는 사람들은 신비 주의 단체를 찾아가야 한다. 그들은 형식적인 종교의 일부가 될 수 없다. 형식적인 종교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그것은 미온적이고 피상적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교회의 압력 때문에 참종교가 지하로 숨어야 했다. 뒤에 있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는 많은 위장수법을 써야 하는 법이다. 연금술이 바로 그러한 위장수법의 하나다. 진짜 내막은 다른 것이었다. 연금술사는 주위 사람들이 자신의 하는 일이 저질 금속을 귀금속으로 만드는 작업이라고 믿게끔 만들었다. 그것은 허용이 되었다. 교회는 매우 흐뭇해 했다.
저질 금속을 귀금속으로 만드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괜찮았다. 성공하면 교회에 더 많은 금덩어리가 생기지 않는가. 그러니 거기에 대해 염려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위장수법에 불과했다. 그것은 진정한 연금술이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만 그렇게 보였을 뿐 내막은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저차원의 존재를 고차원의 존재로 변형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태을금화종지』였다. 보통 금속에 해당하는 그대의 성 에너지를 황금에 해당하는 영성(靈性)으로 탈바꿈시키는 비의(秘饍)였던 것이다.
성가신 일이긴 했지만 연금술사들은 자신들이 금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주위 사람들에게 심어 주어야 했다. 모든 사람들은 황금에 관심이 있게 마련이다. 어쩔 수 없는 교회 또한 하나님 보다는 황금에 더 관심이 있게 마련이다.
로욜라는 위대한 신비주의자였다. 그는 예수회를 세웠다. 그런데 아주 적대적인 교황이 권좌에 올랐다.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작정이신가요? 이제 어떻게 될까요? 교황의 말 한마디면 예수회는 사라질텐데요"
로욜라는 대답했다. "15분 동안 기도하고 나면 모든게 괜찮아질 것이오 깊이 명상에 빠지는데 15분 걸리니 그것이면 족하오. 내가 거기에 이르면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오."
조사는 이야기 한다. 단지 15분이면.....
그것으로 만겁천생을 제(制)할 수 있다.
모든 방법은 고요함으로 끝을 맺는다.
명심하라. 방법이 어떻든 간에 목표는 동일하다. 고요함, 내면의 완전한 침묵, 사념이 사라진 상태, 만족감조차도 수반하지 않는 순수의식, 바로 그것인 것이다.
이 놀라운 묘법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그것은 정말 헤아릴 수조차 없다. 사념들이 사라지고 그대가 온전히 침묵할 때, 그 침묵은 하나의 끝없는 심연과 같다. 그 깊이를 잴 수가 없는 것이다. 태평양은 측량이 가능하다. 그 깊이는 5마일이다. 그러나 내면의 태평양은 측량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무한하다. 계속해서 파내려가고 깊이 잠수를 해가도 바닥에 닿지 못한다. 절대로 닿을 수 없다. 오직 사념들만이 측정이 가능하다. 무념(無念)의 경지는 측정될 수 없다. 그래서 무념은 신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명심하라. 사념이 없는 경지가 일종의 잠자는 상태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아주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일같이 일어난다. 깊은 잠 속에서 꿈들마저 사라질 때, 그대는 심연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깊은 잠을 자고나면 몸이 풀리고 원기가 회복이 된다. 아침에 그대는 생기를 느끼고 다시 태어난 듯 새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적이다.
파탄잘리는 한 가지만 차이가 날 뿐 깊은 잠과 사마디는 아주 비슷하다고 말했다. 잠은 무의식이지만 사마디는 의식이라는 것. 그러나 그대는 똑같은 곳, 측량할 수 없고 신비한 똑같은 내면의 공간을 다녀오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고 욕망도 없고 마음의 움직임도 없어 모든 것이 고요하다. 모든 방법들이 도달하는 곳은 거기이다. 요가, 탄트라, 타오(Tao), 하씨디즘(Hassidism ), 수피즘(Sufism) 등은 다른 길로 거기에 이르는 방법들일 뿐이다. 그것들은 각양의 사람들을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그러나 수행을 시작함에 있어서는 표면적인 층으로부터 깊은 층으로,
조잡한 차원으로부터 정묘한 차원으로 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처음에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대는 표면적인 층으로부터 깊은 층으로 해나가야 한다. 무엇이 표면적인가? 표면적이란 사념의 끊임없는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깊은 층이란 무엇인가? 무념의 상태를 이름이다. 조잡한 차원이란 무엇인가? 마음의 모든 내용물들을 이름이다. 그러면 정묘한 차원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비워진 상태를 이름이다. 수행자는 계속해서 밀고 나가야 한다. 처음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오로지 그 일에만 전념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에 가서야 비로소 명상이 별로 힘들지 않게 되면서 축복된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수행을 시작함에 있어서는 표면적인 층으로부터 깊은 층으로,
조잡한 차원으로부터 정묘한 차원으로 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것은 중단해 버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을 규칙적인 일과로 삼아라.
수련의 시작과 끝은 하나여야 한다. 그 사이에 서늘해지고
따뜻해지는 순간이 있나니 그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목표는 모든 방법들이 아주 쉽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도록 하늘과 같이 넓고 바다와 같이 깊어지는데 있다.
그때에야 비로소 목표는 수중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통달은 어떠한 노력도 필요없게 되었을 때, 모든 노력들을 떨어버릴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 어떠한 방법도 필요가 없고 모든 방법들을 떨어버릴 수 있을 때, 진정으로 통달하게 되는 것이다. 명상은 더 이상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대 자체가 명상이 되어 버렸을 때 진정한 통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대는 명상 속에 살고 명상 속에 걸으며 명상 속에 앉는다. 행주좌와(行住坐臥)가 그대로 선(禪)이 되는 것이다. 그 속에서 먹고 자는 그대는 이제 그것 자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한 순간은 온다. 그러나 처음에는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기억하라.
물은 정확히 온도, 99도도 아닌 99도 9분도 아닌 100도에서만 수증기가 된다. 그와 같이 그대가 온 힘을 기울여 100도 그 절정에 달했을 때는 언제나 그 즉시 보통 금속이 귀금속으로 변한다. 즉시 성적인 에너지가 영적인 세계를 관통하게 되는 것이다. 밖으로 향하던 에너지가 즉시 180도 회전을 하여 양 눈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바깥의 모든 것과 안의 모든 것이 깨달음을 얻는다.
예수는 말했다. "나무를 쪼개어 보라, 그러면 나를 발견할 것이다. 돌을 깨뜨려 보라, 거기에 내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궁극의 경지이다. 나무를 쪼갤 때 하나님을 발견하고 돌을 깨뜨릴 때도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때 그대는 하나님 위에, 하나님 안에, 하나님으로서 생활하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하나님을 호흡하며 하나님을 먹고 마신다. 만물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조사가 말한 궁극의 경험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제3의 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