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YMCA 개척 간사로 한국에 파송된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는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를 설립했고 1905년에는 청년회 회원들에게 서양식 공놀이인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대한체육사에 기록되어 있는 한국 야구의 효시다. 한국에 야구가 보급된 것은 1905년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1873년에 야구를 도입한 일본이 조선 침략을 본격화하며 전국에 일본인 야구팀을 만들어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의 야구일 뿐 한국 야구는 아니다. 그래서 한국 야구의 도입을 1905년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 야구 역사의 시작
한국에 야구가 도입된 지 100년이 훌쩍 지났다. 1920년에 열린 전조선야구대회가 전국체육대회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한국 스포츠에서 차지하는 야구의 위상을 쉽게 알 수 있다. 광복 후 수많은 야구인의 노력으로 한국 야구는 발전을 거듭해 미국, 일본과 세계 정상을 다투게 됐다. 이 글에서는 한국 야구의 발자취를 살펴보려고 한다. 무엇하나 소중하지 않은 역사가 없지만 아마추어 야구와 세계대회 등에서 이정표가 될 몇몇을 추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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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한국야구의 에이스 김양중(좌측)과 명포수 김영조. 1958년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친선경기에서 애초 참패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0:3으로 선전한 것은 두 이가 있었기 때문. 1회 초 무사 2, 3루에서 구원 등판한 김양중은 9이닝을 2실점으로 틀어막는 호투를 펼쳤고 김영조는 빼어난 리드로 뒷받침했다. 특히 대타자 스탠 뮤지얼을 삼진으로 돌려세운 것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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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학생야구단은 1972년부터 1997년까지 매년 봉황대기에 참가해서 우승 없이 준우승만 3번 했다. 급조된 팀이라서 가진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면도 있겠지만 상당수 야구인은 판정의 희생양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재일교포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매년 여름에는 한국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재우 전 감독은 “모국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사진: 스포츠춘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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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고는 괴물 투수 신인식을 앞세워 청룡기 대회 3연패를 이룩했다. 청룡기를 모교 교장실에 영구보존하는 유일한 학교다. <사진: 황승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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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홍 감독을 비롯한 한국 대표팀은 죽을 각오로 일본과 결승전에 나섰다. 최하위에 머물더라도 일본만 이기면 모든 것이 용서되던 시대였기에 일본 전의 압박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사진: 어우홍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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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3일 동대문야구장에서 마지막 공식경기가 끝나고 나서 둘러보던 김양중 백구회 명예회장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이에게 동대문야구장은 삶의 터전이었고 인생의 동반자였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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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문 감독의 용병술이 적중하며 한국은 9전 전승을 기록하며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야구 종목의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전승 우승은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와 1996년 애틀랜타 대회의 쿠바에 이어 3번째로 올림픽에 프로 선수가 참가한 후로는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