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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목물떼새 외 7편
안도현
눈이 게으른 새떼처럼 오고 있다
나는 돌배나무 아래 들어 천지에 꽃망울 뒤척이는 소리를 듣는다
아무에게도 전화하지 않고 손으로 눈을 받았다고 쓴다, 손금이 눈송이를 튕겨 올렸다고 쓴다
냇가에 사는 흰목물떼새가 마당 안까지 냇물을 끌고 왔다 새는 목덜미가 하얘질 때까지 울었는데 울음소리가 가볍다
새야, 구절초 씨앗 뿌려 놓은 꽃밭은 기웃거리지 말아라 씨앗을 다 쪼아먹으면 나는 내후년 가을에 어떡하노?
나는 쓸모없는 걱정을 하다가 가장 쓸모없는 일이 가장 귀한 일이라는 생각도 한다
땅에 떨어진 깃털이 새의 윤곽이라는 말을 들었다, 라고 쓴다
유산가(遊山歌)
영양 자작나무 숲 가는 길에 외딴집 한 채를 뵈었다
서쪽으로 어깨가 한 자쯤 기울었다 기우뚱거리는 범선 같았다
뒷마당 돌배나무는
쌀 안치는 소리 같은
꽃을 달고 서 있었다
자신을 밀고 나가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인가 잠시 멈춰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밑바닥이 가라앉기 좋아 보였다
저 빈집을 통장을 털어 살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다가 흥정이 잘 되면 훤칠한 돌배나무 돛을 공으로 얻을 수 있겠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뻗어나갔다
빈 집은 청승 맞게 허벅지를 긁고 있었고
소유할 때 생기는 오해를 나는 어찌 감당할 것인가 초록을 핑계 삼아 돌파할 수 있는가 근심이 돌배나무 수피에 덕지덕지하였다
그나저나 주인의 연락처는 어딜 가서 구한단 말인가
마음에 대하여
마음이란 게 있어서 마음이 발 달린 짐승처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마음이 굴러가다가 제일 나중에 가닿고 싶은 그곳을 마음의 처소라고 부르자 더 이상 갈 데도 없고 해야 할 말도 없는 마음이 앞에 앉은 여자의 손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리, 성스러운 것도 속된 것도 없는 마음이 발소리 죽이고 어깨를 낮추고 빈 술잔에 입술을 댔다 뗐다 하는 자리, 이어지지 않았지만 끊긴 것도 없고 풀어놓지 않았지만 묶어 놓은 것도 없는 논바닥의 지푸라기 같은 심정을 마음이라고 부르자 볕 잘 드는 오후쯤에는 마른 들깻대를 털다가 들깨꽃이 앉았다 간 자리마다 셋방을 놓을 수 없을까를 생각하고 그 셋방 얻으러 오는 마음에게 셋방 내주는 마음으로 술 마시고 싶은 자 술 마시게 하고 울고 싶은 자 울게 하고 인생 탕진하고 싶은 자 탕진하게 방치한들 어떠리 여기에도 마음이 있고 저기에도 마음이 있는 것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을 더 좋아하는 마음이나 미워하는 사람을 좋아하려고 애쓰는 마음이나 매한가지일 것이니 창틈에서 손을 빼지 못하는 바람의 마음이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끼의 마음이나 바위 속에 식솔들 재워두고 세상 구경 나온 마애불의 마음이나 대처나, 안팎이 없으리 꽃에 손을 대면 그때부터 꽃을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밥을 입에 대면 그때부터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것처럼 마음이여, 가까이 닿으면 금세 사라지는 방아깨비 다리여 멀리 멀어지면 이마로 들이받고 싶은 천둥소리여, 너나 나나 마음이 편지가 아니니 전하려고 하지 말고 마음이 연못이 아니니 담으려고 하지 말고 마음이 보자기가 아니니 펼치려고 하지 말고 마음이 칼이 아니니 새기려고 하지 말 일이다 빨랫줄을 받치고 선 바지랑대의 마음이나 빨랫줄에 몸을 걸친 빨래의 마음이나 다 잇대어 있고 겹쳐 있는 것을 세상 한 바퀴 휘 돌아와 가까스로 알아채는 날이 오면 그 어떤 의도도 목적도 없이 마주 앉아 한 끼 밥을 먹어도 좋으리, 그 어떤 계획도 행선지도 없이 지갑도 카드도 없이 길을 나서는 궁리를 해봐도 좋으리
연못 위에 쓰다
당신을 병상에 버리고 당신은 유리창 너머로 저를 버리고
저는 밤마다 아무도 읽지 않을 이야기를 썼죠
마당 가에 연못을 들였고요
당신이 꽃의 모가지를 따서 한 홉쯤 말려서 소포로 보내주신다면 꽃잎을 물 위에 뿌려놓고 꽃잎이 물속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바라보려 했죠
당신은 오래 죽은 척 가만히 누워 있었죠
발톱을 깎아 달라는 청을 들어주지 못했어요
연못 가에 앉아 제 발등을 바라보는 동안
풀이 시들고 바람이 사나워지고 골짜기 안쪽에서 눈이 몰려왔어요
당신의 장롱과 당신의 옷을 분리하고 당신의 부엌에서 당신의 수저를 떼어내고 면사무소에 가서 이름을 지웠어요
저는 이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어요
문법을 잊고 마음껏 미끄러질 수 있게 되었어요
쨍한 코끝으로 연못 위에 문장을 쓸 수 있게 되었어요
당신이 자신을 결박하고 돌아누워
얼음장을 깔아준 덕분이죠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아서 좋은 단어들
의미 없이 녹아버릴 돌멩이들
연못을 덮은 얼음장 위에 얼음장을 덮은 눈 위에
세워둔 연못
간장종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숟가락을 놓고 가보니 창에 새가 부딪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등이 푸른 물총새였다 연못을 살펴보러 왔다가 막 떠나려던 참이었나 새끼들을 부르러 가던 길이었나 앞마당 연못 속 물고기의 수를 헤아리느라 부리가 길어졌구나 물총새는 수평의 연못이 지겨워 연못을 세워두고 머리를 들이밀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바깥을 보려고 창을 달았으나 나의 바깥은 새의 국경이었다 또한 나의 바깥은 반질반질해진 새의 안쪽이었다 새가 밥을 얻으러 가던 실 끝을 땅에 묻고 나는 식은 국을 떠먹었다
북문
눈보라가 들어와서 무릎 꿇고 울던 북문
오래전 여진족 기마부대가 들이닥치던 북문
땔감 장수들이 지게 내려놓고 유곽 쪽을 힐끔 바라보던 북문
팔목에 쇠갈고리 끼우고 상이군인들이 찾아오던 북문
현판에 북풍한설이라 쓰고 태평천하라고 읽던 북문
월북작가들이 빠져나간 북문
나무들이 발목에 흰 붕대를 감고 산에서 내려오는 북문
피부가 거친 굴참나무와 화상 자국이 또렷한 노각나무가 사는 북문
아는 나무보다 모르는 나무가 많아서 좋은 북문
나 제일 친한 친구의 집 어두운 처마 안쪽이 환하던 북문
장끼가 떨어뜨린 꽁지깃으로 벽에다 시를 몇 줄 끄적이던 북문
내가 쓴 시가 하늘로 가서 흰 눈이 되던 북문
늙은 모텔과 고시원의 달방이 즐비한 북문
냉동 돼지고기 앞다리로 찌개 끓이는 식당이 많은 북문
고등어를 쌌던 피 묻은 신문지가 날리는 북문
폐경기 지난 이모가 옥상에서 빨래를 털어 너는 북문
감나무가 더디게 자라서 감꽃이 늦게도 피는 북문
북문 가까이 얼씬대지도 말라고 하던 북문
북문의 여자들을 생각하지도 말라고 하던 북문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을 만큼 눈발이 쏟아지던 북문
북천
경남 하동에도 있는 북천 경북 상주에도 있는 북천 강원도 고성에도 있는 북천
지명에도 있고 하천명에도 있고 간이역 이름에도 이대흠의 시에도 스님 법명에도 있는 북천
북천의 뒷산 꼭대기에는 만년설이 살고 사시사철 크리스마스 캐럴 음반이 출시되고 아이스크림 장사보다 참나무 장작 장사가 더 잘 될 것 같은 북천 청둥오리 떼를 잡아 연탄불 위에 굽는 저녁이 왁자할 것 같고 큰 강의 얼음장은 국어대사전보다 두꺼울 것 같고 이런 추측은 북천이니까 가능할 것 같고
꽁꽁 얼어붙은 북천에는 투기꾼들이 묵을 여관이 없고 고층아파트를 짓지 않으니 은행에 대출하러 갈 일이 없고 은행원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을 필요가 없고 연대보증 부탁하는 시간에 처마 끝 고드름을 따먹을 수 있어 좋고 고드름 고드름 수정고드름 동요를 부를 수 있어 좋고 북천의 언덕에서는 마을의 지붕이 손바닥 안의 스마트폰처럼 다 보이고
북천 주변의 산골짜기에는 자작나무가 살고 산꼭대기에도 자작나무가 살고 고갯마루에도 자작나무가 살고 경사지에도 자작나무가 살고 산속의 화전민도 자작나무를 때고 산속의 사찰에서도 자작나무를 때고 일 년에 딱 한 번 초파일에 절에 가는 여자가 사는 집에서도 자작나무를 땐다
온천을 좋아하는 사람은 북천에 노천탕이 있나 생각할 것이고 삼복염천을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은 북천의 마굿간에도 에어컨이 들어오나 걱정할 것이고 천상병의 시를 읽어본 사람은 북천이 소풍 가는 곳인 줄 착각할 것이고 부천에 사는 사람은 부천에 왜 기역자가 하나 더 붙었지 하며 의아해할 것이고
나는 북천에서 태어나 보지 못한 사람 북천에 나가 빨래를 해보지 않은 사람 나는 그럼에도 친절해져서 북천의 스피커처럼 말한다
북천은 바로 거기에 있어요 북천은 손 뻗으면 닿는 거기에 있어요 북천은 만질 수는 없지만 보이는 곳에 있어요 북천을 가지고 갈 수도 없고 쌓아둘 수도 없지만 북천은 부서지지 않고 흘러내리지 않고 물렁거리지 않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요 북천은 비누처럼 미끌거리고 대파처럼 맵싸하고 비스킷처럼 바삭거려요 이 의미 없이 좋은 북천
북항
나는 항구라 하였는데 너는 이별이라 하였다
나는 물메기와 낙지와 전어를 좋아한다 하였는데
너는 폭설과 소주와 수평선을 좋아한다 하였다
나는 부캉, 이라 말했는데 너는 부강, 이라 발음했다
부캉이든 부강이든 그냥 좋아서 북항,
한자로 적어본다, 北港, 처음에 나는 왠지 北이라는
글자에 끌렸다 인생한테 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로든지 쾌히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맹서를 저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신하기 좋은 북항,
불 꺼진 삼십 촉 알전구처럼 어두운 북항,
포구에 어선과 여객선을 골고루 슬어놓은 북항,
이 해안 도시는 따뜻해서 싫어 싫어야 돌아누운 북항,
탕아의 눈 밑의 그늘 같은 북항,
겨울이 파도에 입을 대면 칼날처럼 얼음이
해변의 허리에 백여 빛날 것 같아서
북항, 하면 아직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편이
있을 것 같아서 나를 버린 것은 너였으나
내가 울기 전에 나를 위해 뱃고동이 대신 울어준
북항, 나는 서러워져서 그리운 곳을 북항이라
하였는데 너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하였다
<시인의 에스프리>
이 의미 없이 좋은
안도현
1
초등학교 6학년 봄까지 안동 풍산에서 살았다. 나는 농협 바로 옆 가겟집 아이였다. 가게 앞으로 사시사철 조붓한 도랑물이 하나 흘렀다. 그 도랑은 가게에서 1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연못에서 시작되었다. ‘눈꼽째기창’과 김홍도의 현판 글씨로 유명한 체화정 앞 연못이다. 50년 전만 해도 연못은 질척한 늪처럼 보였다. 어른들은 연못 안에 물이 나오는 소(沼)가 있다고 했다. 여기에 발을 잘못 들여놨다가는 소가 발목을 잡아 빠져나올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말도 덧붙였다. 여름에 도랑물이 불어나면 아버지는 밤에 족대를 세워 물고기를 잡았다. 손바닥만 한 붕어와 큰 메기가 세숫대야에 가득 찼다. 민물 뱀장어가 걸려든 날도 있었다. 그 뱀장어는 낙동강을 타고 내려가 남태평양에 알을 낳으러 가던 길이었을 것이다. 체화정 앞 연못은 지금도 물이 생성되는 수원지로서 내 상상력의 밑바닥에서 찰랑거린다.
고향에 집을 짓고 나서 마당과 텃밭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숙제가 생겼다. 연못을 하나 파야겠다고 생각했다. 없는 연못을 머리로 그려 보느라 한 달 넘게 잠을 설쳤다. 연못의 깊이를 떠올리고 가장자리에 앉힐 돌의 모양을 궁리하고 세상의 모든 연못을 검색하느라 일주일이 지나갔다. 연못 바닥을 처리하는 방법을 알아보고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자리를 가늠하고 물구멍의 높이를 생각하면서 또 일주일을 보냈다. 연못가에 부들과 백련과 수련을 구해 심고 붕어와 미꾸라지를 키울 계획을 메모했다. 방수포와 비닐을 미리 주문했다. 그러다가 또 일주일이 지났다. 기다리는 포크레인 기사는 연락이 없었고 내 마음속의 연못은 컴컴해졌다.
포크레인 기사는 열흘 후쯤 덜컹덜컹 마당에 도착했다. 연못의 넓이와 깊이를 내게 물었고 나는 작대기로 둥그렇게 줄을 그었다. 몇 평쯤 파주세요, 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기사는 연못이 너무 큰 거 같다고 했고 흙을 퍼낸 뒤에 어디에다 쓸 거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흙을 파낼 생각만 했지 흙이 쌓인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볼게요. 그러자 포크레인은 내가 작대기로 그어둔 선을 따라 어렵지 않게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밥그릇에 담긴 밥을 숟가락으로 푹푹 퍼먹듯이.
평평했던 땅이 깊이를 가지기 시작했다. 신기하면서도 두려웠다. 내가 정말 연못의 주인이 되는 걸까? 포크레인이 쌀자루보다 큰 돌을 옮겨와 연못 테두리를 두르는 것으로 작업은 끝났다. 나는 1미터 깊이의 연못으로 들어가 보고 깜짝 놀랐다. 땅속에 허공이 있었던 거다! 내가 상상했던 연못은 어마어마한 허공이었고 나는 그 허공에 둘러싸여 있는 기분이었다. 연못을 궁리하다가 허공을 얻게 된 날이었다. 허공을 설계하고 허공에다 벽지 바르는 일을 상상하느라 나는 숨이 가빠졌다.
연못은 먹이를 뿌려주면 뽁뽁 소리를 내며 잘도 받아먹던 잉어들의 집이 되었고, 소금쟁이와 개구리들을 불렀다. 재미로 낚싯대를 던지는 제자도 있었고, 겨울에는 외손녀의 신나는 썰매장이 되어주었다. 올해 봄, 그 두껍던 얼음이 녹자 물 위로 잉어들이 죽은 채 떠올랐다. 아뿔싸, 내 욕심이 그 통통한 생명들을 죽인 것이다. 연못의 깊이를 낮춘 건 3년째 세력을 키운 노랑어리연꽃의 줄기들이었다. 봄부터 나는 연못의 물을 양수기로 빼내고 10센티마다 뿌리를 내리고 물속에 스크럼을 짠 노랑어리연꽃과 싸우고 있다. 다행히 멸종위기 야생생물2급으로 지정된 물방개가 들어와 사는 연못이야, 라고 자위를 하면서.
2
‘북녘 북(北)’이라는 글자는 남쪽의 반대 방향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달아난다는 뜻도 있고 배반한다는 뜻도 있다. “처음에 나는 왠지 北이라는/ 글자에 끌렸다 인생한테 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로든지 쾌히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맹서를 저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신하기 좋은 북항”(「북항」 부분)이라는 문장을 그래서 얻게 되었다. 「북항」이라는 시의 제목은 단순히 목포나 인천의 북쪽 항구를 가리키는 지명에 머무르지 않는다. ‘북’은 엇갈리거나 빗나가거나 뒤틀리거나 서로 돌아서고 돌아눕는 모든 현상에 스며 있는 언어다.
한국인에게 ‘북’은 북한,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줄여서 쓰는 말이기도 하다. 이때 ‘북’은 한반도 남쪽에 사는 사람들에게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증오와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단 한 글자인 ‘북’은 한반도에서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바람처럼 움직이고 썰매처럼 미끄러지고 물고기처럼 튀어 오른다. 하나의 글자가 이처럼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서부터 현실 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의적으로 퍼지고 충돌하는 예를 나는 알지 못한다. 역사와 이념과 시간을 이렇게 끈질기게 끌어안고 있는 언어가 없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북’은 내게 아주 시적인 언어다.
북천은 바로 거기에 있어요 북천은 손 뻗으면 닿는 거기에 있어요 북천은 만질 수는 없지만 보이는 곳에 있어요 북천을 가지고 갈 수도 없고 쌓아둘 수도 없지만 북천은 부서지지 않고 흘러내리지 않고 물렁거리지 않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요 북천은 비누처럼 미끌거리고 대파처럼 맵싸하고 비스킷처럼 바삭거려요 이 의미 없이 좋은 북천(「북천」 부분)
‘북’을 제목으로 삼은 몇 편의 시를 읽고 이대흠은 이렇게 썼다.
안도현의 북쪽은 아직은 다 밝혀지지 않는 한 세계를 구축해 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발표되는 신작시까지 살펴보았을 때, 안도현에게 북쪽은 이상 공간이자, 현실 공간과 상상 공간이 합쳐져서 낯설고도 정다운 세계를 이루는 공간이며, 또한 역사적 의미가 한꺼번에 드러나는 통시적 공간으로서의 의미로도 읽힌다. (중략) 시인이 분명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들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뜻하며, 새로운 시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태도로 보인다. 말할 수 없고, 의미 없고, 실체가 분명하지 않는 세계를 긍정함으로써 그의 세계는 얼마나 넓어질 것인가.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3년 3월호)
당분간 ‘북’이라는 언어가 지시하는 대로 따라가 볼까 한다. 그러다 보면 문득 북한강 골짜기도 갈 수 있고 북유럽도 갈 수 있을 것이다. 북두칠성의 국자를 들고 바닷물을 퍼 고비사막에 뿌릴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의 삼수군 가는 길을 물어 백석이 살던 옛집을 찾아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특정한 목표를 두고 가는 길이 아니기에 조바심을 낼 것도 없다. 길이 막히면 돌아가고 돌아가도 길이 막히면 그 자리에서 포기하면 되는 길. 그래서 모처럼 시를 쓰는 사람이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스스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즐거운 길. 내년쯤에 낼 시집의 제목도 미리 정해 놓았다. 이 의미 없이 좋은, 이라고.
3
화가나 건축가들이 자기 작품 앞에서 어떤 의도에 의해 이것을 제작했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라고 설명하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들의 표정은 대체로 진지하지만 나는 그 지나치게 친절한 태도 때문에 귀를 막고 싶어진다. 그들의 언사는 작품에 대한 덧칠 같다, 작품에 사족을 달아 숙성이 덜 된 음식을 마음껏 드시라고 선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기애의 과용 같기도 하다. 시인이 자기 작품을 의미라는 좁은 테두리 안에 가두어버리는 그런 서투른 해설을 시도한다고 해보자. 나는 그 작품을 읽고 싶은 마음을 던져버릴지도 모른다. 언어의 의미는 시인의 소유가 아니다. 의미는 독자에 의해 얼마든지 다르게 규정될 수 있고 언제든지 폐기될 수도 있다. 시인은 의미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만 독자는 울타리 안팎을 넘나들며 의미를 세우기도 하고 부수기도 한다.
수업 시간에 의미의 덫에 갇히지 말자는 말을 자주 하는 편이다. 시인의 의도가 의미를 생성할 수 없다. 시인의 거창한 의도가 딱 맞는 언어를 만나지 못하면 오히려 의도가 시를 망치는 주범이 된다. 그러니 시인이라는 주체의 자리를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지 말고 대상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자. 시를 쓰는 일은 대상을 주체로 만드는 일이기에 이 세상 어떤 일보다 품격 있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학생들에게 비속어를 한 마디 써도 되냐고 묻고 동의를 얻은 다음 간신히 말한다. 시인이라는 존재, 좆도 아니라고 생각해라.
안도현(安度昡)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198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 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등을 냈다. 소월시문학상, 백석문학상, 석정시문학상 등을 받았다. 현재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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