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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학당] 진여와 열반 18강-팔천송반야경(00:08-01:13:00)
00:08 <불교는 공空, 상相, 성性이다>
반야경이 이미 너무 왜곡돼 있어요. 중관파 때문에 공종하면 중관파라고 하거든요. 중관파가 이미 너무 특수한 입장이에요. 공종을 제대로 포괄하지 못해요. 중관파 입장을 또 우리가 되게 걸러서 봐야 된다. 그런 부분도 좀 감안하시라고 말씀드린 거고. 보세요. 공종이 이렇게 있죠. 공종 텅 비어 있다. 텅 비어 있다는 걸 강조합니다. 만법이 청정광명심 안에서는 없다. 이걸 강조한 게 공종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게 아니에요. 자명한 주장이에요. 이 자명한 주장을 왜곡시킨 겁니다. 연기하니까 공하다라고 틀어버림으로써 바로 청정광명심으로 뛰어들 수 있는 길을 막는 거예요. 지금 실제 티벳 불교가 중관파들이 득세해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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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교육체계를 만든 게 20년간 결국 중관 사상을 연구하다가 관련된 사상들을 연구하다가 실제 수행은 한 20년 뒤에나 밀교수행이 가능합니다. 실천적 수행. 그러니까 분석으로 20년을 갖다가 이렇게 날려버리면 이미 개념이 왜곡돼 버려요. 정광명 안에서 답을 찾아야 되는데. 그렇죠. 석가모니 제자들은 1주일 만에 아라한이 돼서 정광명 안에 들어갔는데 안주했는데, 20년씩 개념화해버리면, 개념으로 싹 도배를 해버리면 우리 머릿속을, 공부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말씀드린 겁니다. 공종 그리고 유식학은 상종, 아뢰야식이 현상계를 만들었다. 아뢰야식이 현상계를 만들었다. 아뢰야식은 본래 텅 비었다. 이런 입장인 거죠. 공, 모든 일체가 공하다. 본질은 공하다. 아뢰야식이 현상계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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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둘이가 끊어져요. 공과 상이 끊어지게 돼 있어요. 유식학만 해도 끊어집니다. 공한 진여의 세계와, 공한 진여의 세계와 상을 만드는 아뢰야식의 세계가 끊어져 있습니다. 이거를 뭐로 연결해요? 성(性) 이겁니다. 공, 진공, 공하되 영지(靈知)가 있다는 거예요. 공하되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영지가 있어서, 그래서 공하되 진공묘유의 세계가 있어서, 자 여기는 진공의 세계, 그럼 공합니다 진짜로. 여기는 묘유의 세계. 그래서 현상계, 인과의 세계를 낳았습니다. 깔끔하죠. 불교는 공성상(空性相)이다. 됐죠? 그리고 이렇게도 그렸죠. 공한 중에 영지가 있다. 진공묘유. 학당 로고는 진공묘유를 그려놓은 겁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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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요. 이 원주(圓周) 안에는 무한한 점이 있습니다. 무한한 점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만법은 무한한 법이 있어요. 그중에 동서남북, 방향은 무한한 방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서남북으로 다 잴 수 있죠. 마찬가지예요. 무한한 만법이 있지만 육바라밀 안에 다 포섭됩니다. 이 육바라밀에 각각의 종자들, 자성에 이 종자들이 있어요.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미 구현된 것도 있고 청정광명심 안에서 미구현, 구현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결국 이것들이 언제 어디서 구현돼요? 세속제(世俗諦), 속제(俗諦)에서 구현됩니다. 구현이 이미 어디에서 이루어졌죠? 승의제(勝義諦), 진제(眞諦)라고 그랬죠. 절대계에서 이미 구현된 청정광명심의 세계가 승의제인데 이 세계에서 이미 구현된 게 있고 여기서 미구현됐지만 세속제 속제에서 구현되는 게 있고. 그렇죠? 탐진치는? 여기 탐진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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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겠어요? 하지만 분명히 탐진치의 원리가 있으니까 탐진치가 작동하지 않을까요? 우주 모든 존재들 안에서, 중생들 안에서. 그렇죠. 왜 지수화풍만 존재할까요? 물질에서, 지수화풍 공까지해서. 요게 기본 정보가 있겠죠. 청정광명심 안에는 기본 정보가 있습니다. 그게 만법이 구족돼 있다는 거예요. 다 갖춰져 있다, 여기에. 그래서 한편으로는 아까 말씀드렸지만 한편으로는 구공(具空) 공하되 한편으로는 만법이 다, 이 원이라는 것은 공한 거고요 원 안에 무한한 점이 있다는 측면에서는 구족(具足)입니다. 모든 게 다 갖춰져 있다. 그림으로 이해해 보시라는 겁니다. 그림으로 이해를, 상징이고요 그림은. 이해를 도와드리려는 겁니다. 이 정도 깔고 보자고요. 아까 한 걸 다시 정리했어요. “저놈은 지난 시간 정리하고, 이번 시간에 한 걸 또 이번 시간에 정리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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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있어요. 전 다 들려요, 악플이. 하도 많이 봤더니 악플통이랄까요. 통했어요. 말하면서 들려요. 그래 그래 이제 악플과 대화하면서 얘기합니다 저는. 아시겠죠 어떤 경지인지 해서.
05:19 <브라만교, 소승불교, 대승불교의 차이점>
자 팔천송반야경 BC 100년, 이쯤에서 (악플) 달려다가 “아! 씨” 하고 포기하고 있기를. BC 100년부터 AD 100년 사이에 초기 대승경전입니다. 대승경전이 이때 소승과 확실하게 선을 긋고 육바라밀교로서 출범합니다. 육바라밀만 닦으면 나도 보살이다. 보세요. 당시 브라만교, 힌두교인데요, 어떤 분들 브라만교라고 해야지 힌두교라니 감히. 인생 그렇게 어렵게 살지 마시고요. 지금 힌두교의 전신이기 때문에 힌두교예요 여기도. 광의의 힌두교예요. 그냥 힌두교라고 하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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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는 브라만교라고 했어요 그때. 브라만교에서는요 인간이 중생이 할 수 있는 건 해탈, 열반밖에 없어요. 중생 구제는요? 이건 신의 영역입니다. 시바신, 비슈누신이 하는 거지 시바신 비슈누신 브라마신 같은 그런 신적 존재가 하는 거지 인간이 하는 건 아니에요. 인간은 해탈 열반만 가능해요. 자 소승 불교에서도 여기서도 똑같아요. 열반, 해탈, 아라한이죠. 아라한 되는 거, 아라한 되는 것만 가능해요. 여기서 이 중생 구제하려는 신적인 존재로 등장한 게 부처였죠. 부처는 못 돼요. 부처는 거의 신급이에요. 그럼 엄청난 공덕을 쌓아야 돼요. 난 이생에 이미 해탈을 얻어버렸기 때문에 될 수가 없습니다.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없어요. 부처. 하지만 이건 부처나 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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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가 뭐가 다른지 아시겠어요? 대승불교, 신이나 부처나 가능한 이 영역, 중생 구제의 영역을 그게 인간의 본래의 임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대승불교에서는 인간이 해야 될 일이 뭐예요? 중생 구제예요. 이거를 인간이 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목표였다는 걸 부정한 거예요. 이게 인간의 이 신의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고 온 거예요. 그리고 신의 영역이자 부처의 영역이었던 것을 모든 중생이 해야 될 일로 끌어온 거예요. 아라한 되는 걸 거부합니다. 뭘 해야 되는지 아시겠죠? 중생구제 이 중생부제의 마음이 뭐예요? 보리심. 보리심 닦아서 이 보리심을 구현하면 육바라밀입니다. 다른 이름 하나 가르쳐 드릴게요. 이게 청정광명심(淸淨光明心)이죠, 정광명(淨光明)이라고 하는. 다른 이름이 보리심(菩提心)이에요. 이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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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의제의 보리심, 절대계의 보리심이니까 절대적 보리심이에요. 절대적 보리심 안에 육바라밀의 종자가 있어요. 이게 현상계 속제에서 구현되면 어떻게 될까요? 육근의 세계에서 구현되면 상대적 보리심입니다. 성종에 오면요, 이 성종에 오면 절대적 텅 빈 중에, 텅 빈 중에 절대적 보리심이 갖춰져 있다가 상(相)의 세계에서 절대적 보리심이 구현되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이걸 또 다른 이름을 한마음이라고 하죠. 대승기신론에서 뭐라고 하냐면 일심교를 주장합니다. 한마음만 타고 가면 된다. 진제에서도 한마음, 속제에서도 한마음. 진제는 불변의 한마음, 속제는 묘유가 작용을 일으킨 한마음, 전체가 한마음일 뿐인 거예요. 중생심 전체가 사실은 한마음이다. 이 한마음의 작용일 뿐이다. 여기까지 옵니다. 이건 참나론을 전제하지 않고는요 절대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이거를 지금 중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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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으로 모든 걸 풀고 있어요, 지금 현재 불교계들이. 왜? 그게 논리적으로 접근 가능하거든요. 참나를 몰라도 논리적으로 접근 가능하거든요. 그 세계에 빠져가지고 체험을 안 하고 해탈을 할려는 탐진치, 만용을 부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대승불교는 자 육바라밀이 핵인 이유가 이겁니다. 보리심을 강조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중생을, 내가 부처가 돼서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 하는 것도 원보리심(願菩提心)이에요. 보리심을 서원한 겁니다. 보리심 닦겠다고 서원한 거예요. 육바라밀을 실천하면요 행보리심(行菩提心)이에요. 이 두 개가 상대적 보리심을 구성합니다. 청정광명심과 접속한 게 절대적 보리심을 각성한 거고요. 즉 절대적 보리심은요 다른 말로 무분별지예요. 무분별지에 들었을 때 여러분은 뭐를 해요? 공성직관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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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직관을 하죠. 이게 절대적 보리심 닦는 법입니다. 절대적 보리심은요 여러분이 시공을 초월해서 무분별지 상태에 들어가서 청정광명심, 즉 참나각성을 했을 때 절대적 보리심 상태예요. 현상계에서는 상대적 보리심을 실천해야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끝없이 원을 세우고, 즉 여기는 의지고요. 의지의 세계, 여기는 실천의 세계, 행동, 의지를 품고 행동하고, 의지를 품고 행동하고. 제트(Z) 자 이론 기억하세요. ① 참나현존, 이게 보리심이 현존입니다. 그다음에 ② 공성이나 자성 직관, 그다음에 진리, 여기서 공성 자성의 ③ 진리 분석, 그리고 ④ 진리 실천. 여기가 진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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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보리심. 절대적 보리심. 여기는 상대적 보리심입니다. 여기가 속제예요. 분석하고 실천하고. 여기다 이제 하나 더 보태면 원보리심. 이 자체는 다 행(行)이거든요. 육바라밀 실천에 다 들어가잖아요. 반야바라밀, 나머지 방편바라밀, 나머지 다섯 바라밀을 방편바라밀이라고 그래요. 됐죠. 이 그림에 다 들어있습니다. 이 그림만 기억하세요. 반야바라밀 방편바라밀 육바라밀 실천하는 거고. 이 자체도요 이 자체도 정혜쌍수죠 선정에서 지혜를 닦는 거고. 정혜쌍수. 선정과 지혜. 정혜쌍수. 반야방편쌍수.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명상 잘하고 진리 직관, 명상 속에서 진리만 직관해도 절대적 보리심을 닦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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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구공이에요. 공 안에 육바라밀이 들어 있다는 걸 직관하는 겁니다, 이걸 통해. 직관을 반드시 분석을 통해 현실화시켜야 돼요. 분석은 개념화를 한다는 겁니다. 개념화를 하고요 현실에서 현실화를 해야 돼요. 사실은 구별해서 그렇지 개념화도 현실화입니다. 개념화하는 게 이미 현실화가 된 거예요. 여러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로 설명했다는 게 이미 현실화예요. 여러분 스승들한테 배우고 싶은 게 일단 개념이죠. 개념을 들어야지 뭘 알죠. 개념으로 현실화시켜 준 거예요. 무형의 진리를 언어로 현실화시켜 준 겁니다. 지금 이 강의장은 현실화의 장이에요. 행동을 통해까지 현실화시키자는 거고 이거는. 이미 생각에서 이미 현실화된 겁니다. 여러분 머릿속에 제가 말하는 게 그려졌다면 현실화된 거예요. 현실화가 시작된 겁니다 이미. 그것만이 현실화라는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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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화는 시작됐습니다. 진리가 여러분의 개념이라는 그릇에 담겼어요. 잘 담겼어요. 그러면 개념 하나가 모든 여러분의 언행을 지배합니다. 개념 하나 잘못되면 여러분 언행이 다 잘못돼요. 나중에 여러분 이불을 차죠. 미쳤었지.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럼 말도 안 되는 걸 믿고 왜? 그렇게 남한테 말하고 행동까지 다 했거든요. 죽죠, 힘들어서. 왜? 개념 하나가 모든 걸 잘못되게 만드니까. 자 이 정도 그림 놓고 얘기하시자구요. 보세요. 팔천송반야경 대승불교라는 게 이런 겁니다. 대승불교는 보리심을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이거 하나만 더 얘기하면 브라만교나 소승불교는요 같아요. 뭘 강조하냐면 출리심(出離心), 사바세계에서 벗어나자는 것을 강조해요. 출리심, 출, 날 출(出)자, 이별할 리(離)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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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리(出離) 다른 말로는 염오심(染污心). 그러니까 현상계를 혐오해야 돼요. 사바세계를 혐오해야 됩니다. 육도(六道)의 세계를 혐오해서 탈출하려는 마음입니다. 출리심. 보살들은 보리심이에요, 출리심이 아니라. 탈출을 포기해요, 탈출 안 하고. 영화 보면 그런 분 멋있죠. 탈출할, 탈출 안 하고 문을 딱 닫는 분들. 여기는 내가 맡는다. 아라한들아 너희부터 가라. 너희는 가라 일단. 여기는 내가 다 맡겠다. 문 잠그고 사바세계 중생들을 내가 다 구제해버리겠다. 기본적으로 이런 발상이 보리심이에요. 나도 부처되고 모든 중생 성불시켜 버리겠다. 힌두교에서 신이 하는 그 일을 내가 하겠다. 그래서 힌두교의 시바신이 있다면 대승불교에서는요 관세음보살이 있어요. 시바신의 불교식 모습입니다 관세음이. 그래서 그 증거가 뭐냐? 천수다라니를 쭉 읽으면 관세음을 찬양하는 문구들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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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신 찬양 문구예요. 그대로 가져온 거예요. 간혹 비슈누신 찬양 문구도 들어 있어요. 그러니까 비슈누 시바를 합쳐 놓은 겁니다 관세음이. 그래서 시바신의 이름이 자재신인데요. 자재라는 이름이 관자재(觀自在)에 들어 있는 거예요. 관자재 그러면 시바신을 말하는 거예요 원래. 우주를 굽어보시는, 관(觀)하시는 하느님이시여, 하느님과 같은 보살님 이런 겁니다 관세음이. 시바신에 비슈누신을 합쳐서 불교에 박아놓은 게 관세음보살입니다. 즉 이 얘기는 뭐예요? 힌두교에서 신이 하는 걸 우리가 하겠다는 선언입니다. 힌두교 니네들은 아라한 되듯이 열반에나 들어, 힌두교 성자들. 중생은 우리가 맡는다. 내가 다 관세음 같은 부처로 만들어 가지고 성불시키게. 스케일이 달라요. 성불의 그것도 달라요. 아라한 정도 만드는 게 아니에요. 다 부처 만들겠다는 거예요. 요게 대승입니다. 이 대승 사상이 태동한 게 BC 100년경부터요. 이때 공사상으로 등장해요.
16:04 <반야바라밀다>
우리 어렸을 때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하면 천녀유혼을 통해 많이 배웠죠. 도사가 맨날 보여보로미(Bōrě bōluómì)이 그러나요? 뭘 쏠 때 신통을 부릴 때 반야바라밀 반야바라밀 하면서 신통을 부려요. 한번 보세요 나중에. 우리끼리 막 보여보로미 하면서 서로 공격하면서 그런 적이 있었는데. 전순환 씨가 쓴 번역하신 팔천송반야경, 불광출판사, 그 책에 있는 번역을 그대로 실었습니다. 이게 산스크리트어를 그대로 번역하신 거라 제 영역이 아니에요. 한문이면 제가 번역했겠지만, 이분 번역을 참고하자고요. 한역된 건 있었죠, 예전에도. 그런데 산스크리트 원전에서 번역한 거니까 더 생생하죠. 1. 반야바라밀다는 여래의 진정한 사리입니다. … 너희들은 나를 ‘법신의 완성체’라고 볼 것이다. 여래의 몸은 ‘반야바라밀다’라는 ‘진실한 궁극의 실재’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져야 한다. (140쪽) 반야바라밀다는 여래의 진정한 사리입니다. 어떠세요? 기분
17:00
좋았는데 시작부터 이러기냐 이러고. 자 반야바라밀을 뭐라고 생각하셔야 돼요. 반야바라밀은요 무분별지 플러스 분별지입니다, 원래. 그런데 분별지는 반드시 무분별지 뒤에 와요. 그래서 무분별후득지라고 해요. 이걸 보시면 돼요. 참나의 현존에서 공성을 직관하죠. 여기는 분석하죠. 분석은 개념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면 분석이라는 건 분별지예요. 분별지, 여기가 무분별지입니다. 이 직관한다는 게 무분별지예요. 이 영역이요. 알아차림, 영지가 진리를 알아차리고 있는 이 상태, 이걸 직관이라고 그래요. 직관. “나 뉴진스 직관했어.” 이러잖아요. 직접 봤어. 그런 거, 그런 거랑 달라요. 직관은
18:00
생각을 쓰지 않아요. 그러니까 통하는 게 있어요. 직접 봤다는 거잖아요. “개념으로 본 게 아니라 직접 봤어.” 그 느낌이에요. 그 느낌은 통해요. 그러니까 참나를 직접 본 거예요. 그런데 오감으로 본 게 아니라 영감으로 본 거예요. 직접 본 거예요. 그러니까 무분별지죠, 여기는 분별 안 하고. 분별을 할 수 있다는 건 이미 생각한 거예요. 그러면 무분별, 보세요. 진리를 참나 안에서, 일단 정광명을 만나서 진리를 직관하고 나면 그 직관을 받은 게 있어요. 그러면 제가 쉽게 말씀드릴게요. 자명 찜찜의 느낌을 받아요. 이건 자명 이건 찜찜. 느낌만 있는 걸 언어화해요. 언어화하는 걸 그래서 무분별 뒤에 온다고 무분별. 뒤 후(後)자 써서요 후 얻을 득(得)자 무분별후득지 그럽니다 이게. 다른 이름으로 무분별후득지. 분별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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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무분별 뒤에 와요. 무분별보다 앞서는 분별지는 분별이에요, 그냥. 분별지혜가 아니고. 이것은 직관이 있은 뒤에 직관으로 분석할 때 분별지라고 하는 거예요. 직관, 느낌이 없는데 체험이 없는데. 영적 체험이에요 직관은. 눈으로 직접 봤다는 게 체험이죠. 생각 감정, 생각으로 따지는 분별이 아니라 직접 오감으로 경험한 거예요. 이해되시죠? 생각 감정으로 따지고 감정을 자기가 일으킨 게 아니라 좋다 싫다를 직접 경험한 거예요. 체험한 거예요. 그래서 이 체험한 걸 바탕으로 우리가 분별할 때 분별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두 개가 반야바라밀을 구성해요. 이 두 개가 반야바라밀을 구성합니다. 이렇게. 반야바라밀이라는 건 두 개인데 뭐가 더 본질이겠어요? 반야바라밀경에서 강조하는 반야바라밀은 뭘까요?
20:00
무분별지예요. 그래서 반야심경도 관자재보살께서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그때 오온이 공한 줄 알았다는 게 이겁니다. 연기(緣起) 따지고 하면 벌써 분석지예요. 그런데 보세요. 그러니까 관자재보살이 연기를 따져서 공을 넣어놨다는 건 벌써 다음 얘기예요. 무분별지에서 뭘 봤을까요? 그러니까 그전에도 따졌겠죠. 분석은 해 봤겠지만, 무분별지에서 뭘 봤으니까 체험했으니까 그걸 가지고 분석한 거예요. 그런데 체험 없는 분석만 하고 있다고요, 지금 중관 사상은. 이해되세요? 진짜 그러니까 분별만 하고 있는 거예요. 분별지는 무분별 뒤에 옵니다, 불교 이론에서. 그래서 후득지(後得智)라고 불러요. 다릅니다. 그냥 줄여서 무분별도 빼고 후득지라고 그래요. 후득지. 그 뭐 후천적으로 얻어서 후득지인가? 이러기 쉬운데 무분별후득지라는 뜻이에요.
21:00
직관을 해야 됩니다. 직접 봐야지. 들은 말로, 들은 풍월로 지금 읊고 있는 게 분석입니다. 그런데 보고 나서 분석한 거예요. 그래서 관자재보살이 오온이 공하더라는 걸 무분별지 상태에서 봤기 때문에 “진짜 없네” 한 거예요. 무분별지 상태에서는 “없네” 하고 직관했기 때문에 나와서 그걸 꿰뚫어 봤기 때문에, “없네”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나와서 뭐라고 말할 수 있었던 가요? “오온이 공하더라” 한 거예요. 오온이라는 개념도 없죠 거기서는. 그냥 공만 있죠. 나와서 “오온이 공하더라”라고 분별지로 설명해 준 겁니다. 그러고 나니까 실천적으로 일체고액을 건너가더라(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이겁니다. 고통에서 해방됐다는 거예요 실제로. 육바라밀만 이제 실천하게 되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러 다녔지 자기 탐진치에서, 탐진치 고민에서 해방되더라. 이걸 너무 한목에 써놨는데요. 공부가
22:00
이제 닦여서 거기 가겠죠. 그걸 축약해서 써놓은 겁니다. 근본적으로 탐진치 극복할 방법은 반야바라밀밖에 없다. 그리고 그 반야바라밀은 무분별지다. 그럼 다른 이름으로 반야바라밀은 뭐예요? 청정광명심이에요. 그 반야경에서는요 청정광명심을 반야바라밀이라고 부른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이걸 중관 사상에서는 이걸 틀어가지고 반야바라밀을 분석지 위주로 설명한다고요. 분석을 합시다. 분별합시다. 분별없이 그냥 바로 참선만 하면 우리는 잘못됩니다. 무자성의 이론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엉터리죠. 무분별지도 직관시켜주지 못하는 지혜가 있으니까 미리 분석해서 준비합시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무분별지를 졸라 안 믿어요. 내가 배우는 중관론의 교리를 우선시하지 무분별지를 안 믿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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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무분별지만 과하게 믿는 파가 어디죠? 최상승선이에요. 몰라 해버리라고 그러잖아요. “불교 배우러 왔습니다.” “몰라 하세요.” “모르는데요. 뭘 몰라 해요? 알지를 못하는데 일단 좀 가르쳐 주시죠.” “몰라 해보세요.” 딱 몰라 했더니 “아! 이게 그거군요.” 알아졌죠. 직관을 했으니까. 그때 불교 교리 들으면 한눈에 꿰어집니다. 성경을 보면 안 꿰어질 것 같으세요? 한눈에 꿰어집니다 그때부터. 신기하죠. 왜? 직관을 했기 때문에. 지식이 들어와 버려요. 직관하면 지식이 통으로 들어와 버려요. 이렇게 무분별지를 안 믿고, 무분별지를, 몰라 하면은, 보세요, 얼마나 1차원적 생각인가? “몰라를 하면 모를 것이다. 따라서 미리 분석을 해 놔야 몰라를 했더라도 (분석)해 놓은 가락이 있어서 알게 될 것이다.” 이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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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당에서는요 이것만 주장하지는 않아요. 즉 미리 지식은 갖고 있어야 됩니다, 적당히만, 왜냐? 체험했을 때 체험을 설명할 도구는 있어야 되니까. 그런 차원에서 지식이 필요하다고 하지 미리 지식에서 답을 다 내놓고, 연기하니까 공하다고 다 그냥 개념화해 놓고, 체험을 통해서 확인만 하겠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무분별지를 통해 확인만 하겠답니다. 이게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거예요 그거는. 그래서 무분별지가 반야바라밀입니다. 그래야 이 글이 이해돼요. “반야바라밀다”라고 하는데 반야바라밀을 말해요. 반야바라밀다는 번역어의 차이입니다. 인도말 파르미타(pāramitā)를 번역하다 보니까 바라밀로 번역하기도 하고, 바라밀다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요 반야바라밀다는 여래의 진정한 사리입니다. 여래의 진짜 사리는 뭐죠? 육신에서 사리를 찾지 마세요. 여래의 진짜 사리는 여래의 법신입니다. 절대적 보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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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광명심이 여래의 법신입니다. 진리를 품은, 진리 그 자체인 육바라밀의 진리 그 자체인 진리의 몸이기 때문에 법신이라고 합니다, 청정광명심은. 벌써 내가 말하는 반야바라밀이 뭐다는 걸 설명해 준 거예요. 이 경에서 말하는 반야바라밀은 여래의 진정한 사리를 말한다. 되셨어요? 이거 이해되셨죠? 표정들이? 재미있지 않아요. 이 구절 안에 이미 심법이 들어있다는 거 아시겠죠, 이제? 반야바라밀이 여래의 사리입니다. 반야바라밀이 여래의 법신입니다. 반야바라밀은 진리를 직관하는 청정광명심입니다. 이해되시죠. 너희들은 나를 법신의 완성체라고 볼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안다면 나를 법신의 완성체라고 볼 것이다. 이해되시죠. 법신을 온전히
26:00
직관한 자리는 여기라니까요, 무분별지. 청정광명심 상태. 여기서만 온전히 진리와 하나가 돼 있어요. 그렇죠. 이게 신적인 관조 상태죠. 신성 안에서 진리를 관조하는 상태를 서양 철학자들도 최고의 경지로 봅니다. 이건 신의 경지로 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크스 윤리학” 보면 행복한 삶에 대해 논하다가 최고의 삶으로써 명상 속에서 진리를 관조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보세요, 분석을 하려고 해도 개념이 필요하죠. 언어가 필요하죠. 실천을 하려고 해도 남이 필요해요. 어떤 것도 필요 없어요. 서양 철학도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할 때 가장 신적이라고 봐요. 똑같죠? 한번 보세요. 파이돈에도 보시면 나와요. 신적인 것은 그렇게 불변의 것이고. 독립돼 있어야 되고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아야 돼요. 진짜 자유, 진짜 장자(莊子)에서 말한 자본자근(自本自根). 자기가 자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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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가 되고 자기가 자기의 근본이 됩니다. 이걸 모든 동서양 철학자들이 추구한 최고의 경지입니다. 이 경지에 여래께서 도달했다는 걸 써놓은 거예요. 여래의 반야바라밀은 법신의 완성체다. 여래의 몸, 즉 이 법신이죠. 여래의 몸은 반야바라밀다라는 진실한 궁극의 실재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져야 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여래의 몸은 법신만이 아니겠죠. 실제로 여래가 우리 눈앞에서 활동했더라도, 보세요, 여래가 우리 눈앞에서 분석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줬죠. 화신이죠. 화신(化身), 색신(色身). 형상 있는 몸으로 나타났더라도 형상이 있는 몸은 형상 없는 법신의 자기 작용이다. 반야바라밀에서 나온 거다. 이 구절 이해되시면 다 이해하신 거예요, 지금 반야경. 여기에 지금 단순히 연기하니까 공하다는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있나요? 없죠. 또 보죠. 두 번째 2. 교시가여, 방금 건 140쪽이었네요. 241쪽에 교시가여,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이 ‘반야바라밀다’의 보호를 받을 때 비로소 바라밀다 란 이름을 얻고 … 전지자성을 얻기 위해 눈을 얻게 된다. (241쪽). 교시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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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이. 지금 나머지 다섯 바라밀 이걸 방편바라밀이라고 그래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형편에 따라 처방하는 거기 때문에 방편바라밀이에요. 이건 분석과 실천 쪽이죠, 따지자면. 그런데 이제 분석은요 실천에도 들어갈 수 있고 또 반야에도 들어갈 수 있죠. 그래서 겹치게 해 놨잖아요. 실천적이면서 또 반야, 왜냐하면 뭔가 우리가 실천하려면 판단 안 하고 실천할 수 있어요, 분석 안 하고?. 실천적 덕목이기도 하고, 반야방편 여기서 나눌 수도 있지만 크게 보면요 이게 반야, 이렇게도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요 요게 반야 요게 방편 이렇게도 될 수 있는데, 크게 보면 이게 반야고 이게 방편입니다. 왜? 반야바라밀 중에 포인트가 무분별지거든요. 무분별지가 반야의 핵심이고 이 분석은 실천을 돕는 분석이니까 방편으로 뺄 수도 있고요. 또 이렇게 나누지 않고 이 둘로 나누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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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반야고 이게 방편이 되기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볼 수 있어요. 두 개 이렇게 자유롭게 보실 수 있어야 돼요. 그래서 여기에서 보면, 지금 교시가여 보시지계 인욕 정진 선정이 반야바라밀다의 보호를 받을 때, 즉 나머지 방편 바라밀들이 반야바라밀, 여기서 반야바라밀은 무분별지라고 본다면 밑에 것들은 다 지금 분석과 실천은 다 앞에 나온 다섯 바라밀에 해당될 수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보시 지계 인욕 선정 정진 닦을 때 반야가 없이 닦으실 수 있어요?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여기에서 따로 반야바라밀을 뺄 때는 무분별지를 강조한다고 보시면 돼요. 반야바라밀의 보호를 받을 때 비로소 바라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그러니까 정광명의 작용, 절대적 보리심의 작용이 아닌 방편이라는 건 바라밀이 아니란 말이에요. 진리를 직관하는 그 참나의 작용일 때 바라밀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시겠죠. 내가 머리 굴려서 하는 걸 바라밀이라고 안 해요. 보시라고 하지,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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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욕이라고 하지, 빡치는데 겨우 참은 건 인욕이죠. 근데 나와 남이 본래 공한 줄 알고 진리는 본래 성내지 않는다는 걸 직관하면서 참으면 인욕바라밀이 돼요. 직관하는 건 다 반야의 작용입니다. 반야가 공성을 직관해 줘야만 내가 하는 행위가 바라밀이 돼요. 남한테 베풀 때도요 나와 남이 본래 공하고 공한 중에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줄 알아서 남의 일이 내 일 같아서 베풀 때 보시바라밀이 되는 겁니다. “나 이거 보시, 오늘 내가, 오늘은 내가 오늘쯤엔 내가 쏴야 되는데.” 이런 식으로 쏘면 그냥 보시죠. 그렇죠. 이게 달라요. 바라밀이라는 이름을 얻고 전지자성, 전지전능의 전지자성을 얻기 위해 눈을 얻게 된다. 진짜 전지자성이라는 건 부처의 경지예요. 부처의 경지에 나아갈 수 있는 안목, 진리의 눈, 법안을 얻게 된다. 반야바라밀은 눈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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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바라밀은 내비라는 거예요. 내비. 눈이라는 건 내비예요. 내비게이션을 갖춰야만 나머지 바라밀들이 어디로 갈지 방향이 잡히는 거예요. 나머지 바라밀만 해서는 바라밀이라고도 안 한다는 거예요. 반야바라밀이 내비게이션이 돼서 길 안내를 할 때 따라가 줄 때 그걸 바라밀이라고 우리가 부른다는 겁니다. 241쪽이고요. 316쪽이요. 3. 불국토에서 여래들의 면전에서 서로 마주보며 재차 바로 이 깊고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상세히 들을 것이다. (316쪽). (반야바라밀다를 통해 ① 자신의 ‘자성’(공성ㆍ진여)를 깨닫고, ② 나아가 일체 만법의 ‘자성’(공성ㆍ진여)과 둘이 아님을 깨닫고, ③ 나아가 ‘6바라밀’을 두루 갖추게 된다. 따라서 보살마하살은 불국토에 태어나 여래들을 직접 뵙고 무상정등각을 향해 더욱 깊게 나아가게 된다.) 이 공부, 대승 공부를 하다 죽으면요 이제 정토를 가게 돼서, 반야바라밀 닦다 죽으면 정토에 가서 여래의 면전에서 반야바라밀에 대해서 더 깊게 듣게 될 것이다. 고수들의 가르침. 이게 소크라테스의 파이돈 보면 딱 이겁니다. 소크라테스 죽는데 되게 신나해요. 와이프 울고 그러는데 “나가라” 그러고. 자기는 “지금 사실 좀 신난다.” 왜? “죽으면 올림푸스산 거기 신들의 세계에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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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제우스나 막 직접 보고 좀 진리 좀 배우고 싶어.” 덕후죠. 너무 진리의 덕후죠. 이게 불국토 사상에도 그대로 있습니다. 원래 여래의 면전에서 직접 배우겠다는 게 포인트예요. 정토 사상이 왜 나왔냐면요 기독교랑 똑같아요. 기독교도 천국 가서, 천국 가서 하나님 백성 되겠다는 거예요, 직접. 여기 지금 로마의 백성이 너무 힘들잖아요. 로마 식민지 생활의 백성이 아니라 이 사바세계 백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싶다. 하느님의 제자가 바로 되고 싶다는 것. 똑같아요. 부처님의 바로 제자가 돼서 저자 직강을 듣고 싶다. 본인 공부 안 되는 것을 저자 직강을 못 들어서 그렇다. 이런 분들한테 정토 사상을 권합니다. 대승기신론이 나와요. 발심이 영 안 되는 사람, 그냥 발심이 쉽게 되면 그냥 또 닦으면 되는데 영 안 돼서 “아 나는 여래를 좀 보고 내가 배우면 참 잘할 텐데” 하는 분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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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사상이 나옵니다. 여래 그러면 여래 앞에 가서 배우잖아요. 요게 이미 반야경에 이미 들어있다는 게 재미있죠. 정토사상이 들어있다. 물론 이 부분도 감안해야 됩니다. BC 100년부터 반야경이 제일 오래된 초기 대승 경전이니까 “여기 나온 게 제일 원형이다. 이미 초기부터 정토 사상도 있고 육바라밀 사상도 있고 다 있었구나.” 이게 바로 단언하기는 어려운 게 경전이라는 건 계속 손이 대줘요. 뭔 얘기예요? 후세에 추가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건 감안하고는 봐야 돼요. 혹시 오해하실까 봐요. 또 악플이 보였어요. “후대에 덧붙여진 거 아닌가요?” 이런. 이때쯤에 또 의욕을 잃으실 겁니다. 다 꿰뚫어보고 있으니까. 전지자성까지는 아니어도 꽤 보니까. 그래서 이런 것도 이해되시죠. 그런데 첨삭됐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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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몇 부분이어야지 전체적으로 밀고 나가는 논지는 첨삭됐다고 볼 수는 없죠. 이 공 사상과 육바라밀 사상은요 전체 큰 주제거든요, 이 책에 경전에. 그거는 후대에 붙여졌다고 볼 수 없고요.
34:14 <반야바라밀을 통한 자성(공성) 직관>
이런 정토 사상 같은 건 혹시 모르죠. 그런데 다만 그때부터 있었다고 볼 수도 있는 거니까 오히려 경전에 있으니까. 다른 증거가 없다면 있었다고 보는 게 맞겠죠. 정토 사상의 핵심은 아무튼 여래들 면전에서 배우겠다는 겁니다. 아미타불한테 관세음보살한테 직접 배우겠다. 여기 반야바라밀을 통해 ① 자신의 ‘자성’(공성ㆍ진여)을 깨닫고. 제가 각주 붙여놓은 겁니다. 이건 제가 붙여놓은 말이에요. ② 나아가 일체 만법의 자성(공성ㆍ진여)과 둘이 아님을 깨닫고 ③ 나아가 ‘6바라밀’을 두루 갖추게 된다. 반야바라밀을 통해서. 따라서 보살마하살은 불국토에 태어나 여래들을 직접 뵙고 무상청등각을 향해 더욱 깊게 나가가게 된다. 결국 반야바라밀을 더 깊이 탐구한다는 건요 청정광명심에 대해서 더더더 탐구한다는 겁니다, 여래들 만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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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성령을 더 깊이 이해하는 거예요 천국 가서. 예수님 직접 뵙고 성령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성령의 진리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닦겠다. 이런 게 지금 불국토에 가겠다는 거고요. 반야바라밀을 통해서 우리가 뭘 직관하겠어요? 반야바라밀 공성직관인데 첫째, 공하는 게요 이 공성을 구공과 구족, 즉 공성직관과 자성직관이라고 봐도 되고요. 이 두 가지로 봐야 돼요. 여기서 설명은요 평소 제가 많이 하던 식으로 이 공성직관이라는 것만 해도 보세요. 구공의 직관이 아공, 나라는 자아가 공하더라. 내 에고라는 게 이 청정광명심 밖에 독자적 실체가 있는 게 아니더라는 게 아공입니다. 법공은요? 만법이 결국 광명심의 작용이지 청정광명심 밖에 독자적 불변의 실체가 있는 게 아니더라. 즉 다른 말로 자성이 있는 게 아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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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그리고 구공, 텅 비어 있지만 사실 안에 만법이 꽉 차 있더라. 그냥 공만 가지고 논하더라도 세 개를 또 나눠서 얘기할 수 있겠죠. 이 마지막 구공은 또 구족이랑 통하죠. 공과 구족이 하나가 돼버리죠. 공은 공인데 구족한 공이니까 갖추고 있는 공이 돼버려요. 이렇게도 이 관점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고요. 아공 법공 구공을 깨닫았다. 아공의 직관, 구공의 직관, 법공의 직관, 이 세 가지 공성의 직관. 이걸 이렇게 설명한 거예요. 자신의 자성을 깨닫고 나아가 만법의 자성이 둘이 아님을 깨닫고 나아가 육바라밀을 두루 갖추게 되는 경지로 나아갈 거다. 반야바라밀만 품고 있으시면요 여러분 그러니까 죽으나 사나 청정광명심만 붙잡고 계시면 돼요. 그럼 계속해서 직관이 옵니다. 그게 계속해서 개념화되면서 여러분 삶을 통해 실현됩니다. 결국은 처음에는 에고의 공함, 이게 실현되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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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이 되고요. 만법의 공함에 대해서 직관하고 실현하다 보면, 견성한 확철대오의 도인이 되고요. 육바라밀이 갖춰져 있다는 것까지, 공 안에 육바라밀이, 단순히 아공 법공의 공함이 아니라 육바라밀이 갖춰져 있다는 것까지 깨닫게 되면 여러분은 위대한 보살로 거듭날 수밖에 없고 나아가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직관만 계속 품고 사시면서 분석과 실천을 꾸준히 해 주시면, 나날이 나날이 진보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반야경 입장은. 그 얘기를 제가 좀 풀어드렸고요. 그다음 네 번째요. 4. 5온은 자성(독자적 불변의 실체)이 없고 ‘공성’을 자성(불변의 실체)으로 갖는다. ‘공성’은 무너지지도 무너져버리지도 않는 것이니라. (354쪽). 오온은 자성(독자적 불변의 실체)이 없고. 독자적 불변의 실체 이렇게 저는 주로 풉니다. 여러분 학당에서 아공 법공 구공 인가할 때도 아공 법공 인가할 때 이 얘기하셔야 돼요. 여러분. 아공은 뭐예요? 에고에는 독자적 실체가 없다. 아 독자적 불변의 실체가 없다가 아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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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공은요? 모든 존재 내가 경험하는 모든 존재에는 독자적인 불변의 실체가 없다. 이 말이 지금 반야심경의 근원입니다. 이 구절 잘 보세요. 오온은 자성이 없고 ‘공성’을 자성(불변의 실체)으로 갖는다. 두 말이 아는 자성이 달라요. 두 개의 자성이 나옵니다. 각주를 먼저 보세요. 2) ‘자성’自性은 ‘독립ㆍ고정ㆍ불변의 실체’이니 경전에서 의미하는 자성은 주로 ① 불변의 본질(만법의 본질이 되는 근본원리ㆍ보편법칙) ② ‘불변의 존재’(연기를 초월한 청정광명심) ③ 독자적 불변의 실체(공성ㆍ진여와 별개의 독자적 불변의 실체)를 의미한다. 자성이라는 것. 자성은 이번에 이렇게 정리하자고요. 자성이 앞으로 불경에서 계속 등장할 거고, 그때마다 헷갈리실 거예요. 자성이라는 게 뭔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자성이 본래 청정한 마음, 자성 청정심이 정광명이에요. 자성이 있죠, 그러면 그때는 청정한 자성을 갖춘 마음이에요. 자성이 있죠. 또 자성이 없다 그러죠. 헷갈리죠, 이건 이렇게 정리하자고요. 반드시 출제는 요 세 가지 중에 하나로 됩니다. 그래서 요거 놓치시면 다 틀리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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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되시죠? 이 자성 얘기할 때 저 자성 얘기하고 그러면 다 틀리는 거예요. 첫째, 자성을 제일 엄밀하게 말하면요 학술적으로 ‘독립ㆍ고정ㆍ불변의 실체’입니다. 이건 뭐 중관 사상, 특히 용수보살이 이런 자성을 강조했어요. 자성이 없다는 얘기를 할려고. 공이라는 것은 무자성, 자성의 없음이거든요. 이것의 근원은 뭐냐 하면 제법무아(諸法無我)요. 만법에는 무아, 나라는 게 없다. 그리고 무아를 무자성(無自性)으로 봤어요. 그래서 자성을 독립ㆍ고정ㆍ불변의 실체로 보고 만법에는 독립ㆍ고정ㆍ불변의 실체의 실체가 없다. 왜? 연기(緣起)하니까? 연기라는 것은 상호의존입니다. 여기까지 쭉 머릿속에서 나오셔야지 문제를 풀 수 있어요. 무자성하면 이것까지 딱 나가야 돼요. 그런데 모든 지금 스님들이 이 얘기밖에 안 합니다, 불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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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복은 입었고 뭔가 얘긴 해야 되고 오면 그럴싸한 얘기는 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이것만 연구하면 된다. 공이라는 건 자성이 없음이요. 그럼 부처님이 말씀하신 제법무아, “만법에는 나라는 게 없다. 나라고 하는 영원한 나라는 게 없다.” 이렇게 풀어서 영원한 나를 자성으로 본 거예요. 영원한 나를 고상하게 얘기하면 독립ㆍ고정ㆍ불변의 실체입니다. 만법에는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다. 제법무아를 이렇게 푼 거예요. 그러면 제법무아가 법공이 돼 버렸죠. 석가모니는 아공을 위주로 가르쳤지만 이제 이 공부하신 분들이 대승불교에서는 이것도 법공으로 봐버린 거예요. 용수보살이 법공으로 보자고 본 거예요. 주장한 거예요. 이게 이미 법공 아니냐. 석가모니는 이걸 아공으로 쓰셨어요. 왜 그러냐면 석가모니는 제법이라면 오온이거든요. 오온은 나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죠. 나를 구성하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에 나라고 할 만한 요소가 없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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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했기 때문에 아공의 가르침이 됐고, 이거를 여기 제법을 만법으로 확장해서 만법에는 나라고 하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하니까 법공이 됐죠. 만법에는 독립ㆍ고정ㆍ불변의 실체가 없다. 법공이잖아요. 아공도 되고 법공도 돼요. 한 구절, 같은 구절이. 나를 구성하는 요소인 생각 감정 오감이 본래 내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 아공이 돼죠. 내가 없다는 데 포인트가 있잖아요. 그런데 생각 감정 오감이라는 것이 본래 독자적 실체가 있는 게 아닙니다라고 해 버리면 법공이 되죠. 존재 자체의 공함을 얘기한 거잖아요. 한쪽은 내가 없다는 얘기를 한 거고. 그래서 초기 불교는 소승불교라고 불리는데 아공을 강조했다고 하는 게 이겁니다. 대승불교는 법공을 강조했다고 하니까 같은 구절이 아공 법공에 다 쓰이는데 용수보살은 이 구절을 가지고 법공을 강조해 버렸어요. 즉 아공에 쓰여야 할 논리로 법공을 강조해 버리니까, 연기하니까 상호 의존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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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정도의 논리가 나와 버린 겁니다. 제법무아의 논리를 가지고 여기까지 끌어낸 거예요. 그래서 이게 무자성의 논리에 근거가 되는데 한번 진짜 자성이 뭔지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 한번 보자고요. 세 가지로 나눠봤습니다. 독립ㆍ고정ㆍ불변의 실체니까 불변하다는 건 맞고요. 불변의 본질을 의미할 때가 있어요. 본질. 그러면 이 근본 원리나 보편 법칙 같은 겁니다. 즉 근본원리는 출세간법이에요. 출세간에 있는 진리. 아까 육바라밀 같은 거예요. 세간을 초월한 청정광명심에서 구현되고 있는 진리. 출세간법. 여기요 청정광명심 안에서 구현되던 진제의 진리 출세간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근본 원리라고 그래요. 우주의 근본 종자 출세간법 세간을 초월하는 진리. 여기서는 미구현 됐지만 속제에서 구현되는 걸 세간법이라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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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제가 보편법칙이라고 부릅니다. 현상계의 보편법칙. 물은 아래로 흐르고 불은 타오르고 현상계의 보편법칙. 세간법. 물과 불이 애초에 여기 청정광명심에는 없으니까 구현이 안 되잖아요. 거기에서는 미구현이지만 여기서는 구현되는 보편법칙과, 그러니까 세속제의 진리와 속제의, 뭐지, 승의제 진제의 진리를 불변의 본질이라고 하자면 자성은 불변의 본질입니다. 이건 있어요. 그렇죠. 불변의 본질이 있어요, 우주에. 세간법과 출세간법으로. 그다음에 존재로 볼 때는요 불변의 존재가 있다고 하면 어때요? 좀 더 느낌이 다르시죠. 불변의 존재가 있나요? 이거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요. 이 펜에 불변의 존재가 있나요? 이 펜의 세간법, 이 펜의 본질은 있겠죠. 자성. 본질로서의 자성은 있겠죠. 그러니까 펜이 등장했겠죠. 하지만 이 펜이 불변의 존재인가요?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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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불변의 존재는 어디서만 허용해야 되냐면 여기는 이 본질이라는 것은 아까 세간법과 출세간법, 근본 원리와 보편법칙에서 허용할 수 있다면요 이 존재는요 청정광명심은 그런데 현존하는 존재잖아요. 청정광명심은 가능하지 않나요? 영원불변,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은 존재잖아요. 존재로서 가능한 게 있습니다. 존재로서 불가능한 게 있고, 즉 세속제의 존재들은 불변할 수 없고 결국 승의제, 진제의 존재는 영원할 수 있죠. 이해되시죠? 절대계의 존재는 영원할 수 있다고요. 시공을 초월하니까. 그런데 세속제의 존재, 현상계 안에 시공 안에 존재하는 것한테 불변이라고 이름을 붙이려면 안 되겠죠. 그때는 자성이 없다고 해야겠죠. 자성이 없다는 말을 하려면 자성을 정리해야 되니까. 불변의 본질이, 본질이라는 측면에서는 우주만물에 세간법 출세간법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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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이 있어요. 그래서 본질이 청정하다고 해서 자성청정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성 인정했죠, 불교에서도. 또 한편으로는 불변의 존재라고 말할 때 너의 자성을 찾아라 그럴 때는 청정광명심을 말한다고요. 이것도 인정돼야죠. 단 뭐죠? 이게 불변의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겠죠. 본질이 불변일 수도 있어서 이 펜 자체가 불변일 수는 없잖아요. 연기하니까. 그다음에 무조건 없다고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독자적이라는 말 붙여 보세요. 여기서 이 독립이라는 걸 더 강조해서 독자적 불변의 실체, 여기서 독립은 독립돼 있는 그 본질이라는 걸 말하고자 하는 거잖아요. 이거를 강조해 보자고요. 청정광명심으로부터 독립된 실체는 가능할까요? 이걸 제가 독자적 실체라고 부른 겁니다. 독자적 본질이건 존재건 간에 독자적인 게 있을 수 있을까요? 참나로부터 독자적인 게 있을 수 있냐고요. 독자적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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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 존재, 이게 아공법공의 우리가 아공 법공 할 때 이겁니다. 자아의 자성은 없는 거죠. 이런 의미의 자성은 없죠. 이런 의미의 존재의 자성이 있을 수 있어요? 독자적인 불변의 실체, 있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여기서 한 번 더 나가죠. 자아와 존재는요 무엇을 자성으로 삼을까요? 그러면. 독자적 자성은 없어요. 이 존재들의 자성은요? 이 존재들을 또 자성이 있다고 말하려면 자성이 뭐라고 해야 될까요? 이 세계죠. 이게 자성이죠. 이해되시죠. 자아에 자성이 없다라고 할 때 자성은요, 참나와 분리된 자성은 없다는 얘기고요. 자아의 자성은 공성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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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있을까요? 자아는 여기서는 본질을 의미하죠. 불변의 본질, 나라는 것에 불변의 본질은 그리고 나라는 본질은 뭐다? 결국 공이다. 참나다. 참나가 자성이 되잖아요. 나는 독자적 자성이 없습니다 그 말은요 나의 자성은 뭡니다? 참나입니다. “나의 불변의 본질은 참나입니다.” 이 얘기죠. 그래서 밑에 보시면, ③ 독자적 불변의 실체(공성ㆍ진여와 별개의 독자적 불변의 실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자 위로 왔습니다. 위로 와서 이 구절 한번 이해해 보세요. 이 구절만 오늘, 시간 됐나요?, 이 구절만 이해하시면요 반야심경까지 다 아시는 거예요.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의미를 이해하실 수 있어요. 이 구절을 아셔야, 여기서 지금 만법으로 돼 있죠. 이 만법을 오온으로 보자고요. 오온이 만법, 오온개공 이것의 의미, 오온이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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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하더라. 만법이 모두 공하더라. 그런데 우리 지금 반야심경에 생략된 게 있어요. 오온개공 이렇게만 한역해 놨죠. 산스크리트 원문은 “오온의 자성이 공하다”고 되어 있어요. “만법의 자성이 공하더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시려면 이걸 이해하시면 돼요. 오온은, 여기서 보세요. 제가 왜 두 개의 자성을 다른 설명을 붙였을까요? “오온은 자성이 없다.” 이때 자성은 뭐라고요? 독자적인 불변의 실체가 없다. 그런데 같은 말을 다르게 해요. 오온은 자성이 없다 할 때 이 “없다”를 한문으로 공(空)이라고 번역한 거잖아요. 그럼 반야심경 1장이 이게 첫 부분이에요. 1장이 이제 그 앞부분이에요. 오온은 자성이 공하다, 없다. 이때 “없다”는 자성은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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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 불변의 실체는 없다. 그런데 공성을 자성으로 삼는다. 어떠세요? 죽여버릴까 막 이런 식으로. 한마디만 해라. 이거 이해되면 끝이에요. 오온은 자성이 없다. 그런데 없는 성질을 자성으로 삼는다. 그러면 이 두 번째 자성을 제가 불변의 실체라고만 번역한 이유 아시겠냐고요? 독자적을 뺐잖아요. 이해되세요? 자 이 느낌 아시겠죠. 오온은 자성이 없습니다. 이게 자명한지 인가해 볼까요? 오온은 독자적 자성이 없습니다. 왜? 청정광명심, 즉 무분별지 상태에서는 오온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오온의 자성은 본질적으로 없습니다. 오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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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 불변의 실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온의 자성은 뭡니까? 공성(空性)이 자성(自性)입니다. 청정광명심 그 자체가 자성입니다. 불변의 실체가 오온에는 있습니다. 공성이 불변의 실체입니다. 됐죠. 이 심오한 얘기가 오온개공 이렇게 번역됐습니다. 자 이제 반야심경 번역해 볼까요? 우리가. 오온개공의 의미는요 오온은, 여기 원래는 원문에는 자성이 있다고 그랬죠. 오온개공의 원래 의미는 “오온에는 자성이 없습니다”라고 공(空)을 한번 풀어야 돼요. 없습니다. “하지만 오온은 자성이 공성입니다”로도 풀 수 있어야 돼요. 이 두 구절을 한 문장으로 써놓은 게 오온개공입니다. “오온은 자성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온은 자성이 공입니다.” 없다는 느낌의 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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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이라는 느낌의 공은 달라요. 없다는 건 진짜 없다는 거예요. 그건 독자적 불변의 실체는 없다는 거예요. 한쪽에서는요 공성은요 청정광명심을 말해요. 청정광명심 안에서는 텅 비어 있기 때문에 공성이 오온의 자성이 되는 거예요. 그 텅 비어 있음을 자성으로 삼아서 무한한 우주 만법이 존재하는 거예요. 여기까지 이해되시죠. 반야경 안에 이런 내용들이 다 있다고요. 이거를 정말 극히 피상적으로 부분적 자명만으로 해석해가지고 막 갖다 붙입니다. 오온은 연기하니까 없다는 말이 여기 있나요? 지금. 왜 연기가 안 나오죠. 대승에서는 연기를 강조하지 않아요. 오온이 공이요 오온이 공이라는 게 포인트예요 대승은. 청정광명심, 절대적 보리심에서는 만법이 공하고요. 에고의 세계, 청정광명심의 작용의 세계에서 육바라밀이 펼쳐져야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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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이 하나여야 돼요 이게 대승의 핵인데 어느 부분적 자명 하나 붙잡고, “대승불교는 공을 강조하니 공이라는 것은...” 이런 달라이라마가 늘 강조하는 “이 공은 이런 실체가 아니라고.” 실체화 됐잖아요. 이미 자성이 공성이래잖아요. 그럼 실체화돼 버린 거예요. 실체화를 안 시키고 공은 그냥 없다는 말이라고 계속 강조합니다, 티벳 불교 중관파들이. “경전에서 공은 진짜 없다는 거라니까. 왜 공을 실체화시켜. 그러면 공이 참나가 돼 버리잖아.” 이게 달라이라마의 걱정입니다. 근심이에요. 그런데 반야경에서 이미 시작부터 반야바라밀은 법신이니, 반야바라밀은 사리니, 반야바라밀이 뭐냐? 결국 오온이 공하다는 걸 직관하는 건데 오온의 자성, 독자적 자성은 없고 오온의 자성은 결국 공성, 진여라는 걸 직관하는 게 반야바라밀이라고 얘기하는 거죠. 여기까지 제가 이견을 제시할 게 없는데요. 왜 공종이랑 이렇게 친해지죠 저희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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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종이 다 와 닿아요? 중관 빠지고 보니까 공종이 그냥 그대로 정광명 얘기한 건데요. 또 볼까요? 5번. 법은 공하다는 특성이 부여되어 있다. … 천자들아. 거기에는 무상無相, 무원無願, 무작위無作爲, 불생不生, 불멸不滅, 무오염, 무정화, 무존재, 열반, 법계法界, 진여眞如라는 특성들이 부여되어 있다. (372쪽). 법은 공하다는 특성이 부여되어 있다. 만법은 공하다는 게 특성이라는 건 자성이에요. 만법은 공하다는 게 자성이래요. 불변의 본질이 공하다는 거래요. 그래서 그런데 보세요. 천자들한테 부처님이 얘기하실 때 나온 얘기네요. 천자들아. 거기에는 무상無相, 무원無願, 무작위無作爲, 불생不生, 불멸不滅, 무오염, 무정화, 무존재, 열반, 법계法界, 진여眞如라는 특성들이 부여되어 있다. 거기에는 무상 형상이 없음, 이 공의 다른 표현들입니다. 형상이 없고, 무원 바라는 게 조금도 없고. 제가 몰라 유도할 때 쓰는 말이 무상 무원입니다. 여러분 모르시죠. 시간도 공간도 모르시죠. 없으시죠. 이게 무상이고요. 자 조금도 바라는 게 없으시죠. 부족한 게 없으시죠. 이게 무원입니다. 그러면 그냥 진여로 들어가 버려요. 여러분이 정광명으로 들어가 버려요. 무상 무원 해버리면. 무상을 우리말로 하면 “몰라”고요. 무원은 “괜찮아” 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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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괜찮아 하면 끝입니다. 무작위 어떤 할 것도 없어요. 해야 될 것도 없고요. 불생 생겨난 것도 없고요. 그 자리는 불멸 멸할 것도 없어요. 무오염 조금도 오염되지 않았고요. 무정화 정화시킬 게 없어요. 무존재 여기서 존재라는 것은 어떤 오온적인 존재도 없어요. 시공 안의 존재가 없어요. 그리고 이 자리는 열반이에요. 그리고 법계, 진리의 세계예요. 그리고 진여예요. 자 진여란 말, 진(眞) 어렵게 얘기하면요 진은요 무루(無漏) 오염됨이 없다는 겁니다. 루(漏) 번뇌가 없다는 거예요. 무루. 여(如)는요? 무위(無爲) 작용이 없다는 겁니다. 무위. 왜? 이래야 영원불멸이거든요. 영원불멸, 불변. 똑같다고 했잖아요. 똑같으니까 이거는 현상계에 작용하는 건 무조건 변해요. 현상계의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절대계의 존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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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입니다. 작용이 없어요 이 자리는. 그리고 무루 참돼요. 참되면서 영원한 존재입니다. 단순한 공이 아니에요. 5번까지 보시니까 어때요? 6번 볼까요? 6. 수보리야, (5온 중) 색色은 불가사의하고 비교 불가이며 무량무수無量無數이고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것이니라. 수상행식도受想行識 또한 그러하다. (388쪽). 수보리야 오온 중에서. 이게 다 반야심경의 근원이에요. 팔천송 반야경 보세요. 수보리야 오온 중에서 색수상행식 중에서 색, 물질은 불가사의하고. 자 물질은 연기하니까 공하다는 얘기를 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지금 중관론식 풀이라면. 뭐라고 하죠? 불가사의하고 비교불가이며 무량무수하다. 헤아릴 수도 없고 헤아릴 수 없는 수를 갖고 있다. 이것은 불가사의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셀 수 있는 게 아니다. 헤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물질도. 유일무이하다.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아요? 연기하다는 말은 한 마디도 안 나오고 유일무이하다. 왜 이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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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지 아세요? 진여라는 소리입니다. 이게 진여. 수보리야 물질은 진여란다. 불가사의하고 비교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가 없단다, 애초에. 개념화할 수가 없단다, 물질도 알고 보면. 수상행식도 그러하다. 이게 오온개공의 본 의미라고요. 오온은 공하다 이 소리는요 오온의 자성이 연기하니까 없다가 아니고 오온은 진여 그 자체라서 불가사의하고 비교 불가고 말로 할 수가 없다. 색수상행식 역부여시(色受想行識 亦復如是) 수상행식도 또한 그렇다. 이게 오온개공의 의미입니다. 이해되세요. 이런 얘기 못 들으셨잖아요. “오온을 처음 듣는데요.” 이러실 수도 있죠. 오온개공의 의미를요 지금 수많은 풀이가 있지만 원문대로 가자고요, 저는 원문대로. 무슨 의미인지 이해되셨죠? 제 얘기가 뭔지? 더 보자고요. 7. 초심자인 보살마하살은 좋은 벗들 (6바라밀)에 의해 단계적으로 반야바라밀다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 무상의 올바른 깨달음을 터득하고자 하는 보살마하살들은 그와 같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덕택으로 ‘개인적인 열반’에 들기를 바라지 않는다. 극도의 고통으로 가득 찬 유정의 세계를 철저하게 본 후 … ‘윤회’에 겁을 먹고 놀라지 않을 것이다. (403쪽). 초심자인 보살마하살은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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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들에 의해. 육바라밀을 말합니다. 좋은 벗들에 의해 단계적으로 반야바라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서 보살마하살은 원래 보살마하살 그러면 마하살이 붙으면 대사거든요. 대사, 보살 중에 위대한 보살이라서 마하보살이라서 원래 1지 이상 10지 체제 안에 들어간 보살을 말하는데요. 이때는 아직 십지론이 없어요. 팔천송반야경은 화엄경 나오기 전이잖아요. 십지론이 없기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그냥 보살을 찬양하는 말이에요. 발심한 보살, 와! 내가 부처가 돼서 중생 다 구제해 줘야지. 원보리심(願菩提心)을 일으킨 보살, 서원을 세운 보살을 그냥 보살마하살 그럽니다. 이런 존재는 육바라밀을 닦다가 단계적으로 반야바라밀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다가 공성, 자성을 직관하게 된다. 무상의 올바른 깨달음을 터득하고자 하는 보살 마하살들은 그와 같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덕택으로 개인적 열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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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라한과 차이가 있죠. 아라한과 달라요. 육바라밀을 총체적으로 닦기 때문에, 보세요, 아라한들은 육바라밀을 총체적으로 안 닦으니까, 대승불교 보살들의 인식이 그래요. 아라한들은 육바라밀을 안 닦아요. 대승은 육바라밀교입니다. 왜? 보리심교이기 때문에 보리심은 육바라밀이에요. 육바라밀을 닦기 때문에 선정에 들어서 공성을 직관하더라도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을 구현하기 위해서 현상계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근데 아라한들은 이걸 안 닦기 때문에 공성 안에서 아공의 진리만 직관해도 열반에 든다고 생각하고 해탈에 들었다고 주장해요. 이게 차이예요. 그래서 육바라밀을 총체적으로 닦는다는 게 반야만 닦으면 아라한이 된다고 보는 겁니다. 반야만 닦다 보면, 그것도 아공 반야를 얻어서 아라한에 들어가 버린다. 그런데 법공 반야까지 깨달은 존재는 육바라밀을 닦아서 사바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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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않는다. 이게 기본 관점입니다. 개인적 열반에 들기를 바라지 않는다. 극도의 고통으로 가득 찬 유정의 세계를. 유정(有情)은 중생이에요. 감정이 있다고 해서 유정입니다. 감정을 이제 알음알이로도 봐요. 알음알이가 있는 중생, 원래는 이제 자기 마음이 있는 존재라는 거예요. 마음, 중생심을 갖고 있는 존재, 그러려면 동물 이상입니다, 원래는. 식물은 아니고. 원래 동물 이상을 유정이라고 그래요. 유정의 세계를 철저하게 본 후에 윤회에 겁을 먹고 놀라지 않을 것이다. 윤회에도 안 쫀다는 거예요. 왜? 윤회세계도 본래 공한 줄 다 알았거든요. 아공만 닦은 분은요 만법은 있는데 만법이, 제법무아를 어떻게 푸냐면 만법은 있는데 만법이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라는 자아에서 벗어납니다. 그래서 열반에 들고 해탈에 들어가는데 사바세계를 혐오한다고 했죠. 윤회세계를 혐오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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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법공을 깨달은 도인은 만법이, 존재하는 모든 게 원래 공한 청정광명심, 참나의 작용이라고 보기 때문에 윤회계를 겁내지 않고 오히려 꼼꼼히 관찰해가지고 윤회계에 계속 구르고 있는 6도 중생을 구제하는 데 나아가요. 6도의 전문가가 됩니다 오히려. 이 차이를 써놓은 거고요. 8번 보실래요. 8. 여래의 ‘진여’는 변화를 결여, 구별을 결여하고 있기에 … ‘여래의 진여’와 ‘제법의 진여’는 ‘하나의 진여’이며, ‘불이不二의 진여’인 것이다. (424쪽). 여래의 진여는. 여기서 진여는 공성이 진여예요. 벌써 놀라운 얘기가 나오는데 아까 얘기했지만, 공종은 공만 얘기할 것 같죠 이 공을 자꾸 진여라고 풀어요. 반야경부터 진여라고 풀어요. 이 얘기는 뭐냐면 공한 중에 공하지 않은 얘기를 계속 한다니까요. 공한 중에 공하지 않은 게 있다는 얘기가, 이미 진리로 꽉 차 있다는 얘기가 법신이라는 용어로 이미 반야경에서 나왔죠. 진리가 꽉 차 있대요, 이 공자리가. 따라서 공종이라고 해서 공만 얘기한 적이 없다. 공을 강조했을 뿐이지 공 안에 불공의 세계, 구공의 세계도 이미 전제돼 있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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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공을 얘기한 사람 안에, 얘기한 학자들 마음 의식 안에 이미 공은 청정광명심의 공이요 법신의 공이고 진리로 꽉 차 있는 공이라고 한다면, 후대에 나온 성종과 뭐가 달라요? 설명을 미처 다 안 한 부분만 있는 거지 본질적으로는 똑같아요. 그래서 유식학에서도 미료(未了)의 아님 밀의, 은밀하게 진리를 공적인 측면에서 설파했다고 하지 부정하지 않아요, 이 공종 사상을. 유식학도 공종 사상을 부정하지 않아요. 중관파를 부정하는 거지. 반야경을 오히려 우리가 잘 풀었다라고 주장하면서 나온 게 유식학이에요. 그러니까 원래 반야경 안에 유식학적 진리가 다 있었다고 본 거예요, 유식학은. 이렇게까지 보면 반야경이 공종의 경전이라고 해서, 상종과 충돌할 거라고 생각하시면 안 맞다는 거 아시겠죠. 우리가 공종을 제일 잘 풀었다고 나왔다니까요, 유식학이. “중관파 니네들이 푼 거 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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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네는 공이 끝이라고 풀었는데 우리는 아니다. 공은 진리의 일부만 먼저 드러내신 거다. 안에 숨겨져 있는 이런 게 있었다.” 하고 풀어준 게 유식학이에요. 둘 다 반야경을 풀다가 나왔다는 게 특징입니다, 공종이나 상종이나. 그래서 여기서 보면 진여라는 게 공이에요. 보세요. 여래의 진여는 변화를 결여, 변화하지 않는대요. 그 공이라는 말이 단순히 없다는 말이었다면 이걸 진여라고 부르면서 변화하지 않는다는 말을 굳이 붙일 필요가 있을까요? 이런 거예요. 보세요. “이 펜은 연기하니까 없습니다. 자성이 없습니다. 그 자성이 없음이 공이에요. 즉 이 펜의 본질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펜의 그 존재는 없습니다.” 이게 공 사상인데 여래의 진여, 이 펜의 진여를 논한다는 게 이상하잖아요? 이 펜의 진여는 불변합니다. 이상하죠? 맥락이 전혀 다른 얘기라는 거 아시겠어요? 지금 여래의 진여를 얘기하고 있죠. 보세요. 여래의 진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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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의 공성이에요. 여래의 진여는 변화를 결여하고 구별을 결여하고 있다. 분별할 수도 없고. 무분별 상태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래의 진여는 만법의 진여와 하나의 진여이다. 만법의 공성을 만법의 진여라고 부릅니다. 만법의 참되고 여여한 영원한 모습, 그 본질과 여래의 본질은 만법의 본질과 하나다. 그 본질이 뭐라고요? 공성이고 그 본질이 그대로 진여예요. 그래서 하나의 진여일 뿐이에요. 불이(不二)의 진여, 우주에는 한 진여만 있어요. 기독교적으로 우주에는 한 성령만 있습니다. 너의 성령 나의 성령이 없다고요. 만법의 공성이 본래 한 공성이고 한 진여라는 얘기를 하고 있어요. 이래도 이 공성이 그냥 없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공성이라는 실체일까요? 영원불변의 실체일까요? 이 차이입니다. 이 차이예요. 공성을 불변의 실체로 보느냐? 단순히 없다는 말로 보느냐? 부정어로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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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까 얘기했지만, 오온개공도 두 개를 다 풀어야 된다는 거예요. 만법에 자성은 없다. 부정어입니다. 하지만 만법은 공성이 자성이다. 여기까지 이해를 못 하시니까, 한쪽만 보니까 계속 잘못된 해석이 나오는 겁니다. 여기서 이런 말을 이해하실 수 있겠어요? “여래의 진여와 만법의 진여가 원래 하나의 진여다.” 이런 말 하실 수 있다면 청정광명심 안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9. 사리자여, ‘진실성과 항상성’(眞如)에서 볼 때 퇴전하는 법이 존재한다면 무엇인가? … 퇴전할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수보리여, 성문승, 독각승, 보살승 이와 같은 3종 보살승(진여에서 현시된 보살)에 오른 사람들이 여래에 의해 말해지고 있으나, 사실 3승에는 어떤 구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로 오직 하나의 승 즉 불승, 보살승만이 존재할 뿐이다. (441쪽). 사리자여. 진여를 이렇게 풀었어요. 진실성과 항상성, 참되면서 영원한 그 자리, 진여에서 볼 때 퇴전, 뒤로 물러나는 법이 존재한다면 무엇인가? 퇴전할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여 안에서 절대 우리는 물러날 수 없다. 이 진여가 공성이죠. 공성이 진여란 말이에요. 이 진여 안에서 우리는 물러날 수 없다. 수보리여, 성문승이니 독각이니 여기는 소승들이죠. 성문승, 독각승은 소승이고 대승은 보살승이죠. 이와 같은 3종 보살승, 여기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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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독각도 보살로 봐 버립니다. 좀 모자란 보살. 보살승, 다 진여의 작용이라고 봐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대승이 통이 크다니까요. 일체가 진여작용, 이게 법화경에 가서는 1승 사상으로 나오는 겁니다. 다 한 승만 있다. 3승이 있는 게 아니다. 다 방편이었다. 성문승 독각승도 사실은 보살승이다. 왜? 진여를 따르는 존재니까. 진여를 따르는 이 보살승의 세 가지 보살승에 오른 사람들이 여래에 의해 말해지고 있으나 사실 3승에는 어떤 구분도 없다. 왜? 실제 3승의 구별이 없다는 게 아니고요 3승의 본질은 하나라는 거예요. 다 불승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불승이자 보살승이라 그래요. 즉 보살승만 있다는 거예요. 불승과 보살승은 다른 게 아닙니다. 이렇게 얘기해요 보통. 3승, 소승에서 두 가지로 또 나눈 거예요. 보통 2승인데 3승으로 나누면요 소승 중승 대승 구조거든요. 그러면 성문승 독각승 성문보다 더 큰 깨달음을 스스로 얻었지만 중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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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하지 않기 때문에 소승에 들어가요. ①성문승, 부처님 말 듣고 깨달아서 성문, 소리를 들었다 성문승. 부처님처럼 홀로 깨달았다고 해서 ②독각승, 공덕이 더 큽니다 이 양반은. 그다음에 중생을 구제하는 ③보살승. 이 3승이 본래 하나다 주장하는 게, 항상 천태종은 셋이 하나다 예요. 일심삼관(一心三觀), 또 3승이 1승이다. 셋이 사실은 한 승밖에 없다. 그걸 불승이라고 하는데요. 불승의 다른 이름이 보살승입니다. 즉 소승을 말하는 성문, 독각승, 보살승 중에 보살승만 있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 보살승은 틀렸다는 게 아니에요. 무슨 얘기냐 하면 성문 독각과 대비할 때 보살승이라는 말을 했으니까 3분법의 한 축을 담당할 뿐인 것 같지만 사실은 결국 1승이다라고 할 때는 보살 밖에 없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보살승. 그 불승, 보살승을 구분하지 않고 씁니다. 그러니까 불승만 위대하고 보살승은 좀 더 낮다고 생각하시면 안 된다는 거예요.
01:07:00
3승 중에 보살승이 하나니까 1승만 얘기할 때는 보살승이 아니겠지 하시기 쉬운데 아니라고요. 그 보살승 하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근데 보살승은 부처 되겠다는 거니까 불승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문 독각성은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거예요. 제한된 부처로만 기능하는 것밖에 안 돼요. 따라서 진짜 부처가 되겠다는 사상이기 때문에 보살승을 불승이라고 하는 겁니다. 마지막 10번째요 10. ‘6바라밀’은 좋은 벗이고, 스승이고, 도이고, 등불이고, 광명이고, 보호소이고, 대피소이고, 안식처이고, 최종목적지이고, 세간의 섬이고, 어머니이고. 아버지이니라. 바라밀은 무상정등정각으로 이끄느니라. (546~7쪽) (전순환, 팔천송반야경, 불광출판사). 육바라밀은 좋은 벗이고 스승이고 도이고 등불이고 광명이고 보호소이고 대피소이고 안식처이고 최종 목적지이고 세간의 섬이고. 섬이 어디라고요? 육바라밀이요. 육바라밀 중에 제일 핵이 뭐예요? 반야바라밀. 청정광명심 안에 들어갈 때 섬에 도달합니다. 어머니이고 아버지이니라. 육바라밀은 무상정등정각으로 이끄느니라. 이 육바라밀 중에 특히 반야바라밀을 껴안고 있으면 여러분 나머지 바라밀이 따라오면서 부처가 되는 지경까지 가게 돼요. 이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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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은 뭐라고 표현하냐면 한마음에 타면, 한마음만 타고 있으면 여래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고 표현해요. 이 한마음이 뭐예요? 무분별지, 청정광명심. 대승을 포함해 소승까지도 원래 불교란 청정광명심교입니다. 이게 참나교예요, 다른 말로. 참나교가 불교입니다. 참나를 열반이라고 하면 또 알아듣고 참나라고 하면 또 우끼끼해요. 흥분해요. 그러면 열반이라고 하자. 아! 훌륭하시네요. 참나. 와아! 그러고 성토합니다. 무분별지 그러면 또 조용해져요. 이름 바꿨다고 조용해지면 이게 조삼모사밖에 안 되죠. 같은 건데 실체가 같은데. 이해되시죠? 참나교입니다. 청정광명심교예요. 소승부터 대승, 금강승, 모든 불교는 청정광명심에 기반합니다. 연기하니까 공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참나니 영원한 불변의 실체가 없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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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논리적으로 까는 중관 사상에 현혹돼가지고 본질을 놓쳐버리시면 안 돼요. 영원불변한 실체는 있습니다. 그게 공이에요. 그래서 팔천송반야경에서도 그 공을 진여라고 부른 거예요. 여래의 진여와 만법의 진여는 하나의 진여요 거기는 분별이 없는 세계요 따질 수 없는 세계다. 그러면 좀 이해되시죠. 청정광명심 하나만. 그래서 여러분 이 얘기 다 듣고 뭐 하셔야 돼요. 몰라 한번 하세요. 몰라 하면 그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몰라 하는 자리가 무분별지의 자리입니다. 늘 그 자리에서 진리를 직관하세요. 육바라밀이 직관돼요. 그래서 여러분은 모르셔도 진리는 직관됩니다. 여러분은 모르셔도 이상하게 무분별지 상태에 들어갔다 나오면 육바라밀이 각성돼 있어요. 그래서 이상하게 마음이 더 관대해져 있고. 왜? 진리랑 안에 같이 있었잖아요. 무분별지 안에 있다는 게
01:10:00
본질이 뭐냐면요 무분별지 안에서 뭘 직관했냐면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직관했다니까요. 더 생각이 자명해져 있고요. 나와 남을 더 둘로 보지 않게 되고요. 무분별지에 들어갔다 나오면 유혹을 이겨낼 수 있게 되고요. 진실을 수용할 수 있게 되고요. 나태함이 떨어져 나가고요. 더 깨어나게 돼요. 고요해지게 돼요. 이상하게. 누가 시킨 거죠? 진리가요. 다르마의 명령입니다. 다르마가 이렇게 시킨 거예요. 늘 다르마와 진리와 하나 되어 살아야 돼요. 이건 그대로 다르마 자체이기 때문에 법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청정광명심은 진리로 꽉 차 있기 때문에 법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진리의 몸. 진리의 몸과 하나 됐다 나왔는데 진리가 묻어있지 않겠어요? 진리에 공명돼 있지 않겠어요? 내 탐진치의 오온의 에고도 공명, 자꾸 진리랑 공명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인격이 변해서 부처까지 가는 거예요. 육바라밀을 총체적으로 닦지 않으면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라한은 될 수 있고 독가승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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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는 못 됩니다. 왜? 부처는 진여를 온전히 현실화시킨 양반이거든요. 법신을 온전히 구현한 존재입니다, 전지전능한 모습으로. 인간은 거기까지 가야 됩니다. 그래서 힌두교에서는 신이나 가능했던 것을 인간은 보살로써 구현해내야 됩니다, 현실에서. 그래서 만들어진 세계가 불국토입니다. 이게 대승 사상이에요. 대승 사상은요 초기 불교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에 가까워요. 불국토 건설, 중생 구제, 정토 구현. 그렇죠. 현상계를 떠나지 않고 현상계 안에서 모든 중생들을 다스리고 가르치겠다는 사상이에요. 극락의 교주로 있는 아미타불이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하고 건져주고 가르치겠다는 겁니다. 사바세계를 떠나지 않아요. 기존 소승 불교랑 너무 다른 겁니다. 오히려 힌두교랑 하나가 됐지만 또 힌두교적이지도 않은 거예요. 이걸 중생이 다 하겠다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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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랑 다릅니다. 힌두교는 신이 하는 거지 우리가 할 필요가 없어요. 재미있죠. 이렇게 해서 반야경을 이제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다음 시간에는 팔천송반야경 다음에 나온 2만5천송반야경 들어가 보고, 그다음에는 반야심경을 조목조목 분석해 보면서 우리가 오늘 봤던 반야경 사상이 실제로, 경전 상으로 설명이 되는 건지 하나하나 따져보겠습니다. 스포일러 하자면 다 이미 오늘 다 아신 거예요. 해답은 다 들으신 거예요. 오늘 것만 잘 이해하시면, 오온개공의 의미만 이해하셔도 오늘 엄청난 걸 건지신 겁니다. 자 오온개공은 뭐예요? “오온은 자성이 없고, 독자적인 자성이 없고 공성을 자성으로 삼는다.” 요게 불교계 변혁을 가져올 말입니다. 이 한 구절이면 법공이 다 설명됩니다. 보살도의 핵심이 설명됩니다.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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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홍익학당] 진여와 열반 18강-팔천송반야경(00:08-01:13:00)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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