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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주님의 능력
1-4절, 나병 환자를 고치심
[1-2절]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한 문둥병자[나병 환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5-7장에서 사도 마태는 예수께서 산 위에서 하신 설교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세히 기록했다. 예수님의 설교는 무리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고, 그 결과, 허다한 무리가 그를 좇았다. 8-9장에서 마태는 예수께서 능력의 일들을 행하신 것을 기록한다. 예수께서는 말만 하시고 행함이 없으시고 능력이 없으신 자가 아니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즉 신적 능력을 가진 자이셨다. 마태는 먼저 예수께서 한 나병 환자[한센병 환자]를 고쳐주신 사건을 증거한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나아왔다. 나병은 살이 붓고 얼굴, 손, 발이 변형되고 감각이 없어지는 무서운 병이다. 나병 환자는 일반 사람들과 격리되어야 했다(레 13:46). 많은 사람이 좋은 조건을 갖고도, 아니 그 좋은 조건 때문에, 예수께 나오지 않았고 그에게 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나병 환자는 아마 이 병 때문에 겸손해졌고 그의 자존심을 앞세우지 않았고 자신의 누추한 모습 그대로 예수께 나왔고 그에게 절했다.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더 나오기 쉬운 것 같다. 시편 119편 저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다(67, 71절).
그 나병 환자는 예수께 나아와 절하며 말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단순히 예수님께 존칭어로 ‘주여’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고 보인다. 그는 예수께서 원하시면 그의 불치의 병인 나병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즉 신적인 구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주여’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호칭이라고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삶과 죽음, 건강과 연약, 복과 재앙을 다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책에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신 32:39). 선지자 사무엘의 모친 한나도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라고 바르게 고백하였다(삼상 2:6-7).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을 창조자와 섭리자 하나님, 곧 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으로 믿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신적 구주이실진대 그에게도 능치 못하심이 없어야 할 것이다. 놀랍게도 이 나병 환자 속에는 예수께서 원하시면 자기를 깨끗케 하실 수 있다는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그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그의 지식과 믿음은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와 그의 병고침을 간청한 그 나병 환자의 간청을 물리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주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7-8).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해졌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의 일이었다. 이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이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부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이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롬 4:17)의 바로 그 능력이었다.
예수님의 치료는 의학적 치료와 달랐다. 의학적 치료는 대개 점진적이고 많은 경우에 불완전하다. 심각한 질병의 경우, 부득이 수술을 실시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치료나 회복보다 차선책일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의 치료는 즉각적이고 완전하였다.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졌다.” 그것은 그의 완전한 신적 능력의 치료이었다.
[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병고침이 그가 세상에 오신 주된 임무가 아니었음을 보인다. 일차적으로, 그는 병자들을 고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하여(마 9:13; 눅 5:32) 또 사람들에게 이 구원의 복음을 널리 전하기 위하여(막 1:38; 16:15) 오신 것이었다. 그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그것은 단지 부수적인 일이었다.
또 예수께서 그 고침 받은 이에게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사람이 자기가 병고침 받았음을 확증하고 또한 율법의 규정을 지켜야 함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이루기 위해 오셨다.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가 간구해야 한다. 고난은 우리에게 힘든 일이지만 유익이 있는 일이다. 고난 당할 때가 곧 하나님께 기도할 때이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환난과 고난의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아야 한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편 119:67, 71,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은 유익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힘써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겸손히 그에게 경배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예수께 나아오지 않았을 때 그 나병 환자는 그에게 나아왔다. 그는 자기의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주께 나아왔고 그에게 엎드려 절하였다. 불치의 병인 나병이 그에게는 오히려 주 예수께로 나아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고난은 그의 어두운 마음에 깨달음을 주었고 교만한 마음을 깨뜨려 온유하고 겸손케 했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과 주 예수께로 나아오지 못한다. 주 예수께서는 그 나병 환자를 고쳐주셨다. 불치의 병인 나병을 고쳐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하고 겸손히 그에게 경배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나병 치료보다 더 중요한 죄사함을 받았다. 나병 치료의 사건은 죄사함의 구원에 비교될 수 있다. 영적으로, 모든 죄인들은 나병 환자와 같다. 죄는 나병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죄는 모든 죄인들을 영원한 지옥의 멸망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께서는 원하시는 모든 자들의 모든 죄를 즉시 깨끗케 하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는 신적 구주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자.
5-17절, 중풍병, 열병,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심
[5-9절]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은 100명의 부하를 지휘하는 군대 장교이다. 이 백부장은 자기 종의 병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다. 그의 종은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백부장은 자기 종에 대해 사랑과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예수님의 존귀한 신분과 자신의 천한 영적 상태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는 예수님의 신적 인격과 능력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단지 말씀만 해주셔도 자기 종의 질병을 고치실 수 있음을 믿는다고 말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지식과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아는 지식과 작은 믿음을 주셨다.
[10-13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이스라엘 중에서라도]12)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이 백부장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이방인이었으나, 그의 믿음은 이스라엘 중에서라도 찾아볼 수 없는 큰 믿음이었다. 주께서는 동서로부터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천국에서 제외되고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가는 처지가 될 것을 예언하셨다. 사람의 믿음은 반드시 그의 부모가 가진 믿음에 비례하지 않는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예수께서는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믿음의 간구를 들어주셨다. 그의 치료는 대체로 치료받는 자의 믿음에 근거했으나, 때로는 그와 관계된 이의 믿음에 근거하기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치료의 말씀은 즉시 효력을 나타내었다. 바로 그 시간 그 백부장의 하인은 나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능력이었고 그것은 치료의 능력을 포함했다. 또 그의 치료는 완전했다. 백부장의 종의 중풍병을 오직 말씀으로 고쳐주신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를 믿고 확신해야 한다.
[14-15절]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다. 마가복음은 그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증거한다(막 1:29). 예수께서는 많은 무리들 중 특히 몇 명의 제자들을 늘 그와 함께 있게 하셨다. 그는 베드로의 집에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워 있는 것을 보셨다. 누가복음은 그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렸다고 증거한다. 열병은 높은 열로 고생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셨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께 요청했다고 증거한다. 이번에는 그 환자와 직접 관계된 자의 요청이 아닌 것 같다. 이와 같이, 환자 본인이든지, 그의 주인이든지, 혹은 그와 좀 멀리 관계된 자일지라도 치료를 간청할 때 주께서는 치료해 주셨다. 주께서 그의 손을 만지시자 그의 열병은 떠나갔다. 마가는 예수께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났다고 증거했고, 누가는 그가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시자 병이 떠났다고 하였다. 그 열병은 즉시 치료되었던 것이다. 베드로의 장모는 즉시 일어나 예수께 수종들었다(눅 4:3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은 이와 같이 나병, 중풍병, 열병 등 다양한 병들의 치료에서 나타났고, 치료를 요청한 자들도 환자 자신, 혹은 환자의 주인, 혹은 환자의 이웃 등 환자와 다양한 관계의 사람들이었다. 어떤 때는 주께서 환자에게 손을 대셨고 어떤 때는 단지 말씀으로만 하셨고 어떤 때는 그 병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동일하게, 주 예수의 치료는 즉각적이며 완전하였다.
예수께서 병들을 고치신 사건들은 그의 신적 능력과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런 증거들을 읽고 듣고 그가 누구이신지 깨닫고 그를 믿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놀라운 신적 구주가 계시다. 그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구주이시며,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만 성령으로 우리 속에서 일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는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구주이시요, 또 우리의 육신의 문제까지도 도우실 수 있는 주님이시다.
[16절]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날이 저물었을 때, 사람들은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왔다. 귀신들은 타락한 천사들이다. 그들의 왕은 사탄이다. 귀신들은 모든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일들 배후에 활동하고 있고 또 많은 질병들, 재난들, 불행한 일들을 일으킨다. 특히 귀신이 들어와 그를 주장하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과 의지를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귀신 들린 자들이다. 이들은 정신 이상자들과 비슷하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들을 많이 데리고 예수께 왔을 때,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주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창 1장).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말했다(히 4:12). 신구약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성경을 열심히 또 규칙적으로 읽는 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을 얻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성과 세상의 악과 마귀의 시험을 이길 능력을 얻을 것이다.
[17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사 53:4)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주께서는 우리의 죄뿐 아니라, 죄의 결과인 모든 질병과 슬픈 일들도 담당하셨다. 우리는 아직 모든 질병과 슬픈 일들이 믿는 자들에게서 완전히 제거됨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죄사함은 그것들을 제거하지만, 주께서 남겨두신 것들은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함일 뿐이다. 우리가 천국에 이를 때면 죄와 그 결과들은 다 사라질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병들을 다스리는 신적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그는 나병과 중풍병과 열병을 치료하셨고 귀신 들린 자들도 고쳐주셨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이것이 사복음서의 목적이다.
둘째로,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와야 한다.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무엇을 간구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구하는 바를 들어주셨다. 기도는 믿음의 증거이며 표현이다.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으나,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할 것이다.
18-34절, 제자들의 길, 풍랑을 잔잔케 하심,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심
[18-20절]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 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이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 행하심에 큰 감동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어디든지 따르겠다는 결심은 놀라웠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말씀은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길이 어떠할 것을 암시한다. 주께서는 개인 소유의 집을 가지지 않으셨다. 주의 제자가 되는 길은 경제적 불안정과 심지어 고난과 핍박을 각오하며 따라야 하는 길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고, 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다(행 14:22; 딤후 3:12). 오늘날 교회들이 고난 없는 기독교를 전파함으로 교인수만 늘이고 있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는 가난과 고난의 삶을 각오해야 한다.
[21-22절]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누가복음에 보면, 주께서는 이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는 초청을 먼저 하셨다(눅 9:59). 하나님의 아들께서 개인적으로 그를 초청하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그러나 그는 먼저 자기 부친을 장사하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요청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가리킨다. 주의 말씀의 뜻은 세상일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거나 지연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부모의 죽음을 인해서도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었다(레 21:11).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군사로 모집된 자들은 자기의 생활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딤후 2:4). 하나님의 일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들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일들, 즉 가족 관계나 직장 관계의 일들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거나 지연되어서는 안 된다. 매튜 풀은 사람에 대한 어떤 사랑과 의무의 일도 우리가 우리의 첫 번째 순종을 드려야 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보다 우선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J. C. 라일은 장례식, 결혼식 등의 방문이 신자의 시간을 빼앗고 신자로 하여금 어떤 분명한 종교적 의무를 못하게 할 때, 그것들은 신자의 영혼에 올무가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첫 번째의 순종을 하나님을 위해 또 하나님의 일을 위해 드려야 한다.
[23-27절]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바다에 큰 놀[풍랑]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우리를]13)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예수께서는 나병환자, 중풍병자, 열병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등을 고치셨을 뿐 아니라, 또한 바람과 파도도 꾸짖어 잔잔케 하셨다. 그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신성(神性)을 가지신 사람이셨다. 어떤 사람이 그런 불치의 병들을 고치고 바람과 풍랑을 꾸짖어 잔잔케 할 수 있겠는가? 오직 하나님께서만 또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께서만 그런 일들을 하실 수 있다.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적 구주이시다.
이 세상은 종종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다. 주를 믿고 따르는 길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삶의 온갖 풍랑을 제거해 주실 수 있고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실 수 있다. 세상에 고난은 있지만, 하나님 안에 구원과 평안이 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에서 아시아에서 많은 환난을 당하였고 죽을 지경에 있었으나 하나님만 의지함으로 구원을 받았음을 간증했다(고후 1:8-10). 환난 많은 세상에서 우리는 현실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28-34절]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겔게세네](갈릴리 호수 동쪽 해변)(전통본문)14)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 [예수]15)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진대 돼지떼에 들여보내소서 한대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마가복음 5:1-20과 누가복음 8:26-40은 이 사건을 더 자세히 증거하지만, 귀신 들린 자가 두 명이라는 말은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복음서들은 서로 보충적이다. 마가복음 5:13은 돼지떼가 거의 2천 마리가 되었다고 말한다. 돼지를 치던 자들은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였으나, 온 성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다.
본문은 귀신이 실제 존재하며 그 수가 많음을 증거한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그 귀신의 이름을 ‘군대’라 했다. 귀신은 타락한 천사 즉 악한 영이다(엡 6:12). 온 세상에서 활동하는 귀신들의 수는 많을 것이다. 또 귀신들은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았고 또 자신들의 멸망할 운명을 알고 있었다. 또 귀신은 매우 사나웠다. 마가복음은 그 귀신 들린 자들을 더러운 영을 가진 자라고 표현했다. 귀신들은 불경건하고 악하고 부도덕한 세상의 풍조들 배후에 활동하고 있는 영들이다.
본문은 또 사람의 가치가 참으로 큼을 보인다. 귀신 들린 영혼들의 가치는 돼지 2천 마리보다 더 귀하였다. 그러나 가다라[겔게세네] 사람들은 그 귀신 들린 자들의 회복이 얼마나 귀한 일임을 깨닫고 감사하고 기뻐하기보다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항상 환영을 받는 자가 아니셨다. 주를 믿고 따르는 길은 항상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길이 아닐 것이다.
본문은 무엇보다 예수께서 귀신들도 주관하는 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에게 그 사람들에게서 나가 돼지떼에 들어가라고 명하셨다. 그는 귀신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귀신들은 때가 되면 그들이 멸망을 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말하였다. 누가복음 8:31은 귀신들이 자기들을 무저갱[지옥]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였다고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장차 귀신들을 지옥에 던져넣으실 수 있는 심판의 권세를 가진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시다. 그는 천상천하에 유일하신 신인(神人), 즉 사람이신 하나님 또는 하나님이신 사람이시다. 그는 자연계와 영계를 주관하시는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다. 우리가 믿는 구주 예수께서는 바로 참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다.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과 같이 전지하거나 전능할 수 없다. 전지와 전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이다. 예수께서 온갖 종류의 질병을 치료하시며 자연계를 명령하시며 또 귀신들을 명령하실 수 있다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우리에게는 놀라운 구주, 신적 인격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그는 능력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고 그러므로 그에게 기도하는 자는 복되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의지할 만하지 못하나, 그는 우리가 참으로 의지할 자가 되시며 가장 가치 있는 분이시며 우리의 힘과 기쁨이 되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큰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가 아니고서는 큰 풍랑을 잔잔케 하실 수가 없으며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하고, 그를 알지 못하는 자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를 믿고 따르는 길이 물질적 안정이 없는 길임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는 물질적 부요를 바라고 주를 따르지 말고 그가 진리의 주님과 구주이시기 때문에 고난을 각오하며 그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평안과 건강과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주를 믿고 따를 때 우선순위를 주께 두고 따라야 한다. 가족에 대한 의무는 당연한 일이며 이웃에 대한 선한 일도 해야 하지만, 만일 그 일이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충돌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우선순위를 거기에 두어야 한다.
넷째로, 주를 믿고 따르는 길은 큰 풍랑도 있고 사람들의 배척도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길이다. 주를 믿고 따르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고 고난의 길이지만, 능력의 주님과 늘 동행하는 길이다. 그 길은 주의 능력을 체험하는 길이며 선한 열매를 체험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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