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 프라테 성당, 성모 발현성지
개요
유럽에 이성주의가 확산하자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세력이 등장하였으며, 이탈리아 전역에서 일어난 통일 운동과 유럽 각국에 정착하여 성공을 이룬 유대인의 막대한 영향력은 교황청과 가톨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이처럼 가톨릭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성모 님이 파리 뤼 뒤박에서 발현하신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탈리아 수도이자 가톨릭의 중심부인 로마에서 유대계 은행가의 상속자에게 발현하셨다. 발현을 목격한 유대인이 즉시 개종하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그는 가톨릭 사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시온의 성모 여자수도회를 설립하고 평생동안 유대인의 개종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성모님의 발현
1842년 1월 20일, 28세의 유대인 알풍스 라티스본은 산탄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의 제대 앞에서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였다. 그는 친분이 있는 백작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뷔시에르 남작과 함께 성당에 왔는데 너무 일찍 도착하여 혼자 성당에 들어가 제대 바로 아래에 서 있었다. 그러자 빛으로 성당 내부가 매우 환해지면서 제대 위에 흰색 실크 옷을 입고 머리에는 흰색 베일을 쓰신 성모님이 맨발로 구름 위에 홀로서 계신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성모 님은 알풍스를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셨으며, 늘어진 파란색 망토로 팔을 감쌌고, 손가락 끝에서는 빛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알풍스는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모후 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바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훗날 알풍스는 이 순간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살아 있고, 위대하며, 위엄 있고, 아름답고, 자비가 넘치며, 축복받은 한 분이 제단에 서 계셨습니다. 그분은 가장 신성하신 성모 마리아였으며, 제가 목에 걸고 있는 기적의 메달에 새겨져 있는 분과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밝게 빛나는 광채 때문에 제대로 올려다볼 수 없었지만 저는 그분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고 거기에서 용서와 자비의 표현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가장 복되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제게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분의 현존 앞에서 제가 처한 상황과 저의 죄, 그리고 가톨릭 신앙의 아름다움을 깨달았습니다, 성모 님은 파리 뤼 뒤 박에서 발현하신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발현하셨지만 여느 발현과는 달리 어떤 메시지도 없으셨기에 ‘침묵의 성모님’이라고도불린다.
3분여의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성모님은 사라지셨고, 뷔시에르 남작이 성당으로 들어왔다. 그때 그는 알풍스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기억하소서」(서를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되였다. 남작도 알퐁스의 모습을 보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왜 그러냐고 아무리 물어도 알풍스가 답하지 못하고 그저 흐느끼자 그는 알풍스를 성당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마차에 태워 호텔 세를 니로 갔다. 알풍스는 울먹이며 기적의 메달에 입을 맞추고 말하였다.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고해신부에게 데려가 주십시오. 제가 언제 세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세례를 받지 않으면 저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는 결심을 전했다. 남작은 예수회 빌포르 신부를 만나려고 제수(예수) 성당으로 갔다. 알풍스는 계속 울먹이다가 진정한 후 자신의 목에서 기적의 메달
을 벗어 높이 들고 외쳤다. “성모님을 보았습니다. 성모님을 보았습니다.” 알풍스는 고해성사를 받고 빌포르 신부의 지도하에 예수회에 들어갔다.
발현 장소
로마에서 로마제국의 유적이 적으면서도 가톨릭의 유산이 유지되고 있으며 일반 시민들의 만남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스페인 광장과 스페인 계단이 있는 지역이다. 이곳은 15세기부터 스페인인과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많은 외국인들이 거주하면서 1495년 트리니타 데이 몬티(삼위일체) 성당과 수도원이 건립되었다. 가톨릭을 믿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람들이 주요 구성원이었기에 이 지역은 자연스럽게 가톨릭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한 예로 1854년 교황 비오 9세가 무염시태 교리를 선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857년 바로 이 스페인 광장에 무염시태 원주가 세워진 것이다. 이렇게 로마에서 가톨릭적 분위기가 충만했던 스페인 광장 근처의 산탄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셨다.
성모님이 발현하신 프라테 성당을 건립한 사람은 가장 작은 이들의 수도회(미니미 수도회) 창설자인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이다. 1604년부터 부 팔로 가문의 지원으로 성당의 새로운 개조가 시작되었고, 1658년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에 의해 바로크양식으로 재건되면서 둥근 천장과 종탑이 완성되었으며 현재의 성당 정면부는 1826년에 만들어졌다. 성모님이 발현하신 중앙 제단에는 세 폭의 제단화가 있는데 가운데는 사도 안드레아가 엑스X 자 모양으로 십자가형을 당하는 장면이고, 좌측은 안드레아의 죽음, 우측은 안드레아의 매장 장면이 그려져 있어 이 성당이 안드레아를 위하여 봉헌된 성당임을 알 수 있다. 제단 좌우에는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조각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천사상이 있다. 원래는 산탄젤로 다리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교황 클레멘스 9세에 의해 옮겨져 훗날 성당에 기부되었다. 천사상은 각각 가시관과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글자가 새겨진 두루마리를 들고 있으며, 베르니니의 조각 중 대작으로 인정받는 작품이다. 성당 내부에는 총 10곳의 경당이 있으며 그중 하나가 성모님의 발현을 기념하는 기적의 성모 경당이다.
시현자
1814년 5월 1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출생한 알풍스 라티스본은 로스차일드 가문과 가까운 친척 관계에 있는 유대계 은행가 가문의 상속자였다. 그는 어렸을 때, 로마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사제가 된 형 테오도르를 가족들이 좋아하지 않자 자신도 다시는 형과 말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고 가톨릭을 증오하였다고 한다. 그는 27세 때 조카인 플로레와 약혼을 하였지만,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온화한 곳에서 겨울을 보내기 위하여 1841년 말 나폴리와 몰타를 여행하던 중에 1842년 1월 6일 우연히 로마로 와서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들 중 한 명의 형인 남작 테오도르 드 뷔시에르는 가톨릭으로 개종했을 뿐 아니라 가톨릭 사제인 알퐁스의 형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알풍스는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부득이 남작에게 콘스탄티노플과 로마의 여행안내를 부탁했다. 그런데 남작은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일지언정 신앙이 없다면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남작은 알품스와 가까워지자 그를 개종시키기 위하여 작은 제안을 하였다. 그에게 기적의 메달을 목에 걸 것과 매일 아침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가 지은「기억하소서」를 성모 마리아에게 바칠 것을 제안한 것이다. 알풍스는 남작의 여행안내가 고맙기도 하고, 유대인들이 가톨릭 신자들만큼 융통성이 없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제안을 받아들였고, 남작의 어린 딸이 기적의 메달을 알풍스의 목에 걸어 주었다. 그러나 그는 남작의 신앙을 경멸하며 호프만의 이야기에
나오는 “나에게 좋은 일이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나쁜 일은 없을 것이다”를 인용하였다.
다음 날 아침 알풍스는「기억하소서」를 바쳤지만, 그 기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여전히 가톨릭을 증오하였다, 그러다가 며칠 후에 프라테 성당 제단 앞에서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기적의 메달 속 성모님과 똑같은 모습을 한 성모님을 직접 목격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알풍스는 바로 고해성사를 받았으며, 자신이 가진 세속의 모든 지위는 물론이고 가업으로 물려받은 은행가라는 직업도 지체 없이 포기하였다. 1842년 1월 31일 알풍스는 코스탄티노파트리치 나로 추기경에게 세례를 받고 첫영성체를 하였다. 그는 자신의 형 테오도르와 화해했으며, 1843년 형이 시온의 성모 여자수도회를 설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1847년 알풍스는 마침내 사제 서품을 받고 예수회 회원이 되었다.
1855년 알풍스는 유대인의 개종에 전념하기 위하여 교황 비오 9세의 허락을 받아 예수회를 떠났고 예루살렘에 시온의 성모 여자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856년 부속 학교와 소녀들을 위한 고아원을 포함하는 대규모의 에체 호모 수도원을 건립하였으며, 1860년에는 엔케렘산에 교회와 소녀들을 위한 또 다른 고아원과 성 요한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시온의 아버지들’이라 불리며 죽을 때까지 유대인과 무슬림의 개종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1884년 5월 6일 70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성지 소개
유대교 신자 알풍스가 파리 뤼뒤박 성모님이 새겨진 기적의 메달을 걸고 성모님을 목격한 뒤 즉시 개종하는 기적을 보여 주었기에 프라테 성당의 성모님은 ‘기적의 성모님’이라고 불린다. 또한 알풍스가 시온의 성모 수도회를 건립하여 유대인의 개종을 위하여 평생 노력하였기에 ‘시온의 성모님’이라고도 불린다. 성지가 도심에 위치하다보니 그 규모가성당한 곳에만국한되며, 성모님을 위한경당도독립되어 있지 않고성당내에 있는 10곳의 경당중하나일뿐이다. 기적의 성모 경당 양쪽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경당과 성 요셉 경당이 배치되어있어 예수님과 성모님, 성요셉을 함께 경배할수 있다. 프라테 성당 옆에는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가장 작은 이들의 수도회의 수도원이 붙어 있으며, 조경이 잘되어 있는 중정이 있는데 프라테 성당 내에 있는 출입구로 연결되어 있다.
[자료: 세계의 성모발현 성지를 찾아서. 분도출판사. 최하경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