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한 지는 오래되었다. 신라의 옛 서울에서는 민간에서 승려를 부르는 일이 많았는데, 또 송도도 그러하였다. 왕궁과 큰 집들이 모두 절과 서로 연결돼 있어 왕이 후궁과 더불어 절에 가서 향을 피우지 않은 달이 없었으며,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와 같은 대례(大禮)를 베풀되 모두 절에서 하였다. 왕의 맏아들은 태자가 되며, 둘째 아들은 머리를 깎아 중이 되게 하였으니, 비록 유림(儒林)의 명사라 할지라도 모두 이를 본받았다. 절에는 모두 종이 있어서 많게는 수천 수백에 이르고, 주지(住持)가 된 자는 더러 비첩(婢妾)을 두기도 하니, 그 호사스러움이 삼공(三公)과 구경(九卿)보다도 나았다. 십이종(十二宗)을 두어 불교를 관장하였으며, 중으로서 봉군(封君)의 관직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아조(我朝) 태종(太宗) 때에는 십이종을 개혁하여 다만 양종(兩宗)을 두고 사전(寺田)을 모두 혁파했으나, 그래도 유풍(遺風)은 끊기지 않았다. 사대부들이 그 친속을 위하여 모두 재(齋)를 올리고, 또 빈당(殯堂)에다 법연(法筵)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며, 기제(忌祭)를 행하는 자는 반드시 중을 맞아다가 음식을 먹이었다. 또 시승(詩僧)이 있어 관리들과 더불어 서로 수창(酬唱)하는 일이 자못 많았으며, 독서하는 유생들은 모두 절에 올라가서 하였다. 비록 절을 부수고 벽을 훼손하는 폐단이 있기는 하나 유학자와 중이 서로 의뢰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세조(世祖) 때에 극도에 달하였다. 중들이 촌락에 섞여 살면서, 비록 제멋대로 행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사람들이 이를 꾸짖지 못하고, 조관(朝官)이나 수령들도 항의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중을 의지하여 뒤에서 이익을 얻는 자까지 있었다. 성균관 유생(儒生)으로서도 부처의 사리를 바치고 은총을 구하여도 사림(士林)들이 해괴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성종 때부터 도첩을 발급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엄하게 세워 도첩의 발급을 허락하지 아니하니, 이로 말미암아 성(城) 안에는 중들이 줄어들고 내외의 절은 모두 비었으며, 재를 올려 중에게 밥먹이는 사족(士族)이 없어졌다. 이는 임금이 숭상하는 바에 따라 습속도 함께 변한 것이다.일찍이 성 안의 니사(尼社)는 정업원(淨業院)만 남겨두고 헐어버리고 모두 동대문 밖 안암동(安巖洞) 등으로 내쫓았기 때문에 서너 채가 있다. 남대문 밖 종약산(種藥山 약봉, 지금의 서울역 뒤 큰 언덕) 남쪽에 옛날부터 한 채가 있었는데, 그 뒤에 두 여승이 각기 그 곁에 작은 집을 짓고 여기에 거처하더니, 지금은 10여 채가 되었다. 늙은 여승들이 과부를 꾀어서 시주(施主)로 삼아 모두 큰 집을 짓고 비단을 깔고 단청을 올렸다.4월 8일의 연등회와 7월 보름의 우란분(盂蘭盆)과 12월 8일의 욕불(浴佛 불상을 물로 씻는 관불(灌佛)) 때에는 다투어 다과와 떡 같은 것을 시주하여 부처에게 공양하고 중을 대접하는데, 중들은 범패(梵唄)를 부르고 곱게 차려입은 부녀자들은 산골짜기에 모여들어 추잡한 소문이 밖에까지 들리는 일이 꽤 있었으며, 나이 어린 여승들은 아이를 낳고 도망가는 자가 많았다.병조 판서 안숭선(安崇善)이 승문원 제조(提調)가 되어 내병조(內兵曹)를 경복궁 광화문 안의 동쪽 구석에 만드는데, 대청(大廳)과 낭료(廊寮)가 모두 갖추어지고 그 규모가 굉장하고 치밀하였다. 여러 낭관이 이에 진력(盡力)하여 오래가지 않아 완성되었다. 판서(判書)가 임금께 여쭙기를, “병조는 이 집이 아니라도 있을 곳이 있지만, 승문원은 사대(事大)의 직무를 맡고 있어서, 관장하는 문서도 많으므로 관청이 좁아서 들어가지 못합니다. 비옵건대 이 집을 승문원에서 쓰도록 하소서.” 하니, 곧 윤허(允許)하여 판하(判下)되어 낭관들이 모두 실색(失色)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승문원이 궐내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문서를 조사하는 날에 도제조(都提調)와 제조(提調)가 나란히 앉아 문서를 감사하여 올리면 내자시(內資寺)는 술을 갖다 바치고, 사재감(司宰監)은 포육을 갖다 바쳤다. 이 일이 끝나면 퇴청하는데 낭청은 그대로 앉아 술자리를 벌였다. 교리(校理) 조안정(趙安貞)이 한 구를 지었는데,문서를 감사하는 날에 / 監進文書日
제조가 각각 모여 오도다 / 提調各散回
마른 노루포는 한 입에 저미고 / 乾獐一口割
임금이 내린 술은 두항아리를 열었도다 / 宣醞兩尊開
대선생(大先生)을 부르면서 마시고 / 呼大先生飮
여러 동료를 불러 오도다 / 請諸僚友來
신고령의 술잔이 오르내리니 / 高靈鍾上下
옥 같은 모습이 취한 줄을 몰랐도다 / 不覺玉山頹
하였다. 원중(院中)에 인원은 많고 음식은 적어서 낮에는 다만 한 그릇 밥과 소름에 절인 나물 한 접시로 점심을 먹었다. 당시에 이를 희롱하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소반 위에 깨진 주발은 배보다 큰데 / 盤中破鉢大於舟
거친 밥은 엉성하여 꿩 대가리보다 적도다 / 糲飯參差小雉頭
배가 차지 않아 이내 출출하니 / 腸未果然還自惄
시종하는 종들에게는 먹다 남은 찌꺼기도 돌아오지 않도다 / 騶僮曾不瀝餘休
하였다. 어전(御前) 문사(文士)로서 학관이 되어 이로 인하여 직을 얻은 사람이 매우 많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를 활인원(活人院)이라 하였다. 신고령이 예조 판서를 겸직하여 오로지 사대(事大)의 예를 관장한지라, 임금께 여쭈어 봉급을 더 주기를 청하니, 이로 인하여 조금 넉넉해졌다.우리 나라에서 3형제가 과거에 급제한 이는 많았으나,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한 이는 적었다. 그러므로 부모가 죽은 사람은 뒤에 증직(贈職)을 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해에 쌀 20석을 하사하였다. 전조(前朝)에 있어서는 홍우수(洪禹壽)ㆍ홍부(洪富)ㆍ홍강(洪康)ㆍ홍덕(洪德)ㆍ홍명(洪命)뿐이요,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이예장(李禮長)ㆍ이지장(李智長)ㆍ이성장(李誠長)ㆍ이효장(李孝長)ㆍ이서장(李恕長) 5형제와 안중후(安重厚)ㆍ안근후(安謹厚)ㆍ안관후(安寬厚)ㆍ안돈후(安敦厚)ㆍ안인후(安仁厚)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우리 문안공(文安公 성임(成任))이 항상 내게 말씀하시기를, “우리 형제가 세 사람뿐이어서 다섯에 미치지 못하나, 내가 초시(初試)ㆍ중시(重試)ㆍ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고 화중(和仲)이 또한 급제하고, 너도 초시ㆍ발영시ㆍ중시에 급제하였으니, 또한 다섯을 넘는다. 수로 견주어보면 우리 부모가 마땅히 그 영화를 누릴 일인데 국법에 있지 않은 것이 또한 한스러운 일이다.” 하였다.우리 나라에 부자(父子)가 재상이 된 자로는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와 그 아들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수신(守身)이 모두 영의정이 되었고, 이인손(李仁孫) 공이 우의정이고, 그 아들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 이극배(李克培)가 영의정이 되었으며,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 공이 영의정이고, 그 아들 정괄(鄭佸)이 우의정이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재상이 된 자는 상락(上洛) 김사형(金士衡)과 그 증손 김질(金礩), 서원(西原) 한상경(韓尙敬)과 그 손자 한명회(韓明澮), 좌상 노한(盧閈)과 그 손자 영의정 노사신(盧思愼)이다. 장원 급제하여 재상이 된 사람은 좌상 맹사성(孟思誠), 문성(文城) 유량(柳亮), 하동(河東) 정인지(鄭麟趾), 영성(寧城) 최항(崔恒), 익성(益城) 홍응(洪應), 길창(吉昌) 권람(權擥), 거창(居昌) 신승선(愼承善)이다. 생원시(生員試)ㆍ진사시(進士試)ㆍ초시(初試)ㆍ중시(重試)에 연달아 장원으로 뽑힌 사람은 우홍명(禹洪命)이요,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장원한 사람은 남계영(南季瑛)이요, 또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장원한 사람은 정하동(鄭河東)이요, 초시에 장원하고 또 중시에 장원한 사람은 연성(延城) 이석형(李石亨)이다. 생원 진사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장원한 사람으로 1년에 잇달아 뽑힌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데, 배맹후(裵孟厚)는 생원ㆍ진사에 모두 잇달아 장원에 뽑히고, 김흔(金訢)은 진사에 장원하고 문과에 장원하고, 신차소(申次韶)는 진사에 장원, 초시에 장원, 중시에 장원이요, 김천령(金千齡)은 진사에 장원하고 문과에 장원하였다. 일등 세 사람이 한때에 재상이 된 사람은 최영성(崔寧城)ㆍ조창녕(曺昌寧)ㆍ박연성(朴延城)인데 사림(士林)이 우러러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나라는 문장가가 매우 적고 저서는 더욱 적다. 신라 시대의 최치원(崔致遠)이 《계원필경(桂苑筆耕)》몇 권을 저술하였는데, 모두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이요, 시중 최자(崔滋)가 동인문(東人文) 몇 십 권을 편찬하고, 예산(猊山) 최해(崔瀣)가 《삼한구감(三韓龜監)》한 질(帙)을 편찬하고, 시중(侍中) 김태현(金台鉉)이 《동국문감(東國文鑑)》 몇 십 권을 편찬하고, 서달성(徐達城)이 왕명을 받들어 《동문선(東文選)》몇 십 권을 편찬한 것인데, 모두 전현(前賢)의 시문(詩文)을 모은 것이다. 문순공(文順公) 이규보(李奎報)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전후집 몇 십 권을 저술하고, 원외랑(員外郞) 김극기(金克己)가 《김거사집(金居士集)》 몇 십 권을 저술하였는데, 고판(古板)은 교서관(校書館)에 있으나 반은 깎여졌다. 《은대집(銀臺集)》은 한 질이 있을 뿐이요, 《쌍명재(雙明齋)》한 질과 《파한집(破閑集)》상ㆍ하질은 모두 이인로(李仁老)가 저술한 것이며, 《보한집(補閑集)》상ㆍ하질은 시중(侍中) 최자(崔滋)가 저술한 것이다. 《서하집(西河集)》은 글이 떨어져 나간 한 질인데 임춘(林椿)이 저술한 것이요, 《익재집(益齋集)》몇 십 권과 《역옹패설(櫟翁稗說)》한 질은 이제현(李齊賢)이 저술한 것이요, 예종(睿宗) 《창화집(唱和集)》두 질은 예종이 곽여(郭輿) 등과 더불어 수창(酬昌)한 것을 저술한 것이요,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한 질은 이승휴(李承休)가 저술한 것이요, 《중순당집(中順堂集)》한 질은 나흥유(羅興儒)가 저술한 것이다. 《식영암(息影庵)》한 질은 중이 지었는데, 그 이름은 알 수가 없다. 《죽간집(竹磵集)》한 질은 나옹(懶翁)의 제자 중 굉인(宏寅)이 구양현위(歐陽玄危)와 더불어 사귀어 양학사(兩學士)가 서(序)를 쓴 것인데, 시(詩)가 가장 웅건하다. 관동와주(關東瓦注) 한 질은 안경공(安景恭)이 관동 안렴사(關東按廉使)가 되었을 때 저술한 것이요,《목은시문집(牧隱詩文集)》몇 십 권은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이 저술한 것이니, 동방의 문부(文府)라 할 만하다. 《가정집(稼亭集)》몇 권은 이곡(李穀)이 저술한 것이요, 《초은집(樵隱集)》한 질은 이인복(李仁復)이 지은 것이요, 《포은집(圃隱集)》한 질은 문충공 정몽주(鄭夢周)가 지은 것이요,《도은집(陶隱集)》두 질은 이숭인(李崇仁)이 지은 것이요, 《농은집(農隱集)》한 질은 졸옹(拙翁) 최해(崔瀣)가 지은 것이다. 《제정집(霽亭集)》한 질은 이달충(李達衷)이 지은 것이요, 《설곡집(雪谷集)》한 질은 정포(鄭誧)가 지은 것이요, 《원재집(圓齋集)》한 질은 정추(鄭樞)가 지은 것이요, 《사암집(思庵集)》한 질은 유숙(柳淑)이 지은 것이요, 《복재집(復齋集)》한 질은 정총(鄭摠)이 지은 것이요, 《의곡집(義谷集)》한 질은 이방직(李邦直)이 지은 것이요, 《춘곡집(春谷集)》한 질은 이항구(李亢紌)가 지은 것이요, 《동정집(東亭集)》한 질은 염흥방(廉興邦)이 지은 것이요, 《훤정집(萱庭集)》한 질은 염정수(廉庭秀)가 지은 것이요, 《양촌시문집(陽村詩文集)》몇 십 권은 문충공 권근(權近)이 지은 것이요, 《춘정집(春亭集)》몇 십 권은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것이요, 《삼봉집(三峯集)》몇 십 권은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것이요, 《부재집(負齋集)》한 질은 박의중(朴宜中)이 지은 것이요, 쌍매당(雙梅堂) 몇 십 질은 이첨(李詹)이 지은 것이요, 《교은집(郊隱集)》7권은 정이오(鄭以五)가 지은 것이요, 《척약재집(惕若齋集)》한 질은 김구용(金九容)이 지은 것이요, 《유항집(柳巷集)》한 질은 한수(韓修)가 지은 것이다. 《선탄집(禪坦集)》은 선탄이 지은 것이요, 《독곡집(獨谷集)》두 질은 정승 성석린(成石璘)이 지은 것이요, 《상곡집(桑谷集)》한 질은 우리 증조공(曾祖公)이 지은 것이요, 《매헌집(梅軒集)》두 질은 제학(提學) 권우(權遇)가 지은 것이요, 《둔촌집(遁村集)》한 질은 이집(李集)이 지은 것이다. 《근사재집(近思齋集)》은 설손(偰遜)이 지은 것이요, 《운제집(芸齊集)》한 질은 설장수(偰長壽)가 지은 것이요, 《하정집(夏亭集)》한 질은 정승 유관(柳觀)이 지은 것이다.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은 이암 (李嵓)ㆍ이강(李岡)ㆍ이원(李原) 등이 지은 것이요, 《팔계집(八溪集)》은 정해(鄭偕)가 지은 것이요, 《천봉집(千峯集)》한 질은 중 둔우(屯雨)가 지은 것이요, 《계정집(桂庭集)》한 질은 중 성민(省敏)이 지은 것이요, 《태재집(泰齋集)》한 질은 유방선(柳芳善)이 지은 것이요, 《율정집(栗亭集)》한 질은 윤택(尹澤)이 지은 것이요, 《청경집(淸卿集)》한 질은 윤회(尹淮)가 지은 것이요, 《방헌집(厖軒集)》한 질은 정승 황희(黃喜)가 지은 것이요, 《난계집(蘭溪集)》한 질은 함부림(咸傅霖)이 지은 것이요, 《통정집(通亭集)》한 질은 강회백(姜淮伯)이 지은 것이요, 《완역재집(玩易齋集)》한 질은 강석덕(姜碩德)이 지은 것이요, 《인재집(仁齋集)》한 질과 《양화소록(養花小錄)》한 질은 강희안(姜希顔)이 지은 것이요, 《단활집(短豁集)》한 질은 이혜(李惠)가 지은 것인데, 사람됨이 키가 적고 입이 비뚤어졌기 때문에 이같이 이름하였다. 《보한재집(保閑齋集)》2권은 영의정 신숙주가 지은 것이요, 《소한당집(所閑堂集)》두 질은 좌의정 권람(權擥)이 지은 것이요, 《태허정집(太虛亭集)》두 질은 영의정 최항(崔恒)이 지은 것이요, 《식우집(拭疣集)》두 질은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것이요, 《사가정집(四佳亭集)》몇 십 권은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것이요, 《사숙재집(私淑齋集)》몇 십 권은 진산군(晉山君)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것이요, 《안재집(安齋集)》한 질은 곧 우리 백씨(伯氏)가 지은 것이요, 《진일집(眞逸集)》한 질은 우리 중씨(仲氏)가 지은 것이다. 고려로부터 조선에 이르는 사이에 저작자가 무한히 많고, 저술한 것이 비록 많으나 자손이 있으되 미약하여 모으지 못하고 비록 모으고자 하나 흩어져 다 없어졌다. 지금까지 세상에 전하는 것을 모아 위와 같이 기록한다.옛날에는 문과 전시(殿試)에 3등으로 뽑힌 사람을 담화랑(擔花郞)이라 하였는데, 방을 내걸 때 담화랑은 어전(御前)에서 모화(帽花)를 받아 모든 신은(新恩)에게 나누어 꽂아주었다. 나의 중형이 계유년 봄에 과거에 뽑혀 담화랑이 되어 전농시(典農寺) 직장(直長)의 자리에 임명되었다. 이 때에 사문(斯文) 김자감(金子鑑)이 판사(判事)가 되었는데, 뜰에 있는 배[梨]가 바람 부는 대로 어지럽게 떨어지므로 사문(斯文)이 중형(仲兄)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한 구(句)를 지을 테니, 그대는 대구를 짓겠는가?” 하고,뜰에 가득한 배와 밤은 청지기가 즐거워하고 / 滿庭梨栗廳直樂
하므로, 중씨가 곧 응답하여 짓기를,책상에 쌓인 문서는 판사가 근심하는도다 / 堆案文書判事憂
하니, 사문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족하(足下)는 청지기로서 나에게 대항하는 것인가?”하므로, 중형이 겸손하게 사과를 하여 조금 풀렸다. 그 뒤에 전농시를 폐하여 군자대창(軍資大倉)으로 만들었다.정정절(鄭貞節) 공과 그 아우 정봉원(鄭蓬原) 공은 모두 나의 육촌이다. 나의 큰형이 정정절 공의 집에 가서 뵈니, 정정절이 곧 불러들이었다. 공은 아직 아침이라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는데, 무명 이불에 풀로 짠 자리를 깔고 있어 쓸쓸하기가 짝이 없었다. 공이 말하기를, “네가 추위를 무릅쓰고 멀리서 오느라고 수고했다. 내 이불 밑에 손을 넣어라.” 하고, 서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또 정봉원 공을 뵈러 갔을 때에는 꽤 오래 문밖에 서 있은 뒤에야 공이 관복을 정제하고 나와 큰 손님을 대하듯 하였는데, 형제간이지만 기상이 이같이 서로 같지 않았다.함동원(咸東原)이 젊었을 때에 화류계에서 방랑하였으나, 직무에 임해서는 신중하였고 일을 잘 처리하여 드디어 명재상이 되고 공훈(功勳)으로 봉군(封君)이 되었다. 호남 감사가 되어 선정(善政)으로 소문이 자자하더니, 그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항상 전주 기생을 사랑하였는데, 이별하기 어려워서 호패(號牌)를 기생에게 비밀히 주고 밤에 몰래 따라오라 하였다. 여러 날이 지난 후, 기생이 부윤(府尹)에게 이별을 고하니, 당시 부윤으로 있던 이언(李堰)은 성품이 청렴하고 고상하면서도 급하여 기생이 하직하는 것을 보고 크게 노하여, “법관(法官)이 어찌 기생을 데리고 갈 리가 있는가 네 말이 거짓이다.” 하였다. 기생이 대사헌의 호패를 내보이며 말하기를, “공이 ‘관부(官府)에서 만약 믿지 않거든 이것으로써 표를 삼으라.’하셨소이다.” 하니, 이언이 땅에 침을 뱉고 크게 꾸짖기를, “내가 함동원을 지조 있는 선비라 여겼는데, 지금 와서 보니 참으로 하품인(下品人)이로다.”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공의 솔직함을 좋아하고 이언의 빡빡함을 비웃었다. 늙어서는 오랬동안 병중에 있었으며, 딸 하나가 있었으나 그 딸마저 먼저 죽었는데, 또 주색을 싫어하여 첩을 두지 아니하고 집안일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 끼니를 자주 거르기도 하였다. 옛날 정분이 있던 여의(女醫)가 이 소문을 듣고, 곧 찾아가 공을 뵈니, 남루한 옷을 입고 거적자리에 길게 누웠는데, 다만 한 하인만이 옆에 모시고 있을 뿐이었다. 여의가 말하기를, “공 같은 호걸(豪傑)이 어찌 이와 같이 되셨습니까.” 하니, 공이 아무 말도 없이 똑바로 쳐다보면서 눈물만 흘렸다.세조께서 항상 문사(文士)를 근정전(勤政殿) 뜰에 모으고 과장(科場)의 예에 의하여, 도이산융낙역래조(島夷山戎絡繹來朝)라는 전(箋)을 내어 20여 명을 뽑았는데, 큰형이 수석을 차지하였다. 세조께서 친히 일등이란 두 자를 권미(卷尾)에다 써주시었는데, 강진산(姜晉山)이 둘째요, 서달성(徐達城)이 셋째였다. 큰형은 판사재(判司宰)로서 첨지중추(僉知中樞)에 제수하고, 강진산은 판통예(判通禮)로 예조 참의에 제수하고 서달성은 사간(司諫)으로 공조 참의에 제수하였다. 세조께서 명하시어 방을 내걸고 유가(遊街)하려 할 때, 마침 간관(諫官)의 간언(諫言)으로 인하여 그만두었으나, 특별히 주악(酒樂)을 큰형의 집에 하사하고 내종친(內宗親)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ㆍ익현군(翼峴君) 이운(李運)ㆍ의창군(義昌君) 이공(李玒)ㆍ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ㆍ영해군(寧海君) 이당(李瑭)ㆍ영천위(玲川尉) 윤사로(尹師璐) 및 명공(名公) 거경(鉅卿)들을 오게 하시어 마음껏 즐기고 파하였다. 이튿날에 동방인(同榜人)이 모두 술병을 가지고 찾아오니, 당시의 사림이 모두 영광으로 여겼다. 큰형의 전사(箋詞)에 이르기를, “천지를 덮어주는 인(仁)을 체득하였으니, 성대한 덕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성교(聲敎)가 남북에까지 미치게끔 되었으니, 수방(殊方 이(夷)와 융(戎)을 말함)에서 모두 몰려오도다. 공손히 생각건대 전하(殿下)는 하늘과 더불어 한 가지로 크시니, 옛날에도 앞설 사람이 없도다. 종사(宗社)가 다시 편안하니 무공(武功)이 화란(禍亂)을 다스려 평정하고, 인의(仁義)가 이미 효험을 얻어 문치(文治)가 나라를 편안케 하니, 해도만리(海濤萬里)에는 오랑캐들이 분주하고, 구중궁궐에는 오랑캐 풍속이 예를 갖추도다.” 하였고, 박치명(朴致命)의 사(詞)에는, “단간대(單干臺) 위에 상제(上帝)가 친히 임하는 것처럼 수고롭지 아니하고, 간우계(干羽階) 앞에 앉아서 오랑캐가 스스로 찾아옴을 보도다.” 하였다. 윤무송(尹茂松)은 곧 신고령(申高靈)의 처형이니 한때 재상을 제수받은 일이 있다. 동년(同年) 모임에서 신고령이 한 구를 지었는데,청안의 옛 친구들이 모두 백발이로다 / 靑眼故人俱白髮
하니, 윤무송이 급히 대구하기를,검은 머리의 현상이 다만 단심이로다 / 黑頭賢相只丹心
하였다. 신고령이 탄복하여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나는 형만큼 정밀하지 못하다.” 하였다. 신고령이 고부(古阜) 기생 지단심(只丹心)을 사랑한 까닭에 이렇에 말한 것이다.요즈음은 풍속이 날로 야박해지지만 오직 시골 사람만은 아름다운 풍속이 그대로 있다. 대체로 이웃 천인(賤人)들이 모두 모여서 회합을 하는데, 적으면 혹 7, 8, 9명이요, 많으면 혹 100여 인이나 되어 매월 번갈아가며 술을 마시고, 초상을 당한 자가 있으면 같은 무리들이 상복을 갖추고 관곽(棺槨)을 갖추고, 혹은 횃불도 갖추고 음식을 갖추어, 상여줄을 잡고 무덤을 만들며 사람들이 모두 시마복(緦麻服)을 입으니, 이는 참으로 좋은 풍속이다.내가 어렸을 때에 남강(南江)에서 손님을 전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전생서(典牲暑) 남쪽 고개에 이르렀을 때에, 마침 부슬비가 내리자 말이 거품만 뿜고 나아가지 못하는데, 문득 따뜻한 기운이 불과 같이 얼굴을 스치고 또 취한 기운이 있어 견딜 수가 없었다. 길가 동쪽 골짜기를 바라보니 어떤 사람이 삿갓을 썼는데, 키가 수십 척이요 낯이 소반 같고 눈이 횃불과 같아 괴이한 현상이 범상치 않았다. 내가 묵묵히 생각하기를, “내가 만약 마음을 놓치면 반드시 저놈의 계략에 떨어지겠다.” 하고, 드디어 말을 멈추어 나아가지 않고 한참을 눈여겨보니 그 사람이 문득 머리를 돌려 하늘을 향하고 점점 소멸하여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마음이 안정되면 허깨비가 들어오지 못한다더니, 참으로 그러한가 보다.중추 김성동(金誠童)은 상낙부원군(上洛府院君)의 아들이다. 집이 남대문 밖 연지(連池) 곁에 있었는데, 키가 아홉 자요 성품이 침착하고 신중한데다가 말이 없고 손님이나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항상 방안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과 얘기하지 않고 종일토록 책만 읽었다. 적성 현감(縣監)을 지낸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드디어 갑과(甲科)에서 3등으로 뽑혀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부평(富平)에서 수령으로 있을 때 공무를 당하여서는 청렴하고 신중하였고 일은 시원스럽게 처리하였으며 조세를 독촉하는 일이 없어, 백성이 편안하게 살며 부모처럼 섬기었다. 그때 감사가 임금에게 선정(善政)을 아뢰어 특별히 중추원(中樞院)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그가 공무(公務)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있을까 골몰하면서도 집안일은 조금도 경영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원대함을 보고 기대하기를, “참으로 재상감이다.”하였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부부가 모두 죽었다. 집의(執義) 윤수언(尹粹彦)은 내 친구 윤자방(尹子芳)의 아들인데, 집이 김성동의 집과 이웃해 있었다. 사람됨이 문무(文武)에 뛰어나서 소년으로 등제(等第)하여 사인(舍人)으로부터 나아가 집의(執義)가 되고, 아침저녁으로 은대(銀臺)에 오르기를 지척(咫尺)에 있는 것 같이 여기었다. 평안도에 사신으로 갈 때에 윤자방이 황해 감사라, 집의가 해주(海州)로 아버지를 뵈러 가다가 돌연 병으로 인하여 죽었다. 중추의 관이 발인한 지 며칠이 못되어 집의의 관이 들어와 사림(士林)의 똑똑한 사람들이 한번에 죽으니, 인근 지척의 사이에 흉사(凶事)가 연달아 일어나 사림에서 비통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지금의 빙고(氷庫)는 옛날의 능음(凌陰)이다. 동빙고는 두모포(豆毛浦)에 있는데, 오직 하나뿐이어서 제사지내는 데만 사용하였다. 얼음을 저장할 때에는 봉상시(奉常寺)가 주관하고, 별제(別提) 두 사람과 함께 검찰(檢察)하였다. 또 감역부장(監役部將)과 벌빙군관(伐氷軍官)이 저자도(楮子島) 사이에서 채취하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이는 개천 하류의 더러움을 피하기 위함이다. 서빙고(西氷庫)는 한강 하류 둔지산(屯知山)의 기슭에 있는데, 무릇 고(庫)가 8경(梗)이나 되므로, 모든 국용 (國用)과 제사(諸司)와 모든 재추(宰樞)가 모두 이 얼음을 썼었다. 군기시(軍器寺)ㆍ군자감(軍資監)ㆍ예빈시(禮賓寺)ㆍ내자시(內資寺)ㆍ내섬시(內贍寺)ㆍ사담시(司贍寺)ㆍ사재감(司宰監)ㆍ제용감(濟用監)이 주관하여 별제 두 사람과 같이 검찰하였고, 또 감역부장과 벌빙군관이 있고 그 나머지 각사(各司)는 8경에 나누어 소속시켰는데, 얼음이 얼어서 4치 가량 된 뒤에 비로소 작업하였다. 그때는 제사(諸司)의 관원들이 서로 다투어 힘쓰므로 군인이 비록 많으나 잘 채취하지 못하고, 촌민들이 얼음을 캐가지고 군인들에게 팔았다. 또 칡끈을 얼음에 동여매어서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강변에는 땔나무를 쌓아놓아 얼어 죽는 사람을 구제하며, 또 의약을 상비(常備)하여 다친 사람을 구제하는 등 그 질환에 대한 조치가 상비되었다. 처음 8월에는 군인을 빙고에 많이 보냈는데, 고원(庫員)이 군인을 인솔하여 고(庫)의 천정을 수리하고 대들보와 서까래가 썩은 것을 바꾸고, 담이 허물어진 것을 수리하였다. 또 고원한 사람은 압도(鴨島)에 가서 갈대를 베어다가 고의 상하 사방을 덮는데, 많이 쌓아 두텁게 덮으면 얼음이 녹지 않는다. 전술한 관인들은 밤낮으로 마음껏 취하도록 마시고 얼음을 저장하는 일은 하리(下吏)들에게 맡기었다. 계축년에 얼음의 저장을 소홀히 하자 왕이 노하여 모두 파직을 시켰고, 갑인년에는 관리가 주의하여 얼음을 저장했기 때문에, 국상(國喪)과 중국 사신을 대접하는 연회에도 얼음이 넉넉하고 가을까지 빙고에 남아 있었으니, 그 검사하는 방법을 치밀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우리 나라의 길흉(吉凶)을 점치는 일은 모두 소경이 맡아 하였다. 국초에 복진(卜眞)이란 점쟁이가 있었는데 둔갑술을 하였다. 하루는 복진이 문득 궁궐에 나아가 왕을 뵙자 왕이 묻기를, “대궐의 문단속이 매우 엄한데, 너는 어찌 들어왔는가?” 하니, 복진이 여쭙기를, “신이 둔갑술로 몸을 감추어 들어왔으므로 대궐 문지기가 모두 알지 못하였나이다. 오늘이 신의 명이 다하는 날이오니 원컨대 상께서 구해 주시옵소서.”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네가 비술(祕術)로써 몰래 대궐에 들어왔으니, 네 죄가 아주 무거우므로 용서할 수 없다.” 하고, 곧 명하여 죽였다. 그뒤에 김학루(金鶴樓)란 사람이 점치는 법을 알았고, 또 김숙중(金叔重)이란 사람이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생원 박운손(朴雲孫)이 관비(館婢)와 간통하고 관비의 지아비를 시기하여 살해하였으므로 살인죄로 옥에 갇히었는데, 판결하는 날에 형조의 낭관들이 모두 모이고 김숙중이 또한 그 옆에 있어 차례로 길흉(吉凶)을 이야기하였다. 정랑(正郞) 노회신(盧懷愼)은 호부(豪富)로서 한때에 이름을 떨쳤는데, 김숙중을 돌아보고, “저 죄인의 명이 조석(朝夕)에 달려 있는데 면할 도리가 있을까.” 하니, 김숙중이 꽤 오래 명수를 점쳐보다가. “이 죄인이 형벌을 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벼슬길이 넓게 트여서 해를 당할 일이 없고, 정랑의 명수가 오히려 이 죄인만 못합니다.” 하여,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맹랑함을 비웃었다. 박운손이 형벌을 받는 날에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고 뒤에 벼슬이 3품에 이르러 나이 70이 되어 죽었는데, 노회신은 얼마 안 가서 일찍 죽었다. 우리 선군께서 김숙중을 후대하였는데, 내가 나이 다섯 살 때에 역질(疫疾)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김숙중을 불러 길흉을 묻고 또 백형ㆍ중형의 명까지 점치게 하니, 김숙중이 말하기를, “맏아드님은 복록이 장구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를 것이요, 둘째 아드님은 비록 청귀(淸貴)하나 명이 길지 않고, 막내 아드님은 복록이 맏아드님과 비슷하나 영화는 오히려 더 나으니, 호랑이 굴 속에 두어도 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하더니, 과연 말한 바와 같았다. 김효순(金孝順)이란 사람이 또한 점을 잘 쳤기 때문에 백형 선비 시절에 상사(上舍) 이관의(李寬義)와 함께 그 길흉을 점쳤는데, 김효순이 백형의 명수를 점쳐 말하기를, “올해에는 반드시 장원급제하여 나중에 귀현(貴顯)에 이르리라.” 하고, 상사(上舍)의 명수를 점쳐 말하기를, “늙어 죽을 때까지 속된 선비를 면치 못하겠다.” 하였다. 상사가 문명(文名)이 있어서 여러 사람들이 받들어 거벽(巨擘)으로 삼았으며, 과거에 힘들이지 않을 것이라 보았는데, 점친 말을 듣고 통곡하여 흐느껴 울자 김효순이 위로하여 말하기를, “그러나 만년(晩年)에는 군신이 경사롭게 만나는 격입니다.” 하였다. 그 뒤에 상사가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늙어서 시골에 물러가 있다가, 나이 70에 일민(逸民)으로서 임금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성종(成宗)께서 편전(便殿)에서 인견(引見)하고 치도(治道)를 강론할 때 전교(傳敎)를 내려 “참으로 훌륭한 인재이지만 늙었으므로 쓰기 어렵다.”하시고, 후하게 의복을 하사하시어 돌려보냈다. 김산실(金山實)이 우리 이웃에 살고 있는데, 정미년ㆍ무신년 간에 길흉을 물으니, 김산실이 말하기를, “대명(大明)이 처음 나오는 곳에 만리에 빛을 보리니, 이는 벼슬길에 높이 오를 징조라, 반드시 고관(高官)을 얻을 것입니다.”하더니, 그해에 홍치 황제(弘治皇帝)가 새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어 사은사(謝恩使)로 명경(明京)에 나아갔으므로 그 일이 바로 맞았다. 김산실이 고관을 얻겠다 한 말은 틀렸으나, 사실 그 징조에 있어서는 헛되지 않았다.국초(國初) 이후로 법률이 문란해져서 사대부가 이익을 얻는 길이 또한 넓어졌다. 세상에 전하기를, “태종(太宗)이 외방에서 사냥하시다가 날이 저물어 평복 차림으로 시내를 지나니, 10여 이이 말에 식물을 싣고 임금 앞을 지나다가, ‘승정원이 어디 있습니까.’하고 묻자, 태종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물 아래 연기 나는 곳으로 내려가면 그 곳이 곧 승지(承旨)가 있는 곳이다.’하였다.”한다. 세종(世宗) 때에는 여러 창고의 공물(公物)을 단속할 줄 모르고, 궁궐 안의 찬물(饌物)은 승정원이 오로지 관장하였는데 어선(御膳)의 나머지를 다 먹을 수 없어서 나누어 자기 집까지 보내었다. 연회(宴會)가 있을 때면 예빈시(禮賓寺)에서 연석을 베풀고 주관(酒官)이 술을 올리며, 창고의 아전이 기생에게 소요되는 옷감을 주되, 쌀 열 섬 이하는 마음대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되므로 하루에 쓰이는 종이가 수백 권이요, 술은 수백 병이며, 다른 물건도 또한 이와 같았다. 관리로서 객지에 있는 사람이 되질을 하는 과정에서 땅에 흘린 곡식을 창관(倉官)에게 빌려 썼는데, 그 수가 적어도 몇 섬이 넘었으니 비록 땅에 흘린 곡식이라고는 하나 실상은 정곡(正穀)이었다. 그릇을 관에서 빌려쓰고 돌려보내지 아니하여도 관에서는 이를 묻지 않았다. 허비가 이렇게 많은데도 공용이 군색하지 아니하니,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조(世祖)로부터는 육전(六典)을 고쳐 횡간(橫看)의 안(案)을 만들어서 비록 적은 물건이라도 모두 계품(啓稟)한 뒤에 쓰게 하니, 이로부터는 사람들이 남용하는 일이 없었으나, 저축해 둔 것이 또한 없어서 국가에서 항상 그 부족함을 근심하니, 어째서 이렇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철원(鐵原)은 옛날 동주(東州)의 땅인데, 이곳을 짐승 숲이라 불러왔다. 세종께서 가끔 이곳에서 사냥을 하시어 수많은 짐승을 잡았는데, 예빈시에서 쓰는 고기와 공청(公廳)의 수요 이외에 재추(宰樞)에게 골고루 하사하는 것도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았었다. 이로부터 문소전(文昭殿)의 초하루나 보름 제사 때 쓰는 고기는 오직 철원과 평강(平康)에서만 바쳐도 남음이 있었다. 지금 동주의 들은 태반이 밭이 되고 금수(禽獸)가 줄어들어 양읍(兩邑)에 짐승 잡기가 어려워지니, 잡히지 아니하면 불안해서 침식을 잊을 정도다. 상하의 관리가 수풀을 뒤지며 겨우 벌을 면하고 있는 형편인데도 지금까지 폐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다른 곳보다 낫기 때문이다.정정절(鄭貞節) 공은 판서 정흠지(鄭欽之)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형조 판서이고 정정절은 대사헌이 되어 부자가 한때에 재추(宰樞)가 되었다. 부자가 모두 용모가 건장하고 수염이 길고 아름다웠다. 하루는 큰 길거리에서 만나 판서는 초헌(軺軒)을 타고 대헌(大憲)은 초헌을 부축하고 가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그 풍채가 너무도 훤하여 길가에서 보는 사람이 영화롭게 여기어 흠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군자가 집을 지으려면 반드시 먼저 사당을 세워서 조상의 신주를 받드니, 이는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이다. 삼국ㆍ고려 시대 이후로 오로지 불교를 숭상하여 가묘(家廟)의 제도가 분명하지 못하고, 사대부가 모두 예로써 조상을 제사지내지 않더니, 포은(圃隱) 문충공이 도학을 밝히기를 주창함으로부터 제사지내는 의식을 엄하게 세우니, 그뒤에 집집마다 사당을 세우고 비로소 가사(家舍)를 적사(嫡嗣)에게 전하고 적서(嫡庶)의 분별을 중하게 하므로, 자식 없는 사람은 반드시 친족 자제를 취하여 후사(後嗣)를 삼았다. 국가의 대제(大祭)는 맹월(孟月)에 하고 사대부의 시제(時祭)는 중월(仲月)에 하였으니, 이런 것도 모두 차서가 있었다.김[苔]은 남해(南海)에서 나는 것을 감태(甘苔)라 하고, 감태와 비슷하나 조금 짧은 것을 매산(莓山)이라 하는데, 구워서 먹는다. 내 친구 상사(上舍) 김간(金澗)이 절에서 독서할 때 밥상에 있는 것을 먹어보니, 아주 맛이 좋으나, 무엇인지 알지 못하다가 중에게 자세히 물어본 뒤에야 비로소 그 이름을 알았다. 하루는 내 집에 와서 말하기를, “그대는 매산 구이를 아는가? 천하의 진미라네.”하기에, 내가, “이것은 임금님이 잡수시는 상에만 올리는 물건이므로 궐 밖 사람이 맛볼 수 없는 것이나 자네를 위하여 구하리다.” 하고, 숭례문 밖으로 나가 연지(蓮池) 속에 태발(苔髮)이 물위에 어지럽게 떠있는 것을 보고 조리로 떠내어 구워놓고 하인을 보내 상사를 불러오게 하니, 상사가 이 말을 듣고 곧 왔다. 두 사람이 마주앉아 술을 마실 때 나는 매산을 먹고 상사는 오로지 김만 먹더니 겨우 두어 꽂이를 먹고 나서 말하기를, “구이 가운데 모래가 있어 먼저 먹던 것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점점 가슴속이 메스꺼워 뱃속이 편안치 않다.” 하고, 곧 집으로 돌아가 토하고 설사하여 수일을 앓은 뒤에 일어나서 말하기를, “중이 준 매산은 아주 맛이 있었는데, 그대의 매산은 아주 나쁘다.” 하였다. 내가 뜰안에 있는 나무에 청충(靑虫)이 가득히 있어 잎을 갉아먹는 것을 보고, 이를 주워모아 종이에 꼭 싸서 봉하고 어린 종을 시켜 이를 보내면서, “요행히 매산을 얻었으니 그대는 한 끼 밥 반찬으로 하라.” 하였다. 이때는 이미 황혼이라 상사 부부가 이불을 깔고 같이 앉았다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너의 주인이 먹지 아니하고 내게 보내주니 참으로 벗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봉한 것을 뜯으니, 벌레들이 마구 쏟아져 나와, 혹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혹은 치마 속으로 들어가므로, 부부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벌레가 닿은 곳은 모두 탈이 나서 온 집안이 크게 웃었다.선(善)을 행한 집에는 반드시 뒤따르는 경사가 있는 법인데, 독곡(獨谷)은 평생에 착한 마음을 가지고 몸가짐을 청렴히 하며, 행동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인(仁)으로 하였으니, 그 자손이 번화한 경사를 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장윤(長胤) 참찬공(參贊公)은 후손이 없고, 차자 참의공(參議公)은 뱃속에서부터 장님이었고, 그 아들 창산군(昌山君) 및 그의 아들이 또한 뱃속에서부터 장님이 되어, 3대가 연달아 이렇게 되었으며, 나의 중씨는 문장과 학문이 사람들이 추앙하는 바가 되었으나 나이 겨우 30에 죽고, 그의 두 아들도 모두 광질(狂疾)을 얻었으니, 참으로 천도(天道)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속담에, “아침에 마신 술은 하루의 근심이요, 맞지 않는 가죽신은 1년의 근심이요, 성질 나쁜 아내는 평생의 근심이다.”라는 말이 있으며, 또, “배가 부른 돌담과 말 많은 아이와 헤픈 주부는 쓸모가 없다.”는, 말이 있는데, 말은 비록 속되나 역시 격언이다.경 읽는 판수들은 모두 머리를 깎았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를 선사(禪師)라 하였다. 늙은 판수 김을부(金乙富)라는 사람이 광통교(廣通橋) 가에 살았는데, 점치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 사람이 다투어 점을 쳐보았으나 맞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아 부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광통교 선사는 흉하다고 하면 길하다.” 하였다. 참판 김현보(金賢甫)가 그 아들이 과거를 볼 때, 김현보가 그 글 지은 것을 보고 말하기를, “너의 문사(文詞)는 너무 속되어서 선(選)에 들지 못할 것이다.”하였는데, 방이 걸릴 때 그 아들이 높은 점수로 뽑히었다. 동료들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광통교 선사는 흉하다 하면 길하다.” 하였다.만약 사람들에게 대두(大豆)와 소두(小豆)의 꽃 색깔을 물으면 흔히, “대두의 꽃은 노랗고 소두의 꽃은 붉다.”하는데, 이는 다만 그 열매의 빛을 보고 말한 것으로, 실제로는 소두의 꽃은 노랗고 대두의 꽃은 붉다. 만약 석균(石菌)의 땅에 붙은 뿌리를 물으면 사람은 모두, “털이 난 것은 밖에 있고 거죽이 번지르르한 것은 땅에 붙었다.”하는데, 이는 다만 거죽이 번지르르한 것은 진흙에 섞여 있음을 보고 말함이요, 실제로는 털이 난 것이 땅에 붙어 있고 거죽이 번지르르한 것이 밖에 있는 것이다. 만약 한새[鷴鳥]의 꼬리를 물으면 사람들은 모두 검다고 하는데, 이는 새의 두 날개가 꼬리를 덮고 있어 검게 만든 것으로, 실제로는 희다. 대개 세상 사람이 억측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흔히 이와 같다.같이 급제한 신생(申生)은 수염이 많으나 누렇고 크기가 작고 등이 굽었다. 그러나 성품이 부지런하고 분명하여 조금도 남에게 신세를 지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예조 정랑이 되어 기생들을 검찰(檢察)할 때 너무 각박하여 기생들이 모두 노래를 지어 조롱하였다. 또 순채와 송이버섯을 싫어하며 “이것이 무슨 맛이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느냐.” 하였다. 친구가 모두 웃으며 말하기를, “신군은 특이한 사람이다.” 하였다. 또 꾀꼬리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좋도다. 갹조(噱鳥)의 소리여.”하므로, 친구들이, “이는 꾀꼬리인데 어찌 갹조라 하느냐.” 하니, 신생이 말하기를, “그 울음이 갹갹하니 이는 갹조요, 꾀꼬리가 아니다.”하자, 친구들이 모두 그 고지식함을 웃었다. 이때에 어떤 이가 시를 짓기를,나뭇가지에는 갹갹하고 우는 꾀꼬리 머물고 / 樹頭![]()
黃鳥止순채와 송이는 내가 좋아하지 않도다 / 蓴菜松菌非我喜붉은 수염의 등이 굽은 작은 남아는 / 紫髥曲脊小男兒이원(梨園)의 기생을 검찰할 줄 알도다 / 猶知檢察梨園妓 하였다.○ 대제학 박연(朴堧)은 영동(永同)의 유생이었다. 어렸을 적에 향교에서 수업할 때, 이웃에 피리 부는 사람이 있었는데 제학이 독서하는 틈에 겸하여 피리를 익히니, 그 지역에서 모두 훌륭하다고 인정하였다. 제학이 과거 보러 서울에 가다가 이원(梨園)의 훌륭한 배우를 보고 교정을 받는데 배우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음절이 속되어 절주에 맞지 않으며 습관이 이미 굳어져서 틀을 고치기 어렵다.” 하니, 제학이 말하기를, “그렇더라도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하고, 나날이 왕래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일 만에 배우가 들어보고서, “선배는 가르칠 만하다.” 하고, 또 수일 만에 들어보고는, “규범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장차 대성에 이르리라.”하더니, 또 수일 후에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치고 말하기를, “나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겠다.” 하였다. 그뒤에 급제하여 또 금슬(琴瑟)과 제악(諸樂)을 익히니, 정묘(精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세종(世宗)의 총애를 얻어 드디어 관습도감(慣習都監) 제조(提調)가 되어 오로지 음악에 관한 일은 관장하였다. 제종이 석경(石磬 돌로 만든 경쇠)을 만들고 제학을 불러 교정케 하니, 제학이 말하기를, “모율(某律)은 1푼이 높고, 모율은 1푼이 낮다.” 하여, 다시 보니, 고율(高律)에 진흙 찌꺼기가 있었다. 세종께서 명하여 진흙 찌꺼기 1푼을 없애게 하고 또 저율(低律)에는 다시 진흙 찌꺼기 1분을 붙이게 하였더니, 제학이 아뢰기를, “이제는 음률이 고릅니다.”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 신묘함에 탄복하였다. 그 아들이 계유(癸酉)의 난에 관여되어 제학도 또한 이로 인하여 파직되고 향리로 내려갈 때, 친구들이 강가에서 전송하였는데, 제학이 말 한 필과 종 하나만 데리고 그 행장이 쓸쓸하였다. 배[舟] 안에서 같이 앉아서 술자리를 베풀고 소매를 잡고 이별하려 할 때 제학이 전대 속에서 피리를 꺼내어 세 번 불고서 떠나가니, 듣는 사람들은 모두 처량하게 여기어 눈물은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내가 백형(伯兄)을 모시고 개성(開城)으로 떠나려 할 때 파산(坡山)의 별장에서 쉬면서 달밤에 이야기하다가 우연히 고도(故都)의 일에 이르러 내가 개연(慨然)히 탄식하며, “개성은 우리 조상이 거처하던 곳이라, 응당 분묘가 있을 것입니다.”하였더니, 백형이 말씀하시기를, “현조(玄祖) 총랑공(摠郞公)은 창녕에다 모시었고, ”고조(高祖) 문정공(文靖公) 양위(兩位)는 포천(抱川)에다 모시었고, 증조(曾祖) 정평공(靖平公) 양위와 조(祖) 공도공(恭度公) 양위는 모두 과천(果川)에다 모시었고, 오직 총랑 부인 오씨(吳氏)만 산소가 개성에 있어, 엄군(嚴君)께서 일찍이 말씀하신 적이 있으나 그때에 나이 어려서 자세히 여쭈어보지 못한 것이 평생의 큰 한이다. 지금 비록 장지가 있다 해도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묘 봉우리가 평평하게 되었을 것이니, 무엇으로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 이튿날에 임진강을 건너 호관(壺串)을 지날 때, 길 옆에 옹중(翁仲)이 있는 오래된 무덤을 보기만 하면 비통하게 말하기를, “어찌 이것이 아닌 줄 알겠는가.” 하고, 서로 서글퍼해 마지 않았다. 종이 안장과 농두(籠頭)를 잡고 앞을 인도하여 동쪽으로 10리 남짓 가서 대로(大路)로 나와 다시 산골짜기의 조그만한 길로 접어들 때, 백형이 말하기를, “이 길은 전일에 가던 길과 같지 아니하다.” 하고, 머리를 돌려 바라다 보니 옛날에 가던 길과는 수 리나 떨어져 청교역(靑郊驛)이 아득히 서쪽에 있었다. 비로소 깨닫고, “여기는 천수산(天水山) 동쪽 기슭이다.” 하고, 길을 잃고 정신없이 큰 고갯마루를 타고 오르다가 몸이 피곤하여 말에서 내려 잠깐 쉬면서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어지러운 무덤 가운데 석비(石碑)가 우뚝이 서 있는지라, 내가 가보려고 하자, 백형이 날이 저문다고 하며 말렸다. 그러나 내가 말을 달려 가보니 바로 오씨의 무덤이었다. 전면에 삼한국 대부인 동복 오씨지묘(三韓國大夫人同福吳氏之墓)라 쓰여 있고, 후면에 고조 및 증조 3형제분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내가 백형을 맞아 사배 (四拜)하니 백형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는 조고(祖姑)의 신령이 우리들을 이곳에 이끌어온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런 기이한 일이 있겠는가.” 하고, 오래 흐느껴 울다가 떠났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백형이 유수(留守)에 제수되고 시좌(時左 성준(成俊))ㆍ자강(子强 성건(成健)) 형제가 서로 이어 경기 감사 순찰사가 되어 지금까지도 제향을 폐하지 않고 있다.개구리는 오랫동안 가물면 소리가 없다가 비가 오면 시끄럽게 우는데, 어째서 그런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주례(周禮)에 진회(蜃灰 조개 재)를 뿌려서 기도[禳]하는 것은 그 소리를 미워해서이고, 공치규(孔稚圭)가 이것을 양부(兩部)의 북을 치고 피리 부는 것에 비한 것은 그 소리를 좋아해서이다. 지금 맹인들이 경을 읽을 때 개구리 소리를 모방하는 것도 또한 일종의 음악이다.권성(權姓)인 재추(宰樞)가 문관으로서 조정에 현달(顯達)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남의 무덤을 파헤치고 장사지내려 할 때 무덤 주인이 말하기를, “이 무덤은 우리 아버지의 무덤이다. 우리 아버지는 벼슬은 비록 낮았으나 뜻이 엄하고 굳세어 보통 사람이 아니었으니, 부디 파내지 말라. 반드시 해가 있으리라.”하였으나, 재추가 듣지 아니하고 마침내 그 무덤을 파서 관을 열어 시체를 버리니, 그 아들이 시체를 어루만지며 통곡하기를, “영혼이 만약 있다면 어찌 이 원통함을 보복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날 밤에 풍수(風水) 이관(李官)의 꿈에 수염이 붉은 한 장부가 분노하여 꾸짖기를, “네가 어찌 나의 안택(安宅)을 빼앗아 타인에게 주었는가. 화근은 실로 네게 있다.” 하고,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치니, 이관은 가슴을 앓아 피를 흘리다가 바로 죽고, 얼마 가지 아니하여 재추도 또한 나라의 죽임을 당하고 가문이 멸망하니, 사람들이 모두 무덤을 파낸 까닭이라고 하였다.신축년에 채기지(蔡耆之)와 성경숙(成磬叔)이 승지로서 죄를 입어 모두 파직을 당하고 관동(關東)에 놀러 갈 때 흰옷과 짧은 도롱이로 각각 한 어린 종을 거느리고 가는데, 무관(武官) 회옹(晦翁)이 따라갔다. 포천(抱川)에 이르러 시내에서 저녁밥을 먹는데, 한 소년이 촌락에서 나와 경숙의 옆에 걸터앉으며, “당신들은 영안도(永安道) 사직(司直)이 아니오, 내가 소를 사고자 하오.” 하니, 경숙이 답하기를, “소가 없소니다.” 하여, 좌우가 모두 웃었다. 금화현(金化縣)에 이르니, 현감이 앞길에 나와서 현(縣)으로 맞아들이고자 하므로, 경숙이 말하기를,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었고, 금성(金城)까지는 아직도 길이 멀며 사면(四面)에 인가가 없으니, 주인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 하니, 기지가 노하여, “처음에 족하를 믿음직하다고 여겼는데, 어찌 일을 다스림에 착오가 이와 같은가.” 하고, 인색을 붉히면서 길을 떠나 10리 정도 갔을 때,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회옹이 말하기를, “영안을 왕래하는 사람들은 모두 길가에서 노숙하므로 내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활소기와 말타기로써 업을 삼았으니, 어찌 도적 같은 것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길 위에서 자고 가도록 합시다.” 하니, 경숙이 말하기를, “영안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이 모여 무리를 지어 있기 때문에 노상에서 자지만 그래도 흔히 도적을 만나 물건을 잃었는데, 족하가 아무리 용무(勇武)를 믿는다고 하나 어찌 한 몸으로 많은 무리를 당하겠소.” 하였다. 이러는 동안 마침 서쪽 골짜기의 소나무 사이에 좁은 길이 있어, 혹은 인가(人家)가 있을 것이라 하고, 혹은 무덤이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 경숙이 말하기를, “골짜기 깊숙한 곳이 오히려 큰 길 옆보다는 낫다. 집이 있으면 자고 집이 없으면 나무를 베어 목책을 만들어 자면 해될 것이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좁은 길을 찾아갔더니, 소점(小店)이 있어 한 여자가 아이를 안고 문에 나와 말하기를, “집에 주인 어른은 계시지 않고 다만 주부만 있을 뿐이니, 손님을 들일 수 없습니다.”하므로, 모두 집 앞 채소밭에 앉아 저녁을 먹을 때 이미 어두워져서 주위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조금 후 한 사람이 말을 타고 오는데 개가 그 뒤를 따라왔다. 어린애가, “주인 어른 오신다.” 소리치니, 여자가 나와 맞이하며 말하기를, “손님이 밖에 가득한데 도적인 듯합니다.” 하였다. 늙은이가 말하기를, “누군지는 모르지만 밤늦게 왔으니 황당(荒唐)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고, 드디어 말에서 내려 기침을 하며 사방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행장에 곰가죽과 호피(虎皮)가 있으니, 반드시 사족(士族)이리라.” 하였다. 좌중이 모두 갓을 기울여 쓰고 말이 없으므로 늙은이가 성경숙의 갓을 벗기어 보고 갑자기 물러서면서, “이분은 성영공(成令公)이시다.” 하고 또 기지의 갓을 벗기어 보고는, “이분은 채영공(蔡令公)이신데 두 영공께서 어찌하여 이곳에 이르셨습니까.” 하여, 서울의 일을 자세히 물은 다음 비로소 그 까닭을 알고 방으로 맞아들여 병풍을 펴고 자리를 깐 다음, “내 집은 몹시 빈한하여 오직 좁쌀막걸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종을 불러 술을 걸러 동이에 넣고 두 딸을 불러 나와 절하게 하자 모두가 경의(敬意)를 표하였다. 늙은이가 말하기를, “나의 정처(正妻)는 자식이 없고 이것들은 모두 종의 소생입니다.” 하고, 두 사람 옆에 앉히어 각각 차례로 술을 따르게 하고 채기지의 종으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에 채기지가 말하기를, “따님의 손을 잡아보고 싶은데 주인의 뜻이 어떠하실는지요?” 하니, 늙은이가 말하기를, “딸들이 비록 촌티가 나고 못났으나 옆에 모시게 한 까닭은 영공의 기쁨을 돕게 하고자 한 것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였다. 채기지가 나아가 그 손을 잡고 여러 가지로 희롱할 때 집이 낮아 일어설 수가 없어 모두들 앉아서 춤을 추면서 새벽까지 놀았다. 늙은이의 성은 진(秦)이니, 당시에 이조 녹사(吏曹錄事)로 있다가 휴가를 얻어 고향에 와 있는 것이었다. 창도역(昌道驛)에 이르러, 회옹이 병이 나서 수일을 머물렀는데, 일행의 말이 풀을 먹고 똥을 많이 누었다. 역졸이 비를 가지고 와서 쓸면서, “누가 우리 감사가 앉는 마루를 더럽히는고.” 하고, 몹시 노한 기색을 보이자 성경숙이 천천히 달래면서 말하기를, “노하지 말게, 우리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만약 찰방(察訪)이 되면 마땅히 자네에게 말미를 주도록 하겠네.” 하니, 역졸이 말하기를, “어찌 흰옷에 가는 실띠를 띤 사람이 찰방이 될 수 있겠소. 만약 그렇다면 영안도(永安道)로 대구(大口)를 싣고 왕래하는 사람들이 모두 찰방이 되겠습니다.” 하여, 사람들이 모두 포복절도하였다. 신안역(新案驛)을 지날 때 길에서 역마를 타고 달려오는 한 관인(官人)과 마주쳤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풀밭에 숨어 엎드렸는데, 관인이, “이 사람들은 누구인데 방황하고 물러가지 않는가.”물었다. 또 보니, 한 여자가 붉은 저고리와 흰 치마를 입고 역마를 타고 오므로 성경숙이 말하되, “이는 참으로 장부의 행차로다. 내가 일찍이 한림원을 거쳐 은대(銀臺)에서 벼슬하고 기생들이 연주하고 노래하는 자리에서 취해 놀다가 오늘날 불우한 환경에 빠짐이 이와 같으니, 우리들 처지에서 저들을 보니 참으로 천상의 신선과 같도다.” 하였다. 채기지가 말하기를, “그대가 일찍이 관서(關西)에 사신으로 갈 때 두 기생을 데리고 갔었으니, 저 것도 한때, 이것도 한때인데 어찌 저것을 부러워하오?” 하여, 일행이 모두 웃었다. 회양(淮陽)의 속읍인 화천현(和川縣)에 이르렀을 때, 회옹이 입맛이 없어 콩죽을 먹고자 하니, 성경숙이 현(縣)의 아전을 불러 옷을 전당잡히고 죽을 구하니, 아전이 말하기를, “저의 집이 비록 가난하지만, 어찌 죽을 옷과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저녁에 콩죽 한 주발과 꿀 한 바리를 가져왔는데, 채기지가 모두 먹어버렸으므로 아전이 또 한 주발을 보내었다. 이번에는 성경숙이 먹어버리고 회옹은 다만 먹다 남은 찌꺼기만 먹었다. 추령(楸嶺)을 넘어 중대원(中臺院)에 이르러 마침 비바람을 만났는데, 그 맹렬한 찬 기운이 마치 가을과 같았다. 앞서 서울을 떠날 때 성경숙은 두터운 저고리를 가져오지 아니하여 이때에 이르러 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다. 정중(亭中)에 한 역졸이 막걸리를 가져와 권하니 모두 그 더러움을 싫어하며 마시지 않았는데, 성경숙은 한 사발을 기울이고 말하기를, “겹옷 입은 사람은 비바람 속에서는 막걸리를 마셔도 또한 무방하다.” 하였다. 통천(通川)에서 수일을 머물 때 군수 안국진(安國珍)과 더불어 놀고 남으로 고성군(高城郡)에 이르니, 마침 홍자심(洪子深)이 군수가 된지라, 삼일포(三日浦)에서 놀다가 다시 동해의 봉화봉(烽火峯)에서 노니, 그 기이한 경치야말로 비할 데가 없었다. 자심이 그 봉을 승선대(承宣臺)라 이름지었으니, 여기서 양인이 모두 승지를 지냈기 때문이다. 바닷고기를 잡아서 몹시 마셔서 크게 취하니, 군수가 오미자장(五味子漿)을 조제하여 병에 넣어둔 것을 성경숙이 살그머니 훔쳐 마시자 회옹이 이것을 보고 병을 채가지고 도망하였다. 성경숙이 몽둥이를 가지고 쫓아가니, 희옹이 병 속에 침을 뱉어 남이 먹지 못하게 하였다. 채기지가 노하여 병을 거꾸로 하여 땅에 쏟아버리니, 한 병의 장이 모두 없어졌다. 낙산사(洛山寺)에 이르러 중이 말하기를, “행차가 저희 절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마침 길 가는 사람이 간성(扞成)으로부터 오므로, ‘승지 일행이 어디쯤 오더냐.’물으니, 답하기를, 승지는 보지 못했고 다만 말 꽁무니에 도롱이와 옷을 매달고 오는 객 두서너 사람을 보았을 뿐인데, 필시 강릉(江陵)의 정병(正兵)일 것입니다.’하더니, 지금 보니 그 대들이 모두 도롱이와 옷을 매달고 왔으니, 길 가는 사람이 잘못 본 것이로다.”하므로, 서로 크게 웃었다. 양양(襄陽)에 이르러 드디어 일행은 서울로 돌아왔다. 이듬해 임인년에 회옹은 회양 부사(淮陽府使)에 제수되었고, 3년 후 계묘년에는 성경숙이 강원 감사에 제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