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비료 주식회사가 사카린을 밀수하여(사카린 밀수사건) 국회에서 삼성 이병철과과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며 국무위원등에게 오물을 투척하였다.
(국회오물 투척사건)
경기도 수원 신민당후보로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에서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전깃불 관련 발언이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반공법으로 옥고를 치렀고
이후에는 유신 벽보를 뜯는 등 비판해오다
1972년 11월 19일 사람을 만나러 나간다며 나간 뒤
어딘가에서 쓰러져 의식 불명상태로 가망 없는 퇴원 직후
11월 21일오전 9시 5분에 사망하였다.
대변에도 능하여 연설 등에서 지지를 받기도 했다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1966. 9. 15)
삼성그룹 계열사인 한국비료가 일본에서 자재를 수입하면서
그 안에 수천만원 어치의 사카린을
밀수입해 들여온 사건이 1966년 9월15일 터졌다.
그런데 부산세관은 이를 검찰에 고발하지 않고 추징금만 받고
밀수품을 돌려주는 등 사건을 흐지부지했다.
국민들은 세관 경찰 등 관련기관의 삼성 비호에 격앙됐다.
일주일 뒤인 6월22일 국회 본회의장. 민주공화당의 이만섭 의원과
민중당의 김대중 의원은 삼성의 사주 이병철 씨를 구속해
법정최고형에 처할 것을 요구했다.
이어 한독당의 김두한 의원이 연단에 나섰다.
그는 하얀 보자기로 싼 통을 들고와서는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이를 합리화시키는 당신들은 총리나 내각이 아니고 범죄 피고인에 불과하다"고
고함을 지른 뒤 "맛을 봐라"며 국무위원석으로 냅다 집어던졌다.
통 안에는 파고다공원에서 퍼 온 인분이 담겨있었다.
정일권 국무총리 등 국무위원들은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인분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의사당은 아수라장이 됐다.
분뇨에 의한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로 가득했다.
국회 인분투척사건 직후 정일권 내각은 일괄사표를 제출했다.
민복기 법무장관, 김정렴 재무장관이 해임되고
이병철의 둘째아들 이창희가 구속됐다.
삼성은 한비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했다.
그러나 정 총리의 사표는 반려돼 6년7개월이라는 최장수 총리기록을 남겼다.
김두한은 이 사건 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구속되는 등 이후 불우한 인생을 마쳤다.
1966년 9월 24일 밤, 구속 수감되고 있는 김두한 의원
생생증언 '김두한 국회오물 투척의 진실'
2002년 말 SBS 드라마 '야인시대'로 다시 드라마에 등장했던
김두한 전의원의 66년 국회오물투척 사건의
전모가 36년만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김 의원의 국회 비서였던
채원기씨(63)가 오랜 침묵을 깨고 스포츠서울에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함으로써 밝혀졌다.
현재 건실한 중견기업인 (주)트리닉스 전광판을 경영하는 기업인으로 변신한 채씨의 증언으로 그동안 잘못 알려졌던 역사적 사실과 정치비사들이 고무마덩굴 딸려 나오듯이 줄줄이 나왔다.
새롭게 규명된 역사적 진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바로 당시 국무위원들에게 뿌려진 인분이 알려진 것처럼
파고다공원에서 퍼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거사 전날 김의원의 집인 서울 신문로 주택 화장실에서
김의원과 채 비서가 코를 막으며 직접 푼 것으로 확인됐다.
채씨와의 만남은 우연찮게 이뤄졌다.
김두한이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박정인 여사를 취재하면서
그 진위여부를 캐는 과정에서 연락이 닿았다.
흐르는 세월을 거꾸로 돌릴 수 없었을까.
풍운의 꿈을 안고 정치판에 뛰어들었던 20대 청년은
이제 켜켜이 쌓인 세월의 나이테를 감당하지 못한 듯
시원하게 벗겨진 머리의 초로의 신사로 세상에 나왔다.
부리부리한 눈매에서 범상치 않은 인상을 풍긴 채씨는 조리있는 말투로
얘기 보따리를 풀며 기자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36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침묵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온 이유부터 설명했다.
김두한 의원을 평가할 때 '정치인 김두한'에 대한 실체적인 접근은 없고
마냥 주먹쓰던 협객시절의 잔상으로만 비쳐지고 있는 게
가슴 아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그분의 인생에서 짧았지만 가장 드라마틱했던 6대 국회의원시절을 그림자처럼 수행했던 사람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비어있거나
왜곡돼 있는 '정치인 김두한'의 올바른 조명을 위해
일종의 역사적 책임감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김두한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했던 66년 9월 22일
국회 오물투척사건은 당시 세간에 큰 반향을 몰고 왔지만
'엄청난 태풍'이었던 삼성 계열사인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에
파묻혀 한갖 해프닝으로 치부된 채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려 안타까움이 들었다고 했다.
채 비서는 김두한이 65년 용산보궐선거에서 한독당 공천으로 국회에 두번째(54년 3대 민의원 종로에서 당선) 등원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금배지를 달면서도 기거할 집이 없었던 김의원은
당시 청진여관 아랫채 3칸을 빌려 생활하고 있던 중
역량있는 젊은 비서를 뽑기 위해 공고를 냈고 18명의 지원자중
이찬오(전 현대자동차 부사장) 서용화(강릉대학교 철학과 교수) 채원기씨 등
3명이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네요.
청진여관 넓은 방에서 가운데 김의원이 그 큰 덩치로 보료에 턱하니 걸터 앉아 요즘으로 말하면 1시간 가량 자유토론을 시켰지요.
첫댓글 좋은자료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남해병님
진실은 밝혀져야죠^^
감사합니다~진실은 반드시 밝혀집니다~^^
언젠가는 세상이 바뀌겠지요.......
세상은 바꿔지지 않을 거같아요. 연속이고 되풀이지.......인간의 욕심이란......
세상이 왜 그런지..........
좀기네요 잘보았습니다 오물투척사건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좋은글 잘보고 가네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