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9시부터 하루 종일이 걸렸다. 그러나 이제부터 시작이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 오후 10시 반, 방배동의 2층 저택으로 돌아온 김가영에게 이성희가 말했다.
“그냥 푹 자.”
이성희는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잇는다.
“전에는 한 달쯤 걸렸는데 요즘은 자연미를 찾는 분위기도 있으니까 일주일로 끝내자.”
김가영은 잠자코 이성희를 따라 2층 계단을 오른다.
“내일은 오후에 워킹 연습, 스피치 연습이야. 두 시간씩 네 시간이다.”
세상에, 모델 나가는 것도 아니고 미스코리아 선발도 아닌데. 기가 좀 막혔지만 김가영은 대꾸하지 않았다. 오늘 아침 일찍 정민옥에게 대전 유치원에 간다고 해놓고는 이곳으로 온 것이다. 이성희는 가영을 끌고나가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대충 들른 곳을 꼽으면 미용실 4시간, 의상실 3시간. 의상실에서 구두에다 속옷, 액세서리까지 10여벌씩 구입했고 마사지를 두 시간이나 받았다. 2층 응접실에 들어선 이성희가 소파에 앉으면서 말했다.
“그럼 푹 자라. 많이 자야 돼.”
“안녕히 주무세요.”
이성희는 푹 웃었다.
“야, 나 포주 아니다. 빚쟁이는 더욱 아니고. 긴장 풀어.”
“네, 언니.”
“넌 곧 익숙해져. 내가 알아.”
이성희의 시선을 받으면서 김가영은 방으로 들어섰다. 당분간은 이곳에서 생활하게 될 것이었다. 저택은 조용하다. 2층 건물로 연건평이 150평쯤 되어 보이는 저택 안에는 가정부 둘과 이성희, 그리고 이제 김가영까지 넷이 거주하게 되었다. 방에 들어온 김가영이 숨을 들이켰다. 정면 벽에 붙여진 거울을 보았기 때문이다. 거울에 김가영의 전신이 비춰져 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여자 같다. 우아하게 파마한 머리가 어깨에 물결치듯이 흘러 닿았고 매끄러운 피부는 윤기가 흐른다. 그리고 크림색 정장 투피스, 목에는 진주 목걸이가 걸렸으며 손에 쥔 가방은 명품이다. 전혀 다른 분위기의 여자가 서있는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춰질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메이크업을 하던 미용실의 김실장이 정말 몇 년 만에 보는 진국이라고 했던가? 의상실의 최사장은 이성희에게 대놓고 얘는 1%라고 말해주었다. 이윽고 길게 숨을 뱉은 김가영이 창가의 소파에 앉는다. 방은 넓다. 안쪽에는 욕실이 딸린 화장실에 냉장고까지 갖춰져 있다. 나는 이제 새 세상으로 나왔다. 내가 택한 일이었으니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새 세상에 나온 대가는 있을 것이다. 이성희가 서로 이용하고 사는 것이라고 했던가? 내가 받은 만큼 내놓은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때 김가영의 머릿속에 윤성일의 모습이 떠올랐다. 얼굴 윤곽은 흐렸지만 목소리는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 순간 갑자기 목이 멘 김가영이 숨을 들이켰다.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이 윤성일이다. 이성희를 만날 결심을 한 순간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윤성일이었던 것이다. 얻었으면 내놓는 것이 있어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가영이 천천히 옷을 벗는다.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서 마치 껍질을 벗는 것 같다.
다가선 박기춘이 눈썹을 모으고 윤성일을 주시했다. 요즘 박기춘은 사흘에 한 번꼴로 병문안을 왔지만 30분을 넘는 때가 없다. 의자에 앉지도 않고 서성대다가 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본래 정서가 조금 불안정한 성격이었는데 요즘은 더 심해진 것 같다. 윤성일이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더 가까이 와, 이 새끼야.”
“왜?”
“너 맞을래?”
아직 붕대도 풀지 않아서 번데기 신세는 여전했지만 목소리는 전과 같아졌다. 눈빛도 더 강해졌다. 금방 주눅이 든 박기춘이 주춤거리고 다가와 몸을 침대에 붙였다. 오후 2시, 병실 안에는 안성댁과 간병인이 남아있다. 둘은 바깥쪽 응접실에 앉아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조금 전에 오명화가 다녀갔다. 윤성일이 입을 열었다.
“너 사람 좀 찾아봐.”
“응? 누구?”
박기춘의 눈이 둥그레졌다. 목소리가 커졌으므로 윤성일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조용히 해, 짜샤.”
“알았어. 그런데 누구 찾으라고?”
그러자 윤성일이 깁스 안에 접어든 쪽지를 꺼내 내밀었다. 쪽지를 펴본 박기춘이 윤성일을 보았다.
“이게 누군데?”
“넌 알 것 없고.”
“전화번호는 맞아?”
“그럼 틀린 번호를 주겠냐? 이 빙신아.”
박기춘이 다시 쪽지를 보았다.
“김가영. 010-xxxx-xxxx. 한양여대 영문과 2년 휴학 (2011년). 23세. 1991년생.”
이렇게만 적혀있다.
“야, 전화가 안돼?”
목소리를 낮춘 박기춘이 묻자 이번에는 윤성일이 화를 내지 않았다. 머리를 끄덕인 윤성일의 얼굴이 가라앉아 있다.
“안돼, 전원을 꺼놓은 지 벌써 일주일이 되었다.”
“이것밖에 아는 게 없냐?”
“그래.”
“그런데 누구야?”
다시 박기춘이 묻자 윤성일이 심호흡 하고나서 대답했다.
“꼭 찾아야할 사람이야.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돼.”
“참.”
눈을 크게 뜬 박기춘이 윤성일을 보았다.
“지난번에 내 전화로 통화를 했던 여자야? 맞지?”
“그래.”
“으음, 어떻게 찾지?”
쪽지를 노려본 박기춘이 혼잣말을 했다.
“심부름센터를 시키는 것이 낫겠는데.”
윤성일이 대답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든 찾으라는 표시일 것이었다.
오늘은 강만규가 집에 일찍 들어왔기 때문에 세 식구가 저녁을 같이 먹게 되었다.
“음, 이렇게 같이 밥 먹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늦게 들어오는데다 외국 출장이 잦은 강만규로서는 감회가 일어나는 표정이었지만 강희나는 담담했다. 이렇게 세 식구만 성북동 저택에 남겨진 것은 2년째가 된다. 그것은 네 살 위인 언니가 동방건설 가문으로 출가를 했고 일곱 살 위인 오빠가 옆집으로 분가 해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희나의 반응이 시원치 않은 것이 서운한지 강만규가 오지희를 보았다.
“희나하고 윤회장집 막내하고는 잘 되는 거야?”
“그걸 왜 엄마한테 물어요?”
대뜸 강희나가 되묻자 강만규는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둥근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라 있다.
“얀마, 니가 삐져있으니까 그렇지.”
“내가 왜 삐져요?”
“내가 척 하면 삼척이다.”
“삼천포로 빠지네 뭐.”
강씨 집안 삼남매 중 아버지한테 이러는 자식은 강희나 뿐이다. 오빠 강동수는 삼호해운 기조실 부장으로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터라 회장인 아버지한테 기가 팍 꺾인 상태였고 언니 강유나는 말대답도 못하는 성품이다. 그때 오지희가 말했다.
“윤성일이가 교통사고로 지금 병원에 있어요.”
“뭐어?”
놀란 강만규가 수저를 내려놓았고 강희나는 오지희에게 눈을 흘겼다. 그러나 오지희가 말을 잇는다.
“고속도로 갓길에서 나오다가 트럭하고 충돌했다고 해요.”
“아니, 언제? 많이 다쳤어?”
“한 열흘이 넘은 것 같은데 괜찮아요.”
“그걸 왜 이제야...”
“당신도 참.”
쓴웃음을 지은 오지희가 힐끗 시선을 주었다.
“그동안 당신이 집에 들어온 날이 며칠이유? 이틀인가? 미국 갔다가 돌아와서 또 금방 중국에 다녀왔지. 그것도 집에는 새벽에 술에 취해 들어왔고.”
“아이구, 그만.”
손을 들어 보인 강만규가 다시 강희나를 보았다.
“병원에는 가봤냐?”
“맨날 가는데 뭐.”
다시 오지희가 대답하자 강희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입맛이 떨어졌다는 표정이다.
“아이구, 시끄러.”
“얼마나 다쳤는데?”
“전치 8주라는데 병신은 안 되는가 봅디다. 밤에 뭐하러 고속도로를...”
“엄마, 그만해.”
강희나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강만규는 못들은 척 대화를 잇는다.
“다행이구만. 그 자식 나한테 인사도 하기 전에 병신이 되면 안 되지.”
대체적으로 집안에서는 부동산 재벌 윤정수의 막내아들 윤성일과의 교제를 호의적으로 보는 상황이다. 그렇게 된 것은 오지희의 동생 오명화의 역할이 컸다. 강만규가 웃음 띤 얼굴로 강희나를 보았다.
“희나야. 아빠 볼에 뽀뽀 한번 해주라. 그럼 용돈 줄게.”
강만규 또한 이런 말을 하는 자식은 강희나 뿐이다. 강희나 앞에서는 어깨 힘을 탁 풀어버리는 습관이 든 것이다.
윤정수가 뜬금없이 병실로 들어섰을 때는 오후 5시경이었다. 그러나 미리 병실 체크를 한 것이 분명했다. 윤정수는 주도면밀한 성품이다. 한번도 즉흥적으로 행동한 적이 없는 인간인 것이다. 병실 안에는 간병인 하나만 남
아 있었는데 박상호가 데리고 나가는 바람에 둘만 남았다. 윤정수가 침대 옆 의자에 앉더니 표정 없는 얼굴로 윤
성일을 보았다.
“너 내가 은행 하는 거 알지?”
불쑥 물은 윤정수의 눈을 보던 윤성일이 숨을 들이켰다. 아버지하고 눈썹이 닮았다. 오늘 처음 발견한 사실이다. 산처럼 솟은 눈썹, 짙고 짧아서 눈썹만 보면 좀 우습다. 형들의 눈썹은 이렇지 않다. 누나는 깎았는지 초승달 모양이고. 윤정수의 시선을 받은 윤성일이 대답했다.
“예.”
대일종금은 자본금 1조에 연수익 2천여 억의 초우량 종합금융회사다. 은행은 아니다. 턱도 없다. 그러나 윤정수는 단 한번도 ‘종금’소리를 한 적이 없다. 언제나 은행이라고 부른다. 서울에 두 개, 부산, 광주, 전주에 각각 지점이 하나씩 있어서 전국에 5개 지점을 가진 ‘은행’이다. 윤성일에게 시선을 준채로 윤정수가 말을 이었다.
“잘 들어.”
“예.”
“그 은행이 자본금 1조, 예탁금 3조, 부채는 하나도 없다. 알고 있지?”
“예.”
신문에도 나서 전 국민이 다 안다. 헛기침을 한 윤정수가 말했다.
“한해 수익금이 2천억이다, 알지?”
“예.”
“그 은행만 자산 가치로 2조 5천억이 된다. 알았냐?”
“예.”
슬슬 짜증이 난 윤성일이 지그시 윤정수를 올려다 보았다. 그 눈빛을 글로 표현하면 대충 이렇다.
“아버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요? 빨리 본론을 말해요.”
그때 윤정수가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렸다.
“그건 네 형들도 다 알아.”
“....”
“하지만 이건 모르고 있어.”
다시 어깨를 치켜 올렸던 윤정수가 아무도 없는 병실 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그 은행 간판 뒤에서 내가 사금융을 하고 있다.”
이제는 윤성일이 숨을 들이켰다. 아버지가 말한 사금융은 곧 고리대금, 사채업인 것이다. 윤정수의 말이 이어졌다.
“주로 대기업을 상대로 담보를 받거나 어음, 당좌수표를 받고 돈을 빌려준다. 한국의 대기업중 내 돈을 안 빌려본 기업이 없을 거다.”
“....”
“지금 유통되고 있는 내 사금융 자금은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
당연히 알 리가 없는 윤성일이 눈만 껌벅이자 윤정수가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6조 5천억 가깝게 된다.”
“....”
“모두 현금이지.”
“....”
“내 부동산이 10조라고 떠들어대지만 그건 속빈 강정이다. 담보, 채권이 들어가 있어서 5조 가치밖에 안된다.”
“....”
“이 사금융 내막을 알고 있는 것은 나하고 박전무 둘 뿐이다. 네 형들은 물론 새엄마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