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과 대결하시다
귀환한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께서는 다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길에 오르셨다. 갈릴래아 호수 북쪽 일대를 다시 거꾸로 – 시계 바늘 방향으로 – 도는 여정이었다. 바리사이들도 예수님 일행을 멀리서 뒤쫓아왔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여러 차례 마찰이 빚어지고 논쟁이 벌어졌다. 안식일 논쟁도, 베엘제불 논쟁도 그래서 생겼다. 그런데 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서 마귀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낸다.”는 악소문을 동네방네에 퍼뜨리는 바람에 그분의 친척들까지 듣게 되었고, 급기야 그 친척들이 성모님까지 모시고 가서 예수님을 말리려드는 진풍경까지 벌어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내려오신 성령께서 그분을 광야에로 인도하시어 악령과 대결하게 하셨듯이,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앞길 마다마다에 악령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하수인 노릇을 했던 악인들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다. 복음 선포가 절정에 달하면서 그네들의 발악도 점점 거세어져서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 하수 마귀들을 쫓아내는 어중띠기 마귀라는 희안한 중상모략까지 동원된 것도 여기서였다.
마태오는 제12장에서 이 모든 사건을 기록하면서 우리를 비유설교에로 준비시킨다. 즉,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소란스러웠지만 치열하기 짝이 없었던 영적 대결에서 선포된 복음의 의미를 비유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시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다.
십계명의 셋째 계명에 나올 정도로 중시하는 안식일에 제자들이 남의 밭에서 밀이삭을 뜯어 먹는 일이 벌어지자, 이를 두고 시비를 거는 바리사이들과 예수님 사이에 ‘안식일 논쟁’이 일어났다. 이 논쟁에 대해 교부들은 창세기를 비롯한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렇게 풀이한다.
“안식일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일하신 뒤에 쉬셨으므로 우리도 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해 세워졌다(헤라클레아의 헤로도투스).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 율법을 폐지하시려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을 찬양하셨다. 모든 사람이 더 높은 수준의 계명으로 단련받는 시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왔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일은 도전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옛 율법을 변화시키려는 것이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바리사이들은 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는 가만히 있었지만, 치유의 기적을 보자 마음이 상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러나 그들 자신도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죽임으로써 안식일을 어겼다(히에로니무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는 행위는 결코 죄가 아니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율법 제정자이신 메시아께서, 사람들이 율법이라 믿은 것을 파기하셨다. 이 같은 반전(反轉)이 특별한 사건과 장소에서,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곧 안식일에 성전에서 사제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곧 성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셨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이유는 배가 고파서였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제자들은 자기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처지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떠돌아다니는 신세이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나는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8,20)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세입자 신세도 되지 못하는 방랑 설교가가 그분이셨다. 그러니 삼시 세끼를 채우기는커녕 굶기를 밥 먹듯 했을 것은 뻔한 이치였으리라. 루카는 예루살렘 부인들이 그분의 일행을 자기 재산을 바쳐 돕고 있었다고 했으나(참조: 루카 8,3), 그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 여인들 역시 예수님의 복음선포로 말미암아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또 그분의 공생활 중반에 속하는 어느 시기부터 부인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장정 열 세 사람의 끼니를 날마다 해결하는 일은 벅찬 일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튼 제자들은 평소에도 허기져 있었다. 그래서 안식일인지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바리사이들이 문제 삼을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로 배 고픈 김에 남의 밭에서 밀 이삭을 마구 뜯어서 씹어 먹었다. 그런데 이것이 하필 멀리서 뒤쫓아 오며 감시하던 바리사이들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이것이 안식일 논쟁의 발단이었다.
안식일은 십계명의 셋째 계명이다. 이는 단순히 순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중요성에 있어서도 세 번째 가는 큰 계명이었다. 마카베오와 그 일가는 안식일 계명을 지키려다가 적군의 포로가 되기도 하고 그들을 따른 유다인들은 천명이나 죽기도 했다(참조: 1마카 2,38). 그만큼 그 당시 유다인들에게 안식일 계명은 하나의 커다란 이데올로기 구실을 하고 있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한 구두 주석을 무려 오십 여 가지나 마련해 놓고 있었다. 흔히 하가다(Haggada)라거나 탈무드(Talmud)라고 불리우는 이 주석에 의하면, 모든 생업 행위는 금지되었다. 그런데 안식일에도 일을 해야 먹고 사는 가난한 백성들은 곧잘 이 계명을 어기곤 했다. 그러자 갈수록 이 주석이 정교해졌다. 그 결과, 50m 이상 다른 이들의 물건을 날라다 주는 일도 배송업이라 해서 금지되었는가 하면, 다른 이들의 병을 고쳐주는 의료행위라고 하여 금지되어 버렸다.
위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무엘 상권 21,2-7에 나오는 다윗과 그 일행의 역사적 사례를 들어 반론을 제기하셨다. 레위 24,8과 민수 28,8-9에 나오는 바, 사제들이 안식일에도 성전 제사를 위해 준비하는 작업은 예외로 규정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기도 하셨다. 더 나아가서 그분은 당신을 일컬어 “성전보다 더 큰 이”(마태 12,6)라고 자처하시면서,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을 상기시키셨다 :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12,7). 그리고 이어서 가장 결정적인 언급으로 바리사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 :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12,8). 교부 헤로도투스의 말처럼,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레 째 되는 날 쉬신 분이 쉼 즉 안식의 본 뜻을 재천명하고 계신 셈이다. 그래서 이 언급은 예수님께서 부지불식간에 당신의 신원을 바리사이들과 제자들에게 드러내신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마침’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그 안에 있었다. 바리사이들은 이 사람을 앞에 놓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어도 되느냐고 그분께 물었다. 앞선 안식일 논쟁을 염두에 두고 벌인 소행이자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노골적인 올가미였다.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바리사이들의 이같은 행태에 대해 교부들은 이렇게 풀이한다.
“바리사이들이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신 일을 따졌다. 상징적으로 풀면, 그들은 그들 손의 쓸모없음을 구원자께 가지고 온 것이다. 오그라든 손은 쓸모없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오리게네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회당에 데려다 놓은 사람의 오그라든 손보다 그들의 빈정대는 태도를 먼저 고치고 싶어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위로 그들을 치유하려 하시지만, 그들의 병은 실로 고질병이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결국 그들이 데려다 놓은 사람의 오그라든 손이 성한 손처럼 나아서, 사도들의 구원 선포에 협력자가 되었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성령께서 협력자를 필요로 하시듯이, 악령도 하수인을 필요로 한다. 바리사이들은 오그라든 마음으로 악령의 하수인 노릇을 자청한 셈이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은 해도 되는 법이거늘, 그네들은 그런 양식 있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께 트집잡을 일만 찾았다. 아니, 만들었다. 왜 하필 예수님께서 가시는 회당에 ‘마침’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버젓이 기다리고 있었던가? 우연이라고 보기엔 앞뒤 정황이 석연치 않다. 일부러 데려다 놓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나오시든 함정에 빠뜨리려고 데려다 놓았을 개연성이 거의 100%이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하고 모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군중은 이런 대결 상황을 줄곧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군중 역시 바리사이들의 사악한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지만 나서서 말리지는 못했다. 평소에 그 바리사이들의 권위에 억눌려 지내온 탓이었으리라. 그보다는 예수님께서 처하게 되신 난감한 처지에 동조하거나 사악한 바리사이들의 소행에 대해 비분강개하기 보다는 자신들이나 자신들이 데려온 병자들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는 데 더 관심을 쏟았다. 그만큼 처지와 상황이 절박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리사이들의 사악한 행태와 군중의 이기적 처신에 대해 교부들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오셨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목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없애려 모의한 사실을 아시고 물러가셨다. 이는 그들의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악을 없애기 위해서였다(오리게네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심으로써, 당신을 자랑하기를 거부하셨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넘어서신 것은, 법을 내리신 분의 원수인 적수로서가 아니라 법을 내리신 분과 한마음인 분으로서 하신 행동이다. 예언자들은 그분께서 많은 곳을 다니시리라는 것과 그분의 행위에 담긴 뜻을 예고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하느님 마음에 드는 분이셨다. 그분께는 하느님의 영이 계셨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예수님께서는 소리치거나 자기를 떠벌려서가 아니라 덕성스러운 행동으로 존경받을 만한 공생활을 하심으로써 당신 삶의 본보기로 가르치셨다(라오디케아의 아폴리나리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명을 이루실 때까지 사람들의 적대를 끈기있게 참아 주심으로써, 그들이 자신들의 나약함 때문에 완전히 잊혀지는 일이 없게 하셨다(헤라클레아의 테오도루스).”
마태오는 이렇듯 악령의 하수인처럼 못되게 구는 바리사이들과 정면으로 대결하면서도 이기적이기까지 한 군중의 요구에 군소리 없이 응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하면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였다. 본문에서는 42,14를 인용하였는데, 이는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로 알려져 있다. 이 노래를 남긴 제2 이사야는 예수님보다 5백 여 년 전에 살았던 바빌론 유배 시대의 인물이다. 둘째 노래(이사 49,1-7), 셋째 노래(50,4-11), 넷째 노래(52,13-15)가 모두 그의 저술인데,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습을 마치 옆에서 보듯이 정확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어려서부터, 동 시대의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이사야 예언서를 외우다시피 하며 자랐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이사 42,3) 모습은 생명과 평화에 대한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미 부러진 갈대야 이미 죽은 가지나 마찬가지여서 꺾어 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고, 연기가 나는 심지라면 곧 꺼질 심지라는 뜻인데, 그럴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부러진 갈대도 되살리실 수도 있고 꺼져 가는 심지조차도 당신 도구로 쓰실 분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보여주는 메시아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안식일 논쟁에서 하릴없이 판정패를 당한 바리사이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평소처럼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데려온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자 군중은 그분이 혹시 메시아가 아니실까 하고 경탄하는 반면에 바리사이들은 “마귀 두목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지 못한다”(12,24)고, 그러니까 예수님도 마귀 들린 자라는 식으로 아주 못된 중상모략을 해 댄 것이다. 사태가 이런 식으로 험악하게 돌아가자 교부들은 그 역사적 의미를 장중하게 풀어내었다.
“마귀 들려 눈멀고 말못하는 사람은 보지도 못하고 입으로 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상징적으로 풀이하면, 그는 자신의 창조주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분께 감사를 바치지도 못했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그러나 예수님에게 치유받자, 믿게 되어 하느님을 찬양했고, 눈이 뜨여 그리스도께서 환히 빛나는 빛이심을 마음의 눈으로 알아보았다(라틴인 에피파니우스).”
“바리사이들은 진리에 관한 일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사악한 마음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거짓말을 함으로써, 사람들을 믿음에서 멀어지게 했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그들은 마귀를 쫓아내는 예수님의 힘이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에게서 온다고 우겼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만일 예수님이 사탄이라면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는 셈이므로, 그들의 비난은 전제부터가 잘못됐다. 자기를 쓰러뜨릴 것에 의지해 서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갈라진 집안은, 율법의 백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완성되는 것에 저항하는 예루살렘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서로 갈라선 악마의 나라는 서 있을 수 없다(아우구스티누스). 우리는 갈라질 수 없는 나라, 거룩하고 영원한 나라, 영적 도성 예루살렘, 적대적인 권능이 한 번도 이긴 적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이기지 못할 하느님의 참된 집안을 따라야 한다(아퀼레이아의 크로마티우스). ‘내가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이라는 말에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하느님 영의 권능에 의해(라오디케아의 아폴리나리스) 나타나셨다고 추론할 수 있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히에로니무스).”
“인간의 역사는 마귀 우두머리의 권한 아래 놓여 악을 일삼게 됨으로써 마귀들 손아귀에 들어갔다(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예수님께서 악마를 ‘힘센 자’라고 표현하신 것은, 악마가 본디 그런 본성을 지니도록 창조되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그가 인간을 포학하게 다스리게 되었음을 나타낸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먼저 악마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무찌를 수 없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악마가 아무 힘을 쓰지 못하도록 만드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모든 것을 흩어 파멸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악마가 하는 일이고, 모든 것을 모아들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장차 이단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갈라지면 어떤 황폐한 모습이 될지를 내다보신다(아퀼레이아의 크로마티우스). 세우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그분을 거스르는 자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도울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보다 더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은 그분 안에 계신 아버지 성령의 본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은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안티오키아의 세베루스). 세례를 받고 나서도 성령께 계속 철저히 저항하며, 계속 고집스럽게 회개하지 않는 죄는 용서받지 못할 신성모독이다(아우구스티누스).”
교부 테오도루스의 말처럼, 마귀들 손아귀에 들어간 인간 역사에서 하느님으로서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 대결을 선포하셨다. 이 대결에서 어중간한 중립은 있을 수 없다. 그야말로,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12,30)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예수님의 이 중대 선언 앞에서 이 말씀을 에누리할 수도 없고, 자발적으로 세례를 받고 나서도 성사를 배령하기를 거부하는 이른바 냉담 교우가 전 신자의 70%에 이르는 작금의 세태 때문이다. “세례를 받고 나서도 성령께 계속 철저히 저항하며, 계속 고집스럽게 회개하지 않는 죄는 용서받지 못할 신성모독”이라고 말한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도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 어린 기도와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친절한 배려가 없었다면, 구원을 받기는커녕 마니교 이단에 빠져 방탕한 처지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세례를 받고 나서 철저하게 회개한 끝에 서방 세계에서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大신학자로 거듭 났다. 그러기에 위와 같은 말도 서슴없이 했을 터이다.
냉담자가 한 둘이라면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않으리라. 그런데 전체 영세자의 절반 이상을 넘어선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건 너무 많다. 냉담자들이 세상살이에 바빠서라거나 또는 성직자나 수도자나 교우들에게 상처를 받아서 냉담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아무리 교회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 문제가 교회 바깥보다 더 심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소설가 김훈(63)은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다룬 ‘칼의 노래’를 써서 유명해진 베스트 셀러 작가이다. 그가 최근에 순교자와 배교자를 다룬 장편소설 ‘흑산(黑山)’(2011, 학고재)을 펴냈다. ‘흑산’은 조선 말 신유박해(1801)를 배경으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천주교를 배교한 다산 정약용과 순교한 황사영 그리고 조용히 배교한 뒤 물고기만 들여다보고 살았던 정약전 등의 이야기이다.
2011년 12월 14일자 조선일보 문화면에 따르면, 그는 13일 저녁 서울 광장동 성당에서 천주교 신자 300 여명과 마주앉았다. “저는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40년 냉담자인 그는 자신의 삶과 신앙, 200 여년 전 사람들의 생사를 건 신념과 살아남음의 문제를 담담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숨김없는 ‘고해성사’ 같은 장면이었다.
그는 3대째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던 외가의 영향으로 유아세례를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라틴어를 배워 미사에서 복사(服事)를 섰다. 하지만 군에 다녀오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신앙과 멀어졌다. 그는 강연 서두에서 “신부님이 나오라 해서 왔지만 성당에서 무슨 말을 하려니 더 큰 죄를 짓는가 싶어 두렵다.”고 했다.
이날 강연에서 그는 “‘흑산’에서 신앙과 더불어 내세를 지향하는 사람보다는 신앙과 더불어 세속을 지향하고 신앙의 힘으로 세속의 문제를 해결하고 세속을 천당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으로 만들려고 애쓰다 박해받고 숨진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그리려 했다.”고 했다.
소설 속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과 변론도 했다. 정약용 형제 중 순교한 정약종에 대해선 “순교 외양만 잠깐 썼다.”며 “신앙의 내면을 묘사하는 것은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했다. 정약용과 정약전에 대해선 “배교라기보다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백서사건의 주인공 황사영에 대해선 “고립무원 상태의 토굴에서 인간이 자기의 영성을 끝까지 지켜냈다는 것이 너무도 두렵고 놀라웠다.”고 했다.
그는 “어려서 교리를 배울 때 삼위일체, 창조 등은 어려웠다.”며 “그러나 아주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있었다.”고 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죠. 거기에 추호도 의심도 할 수 없는 진리가 들어있다고 생각했죠. 차별하지 말고, 억압하지 말고, 빼앗지 말라, 이런 게 다 포함되는 것이죠.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 한 마디만 가지고도 우리는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김훈은 글에 ‘사랑’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그는 “젊었을 땐 뭐든 다 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이 먹을수록 내가 장악 못 할 말들은 쓸 수 없게 됐다. 사랑이란 말도 그 중 하나.”라며 “그래도 몇 번은 꼭 쓰고 싶다. 누구나 다 수긍할 수 있는 자리에다 아주 정확하게 ‘사랑’을 써보는 것이 내 소원”이라고 했고 박수가 터져 나왔다.
‘40년 냉담자’는 “‘냉담자’는 심한 표현”이라며 “그냥 삶에 끄달리고 짓눌려 살다 보니 저절로 멀어진 것이 일상화 습관화됐고, 그 기간이 너무 길어지니까 나하고 완전히 끝났구나 생각했던 것이지 성당에 안 나간다고 매일매일 성당을 미워하거나 매일매일 큰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고 해 폭소를 자아냈다.
김훈은 구도자적 글쓰기를 하는 한국 문단에서 몇 안 되는 전업작가의 한 사람이다. 개종하기 전 사도 바오로가 율법에 철저했던 것처럼, 글에 관한 한 그는 철저한 윤리의식을 지닌 사람이다. 기자로서나, 문학평론가로서나 작가로서, 적어도 사실(事實)과 의견(意見)을 구분할 줄 아는 글쟁이다. 게다가 소설 ‘흑산’에서 그가 의도했듯이, 그는 신앙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주 건전한 신앙 감각을 지닌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글과 삶이 유리되어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냉담자들이 김훈처럼 신앙 자체를 거부하는 선택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살다 보니, 멀어지게 됐고, 그뿐이다. 물론 그 계기야 사람마다 있을 것이고 또 다르겠지만, 그렇다. 그러면 성사생활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정상적인 신자들은 무언가?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구원하려고 예비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쏟아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베푼 사제들은?
20세기 서방 교회의 大신학자 칼 라너는 다종교사회의 구원문제를 해결하고자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을 창안하여 비신자들 안에서의 구원 가능성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게 만들었다. 그러나 김훈 같은 냉담자들은 비신자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고, 더구나 김훈은 고등학생 시절 라틴어 미사의 복사까지 설 정도로 열심했었다지 않는가?
그래서 당혹스럽다. 아마도 율법에 대한 열성 하나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겠다고 설치던 사울을 벼락으로 내리쳐서 사도로 만드신 예수님께서, 이들에게도 인생 벼락을 쳐주셔야 하지 않을까 싶다.
변함없이 기도생활과 성사생활에 충실한 신자들에게도 과제는 남아 있다. 자신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이들을 더욱 열심히 해야 하고 그런 행위를 하는 동기와 희망에 대해서 묻는 이들에게 설득력 있게 답변을 준비하여 신앙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이 무신론자이든 타 종교인이든 개신교 신자들이든 아니면 냉담자이든, 예수님 편에 서서 ‘모아들이지 않고’ 기도생활이나 성사생활을 멀리하고 있다고 해도, 가톨릭 교회와 가톨릭 신앙인들이 제대로 믿고 있는지 아닌지는 다 안다. 여기서 잣대는 기도생활과 성사생활뿐만 아니라 특히 – 가톨릭 사회교리가 가르치는 바 – 사회정의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태도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올바른 신앙고백과 제대로 된 신앙증거가 다 함께 균형 있게 필요하다. 그래서 이어지는 ‘나무와 열매의 비유’ 말씀은 예수님을 적대하기로 작심한 바리사이들에게뿐만 아니라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 모두를 겨냥한 가르침이다. 물론 방점은 그분이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쏘아 부친 바리사이들을 향해 찍혀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들과 대적하고 있는, 영적인 차원의 전투적인 상황임을 의식하고 있는 교부들은 이에 대해 냉엄한 경고를 내놓았다.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려면 열매만 보면 된다. 예수님의 행실, 곧 열매에 흠잡을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도 바리사이들은 예수님, 곧 나무에 대해 정반대로 판단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마귀 들린 사람이라 불렀고,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참으로 분별없는 짓이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는 말씀으로, 자기는 나쁜 채로 남아 있으면서도 좋은 말과 착한 행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경계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셨다(아우구스티누스). 사악한 자들은 성경을 인용할 자격도 그 말씀을 마음대로 풀이할 도덕적 권리도 없다. 사람들은 자기가 지껄인 근거 없고 부주의하고 쓸데없는 말을 하느님께 해명해야 한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예수님께서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신 이유는 그들이 조상들을 자랑삼기만 하고 그 이점은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들이 선한 말을 하나도 하지 못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말이란 영혼의 성향을 따라 가는 법이기 때문이다(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사악한 말 뒤에 숨겨진 샘은 더러워진 마음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심판 날에 모든 사람은 자기가 한 말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히에로니무스, 헤라클레아의 테오도루스). 말을 조심하는 사람은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12,34ㄴ)이므로 여기서 ‘나무’는 마음을, ‘열매’는 말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것”(12,31ㄴ)이라고 단죄하신 예수님이셨다. 이 단죄가,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다.”(12,24)던 바리사이들의 중상모략을 겨냥한 것임은 물론이다. 이들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12,32ㄴ)이라고 경고받은 자들로서, “심판 날에 해명해야 할 쓸데없는 말을 지껄인”(12,36) 자들이다.
이런 최후통첩과도 같은 비장한 경고의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하였다. 이미 수많은 기적 사건들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을 표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뜻은 예수님을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바리사이들의 이러한 적대적 의사표명에 대해 교부들은 이렇게 풀이하였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감정을 다스릴 줄 모르며, 쉽게 성을 내게 만들었다가 금세 아첨하여 조종할 수 있는 이라고 생각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하느님의 아드님에게 신성의 표시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표징으로 당신의 말씀을 뒷받침하지 못한다면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이 모두 거짓이라는 듯이, 그분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믿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표징의 증거를 보고서야 하느님의 아드님을 받아들이려는 이들은 요나의 표징인 그분의 죽음이라는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 불신앙에 갇힌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사흘은 수난주간의 금요일 끝부분과 토요일 종일 그리고 주일의 시작 부분을 뜻한다(헤라클레아의 테오도루스). 요나는 사람의 아들을 예표하며(아우구스티누스), 니네베 사람들은 믿는 이들을 예표한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그러나 요나와 예수님을 유비(類比)로 풀이하는 데는 큰 한계가 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교회는, 썩어 없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믿음과, 지식이라는 분향(焚香), 풍성한 제물, 덕의 땀과 순교의 피를 바침으로써, 남방 여왕이 보여 준 예형을 완성한다(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이 유비에도 많은 한계가 있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바리사이들의 요구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요나와 솔로몬의 이야기로 응수하셨다. 보여주실 수 있는 표징은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보낸 것처럼 십자가 죽음을 겪고나서 사흗날에 부활하시리라는 표징이요, 이미 보여 주신 표징은 땅끝에서 온 남방 여왕이 청했던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 큰 지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 자신을 일컬어, ‘요나보다 더 큰 이요, 솔로몬보다 더 큰 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반응은 나와 있지 않다. 제자들 속에 섞여 있다가 이 대화를 들었던 마태오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후에 이 말씀의 의미가 중대함을 깨닫고 기억을 되살려 적어 놓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말도 되지 않는 요구를 해 대는 바리사이들보다는 그들이 문제 삼았던 마귀가 들려 고통 당하다가 풀려난 이들에게 더 있었다. 구마의 치유를 받은 이들이 치유를 받고도 선한 영에로 돌아서지 않으면 이전보다 더 끔찍한 처지가 되리라고 경고하신 것이다. 교부들은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를 받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 칠은사는 칠죄종에 대항할 수 있는 영적인 무기이다.
“처음에는 믿었다가 지금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생기나? 마귀들이 그를 더 확실하게 자기들 거처로 삼는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선한 영 일곱은 지혜, 분별, 경륜, 용맹, 지식, 경건, 하느님을 두려워함의 영이다. 이에 맞서는 악한 영 일곱은 어리석음, 오류, 무모함, 비겁, 무지, 불경과 하느님을 두려워함과 반대되는 교만의 영이다(아우구스티누스).”
성리학의 폐단으로 기울어져 가던 조선 사회를 서학에 대한 관심으로 극복하려 애를 쓰던 우리 신앙선조들은 천주학 서적들을 접하고는 칠죄종을 극복하기 위한 일곱 가지 덕행을 쌓으려 노력하였다. 이를 ‘칠극(七克)’이라 하는데, 이는 중국에 선교하러 온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신부 판토하(D. Pantoja. 1571-1618)가 한문으로 저술하여 조선에 전래된 책의 이름이기도 하다. 죄악의 뿌리가 되는 교만, 탐욕, 음탕, 나태, 질투, 분노, 탐색을 극복할 수 있는 은혜, 겸손, 절제, 정절, 근면, 관용 그리고 인내의 덕을 의미한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악한 영으로 꼽은, 어리석음, 오류, 무모함, 비겁, 무지, 불경과 교만을 교회에서는 교만, 탐욕, 음탕, 나태, 질투, 분노, 탐색이라 하여 칠죄종으로 가르친다. 이는 6세기 말에 교황 그레고리오 1세에 의해 칠죄종 교리로 정해진 것인데, 2008년에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 ‘칠죄종 교리’가 개인적 문제에 치중되어 있음을 감안하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화 현상이 진행되면서 세상의 죄를 불러 일으키는 새로운 죄악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음을 직시하여, ‘세계화 시대의 신 칠죄종’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환경파괴, 비윤리적 과학실험, DNA 조작과 배아줄기세포 연구, 마약 거래, 소수의 과도한 축재(蓄財), 낙태, 소아성애(小兒性愛)이다.
‘칠죄종’과 ‘신칠죄종’은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죄악의 뿌리이고, 사람들이 이 죄악에 떨어지는 이유는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기 때문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성경적 표현으로는 ‘마귀 들린 자’가 되는 것이다.
‘악한 영 일곱’에 근거하여 라틴 교부 피토의 빅토리누스(Victorinus of Petau)는 요한묵시록의 일곱 영(1,4)과 관련시켜 성령칠은을 가르쳤다. 교회는 이 일곱 은사를 신자들이 성령으로부터 받을 수 있도록 견진성사를 거행하고 있다. 인간의 지성과 관련되는 슬기, 통달, 의견, 지식의 은사와, 인간의 의지와 관련되는 용기, 효경, 경외심의 은사가 그것이다.
슬기의 은사는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세속적인 사랑보다 귀하게 알게 하는 지혜이며, 통달의 은사는 구원의 진리를 인간 지력의 한계 안에서라도 모든 피조물을 통해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지혜이고, 의견의 은사는 선악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도와주는 지혜이며, 지식의 은사는 믿을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을 식별하게 해 주는 지혜이다.
용기의 은사는 신앙생활에 뒤따르는 장애를 극복하는 힘을 주는 것이고, 효경은 하느님께 대한 자녀적 사랑을 증진시킴으로써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달아 인도주의적 처신을 하게 해 주는 힘을 주는 것이며, 경외심의 은사는 이 모든 은사를 뛰어넘어 하느님의 뜻을 경외하게 해 주는 힘을 주는 것이다.
견진성사를 거행할 때 집전자는 신자들에게 안수하며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치며 성령께서 일곱 가지 은사를 내려주시도록 기도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전능하신 하느님, 여기 있는 이 교우들을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게 하시고, 죄에서 해방시키셨으니, 이 교우들에게 빠라끌리또 성령을 보내주시고, 지혜와 깨달음의 성령과, 의견과 굳셈의 성령과, 지식과 효성의 성령을 보내주시며, 주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의 성령을 보내주소서.”
이렇게 교회는 견진성사를 통해 ‘악한 영 일곱’을 쫓아내고 그 대신에 ‘선한 영 일곱’을 부여함으로써 마귀 세력과 대적하고 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사악한 ‘마귀 논쟁’으로 예수님을 공격해 왔지만 그분은 이에 맞서 위와 같은 말씀으로 응수하며 군중을 가르치고 계셨다. 이 와중에 바리사이들로부터 그분에 대한 악소문을 전해 들은 그분의 친척 형제들이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찾아오는 일이 생겼다. “예수님이 마귀에 들려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그분을 말리거나 붙잡아 가려고 왔을 것이다. 이 뜻밖의 사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12,50)라는 말씀으로 의연하게 대처하셨다. 마리아로서는 무안해 질 수도 있는 말씀이었다. 이에 대해 교부들은 이렇게 풀이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반박하기 위해, 악마는 교활하게 그리스도의 육신에 따른 친척들을 데려왔다. 그는 사람들의 눈길을 이들에게 모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 했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 가족을 하찮게 여기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육신보다 영혼으로 가까운 것을 더 귀하게 생각하심을 나타낸 말씀이다(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대 그레고리우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사실보다 그리스도의 믿음 깊은 제자였기에 더 위대하다(아우구스티누스).”
마귀들을 두고 바리사이들과 한바탕 언쟁을 치룬 후에 악소문을 듣고 걱정이 되어서 쫓아온 어머니께서 찾아오셨다면,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가르치시던 일을 잠시 접어두고 어머니를 모셨을 법도 하다. 그런데 예수님으로서는 어머니와 친척 형제들이 왜 이렇게 득달같이 쫓아왔는지를 눈치채고 계셨던 것 같다. 그리고 이 기회를 활용하여 혈육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가족에 대한 가르침의 기회로 삼으시고자 하셨다. 그분의 이러한 행동은 당신의 어머니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분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하실 수 있는 행동이었다.
마리아로서는 우선 당신의 아들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친척 형제들을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예수님께서 멀쩡하게 군중을 가르치고 계신 모습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 것은 물론 나서지도 않으셨다. 때로는 침묵이 웅변보다 나은 법이요, 나서지 않음이 나서는 것보다 더 힘있는 경우가 있다. 지금 이 상황이 그러하다. 그래도 이 상황을 지켜보던 제자들은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모자의 침묵 속 교감이 눈에 어른거린다.
첫댓글 마태오 복음12장과 신부님의 해설 잘 읽었습니다..
찔리고 창피하고 죄송하고 따끔하고...그랬습니다,.
부러진 갈대, 연기나는 심지..악하고 절개없는 세대...저 맞습니다..
악한 말을 하는 악한 사람..저 맞습니다..
그래도 오자는 찾아내었습니다.
두 군데 있었습니다.
1. (12, 22-32)의 해설부분에서 '변함없이'로 시작하는 마지막 문단에서 두번 째 문장입니다.
'자신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이*들을 더욱 열심히 해야 하고 '
교정을 잘 보셨네요. 덕분에 고쳤습니다.
2. (12, 38-42)의 해설부분에서 첫 문장입니다.
'이런 최후통첩과도 같은 비장한 경고의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오자도 꼭 저한테 하시는 말씀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요 ㅎㅎ
그래도 오그라든 손을 성하게 하시는 분께서 저를 사랑하시고 저를 조금씩 성하게 해 주시고 있음을 믿나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어느날 자신이 악의 중심축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나름의 정의로운 마음으로 저항하는 가운데 분노라는 감정에 휩쓸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악령의 하수인>노릇을 했다는 마음이 드네요.
오늘 읽은 갈라티아서 2장 20절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가슴에 담아 예수님의 눈으로 보고 행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