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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일곱 교회들에 주신 교훈 (1)
1-7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주신 교훈
[1-3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그랍손)[편지하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케크메카스)[피곤하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 보내진 각 편지는 그 교회의 사자, 즉 목사에게 보내졌다. 목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보내신 사자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다. 목사는 교회를 인도하며 장로들은 협력한다. 목사가 바로 서면 교회는 바로 서며 목사가 잘못되면 교회가 잘못될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께서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신다. 그는 모든 것을 아신다. 그는 목사를 세우실 능력도, 폐하실 능력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므로 자기의 원하시는 바를 다 이루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급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에게 모든 일을 아뢰며 잠잠히 그의 하시는 일을 보아야 한다.
주께서는 에베소 교회 목사의 행위와 수고와 그의 인내를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사람은 다른 이의 중심을 다 모르나, 주께서는 아신다. 특히 에베소 교회의 목사는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자칭 사도라 하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내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은 많은 원수들과 싸워야 하는 힘든 일이요 낙심하기 쉬운 일이지만, 그는 이 일을 잘 수행하고 잘 참고 피곤하지 않았다. 주께서는 그의 선하고 충성된 행위를 기억하고 계셨다.
[4-5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께서는 에베소 교회의 목사의 과거에 잘한 일도 인정하시지만, 현재의 문제점도 지적하고 책망하신다. 그의 문제점은 처음 사랑을 버린 일이었다. 그가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 또 사명자로서 그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의 복음을 전하고 지키는 일을 위해 수고하고 참고 충성했으나, 지금은 처음에 가졌던 그 사랑과 그 열심과 그 충성을 버렸다는 말이다. 누구든지 지금 주를 뜨겁게 사랑하고 충성함이 없다면 주의 지적과 책망을 피할 수 없다.
주께서는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신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이지만, 그 은혜는 죄인 속에 반드시 죄에 대한 회개와 구주에 대한 믿음을 일으킴으로 그를 구원한다. 하나님 없이 죄 가운데 방황하며 살던 사람이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는 일생에 한번뿐이다. 그것은 ‘생명 얻는 회개’(행 11:18)이며 그것이 구원이다. 아직 회개한 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구원을 받는다. 회개치 않는 자는 영원한 멸망(눅 13:3, 5), 곧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이런 회개를 한 자도 어떤 구체적 죄 가운데 빠졌을 때 그 죄로부터 돌이켜야 한다. 이런 회개는 반복적이다.
주께서는 그에게 만일 네가 회개하지 않으면 네게 임하여 그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말씀하셨다. 촛대를 옮기는 것은 교회를 폐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평양의 교회, 그러나 그 도시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죄를 범했던 그 교회를 하나님께서 폐하신 것과 같다. 그것은 무서운 경고이다.
[6절]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에베소 교회의 목사에게는 아직도 선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이었다. 니골라 당은 14-15절에 있는 대로 우상숭배와 음행을 허용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자유를 왜곡하고 남용하였던 것 같다. 주께서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셨다. 주의 참된 종들은 이단들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성령의 말씀이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한 하나님이시다. 또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하신 말씀은 다른 교회들에게, 즉 지상의 모든 교회들의 사자들과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알고 믿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가졌던 그 처음 사랑을 버리지 말고 그 사랑이 날마다 더욱 많아져야 한다.
또 주께서는 우리가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신다. 이긴다는 말은 죄와 사탄의 시험과 세상의 악의 풍조를 이긴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죄가 많고 사탄과 악령들의 시험이 많고 죄악된 풍조들이 많다. 우리는 과거에 세상에 속하여 살았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 살며 죄와 사탄의 시험과 세상의 악의 풍조와 싸우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긴다는 말은 죄 짓지 않고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한다는 말이고, 진다는 말은 죄 짓는다는 말이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먹는 것은 영생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지는 자, 곧 죄에 지고 사탄의 시험에 넘어지고 이 세상의 죄악된 풍조에 지는 자는 영생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는 영생을 얻고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 요한일서 5: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그러나 그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성령 안에서 힘써 노력해야 한다(벧후 1:5, 10).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순종하는 자가 이긴다. 우리는 다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한 행위를 기억하시고 인정하신다. 2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우리는 선한 일을 힘쓰고 수고하고 오래 참고 피곤해지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은 우리의 중심을 몰라주어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과 우리의 선행과 수고와 인내를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고 낙심치 말고 하나님의 선한 일들에 힘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첫 사랑을 잃어버리지 말고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처음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가졌던 사랑과 각오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 현재 우리의 사랑과 열심이 식어져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책망을 들을 것이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늘 깨어 있어야 하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의 일들에 항상 힘써야 한다.
특히 우리가 우리의 죄와 연약을 깨달으면 우리는 즉시 회개해야 한다. 성도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을지라도 반복해 죄를 짓거나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신다.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죄와 사탄의 시험과 세상의 악의 풍조를 이겨야 한다. 우리는 모든 불경건과 부도덕을 버려야 하고 사탄과 악령들의 시험을 물리치고 세상의 악하고 음란한 풍조를 배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성령으로 중생시켜 회개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게 하신 자들은 다 이길 것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의롭고 선한 삶을 힘써야 한다.
8-11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주신 교훈
[8-9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처음이요 나중[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전통사본)5)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會)라.
주께서는 처음이시며 마지막이시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만 참 하나님이시며 오직 그 하나님께서만 온 세상을 주관하신다. 또 주께서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이시다.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요 11:25). 우리가 그를 위해 죽는다 할지라도 그는 우리를 영광스럽게 다시 살리실 수 있고 참으로 다시 살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활의 주께서는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큰 힘과 위로와 소망이 되신다.
주께서는 서머나 교회 목사의 계명 순종과 충성의 행위와 환난과 궁핍을 아셨다. 주께서는 우리의 계명 순종과 충성을 아신다. 또 주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환난과 궁핍을 경험할 것이다. 사도행전 14:22,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디모데후서 3:14,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비록 서머나 교회의 목사가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평가하셨다. 인생의 참된 부요는 물질적인 데 있지 않고 영적인 데 있다. 물질적인 가치는 일시적이지만, 영적인 가치는 영원하다. 주께서는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고 교훈하셨다(눅 12:21). 또 가난한 자들이 믿음이 좋은 경우가 많다.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말했다(약 2:5).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만 소망하며 그를 위로로 삼고 하나님의 뜻만 행하며 사는 자이다.
서머나 교회의 목사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을 받았다. 구약교회는 매우 타락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고 또 주의 제자들과 성도들을 핍박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구약교회인 유대인들의 모임은 실상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었고 사탄의 회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죽이고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자들이 어떻게 참 교회에 속하겠는가? 그들은 분명히 사탄의 회에 속한 자들이었다.
[10절]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10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서머나 교회의 목사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아야 했다. 고난은 기껏해야 우리의 육신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전도자로 내보내시며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고(마 10:28), 사도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노라”고 말하였다(고후 5:1).
서머나 교회에는 장차 10일 동안의 환난이 있을 것이며 마귀가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할 것이다. 그 교회의 목사가 견고히 섰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에 시험과 환난이 있을 것이다. 10일 동안의 환난은 서머나 교회에게 닥칠 문자적으로 10일 간의 환난이든지 혹은 상징적으로 어떤 제한된 기간을 가리킬 것이다. 성도들이 당하는 핍박과 고난은 영속적이지 않고 지나가는 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낙심치 말고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끝까지 충성해야 한다.
주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목사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셨다. ‘충성’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참 충성은 죽기 전까지는 증명될 수 없을 것이다. 충성은 죽음을 통해 참으로 증명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12:11, “또 여러 형제[구원받은 성도들]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사탄]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순교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확실한 표이다. 물론 참 하나님, 곧 신구약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그의 뜻을 위한 순교와 충성만이 의미와 가치가 있다.
주께서는 죽도록 충성하는 종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생명의 면류관은 면류관의 종류들 중 하나라기보다 생명의 영광 혹은 영광스러운 생명이라는 뜻일 것이다. 죽기까지 참된 믿음을 지키고 충성하는 자는 영광스럽고 복된 영생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 충성치 않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보장되지 않는다. 주님을 배반하고 떠난 자에게는 영생의 영광이 약속되지 않는다.
[11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주의 참된 종들과 성도들은 주 예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있어야 한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 곧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성경책을 읽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그 모든 내용을 믿고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기는 자는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충성하며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이다. 그런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둘째 사망의 해는 지옥 형벌을 말한다. 요한계시록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요한계시록 21:8,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믿음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 대해 충성치 않고 순종치 않는 자는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다. 그러나 구원은 반드시 믿음과 인내, 그리고 순종과 충성의 삶을 동반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물질적으로 궁핍할지라도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한다. 부요하신 주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고후 8:9; 눅 2:24; 마 17:27; 21:2-3; 18-19). 지상 교회는 항상 고난받고 궁핍한 교회이다.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우리는 영적으로 즉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있어서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사탄의 시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사탄의 종들의 비방과 핍박이 있고 투옥이 있고 죽음의 위협이 있지만, 우리는 담대해야 하고(요 16:33) 사탄을 대적해야 한다(벧전 5:9).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충성은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다. 주께서는 죽기까지 충성하셨다.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히 13:13). 주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고 말씀하셨다(요 11:25). 요한계시록 20장은 순교자들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복에 대해 증거했다. 우리는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12-17절,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주신 교훈
[12-13절]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6) 네가 어디 사는 것을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주께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로 묘사되신다. 1:16은 그 검이 입에서 나온다고 표현한다. 그 ‘좌우에 날선 검’은 그의 예리한 말씀, 즉 사람의 죄를 지적하여 영혼을 회개시키는 말씀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칼과 같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악인을 죽이기도 할 것이다. 주께서는 좌우에 날선 예리한 칼과 같은 말씀을 주신다.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영적 전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야 한다. 개인의 신앙생활과 교회의 바른 건립은 영적인 전쟁과 같다. 마귀와 불신앙과 비진리를 대항해 싸울 이 전쟁에서 우리의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기록되었으되” 하며 성경말씀을 사용하셨듯이, 오늘날 우리도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때 기록된 성경말씀을 사용해야 한다.
버가모는 사탄의 위(位)가 있는 곳, 곧 우상숭배의 총본부와 같았다. 그 도시에는 제우스 신의 신전과 아테나 여신의 신전과 디오니소스 신의 신전 외에, 뱀 모양의 의술의 신 에스큘라피우스 신의 신전이 있었고, 또 로마 황제 아구스도를 숭배하는 신전도 있었다고 한다. 황제 숭배는 초대교회 시대인 로마 시대에 보편적 풍조이었다. 사탄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혼란시켰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미혹하게 하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믿음과 순종의 행함이 있는 사람이었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믿음에 굳게 선 사람이었다. 그는 주의 이름을 굳게 잡았고 주의 충성된 증인 혹은 순교자 안디바가 죽임을 당했을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바른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순교자 못지 않게 충성된 자일 것이다.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그런 사람이었고 주께서는 그의 믿음과 행위를 아셨고 그를 인정하셨고 칭찬하셨다.
[14-15절]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주께서는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책망도 하셨다. 우리에게 칭찬거리가 있으면 그가 우리를 칭찬하실 것이지만, 우리에게 책망거리가 있으면 그는 우리에게 책망도 하실 것이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책망은 그 교회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발람의 교훈은 발람이 발락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범죄케 한 한 방책을 일러준 것을 말한다. 그것은 그들로 모압 여자들과 행음하며 그 신들에게 제사한 제물을 함께 먹게 하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셨다(민 25:1-3). 그것이 발람의 교훈이었다(민 31:16). 이와 비슷한 교훈이 버가모 교회 안에 들어온 니골라 당의 교훈이었다. 그것은 우상숭배와 음행을 용납하는 것이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그런 자들을 용납하고 있었다.
오늘날도 교회는 우상숭배와 음행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교회가 경계해야 할 우상숭배는 천주교의 마리아 숭배와,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 숭배와, 종교다원주의의 이방 종교 관용이다. 우상숭배의 용납은 하나님께 책망받을 큰 잘못이다. 오늘날 교회는 또 음행을 경계해야 한다. 현대 사회와 문화는 심히 음란하다. 오늘날 교회에는 심지어 동성애와 동성애자 결혼, 그리고 동성애 목사까지 용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인들을 바로 가르치고 바로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께 큰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목사들은 바른 교훈을 전하고 가르치며 교인들을 그 교훈대로 살도록 인도하고 훈련시켜야 한다. 우리는 우상숭배와 음행을 멀리해야 한다.
[16절]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주께서는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다. 교회 안에 우상숭배와 음행을 하는 자들을 용납하는 것은 교회의 목사가 회개할 죄이었다. 만일 목사가 회개치 않는다면, 주께서는 그 교회에 직접 개입하실 것이다. 교회가 권징을 회피한다면 주께서 직접 개입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교인들 중에서 죄 지은 자들에게 직접 징벌을 내리실 것이다. 주께서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신다는 말씀을 보면 주의 입의 칼은 심판의 칼인 것처럼 보인다. 주님의 직접 개입은 목사에게 큰 수치가 될 것이다. 그가 돌보는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직접 징계를 당할 것이다. 그의 목회는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물을 짓는 것과 같은 목회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상급은 크게 감소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직접 개입하시기 전에 그는 교인들을 바르게 교훈하고, 필요할 때 적절한 권징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1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만나는 천국의 양식을 상징하는 것 같다. 시편 78:24-25,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 만나를 주셔서 먹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장차 천국에서 주님과 누릴 사랑의 식탁 교제를 가리킬 것이다. 또 흰 돌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옛 시대에 흰 돌은 운동 경기에서 이길 때에나, 재판에서 무죄 판결 시에나, 큰 잔치에 입장할 때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과연 장차 우리가 받을 흰 돌은 그런 의미를 다 포함하는 것 같다. 그 흰 돌은 이 세상에서 영적 싸움에 승리한 자들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죄(無罪) 혹은 의롭다 하심의 판결을 받을 자들과, 영광스럽고 복된 천국 잔치에 참여할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 흰 돌 위에는 새 이름이 기록될 것인데, 그것은 받는 자밖에는 알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새 이름은 구원받은 자가 아마 천국에서 사용할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천국 백성으로서 우리가 누릴 복된 신분과 영광을 나타낸다.
본문의 교훈을 다시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사탄의 위(位)가 있는 곳, 우상숭배가 가득하고 죽음의 위협이 있는 곳에서도 버가모 교회의 사자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주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참된 믿음은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장차 온 세상에 임할 대환난 시대에 대비하여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준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상숭배와 음행의 악을 포용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시대는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시대이다. 우리는 이 어두운 시대에 교리적, 윤리적 죄악을 분별하고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구원받았지만, 우리는 죄를 짓지 말고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죄악을 정죄하면서 죄악을 용납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자가 될 것이며 주 하나님의 책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8-29절,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주신 교훈
[18-19절]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내가 네 사업[행위]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것보다 많도다.
주님의 눈이 불꽃같다고 한 것은 그의 통찰력의 날카로움을 나타내시며 그의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고 한 것은 그의 심판의 엄위함을 나타내신다고 본다. 주께서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에게 이런 모습으로 표현된 것은 주께서 그 목사의 문제점을 통찰하시고 그가 포용한 악에 대해 심판하실 것을 암시한다. 오늘날도 주께서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보시며 우리의 행위들을 판단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먼저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가 잘한 일에 대해 칭찬하셨다. 그 목사는 주님께 칭찬들을 일을 많이 하였다. 그는 주님를 위해 많은 일을 했고 주를 사랑했고 믿었고 섬겼고 인내했다. 이것들은 다 좋은 점들이었다. 우리도 주를 위해 일하는 자가 되고 주를 참으로 사랑하고 믿고 섬기는 자 되기를 원하며 또 환난 중에도 오래 참는 자 되기를 원한다. 또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는 나중 행위가 처음 것들보다 많았다. 그는 참으로 진실한 목사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꾸준히 주를 믿고 섬겼으며 점점 더 열심히 주를 믿고 섬겼다.
[20-21절]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네 아내](전통사본)7)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진실히 주를 믿고 섬기는 목사에게도 문제점이 있었다. 그의 문제점은 버가모 교회 목사의 문제점과 같이 잘못된 자를 포용하는 데 있었다. 그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그의 아내 이세벨을 용납하였다.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의 아내는 선지자로 자처하였을 뿐만 아니라, 옛날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처럼 우상숭배자이었다. 그 여자는 주의 종들을 가르쳐 꾀어 음행하게 하고 우상제물을 먹게 함으로써 우상숭배에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는 이 죄악을 용납하고 있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도 포용주의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과 목사들이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들과 천주교회를 포용하거나 심지어 동성애 같은 악을 포용하고 있다. 주께서는 확실히 그들에 대해서도 책망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그 여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주께서는 죄인들에게 회개하고 믿을 기회를 주신다. 그들은 그 기회에 지체하거나 고집을 부리지 말고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 음행을 회개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구원받지 못한 자이었을 것이다. 교회 속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회개치 않는 죄인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자들을 보면 낙심할 것이 아니고, 힘써 권면해야 하고 또 우리 자신을 성찰하여 그런 죄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 말했다(고전 15:33-34).
[22-23절] 볼지어다, 내가 그[그 여자]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주께서는 두아디라 교회 목사 사모에게 벌을 선언하셨다. 첫 번째는 그를 침상에 던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를 병상에 눕게 하심을 가리킨다. 두 번째는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 행위를 회개치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 여자의 자녀들을 죽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주님의 공의의 징벌이었다. 이로써 모든 교회는 주께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죄는 은밀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주께서는 사람의 그 은밀한 마음과 뜻을 살피시고 판단하시고 징벌하신다. 주 앞에는 비밀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모든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는 오늘날에도 공의로운 징벌을 내리실 것이다.
[24-25절]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감사하게도 두아디라 교회에는 그 여자의 교훈을 받지 않고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성도들이 남아 있었다. 해이해지고 넓어진 교회들 속에도 순진한 교인들이 남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두아디라에 남아 있는 교인들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으셨다. 그는 그들에게 단지 그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그의 재림의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도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안에 사탄의 은밀한 활동이 많이 있다고 보인다.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이 만연하고 비성경적 에큐메니칼 운동 즉 교회연합운동이 활발하고 은사주의의 혼란과 교회 음악의 타락 등이 그 증거들이다. 현 시대는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주께서 남겨두신 신실한 교회들이 어디인가에 있고 신실한 목사들과 성도들이 어디인가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끝까지 속죄신앙과 개혁신앙을 지키고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하기를 원한다.
[26-29절]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내 일”이라는 말씀은 주께서 명하신 주의 일들을 가리킬 것이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심판 권세이다. 주께서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자이시며(계 12:5) 이 권세를 성도들에게도 나누어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19: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사도 바울은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말했다(고전 6:2). 또 주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새벽별을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 새벽별은 주님의 영광의 빛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요한계시록 끝부분에서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표현하셨다(계 22:16).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두라디아 교회 목사는 나중 행위가 처음것보다 많았다. 우리의 선한 행위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는 처음 믿었을 때보다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자라고 풍성해져야 한다. 우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믿음과 선행이 자라가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는 잘못된 교훈을 따르는 아내를 용납했다.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잘못이 있을 때 그를 책망하고 고치게 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우상숭배와 음행의 악을 멀리해야 한다. 악의 포용은 교회를 부패시킨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 우리는 가족들 중에 있는 악이라도 용납지 말고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처음 믿을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굳게 붙잡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자유주의 신학, 교회연합운동, 은사주의, 여자 목사, CCM, 열린예배, 낙태, 동성애까지 용납하는 풍조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교리적, 윤리적 오류들을 분별하고 배격하고 성경에 밝히 계시되고 증거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굳게 믿고 지키고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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