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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왕조 마지막 어진화사의 길
종로구 와룡동 38-2번지 ‘이묵헌’ , 공주 봉황산 자락을 처음으로 떠나 살게 된 집이다. 1976년 그동안 그린 몇 점의 그림을 들고 찾아간 이묵헌에서 이당선생님은 내 인생을 화가의 길로 이끌어주셨다. 아무도 가지 않는 한국 역사 풍속화의 거장 혜촌 김학수 선생 댁에 살면서 그림을 배웠던 10년을 포함해 20살에 고향을 떠나 50년 동안 서울에서 살게 된 화가로서의 내 삶은 화단의 여러 일들을 겪으며 지금 서초미술협회 임원으로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나 생각해보면 망한 왕조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사이신 선생님은 고귀하고 화려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보다 즐겁지 못한 시간을 감내하신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에 팔대산인(八大山人), 석도(石濤)는 당시 오파(吳派)의 정통을 이어 화단을 장악하고 있던 청초육대가 사왕오운의 산수화나 화조화 그림과는 전혀 다르게 암울한 세상을 살아가는 아픔을 감내하기가 힘들어서인지 승려가 되어 현실의 아픔을 그림에 담아 후세에 남겼다. 당시 망국의 한을 필묵에 싣거나 혹은 회화를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제작에 임한 작가들은 왕실 출신인 이 두 사람 외에도 매청(梅淸), 홍인(弘仁), 공현(龔賢), 정수(程邃), 법약진(法若眞), 예원로, 나목(羅牧) 등이 있다.
그들의 그림은 화단의 주류를 형성하는 오파와 절파의 화풍을 답습하지 않고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는 작품을 남기는 데에서 그쳤고 이후의 화단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거나 확실한 유파를 형성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선 후에는 정부체계가 완전히 달라지고 미술계 활동도 기존의 틀이 완전히 무너지고 서화가들은 전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시대가 되자 대한제국 시절에 왕실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던 도화서 화원들은 일본의 화가들이나 사진사들이 조선총독부의 위세를 등에 업고 왕실의 대소사를 기록하는 역할을 잠식하게 되자 어찌할 수가 없이 민간에 나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각자의 능력대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영정조 시기에 왕의 후원을 받아 금강산과 동해안 명승 그리고 양천과 한양일대의 경치를 강한 필선으로 그려서 조선의 실경산수를 개척한 겸재 정선과 중국의 신선 미인도를 벗어나 우리 고유의 풍속화를 많이 남긴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등이 도화서에서 후세에 끼친 영향은 몇 마디의 필설로 다 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외교 행정 치안 경제 사회 문화를 모두 총독부가 주관하게 된 이후에 왕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고 심지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의해 이토오 히로부미가 죽었을 때 조차도 고종과 순종이 그 역사적 사실을 기뻐하기는 커녕 신문에 애도의 글과 막대한 조의금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처참한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1900년과 1904년 궁궐의 화재로 인해 선대 왕들의 영정이 모두 불타 없어지게 되자 조선의 왕으로서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이 역사적 의무를 가진 고종은 영정을 다시 그려서 모셔야 했는데 실질적으로 많은 권한을 잃었던 고종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에 영정을 제대로 그릴 줄 아는 어진화사는 소림 조석진을 제외하고는 믿을 만 한 화원화가가 없었던 상황이었는데 왕실 궁궐에 선왕들의 어진이 없다면 사직을 이어갈 고종의 입장에서 의무감과 책임감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상황이어서 나중에 이왕직 장관이 되는 윤덕영의 아버지 윤용선을 책임자로 임명하고 소실된 어진들을 다시 그리도록 조치하였다. 윤용선은 먼저 조석진을 중심으로 어진을 봉사할 화가들을 모집했는데 이때 어진을 그리는 데에 많은 도화서 화원과 외부 인물 , 나중에는 일본인 화가들도 참여하게 되고 서양화가들도 어진 제작에 참여하게 된다. 나라를 빼앗긴 고종의 입장에서 선대왕들의 어진 제작에 일본인들이 참여하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았던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어서 총독부의 권유로 자신을 그리러 온 일본 화가들이나 일본 사진사들에게 얼굴을 보이는 것을 피하곤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인지상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죽하면 왕자의 스승인 해강 김규진으로 하여금 일본에 가서 사진술을 배워 오게 했을까.
20세의 인천 출신 청년 김양은은 이런 시기적 배경하에 소림 조석진 심전 안중식이 중심이 되어 후배를 양성하던 서화미술회에 들어가게 된다. 이 서화미술회는 왕실이 해체된 후 총독부가 왕실 인사들과 궁궐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이왕직에서 후원했는데 이때 이왕직 장관이 앞에서 말한 어진제작의 총책임자였던 윤용선의 아들인 윤덕영이었다. 이런 이유로 윤덕영은 왕실과 총독부의 사이에서 관련된 많은 일들을 주관하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하며 특히 화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서화미술회에 입학한 20세 김양은은 고종황제가 심전과 소림에게 의뢰한 어진 제작 문제로 고민할 때 고종의 사진을 모사하여 스승과 고종에게 신임을 받고 후일 마침내 어진을 봉사하게 되는데 이것은 김양은이 서화미술회에 입학한지 채 한 달도 안 되는 시기의 일이었다.
인천 출신의 어린 김양은이 궁궐을 출입할 때 갖춰야할 의상이나 채비가 준비가 되어있을 리가 없는 터라 이왕직 장관이며 아버지에 이어 궁중 어진제작에 관한 일을 주관하던 윤덕영이 프록코트를 빌려주고 심전 안중식이 넥타이 와이셔츠를 사주어 윤덕영의 동생인 윤택영이 차로 궁에 입궐하여 고종을 알현하게 하였다. 당시에 자가용을 소유한 사람은 손으로 꼽을 만 한 세력가였던 것인데 이왕직 장관인 윤덕영 일가는 그만큼 왕실과 총독부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 하던 때였다. 사실 이 모든 것은 1910년 강제로 한일합방조약을 맺을 당시 윤덕영이 순종황제의 비인 순정황후의 큰 아버지로서 순종과 황후를 겁박하여 옥쇄를 빼앗아 큰 역할을 했기에 주어진 권력이었다.
그런 배경에서 어진을 봉사할 때 이왕직 장관 윤덕영이 도움을 주고 이후로도 어린 양은에게 왕실 내외의 고관대작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끼쳤는데, 어린 이당 김은호에게 당시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고 이것은 초기 이당의 화단 활동에 도움이 되기도 했겠지만 종국에 가서는 이것이 이당에게 벗어날 수 없는 초기 활동의 배경이 되어 이당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빌미로 거론되며 피식민지 국민의 오욕을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왕직의 영향 아래 서화미술회는 윤덕영 뿐 아니라 또 한 명의 세도가가 중요한 직책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완용은 서화미술회의 학교장으로 있으면서 가끔씩 서화미술회에 나와서 선생님들과 만나고 본인의 서화에 관한 취미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어린 김양은도 처음에는 그림을 그리는 것 하나 만으로도 서화미술회 시절이 즐겁기만 했는데 고종과 순종의 어진을 봉사하며 선생님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서화미술회의 현실을 알게 되어 한편으로는 어진화사가 되어 어진울 그리는 것 외에도 세상을 보는 눈이 생기고 고종이 독살을 당했다는 소문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비참한 현실에 비분강개하여 3.1운동 때는 등사한 독립신문이며 손으로 그린 태극기를 나눠주며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다가 현장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스승인 심전 안중식 선생을 비롯해 만세운동을 주도한 33인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이때 28살의 젊은 이당은 물론 심전 안중식 선생도 만세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을 색출하려는 일제의 고문을 버티다가 몸에 병이 들어 심전 안중식 선생은 그해 가을에 세상을 떠나게 되고 이당선생은 젊어서인지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온몸이 쇠약해져서 이후 79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폐렴에 시달리게 되었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손병희 선생도 몇 년 견디지 못하고 타계하고 이당에게는 다른 독립운동가들처럼 일경의 감시가 늘 따라다녔다.
3.1운동 이후 대조선 통치를 무단정책에서 문화정책으로 방향을 바꿔 조선미술전람회를 개최하고 서화가들 뿐 아니라 민중들에게도 문화적 혜택을 베푸는 듯 하였다. 그러나 실은 초기에 심사위원들이 모두 일본에서 온 일본인이어야 했고, 참여작가들이 일본작가들 주도로 운영되고 일본화가들의 마당인 듯 하여 조선인 화가들은 문화정책의 혜택은 커녕 오히려 차별을 받고 위축되는 형편이었다. 서화협회 회장이던 심전 선생이 고문으로 옥사한 후엔 서화협회 조직에 공을 들였던 총무 고희동도 이렇다 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조선화단은 선전에서 힘을 내지 못했었다.
스승이 없는 조선 화단은 심전 소림의 제자인 이당과 청전 의재 등이 각자 개인화숙을 열어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특히 이당의 문하에는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선전에서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제자들과 문인 서화가들이 이당의 집에 드나들게 되자 이당에 대한 일제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고 옥에서 나와 만해 한용운의 유심사에서 독립운동의 정신을 지키고 후원하던 것도 더욱 힘들어졌다. 이때 일엽스님의 아들인 김태신이 이당 문하에 그림을 배우러 오고 나서는 그의 손을 빌어 만해의 집에 활동자금을 몰래 전달하기도 하면서 일제의 감시의 눈길을 피하기도 했다. 그는 총독부에서 일하는 일본 유력가문의 아들과 2.8독립선언을 주도했던 조선인 일본유학생 신여성 김원주(일엽스님)의 아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제는 중일 전쟁을 도발하면서 선전 이외에도 여러 전시회를 주최하며 화가들도 멸사봉공하는 마음으로 일제에 동조하는 그림을 출품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당선생은 건강이 안 좋다든지 다른 그림으로도 그에 부응할 수 있다는 등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전쟁과 관련된 그림은 그리지 않고 버텼다.
1936년 후소회가 창립된 다음해부터는 내외 정세가 급격하게 혼란스러워졌다. 선전에서 승승장구하며 활동하던 후소회의 유망주들과 이당 선생 뿐 아니라 모든 예술가 문인 학자들이 전쟁분위기를 지원하기 위해 학교와 언론 그리고 미술전시장까지 강제로 총동원 되어 전쟁을 지원하도록 부역을 강요받았다.
총독부의 중앙정보위원회가 사주해서 전쟁을 후원하는 동요회의 부인들로 결성된 애국금차회가 1937년 결성식에서 금비녀를 갹출 헌납하고 회장인 김복수는 그 사진을 가지고 평소 알고 지내던 이당 선생에게 그려줄 것을 요구했다. 애국금차회의 회장은 앞에서 말한 이왕직 장관 윤덕영의 부인 김복수였다.
그동안 이리저리 피해오던 이당 선생도 이번에는 사진을 가져다 놓고 그려낼 것을 종용하는 총독부 그리고 김복완과 최종 윤덕영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금차헌납도를 제작했고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이것을 대서특필하여 선전에 이용하였다. 이당 선생의 전쟁 관련 그림은 딱 한장 이 그림이 있을 뿐이고 주요한 선생의 전쟁시에 사용된 후지산 풍경을 그린 산수화는 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화가들이나 사진 작가들도 자주 그리고 촬영하던 일반적인 산이라는 소재였는데 이런 그림을 전쟁을 독려하는 주요한의 시에 함께 게재하면서 파문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당 선생은 북경여행을 할 때 유명한 경극배우 매란방의 공연을 보고 스케치도 하고 사진도 구해 와서 작품으로 남긴 것이 있는데 그 일을 알게된 매란방의 후예들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한국의 예술가 이당선생과 관련되는 항일 기록물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중국에서 매란방은 중일전쟁 이후 일본인 앞에서는 정통 경극을 공연하기 싫다며 활동을 접었던 사실을 들어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항일 투쟁의 기수라며 매우 추앙 받고 있다. 이당 선생도 일본에 부역하는 그림을 그리기 싫었다면 매란방의 경우처럼 붓을 꺾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생각하지 않는 무책임한 생각이 아닌가 한다.
이당 김은호 청전 이상범 이도영 오일영 등 서화미술회의 제자들이 일제가 스승 심전 안중식 선생을 고문 핍박하여 옥사하게 만들었던 사실을 보아서는 충분히 화가들의 절필의 명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해 저항하는 의연한 모습으로 모두 붓을 꺾었거나 혹은 중앙무대인 선전을 거부하고 모두 재야에서 조용히 제자들과 그림만 그리며 숨죽이고 살았다면 우리 미술계는 자연스럽게 일본화가들이 선전을 독차지하고 학교 미술과 언론계를 장악하게 되어 일본화의 심각한 영향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고 한국화단은 자연스럽게 일본화단의 아류로 사육되었을 것이다. 어떤 능력을 가진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지역에 치우쳐 자체적으로 활동하는 화가들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그 영향력은 조선총독부의 쓰나미 같은 큰 물결을 막아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니, 내선일체라는 총독부의 시도를 전면적으로 마주하며 조선 화가들의 능력을 함양 발휘하여 중앙 미술무대를 장악했던 활동은 친일이라는 한마디로 함부로 단편적 평가를 내린다면 그것은 하나만 보고 둘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옥살이를 했던 반일분자여서 일제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선전에 참여하고 후진을 키워가며 한국화단에 전통 한국화의 맥을 지켜 오늘까지 이어지게 한 것과, 그 뒤로도 일제의 감시를 피해 남몰래 한용운의 항일 운동에 도움을 주고 당대 최고의 작가로 벌었던 돈을 거의 후진양성과 독립운동에 후원한 것은 한국화단과 미술 교육계 그리고 독립운동사에 두고두고 회자되어야 할 귀한 희생이었다. 평생 그린 2만 여점의 작품 중에 두 점이 확실히 친일하는 내용이라며 철저한 친일이라고 매도하고 있지만 그런 모욕을 감내하는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한국화단을 지켜낸 그 공에 대해서는 예술인들이 오해를 했거나 아니면 동료 화가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남보다 먼저 스스로 덮어버리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식으로 손가락질 하던 행위들, 혹은 내 일이 아니라고 눈 감고 못본 체 하던 그 모든 일들은 아무리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려 해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이당 선생이 어진과 고관대작들, 그리고 사회 중요인사들을 그린 초상화로 번 돈은 옥바라지를 위해 처분한 것을 제외하더라도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으나 이당선생의 삶을 보면 그것을 개인의 사치향락에 사용하지 않고 후진양성과 독립운동에 사용한 것은 누가 보아도 환히 보이는 객관적 사실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가지 상을 받은 바 있다. 일제의 농단을 버텨가며 선전에서 한국화가들의 지위를 함양하고 지켜주었으며 오늘날 화단에 일본화의 영향은 미미한 정도에 그치고 있다. 오히려 현대에 와서 일본과 서양에 유학을 다녀온 화가들에 대해 평가가 후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 모두가 함께 짊어진 참혹한 역사의 참혹한 피해와, 사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민족을 배신하고 사치 향락과 부를 누린 일부 인사들을 구분하지 못하고 부화뇌동하여 스스로 주눅이 들어 서로 손가락질만 한다면 그 누가 옳은 일에 나서서 힘들게 희생하려 할까? 독립운동 유공자 후손들과 친일파의 빈부격차는 이런 것을 제대로 감식하지 못한 우리의 어두운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열가지를 잘 해도 한 가지를 말못하면 나쁜 것이라’는 단순한 사고는 일면 그럴 듯 하지만 우리의 제대로 된 성장과 발전을 방해할 수도 있다.
해방될 때까지 총독부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화단에 이루어 놓은 성과와 한용운의 유심사를 중심으로 지원했던 독립운동의 지원활동을 색안경을 끼고 보지 말고 좀더 객관적이고 정확한 시선으로 널리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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