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들, 두 개의 시간 사이에서
―이혁래•김정영 <미싱타는 여자들―전태일의 누이들>
다큐멘터리 <미싱타는 여자들>(2019)은 초봄이나 겨울 초입쯤의 너른 공원 언덕을 향해 걸어가는 세 여인의 모습을 롱테이크로 따라가며 시작한다. 언덕이 지평선을 이루는 풍경에서 무엇보다 크게 잡히는 것은 구름이 수놓인 파란 하늘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 번 반복될 아름답고 서정적인 기타 음악 사이로 세 여인의 대화가 들려오고 그이들이 지금 가고 있는 곳이 언덕 위에 놓인 세 대의 미싱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연출’된 오프닝 시퀀스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파란 하늘과 광활한 들판의 맑은 공기 속으로 이 여인들의 ‘미싱 타는’ 노동의 시간을 돌려주려는 영화의 의지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세 여인 중 막내인 임미경이 말하는 대로(임미경은 1974년경 시다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이들이 사오십 년 전 시다로, 미싱사로 일하던 작업장 공간은 너무도 좁지 않았나. “작업장은 약 8평 정도. 재단판과 열너댓 대 되는 재봉대(미싱다이)와 거기에 맞붙은 시다판들이 가뜩이나 비좁은 방 안에 꽉 들어차고, 그 틈서리 틈서리에 핏기 잃은 창백한 얼굴의 종업원 32명이 끼어 앉아 일한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약 1.5미터 정도. 이것이 저 악명 높은 평화시장의 다락방이다. 원래는 높이 3미터 정도의 방이었던 것을 공중에다 수평으로 칸막이를 하여 그것을 두 방으로 만든 것이다. 이 넓고 넓은 세상에 왜 그녀에게는 이렇듯 좁은 공간밖에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 여공들은 허리를 펴고 걸어 다닐 수가 없다. 청계천6가 쪽 고가도로를 차를 타고 달리면서 이 작업장들을 보면 마치 무슨 돼지우리나 닭장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전태일평전>, 조영래 지음, 2020 개정판, 108쪽) ‘다락방 속의 하루’라는 소제목이 붙은(소제목은 개정판을 내면서 편집자가 붙임) 평전의 이 대목은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까? 평화시장의 저 참혹한 노동에 관한 이야기를……/여기 열세 살의 한 여공이 있다고 하자. 그 아이의 이름은 시다, 평화시장의 시다이다”로 시작된다. 이곳 말고도 평전 곳곳에서 익명의 ‘시다’로 형상화되는 인물이 세 여인 중 한 명인 ‘신순애’다. 평전 집필을 위해 평화시장 어린 여공들의 생활을 알고 싶어 한 조영래에게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소개해준 이가 바로 그이였던 것이다(신순애, <열세 살 여공의 삶>, 한겨레출판 참조). <미싱타는 여자들>에서는 전체적으로 증언자들에 대한 신상 정보를 최소화하는데, 선입견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1966년 열세 살 나이로 평화시장에서 시다 생활을 시작한 신순애는 세 여인 가운데 큰언니 격인데, 잠시 뒤 이들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그이의 딸이 엄마의 설명을 듣고 그려준 그림 속에서 ‘시다판’ 앞에 무릎을 꿇은 채 허리를 굽히고 일하는 모습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신순애는 2014년 <열세 살 여공의 삶>이라는 책을 냈고, 그림은 여기에 실렸다). 신순애는 그림 속 자세로 몸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하루 열네 시간씩 일하던 그 시절을 돌아보며, “죽으려고 한 짓 같았다”고 증언한다. 신순애의 등은 지금 꽤 굽어 있다. 세 사람 중 가운데 나이인 이숙희는(자료를 찾아보니 1969년에 평화시장에서 시다 생활을 시작했다) 얼떨결에 참석한 전태일 일주기 추도식이 전태일과 청계피복노조를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후 교육선전부장을 맡는 등 열성적으로 노조 활동을 이어간 이숙희는 이번 다큐멘터리에서도 벌어진 사태를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정확하게 복기하고 성찰하는 중요한 증언자의 역할을 맡는다. 임미경은 나중에 보름간 계속된 철야 노동 끝에 ‘파란 하늘을 보고’ ‘남산 아래서 자고 싶다’는 단 하나의 목표로 점심시간에 동료 시다 둘과 함께 작업장에서 도망쳤던 한나절의 실패한 ‘탈주’에 대해 우리에게 들려주게 되는데, 이들 모두에게 ‘파란 하늘’ ‘맑은 공기’ ‘드넓은 공간’ 속에서 미싱 일을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한 소망이었으리라.
신순애, 이숙희, 임미경―세 사람의 증언자 소개를 겸한 오프닝 시퀀스가 더 알려주는 것은 꿈꾸는 듯한 풍경을 감싸고 있는 환하고 밝은 기운인데(들판 언덕에서 미싱을 타는 세 여인은 정말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다), 놀라운 것은 그 서두의 활기가 드물게는 승리와 행복의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로는 참혹하게 짓눌린 암담하고 부당한 시간들로 채워진 과거 ‘청계’ 시절과의 대면에, 그러니까 다큐멘터리 전체에 시종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싱타는 여자들>이 다루는 핵심적인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일방적인 ‘노동교실’ 폐쇄에 맞서 싸운 1977년 9월 9일의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 사수 투쟁’인데, 기실 노조 지도부와 무관하게(지도부를 보호할 목적으로) 조합원들 중심으로 진행된 노동교실 점거 농성 투쟁은 신순애, 이숙희, 임미경, 신승철, 김주삼 등 5명의 조합원 구속과 9명의 즉결심판 회부(3층에서 투신한 민종덕은 척추를 크게 다치고, 신승철 김주삼 박해창은 배와 손목을 유리로 그으며 저항했다. 전순옥과 임미경은 제2의 전태일이 되겠다며 투신을 각오하고 창틀에 올라섰으나 동료들이 제지했다)로 끝나고, ‘노동교실’ 폐쇄 철회와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석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각계 민주세력에게 큰 활력소가 되었다”는 ‘외부’의 평가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이 결사 투쟁은 긴급조치 9호의 위세에 눌려 침체 상태에 빠져 있던 각계 민주세력에게 큰 활력소가 되었다. 이후 청계피복노조는 1981년 1월 6일 서울시장으로부터 해산 명령을 받자 격렬한 항의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합법성 쟁취를 위한 끈질긴 노력 끝에 마침내 1984년 법외노조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사수투쟁’(『한국근현대사사전』, 2005. 9. 10, 한국사사전편찬회)
와는 달리, 다큐멘터리의 증언들에 따르면 ‘9•9사건’ 이후 노조의 힘은 약화되고, 조합원들 사이에도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큐멘터리의 주요 증언자인 임경숙은 점거 농성 후 즉심에 회부되어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30일간 구류를 살게 되는데, 그 사실을 가족이나 조합원 누구도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경찰과 검찰을 동원한 정권의 어처구니없는 용공 몰이(투쟁일인 9월 9일(건물주가 노동교실을 비우라고 통보한 날이 9월 10일)과 이소선 여사에 대한 ‘어머니’ 호칭을 북한과 연결 지으려고 함)에 재판부까지 동조하는 상황이었다(‘그래도 판사님은 정의로운 판결을 하리라 기대했다’는 임미경의 증언이 있다. 1962년생인 임미경은 형사미성년자 나이인데 1960년생으로 주민등록을 위조하여 구속 기소한 삽화는 야만의 시대를 웅변한다). 검경은 ‘여공들’을 ‘빨갱이’로 몰면서 면회는 물론 일체의 물품 반입을 금하는데, 보름간 속옷을 갈아입지 못한 고통을 전하는 신순애의 증언은 차마 듣고 있기가 힘들 정도다. 그러나 이런 야만적 탄압보다 더 힘든 일이 조합원 내부의 신뢰 약화일 텐데, 외부적 상황의 악화에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임경숙이 겪은 고립감은 9월 9일 투쟁이 청계피복노조 내부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의 한 자락이었을 테다. 요컨대 1975년 2월 7일의 ‘1차 노동교실 폐문 항의 투쟁’의 승리와는 달리, 1977년의 ‘9•9 노동교실 사수 투쟁’은 ‘청계’ 노동자들 내부에 많은 상처와 좌절의 기억을 남겼던 게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그 쓰라린 증언들을 힘들게 전하면서도 <미싱타는 여자들>은 그 시간들이 동시에 자존감으로 이루어낸 긴 승리의 하루하루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한다.
다큐멘터리의 기획 중에는 이들의 초상화를 그려내는 작업이 포함되어 있는데, 화가 노석미는 인터뷰어로서 신순애, 이숙희, 임미경의 이야기를 듣는다. 노석미는 세 사람 각자가 생각하는 자신의 색을 묻고, 빨강, 연두, 분홍은 그이들 초상화의 테마 색이 된다. 그러니 그이들의 화면 속 현재 얼굴이 이중노출 방식으로 초상화와 겹쳐지는 순간은 다큐멘터리의 수사학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의 자기 언급의 일부다. 초상화는 직접 자신의 색을 이야기해준 이들 세 사람 말고도 70년대의 어느 날 평화시장 옥상 노조 사무실 앞에서 즐겁게 단체 사진을 찍은 이들 모두에게 돌아가고, 그 변환의 순간이 다큐멘터리의 감동적인 마지막을 이룬다. 어쩌면 그 단체 사진 속 여성들 중에는 ‘9•9 사건’ 이후 강압에 의해서든 다른 이유에서든 노조를 떠나야 했던 이들도 있을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청계’의 기억을 잊고 싶었던 이들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다큐멘터리 후반부에는 ‘이제는 다들 어떻게든 만나봐야 하지 않나’ 하는 증언이 나온다). 신순애, 이숙희, 이미경 세 사람을(이들은 계속 노동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계’의 대표 발화자가 아니라 그들의 일부로 단체 사진 속에 다시 자리 잡게 하는 일은 그 때문에도 더 긴요했으리라 짐작된다.
다큐멘터리가 ‘9•9 사건’을 향해 나아가고 다시 현재의 시간으로 돌아오는 동안 <미싱타는 여자들>을 하나로 묶는 특별한 공간이 떠오른다. 증언자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발화된 단어이기도 한데, 바로 ‘노동교실’이다. 고쳐 말한다면 <미싱타는 여자들>은 청계피복노조의 ‘미싱타는 여자들’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청계피복노조 속 ‘노동교실’의 ‘미싱타는 여자들’을 향해 가는 다큐멘터리다. ‘노동교실’의 정확한 명칭은 ‘청계피복노조 새마을 노동교실’로서, ‘청계피복노조’와 ‘새마을’의 어색한 동서(同棲)에 이 특별한 학교의 기원이 새겨져 있다. 이숙희의 증언에 따르면, 노조 부녀부장이던 ‘정인숙 언니’가 모범 여성 근로자로 뽑혀 청와대로 가게 되고 거기서 대통령 부인 육영수 씨는 정인숙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한다. 정인숙은 공부를 할 수 있는 교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답한다. 이후 청와대의 지시를 받은 ‘평화시장 주식회사’ 사장들이 돈을 모아 동화상가 옥상에 마련한 것이 ‘청계피복노조 새마을 노동교실’이다. 그런데 1973년 5월 21일의 개관식 때 재야인사 함석헌을 초청하고 초청장에 자주색 이 들어갔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노동교실’은 개관하자마자 문을 닫게 된다. ‘노동교실’을 다시 열기 위한 호소가 이어지고, 2년여 만인 1975년 2월 7일 ‘노동교실 폐문 항의 농성 투쟁’을 통해 ‘청계’ 노동자들은 ‘노동교실’을 되찾게 된다. ‘9•9 사건’은 그렇게 해서 1975년 4월 30일 동대문운동장 맞은편 유원빌딩 3, 4층에 새롭게 문을 연 ‘노동교실’이 두번째 폐쇄 통보를 받자 ‘청계’ 노동자들이 다시 한번 일어난 싸움이었던 셈이다.
‘노동교실’의 존재와 운영이 국가권력과 사업주의 시혜적 행동과 이념적 물리적 통제하에 놓여 있던 당시의 상황은 전태일의 죽음이 싹틔운 ‘노동운동’의 불씨가 그 열망의 강도와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는 언제든 꺼지고 짓밟힐 수 있는 미약하고 위태로운 형세였음을 웅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더욱더, 시혜와 통제를 부분적으로 감수해야 할망정 ‘노동교실’의 존재는 이들에게 절실하고 절박한 공간이었던 듯하다. 신순애도 이숙희도 임미경도, 그리고 다른 증언자들도 하나같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다큐멘터리는 그 목소리들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노동교실’에서 ‘중등교실’을 열었다는 공고를 접한 뒤 그이들이 느낀 설렘과 흥분을 토로할 때 나는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 정말 무료로 공부를 할 수 있는지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 신청을 위해 노조 사무실 앞까지 갔지만 처음에는 용기가 없어서 들어가지 못했다는 이야기, 늘 ‘몇 번 시다’로만 불리다 지원서의 성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을 때의 낯섦(이름은 불리지도 않았고, 쓸 일도 없었다)…… 다큐멘터리에는 1973년 ‘폐문 항의 농성’ 때 준비했던 등사 유인물이 자료 화면으로 나오는데(경황중에 농성 진행자를 맡게 된 이숙희는 사전 준비가 거의 없었던 걸로 기억하며 현장에서 부른 노래로 애국가 정도만 떠올린다), ‘통일’을 ‘배움’으로 바꾼 <우리의 소원은 배움>과 <우리는 근로자다 좋다 좋아>의 노래 가사가 보인다. 요구 사항에는 ‘노동교실 폐문 철회’와 함께 ‘근로시간 12시간으로 단축하라’가 있다. “밤 10시라도 일이 끝나면 노동교실로 달려갔어요. 그러면 30분이라도 수업을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에겐 저녁 8시에 일이 끝나는 게 너무 중요했습니다. ‘노동교실’에 가야 했으니까요.”
밥을 먹지 못하더라도 ‘노동교실’에는 빠지지 않았다는 신순애가 ‘중등교실’ 국어 교사의 수업에 관해 전해주는 삽화는 이 교실에서 일어난 교육의 기적이 소위 ‘이념적’ 차원 바깥에서도 얼마든지 수행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만하다. 국어 교사는 일(壹), 이(貳), 삼(參) 등의 숫자를 한자로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친 뒤, 은행에서 통장을 만들어 저금과 인출을 해보는 것을 과제로 내준다. 이 학습이 준 것은 생전 처음 가져보는 통장의 존재 이상이었다고 신순애는 말하는데, 아마도 그것은 예속의 노동이 앗아가버린 자존감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노동교실’의 존재 자체가 이들에게는 자존의 가능성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노동교실’의 참여는 ‘다른 밤’을 선택하고 결의하는 일이었다. 장시간 노동으로 곤죽이 된 육체가 ‘잠의 밤’을 줄여 깨어 있으려 했을 때, 그것이야말로 예속의 거부이고 자유의 이행이 아니었을까. <미싱타는 여자들>의 증언들은 이 점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한 증언자가 정확히 짚은 대로 ‘노동교실’이 ‘의식화’의 장소였고 정권과 사용자 측의 거듭된 폐쇄 기도가 그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특정한 교육 내용이나 커리큘럼의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당시 ‘노동교실’의 홍보 유인물에 따르면, 교과는 크게 교양교실, 재단교실, 봉제교실로 나뉘며, 중등과정이 별도로 개설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수강 대상’은 ‘전 근로자’. 조합원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러나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기에는 시간도 자원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형편이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의지였을 것이다. 랑시에르는 배우려는 의지를 가르치는 의지에 예속시키는 기존 교육학의 논리에 맞서 지능의 위계를 모르는 스승의 의지가 학생 스스로 그 자신의 배우려는 의지로 길을 찾아가게 열어주는 ‘지적 해방’의 교육을 이야기한 바 있다.(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양창렬 옮김, 궁리). “사람은 배우고자 할 때 자기 자신의 욕망의 긴장이나 상황의 강제 덕분에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도 혼자서 배울 수 있다.”(29쪽) 신순애가 이야기한 국어 교사의 교실에는 얼마간 ‘지적 해방’의 교육이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인간의 말이 그들에게 전달되고, 그들은 그 말을 분간하고, 그것에 답하고 싶어한다. 학생이나 식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치 당신을 시험하는 자에게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말을 건네는 누군가에게 대답하는 것처럼. 평등의 징표 아래.”(26〜27쪽) 물론 실제 ‘노동교실’의 모든 강좌가 이런 이상적인 경로로 진행된 것은 아닐 테지만,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우리를 거듭 놀라게 하는 ‘미싱 타는 여자들’의 견고한 자기 언어, 논리적이면서도 생생한 자기표현의 증언은 제도교육의 바깥에서 그이들이 만들어낸 절실한 ‘밤의 학교’로서 ‘노동교실’의 시간을 평등과 해방의 기운 안에서 상상하게 해준다. 다큐멘터리 <미싱타는 여자들>에서 ‘노동교실’은 중심적인 사건이 벌어진 공간이면서, 지금 증언자들의 얼굴과 목소리, 언어를 형성한 시간의 증거로도 계속 화면의 숨은 배경을 이룬다.
그러고 보면 그이들이 즐거이 회고하는 ‘아카시아회’ 같은 친목회도 ‘노동교실’의 연장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재봉 관련 일을 하고 있는 듯 일터의 미싱대에 앉아 증언하는 조미자는 친목회에서 꽃꽂이와 중창을 배운 일이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돌아본다. 한 달에 단 두 번 주어진 일요일 휴일은 거의 온전히 ‘노동교실’이나 야유회 형식의 친목과 교육에 바쳐졌던 것 같은데, 먼지로 뒤덮인 좁디좁은 작업장을 벗어나 야외에서 찍은 사진들 속 소녀들의 모습은 너무도 환하다. ‘9•9 사건’ 두 달 전, 신순애 이숙희 등 몇은 주말을 잡아 강릉 동해안을 다녀오는데 숨돌릴 틈 없는 일정에(밤 기차로 오고 가고 월요일 새벽에 도착한 청량리역에서 바로 출근한다) 이들 ‘여름 여행’의 가난과 절실함이 새겨져 있다. 다큐멘터리는 이들과 함께 다시 강릉 바닷가를 찾는다. 사진 속 그날의 모습과 그때를 즐겁게 추억하는 현재의 모습이 대비된다. 비둘기호 연결통로 계단에 몸을 내밀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소녀들 가운데 앳된 모습의 신순애가 얼굴이 반쯤 가려진 채 보인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사진의 힘을 최대한 끌어낸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 속에는 ‘청계’에서 일하던 증언자들의 10대, 20대 때 사진이 많이 나온다. 흑백도 있고 컬러도 있다. 이숙희와 이순자는 노조 사무실 책상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열세 살 나이로 시다 생활을 시작할 때 동네에서 친구와 찍은 임미경의 흑백 사진은 많이 바래 있다. 여의도 광장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진은 컬러다. 임경숙은 야유회에서 춤을 추고 있다. 주로는 교육과 함께 진행된 야유회에서 찍은 단체 사진들이 많다. ‘노동교실’에 빼곡히 앉아 열심히 강의를 듣고 있는 사진, 노조 사무실이 있던 평화시장 옥상에서 찍은 단체 사진도 있다. 다들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환히 웃고 있기도 하고, 조금은 굳은 표정이기도 하다. ‘노동교실’ 홍보 전단, 노조 소식지 등 자료 사진도 많이 나온다. 증언들은 대개 옛 사진을 영사막에 띄워놓고 그 앞에 두 사람이 앉아 대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사진이 이야기를 끌어내고 이야기는 다시 사진 속으로 들어간다. 시간의 부패에 맞서 시간을 보존하며 바래가고 있는 사진들은 다큐멘터리의 움직이는 현재를 응시하며 계속 말을 걸어온다. 다큐멘터리는 사진을 활용한 극적 연출도 마다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은 ‘청계’의 여인들을 그들의 작업장이 있던 통일상가 3층으로 초대한다. 이 초대는 다큐멘터리 도입부의 파란 하늘 아래 들판 언덕 위로 가는 길에 상응하는 형식이기도 하다. 미로처럼 얽힌 어두운 복도, 문을 닫은 작업장들에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여인들은 머뭇대고 낯설어하며 옛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다 옥상에서 쏟아지는 환한 빛을 향해 여인들은 올라가고 평화시장 옥상은 이들의 무대가 된다. 여인들의 <흔들리지 않게> 합창. 다큐멘터리는 여인들이 방금 전 장막 너머 자신들의 10대, 20대 때의 사진과 만나던 순간을 뒤늦게 편집으로 보여주며 여인들의 합창이 두 개의 시간 사이에서 울려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한다. 어떤 정화의 순간.
그러나 생각해보게도 된다. 이것은 혹 다큐멘터리의 과도한 개입, 과도한 미학화가 아닐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감상의 유로를 감당하는 것은 다큐멘터리 속 여인들의 현재, 그이들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사진들이 부패하는 시간에 안타깝게 맞서고 있다면, 다큐멘터리가 계속 찍어온 여인들의 얼굴은 그 시간의 부패조차 어쩌지 못한 삶의 진행과 성숙을 가리키고 있다. 전태일의 죽음, 청계피복노조의 탄생, ‘9•9 사건’은 ‘노동’과 ‘정치’의 가파른 선을 포함하면서도 ‘청계’의 소녀들 각자의 기쁨과 좌절, 존엄을 감싸는 더 크고 지속적인 시간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오며, 그 시간의 현재적 흐름으로서 여인들의 얼굴을 잊지 않는 것 같다. 정화는 미학적 연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간의 존재와 구조에서 온다. 옥상의 여인들 뒤에는 70년대에 바로 그 자리에서 그이들이 찍었던 단체 사진이 큰 걸개로 걸려 있다. 지금 이 자리에 오지 못한 이들도 많지만, 옥상의 여인들은 사진 속 자세로 하나둘 자리를 잡고 다큐멘터리는 이들 두 시간을 포개려 한다. 그리고 두 개의 시간은 화가 노석미가 사진 속 인물 하나하나를 그린 초상화에 의해 기적을 꿈꾸며 변환되려 한다.
“십대 소녀인 나?/그 애가 갑자기, 여기, 지금, 내 앞에 나타난다면,/친한 벗을 대하듯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까?/나한테는 분명 낯설고, 먼 존재일 텐데.”(‘십대 소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집 <충분하다>, 최성은 옮김, 문학과지성사) <미싱타는 여자들>의 여인들은 사진 속 낯설고 먼 소녀들을 향해 손을 뻗는다. 시리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