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
공성을 통하여 무아(anātman)의 가르침은 그 의미가 확장된다. 즉 무아의 교리는 실체로서의 자성이 없는 무자성성(niḥsvabhāvatā)이라고 더욱 심오하게 해석된다. 이 가르침의 칼날은 아뜨만(ātman, 자아·주체의 실재성)의 부정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성이라는 법칙을 통해 모든 존재의 구성 요소(dharma, 법)가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데까지 더욱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닿는다. 일찍이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는 아뜨만이란 용어가 단순히 '자기' 또는 '자아'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자체' 또는 '본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밝혔다. 그래서 그는 "아뜨만이라는 단어는 자성이라는 단어의 동의어"라고 말한 짠드라끼르띠의 견해를 이어받아 '무아'란 '무자성'과 같은 뜻이라고 해석한다. 만약 무아를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중론』 22장 게송3의 전반부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연기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개념이 된다.
자성은 나가르주나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자성이란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다른 것에 의존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자성이란 자기의 본질이고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고 변하지 않는 실체인 셈이다. 그런데 연기인 공성에 의해서 모든 존재가 독자적인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상호의존하고 중연화합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성은 "무아의 부흥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열어서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의 무아설은 아뜨만을 둘러싼 집착을 물리치고 아만을 버리는 것을 수습하여 고통을 소멸하고 열반을 증득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한다. 불교의 이러한 기본적인 입장은 수행론적 색채가 짙은 BCA에 그대로 이어진다. 아뜨만을 둘러싼 BCA의 철학적 논의는 불교내부와 외부의 다른 학파들의 견해에 대한 무아의 가르침을 통한 논박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유부가 아공법유(我空法有)를 주장하는데 반해, BCA는 중관학파의 입장에서 아공법공(我空法空)을 주장한다. 샨띠데바는 우선 아공에 대해 9장 게송57∼78에서 설하면서 유아설을 비판하고, 그 후에 법공에 대해 게송79∼106에서 설하면서 신체 등의 무아를 주장한다.
1)인아설에 대한 비판: 인무아(pudgala-nairātmya)
실체로서의 아뜨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샨띠데바의 주장은 공성을 비난하는 불교내외의 다른 학파들의 주장에 대한 반론 형식으로 전개된다. 그는 유아설 비판의 서론격으로 게송57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만약 나라고 불리는 어떤 실재가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두려움이 생길 것이다. 만약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두려움이 생길 것인가."
공성은 고통을 소멸시키기 때문에 두려움의 고통은 공성을 알지 못하는 자, 다시 말해 진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아집(ātma-graha)과 아만(ahaṃkāra)으로부터 생긴다. 아뜨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ahaṃkāra) 그것에 집착하는(ātma-graha) 것은 '분별에 의해 만들어져 현상으로 나타난' 아뜨만에 대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 아뜨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뜨만에 대한 생각과 집착도 자연히 사라지는 것이다.
쁘라즈냐까라마띠는 위의 게송을 주석하면서 '나'(aham)는 '나라는 관념의 대상'(ahaṃ-pratyayasya viśaya)이지만, 그것은 언어에 의해 가명으로 시설된 것일 뿐 실재하는 대상은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지(知, buddhi)에 의한 관념의 산물이고, 단순히 명칭으로 분별되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śabha-vikalpa-mātra). 따라서 '나'라고 하는 것은 그 어디에도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의 고통이 생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는 출처를 밝히지 않은 문헌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나'(aham)는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것'(me)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에게는 두려움이, 지혜로운 자에게는 두려움의 소멸이 있다."
연이어 게송58∼60에서 샨띠데바는 신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관찰해서 신체의 각 부위와 기관들, 그리고 안식(眼識) 등의 여섯 가지 의식도 '나'가 아님을 강조한다. 신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뿐만 아니라, 요소들의 집합체도 '나'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라고 하는 것은 사유의 분별일 뿐 실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 확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나라는 관념의 대상'은 실제로는 대상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다.
<『입보리행론』의 보리심론 연구/ 이영석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