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題
消滅期 漢文文化의 文化史的 位相
-杜南文集에 부쳐鄭 洋
一. 머리말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당연한 듯이 겪고 있는 한문문화의 단절은 그 가속화된 단절의 속도만큼이나 심각한 문화적 공백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 골동품 가게 같은 데서 무심히 종이값으로 팔리기도 하는 한적漢籍들은 그러한 문화적 단절의 깊이와 그 공백을 실감나게 한다. 그 한적들은 지금도 사대부 집안에서만이 아니고, 이 나라 방방곡곡의 민가에서도 끊임없이 쏟아져나오고 끊임없이 종이값으로나 팔리면서 사라져가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의 한문문화는 그 대부분이 사대부 문화를 중심으로 논의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양반문화가 평민화하던 조선 후기에 이르러 평민지식층의 활약이 우리 문학사에 괄목할 만한 자취를 남기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평민지식층들의 한문문화는 호남지방에서 한문문화 소멸기 직전만 해도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 해학海鶴 이기李圻, 간제艮齊 전우田禹, 유제裕齊 송기면宋基冕 같은 초가草家 출신의 거유巨儒들을 배출하기도 했고. 흠제欽齊 최병심崔秉心, 고제顧齊 이병은李炳殷, 현곡玄谷 유영선柳永善 같은 이들에 의해서 그 사상적 깊이와 예술적 품격의 조화를 우리 문화사에 갈무리하기도 했다.
평민지식층에 의해서 축적된 평민들의 한문문화는 사대부 중심의 그것과 비견해 볼 때 양반문화를 닮아가려는 집념이 큰 줄기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평민지식층의 현실주의적 세계관을 바탕삼아 철학적 깊이와 신선한 현실감각과 예술적 품격을 유지하고 있는 예도 오히려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문문화 소멸기인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조선 후기에 대두된 평민문화의 맥脈이 이어지지 못한 채 근대화의 그늘 속에 무심히 묻혀버리고 있다. 평민지식층에 의해서 형성된 한문문화가 그 양적인 면에서나 철학적 깊이나 문학적 수준에 있어서 가볍게 여길 만한 대상이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그 맥이 끊기어 무심히 사라지는 현실은 그대로 방치해둘 수만은 없는 문화사적 위기감마저 자아내게 한다.
二. 意義
우리는 우리나라 한문문화의 소멸기에 평민지식층에 의해서 형성 유지되었던 한문문화를 정리 복원하는 표본을 보임으로써 조선 후기 평민문화의 맥을 찾아 그 문화사적 위상을 확인하고 나아가 우리나라 문학사 연구의 지평을 확대하고자 두남杜南 오연호吳然鎬 선생이 유고로 남긴 두남문집杜南文集을 주목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 책의 지은이 두남이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김제군 성덕면 대목리 탄동부락, 호남평야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전라북도 김제는 드넓은 금만평야를 껴안고 있는 호남 농경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양반문화를 닮아가고자 했던 평민들의 꿈이 이 나라에 보편화되었던 탓에 우리나라에서 크게 씨족을 형성하고 있는 성씨들마다 몇 십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명문거족 아니었던 집안이 거의 없는 것처럼, 김제에도 큰 씨족을 형성하고 있는 성씨마다 양반 아닌 집안이 거의 없지만 따지고 보면 평민출신 아닌 집안 또한 거의 없을 것이다. 민중적 해학諧謔의 달인 정평구鄭平九(1590년대 임진왜란 때 비거飛車를 발명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고 함.)의 기상천외한 행적들이 전설로 남아 있는 고장, 한말에 이르러 위의 석정 이정직(1841-1910)이나 해학 이기(1848-1909), 유제 송기면(1882-1956) 같은 서민 출신의 거유巨儒들이 배출될 만큼 김제金堤는 다른 지역에 비하여 평민지식층에 의한 평민문화가 유난히 두텁게 자리잡은 고장이기도 하다.
두남문집은 그 김제를 중심으로 한 한문문화 소멸기 문화활동에 관한 여러 기록들이 시나 산문으로 정리되어 있다. 여러 차례의 시회詩會, 백일장白日場, 수연晬宴, 장례葬禮, 제례祭禮, 그리고 향교와 서원 활동 등을 통하여 김제 군내의 여러 명소나 마을뿐만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여러 지역(무주茂朱, 진안鎭安, 남원南原, 장수長水, 금구金溝, 예산禮山, 순창淳昌, 자인慈仁, 부여扶餘, 서천舒川 등)의 평민지식층들과의 교류관계가 그의두남문집에는 폭넓게 담겨 있다.
2.두남문집의 지은이 두남의 생존연대(1902-1983)가 한문문화 소멸기에 해당한다. 그는 김제 출신 유학자들의 막내에 해당하여 한문문화의 최후를 장식한 것이다.
3. 그는 신교육을 받은 일이 없고. 이렇다 할 학맥이나 학력이 없다. 마을의 서당 훈장이었던 부친 지산芝山 오재희吳在熺(1864-1943)로부터 한학을 배운 것이 그의 학맥과 학력의 전부다. 지산 역시 유고로 지산시집芝山詩集 을 남길 정도의 한학자였다. 두남은 석정 이정직(김제군 백산면 상정리)이나 해학 이기(김제군 성덕면 대석리) 유제 송기면(김제군 백산면 석교리) 같은 이들과 매우 가까운 지역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친 지산과 함께 그들과의 학문적 영향이나 교류가 거의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간제艮齊 전우田禹(1841-1922)가 후학들과 함께 지내던 부안군 동진면 계화도도 거기서 그리 멀지 않았지만(20km), 간문艮門과도 또한 특별한 학문적 인연은 없었다. 다만 간제가 쓴 오씨 문중의 부인 행록이 있을 뿐이다.
4. 그는 벼슬살이와는 인연이 먼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기껏 해방 후에 면장을 했지만 다시 농부로 돌아가 논밭을 손수 가꾸었다.
이 문집은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그 지은이가 ⑴생몰지가 호남 농경문화의 중심지이며, 평민의 한문문화가 보편화되어 있는 지역이고, ⑵생존연대가 한문문화의 소멸기의 마지막 단계이고, ⑶학맥이나 학력이 없어 평민적 순수성을 지녔고, ⑷직업이 평민적 삶을 대표하는 농업이었다는 점 등이 소멸기 평민지식층의 한문문화 전개양상을 헤아리고자 하는 데에 부합하는 여건들을 지니고 있다.
三. 著者
1. 經歷
두남은 1902년(광무6년, 임인) 3월 28일, 전북 김제시 성덕면 대목리 301번지에서 지산 오재희(1864-1943)와 이천서씨利川徐氏(1863-1946)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39세에 난 늦동이였다. 그는 16세 때(1918) 당시의 조혼 풍습에 의하여 한 살 위인 풍천임씨豊川任氏 녹주綠珠(1991-1974)와 결혼하여, 18세 때(1920)에 첫 아들을 낳고, 20세 때(1922) 같은 동네 183번지로 분가하여 호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1952년 우리나라 최초 로 실시한 지방자치제 선거에서 향리인 성덕면장에 당선되자 성동초등학교聖東初等學校를 개교시켰고 이후 자치제가 폐지되고난 후 관선면장을 역임했다. 1960년대에는 만경향교萬頃鄕校 전교典敎와 유도회장儒道會長, 성균관成均館의 전교典敎와 전의典儀 등을 역임하며 효자 표창을 받았다. 1950년대에서 70년대까지 동진수리조합(현 동진농조) 평의원을 지냈다. 1983년 9월17일 사망하니 향년 81세였다. 그의 장례에는 면민이 모두 참석했다는 과장이 있을 정도였다 한다.
2. 家系
두남은 해주오씨海州吳氏 진사공進士公 정설廷說의 18세손이다. 그의 선대에 관료로 조선실록(성종21)에 등장하는 인물은 그의 14대조 병마우후 자신自信과 13대조 장령 종손從孫뿐이지만, 16대조 희철希哲은 전주부윤이고, 15대조 진선進善 은 전라병마절도사이었다. 그 이후 12대조 석정錫楨은 통덕랑이고 11대조 윤성允成은 선릉참봉이고 10대조 응문應文은 부장이었다. 그의 9대조 봉사 대립大立이 광해군의 폭정을 피하여 만경현에 낙향해 있다가 이괄의 난(1624) 때, 두 아우를 이끌고 공주로 왕을 호종한 공로로 진무원종일등공신振武原從一等功臣으로 기록된 정도이다. 철종 5년(1854) 대립의 정려旌閭 건립에 관한 예조입안禮曺立案에 의하면 대대로 무관 출신 집안이며 당시에 ‘자손이 영락하여 바닷가에서 낙담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가 두남의 할아버지 시대이다. 이로 미루어 벼슬이 점점 말직에 머물다가 그조차도 후대에 끊겨, 그의 가문은 당대에 양반의 대열에 서지 못하고 집안은 몰락한 듯하다. 진사공의 후예로 문과에 급제한 이로 이웃 정읍출신인 5세손 효부孝夫와 6세손 익념益念의 부자가 조선방목과 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나 방계이다. 그러나 그 집안 역시 이후 벼슬이 없이 퇴락한 듯하다.
3. 敎育
그의 부친인 지산은 당시 상당한 지식인인 듯하다. 지금, 당시(1880년대-1920년대)의 서적으로 千字文(白首文)으로부터 , 童蒙先習, 四字小學, 四書三經, 漢文學(唐詩, 聯珠詩 , 古文眞寶 외), 우리나라 한시(石北詩集 외), 운서(全韻玉編 , 奎章全韻 ), 중국역사( 統監,史略 , 史要聚選 , 歷朝捷錄 외), 우리나라 역사( 東國文獻 외), 생활지식( 事物類聚 , 魚鴈集 , 昭喩篇 , 喪禮備要 , 簡牘精要 , 行禮 , 方藥合編 외), 불경( 玉樞寶經 , 天地八陽經 ), 소설( 剪燈新話 , 沈淸傳 ), 신학문( 外國總叙 ) 등이 목판본, 활자본, 필사본으로 170여권이 남아 있다. 이 책들은 지산의 소유이거나 그 아들인 두남과 손자인 양탄陽灘(해선海鮮 1908-1941)의 필사본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사망하거나 집을 떠나 있을 때 여러 궤에 가득하던 책들이 벽지나 베게속이나 변소의 휴지 등으로 사용하여 모두 사라졌고 그나마 남아 있는 이들 책들 은 두남이 따로 보관한 것들이다. 후손의 기억으로는 1900년대의 지도와 상해임시정부에 독립군군자금을 낸 증서도 있었다 하나 중간에 소멸되었다. 그는 부친이 별세했을 때 책궤를 상속받고 싶었겠지만 장자상속의 법과 예를 어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산 역시 아마도 당시 호남 유학을 대표하는 간재 전우 등과 교유하거나 유학을 배우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 시절에는 술서에 심취되어 있었지만 후에 이들 서적을 불태워버렸다 한다. 어느 뚜렷한 학맥을 이은 것이 아니라면 오로지 독학으로 이룬 학문적 성취인 듯하다. 그는 이 지식을 바탕으로 인근의 아동들을 모아 그의 집에 서당을 차렸다. 두남은 그의 아들이자 그의 제자로 유학,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 한시, 박물학, 불경, 그리고 신학문조차 익힌 듯하다. 두뇌가 명석하여 그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딴 학생이 한 달에도 외우지 못하는 경서를 단 며칠 만에 익혔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노인이 되었을 때까지 그보다 나이 많은 선배조차도 농으로나마 그에게 반말을 할 수 없었다고 하니 그 천재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두남의 조카는 그에게서 현대 수학을 배웠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만큼 그는 구학문뿐만 아니라 신학문에도 밝았다. 이 모두가 독학의 소산인 것이다.
4. 治家
두남보다 6년 연하인 종손 양탄도 지산에게서 배웠다. 두남에게는 양탄이 집안의 장손으로서 조카이면서 친구인 양 유독 각별했던 듯하다. 이 조카가 학비가 없어 학교(정읍농고)를 자퇴하려고 하자 자신의 집을 팔아 조카의 학비를 대납하고 종산의 산직이 집 옆에 있는 단간방에 잠시 살았다고 한다. 이는 산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려는 뜻도 겸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당시 그의 학문의 성취가 있었을 것이다. 1974년, 그의 일기장의 소유자는 ‘두남산방杜南山房’으로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산을 좋아했고, 말년에는 아예 산방에 칩거하려는 의도를 가졌을 성싶다. 두남은 자신의 고향인 성덕면의 민선 면장이 되자 이미 면의 직원으로 있던 둘째아들을 퇴직시키고 이 조카의 아들을 대신 채용했다. 물론 부자간의 상피相避 때문이기도 하고, 집안의 장손을 키우기 위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조카와의 우정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그 장손이 공무원을 그만두고 정부미 도정공장을 인수할 때도 두남은 무이자로 쌀 100여 가마를 빌려주기도 했다.
그는 160여cm 키의 과히 크지 않은 이였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강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의 형인 진호振鎬(1989-1964)는 그보다 13세나 위의 기골이 장대한 이였다. 그러나 형의 집안에 분란이 있으면 그는 형에게 조용히 말씀드려 이를 해소했다. 한 조카가 도박을 한다고 채찍질까지 했으나 밤에 몰래 나가는 것조차 어쩔 수가 없었다. 마침내 재산을 망치고 그의 아들이 대학에 진학할 수 없게 되자 그가 종손의 학비 거의를 내면서 위아래 모든 자식과 조카에게 그 일부를 대게 하여 사범학교 연수 과정을 마치게 해서 그 조카가 살림을 이끌게 했다. 그는 집안의 모든 제사에 꼭 하찮은 재물이라도 사가지고 모든 자손이 참여하게 했다. 이는 책임과 참여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자신의 집뿐만 아니라 큰집조차도 다스렸다.
그는 이미 퇴락한 양반집안으로 당시에는 양반도 아니었지만 양반인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근면 성실한 농사꾼이었다. 한때 집안이 어려워 산에 칩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기도 했지만, 형의 집안이나 그의 집안이나 이 근면 성실한 농사로 나름대로 상당한 부를 쌓아가고 있었는데도 일기를 보면 60이 가까이 될 때까지 머슴을 거느리고 함께 작업했다.
5. 爲先
그는 아버지 지산의 교훈을 충실하게 따른 것 같다. 지산은 「계자시戒子詩」에 ‘處世行身最爲大 先知爲國爲宗忱 待親敬長常和氣 敎子養孫不納淫 可使文房通古史 豈憂富貴戴華簪 戶庭優劣莫如忍 萬事隨機無二心(처세에서 행동 가짐을 최고로 여겨야 한다. 나라를 위하는 것이 집안을 위하는 것이니 정성을 다하라. 어버이를 모시고 어른을 공경할 땐 언제나 온화한 기운으로 하라. 음란을 피하도록 자식을 교육시키고 손자를 양육하라. 항상 책을 가까이 하고 옛 역사를 통찰하면 어찌 높은 벼슬과 부귀 공명을 걱정하겠는가. 집안마다 우열이 있게 마련이니 남의 것을 시기하지 말아라. 세상만사는 기에 따르니 두 마음을 가져 기를 흩으러 뜨리지 말라.)’라 했고, 그의 임종시엔 ‘不忘爲先 不怠敦睦위선을 잊지 말고 화목을 게을리 하지 말라.’이란 가훈을 남기기도 했다. 지금 남아 있는 그의 일기장은 1967년, 1970년, 1975년 등의 3책인데 모두 한문으로 된 메모 형식의 일기이다. 그 중 1967년분에 그의 선고인 지산 묘에 성묘한 기록이 12회나 된다. 이는 한 달에 한 번 꼴이다. 이때는 선고가 별세한 지 24년 후이며 묘소는 50여리나 되고, 교통편 역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이를 굳이 효성의 발로라 하면 그의 효성의 깊이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이다. 두남의 「묘갈명墓碣銘」에 ‘선고가 별세하자 편도 50리 길을 초하루 보름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그것도 걸어서 3년 동안 성묘했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혹 가식이 있을 수 있으리라 상상할 수 있겠으나, 이 일기를 보면 그의 행위는 순수한 효성의 표출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일생 동안 위선을 위해 산 듯싶다. 그는 17대조인 진사공과 그를 위시로 한 진사공파의 11대조까지의 묘지가 있는 전북 김제시 금구면 지장동에 퇴락한 옛 건물을 허물고 부안 갑부의 재실을 사들여 필경재必敬齋를 세운 것을 비롯하여 선산에 4개의 재실을 중수하거나 건립하고, 7대조 이하는 퇴락한 묘지를 새로 새웠고, 족보도 두 번 발간했다. 이는 그만의 재산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성실과 카리스마로 문중을 추스린 결과이다.
6. 牧民
두남은 1952년에 해방 후 최초로 실시된 지방자치제에 의한 면장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선출된다. 그만큼 그는 이미 신임을 쌓았던 것이다. 그는 면장에 취임하자마자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 면내에 초등교육기관으로 유일한 성덕국민학교(초등학교)를 분교시켜 성동국민학교를 설립했다. 우선 일제 때 쓰던 창고를 뜯어다가 임시교사를 만들어 이를 기정사실화시켰다. 이 때문에 허가없이 정부 재산을 훼손했다고 상당한 고초를 당했지만 쓸모없이 방치하느니 공익에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는 통학거리 때문에 면내의 취학아동이 아예 취학을 포기하거나, 그들을 김제와 만경에 빼앗기는 폐단을 막기 위한 임시조치였다. 동진농조 평의원으로 있을 때에도 이해당사자인 주민의 편에서 모든 편의를 제공했다.
그의 1967년 일기에는 지인知人이나 그 부모 조부모까지 소대상小大喪에 참석한 기록이 30여 차례에 이른다. 그는 면장 이전에도, 재임 때에도, 그 이후에도 타인의 애사哀事에 적극 참여하여 부조함은 물론, 예법 등을 낱낱이 조언하여 차질이 없게 했다. 그만큼 그는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고 그만큼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지인의 기일忌日을 기록한 그의 비망록에는 200여 명의 이름이 사망 날짜순으로 올라 있다.
7. 儒學
그는 1950년대부터 20여년간 만경향교 전교와 유도회장을 지냈다. 그 동안 퇴락한 향교재건에 힘썼다. 1969년 일기에 거의 날마다 입교, 분향, 공사감독, 회의 등이 기록되었다. 홍살문을 새로 세우고, 교지를 넓히고, 교답을 사들이고, 담장을 새로 쌓고, 보수공사를 했다. 석전제釋奠祭에는 군수, 면장, 유림들이 모두 참석하게 했고, 이제까지 남의 일로만 여기던 주민들의 참례를 권장했다. 군내, 도내, 충청도 향교와도 교통하면서 서로의 위상을 향상시켰고, 성균관의 전의도 겸했다. 전북향교재단 전교에 추대되었으나 사양했다. 그는 향교뿐만 아니라 인근 서원의 장의掌儀를 맡아 그 재건에 힘을 다했고, 백석서원지白石書院誌를 발간했다.
四. 構成
이 문집은 두남이 자필로 쓴 수서본 시집 풍인風靭 (1951.4), 비망록備忘錄 (1954.4.) 망비록忘備錄 (1966.1) 등을 제題하지 않고 문집 형태로 가편집해 놓은 유고遺稿 1, 2, 3, 4, 부록의 모두를 정리, 번역한 것이다. 이밖에 제반통답신초안諸般通答信抄案 (1975.1)과 낱장으로 된 유고, 그리고 그가 저술한 최신식행례最新式行禮(己未三月初旬日 著作兼刊入者 後蓮 吳命鎬) , 최신식행례 정선제가어最新式行禮 精撰諸家語 (己未冬11.19. 函丈 琹史門下生 後蓮 吳命鎬 謹著) 라는 수서본이 있지만 미쳐 번역하지 못했다. 전자는 그의 개인적인 편지이고, 후자 두 책은 1919년, 그의 나이 17세 때 편찬한 책으로, 여러 서식에 자신의 글을 몇 편 삽입해 놓은 것이지만 그의 당돌함과 조숙성을 보여준다. 후련後蓮은 그의 초기 호이고, 명호命鎬 는 그의 자字이다.
杜南文集 은 시와 산문으로 분류하여 편찬했다. 이는 통상 오늘날의 분류에 따른 것이다. 선인들의 문집에 산문이란 용어는 잘 쓰이지 않는데도 굳이 이 명칭을 사용한 것은 현대감각에 맞추기 위한 것도 있지만 두남이 남긴 산문에 해당하는 글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우선 이를 하나로 묶고 난 다음에 세분했기 때문이다. 이 문집에 수록한 작품은 시 202편, 산문 27편으로 이를 합하면 모두 229편이 된다.
시는 형식상의 분류가 아닌 내용상의 분류를 택했다. 시의 거의 전부가 7언율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7언절구七言絶句로 「을미제석乙未除夕」, 「병신원조丙申元朝」, 「안의사 1.2.3安義士. 又. 又」. 「대우방수천리大雨方數千里」, 「증김죽헌죽병운1.2贈金竹軒竹屛韻.又」, 「방최수정거사訪崔守亭居士」, 「방두무동은사최수정訪杜舞洞隱士崔守亭」, 「사월팔일향교임원향현충사도중음 四月八日鄕校任員向顯忠祠道中吟」, 「향교임원전남광광도중음 鄕校任員全南觀光道中吟」, 「만임면장2.3輓任面長又.又」, 「만김처사2輓金 處士又」, 「외삼문상량기外三門上樑記」, 「일신문상량기日神門上樑記」등 16편, 5언율시로 「방두무동최수정최운제訪杜舞洞崔守亭崔雲齋」 한 편이 있을 뿐, 더구나 5언절구나 부賦 등 기타의 시체는 한 편도 없다.
그 문집에서 시를 내용상 유상遊賞, 술회述懷, 풍물風物, 독서讀書, 교유交遊, 수연晬宴, 만사輓詞, 축성築成, 시사詩社 등 9부로 나누었다. ‘유상’은 노닐면서 풍경을 감상한 바를 쓴 시로 「상춘賞春」 등 39편, ‘술회’는 마음에 품은 바를 읊은 시로 「을미제석乙未除夕」 등 37편, ‘풍물’은 세상 사물에 대한 느낀 바를 그린 시로 「기차汽車」 등 6편, ‘독서’는 독서 후의 감상을 적은 시로 「독백범추모록감제讀白凡推慕錄感題」 등 22편, ‘교유’는 친구의 집을 방문하거나, 친구와 함께 유적지를 관광하면서 우정을 나눈 시로 「증김죽헌죽병운贈金竹軒竹屛韻」 등 22편, ‘수연’은 친지의 회갑일에 덕담을 준 시로 「하성재유우수연賀醒齋柳友晬宴」 등 21편, ‘만사’는 친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심정을 기술한 시로「만임면장輓任面長」 등 14편, ‘축성’은 선인의 업적을 기리는 조형물이나 건축물에 관한 시로 「모유재낙성운慕裕齋落成韻」 등 21편, ‘시사’는 시회에서 창작한 시로 「하산시사蝦山詩社」 등 20편 등이다. 이들 중에서 솔직한 개인 감정을 보일 수 있는 시는 유상, 술회, 풍물, 독서 등일 것이다. 그 외의 교유, 수연, 만사, 축성 등은 그 속성상 덕담을 할 수밖에 없고, 시사는 그때의 모임의 성격이나 의도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또 그런 시들은 스스로 택한 운韻이 아닌 제시된 운에 맞추어야 하므로 자발적인 창작에 저해를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런 시들이 많은 것은 당시 한문학이 마지막을 고할 때 선비들이 느끼는 소외감 때문에 오히려 그들만의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산문은 서書, 기記, 서발序拔, 제문祭文, 묘표墓表, 향교통신鄕校通信 등 6부로 분류했다. ‘서書’ 는 편지로 「남산서원중건추진위원회경고문南山書院重建推進委會敬告文」 등 2편, ‘기記’ 는 사적을 적은 「필경재기必敬齋記」 등 3편, ‘서발序跋’ 은 책의 서문이나 발문으로 「진사공묘각건축비헌성방명록서進士公墓閣建築費獻誠芳名錄序」 등 6편, ‘제문祭文’ 은 「남산서원중건개기축문南山書院重建開基祝文」 등 3편, ‘묘표墓表’는 「참봉남경오공묘표參奉南耕吳公墓表」 1편, ‘향교통신’ 은 딴 향교의 건의에 답한 편지로 「답통-무주향교答通-茂朱鄕校」 등 12편이다. 편지글은 개인적인 것은 아직 미처 정리되지 않아 제외했다. 향교통신도 역시 서書에 속하겠지만 비교적 분량이 많고 그들만의 공통성이 뚜렷하기 때문에 따로 분류했다.
이들 글들은 순한문으로 된 문장, 한문에 현토한 문장, 그리고 한주국종의 문장 등 다양한 형태로 씌어 있어 이미 우리말이 대세를 이룬 당시 한학자의 갈등을 엿볼 수 있다. 부록의 구결까지를 합하면 국어와 한문의 쓰임에 의한 4개의 문체가 이 문집에 나타난다.
五. 附錄
이 문집은 두남과 직접 관련이 있는 타인의 글을 부록으로 실었다. 그 1부는 두남의 원시를 차운次韻하여 그를 찬양한 시들이다. 여기에서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그의 집에서 열린 두남장 청화회에서 두남장 주인杜南庄主人 이 읊은 「두남장청화청화회음杜南庄淸和會吟」의 운자인 晴,聲.營,輕,驚으로 두남을 찬양하여 지은 시이다. 이러한 시회는 당시의 관례인 듯싶다. 흔히 환갑잔치에 초대되어 주인이 지은 시의 운자에 맞춰 주인을 찬양하는 시를 짓거나, 따로 시회를 열거나 하여서 운에 맞춰 지은 시를 읊거나 했을 것이다. 두남의 수연이나 시사에서의 시도 그런 것이다.
이러한 시에서 김삿갓이 아닌 바에 주인을 풍자하거나 모욕하는 시가 나올 리는 없다. 두남이 환갑에 읊은 「육십일생조六十一生朝」에 나오는 ‘면종아배勉從兒輩’는 혹시 이런 무리와 어쩔 수 없이 어울릴 수밖에 없는 역겨움을 탓한 것인지도 모른다. 두남 역시도 그런 시회를 열어 찬양을 받는다. 이 시회에서 얻은 시가 41수이다.
그리고 여기에 「지장동 필경재 낙성운芝庄洞必敬齋落成韻」 9수와 「혹서김우휴주내방酷暑金友携酒來訪」 3수 등의 차운을 덧붙였다. 그러므로 모두 53수이다. 이런 축시가 특별한 문학적인 가치나 당사자의 편모를 엿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 하나 하나를 모아보면 공통분모를 추출하여 두남의 인간의 면모를 어렴풋하게나마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 2부는 두남의 비문이다. 하나는 생전에, 하나는 사후에 씌어진 비문이다. 이 비문을 쓴 김제의 황희경黃熙炅과 무주의 하천수河千秀는 당대의 이름난 유학자요 한학자였다. 그러므로 멀리 무주까지 찾아가 그 비명을 받은 것이다. 이 비명의 하나는 묘갈명墓碣銘이고 하나는 유적비명遺蹟碑銘이다. 유적비는 만경유림에서 정문 건립을 계획하고 받은 것이다. 이런 비명 역시 찬양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친교가 있는 분들이라 나름대로 알고 있는 사실을 기록했으리라 여겨진다. 또 두남의 공적은 널리 알려진 바이기도 하다.
그 3부는 두남의 9대조인 퇴암退庵 오대립吳大立의 시 8편과 그의 시에 화답한 아우 둘의 시 한 편씩, 그리고 그의 오공충효정려기吳公忠孝旌閭記와 이 정려를 건립한 예조의 입안禮曺立案 등으로 구성되었다. 퇴암공은 이 집안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조상인 듯하다. 퇴락한 양반일수록 조상을 내세우게 마련이다. 더구나 조정에서 세운 정려는 자랑할 만하기도 하다. 그 정려가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이 예조입안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유림에서 임금의 행차를 노려서 상소문을 올리고, 이에 임금은 예조에 조사를 명하고, 예조는 조사계획을 세워 임금의 재가를 얻어 관찰사에게 타당유무를 조사하여 보고서를 올리게 하고, 관찰사는 증빙서류를 갖춰 후손과 상소인, 그리고 증인 등의 출두를 명하여 증언을 들어 예조에 보고하고, 예조는 이 조사서와 사적을 검토하여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려 왕의 재가를 받아 국가의 예산으로 정려를 짓고 후손들에게 일정한 혜택을 주도록 관찰사에게 왕명으로 명령을 내린다. 이만하면 자랑할 만도 하다. 특히 이 입안은 구결口訣로 현토하고 있다.
그 4부는 두남의 부친인 지산공芝山公의 시 68편과 그의 비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두남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두남의 효행도 그러한 아버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골의 영락한 집안에서 문자를 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일 텐데 가까이에서 그를 접했던 일가의 비문에 의하면 출중한 인물이었던 듯싶다. 이 비문은 보통 비문과 같이 그 주인공을 미화시키지 않았다고 다짐까지 하고 있다.
지산의 유고는 앞뒷장이 떨어진 채로 2권이 발견되었다. 이로 미루어 훨씬 많은 시를 썼으리라 여겨진다. 두남이 소장했던 도서 속에는 작자를 알 수 없는 시집들이 몇 권 있다. 고증이 끝나면 지산의 유고일 수도 있는 것들이다.
이 부록에 실린 글은 모두 136편이다. 두남의 작품 229편에 이 136편을 합하면 이 문집에 수록된 작품수는 전부 365편이다. 우연히 1년의 날수와 맞다.
六. 文集에 나타난 作家의 삶의 모습
두남문집에 수록된 시문의 성격이나 그 문학적 가치는 이 문집 발간을 계기로 이 방면의 전문가에 의하여 평가될 것이지만 우선 이 문집에 보이는 작가의 삶의 모습을 살피기로 한다.
첫째, 두남의 달관적인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삶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가 환갑을 맞이하여 쓴 「육십일생조六一生朝」이다.
晩生恭在海州人 늦동이로 삼가 해주 오씨 집안에 태어나
虛負桑蓬六十春 인생을 헛살다가 환갑의 봄을 맞았다
勉從兒輩設斯席 어리석은 무리와 섞이다가 이 자리를 베풀어
還愧賓朋賀晬辰 친구들이 생일을 축하해주니 다시 얼굴이 붉어진다
風樹年深惟見日 해마다 고달픈 삶은 깊어가지만 오직 오늘 날짜만은
棣花氣暖足怡神 친구들의 우정인 양 앵두꽃은 피어 마음이 흡족하다
書在床頭田在野 책상에는 책이 있고 들에는 논밭이 있으니
不聞寰宇惹氛塵 우주의 섭리가 어지러운 기운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六一生朝 환갑을 맞아」 전문
이 시에는 그의 집안, 겸손, 세태, 우정, 직업, 그리고 인생관 등이 깃들여 있다. 그는 모친이 39세에 난 늦동이로 해주오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恭’으로 부모와 집안에 감사의 정을 표한다. 그는 누구나와 같이 공명을 추구했으나 얻은 바가 별로 없이 기껏 벼슬이라고는 면장으로 그쳤다. 그는 세속에 물들어 하기 싫은 일도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면종아배勉從兒輩’로 그 삶을 표현한다. 그러나 친구간의 우정으로 그 일을 잊을 수 있다. 이로써 ‘체화기난棣花氣暖’이란 언어를 택할 수 있다. 마침내 그는 ‘서재상두전재야書在床頭田在野 불문환우약기진不聞寰宇惹氛塵’의 인생관을 피력한다. ‘책상에는 책이 있고 들에는 논밭이 있으니 우주의 섭리가 어지러운 기운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 세상이 아무리 혼탁하고, 바라는 바를 성취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고, 자연의 섭리는 결코 어지러운 것이 아니다.
이를 널리 알려져 있는 로버트 브라우닝의 「피파의 노래」와 비교해 보자. ‘때는 봄/ 날은 아침/ 아침은 일곱시/ 언덕 기슭엔 이슬 진주가 맺혀 있고,/ 종달새는 날고/ 달팽이는 가시 위에,/ 하느님 천국에 계시니-/ 온 세상은 평화로워라.’ 이 노래는 1년 중 단 하루만 휴일을 가진 공장 직공 피파가 부른 노래이다. 여기에서 천진난만한 소녀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의 감정이다. 그리고 피파는 지쳐서 고단한 잠을 잔다. 단지 이는 무엇을 모르는 어린이의 변화무쌍한 한순간의 정서일 뿐이다.
그러나 어른은 그래서는 안 되고 그렇지도 않다. 아마 대부분의 어른은 인생에 대한 불만 때문에 우주의 섭리에 회의를 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겪고 이제 회갑을 맞이하여 이순耳順에 이르렀다. 여기 꼭 회갑이라 하지 않고 ‘육십일생조六一生朝’니 ‘육십춘六十春’이니 하고 한 것은 이 이순을 강조하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이순耳順’이라 하지 않고 이렇게 표현한 것은 겸양의 의미가 내포된 까닭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공자는 ‘60에 이순’이라 했지만 범인이 그리 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는 그러하다. 선비이면서도 농사꾼인 그는 읽을 책이 있고 농사지을 논밭이 있으니, 설령 패배의 인생일지라도 선을 지향하는 자연의 섭리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기껏해야 정신과 육체일 뿐이다. 그 정신의 양식인 책이 있고 육체의 양식인 논밭이 있으면 삶의 전부가 있는 것이다. 시인은 회갑을 맞아 이를 터득한 것이다.
둘째, 당시 농촌 현실과 분단 조국을 바라보는 건전한 태도가 드러나 있다. 그는 몇 해 동안 해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이루지 못한 꿈을 다음해엔 이룰 수 있게 기원하는 시를 쓴다. 이 문집에는 수많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항상 인생이 배어 있다. 황희경黃熙炅이 쓴 「두남거사 오공 묘갈명 병서杜南居士 吳公墓碣銘竝書」에 그의 시를 평한 ‘詩格淸高 謹於風花烟草漫遊之場(시의 품격은 맑고 고아하지만,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나 읊고 즐기는 장소는 삼갔다.)’이란 구절이 있다. 대부분의 시객들이 음풍농월을 하던 시절에 그는 이런 퇴폐적 낭만을 멀리한 것이다. 그는 「병신제석丙申除夕」에서 ‘何關政客黨論滿 但願愚農樂歲開(정객들의 당론이 넘치는 걸 어찌 다 상관할까마다만 불쌍한 농부들에게 좋은 세상이 열렸으면 좋겠다)’라고, 또 「경술제석庚戌除夕」에서는 ‘北域餓民皆我族 掃塵何日手相傳 (북녘도 하나같이 우리 민족인 것을 언제쯤이나 묵은 때 다 씻고 서로 손 잡아볼 것인가)’라고 섣달 그믐날에 다음해의 소망을 읊는다. 새해의 소망은 한결같이 남북의 불쌍하고 굶주린 백성의 삶의 개선과 조국의 통일과 진한 핏줄의 정을 읊은 것이다. 북에 대한 적개심을 고양시키던 그 시절 그는 한국전쟁을 이념의 대립보다 민족의 비극과 불행으로 내다본 것이다.
그가 조국의 통일을 갈망한 모습은 여러 군데에서 목격된다. 「辛亥除夕」은 ‘統合吾邦成就日 兄歌弟舞太平傳 (우리나라가 통합되어 하나 되는 날 서로 노래하며 춤추며 태평세월 누리리라)’고 「願南北統一 -奈城社 」에서는 ‘取人更覺通情後 謀事終成盡力中(누가 통치자가 되느냐는 나중 일 우선 통일을 이루도록 힘을 다하자)’라고 또 하나의 같은 제목의 시인「願南北統一 又-奈城社 2」에서 ‘莫言傀儡猖狂事 恣意輕人是自窮 (꼭두각시 미친 일이라고 말하지 말라 백성을 하찮게 여기는 독재자는 사라질지어다)’라고 통일의 염원을 말한다. 내성사의 시는 백일장 시이다. 그런데도 당연히 피력해야 할 북에 대한 적개심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괴뢰’니 ‘자의경인’이니를 북한정권에 대한 표현이라 할 수도 있으나 당시에 이는 남북이 같은 처지였다. 북은 공산 괴뢰고 남은 미제 괴뢰로 서로 신경전을 벌였고, 북은 김일성 독재이고 남은 군사 독재 체제였다.
그러나 통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신해원조辛亥元朝」는 이런 심정을 ‘宿題南北統何日 但願此年四海豊 (남북통일이 언제 될 건지 그건 평생 숙제라 치고 다만 올해에는 온 고을에 풍년이 들기를 바란다)’라 하여 현실에 복귀하여 다시 농민의 삶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의 시에서는 구체적인 농민과 자신의 불행한 삶의 형상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많은 시에서 그 맺음을 농민에 대한 걱정으로 채운다.
셋째, 이 문집에서 그는 가난한 삶의 고달픔을 솔직하게 술회하고 있다. 자신의 이러한 삶을 그대로 보여준 시로 「우음偶吟」이 있다.
尋綠是作首陽人 녹음을 헤치고 우리 씨족의 밭갈이를 한다
不辨靑紅五五春 세월가는 줄도 모르고 바삐 살다가 쉰다섯이 되었다
擇處成婚每歲樂 혼처를 가려 결혼시키니 해마다 행복했지만
裏粮送子幾時新 자식에게 양식을 보낼 때마다 마음이 새롭게 쓰라렸다
男兒窮達欺數山 사내는 속고 속이는 수많은 궁달窮達의 산길을 헤매야 한다는데
水滶遊却忘世塵 세속의 때를 잊으려 오히려 물가에서 놀았다
後生莫爲貧家父 후생들아, 가난한 애비는 되지 말거라
至老無端苦一身 늙어버린 뒤에는 무단히 신세가 괴롭단다
「偶吟 우연히 읊은 노래」 전문
여기에서 그는 자식 키우는 즐거움과 함께 그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세속을 벗으려 농사꾼에 맞지 않는 학문의 길로 들어섰다가 이도저도 이루지 못하고 가난 속에서 헤매야 하는 고통을 진솔하게 그리고 차마 하기 어려운 말을 자식에게 이른다. 누구든 애비로서 자식에게 ‘학문에 힘쓰라’, ‘선을 행하라’ 등의 좋은 말로 훈계할 터인데 이와 다르게, 더구나 선비를 자처하는 이로서 ‘가난하게 살지 말아라’라고 이르기는 차마 하기 부끄러운 말이다. 딴사람은 실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글에서는 안 그런 체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누구보다 안빈낙도安貧樂道를 행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런 솔직한 심정을 시로 읊고 있는 것이다. 여기 그의 참된 인간성이 엿보인다.
넷째, 시와 산문을 통틀어 그가 말년에 집착했던 위선爲先과 유학에의 집념이 강한 의지력과 함께 드러나 있다. 시의 축성築成과 수연晬宴 산문의 전부는 이에 대한 집념의 소산이다. 그밖의 시들에서도 이런 사상은 한결같다.
七. 衰退期 漢文文化의 實狀
두남은 1902년생이므로 그가 본격적인 교육을 받아야 할 1910년대는 신구학문이 교체되는 혼란의 시기였다. 1894년 7월에 이미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근대적인 관리등용법이 제정되었다. 각도에서 추천하는 인재들(경기 강원 황해 함경도 각 10명, 충청 전라 각 15명, 경상 20명, 평안 13명 그리고 5부 및 제주 각 1명)에게 시험을 치러 합격자를 선발했다. 시험은 국문, 한문, 산술, 내국정략, 외국사정 등의 보통시험과 임명할 국局과 과課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출제하는 특별시험의 두 부문으로 나눴다.
이와 같은 새 관리등용법은 근대적 관리가 지녀야 국문, 산술, 외국사정 등의 교양과목과 전공과목을 고시과목으로 하고 있어서 관리등용제도가 근대화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과목을 배울 기회가 적었던 지방민에게는 불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제도에는 연줄이 없어서 추천을 받지 못하는 자는 관리가 되고 싶어도 응시할 수 없었다. 이렇게 경향이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인재를 등용한다 하여 관리 등용의 기반을 개방시켜 놓고 있으면서도, 종래와 같은 연고성과 폐쇄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었음은 안타까운 일이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남에게서 산술을 배웠다는 그의 조카의 증언이나 그의 장서에 외국총서外國總叙가 있는 점은 이러한 관리등용 시험과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10년대는 이런 관리등용제도가 시행된 지 십수 년이 흘렀고 이제 한일합방 의 국치를 당했지만 서울보다 더 보수적인 지방에서는 그 무렵부터나 이런 신학문의 풍조가 미미하게나마 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학문은 진보적인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이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일찍 개화된 중인 계급 출신의 아들들이 서울로 동경으로 유학하여 일제 때 관료로서 행세하게 되었다. 그밖의 학문을 꿈꾸는 집안의 자제는 어쩌면 쓸모가 없게 될,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된 구학문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구학문조차도 부유한 집안 의 자제는 유명한 유학자 스승을 찾아 유학을 할 수 있었으나 두남은 그럴 처지 도 아니었다. 이 지방의 상당한 유학자들은 당시 부안 계화도에 칩거한 간재 전우를 찾아 그 문하로 들었지만, 두남은 그의 부친인 지산 오재희의 서당에서 글을 배 우고, 아마도 향교나 서원을 찾아 학문을 익혔을 것이다. 그가 어린시절에 쓴 최신식행례 정선제가어最新式行禮精撰諸家語에 ‘기미동 함장 금사 문하 생 후련 오명호 근저己未冬 函丈 琹史門下生 後蓮 吳命鎬 謹著’라 하여 그의 부친인 금사(지산의 다른 호)를 ‘함장’이라 이르고 있는 점은 그가 부친으로부터 글을 배웠다는 증거이다.
그리하여 이 한문화 쇠퇴기의 실상을 이 문집에서 살피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은 여전히 구학문의 필수과목인 유학과 중국역사에 집착하여 이를 공부했다. 두남이 남긴 독후감을 보면 우리 역사에 관한 것은 백범추모록 한 편뿐이고 그 외에는 모두 유학과 중국사에 관한 것이다. 시경詩經, 사기史記, 십팔사략十八史略, 초한지楚漢誌, 삼국지三國志, 맹자孟子, 도연명陶然明, 이백李白 등을 우선 셀 수 있고 그 외의 전거를 모르는 책들도 상당수 있다. 다 없어지고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장서목록에서만 보더라도 한학자라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책들이 인쇄본이나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그가 쓴 시어만 보더라도 그의 어휘력이 얼마나 풍부했는가를 알 수 있다.
둘째, 신학문 대신 구학문을 배운 이들은 극도의 소외감을 느끼면서 시절을 한탄하면서도 스스로를 은사, 거사, 처사 등으로 자처하면서 자기만족을 했을 것이다. 친구인 최수정崔守亭이 두남을 찬양한 시 「혹서김우휴주내방차운酷暑金友携酒來訪次韻」에서 ‘己知卓犖遠雲路 其奈蹉跎老海濱(그대 그 재주 감추고 출세길에 멀리 삶을 내 이미 아노니 어찌 기회를 버리고 바닷가에서 늙어가는가)’라고 그 처지를 애달파하고 있지만 이는 똑같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것일 것이다. 두남도 「방두무동은사최수정 訪杜舞洞隱士崔守亭」 「노은유거운蘆隱幽居韻」 등에서 이들을 은사라 표현하고 있다. 「만김벽파거사輓金碧波居士」, 「만김처사輓金處士」 등에 거사나 처사도 보인다.
셋째, 이들의 극도의 소외감은 오히려 이들만의 사회를 형성하게 하였다. 신학문파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그들은 고고했다. 그들은 시사를 조직하여 가끔 모임을 갖고 호운수창呼韻酬唱하여 남들이 모르는, 그렇기 때문에 더 고고한 한시를 읊으면서 즐겼다. 그들은 각종 백일장을 개최하기도 하고, 또 남들이 연 백일장에 참여하여 시를 겨루고, 그들만의 우정을 다졌다. 그들은 친구끼리 방문해서조차도 운을 내어 시를 지었으니, 그들만의 회갑잔치나, 유학이나 선조를 위한 비나 건축물의 제막식에 초대되어서도 호운呼韻하거나 주인의 원운原韻에 차운次韻하여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 두남이 지은 이런 헌시나 축시가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두남의 집에서 연 두남장 청화회에 참여하여 두남의 원시에 차운한 시인들만 41명에 이른다. 그런데 이들은 김제에서도 서부지방에 거주하는 이들이다. 아마도 만경향교 소속이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김제향교, 금구향교를 다 합하면 이러한 불우한 한학자들은 김제만 해도 당시에만 100명이 훨씬 넘었을 것이다.
넷째, 이들은 향교 부흥을 위하여 노력했다. 그러나 이때의 향교를 중심으로 한 활동은 미미한 것이었다. 「성전보수 장원축조후 소감聖殿補修牆垣築造後所感」에 ‘往年廣土問何處 近者纔旌簡䇺籩(왕년에 넓은 땅 어느 곳까지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고 근자엔 겨우 효열을 표창하는 편지와 제기 몇 가지)’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두남이 만경향교 전교로 추대된 후 대대적인 공사를 추진하여 유학의 부흥을 이룩했다. 황희경黃熙炅이 쓴 「두남거사 오공 묘갈명(병서)杜南居士 吳公墓碣銘竝書」에 ‘在萬頃鄕校典校及儒道會長二十餘年 重修校宮及附屬建物 翻尾長垣改修築紅箭門設置 杖畓八千餘坪以安泮宮維持及享祀之資(이십여 년 간 만경향교의 전교나 유도회장을 역임하면서 본당과 헐어진 담장과 홍전문을 수리하고, 석전제에 넉넉하게 쓸 수 있게 교토를 팔천여 평으로 늘리고, 예악으로 젊은 영재를 육성했다.)’라고 쓰고 있다. 이는 단지 두남의 혼자 힘이 아닐 것이다. 패배감에 젖은 이들 사림의 각성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아직도 그러한 저력을 지니고, 집안의 어른으로, 사회의 유지로 대접받으며 재산 관리의 주도권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향교의 부흥뿐만 아니라, 유림록을 새로 발간하고, 서원을 새로 지으며 서원지를 발간하고, 서원의 영구보존을 위하여 서원계까지를 조직한다.
다섯째, 이들은 위선에 힘써 재각을 새로 짓거나 중수했다. 두남 자신이 이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 위의 묘갈명에 ‘執宗事五十餘年建芝庄洞必敬齋 茅山慕省齋 沙節 恒慕齋 長沙追慕齋 七代祖以下石儀新設及改豎 家事投之度外誠之力之殫之不休(집안 일을 오십여 년 주도하면서 조상의 정문이나 재각을 중수하거나 단청을 새로 했다. 지장동의 필경재, 모산의 모성재, 사절산의 항모재, 장사리의 추모재 등의 재실을 짓고, 칠대 이하 선조의 묘소에는 석물을 새로 구비하거나 개수하는 데 마음과 몸을 다 바쳤다.)’라고 썼지만 이는 두남 집안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러 가문의 위선 축성에 참여하여 이에 대한 헌시를 썼다. 이로 미루어 집안을 과시하기 위한 이러한 축성이 상당수 이루어졌으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여섯째, 그러나 이미 당시 기울어진 유학을 다시 일으키기는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향교통신을 보면 천편일률적인 문장임을 알 수 있다. 먼저 타향교에서 그 향교가 소속된 지역에 뛰어난 효행이나 열행을 행한 이가 있어 이를 널리 선양하기 위하여 정문을 짓고자 하니 귀향교의 의향은 어떠한지 묻고 이를 추천해 달라는 공문을 보낸다. 그러면 이를 받은 향교에서는 정문 건립에 동의하는 답장을 보낸다. 이 향교통신은 이러한 답장문이다. 그러나 효열의 행위는 하나같이 비슷하다. 왕상과 맹종의 고사 ‘왕어맹죽신응공王魚孟竹神應助(「一愚居士洪公孝子碑韻」)’와 같은 기이한 하늘의 도움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추천 의뢰가 있을 때마다 향교에서 한 답장 역시 한결같다. ‘이런 보기 드문 효행이나 열행을 널리 알려 세상의 규범을 삼고 땅에 떨어진 도의를 선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의 「퇴암공정려 예조입안退庵公旌閭禮曺立案」에서 본 바와 같이 정려문을 세우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건립하기 어려운 정려를 어느 향교가 발의하면 무조건 옳다고 할 수밖에 없는 다른 향교의 찬성을 얻어 성균관의 허가를 받든, 이러한 절차도 무시하고 어느 집안에서 독단으로 건립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가 왔던 것이다. 이는 오직 가문의 낯내기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향교는 이에 편승하여 어쩌면 잇속조차도 챙겼는지 모른다. 이런 말기 증상의 유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기적이다. 그리고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이 당시 한문학 쇠퇴기의 마지막 증상인지 모른다. 두남도 앞에서 인용한 ‘往年廣土問何處 近者纔旌簡䇺籩’에서 그 실상을 폭로한 것이다. 이런 부패의 온실을 청산하기 위하여 두남은 향교를 중수하면서 당시 국회의원이 돈 몇 푼을 끌어왔다고 칭찬으로 입이 말랐지만(「대성전중수기大聖殿重修記」), 그러나 이는 당시뿐이고 이후 한문화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八. 맺음말
이상으로 우리는 1970년대까지의 한문화 쇠퇴기의 문화사적 위상을 두남문집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그러나 유학 부흥의 실패가 곧 두남시문의 실패는 아니다. 오히려 성공하지는 못했을망정 이를 위하여 마지막 혼신의 노력을 다한 하찮고 이름없는 시골 선비의 모습이 이 시대를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두남도 그런대로 시골 면장도 역임하고 그에게 패배를 안겨준 신학문의 토대인 초등학교 건립의 의지 때문에 관계당국에 소환당하기를 수차례했지만 그러나 그의 바탕인 구학문의 뿌리인 유학을 위하여 서울의 유명한 유학자도 하지 못한 각고의 노력을 다한 점은 이 시대의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금 유학은 발붙일 곳이 없다. 오직 편리한 서구문화에 젖고, 사회생활에 유용한 기독교문화 속에서 살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해결되는 시대에 거추장스럽게 무슨 낡아빠지고 고리타분한 유교문화냐고 비웃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위선이라기보다 집안 과시용으로 이제 관리하기도 귀찮은 서원 대신 호화분묘를 만드는 세태에서 그가 추구했던 유교 이상의 추구는 한갓 꿈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우리 문화의 바탕을 이룩한 유교문화뿐만 아니라 원시 샤마니즘과 불교문화조차도 재조명하여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27세 芝山公(諱在熺)이 谷城 德山譜廳모임 때 쓴 詩(1934) *杜南文集 附錄 所載 文襄公忠節祠1)次韻
德山山下建忠祠 덕산 아래 충절사를 지으니 指點行人己熟知 지나가는 이들 모두 익히 알고 있다 鱗甲寶刀持虎節 잉어 비늘 같은 갑옷과 보배로운 칼로 호랑이의 절개를 지니신 분 朔雪邊風掣龍旗 겨울 눈보라와 변방의 바람에도 용의 깃발을 끌어안았다 奚論魏尙雲中守 어찌 논하랴, 위상이 훌륭한 삶을 지켰던 것을, 不愧留侯帝子師 관리로 남아 왕자의 스승 되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遺像儼如臨陣日 초상화의 의젓함이 마치 전쟁에 임하는 날과 같이 本支百世永言思 본래 백 년 동안 지탱할 영원한 말을 생각한다
문양공 충절사 운에 부쳐 2
天借德山忠一祠 하늘을 빌려 덕산에 충절사 한 채를 지으니 有名千載世皆知 유명해서인지 천 년 동안 세상이 모두 안다 江聲不絶行軍令 강물 소리가 군령을 행하듯 끊이지 않고 嶺樹完如出塞旗 산 위 나무가 완연히 변방의 깃발처럼 나부낀다 刻石記功然後像 공적을 돌에 새기고 이어 초상을 그리니 出將入相以前師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선 재상이 되었지만 그 이전엔 우리 모두의 스승이었다 靈魂長在東朝史 영혼이 오래도록 우리나라 역사에 있으니 花月霜風祭奠思 꽃과 달 그리고 서리와 바람의 역사, 제사를 지낼 때마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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