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전분교장의 추억
< 만남 >
산촌엔 아직 봄기운도 찾아오지 못한 76년 3월 신학기 갈전분교장으로 발령받았다. 높고 험한 산 넘어 이사 가는 날 자기네들 자식 가르쳐줄 훈장 온다고 온 마을 사람들이 지게 지고 이사 도우려 왔다.
단칸방 신혼살림이라 이삿짐이라고 해야 고리짝 하나에 옷 몇 벌과 이부자리와 소꿉장난 같은 취사도구뿐이다. 그러나 맨몸으로도 넘기 힘든 굽이굽이 돌고 돌아 오르는 십 리도 넘는 험한 산길을 등짐으로 나른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말 감사하고 고맙지만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마을은 산자락에 등 기대고 십여 가구씩 옹기종기 새 둥지 틀 듯 매달려 초가지붕 덮고 있다.
전기는 고사하고 전화도 없고 바퀴 달린 것이라곤 볼 수 없는 곳, 문명의 혜택은 손톱만큼도 누리지 못하는 조선 시대의 삶 그대로였다.
< 훈장과 학동 >
교실 두 칸, 개집만 한 창고 하나, 오르간 한 대, 미끄럼틀 하나, 녹슨 그네 두 개에다 손바닥과 서로 자기가 더 크다고 우기는 운동장, 팔 뻗으면 하늘 닫는 곳에 자리한 분교장의 부동산 목록 전부다.
동산은 훈장 두 명, 재산 관리자 한 명, 학동 쉰 명(1-4학년)이다. 5.6학년은 험난한 10리 산길을 걸어 본교에 다녔다.
학교나 마을 환경이 조선 시대 같다고 해서 교사는 훈장, 학생은 학동이라 했다.
나의 근무는 출근도 없고 퇴근도 없는 24시간이다. 사택이 숙직실이고 숙직실이 사택이니 숙직은 당연히 내 몫이고 공휴일 일직 역시 내 몫이다.
가정집 마당만 한 운동장이라 축구할 때는 적당한 간격으로 의자 두 개 놓고 장대 묶어 간이 골대 만들고 공격수도 수비수도 없다. 골키퍼가 차도 바로 슛이니까. 조금이라도 세게 차면 운동장 밖 논밭으로 멋지게 비행한다. 그래서 우리만의 경기 규칙이 생겼다. 한 번 날아가며 경고, 두 번 날아가면 감점 한 골이다.
공부 끝나면 학동들은 마땅히 갈 곳이 없다. 갈 곳 없는 것은 훈장도 마찬가지다. 공부 시간에는 훈장이고 학동이지만 공부 끝나고 나면 소꿉친구 되었다. 오늘은 이 골짜기 내일은 저 골짜기, 산과 들이 놀이터요 야외학습장이다.
봄이면 달래. 냉이 캐고 잔디밭에 둘러앉아 할미꽃 전설도 알아보고 입 모아 호호 불어 민들레 홀씨 날렸다. 진달래꽃 따 먹고 찔레도 꺾어 먹다 다람쥐 만나 술래잡기 놀이에 신명 났다.
클로버 꽃반지 만들어 끼고 갖가지 풀꽃 꺾어 예쁘게 분장하여, 언덕배기 노오란 개나리꽃 덩굴을 배경으로 넙죽 엎드린 넓은 바위 무대에 올랐다. “뻐꾹뻐꾹 뻐뻐꾹” 뻐꾸기 노래에 반주 맞추어 신나게 춤추며 소리 높인 즉석 합창 발표회에 나비는 팔랑팔랑 백댄서하고 참새 떼 무리 지어 축하 비행했다.
밭일 나온 엄마 따라온 송아지는 “엄메∼ 엄메∼엄메에” 언덕 빼기 풀 뜯던 염소가 “메에∼ 메에∼메에에” 앵콜 연발하니 봄볕에 졸고 있던 강아지는 영문도 모르고 덩달아 “멍멍∼ 멍멍∼머엉멍” 가세한다
앵콜 몇 곡 더 부르고 집으로 향하는 길섶 풀꽃들 모두 일어나 기립 박수 보냈다
여름에는 가재 잡고 멱 감으며 물놀이하다 잎 무성한 나무 그늘에 모여 앉아 바람 선풍기에 땀 말리며 매미 노래 감상했다.
가을에는 알밤 줍고, 머루. 다래 따 먹으며, 고추잠자리 잡아 꼬리 달아 날리기 시합했다. 돌아오는 길에 곱게 물든 단풍 꺾어 교실 뒷벽에 가을 동산 만들었다.
겨울에는 볏짚 단 묶어 눈썰매 타다 눈싸움을 했다. 난롯가에 둘러앉아 눈싸움에 꽁꽁 언 손 녹이며 고구마. 밤 구워 도란도란 재미난 옛이야기 꽃 피웠다.
분교장의 봄. 가을 소풍은 따로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학동들이 제일 손꼽아 기다리는 소풍을 가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봄, 가을 마을 화전놀이 하는 날이 바로 소풍날이다. 돼지 잡고 닭 잡아 집집마다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챙겨 와 하루를 즐기는 년 중 가장 큰 행사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도 되고 경로잔치와 마을 단합대회도 겸한다. 얼마나 거창한 소풍인가. 이렇게 거창한 소풍 가는 학교는 우리 분교장뿐일 것이다.
<사람 사는 냄새>
분교장에는 산골짜기 개울 따라 방석만 한 다랑논 몇 때기에 산비탈 일구어 만든 비탈진 밭이 대부분이다. 옥수수, 감자, 고구마, 콩 등 밭작물에 임산물 채취하여 생계 꾸린다.
화전민촌의 삶은 고달프지만, 인심만은 넉넉하다 못해 철철 넘친다. 내 것 네 것, 자기 일 남의 일 가리지 않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사람 사는 냄새가 풀풀 난다.
어느 집에 기제라도 들고, 어르신 생신날이라도 되면 그날은 동네 잔칫날이다. 훈장도 특별 손님으로 당연히 초대받는다. 소환장 들고 오신 허리 굽은 할머니는 노크는 생략하고 교실 문 활짝 열고 고개 들이밀고
“선상님요. 어제저녁에 우리 영감 제사 지내 심더. 빨리 오이소.” 하고 초대장 아닌 소환장 남기고 황급히 돌아가신다. 아직 소환장 발부할 사람이 더 있는가 보다. 미처 소환에 불응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지체 없이 강제구인 영장 들고 온다.
하늘 아래 첫 동네 화전민촌의 겨울은 유난히 눈도 많으며 춥고 길다. 폭설이 내리는 밤이면 설해목 목꺽는 소리가 단잠을 깨웠다.
가을 추수 끝나면 무엇보다 먼저 밥 짓고 온돌 데울 땔감 넉넉히 장만해야 한다. 학교라고 예외일 순 없다. 화목난로 피울 나무하는 날이 따로 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나와 젊은 사람은 지게 지고 나무 베어 나르고 어르신들은 화목난로에 알맞게 자르고 쪼개어 창고에 쌓는다. 여자들은 일꾼들 참과 점심 준비에 분주하다. 마치 대가 집 잔치 마당 같다.
훈장 거주하는 사택의 겨울날 땔감도 한다.
“선상님이 나무할 줄 아십니껴.”
“어린 아기도 있는데. 많이 준비해야지예”하시며 넉넉하게 장만해주셨다. 남의 손자까지 걱정해 주시는 따뜻한 마음으로 온돌 데워 춥고 긴 겨울을 무난히 날 수 있었다.
<산촌의 신혼>
달도 별도 숨어버린 칠흑 같은 산촌의 밤은 적막감이 감돌다 못해 공포감마저 든다.
고라니, 너구리, 부엉이 등 온갖 산짐승은 제각각의 음색으로 짝을 찾는 울음에 첫돌 지난 아들은 엄마 품에 파고든다. 석유곤로 메운 연기에 눈물로 지은 밥상 난포 불 밝혀 마주했다.
장작으로 데운 온돌은 왜 그리도 쉬 식어 새벽잠을 깨우던지 차가운 새벽바람맞으며 또다시 장작불 지펴야 했다.
한겨울에는 개울물도 얼고 유일한 식수원인 옹달샘도 꽁꽁 얼었다. 두 손 호호 불며 얼음 깨고 물 길어다 밥하고 빨래하는 울 새색시 고운 손은 통통 부었다.
못난 훈장 만나 첩첩산중 화전민촌까지 데려와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헤어짐>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듯이 아무리 산촌의 겨울이 춥고 길다 해도 새싹은 움트고 꽃피는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시곗바늘은 쉼 없이 돌고 돌아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지나 또다시 새봄 찾아올 때 인근 학교로 발령받았다. 티 없이 맑고 순박한 학동들과 정들었던 주민들을 뒤로하고 젖은 손수건 흔들며 새로운 근무지로 떠났다.
기나긴 세월 돌이켜 보니 40년간의 많은 근무지 중 갈전분교장에서의 2년간은 고생도 많았지만 아름다운 추억도 많았고 작은 보람도 있었다.
이 세상 어느 꽃보다도 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들이 사는 하늘 아래 첫 동네 00분교장에는 지금도 사람 사는 냄새가 저녁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나겠지. 언제 어디서 이런 사람 사는 냄새를 또다시 맡아볼 수 있을까.
지금은 중년이되었을 그 학동들과 신나는 야외학습 시간을 다시 한번 가져 보고 싶다. 지금도 가만히 눈감고 회상에 잠기면 갈전분교장이 그림처럼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