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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해사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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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에서 뻗어내린 산맥의 마지막 자락이 남해
바다를 바로 코 앞에 두고 우뚝 솟아 먼 바다를 보고
있었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땅의 끝이었다.
두륜산을 돌아 오른쪽으로 십여 리를 더 가자
관음산이었다. 산기슭을 오르던 화담은 멀리 아득히
보이는 남해 바다를 굽어보았다.
"서해를 건너면 중국이 있는데 저 아득한 남해를
지나면 무엇이 있을까요?"
"글쎄. 지금이야 누가 그걸 알 수 있겠나."
망연한 지함의 말을 화담이 받았다.
"말 그대로 망망대해, 끝도 없는 바다일 수도 있을
테고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땅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어딘가 끝은 있을 텐데 과연 어디가
끝일까요?"
"그걸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불경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으니 마음 속에서 그
끝을 찾아 보게나."
지함은 심한 갈증을 느꼈다. 모르는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목을 타게 했다. 막막하게 넓은 세상, 끝도
모를 진리의 세계… 지함은 마른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소태를 씹는 듯 썼다.
"해가 지는군. 뜻하지 않게 바다의 황혼을 보게
되는구만."
화담이 서쪽 하늘을 보며 말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그렇게 가슴 졸이며 떠올랐던
태양은 순식간에 온 천하를 붉은 빛으로 장엄하게
물들이더니 바다 속으로 허망하게 가라앉았다. 해가
지는 것이나, 사람살이나 허망하기로 따지자면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저기 저 마을을 보십시오, 선생님. 음기가 무척
세군요."
덜렁대는 박지화가 오랜만에 무언가를 짚은
모양이었다.
그의 말대로 양기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땅이 눈
아래 자리잡고 있었다. 지형이 흡사 여자의 음부
같았다. 불두덩처럼 둥글고 밋밋한 산이 둘러서 있고,
그 한가운데에 조그만 산이 음핵처럼 돌출돼 있었다.
그 음핵의 바로 아래에 오십여호 쯤 되어 보이는
마을이 깃들어 있었다.
"오늘밤은 저곳에 머물러야겠네. 어차피 더 멀리는
가지 못할 테고…"
앞장선 화담을 따라 일행은 관음산을 내려갔다.
황혼이 나그네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나 빨리
걸었던지 어둠이 내리기 전에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마을은 위에서 내려다보기와는 다르게 꽤 넓게 터를
잡고 있었다. 바다를 지척에 둔 어촌치고는 땅이 꽤
넉넉했다.
논일을 마친 장정들이 연장을 둘러메고 돌아갈 만한
때이건만, 머리에 흰 수건을 둘러쓴 아낙네만
띄엄띄엄 보일 뿐 남자의 모습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물길이 좋아 남정네들이 다들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떠난 것일까. 싸릿대 울 너머로 슬쩍
집안을 들여다보았으나 역시 저녁 준비에 바쁜
여인네뿐이었다.
"저기, 사내가 있긴 있구만."
박지화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예닐곱 살쯤
되어보이는 사내애 서넛이 논둑길로 소를 몰아오고
있었다.
일행은 곧게 뻗은 길을 따라 걸으며 주막을 찾았다.
그러나 주막은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이상하군요. 동네가 이 정도 되면 분명 주막이
있을 법한데요."
마침 한 아낙네가 물동이를 이고 종종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말씀 좀 묻겠습니다. 주막이 어디
있습니까?"
급히 멈춰서는 바람에 물동이가 찰랑거려 몇 방울
흘러내린 물이 아낙의 옷고름을 적셨다.
부끄러움도 없이 지함 일행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아낙의 눈빛이 이상하게 번들거렸다.
"여그서 묵으실라고요?"
"그렇습니다."
"왔던 길을 쪼매 돌아가셔야 쓰것는디요.
오른편으로 자그마한 길이 있는디 글로 가보시씨요."
말을 마친 아낙네는 휭하니 찬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여인의 묘한 눈빛이 공연히 지함의 마음에
남았다.
조금 돌아가 오른쪽으로 꺾어지자마자 아낙의
말대로 과연 허름한 주막이 나타났다. 서툴게
주막이라고 써놓은 등이 걸려 있으니 주막인가 보다
할 뿐이지, 여염집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초라한
초가집이었다. 찾는 이가 별로 없는지 사람의 기척도
없이 썰렁했다.
인기척을 내자 주모인 성싶은 여인이 밖을
내다보았다. 허리 굽은 백발 노파였다. 하기사 이런
마을이야 나그네의 발길도 뜸할 테고 바닷가라고는
하지만 십 리는 떨어져 있을 테니 이 마을 사람들
외에 어부들의 발길이 닿을 리도 없었다.
"주막이 맞긴 맞는 모양인데 너무 썰렁합니다그려."
박지화가 숫기좋게 주모에게 말을 붙였다.
"손님 든 거시 서너 달은 됐는갑소. 객주집이사
객이 있어야 번창흐는 것인디 객이 없응께 그렇지라."
"그런데, 주모. 이 마을에는 남정네들이 통 보이질
않는구려."
"긍께 과부촌이라고 안흐요. 그걸 모르는 걸 봉께
먼디서 온 손님인게비요이. 이 마실 남정네들이
바다만 나갔다허먼 영영 돌아올 생각을 안허요. 그래
이 동네 사내들은 철이 들만 허먼 다 타관으로
떠나뿌요. 남은 사람은 다릿새에 달린 것 ㅇ는 계집들
허고 불알이 들 여문 아그들뿐이그마요."
지함 일행은 주모의 말에 입을 다물지 뭇했다.
음기가 센 지형이긴 했지만 설마 남자의 씨가 마를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물은 쩌그 우물서 떠드시고 쪼까 기다리씨요이."
백발의 주모는 굽은 허리로 다람쥐보다 잽싸게
사립을 빠져나갔다. 오랫동안 손님을 치르지 않은
주막이니 상 차릴 채비를 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마지막 남은 붉은 구름 한 조각이 점점 흐려지면서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마당 한복판에 놓인 평상은 자주 쓰질 않았는지
흙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평상 위에 쌓인
먼지를 툭툭 털어낸 지함 일행은 그 위에 앉았다.
바다 내음을 실은 초여름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다.
부엌 뒷문과 뒷쪽 사립문을 드나드는 인기척이
부산했다. 저녁 준비를 하는 발걸음들인 듯했다. 손님
단 세 사람을 맞기 위한 준비치고는 너무 소란스럽다
싶었다.
잠시 후 주모가 부엌문 틈으로 쭈그러진 얼굴을
삐죽이 내밀었다.
"일단 쩌그 앞 방으로 드시씨요. 손님은 없어도 혹
몰라 쩌 방만은 깔끔허게 치워놨응께."
세 사람은 주모가 가리키는 방에 짐을 풀었다.
"어이, 지함. 우리 나가서 등목이나 하지 않으려나.
주모는 저녁 준비에 바쁠 테니 이 틈에 땀 좀
씻자구."
"거 좋지요."
지함과 박지화는 의기투합하여 마당가 우물로 갔다.
우물은 아득하게 깊었다. 한 두레박을
길어올리는데도 팔이 저릿저릿할 정도였다. 깊은 만큼
물이 맑고 시원했다.
"이거, 물도 온통 음기를 쓰고 있구만. 이가 다
시리네그려."
박지화는 길어올린 물 한 두레박을 다 마실 것처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지함이 다시 한 두레박을 길어올리는 동안 박지화는
웃옷을 벗고 엎드렸다. 마흔이 머지 않은 나이였지만
등이 곧고 탄탄했다.
지함은 두레박에 담긴 우물물을 박지화의 등판에
쏟아부었다.
"읏, 차거, 차거. 거 참 시원타."
깊은 땅 속의 냉기를 뒤집어쓰고 박지화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빼꼼히 열린 부엌문 틈새로 까만 눈동자들이 두
선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을 끼얹을 때마다
진저리를 치며 추워하는 모양을 보고는 끼들끼들
숨죽여 웃는 소리도 새어나왔다.
두 사람이 등목을 끝내고 웃도리를 걸칠 때 주모가
개다리 술상을 들고 힘겹게 부엌 문지방을 넘고
있었다.
"이리 주시오. 주모는 며느리나 딸도 없소? 상을
들기엔 연세가 너무 많은 것 같소이다."
주모는 토끼눈을 하고 박지화를 쳐다보았다. 하기사
남정네가, 그것도 버젓한 양반 차림을 한 선비가 상을
받아들겠다니 놀랄 만도 했다. 제 정신을 가진
사내라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 싶었을 것이다.
남자가 부엌만 들여다봐도 팔푼이로 취급받는 세상이
아닌가.
박지화는 우뚝 멈추어 선 주모에게서 상을
빼앗다시피 받아들고 뚜벅뚜벅 방으로 걸어갔다.
"저녁 진지는 쪼깨 기달려야 쓰것소."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린 주모가 말했다.
"술이면 됐소. 힘드실 텐데 천천히 준비하시오."
부엌에서 여인네들이 낮게 소근거리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이따금 간드러지는 웃음소리도 섞여
나왔다.
"선생님, 안 잡수시겠습니까?"
"난 괜찮네."
"그럼 저희 먼저 마시겠습니다."
배가 출출했던 터라 술 한 병이 금세 비었다. 곧
밥이 오겠지 싶어 술을 더 청하지 않고 기다렸으나
주모는 함흥차사였다. 어둠이 내린 지 제법 오래
됐는데도.
"무슨 별미를 차리길래 이리 늦나. 주모, 주모."
기다리다 못한 박지화가 빈 술병을 거꾸로 잡아들고
숨가쁘게 주모를 불렀다. 주모는 박지화의 목청이 쉴
때쯤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주모는 무슨 못된 짓이라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쭈빗거리며 흘깃흘깃 세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밥이 늦거든 술이라도 더 마셔야겠소. 술 더
없소?"
"예. 후딱 올립지요."
주모는 놀란 닭처럼 후다닥 부엌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술병을 들고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왔다.
얼마나 빨리 뛰었는지 주둥이가 좁은 술병에서 술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허리까지 굽은 노인네가 동작
하나는 열여섯 살 처녀애보다 잽쌌다.
"쯧쯧. 이렇게 급하시긴."
좀체 남 타박이라곤 할 줄 모르는 화담이 낮게
중얼거렸다. 별로 안색이 좋아 보이질 않았다.
"선생님.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아닐세."
"과부촌이라니 기분 좋으실 리가 있겠나?"
약방의 감초처럼 박지화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생각해보게나… 아, 아닐세. 괜한 걱정을 미리 할
필요야 없지.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터이니…"
무슨 말인지 박지화나 지함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시방 상을 들여도 되것는가요? 때가 늦어서 시장들
하실 텐디…"
주모 뒤에는 젊은 여인네 둘이 푸짐하게 차린 상을
들고 서 있었다. 두 여인은 주모가 열어준 문으로
상을 들여놓고는 조용히 사라졌다.
상차림이 그야말로 산해진미였다. 온갖 생선에
갖가지 나물, 그리고 어디서 구했는지 쇠고기까지
올라 있었다.
"정성껏 차리긴 했는디 입맛에 맞으실란가
모르것소이."
"아이고. 이거 나랏님도 부럽지 않구만그래. 어쨌든
고맙게 잘 먹겠소이다."
"글먼, 맛나게 잘 드시씨요이."
상차림이 과하다 싶어 부담스러웠지만 보름동안
허기졌던 배가 벌써 요동치기 시작했다.
"난 생각 없으니 자네들이나 맛있게 들게. 난
바람이나 쐬면서 기를 채움세."
지함도 박지화도 이제는 먹을 것만 앞에 두면
자리를 뜨는 화담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화담이 밖으로 나가자 박지화는 냉큼 숟가락을
집어들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디 일단 먹고 보지라."
박지화가 어느새 익힌 전라도 사투리로 익살을
떨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그동안 먼길에 지친 몸이
노곤하게 가라앉았다. 상만 치우면 쓰러져 자야지
하고 있는데 주모가 샐쭉 얼굴을 내밀었다.
그림자처럼 주모를 뒤따라 온 여인네들이 날아갈 듯한
걸음으로 상을 내간 후에도 주모는 방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서 있었다.
"무슨 일이오?"
"저, 방을 깨깟이 치워놨는디라. 상 물린 방을
치울라먼 시간이 걸릴 텡께 딴 방으로 옮기는 거시
좋것그만요."
"그럴 것 없소이다."
지함이 괜찮다고 말을 했으나 주모는 막무가내로 방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별 수 없이 두 사람은 짐을
들고 주모를 따라 방문을 나섰다.
"어르신께서 들어오시면 이 방을 쓰시라 하시고, 두
분은 지를 따라 오시씨요."
"아니, 우리 모두 한 방을 써도 괜찮습니다."
박지화가 주모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사 쓰간디요. 방도 작은디 어르신께서는
여그서 편히 쉬시는 게 좋구만이라. 두 분도 따로따로
주무셔야 피로가 깨깟이 풀리지라."
주모는 뒤뜰로 가서 담 하나를 지나더니 이웃한
별채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희뿌연 달빛 속이지만
별채는 제법 깔끔하고 운치 있는 모습이었다.
"자, 여기로 이 분이."
주모는 박지화를 바라보며 별채를 가리켰다. 그리고
지함에게는 뒤쪽으로 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우리까지 각 방을 쓸 게 뭐 있소. 번거롭기만
하지. 우리는 같이 있겠소."
지함이 극구 사양했지만 주모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벌써 뒷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박지화는 별
거리낌없이 주모가 안내한 방에 들어갔다. 지함은
어쩔 수 없이 주모의 뒤를 따랐다. 별채 뒷쪽에도
제법 큰 방이 하나 있었다.
"아니, 주모. 이렇게까지 잘 해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숙박비도 넉넉지 못한 떠돌이 객인데."
"아따, 선비님도 무신 말씸을 고래 정떨어지게
하신다요? 돈 더 받아묵을라꼬 그런다먼 천벌이 내릴
것이그만요이. 성의니께 맴 놓시씨요."
떠밀리다시피 방 안에 들어서자 벌써 깨끗한 침상이
곱게 깔려 있었다. 손님도 없는 주막이라더니 여느
주막에 비길 데 없이 정갈했다. 신혼방 같은 화사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문풍지로 젖빛 달빛이 흘러들었다.
송도를 떠나온 지 어느새 석 달, 화담 산방을 나선
것이 바로 오늘 아침의 일인 듯도 하고, 헤아릴 수도
없이 까마득한 전생의 일 같기도 했다. 끝없이 이어진
길에서 마주쳤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또렷하게
떠올랐다.
늙은 어부는 지금 어느 바다 위에 떠 있을까?
고개에서 만난 장사꾼들은 어느 장터를 찾아 떠돌고
있을까? 안 진사는 오늘밤도 감 저장법을 궁리하느라
뒤척이고 있을 테지.
스르르, 기분좋게 눈이 감겼다. 가벼운 솜이불이
달빛처럼 지함의 몸을 다독였다. 지함은 아득하고
평온한 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때였다.
방문이 후다닥 열렸다. 잠결에 지함은 벌떡
일어났다.
달빛을 등지고 우뚝 선 시커먼 그림자는
박지화였다.
"이보게, 지함."
박지화의 음성은 격앙돼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쉽게 잠을 떨치며 지함이 물었다.
"사내 대장부가 머 그깟 일로 난리다요?"
박지화가 대답도 하기 전에 주모의 씩씩한 음성이
들려왔다.
"허허. 내 참."
박지화는 말도 하지 못하고 헛웃음만 피식거렸다.
"무슨 일이오?"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지함은 밖으로 나갔다.
그때, 달빛 아래 저만치에 희미한 그림자 둘이
고개를 외로 꼬고 수줍게 서 있는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다름이 아니라 주무시기에 적적하시것다 싶어
처녀를 한 명씩 합방시켜 드릴라고 혔더니 저
난리시라우. 사내가 그 만한 일을 갖구설랑."
주모는 무안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일로
펄쩍펄쩍 뛰는 박지화를 비꼬는 듯한 투였다.
성미 급한 박지화가 발끈하고 나섰다.
"그만한 일이라니? 우리를 뭘로 보고 이러는 거요?"
박지화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그제사 주모는 목을
자라처럼 움추렸다.
"선비님들께서 해사 마을을 쫌 살려주시씨요이.
사내가 워낙 없응께 이런 짓까지 안 허요. 지발 씨
쪼깨 얻읍시다이."
주모는 축축하게 젖은 눈으로 애처롭게 애원했다.
"허허. 이러니 내가 소리치지 않을 수 있겠나!"
박지화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주모는 저만치 서
있는 여인네들을 불렀다.
"이리들 오그라."
두 여자가 잔뜩 고개를 숙인 채 다가왔다. 둘 다
젊고 뽀얀 얼굴이었다. 특별하게 몸단장을 했는지
머릿결도 곱고 예뻐 보였다. 머리를 틀지 않은 걸
보니 혼인을 하지 않은 처녀들인 모양이었다.
"이 아그덜이 선비님들 침상을 준비했그만이라.
잡수신 음식도 다 야들 손이 간 것이고라. 안즉
시집도 못 간 불쌍한 것들인디, 해사 여인네는
타지에서도 안 받아주는 것을 어쩌것소이. 시집만
갔다 허먼 서방을 잡아묵는다고 소문이 나갖고
안그러요. 암 것도 바라는 것 없그만요. 다만 씨나 좀
받자는 것이제. 마침 사날 전에 달거리를 마친
아그들이라 씨 받기에 좋은 때고…"
주모는 청승맞은 얼굴로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말을 막지 않으면 밤새도록이라도 하소연할 기세였다.
박지화가 낭패한 기색으로 지함을 돌아보았다.
"알았으니 그만 하시오. 예서 잠깐 기다리시오."
지함은 박지화와 함께 마당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사랑채로 달려갔다. 화담이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돌아와 있었다.
"선생님. 잠시 뵙겠습니다."
곧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가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놀라운 얘기였을 텐데 화담의 표정에는 전혀 동요가
없었다.
"그러니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두 사람 다 그렇게 눈썰미가 없는가? 남정네도
없는데 아이들은 어디서 생겼겠는가?"
지함은 더 들어볼 것도 없이 화담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내가 한 오년 전에 이곳을 다녀간 적이 있었다네.
그때나 지금이나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자네들은 알게 될 걸세. 사내 대장부 하는 일이
일마다 다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닐세. 물러들 가보게."
지함도 박지화도 다시 한번 놀랐다.
화담은 벌써 이 마을의 풍속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강진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일부러 이쪽 해사
마을로 들어선 것은 아닐까? 두 사람은 이런
의구심까지 들었다.
게다가 벌써 다녀간 적이 있었다니 지함으로서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려고
이런 곳, 이런 기이한 인연 속으로 제자들을 이끄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화담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돌아앉아 좌정에
들었다.
후원으로 물러나오면서 박지화가 투덜거렸다.
"우리 보고 어쩌라는 말인지 알 수가 없구만.
도대체 다 알고 계시면서 왜 이런 마을로 우릴
데려오셨단 말인가?"
"우리 생각대로 하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자네는 선생님 말씀을 그렇게 받아들였나? 난 그와
정반대로 생각했네만."
"스승님 뜻이 따로 있겠지요. 이 동네 내력을 이미
알고 계셨다면 저희더러 그 뜻을 읽어내란
말씀이시겠지요."
"그럼, 자네는 저 여인들을 받아들이겠단 말인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지함이 단호하게 말했다.
"예. 저는 받아들이겠습니다. 사람의 처지가
범절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람의 처지를 돌보지 않는
범절이 어찌 범절이겠습니까?"
"하긴, 듣고 보니 그 말도 맞긴 하네. 해사 여인들
처지가 안 되긴 안 됐네. 하지만..."
박지화는 아직도 마음을 굳히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이 많고 따뜻한 사람인지라, 딱한 운명에
매여 있는 여인을 매정히 내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지함은 고민하는 박지화를 남겨 두고 먼저 성큼
걸음을 옮겼다.
지함이 방으로 들어서자 잠시 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지함은 잠시 날짜를 짚어보았다.
오월 스무하루.
"여자를 만나게 되어 있구만."
화담이 일부러 해사 마을로 인도하지 않았어도 이미
예정되어 있는 일이었다.
"내 인연, 내가 받을 운명이라면 내 스스로
뛰어들리라."
방문이 열리면서 한 처녀가 조심스레 들어섰다.
소매깃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등 뒤에서 주모가
문을 닫아 주고는 도둑 고양이처럼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처녀의 볼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지함은 찬찬히 처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선이
굵고 분명했다. 콧등이 오똑하게 일어서서 제법
고집이 셀 것 같은 인상이었다. 내리뜨고 있는
눈동자가 방 안 분위기를 엿보는 것인지 살짝 들릴
때마다 검은 눈동자가 고혹적으로 빛났다.
이것도 업인가? 몇 날 밤 같이 지내지도 못한
부인을 제외하고는 지함이 가까이 겪은 여자마다
비슷한 인상이었다. 영원히 지함의 가슴 속에 묻혀
있을 민이도, 기생 선화도, 지금 눈 앞에 있는 이
여인도 모두 비슷비슷했다.
민이… 세상이란 참으로 가혹하다. 민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그 긴 손가락에
입맞추고 광대뼈가 보기 좋을 만치 불거진 뺨에
얼마나 볼을 부비고 싶었던가.
그러나 살내음 한번 제대로 맡아보지 못했는데,
민이는 운명에 밀려 지함의 곁을 떠나가고 말았다.
그런데 꿈도 꾸지 않았던 이 낯선 여인이 자신의
처녀를 바치기 위해 지함의 앞에 다소곳이 서 있는
것이다.
"후우."
지함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민이의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돌탑을
쌓으면서 잊고 또 잊고, 버리고 또 버렸건만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그 진한 그리움을 화담이
알아차린 것일까.
"저, 절 받으시옵소서."
떨리는 처녀의 음성에 지함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절…?"
그러는 사이에 처녀는 공손한 자태로 큰절을
올렸다.
처녀는 다리를 모으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입술을
깨물면서 가만히 서 있었다. 한참 만에야 지함은
처녀가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마을의 오랜 풍습에 따라 제 발로 남자를 찾아온
여자이긴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단 한번도 남자를 겪지
못한 처녀의 수줍음이 엿보였다.
"앉으시오."
그제사 처녀는 자리에 앉았다. 첫날 밤을 맞은
새색시처럼 지함을 등지고.
그게 무슨 뜻인지 지함은 한참 생각했다. 별로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은 자신의 첫날 밤을
기억하고서야 비로소 지함은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이 처녀에게는 이 밤이 혼인인 것이다. 그래서
신부가 하듯이 몸단장을 하고 절을 올린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지함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다. 처녀의 어깨가 잔잔하게
들먹거리더니 숨죽인 흐느낌이 들렸다. 처녀는
오래도록 그렇게 흐느끼며 앉아 있었다.
지함은 그녀가 제 풀에 지칠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그런 슬픔은 남의 위로로 가시지 않는다는 것을
지함은 잘 알고 있었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제대로 예도 갖추지 못하고
길 가는 나그네와 첫 밤을 보내야 하는 운명이…
이 눈물이 이 처녀와 이 마을에 내린 서러운 운명을
걷어가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처녀의
순결한 눈물로도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희망한다고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이미 고통은 더이상 고통이 아니리라.
얼마나 지났을까? 그야말로 장구한 세월이 흐른
듯했다.
별빛도 오랜 어둠에 지쳐 졸고 있을 만한 시간,
차츰 처녀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싫으시면 그냥 주무셔도 됩니다. 소녀, 이대로
있겠습니다."
자기 운명에 대한 마지막 반항일까?
민이도 그랬다. 자기 운명 앞에서 절대로 무릎 꿇지
않았다. 스스로 죽음을 택할지언정.
"뭐라 부르오?"
"이름은 알아 무엇하시겠습니까? 하룻밤 바람처럼
스쳐가는 인연인 걸요."
처녀는 의외로 꼿꼿했다. 말을 받아치는 것이
민이의 당돌한 성품 그대로였다.
"그 말은 맞소만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라오. 난 떠밀려 인연을 맺고 싶진 않소. 말해
보시오."
처녀는 잠시 망설였다.
"희수라고 부릅니다. 기쁠 희(喜)에 빼어날
수(秀)이옵니다. 선비님 함자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지함이라 하오. 고향은 홍성현이오. 처자의
성씨는 무엇이오?"
"본 성씨는 모르옵니다. 어머니의 성이 강씨라
어머니를 따르옵니다."
본 성씨를 모른다? 그녀의 어머니도 그녀처럼
지나가는 사내에게서 아이를 받았는가?
"희.수. 예쁜 이름이오. 이곳 풍습이 그러하여
부지불식간에 한방에 앉아 있기는 하더라도 이름은
알고 싶었소. 나이는 몇이오?"
"올해 열일곱이옵니다. 얼마 전 생일을 지났습니다.
단옷날이 제 생일이지요."
지함은 눈을 감고 희수의 사주를 떠올렸다.
열일곱, 오월 오일.
"태어난 시는?"
"사주를 보시옵니까?"
"그저 알고 싶을 뿐이오."
"이른 새벽닭이 울었다 하옵니다."
지함은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희수의 사주와
자신의 사주까지 짚어보는 중이었다.
어린 처녀라 금세 슬픔을 잊었는가, 희수는 조금
전의 부끄러움과 눈물까지 잊고 신기한 듯 지함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戊辰 戊午 戊戌 甲寅
선친과는 인연이 박한 사주였다. 가족이 구성조차
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남편도 둘 수 없는 데다가
남자의 손을 타지 못하는 고독한 운수를 타고 났다.
거기에 떠돌이 기운이 있어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방랑기까지 있었다.
화담처럼 처녀의 전생까지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함은 무슨 영문으로 이렇게 만나야 하는지 먼
사연이 궁금했지만, 아직 전생까지는 꿰뚫어볼 수가
없었다.
"그대는 아들을 낳고 싶소, 딸을 낳고 싶소?"
지함의 엉뚱한 질문에 희수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이내 또렷하게 대답했다.
"아들이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이 마을에 있으면 어차피 죽을 테고
그렇지 않으면 어미의 품을 떠나야 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딸은 싫어요. 저처럼 사는 것보담야 비록 부모
그늘을 떠나 살더라도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는 편이
낫죠. 거렁뱅이 신세가 되더라도…"
제법 다부진 말이었다. 지함은 희수의 똘망똘망한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더 아팠다.
땅의 음기가 성해 견디지 못하는 남자들이야 땅을
떠나면 되지만, 이곳 여인네들은 다른 지방 어디서도
받아주지를 않아 마을을 뜰 수도 없는 신세였다.
그래서 이 불쌍한 해사 마을의 처녀들은 오로지
평생에 한번 하룻밤 인연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대를 이으며 불행한 운명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단 한번의 교접으로 아이를
잉태할 뿐, 남녀간의 애틋한 정도, 음양 화합의
기쁨도 모르는 채.
지함은 떨리는 손으로 희수의 옷고름을 잡아당겼다.
솜씨 좋은 아낙이 맨 듯 고름은 수월하게 풀렸다. 단
한번도 사내의 눈길이 닿지 않은 순결하고 희디흰
가슴이 드러났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가슴은 탐욕의
대상이 아니었다. 새로 태어날 아이의 편안한
휴식처일 뿐.
인간으로서 운명을 어찌할 수 없다면, 이들에게
잉태란 가장 소중한 삶의 과정이리라.
지함은 부드러운 치맛자락을 따라 허리를
감아들었다. 희수가 스스로 허리띠를 풀었다. 대담한
것까지 어쩌면 그렇게 민이를 닮았는가.
지함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가 민이가
아닌가 하고 몇 번이나 희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지함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끝없이 따라붙는
민이의 상을 떨쳐버렸다. 이 여자는 민이가 아니다.
희수다. 민이가 아니다.
희수는 슬며시 몸을 비틀어 남은 허물을 마저
벗었다.
등이 고왔다. 미끈하게 뻗어내린 등이 곱게
흘러내려 우아한 엉덩이로 이어졌다. 까만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귓볼은 도톰하고 똑 떨어질 듯
매끈했다. 그 아래로 불그스레한 홍조가 입술께까지
번져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대하는 여체였다. 그러나 지함에게는
지난 날과 같은 색에 대한 탐이 사라지고 없었다.
단지 잉태를 위하여, 대를 잇기 위하여 두 사람은
정성스런 마음으로 서로의 몸으로 다가섰다.
멀리서 첫 닭이 울었다. 토실한 어깨를 이불 밖으로
내놓고 잠들어 있던 희수가 닭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지함은 짐짓 잠든 체 하며 미동도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사그락거리며 옷 입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옷을 다 입은 희수는 슬픈 눈으로 지함을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눈에 맑은 눈물이 차올랐다.
일생 단 한번의 남자, 단 한번의 인연. 그러나 그
남자는 잠시 후에 떠나버릴 것이다. 언제 다시 보자는
약조도 없이.
지함은 더 이상 그대로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반듯이 앉았다. 뭔가 이별사를 하지
않고는 그 자신이 견딜 수 없었다.
"원대로 아들을 낳게 될 것이오. 아들을 낳거든
규철(圭澈)이라 부르시오. '맑은 물가에 홀로 서
있다'는 뜻이오."
희수가 맥없이 지함의 품으로 무너졌다.
"누가 아이의 성을 묻거든 이 씨라고 하시오."
지함의 다음 말에 희수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가냘픈 어깨가 들먹였다.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알 수는 없으나
당신을 잊지는 않겠소."
지함은 큰손으로 희수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아니,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왜 이렇게 마주앉아 있겠소?"
지함은 자신의 말을 확신할 수 없었다. 단지 희수를
위로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좀체 눈물을 그치지 않던 희수는 얼마 후 눈물을
깨끗이 닦아내고 살며시 일어섰다. 그리고 지함에게
공손히 큰절을 올렸다.
희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미처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쌀쌀한 새벽 바람이
새들어 왔다.
희수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마당을 빠져 나갔다.
그것이 희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침 일찍 화담과 지함, 박지화 세 사람은 주막을
나왔다.
해사 마을을 다 빠져나가도록 누구도 간밤에 겪은
일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화담 일행은 초여름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강줄기를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들마다 모를 심느라 박자를
맞추는 구성진 노래가락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평양감사, 전라감사가 최고라는 말이 나올 법하게
호남 땅은 너르고 기름졌다. 유난히 맑은 강가에는
군데군데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고, 쇠꼴을
뜯기러 나왔을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강물을
첨벙거리고 다니며 고기떼를 쫓고 있었다.
한나절을 부지런히 걷자 등줄기가 후끈한 게 땀이
줄줄 흘렀다.
"어이구, 선생님. 숨 좀 돌리고 가시지요. 사약을
받는다 해도 저는 좀 쉬어야겠습니다."
해사 마을을 떠난 뒤 박지화가 처음 입을 열었다.
"그러시지요. 선생님. 선생님은 어디서 그렇게 힘이
나시길래 지치지도 않으십니까?"
지함도 화담에게 쉴 것을 청했다.
"앉을 자리를 살펴보게."
화담의 명을 받자마자 박지화는 얼른 들 복판에 서
있는 소나무숲에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농부들이
일하다 잠시 쉬려고 만들어놓은 소나무 그늘이었다.
"선생님, 좀 눕겠습니다. 제발 선생님도 좀
쉬십시오."
박지화는 양반 차림이고 뭐고 가릴 것도 없다는 듯
봇짐을 베고 덜렁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화담이
못 이기는 척 눕는 것을 보고난 뒤 지함도 그 옆에
팔을 베고 누웠다.
그늘이 닿지 않는 쪽으로 누구의 것인지 제대로
손질도 되지 않은 무덤이 오두마니 자리잡고 있었다.
아마도 배를 태워준 노인처럼 평생 땅 한 평 갖지
않고 살았던 누군가의 무덤일 것이었다. 그래서
죽어서나마 너른 들을 품에 안은 듯 누워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을 쪽 논두렁으로 자기 몸집 만한 함지를 이고 한
손에는 오지병을 든 여인네들이 줄을 지어 숲으로
왔다. 해를 보니 벌써 점심 때였다.
"어이. 밥 왔네. 어여 한술들 뜨고 일허소."
허리가 굽기 시작한 반백의 할멈이 늦가을 참새를
쫓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치자 모를 심던 농부들이
흙투성이 손을 바지에 썩썩 비벼 닦으며 나와 숲속
지함 일행의 바로 곁에 자리를 잡았다. 시커먼
꽁보리밥이 군침을 돌게 했다.
"선비님들, 한 술 드실라요? 꽁보리밥이제만
시장하시먼 한 술들 뜨시요."
그들이 권해오자마자 지함 일행은 염치불구하고
그들 쪽으로 돌아앉았다. 젓갈을 듬뿍 넣고 갓 담근
김치가 입에서 살살 녹았다. 호남 맛이 제일이라더니
빈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찬이라곤 김치 한 가지에 넘쳐 흐른 된장국이
고작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맛난 점심이었다.
"니미럴. 쌀 한말도 못 얻어왔는갑네. 창고서 썩는
쌀인디 좀 주먼 어쩐다고 시커먼 보리쌀이여?"
땅딸막한 키에 다부진 몸을 가진 젊은이가 불퉁스런
말을 내뱉었다. 나이 지긋한 노인네가 지함 일행을
곁눈질하며 입 다물라고 옷자락을 슬그머니
잡아당겼다. 그래도 젊은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것도 그냥이나 주간디. 작년에 갖다 묵은 것이나
갚으라고 난리를 치는디 갚을 것이 있으먼 뭐한다고
빌리러 갔것어. 아침 나절 내동 손이 발이 되게
빌었그만. 그나저나 올해는 풍년이 들어야 빚도 갚고
그럴 것인디. 빚은 눈뎅이같이 불어가고 우쩨
살어야헐지 모르것네."
밥 먹으라고 외치던 할멈이 아들인 성싶은 사내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아따 풍년이 들먼 머 우리한테 떡고물이라도
돌아온답디여? 풍년이먼 풍년이랍시고 싹 쓸어갈
것인디…"
불평을 늘어놓는 젊은이 옆에서 노인이 자꾸
젊은이의 옆구리를 찔벅거렸다. 화담 일행이 영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하기사 누가 봐도 양반
차림이었으니 노인이 켕겨 하는 것이 당연했다.
서슬 푸른 양반이라면 젊은 사내의 말을 듣고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관청으로 끌고가 치도곤을 내도
찍소리하지 못할 불충스런 말이었던 것이다.
"아따, 아부지는. 시방 내가 틀린 말 했소? 뼈
빠지게 일하먼 먼 소용이냐 말이요."
젊은이는 아버지에게 심통을 부렸다.
"괜찮소이다. 양반이긴 하오만 양반임을 자랑스레
내세우고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올시다. 괘념치
마시오. 그나저나 여긴 들이 제법 넓은데 그래도
살기가 피곤하신 모양이지요?"
화담이 노인에게 말을 건넸다.
"들이 넓으먼 뭐한다요? 일만 많고 뺏기는 것만
많제. 차라리 나는 것이 적으먼 굶는 것이사 하늘의
뜻이려니 허고 체념이나 할 텐디 가을걷이 때 한번
와보씨요. 달구지 수십 대가 줄줄이 서갖고 쌀을 싣고
가는디, 그걸 보는 우리 맴이 어떻것소. 불이라도 확
싸지르고 싶어진당께요.
봄에 빌어묵은 보리쌀 몇 말이 가실에는 쌀 한
가마로 둔갑허는 것도 미칠 일이제만 이자는 고래
받아 쳐묵음서 소작료라고 주는 것은 쥐새끼
오줌만큼도 안 된다요. 빌어묵을!"
"어느 세상에는 안 그랬드냐. 세상살이가 다
고역이제. 부자고 가난뱅이고 양반이고 쌍놈이고 다
마찬가지다."
노인은 잡초가 무성하게 웃자란 무덤을 덧없이
바라보았다.
"노인장의 말이 옳소. 양반이나 상민이나 무어
다르겠소. 똑같이 흘러가는 강물일 뿐."
"양반이시라 멀 모르는갑는디 양반과 상민은 하늘과
땅 차이요. 뭐가 똑같다요? 양반은 따신 이밥에
호의호식허고, 상놈은 실컨 일하고도 두 끼 밥도
챙겨먹기 어려운디 뭐가 똑같소? 선비님도 한번 배를
곯아보시오. 이놈의 세상이 똑같이 보이는가."
젊은 사나이가 매처럼 날카로운 눈을 번득이며
화담의 말을 쏘아부치고는 그 지긋지긋하다는 일을
찾아 가버렸다. 화담의 눈 가에 잔잔한 주름이
잡혔다.
"미안허요. 피가 끓는 나이라 불퉁거려 쌓지만
심성은 고운 애니 이해하시씨요이."
"아닙니다. 외려 제가 속끓는 말만 했나 봅니다."
화담은 여전히 그늘진 기색으로 봇짐을 챙겼다.
"덕분에 점심 잘 했습니다. 그럼 고생들 하십시오."
꽁보리로 헛부른 배를 문지르며 농부들은 다시
못줄을 잡거나 허벅지까지 걷어붙인 차림으로 논에
들어섰다. 화담은 두툼한 입술을 꾹 다물고 길을
재촉했다.
오월의 바람은 제법 선선했지만 태양만은
한여름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수양버들이 휘늘어진
가지를 흔들고 있는 너른 들 사이로 황톳길이
아스라히 이어져 있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